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선교민족의 뿌리와 사명

[스크랩] 백투예루살렘과 ‘시님의 군대’

수호천사1 2011. 10. 18. 08:59

  복음을 전하는 데 나라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교회가 있는 국가라면 어느 나라든 열방에 복음을 전해야 하며, 그것은 모든 나라의 교회들이 서로 파트너십을 갖고 협력할 일이다. 그러나 누군가 아무 성경적 근거도 없이 촛대가 차이나로 넘어갔다고 가르친다면, 게다가 한국교회의 시대적, 역사적 사명은 마지막 전쟁을 수행할 차이나 교회의 ‘첨병’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그러한 교훈은 전혀 성경적 사실이 아니므로 반드시 교정되어야 한다. 이러한 비성경적 교훈이 유포되는 것을 그대로 방치하면 한국교회 청년들 의식 속에 뜬금없이 사대모화(事大慕華) 정신을 부추기고, 마지막 때에 예루살렘 땅 끝까지 열방을 치유하며 행진해야 할 우리 젊은이들의 웅대한 비전을 좀먹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금 한국교회 안에 이런 거짓 교훈이 확산되고 있다. 잘못된 교훈 때문에 그러한 폐해가 확산되는 것은 시급히 막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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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투예루살렘과 ‘시님의 군대’

‘시님의 군대’란 없다! 

 

 

  일부 지나(支那) 교회가 펼치고 있는 ‘백투예루살렘(Back To Jerusalem)’이라는 복음전파운동이 있다. 복음을 지나 북서부 및 중동 등지를 거쳐 예루살렘까지 전하자는 운동이다. 이를 위해 그들은 2008년 북경올림픽 이후 향후 20년 내에 100만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려는 목표를 세워놓았다고 한다. 선교사 100만 명! 실로 엄청난 숫자다. 한 나라가 100만 선교사를 파송한다면 그것은 2천년 교회사에 유례가 없는 경이적 사건이 될 것이다. 그게 가능할까?


  지금 인구대국 지나에는 약 8천만 명에 달하는 기독교인이 있다(1억 2천만 명이라는 설도 있는데 그것은 과장된 숫자다). 따라서 실현 가능성 여부는 차치하고 수적으로 아주 많은 기독교인이 있는 지나 교회는 얼마든지 “선교사 100만 명 파송”이라는 목표를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박해 가운데 있는 지나 교회가 주님의 지상명령을 성취하기 위해 그렇게 놀라운 일을 계획하고 있다는 것은 대견한 일이다.


  그런데 지나 교회의 백투예루살렘 운동을 이사야 49장 12절에 기록된 “혹자는 원방에서, 혹자는 북방과 서방에서, 혹자는 시님 땅에서 오리라”는 성경 예언의 성취라고 가르치는 국내 선교단체의 지도자가 있다. I선교회의 대표 C형제는 그의 책 「백투예루살렘」130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중국교회의 백투예루살렘 비전은 이미 성경에서 예언한 말씀의 성취입니다. 이사야서 49장 11~12절에 기록된 것처럼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마지막 시대 중국교회에서 시님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향해 일어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지금까지는 소수의 선교사들이 마치 산골짜기를 따라 어렵게 선교사역을 감당하는 듯 했지만 마지막 시대는 다릅니다. 허다한 성도들이 일어나 대로를 따라 복음의 행진을 하게 될 것입니다. 원방에서, 서방에서 세계 곳곳에서 대로를 따라 성도들이 몰려올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가운데 마지막 역사를 감당할 주의 백성들은 중국에서 일어날 시님의 군대가 될 것입니다. 마지막 시대의 거룩한 100만 대군입니다.”(「백 투 예루살렘」, 도서출판 펴내기, 2005, p.130)


  그리고 같은 책 158쪽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마지막 때에 예루살렘으로 몰려올 시님의 군대에 관한 예언의 말씀으로, 대로를 따라 시님 군대가 예루살렘을 향해 몰려올 것인데 여기서 시님은 곧 중국을 말한다(사 49:11~13).”


