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나쁜신앙)

[스크랩] 빈야드(토론토 축복)운동의 문제점 (이인규)

수호천사1 2011. 12. 2. 20:58

빈야드(토론토 축복)운동의 문제점

 

글쓴이 : 이인규

 

한때, 우리나라 목회자들이 너도 나도 캐나다 토론토로 가는 비행기 안에 가득 차는 기이한 현상이 있었다. 소위 빈야드 운동이라고 하는 기이한 집회를 보고 배우기 위하여, 토론토에 있는 교회로 가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되지 않아 빈야드운동이라고 불리는 운동은 제3의 축복, 제3의 성령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에 도입되기 시작하는데, 이것도 무분별하게 몇갈래의 루트를 통하여 도입됨으로서 서로가 원조(?)라고 주장하는 웃지 못할 일이 있었다. 다행히 정통기독교 교단이 상당히 발빠른 대응을 하였고, 결국 빈야드운동은 존윔버가 사망하고나자 그 세력이 많이 감소되었다.

그렇다면 빈야드의 집회가 왜 그런 주목을 끌게 되었는가? 한마디로 발하자면, 빈야드집회를 통하여 나타나는 특이한 현상 때문이다. 사람들이 뒤로 쓰러지며, 헛구역질을 하거나, 해괴한 웃음을 계속 웃는 사람, 또 간혹 누워서 팔과 다리로 발버둥을 치는 사람들이 그 현상이다. 일반 기독교의 집회나 예배 시간이라고 상상도 할 수 없는 해괴한 현상들이 일어나며, 그러한 현상을 그들은 성령의 역사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 연구를 하던 예장합동, 예장통합, 기성, 예장고신등에서는 빈야드운동에 대해서 이단성 혹은 참여금지를 내렸다. 그것을 반드시 성령의 역사라고 볼 타당성이 없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그들의 특징은 단지 "쓰러지는 것"에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무질서한 현상에 대해 어떤 유익한 점도 발견되지 않으며, 그러한 쓰러지는 현상자체가 아무런 멧세지도 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그들의 특징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외부적으로 무질서하다고 말할 수 있는 특이한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뿐이다.

빈야드 운동이란 무엇인가?

최근에 "빈야드 운동" 혹은 "토론토 축복"이라 불리워지는 운동 등이 있는데, 그것들이 "빈야드"라고 부르는 이유는 미국 캘리포니아의 애나하임에 있는 "빈야드교회"를 이끄는 죤 윔버(John Wimber)를 비롯해서 그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형성한  단체를 "빈야드 교회 연합"(Association of Vineyard Churches)이라고 부르며, 이제는 일종의 교단처럼 되었기 때문이며, "토론토 축복"이라 함은 죤 아노트(John Arnott)가 개척한 "토론토 공항 교회"(Toronto Airport Vineyard)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하여 그렇게 불렀기 때문이다. 대부분 빈야드교회와 토론토공항교회의 현상에 대해서, 통괄적으로 빈야드운동이라고 부른다.

빈야드 운동에서는 성령의 능력을 특히 강조하는 권능주의와 성령체험의 감정적 요소를 강조하는 감정주의의 두 관점이 강조되는데, 능력전도를 주장하는 죤 윔버의 경우는 권능주의적인 측면이 강하고, 감정적 경험을 중시하는 죤 아노트는 감정주의적인 면이 강하다고 한다.

죤 윔버는 권능(혹은 능력)이란 말을 자주 사용하는데, 그 능력이란 초자연적인 능력이요, 초자연적인 성령의 은사로서 병자를 치유한다든지, 귀신을 내어쫓는다든지, 예언을 한다든지, 혹은 지식의 말씀이라고 하는 은사를 사용해서 전도를 하는 것을 말한다. 반면에 토론토의 죤 아노트는 감정을 대단히 중요시 한다.

