선교사들은 선교지 문화와 언어에 정통해야 한다. 그럴 때만이 ‘선교사를 위한 선교’가 아닌 ‘선교지를 위한 선교’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조선예수교장로회가 산둥(山東)성에 파송한 초기 선교사들은 현지 의복 착용과 음식문제에 있어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고전 9:19∼22) 사도 바울의 이 같은 고백처럼 선교사들은 중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중국인같이 되고자 했다.
이는 방효원 목사가 1937년 ‘겨자씨’ 2월호에 기고한 글에서도 알 수 있다. “중국인을 얻으려면 중국인이 돼야 한다. 중국인이 되려면 양복을 벗고 중국인의 옷을 입어야 한다. 하얀 옷감에 회색 또는 청색 물을 들이고 다림질도 하지 않아야 한다. 신을 신되 하얀 감에 회색 물을 들이고 신이 헤지면 앞뒤를 기워 신어야 한다. 음식도 양식이 아닌 고구마, 수수죽, 좁쌀죽을 먹어야 한다. 무를 소금에 절인 걸 먹을 줄 알아야 한다….”
1917년 방효원 홍승한 목사가 라이양(萊陽)에 부임하고 언어공부를 시작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스수이터우(石水頭)와 다쾅(大?)에서 교회를 세우게 된 것은 이 같은 노력의 산물인 것이다. 1918년 가을 한 보고서에 따르면 홍 목사는 현지 방언까지 구사할 수 있었다. 1919년 2월 5일자 기독신보에 따르면 그는 “중국에 온 지 1년 3개월 동안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본국 여러 교회 형제자매들의 기도로 영육간이 평안하다. 어학 실력이 아직 부족하지만 몇 달 전부터 중국어로 설교와 기도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교단 부회장 출신으로 ‘준비된 선교사’ 홍승한 목사
한인 선교사들은 당시 조선에서 활동하던 서양 선교사들에게 발탁될 정도로 탁월했다. 그중 홍 목사는 평안북도 의주출신으로 신학문의 전당인 숭실대학부에서 공부한 뒤 교원생활까지 했다. 그가 방지일 목사의 고모부가 된 것은 방 목사의 아버지인 방효원 목사 때문이었다. 방지일 목사의 증언에 따르면 1908년 28세의 청년 홍승한이 방효원 목사의 여동생인 방승화와 결혼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방효원 목사의 주선 덕분이다. 당시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홍승한과 혼사가 오가는 걸 방씨 집안은 원치 않았다고 한다.
1907년부터 평북 철산군에서 조사로 활동하던 홍승한은 1909년 철산 영동교회에서 장로장립을 받았다. 이어 1911년 6월 평양신학교 제4회 졸업생이 됐다. 약 3달 뒤 그는 목사 안수를 받고 대구교회에 부임했다. 그의 재임 시절 평양에서 활동하던 길선주 목사가 부흥회를 인도하기도 했다. 홍 목사는 1912년부터 1917년까지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 연속으로 총대로 참석했을 뿐 아니라 총회 전도국 위원, 정치위원, 재단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그는 1917년 9월 1일 경성(서울) 승동교회에서 열린 제6회 총회에서 부회장에 당선됐다. 그때 회장 한석진 목사, 서기 장덕로 목사, 회계 찰스 클락(곽안련) 선교사가 각각 선출됐다. 당시 홍 목사는 경상도 지역 선교거점인 대구(남성정)교회에서 성도 500명을 목양하고 있었다. 20세기 초 미국 북장로회 조선선교부의 3대 선교거점은 평양과 서울, 대구였다. 지역별 대표 선교사는 평양 사무엘 모펫(마포삼열), 서울 호레이스 언더우드, 대구 에드워드 아담스(안의와)이었고, 한국인 목사는 평양 길선주, 서울 차재명, 대구 홍승한이었다.
대구교회 성도들은 홍 목사가 선교사로 가는 걸 처음엔 강력히 반대했다. 보낼 수 없다는 청원 서신과 전보를 총회 앞으로 발송할 정도였다. 하지만 총회는 홍 목사를 선교사로 파송해달라는 편지를 전도국장 이기풍 목사 이름으로 대구교회가 소속된 경북노회에 발송했다. 홍 목사는 선교사로 선택받은 걸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으로 확신했다고 한다. 이에 1917년 9월 19일 경북노회가 임시노회를 개최할 때 그는 대구교회 목사 직무 사면과 중국 측 산둥독회(山東督會)로의 이명을 청원했다. 결국 노회는 그를 중국으로 파송키로 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교계 지도자급 인물을 선교사로 파송하고 소속을 중국 측 노회로 한 뒤 현지 교회를 치리하게 했다.