  그래서 C대표는 ‘마지막 전쟁’은 하느님(하나님)께서 지나 교회를 통하여 ‘순식간’에 이루실 것이라고 주장한다(같은 책 158쪽).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지나 교회가 100만 명 선교사를 파송할 것이니까 ‘순식간’에 마지막 대추수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우리 한국 교회에 부여된 역사적, 시대적 사명이란 장차 지나 교회가 감당할 그 마지막 주님의 위대한 역사 앞에 약 10만 명 정도의 선교사를 내보내어 시님의 군대 100만 대군의 ‘첨병’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같은 책 158쪽). 그는 촛대는 이미 지나 교회로 옮겨졌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장차 지나에서 소위 ‘시님의 군대’ 100만 대군이 일어나 ‘마지막 주자’의 사명을 감당할 것인가? 우리 한국 교회에 주어진 소임이란 그 위대한 ‘시님의 군대’ 앞에 나아가 첨병 역할을 수행하는 것인가? 국어사전은 ‘첨병(尖兵)’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군대가 행군할 때, 부대의 맨 앞에서 경계, 수색을 하는 임무를 맡은 병사나 소부대.”


  한국 교회의 지위가 지나 교회의 ‘소부대’란 말인가? 참으로 지나 교회의 소부대로서 그들의 첨병 역할을 하는 것이 우리 겨레의 시대적, 역사적 사명인 것인가? 정녕 그것이 우리 한국 교회 젊은이들이 가슴에 품어야 할 비전이란 말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애석하게도 그것은 그릇된 성경해석과 사대주의 정신이 결합되어 나온 억설이다.


  ‘시님’이 지나(China)로 간주되는 근거


  먼저 ‘시님’이 왜 ‘지나(支那)’인지 그 근거부터 확인해 보자. 지나 사람을 부를 때 ‘시노(Sino)’ 족이라고 한다. ‘시노’ 족이 사는 땅이 바로 ‘시님(Sinim)’인 것이다. 앞서 지적했듯이 ‘시노’는 함의 후손 ‘신(Sin)’ 족속에 해당 된다(창 10:17). ‘시노’의 어원이 ‘신’이다(강해설교의 대가인 미국 갈보리교회의 척 스미스 목사도 그의 창세기 강해서인 ‘천지창조’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신’은 가나안의 아들이요, 가나안은 함의 넷째 아들이다(창 10:6; 15). 지나의 기원은 함의 가계, 그 중에서도 가나안의 아들 ‘신’이 지나 민족의 고대 선조이다(창 10:17하). 그러니까 지나 사람은 셈의 자손이 아니라 함의 후손인 것이다.


  지나인이 함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뒷받침 해주는 과학적 증거도 있다. 2005년 1월 윈난(雲南)성 쿤밍(昆明) 소재 동물연구소 유전생물학 실험실의 장야핑(張亞平) 원사는 현재의 지나인들은 아프리카인과 조상이 같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지나인의 유전자본체(DNA)에서 Y염색체를 추출해본 결과 아프리카 흑인들의 선조에서 나타나는 특징이 대체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지나인의 조상이 고대 아프리카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다(문화일보 2005년 1월 15일자 기사).


  지나 사람이 셈족이 아닌 함의 후손이라는 사실은 고대로부터 용(龍)을 숭배하는 그들의 유별난 문화에 의해서도 입증이 된다. 용은 지나의 상징이다. 지나는 용으로 대표되는 나라다. 바로 이것이 지나인이 함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객관적 증거이다. 왜냐하면 용의 고향이 함의 손자 니므롯이 세운 바벨론이기 때문이다. 용은 바벨론의 성수(聖獸)였다. 이 용을 바벨론에 살던 지나인의 조상들이 고대에 동양으로 갖고 들어온 것이다. 당시 그들은 곤륜산을 넘어서 동쪽으로 이동하여 중원(中原)으로 들어왔다. 곤륜산은 일명 ‘화토(華土)’라고도 한다. ‘화토’를 지나왔다는 뜻에서 그 종족을 ‘화족(華族)’이라 하게 된 것이다.

 

 

바벨론의 용


  용은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다(계 12:9, 19:2). 실제로 용은 신비감을 자극하는 뱀의 형상을 하고 있다. 이것은 지나의 기원이 함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고대로부터 뱀을 지극히 숭배하는 족속이라면 그들은 결코 셈의 후손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나 사람이 함의 후손이라는 사실은 자명한 것이다. 가나안의 아들 ‘신(Sin)’ 족속이 바로 ‘시노(Sino)’ 족이라 일컫는 지나인이며, ‘시노(Sino)’ 족의 땅이 ‘시님(Sinim)’인 것이다. ‘시님’이 ‘지나’로 간주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09년 8월 차이나 건국 60주년 퍼레이드에 등장한 용

 

  이사야 49장 12절의 진정한 의미


  이제 문제의 구절인 이사야 49장 12절을 바로 해석해 보자. “혹자는 원방에서, 혹자는 북방과 서방에서, 혹자는 시님 땅에서 오리라”(사 49:12). C대표는 이 구절을 이방 교회들의 이스라엘 선교에 대한 예언으로 이해하고 있다. 즉 허다한 성도들이 원방, 북방과 서방, 그리고 시님, 곧 지나 대륙 등 세계 곳곳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몰려올 것을 예언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마지막 역사를 감당할 주의 백성들은 지나에서 일어날 시님의 군대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 구절은 이방 교회들의 이스라엘 선교에 대한 예언이 아니라,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의 고토 귀환에 관한 예언이다. 그것은 12절 앞에 있는 8~11절 말씀을 보면 의문의 여지가 없다.


