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로 왔던 방지일 목사 만나고 싶다” 백발 中성도 뜨거운 눈물 9일 뒤면 성탄절이다. 해마다 성탄절이 되면 한국교회는 물론 세계교회가 이웃과 나눔 행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의미를 되새기고 지역사회에도 좋은 이미지를 심고 있다. 90여년 전 산둥(山東)성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도 성탄절이면 이웃과 함께하는 행사를 갖고 복음의 확산 기회로 승화시켜나갔다. 민중과 함께, 조국 독립 위해 기도한 선교사들 1918년 12월 라이양(萊陽)에서의 성탄절 축하예배는 수백명의 중국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열렸다. 1년여 앞서 선교지에 도착한 방효원 홍승한 선교사와 가족, 1918년 11월 19일 합류한 박상순 선교사와 김윤식 의사와 그 가족, 중국인 교우들과 비기독교인 등 수백명이 등불을 환하게 밝히고 성탄 축하행사를 거행했다. 이날 10여명의 중국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다. 기독교인들은 성탄절 행사를 위해 음식을 정성스럽게 준비한 뒤 걸인들에게도 나눠줬다. 선교사와 어학 선생들은 라이양 감옥을 찾아가서 70여명의 죄수들에게 전도했다. 이때 복음서적을 전달하고 음식까지 대접하자 죄수들은 큰 감동을 받았을 뿐 아니라 기독인이 되기도 했다. 선교사들은 감옥 내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교도소장의 협조를 받아 죄수들에게 성경과 찬송가를 전달했다. 선교사들도 한달에 몇 차례씩 감옥을 방문해 전도했다. 중국인 교우들도 성탄절을 전도 기회로 삼았다. 1919년 2월 5일자 기독신보의 ‘홍승한 목사의 편지’를 보면 성대한 성탄절 행사로 인해 라이양성 사람들이 구주 탄생의 소중함을 깨달았고 조선 선교사들이 담임하는 라이양교회에 대해 호감을 갖게 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선교사 파송 국가와 교회의 상황 변화는 선교사들이 활동할 때 격려가 되기도 하고 장애가 되기도 한다.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 사건 소식을 전해들은 선교사들은 처음엔 일제 강점기가 끝난 줄 알고 감격해했다. 독립이 된 줄 알고 라이양에서 사역하던 네 가정 모두가 모여 대한독립기념예배를 드렸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그날 예배 후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자 중국인들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해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후 고국에서 들려오는 소식을 들은 뒤 선교사 모두가 베옷을 입고 7일간 모여 금식기도를 했다(1958년 9월 ‘김윤식 의사 자필 초고’). 선교사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한 기도를 이어갔다. 교회마다 시간을 정해 고난 받는 조선교회를 위해 기도했다. 노회와 제직회가 열릴 때마다 조선만을 위한 기도시간을 할애할 정도였다. 독립만세 사건으로 본국 총회전도국 임원 대부분이 체포, 수감됐다. 선교사 회계부에 재정이 한 푼도 없어 선교사와 그의 가족들이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방효원 선교사의 ‘중화민국 산둥성 라이양 선교보고’에 따르면 당시 선교사들은 어쩔 수 없어 수백원을 차용해 연명하던 중 윤산온 목사의 주선으로 위로 편지와 선교비를 극적으로 받아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중국 사정도 만만치 않았다. 1919년 봄부터 ‘일화배척’의 결과로 물가가 뛰고 흉년까지 겹쳐 인심이 흉흉해졌다. 가을부터는 호열자가 크게 발생해 매일 사망자가 속출했다. 방효원 목사는 이때 상황을 이같이 보고했다. “입거(入居)한 지 3년간에 수토불복(水土不服·지방의 물과 풍토에 적응하지 못해 생기는 여러 병증)의 괴로움과 온역의 위험과 홍역의 위험함과 피질의 위험과 도적의 위험과 난리의 위험과 갖가지 질병이 많은 중에 모두 본국 성도의 기도로 한 사람도 세상을 떠난 이가 없고 평안히 지내온 것을 감사드린다.”(1919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제8회 회록) 교회 자립과 교육을 선도한 조선 선교사들 취재팀은 14일간 산둥성 일대를 취재하면서 만나는 중국인들에게 초기 선교사들에 대한 추억을 들으려고 애썼다. 