팀사역을 통해 사역 지평을 넓힌 홍승한 목사
홍승한 방효원 목사는 1918년 5월 중화기독교 화북대회에 정식 가입하고 라이양 사방 30리 내를 선교지로 이양받았다. 이들은 처음부터 팀사역을 했다. 그 결과 1919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 복음당 설립 비용을 청구하고 다음해 3월 라이양 무위덴(沐浴店)에 복음당을 설립했다. 그러나 무위덴에 세운 복음당은 2년 뒤 폐지됐다. 선교사들은 1919년 가을부터 전도에 더 힘쓰기로 한 뒤 서로 구역을 나눠 활동하기로 했다. 이때 선교사들은 중화기독교회로부터 조직교회 5곳, 미조직교회 6곳, 전도인을 두고 전도하는 복음당 6곳, 학교 8곳, 중국인 전도인 17명을 인계받았다. 홍 목사는 1920년 경 교동노회로 이명되기 전까지 어학공부와 전도활동, 라이양 내 난관(南關)교회와 스수이터우교회 등지에서 활동했다. 이후 구센(古峴) 지모(卽墨) 등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했다.
취재팀은 혹시 홍 목사 흔적이 남아있을까 일말의 희망을 갖고 궁자좡(宮家庄)으로 향했다. 그곳은 홍 목사가 1921년 9월부터 맡았던 교회가 있었던 지역이다. 궁자좡교회는 원래 미 북장로교 선교사들이 세웠다. 홍 목사의 선교 보고에 따르면 궁자좡교회는 장로가 3명이나 되는 등 당시 비교적 큰 교회였다. 1922년 총 교인은 94명으로 평균출석교인은 67명에 달했다. 그러나 주일 평균 연보액은 50전에 불과했다. 이 교회는 세례교인이 80명이나 됐지만 재정은 자립되지 못했다. 취재팀은 언덕과 옥수수 밭으로 이어지는 길을 한참 지나가다 궁자좡이란 시골 마을에 도착했다. 할아버지 때부터 예수님을 믿어왔다는 한 노인 집을 방문했다. 그는 방지일 목사와 사역했던 완스첸(萬世謙) 장로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1982년 산둥성 라이양현 기독교대표자들이 모여 찍은 사진도 우리에게 보여주며 친근하게 대해줬다. 그의 집은 보통 산둥 시골 가옥구조 그대로였다. 큰 솥 하나가 걸린 주방과 1m 이상 높이의 침실로 구분된 방, 잡동사니를 보관하는 작은 공간 등이 대부분이었다. 그의 집 한 귀퉁이에는 중국어 성경책과 성경구절이 써있는 종이들이 부착돼있었다.
취재팀은 이어 지모로 이동했다. 지모는 홍 목사가 1922년 봄부터 거주하며 전도했던 장소다. 그는 그해 7월 지모 선교사 주택이 완공되면서 온 가족과 함께 이사를 왔다. 그해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파송한 이대영 선교사 가족은 10개월간 라이양에서 거주하다가 1923년 4월 지모로 이동, 홍 목사 가족과 함께 지낼 수 있었다. 홍 목사는 1923년 남전도사 1명, 여 전도사 1명, 교인 45명으로 지모교회를 세웠다. 취재팀이 찾아낸 지모교회는 과거 홍 선교사가 세운 것이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기록을 찾아낼 수는 없었다. 세월이 너무 흘렀고 정권 또한 중화민국에서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대신 취재팀은 이 교회가 보관해오던 100년이 넘은 독일교회의 종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밖에도 지모에서 이대영 박상순 선교사 사택 유적지를 찾아냈다. 홍 목사가 지모교회의 초석을 놓은 뒤 1924년 9월부터 1925년 8월까지 박상순 선교사가 잠시 맡은 뒤 이대영 선교사가 담당했기 때문에 관련 건물이 남아있을 수 있었다. 라이양·궁자좡·지모=글 함태경 기자·김교철 목사, 사진 이동희·서영희 기자
함태경 기자 zhuanji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