  8.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내가 장차 너를 보호하여 너로 백성의 언약을 삼으며 나라를 일으켜 그들로 그 황무하였던 땅을 기업으로 상속케 하리라

  9. 내가 잡혀 있는 자에게 이르기를 나오라 하며 흑암에 있는 자에게 나타나라 하리라 그들이 길에서 먹겠고 모든 자산에도 그들의 풀밭이 있을 것인즉

  10. 그들이 주리거나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며 더위와 볕이 그들을 상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자가 그들을 이끌되 샘물 근원으로 인도 할 것임이니라

  11. 내가 나의 모든 산을 길로 삼고 나의 대로를 돋우리니


  여기 8절 말씀 가운데 있는 “너”와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말한다. 또한 9절에 있는 “잡혀 있는 자”와 “흑암에 있는 자”도 의문의 여지없이 이스라엘 백성인 것이다. 물론 10절에 나오는 “그들”도 이스라엘 민족이다. 그러니까 “혹자는 원방에서, 혹자는 북방과 서방에서, 혹자는 시님 땅에서 오리라”는 12절 말씀은 어디까지나 8절에서 계속되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예언인 것이다.


  그러면 12절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것은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이스라엘 백성이 말세에 그들의 고토로 귀환할 것이라는 예언인 것이다. ‘북방’은 이스라엘의 북쪽 지역, 주로 러시아의 유대인을 뜻한다. ‘서방’은 주로 북남미, 특히 유대인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미국을 가리킨다. ‘시님’은 ‘지나’를 뜻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들은 나치 학살을 피해 세계 각지로 탈출을 시도하였다. 그때 일부 유대인들은 지나 땅까지 도피했는데, 상해에 25,000명(당시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상해만 비자 없이 입국이 가능했다), 북경에 5,000명의 유대인이 거주하였다. 1948년 이스라엘 국가 재건 이후 이사야 49장 12절의 예언은 명확히 성취되었다. 그리고 장차 주님의 재림이 임박할 때에 이 예언은 더욱 온전히 이루어질 것이다.

 

  이처럼 성경의 예언에 따라 말세에 세계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팔레스틴의 고토로 되돌아가는 것(신 30:3~6; 사 11:12; 렘 32;37; 겔 37:21), 바로 이것이 ‘백 투 예루살렘’의 진정한 의미이다. 가령 ‘대전으로 돌아가자’는 말은 충남 대전이 고향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이 이스라엘로 복음을 전하러 가는 것, 혹은 이방 기독교인들이 이스라엘로 성지순례를 가는 행위 등을 ‘백 투 예루살렘’이라고 부르는 것은 언어의 오용이다. 한국 교회 성도들은 일부 지나 교회가 만들어 낸 이치에 안 맞는 ‘백 투 예루살렘’이라는 용어를 무분별하게 답습해 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겠다. 이사야 49장 12절과 동일한 예언의 말씀이 이사야 43장 5~6절에도 있다.


  5.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네 자손을 동방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방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6. 내가 북방에게 이르기를 놓으라 남방에게 이르기를 구류하지 말라 내 아 들을 원방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라


  여기에서 ‘동방’은 아시아를 의미하고, ‘서방’은 주로 북남미, 특히 유대인이 가장 많은 미국을 뜻한다. ‘북방’은 이스라엘의 북쪽 지역을 말한다. 거기에는 독일, 폴란드, 러시아가 있다. 오늘날 러시아는 이들 중 가장 큰 나라로서 유대인들이 가장 많이 남아 있다. 여기서 ‘남방’이라고 하는 것은 히브리어로 예멘을 지칭한다. 이스라엘 국가 재건 이후 예멘에서는 약 5만 명의 유대인이 이스라엘로 귀환했다.