현재는 죤 윔버(John Wimber)가 이끄는 `빈야드 교회(Vineyard Christian Fellowship)'를 중심한 빈야드 운동(Vineyard Movement)과 죤 아노트(John Arnott)가 이끄는 `토론토 공항 교회(Toronto Airport Vineyard)'를 중심한 토론토 축복(Toronto Blessing)은 분리되었다. 그들의 특징은 "외부적인 기이한 현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다시 말하여 표적과 현상을 중요시하는 것이다. 그러한 현상은 단지 표면적으로 볼 때에, 쓰러지거나 해괴한 웃음을 웃거나 무질서한 행동을 하는 것뿐이다. 어떤 중요한 멧세지를 전하는 것도 아니고, 대단한 기적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며, 단지 "이상하고 무질서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뿐이다. 즉 기이하고 표적적인 현상 - 이것을 소위 성령의 능력으로서 강조되는 것이다.

존윔버는 신비주의적인 요소가 많다. 그는 그의 책 "능력전도"에서 이렇게 말한다.

"시카고 집회를 마치고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사업가로 보이는 중년 신사가 앉아 있었다. 처음에는 그에게서 아무런 특별한 점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나 다시 한번 나의 눈길이 그에게로 향하는 순간 나는 소스라쳐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그의 얼굴 위에 매우 분명하게 '간통'이라는 글씨가 나타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눈을 비비고 나서 다시 한번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 글씨는 여전히 그의 얼굴 위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간통' - 나는 육안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이 글씨를 읽을 수 있었던 것이며, 그 비행기 안이 그 누구도 나처럼 이 글씨를 읽을 수 있었던 사람은 없었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이는 성령께서 나에게만 보여주신 것이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영적인 현상이라는 사실이 이 사건의 현실성을 더욱 생생하게 느끼게 했다"(능력전도 65-66).

윔버는 특히 주관적이며 신비주의적인 성령의 능력을 강조하는데, 이것을 윔버는 "성령이 나에게 보여준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한때 이단집단이라고 불리는 신비주의적인 교회에 심취한 적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들의 집회와 예배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은 '쓰러짐 현상'이다. 이들은 쓰러짐을 정당화하기 위해, 에스겔 1:28과 다니엘 8:17을 근거로 에스겔과 다니엘의 쓰러짐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에스겔이나 다니엘은 하나님의 위엄 앞에서 스스로 앞으로 부복한 것이지, 빈야드의 경우와 같이 은혜의 체험으로 뒤로 넘어진 것이 아닌 것을 볼 때, 전혀 성경적으로 합리화할 수 없는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러 온 군사들이 넘어진 것(요18:6), 무덤을 지키던 파수꾼이 넘어진 것(마28:4) 등을 열거하지만(John Wimber, Kevin Springer, [능력치유] 이재범 역, 서울:도서출판 나단, 1991, p.359), 성경의 그러한 예들은 성령의 은혜를 체험했기 때문에 넘어진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쓰러진 것이라든지(행9:4), 요한이 밧모 섬에서 쓰러진 일(계1:17)등을 비유하는데, 이것 역시 성경은 쓰러짐이라는 현상을 중요시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직접 나타나셨다는 그 사건 자체에 멧세지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주장은 빈야드의 쓰러짐 현상을 성경적이라고 합리화시키려는 고의적인 시도에 불과하다. 예를 들자면 이들은 요한웨슬레의 집회에서도 쓰러짐이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요한웨슬레의 집회가 빈야드집회와 같이 항상 쓰러지는 현상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러한 쓰러짐의 현상을 결코 강조한 적도 결코 없었다. 성경에서 성령의 역사는 항상 사람을 쓰러지게 하였는가? 성령이 역사하는 기독교의 모든 집회는 항상 사람들이 쓰러지는 현상이 있었는가?

성령께서 하시는 가장 중요한 일은 진리이신 예수께로 우리를 이끌고, 또한 생명이신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로 우리를 인도하고 보호하고 조명하시는 것이다. 그 외의 사역은 본질적인 사역이 아니다. 과연 사람을 쓰러트리는 것이 성령의 본질적인 사역인가?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역을 강조하는 곳에 대해서 주의하여야만 할 것이다.