그러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 조선 선교사들과 함께 사역한 사람들은 대부분 유명을 달리했지만 선교사들이 뿌린 씨앗은 뿌리를 내리고 무성한 가지와 잎사귀를 내고 열매를 맺었다는 것이다. 이는 선교사들이 처음부터 자립하는 교회를 꿈꿨고 현지인들을 수혜자가 아닌 동역자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라이양과 지모(卽墨), 핑두(平度), 칭다오(靑島) 등지에서 만난 70∼80대 노인들은 가물가물한 기억을 힘겹게 떠올리면서도 “선교사들에 대한 나쁜 기억은 전혀 없다”고 말했다. 이들은 취재팀에게 가장 늦게 중국을 떠나야 했던 방지일 목사를 꼭 만나보고 싶다면서 간절히 관련 소식을 전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심지어 방 목사의 사진이 실려 있는 ‘임마누엘’의 겉표지를 끌어안고 눈물을 쏟아 보는 이들을 숙연해지게 했다. 조선 선교사들은 또한 엘리트로서 현지 언어와 문화에 정통하려고 애썼던 것도 척박한 선교지에서 성공적으로 목회할 수 있는 근거가 됐던 것처럼 보였다. 실례로 제3대 산둥성 선교사로 파송된 박상순 목사는 본래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집사, 장로가 돼 주일학교를 인도하고 찬양대를 지휘했다. 일반대를 졸업한 그는 평양신학교 제10회 졸업생으로 강도사로 활동하다가 자신이 속한 평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선교지로 떠났다. 그는 중국 선교를 시작할 때부터 교육에 앞장섰다. 중국어 학습 능력이 뛰어나 선교지 도착 1년 만에 중국어로 설교와 기도는 물론 전도도 할 수 있었다(1919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제8회 회록’). 선교사들은 중국 교인들에게 자력전도를 강조했다. 해외선교 비전까지 심어주기까지 했다. 선교사들은 고국에서 감사일 연보를 작정해 중국선교를 한다고 밝히는 한편 중국교회는 진실하고 열심 있는 형제를 선택해 3개월씩 전도하게 하자고 권면했다. 이에 중국 교우들은 감사절 연보를 하고 그 돈으로 중국인을 세워 자국민 전도를 하기도 했다. 외지에 선교사를 파송할 것을 작정하기도 했다. 1919년 난관교회 교인은 61명, 스수이터우교회 교인은 28명이었다. 주일 평균 예배 참석자는 난관교회 40명, 스수이터우교회 20명이었다. 그해 두 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사람은 모두 19명이었다. 선교사들이 두 교회를 개척한 뒤 세례 받은 총수는 49명에 달했다. 선교사들의 보고에 따르면 1919년 가을부터 전도에 더욱 힘썼고 선교지 분할, 확대에 힘썼다. 당시 선교사들이 맡은 지역은 라이양 사방 30리뿐이었다. 라이양 서남은 자오둥(膠東)노회에, 동북은 산둥노회에 속해 있었다. 조선 선교사들이 활동한 지역은 두 노회 중간 지점이었다. 중국의 2개 노회는 선교사들의 청원을 받아들였다. 이는 중국교회가 조선교회와 선교사에 대해 매우 긍정적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항상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선교구역을 확장한 뒤 중국 전도인 15명의 봉급을 지불하기 위해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 요청한 재정 지원이 여의치 않게 된 것.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의 찰스 클락(곽안련) 선교사는 “우리 선교사들은 본국 전도국에 중국인 조사와 전도인의 봉급을 청원했다. 물론 우리 전도국에서는 반드시 조선식으로 하도록 하라며 허락하지 않았다.”(곽안련 ‘장로교회사전휘집’) 박상순 목사 사택건축비 청구는 평양부인전도회에서 전체 소요 금액의 50%를 감당키로 해 허락됐다. 1919년 평양 총회에서 가결한 1920년도 산둥 선교예산은 일화로 1만3000원이었다. 가장 많이 부담한 곳은 평남노회였다. 그 다음이 황해노회였다. 총회 전도국에서 노회별로 분담금을 책정, 담당하도록 했다. 감사일 연보는 총회 결의대로 각 교회에서 조금도 쓰지 않고 총회로 모두 보내도록 했다. 라이양·지모=글 함태경 기자, 사진 이동희 기자 zhuanjia@kmib.co.kr |
출처 : CMP KOREA ♡ 차이나미션파트너
글쓴이 : 東北亞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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