  이상 살펴본 바처럼 이사야 49장 12절은 흩어진 유대인들의 고토 귀환에 대한 예언이다. 따라서 이 구절에 나오는 “혹자는 시님 땅에서 오리라”는 문구를 지나 교회의 백투예루살렘 운동을 예언한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성경에는 어디에도 마지막 주의 위대한 역사를 수행할 이른바 ‘시님의 군대’가 일어나리라고 예언한 말씀은 없다. 「하늘에 속한 사람」을 저술한 지나 교회의 지도자 폴 해터웨이도 “혹자는 시님 땅에서 오리라”라는 구절을 지나 교회의 백투예루살렘 운동과 연계시킨다. 아전인수(我田引水)격 해석인 것이다(2005년 2월 한국을 방문했던 폴 해터웨이의 동역자 수 형제는 영동제일교회 주최 부흥성회에서「하늘에 속한 사람」은 약 50%가 과장된 것이라고 고백했다).


  2008년 북경올림픽 이후 향후 20년 내에 100만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겠다는 일부 지나교회의 이른바 백투예루살렘 운동은 성경 예언의 성취가 아니다. 그것은 다만 사람의 계획일 뿐이다. 따라서 그대로 이루어질지는 두고 볼 일이다. 결국 C대표는 실현 여부가 불확실한 인간의 계획을 성경 예언의 성취라고 잘못 해석하여, 마지막 전쟁을 수행할 ‘마지막 주자’는 '지나 교회'라고 단정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예언을 곡해한 것을 성경적 교훈인 양 한국 교회 청년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게다가 더 어처구니없는 것은 우리 한국 교회에 부여된 역사적, 시대적 사명이란 그 위대한 시님의 군대 100만 대군 앞에 약 10만 명 정도의 선교사를 파송하여 지나 교회의 ‘첨병’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교훈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이없는 일이다. 그는 전혀 성경적 근거도 없이 한국 교회의 지위를 함부로 지나 교회의 첨병, 곧 소부대로 격하시키고 말았다. 이렇게 성경을 잘못 해석하면 아주 엉뚱한 주장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권면했다: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


  사대주의자가 아니신 하느님


  C대표는 잘못된 성경 해석을 토대로 우리 한국 교회 청년들이 가슴에 품어야 할 비전을 “열방과 예루살렘 땅끝까지”가 아니라 “지나 교회의 첨병 되기”로 축소시켰다. 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 않아도 지나 사람들은 우리나라를 속국 취급을 하고 있다(지나인들의 이러한 대한(對韓) 인식은 기독교인도 예외가 아니다). 이런 현실에서 단순히 지나 교회의 숫자에 위압당해 아무 성경적 근거도 없는 ‘첨병론’을 들고 나와 소위 ‘시님의 군대’의 소부대를 자처하고 나서는 것은 슬픈 일이다. 이러한 사상은 마치 지나(支那)를 대국으로 숭배하던 조선시대의 사대주의자들이 조선을 소중화라고 자처하며 만족해했던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러므로 이러한 교훈은 필연 한국 교회 청년들의 의식 속에 은연중 사대모화(事大慕華) 정신을 부추길 것이며, 결국 한국 기독교인들을 잠재적 사대주의자가 되게 될 것이다.


  2005년 4월 10일, 한기총과 한국세계선교협의회는 현재 1만 3000명인 정규 선교사 수를 5만 명으로 대폭 늘리고 이르면 2020년까지 100만 명 자비량 선교사를 배출하기 위해 대대적인 선교활성화 운동을 시작한다고 발표했다(국민일보 4월 11일자 기사). 그러니까 100만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겠다는 계획은 인구대국 지나 교회만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한국 교회도 얼마든지 그러한 계획을 세울 수 있으며, 또한 한국 교회는 충분히 이 목표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분단의 고통을 겪고 있는 아시아 변방의 작은 나라 한국, 더욱이 복음을 수용한지 120년이라는 일천(日淺)한 역사를 가진 나라, 그러면서도 오늘날 우리나라는 세계 제2위의 선교대국으로 부상했다. 아주 놀라운 사실 아닌가? 이러한 사실을 감안한다면 한국 교회의 100만 명 선교사 배출 비전은 결코 과대망상이 아닌 것이다. 장차 통일 대한민국은 미국을 추월하고 능히 세계 제1위의 선교강국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한국 교회는 아무리 잘해도 10만 명 이상의 선교사는 내보낼 수 없을 것이다. 한국은 작은 나라이기 때문이다. 100만 명 선교사를 배출할 수 있는 나라는 인구대국 지나뿐이다. 따라서 한국 교회의 시대적, 역사적 사명은 지나 교회의 ‘첨병’ 역할을 하는 것이다. 촛대는 지나 교회로 넘어 갔다. 마지막 전쟁은 선교사 100만 대군을 파송할 나라 지나의 몫이다”라고 예단한다면 그것은 메뚜기 콤플렉스(민 13:33)요, 사대주의의 부활이다.