1. 비본질적인 사역을 성령의 사역이라고 절대화시켜 포장하는 경우
2. 성령의 사역을 미끼로 헌금을 강조하고자 하는 경우
3. 유익하지 않은 불필요한 은사를 남발하는 경우

쓰러짐의 현상을 갖고 모두 이단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그러나 쓰러짐이 성령의 본질적이고 중요한 사역이며 현상이라고 하는 것은 더 모순이다.

이러한 운동은 빈야드와 토론토의 두 갈래와는 달리, 또 다른 예태해목사라는 목사를 통하여 우리나라에 도입되는 경우도 있다. 예태해목사는 원래 미연합장로교단에서 해임되었던 자이다. 1985년 9월 어느 철야집회 때, 로스앤젤레스 소재 예태해목사가 담임하고 있던 베다니 교회에서, 교인 중 김순실이란 여인이 재림 예수의 영을 받았다고 하며, 그해 추수감사절 예배시 그 교회의 여성도들이 입혀준 흰 옷을 입고 강단에 뛰어 올라 자신이 "재림 예수 임재"라 하였고, 예태해목사는 이 여인에게 설교를 허락하였고 그 여인은 "솔로몬보다 더 큰 성전을 지을 것"을 예언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이 미연합장로교 태평양노회(250여 명의 목사, 장로로 구성)로 하여금 조사위원회를 조직, 1986년 2월 2일에 예태해 씨의 베다니교회 강단권과 당회장직을 정지시키도록 만들게 한 것이다. 이 결과는 계속해서 1986년 3월 11일에 노회원 전원의 만장일치로 예태해목사의 베다니 교회 목사직 해임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예태해목사는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과 성도들에게 그리 생소하지 않은 인물이다. 그는 베다니목회를 그만 두고, 현재 미국 뉴저지 소재 엠마오선교교회(Emmaus Mission Church)를 담임하고 있는 목사이며, 국내에서는 목양세계선교회란 단체를 통해 적지 않은 활동을 하고 있다. 특히, 국내에 잘 알려진 목회자나 신학자들이 그와 함께 집회를 함으로 한국 교회가 별 경계심 없이 그를 받아들인 것도 그의 활동이 활발할 수 있었던 원인 중의 하나로 보인다.

그는 결국 또다른 유형의 빈야드일 뿐이다. 그의 집회에서도 쓰러짐과 해괴한 웃음등의 이상한 현상이 나타나며, 이러한 현상을 강조하고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현상을 입신(入神)이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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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전문지 교회와 신앙에서는 장운철기자(현재 목사)가 이러한 빈야드집회에 직접 참여하여 현장을 기록하였던 기사 내용을 그대로 인용한다.

지난 3월 28일. 광명시에 위치한 한국포도원교회(담임 이승헌 목사)에서 소위 '빈야드'식 집회가 열렸다. 집회장 입구에 '토론토 축복'이란 큰 글귀가 붙어 있었다. 이 날의 집회는 세계영성원(원장 유기상 목사)이란 단체와 함께 부흥회를 겸한 것이었다. 평일 낯 집회임에도 3백 명 이상의 신도가 참석, 신도들이 이 집회에 기대하고 있는 정도를 가늠할 수 있었다.
 
오전 11시. 집회가 시작됐다. 6-7명의 청년이 강대상 앞으로 올라와 찬송을 인도했다. 전자 기타와 올겐의 찢어지는 듯한 음이 집회장 구석구석까지 순식간에 도달했다. 그때까지 참석한 신도 수는 약 50여 명. 1백여 평의 평방으로 된 집회장 앞쪽에서부터 신도들은 앉았다. 휴가까지 내는 정성(?)을 보인 듯 곳곳에 양복을 입은 젊은 남자들도 눈에 뜨였다.