  지나는 인구대국이요 기독교인도 8천만 명이기 때문에 장차 100만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여 마지막 전쟁을 수행할 나라라고 단정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지나와 비슷한 인구대국 인도는 기독교인이 1억300만 명이니, 인도 교회는 적어도 150만 명의 선교사를 파송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마지막 전쟁을 수행할 나라는 지나가 아니라 인도라고 해야 옳지 않을까? 더욱이 약 20년 후면 인도의 인구가 지나 인구를 앞지를 것이라고 한다. 지나는 국가가 하나만 낳아 기르도록 산아제한을 하고 있지만 인도는 그게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형제자매여, 우리 하느님이 숫자와 덩치의 크기를 보고 일하시는 분이란 말인가? 그것은 아주 비성경적인 발상이다. 전능하신 하느님은 어떤 전쟁이든 ‘인해전술(人海戰術)’을 의지하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마지막 전쟁에 꼭 100만이라는 수의 선교사가 필요한지 의문이다. 그러나 마지막 대추수를 위해 100만 명의 선교사가 필요하다면, 하느님은 동방의 작은 나라 한국 교회를 통해 그 일을 행하실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왜 나는 그렇다고 믿는가? 성경을 관찰해 보니 우리 하느님은 골리앗처럼 덩치 크다고 특별하게 쓰시는 사대주의자가 아니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언제나 작고 약한 것을 선택하여 크고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고전 1:27~28).

 

 

  성경은 하느님이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시는 분이라고 말한다(시 8:2). 즉 세상의 약한 자와 어리석은 자를 영적 현자와 강자로 만드셔서 잘난 체 하는 자들의 허위와 교만을 격파시키는 분이 여호와 하느님이시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느님은 항상 ‘소수’로 하여금 ‘다수’를 압도하게 하신다. 그는 “너희 다섯이 백을 쫓고 너희 백이 만을 쫓으리니”(레 26:8)라고 말씀하셨다.


  기드온이 미디안, 아말렉을 비롯한 여러 이방족속의 연합 공격에 대비하려고 32,000명의 군사를 모집했을 때, 하느님은 31,700명을 집으로 돌려보내셨다. 그분은 단 300명으로 승리를 주시고자 했다(삿 6:33; 7:1~8). 약한 것들을 선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없는 것들을 선택하사 있는 것들을 쓸모없게 만들려는 것이 자비하신 하느님의 성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지막 전쟁을 위해 100만의 선교사가 꼭 필요하다면 하느님은 그들을 동방의 작은 나라 한국 교회에서 부르실 것이라고 얼마든지 단언할 수 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이유도 그들의 수효가 작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 신명기 7:6~7 말씀에 의해서도 보증된다.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으니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작으니라”(신 7:6~7).


  그렇다! 수효가 많지 않은 작은 나라를 선택하셔서 구원의 계획을 이루시는 것이 자비로운 하느님의 성품이다. 따라서 우리나라는 ‘작은 나라’임으로 오히려 큰 소망이 있는 것이다. 하느님은 사대주의(事大主義)자가 아니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수효가 13억이 넘는 지나(支那)와 같은 영토대국, 인구대국은 ‘마지막 주자’로 쓰실 백성이 아니라고 얼마든지 단정할 수 있다(이 글의 논지를 잘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 나는 지금 하느님이 우리나라만 쓰신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며, 지나 교회는 선교를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선교활동 영역에서 이웃 나라들과의 파트너십을 부정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한국에 대한 게오르규의 예언


  게오르규(1919~1992년)는 소설 「25시」로 세상에 알려진 루마니아의 작가이자 정교회의 사제이다. 그는 1949년에 「25시」를 간행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25시」에서 그는 서구 물질문명의 붕괴와 동방에서 빛을 발할 영적 부흥의 도래를 예언했었다. 그가 말하는 「25시」란 서구 물질문명이 초래한 인간성 부재의 상황과 폐허의 시간, 절망의 시간을 의미한다. 그런데 게오르규는 「25시」가 출간된 지 25년 후인 1974년, 그 절망에서 인간을 구원할 동방은 한국이라고 선언했다. 그는 1974년 3월 「문학사상」지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했을 때, 「25시」에서 자신이 예언한 동방은 동양의 ‘작은 나라’인 한국이 분명하다고 했다.


 “… 나는 25시에서 직감적으로 ‘빛은 동방에서 온다’는 말을 한 일이 있습니다. 빛은 아시아에서 온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25시」를 읽은 젊은 사람들은 그 「동방」이 모택동의 중공을 의미하는 줄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나는 오늘의 중공은 빛과 반대되는 암흑의 세계인 것을 압니다. 내가 작품 속에서 빛이 온다고 말한 그 동방은 당신네들의 작은 나라, 한국에 잘 적용되는 말입니다. 이것은 인사치레로 하는 말이 아니며 당신네들의 마음에 들려고 과장해서 하는 말도 아닙니다.


  내가 그걸 알 수 있는 것은 구주이신 예수님이 작은 나라에서 태어나신 걸 알기 때문입니다. 팔레스타인의 작은 마을 베들레헴, 지도에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는 보잘 것 없는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서 그리스도는 태어났습니다. 광명의 상징인 예수님이 베들레헴이라 불리는 그 소촌(小村)에서 태어나리라는 것을 안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빛은 결코 뉴욕이나 모스크바나 북경과 같은 큰 도시에선 오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빛이 무명의 아주 작은 마을에서 온 것처럼 지금 인류의 빛도 작은 곳에서부터 비쳐올 것입니다.


  내일의 빛이 당신네 나라인 한국에서 비쳐온다 해서 놀랄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신네들은 수없는 고난을 당해온 민족이며, 그 고통을 번번이 이겨낸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당신들은 고난의 수렁 속에 강제로 고개를 처박힌 민족이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고개를 쳐든 사람들입니다. 당신네 한국 사람들은 내게 있어서 젊은 시절에 읽은 성서의 ‘욥’과 같은 존재입니다…”(제1·2차 강연-이화여대·대구 계명대, 1974년 *「문학사상」, 1974년 5월호, p.60~61, 게오르규, 「25시를 넘어 아침의 나라로」, 서울: 문학사상사, 1987, p.76~77)


  게오르규의 이 말은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과 부합하는 예언적인 말이다. 「25시」의 작가 게오르규는 그가 모르고 있던 동방의 ‘작은 나라’ 한국을 발견함으로서 25시라는 흑암의 시간을 향해 치닫고 있는 이 지구상에 아직 소망의 빛이 남아있음을 인지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한국을 ‘열쇠의 나라’라고 정의하였다. 25시의 절망에서 인간을 구원할 열쇠가 한국이라는 것이다. 그의 말에 의하면 지도를 펴놓고 유심히 살펴보면 한국은 열쇠처럼 생겼는데, 한국은 동아시아와 러시아(유럽)가 시작되는 ‘태평양의 열쇠’라는 것이다. 실제로 지도상에서 한국은 아시아와 유럽 그리고 아프리카가 연륙된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대륙이 시작되는 위치에 열쇠처럼 걸려있다. 그는 세계의 모든 난제들이 ‘열쇠의 나라’ 한국에서 풀릴 것이라고 예언했던 것이다. 실로 뛰어난 영적 직관이 아닐 수 없다.

 


  게오르규는 25시의 어두움 속에서 영적 등불이 될 한국이 존귀한 나라임을 분명히 알았다. 그리하여 그는 또한 한국을 ‘아시아의 보석’ 이라고 했다:


“한국은 내가 학교에서 배운 것처럼 중국과 일본 사이에 놓인 극동 아시아의 하나의 반도이다. 그러나 평면구형도(平面球形圖)를 놓고 볼 때 그것은 반도가 아니다. 한국은 아시아 대륙의 귀고리다.


  아시아를 아름답게 만들기 위하여,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하여 하느님은 그 자리에 한국이라는 귀고리를 달아 놓은 것이다. 한국은 보석처럼 정교하게 깎여지고 만들어지고 가꾸어진 것이다. 그 해안은 레이스로 되어 있다. 칠보로 되어 있다. 그것은 정말로 자수이다. 오직 보석만이 그런 식으로 재단된다.


  한국은 반도가 아니고 하나의 장식품이다. 하나의 보석, 하나의 귀고리이다. 레이스로 수놓은 1천8백㎞의 해안에 3천4백 개의 섬이 있다. 세공된 크고 작은 섬, 온갖 형태의 섬들이 해안을 장식하고 있다.


  이 해안에서 등을 돌려 한국의 내부로 시선을 돌린다면 한국이 보석이라는 것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된다. 지리학자는 이 반도는 3/4이 산악지대라고 말할 것이다. 구름 위까지 뻗치는 산이 있고 거기에 다른 산들이 연결되어 있다. 토지의 기복을 제하면 그것은 해안과 마찬가지인 레이스이다. 산들은 구름에 걸린 레이스와도 같다. 레이스를 이루는 산꼭대기인지, 하늘과 구름인지를 때로는 분간할 수가 없다. 아시아의 귀고리는 부조(浮彫)로 된 작품이다. 그 산은 칠보의 레이스이다.