신도들은 사회자의 인도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양손을 올리는가 하면, 자리에서 일어서기도 하고 박수, 춤 등 이미 잘 훈련된 것같이 모두들 사회자의 요구에 잘 따랐다. 찬송 시간이 30분 가량 지났을 무렵, 신도 중에 헛구역질하는 한 사람이 기자의 눈에 들어왔다. 마치 입덧하는 그런 모습과도 같았다. 그러나 그는 자리를 피할 생각을 하지 않은 채 '욱-욱' 거리기만 했다. 주변의 신도들도 당연한 상황인 듯 그에게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잠시 후 헛구역질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계속 나타나기 시작했다. 집단 식중독이라도 걸린 듯한 긴장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어떤 이는 정도가 심해 그 자리에 주저앉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때도 역시 주변의 신도와 집회의 진행자는 그들에게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이었다. 사실 헛구역질 소리만 요란하게 들려올 뿐 실제로 이물질을 토해내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찬송 시간이 끝났다. 약 50분 동안 진행됐다. 무엇인가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신도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자리에 앉았다. 뛰어 다니는 아이들의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오후 3시 경. 약 3백여 명의 신도들이 집회장에 촘촘히 들어찼다. '안수 기도'(그들은 '기도사역'이라 함) 시간이 온 것이다. 이때 사회자는 이승헌 목사로 바뀌었다. 그는 먼저 모든 사람이 손에 손을 붙잡을 것을 지시했다. 마치 손과 손을 통해 사회자로부터 맨끝 줄의 신도에게까지 무엇인가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전달됨을 보여 주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눈을 감을 것을 지시했고 '성령이 임함을 기대하라'는 식의 맨트와 함께 대중을 신비(?)의 분위기로 몰아갔다. 기자도 이 대열에 동참했다.

약 1분이 지났을 무렵, 곳곳에서 또다시 헛구역질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앞서 찬송시간에 나타났던 그것보다 속도와 질적인 면에서 농도가 달랐다. 많은 사람이 또다시 '욱-욱'거리기 시작했다. 짧은 시간이었다. 마치 최면에 걸린 듯했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헛구역질 소리 사이로 올겐음이 들려 왔다. 이때 사회자인 이승헌 목사는 토론토 집회에 참석했던 사람을 중심으로 '안수자'를 일으켜 세웠다. 약 30명이 신도들 곳곳에서 일어섰다. 사회자는 그들에게 '안수 시작'을 지시했고 자신은 마이크에 가까이 입을 대고 보다 낮은 목소리로 "주여, 믿습니다. 성령이여, 임하옵소서" 등의 단순한 멘트만을 반복적으로 읊기 시작했다.

집회장은 '안수 행위'로 뒤덮였다. 안수자들은 신도들의 머리나 어깨, 등에 자신의 손을 얹거나 서로의 손을 마주 잡는 등의 방법으로 안수 행위를 했다. 안수를 행하는 자나 받는 자 사이에 남녀 구분은 없었다. 안수 받은 신도들은 대부분이 '쓰러짐'으로 반응을 보였다. 이 안수 행위에 반항을 하거나 거부하려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는 오히려 안수를 더 받기 위해서 안수자를 찾아다니기까지 했다. 여 신도가 쓰러졌을 경우 간혹 담요를 갖다 덮어 주는 사람도 있었다. 쓰러진 신도들에게 여러 가지 반응이 나타났다. '오-', '주님-' 하는 식으로 소리를 지르거나, '깔깔' 거리며 웃는 모습 또는 큰 소리로 노래하는 등 일관된 모습은 없었다. 이러한 반응 중 대부분에게 나타나는 공통된 현상은 역시 헛구역질 모습이었다.

집회가 진행되는 동안 분주히 움직이며 일을 도왔던 유영준 전도사(한국포도원교회)를 만날 수 있었다.

▲안수 기도를 받아 보았는가.
- 그렇다. 쓰러지는 것은 자기 의지하고는 무관한 것이다. 입신하고도 다르다. 외부의 소리나 상황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안수를 받은 후 대부분의 사람들이 헛구역질하는 모습이 특이하다.
- 속에 악한 것들이 빠져나가는 것이다.

▲헛구역질을 통해 악한 것이 나가는 것이라 했는데, 한 사람이 여러 번 안수 받는 모습을 보았다. 그때마다 그는 헛구역질을 했다. 이것은 악한 것이 조금씩 나간다는 뜻인가, 아니면 나갔다가 금방 다시 들어온다는 뜻인가.
- 모르겠다.

▲토론토 교회에서 배워온 모습인가.
- 아니다. 이곳에서만 나타나는 특징이다.

▲토론토 집회에서도 안수를 여러 번 받는가.
- 거기에서는 한번만 한다.

▲안수는 많이 받는 것이 좋은 것인가.
- 뭐라 말할 수 없다.

▲이 운동을 교회에 접목시키면서 부작용은 없는가.
- 있을 것이다. 나는 모르겠다.

▲이 교회와 같은 집회를 갖는 곳이 또 있나.
- 6∼7군데 있는 것으로 안다.

유 전도사는 기자의 사진 촬영에 자제해 줄 것을 요구했다. '마귀가 틈탈 수 있다'는 것이 그가 내세운 이유였다. 집회장 안에는 사람들의 '쓰러짐'으로 발디딜 틈조차 없게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쓰러져 있기 때문이다. 곳곳에서 '쓰러짐'과 '일어남' 그리고 '또 쓰러짐'이 반복됐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일어남'의 숫자가 줄어들었다. 사람들 틈 사이로 안수자들의 발은 계속적으로 분주히 움직였다. 그때까지 서 있거나 앉아 있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것이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집회장 뒷켠에 걸린 시계 지침은 오후 6시를 막 넘기고 있었다. 장장 7시간이 넘도록 집회였다. 신도들은 자신의 소지품을 정리하며 삼삼오오 집회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들의 얼굴은 무엇인가 만족한 듯한 표정들이었다. 그러나 일부 신도들은 시간가는 줄 모르고 '쓰러짐'에 젖어 있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안수자를 찾아 헤메는 사람도 있었다.  

기자는 이 집회에 안수자로 움직였던 한 목사와 전화 인터뷰를 했다. 그는 왠지 자신의 이름 밝히기를 거부했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

▲집회 중 안수 기도를 해주는 사람이나 그것을 받는 사람 사이에 남녀의 구분이 없었다. 그에 따른 부작용은 없는가.
- 우리는 그것을 철저히 규제를 한다. 우리 목회자들은 꼭 머리에다가만 한다. 상처를 많이 받은 사람들에게는 가슴이나 목밑에 손을 대고 기도하면 회개의 역사가 일어난다. 배에다 손을 대는 이유는 배에 악한 것들이 있다고 보여지기 때문인데, 배가 꿈틀거린다. 그때 살짝 손을 대주면 토하게 된다.

▲실제 토하는가.
- 그렇다. 가래가 나온다. 그것을 토해내면서 악한 것이 나가는 것이다.

▲목에다 손대는 것은 왜 그런가.
- 속에서부터 악한 것이 목에 걸려 안나가려고 한다. 그때 목에다 손을 대주면 나가게 된다.

▲발을 잡는 이유는 무엇인가.
- 가슴부분에 손을 댈 경우 다치고, 스치고 할 수가 있을 때 발에다 손을 댄다. 현상은 똑같이 일어난다.

▲한 명이 여러 번 안수를 받고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이것은 악한 것이 조금씩 나간다는 것인가. 아니면 나갔다 들어왔다한다는 것인가.
- 우리가 하는 것은 은사사역이라기 보다는 자아가 죽는 것이다.

▲그러면 그 자아가 죽었다가 살아났다하는 것인가.
- 그렇다. 한번 넘어지면 깨지고, 두번 넘어지면 더 깨지고 그러는 것이다. 고집이나 강력한 이론 사상들이 깨지는 것이다.