  지도상의 한국은 매우 작다. 모든 보석이 그런 것처럼 하나의 귀고리는 제아무리 커도 역시 작은 것이다.”(게오르규, 「25시를 넘어서 아침의 나라로」, 문학사상사, 1987, p.15~16)


  지도를 펴놓고 유심히 살펴보면 한국 영토의 모양은 열쇠처럼도 생겼고 귀고리처럼도 생겼다. 여기에서도 게오르규는 한국이 ‘작은 나라’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하여 아시아 대륙에 한국이라는 귀고리를 달아 놓으셨는데, 모든 보석이 그런 것처럼 귀고리는 제아무리 커도 작다는 것이다.


  현재 13억의 인구대국 지나에는 8천만 명이라는 많은 수효의 기독교인이 있다. 그러나 하느님이 어느 나라에서 수많은 사람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과 어떤 나라를 선택하여 마지막 주자로 쓰시는 것은 별개의 문제인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덩치 크다고 쓰시는 사대주의자가 아니시기 때문이다.


  승패를 결정짓는 마지막 전투일수록 ‘소수 정예 특수부대’가 더 필요하다. 특수부대는 혹독한 훈련을 많이 받은 부대이다. 하느님께서 우리 겨레를 수천 년 동안 고난으로 단련하신 까닭은 “마지막 전쟁의 특전사 군대”로 쓰시기 위해서이다. 즉, 다섯이 백을 쫓고 백이 만을 쫓는 하늘나라의 특전사 부대, 그들이 바로 ‘알이랑 민족’ 한국인인 것이다.


  충전을 오래 한 배터리는 강하고 오래 사용할 수 있다. 인간을 배터리로 비유한다면, 사람은 무엇으로 충전할까? 그것은 ‘고난’일 것이다(사 48:10; 욥 23:10). 우리 겨레는 오랜 세월 고난으로 충전되었다. 지금도 한민족은 국토가 분단되어 엄청난 고난을 겪고 있다. 하느님은 왜 우리에게 이렇게 크고 긴 고난을 허락하셨을까?


  이웃 민족보다 죄가 더 많기 때문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오랫동안 고난으로 충전하여 마지막 때에 귀하고, 강하게, 오랫동안 쓰시기 위해서다. 그래서 게오르규의 말처럼 동방의 의인 ‘욥’과 같은 백성이 한민족이다. 고난의 사람 욥은 모년에 갑절의 복을 받았다(욥 42:12~16). 우리 ‘알이랑 민족’도 말세에 넘치도록 큰 복을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태평양시대의 중심 국가는 차이나가 아니라 통일 코리아가 될 것이다. 성경을 모르는 세상 학자들은 소위 팍스 시니카(Pax sinica)의 시대가 올 것처럼 이야기 한다. 차이나가 세계의 차세대 슈퍼파워가 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꾸준히 들려온다. 그러나 승천하던 용은 떨어지리라! 일찍이 동아시아에서 차이나가 부상(浮上), 미·일과 전략적 대결을 벌일 걸로 전망한 이는 새뮤얼 헌팅턴(Huntington) 하버드대 교수였다. 그는 1996년 문제작 ‘문명 충돌과 세계 질서 재편’에서 “차이나는 역사·문화·전통·크기·경제 역동성·자기 이미지 등 모든 점에서 동아시아에서 패권적 지위를 자처하게 돼 있다”며 “동아시아 국가들은 이에 대해 홀로 혹은 동맹을 통해 균형을 취할 건지, 편승할 건지, 절충할 건지 선택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두고 보라. 하느님의 때에 찬 섭리와 경륜에 따라 통일 코리아가 차이나를 압도할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촛대가 지나로 옮겨질 수 없는 까닭


  여호와 하느님은 ‘셈의 하느님’(창 9:26)이시다. 그래서 하느님은 구원의 역사를 셈의 후손을 통해 시작하셨다. 그렇다면 구원사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마지막 대추수의 역사도 틀림없이 셈의 후손을 통해 이루실 것이다. 하느님은 ‘셈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무릇 마무리는 시작보다 더욱 중요하다. 그래서 인류 구원의 마지막 대사명은 더더욱 셈족에게 맡기실 것이다.