1. 빈야드운동에 대한 비판

우리는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형태와 다른 신앙과 운동에 대해서 무조건 배타적이거나 정죄할 수는 없다. 그러나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음에 유의하여야만 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요일4:1)

우리는 눈앞에 나타나는 가시적인 표적과 기적만으로 그것을 성령의 사역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그렇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짓그리스도들과 거짓선지자들이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다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마24:14)

"네게 말하기를 네가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좇아 섬기자하며 이적과 기사가 그 말대로 이룰지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신13:1-3)

우리는 기적과 표적이라고 불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느 단체의 주장이 성경말씀이라는 표준에서 이탈되어 있는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하나님은 지금도 놀라운 기적과 이사를 행하시는 분이시며, 너무도 당연히 능력을 행하실 수 있는 전지전능하신 분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생활은 그런 기적과 표적만을 바라고 기대하며 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그리고 빈야드집회가 보여주는 쓰러짐의 현상은, 그 쓰러짐이 어떤 유익한 점도 없으며, 단지 이상한 표적을 보여주기 위한 현상뿐이다.


빈야드집회는 시작할 때에 아예 스티로폴을 앞과 복도에 깐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넘어지는 사람은 반드시 스티로폴 위로 넘어진다. 스티로폴이 없는 곳이나 의자 위로 넘어지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 스티로폴이 없는 곳에서는 뒤를 살펴보면서 손을 먼저 뒤로 집고 넘어지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반드시 넘어지는 것은 아니다.


또 뒤로 넘어지는 사람은 항상 뒤를 살피며, 뒤에서 받쳐주는 보조자가 있을 경우에는 그러한 현상이 더욱더 잘 일어난다. 만일 반드시 쓰러지는 것이 성령의 역사라면, 안쓰러지는 사람의 경우는 성령이 임하지 않았다는 증거인가?

2. 빈야드 운동의 문제점들

(가) 성령과 그 사역에 대한 이해가 치우쳐 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은사를 주시는 것은 다양하다. 성령의 은사는 기적적인 것도 있으나, 기적적인 것 같지 않아 보이는 것도 있다. 또한 그런 은사들은 각 사람이 모두 다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의 사명과 필요에 따라 하나님께서 나누어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빈야드 운동에서는 초자연적인 은사들과 능력, 그리고 신비 현상들이 지나치게 강조되고 있다. 특정한 은사들이나, 격렬한 감정의 분출 현상이나 이적들이 지나치게 강조되면, 성령의 역사의 다른 중요한 측면들(즉 말씀, 사랑의 삶, 공동체  안에서의 교제, 사회에 대한 책임적 행위에 관련된 성령의 역사)이 간과되거나 약화될 수 있다.


웬일인지 최근에 들어와서 윔버는 이 점에 있어서 나름대로 균형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지만 사람들에게 그가 미친 영향은 결국 초자연적 능력을 매우 강조하여 열광주의에 빠지게 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나) 거룩한 웃음, 떨림, 쓰러짐, 짐승 소리 등의 현상은 비성경적인 현상들이다.


빈야드 운동이 사람들의 혐오감을 유발하는 가장 두드러진 점은 그들 가운데서 많이 일어나는 떨림, 쓰러짐, 거룩한 웃음 등의 현상 때문이다. 또한 이런 현상들이 실질적으로 이 운동의 특성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그들의 집회의 분위기는 그런 현상들을 암시적으로 격려하는 것으로 보인다.


짐승 소리는 토론토 교회의 현상으로서 죤 아노트가 그런 현상들과 특히 짐승 소리를 정당화하는 성경적인 증거로 예수님을 `유다 지파의 사자'라고 묘사한 계시록 5:5 이라든지 `하나님이 사자같이 부르짖으신다'는 아모스 3:8 등을 인용하여 정당화하고 있는데(The Father's Blessing pp.172~173), 이는 억지스런 해석으로 위의 본문들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과 은유로 묘사한 것이지 실제적인 짐승 소리나 괴성을 정당화하는 말씀은 아니다.

거룩한 웃음을 정당화하기 위해 아브라함이나 사라의 웃음(창 17:17, 21:6)과 같은 것을 예로 들지만(능력치유 p.362), 아브라함이나 사라의 웃음은 어떤 주체할 수 없는 감정 때문에 광적으로 웃는 웃음이 아니다.


또한, 떠는 현상을 정당화하기 위해 몇몇 성경을 억지인용하지만, 그러한 사건들은 구체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혹은 어떤 두려운 사건이 일어난 상황에서, 두려워서 떠는 의식적이며 자연스러운 현상이지, 빈야드 운동에서 처럼 주체할 수 없는 주관적이며 잘못된 신비적인 감정이 아니다.

(다) 위와 같은 현상들은 격렬한 종교적 감정의 표현으로 그런 현상들 자체가 강조되고 격려되는 분위기는 바람직하지 않다.


성령의 은혜를 경험하고 감동된 사람들이 격렬한 감정 속에서 그러한 현상이 수반되어 나타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현상들이 격려되고 장려되어 은혜 받은 표적으로 정형화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위험스럽다. 성령의 은사들은 우리가 복음을  전하며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데 소용되는 성령의 선물이며 능력이다. 은사들은 구체적인 유익, 특히 타자를 위한 유익을 가져온다(고린도전서 14장, 에베소서 4:11).


혹시 그러한 극단적인 감정의 분출 현상이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경우에라도, 그런 것은 드러내고 공개하고 격려할 문제가 아니다. 그런 현상들은 사람들에게 의구심과 혐오감을 일으키기 쉽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방언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공개석상에서 방언하는 것에 대하여는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한 배려를 하는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한 것에 주의해야 한다.


그런 현상들을 체험한 사람들은 다른 이들에게 특히 불신자들에게, 덕이 되지 않고, 오히려 혐오감을 주게 될 우려가 있다. 그런데 빈야드 운동에서는, 특히 토론토 측에서는 그런 현상을 드러내고, 심지어 집회시 강단에서 간증할 때에도 나타나도록 하므로 바람직하지 않다.

(라) 예배를 무질서하게 드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찬양과 예배의 갱신은 그들이 강조하는 또 하나의 요점이기도 하다. 그들은 형식에 얽매어 역동성을 상실한 예배를 자유롭고 무형식적인 예배를 통해 갱신하고자 한다. 무형식적인 예배는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를 따르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어떤 면에서 항상 똑 같고 형식적인 예배에 식상한 사람들에게 그것은 신선한 충격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전통적인 형식 속에서도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또한, 빈야드가 아무리 무형식이라고 해도 거기에 이미 나름대로의 어떤 형식이 자리잡게 된다. 자유로운 분위기의 긴 찬송 시간, 설교, 각 사람을 위한 기도 시간 등은 이미 하나의 형식이다.

사실상, 윔버 자신도 어느 정도 질서와 조직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기도 하다(Wimber & Springer, 능력전도 pp.57~58). 전통적인 형식들도 많은 경우 그 근원에 있어서 고대에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자연스럽게 나타난 현상에 근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각 사람이 무질서하게 각각 자기 원하는 식으로 찬송하고, 기도하고 하는 것은 여럿이 모였으되, 각각 자기 문제를 위해 기도할 때에는 문제가 없지만, 예배는 개인만이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교류하며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질서가 유지되어야 한다. 예배는 엄숙하고 질서 있게 드리고, 기도가 필요한 사람들은 따로 기도하는 시간을 마련하면 좋을 것이다.

(마) 수용하는 이들의 신학적 목회적 비성숙성이 더 문제를 확대하고 있다.


우리 나라의 많은 목회자들이 빈야드 세미나에 참석하고 돌아와서는 자기 교회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시도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다. 그런 경우 기존 신앙생활의 모습을 고수하려는 이들과의 사이에 마찰과 분열이 야기되고 있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의 무비판적인 수용은 오히려 교회를 어지럽히게 된다. 본 교단 소속 목회자들과 교인들은 성령님의 여러 가지 놀라운 은사들과 역사를 받아들이고 추구하되, 성경이 가르치시는 바에 따라 건전하고 덕스러운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출처 : 내 사랑 중국 ♡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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