  바로 여기에 촛대가 지나 교회로 결코 옮겨질 수 없는 원초적 이유가 있다. 앞서 지적했듯이 지나의 기원은 함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함족은 축복을 상실했다. 창세기 9장 24절에서 27절에 기록된 노아의 노래를 보라. 그때 노아는 함족 전부를 저주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축복하지도 않았다. 함족은 일반적으로 축복을 상실했다. 복을 상실한 족속을 마지막 주님의 위대한 역사에 크게 들어 쓰신다는 말인가? 그것은 이율배반(二律背反)적 논리로서 아주 비성경적 교훈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역사적으로 지나는 이족천시(異族賤視) 사상인 중화사상으로 늘 이웃 나라들을 오랑캐라고 멸시하며 침략전쟁을 일으키고 패권을 추구해온 나라다. 그래서 지나의 손에는 피가 묻어 있다. 지금도 약소국 티베트를 총칼로 지배하고 있으며, 한반도를 자기들의 잠재적 영토로 간주하고 있다. 그리하여 한국 정부의 만류에도 아랑곳없이 엄연한 우리 민족사인 고조선, 부여, 발해, 고구려사를 도적질하고 있는 것이다. 차이나의 영토에 대한 탐심은 끝이 없다. 서북공정으로 위구르를, 서남공정으로 티베트를 빼앗더니, 이젠 동북공정으로 간도와 북한 땅까지 강탈하려고 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마수는 우리 영해 최남단에 있는 이어도까지 뻗치고 있다. 얼마전 지나 정부가 이어도에 대한 한국의 권리를 인정할 수 없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하고 나섰기 때문이다(이어도는 지나쪽보다 한반도에 더욱 가깝다).


  이웃을 향해 공의를 행치 아니하고 이렇게 끊임없이 악을 자행하는 불의한 나라를 세상을 정의로 다스리시는 의로우신 하느님께서(시 67:4) ‘마지막 주자’로 귀하게 쓰신다는 말인가? 그것은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천하에 공리(公理)는 어디에 있을 것이고, 역사의 신성(神聖)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우리는 역사의 주관자가 살아계신 공의(公義)의 하느님이심을 믿는다.

 

  따라서 지나 교회 지도자들은 세계선교를 논하기 전에 역사적으로 지나가 이웃 민족에게 저지른 죄악, 지금도 이웃 나라들에게 자행하고 있는 악행들을 회개해야 한다. 거룩하신 하느님은 손에 피가 묻은 자를 쓰시지 않는다. 다윗이 성전을 건축하기 원했지만 피를 많이 흘려 허락되지 않았다(대상 22:8). 그처럼 지나(支那)는 복음의 마지막 주자로 쓰임 받는 은혜가 허락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지나 사람들은 셈의 후손이 아닐 뿐더러, 그들의 손엔 피가 묻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촛대는 절대로 지나 교회로 옮겨갈 수 없다(다시 말하건데 나는 지나 교회는 선교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이 종말의 때에 마지막 대추수를 위해 사용하실 세계선교의 마지막 주자에 관해 성경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신약시대의 성전은 교회이다(고전 3:16). 따라서 복음을 전하여 주님의 교회를 세우는 것은 곧 성전을 건축하는 행위가 된다. 이 신약시대의 성전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주께 돌아오고, 맨 나중에 온 이스라엘이 구원 받을 때 완성된다(롬 11:25~32). 그래서 말세에 유대민족을 구원하기 위해 예루살렘까지 복음 들고 달려갈 나라가 마지막 주자이다. 신실하신 하느님은 그 위대한 나라를 셈의 후손 중에서도 작은 나라이며, 손에 피가 묻어 있지 않은 양(羊)과 같은 백성을 선택하실 것이다. 그가 바로 동방의 알이랑 민족 한국인인 것이다.


  성경 어디에도 ‘시님의 군대’라는 것은 없다. 마지막 역사를 감당할 시님의 군대 100만 대군이 지나에서 일어날 것이라는 가르침은 성경적인 근거가 전혀 없는 이야기다. 하느님의 말씀이 아닌 그러한 픽션에 의거해 한국 교회의 위상을 지나 교회의 ‘소부대’로 격하시키고, 우리 겨레의 시대적, 역사적 사명을 그들의 ‘첨병’으로 축소시켜서는 아니 될 것이다. 그러나 현재 이러한 비성경적 교훈이 유포되어 한국교회 청년들의 의식 속에 뜬금없이 사대모화(事大慕華) 정신을 주입시키고 있다. 이러한 거짓 교훈에 성도들이 더 이상 오도(誤導)되지 않도록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성경을 바로 가르쳐 주어야 할 것이다.


  세계선교의 마지막 주자 코리아


  앞으로 통일의 새 날이 오면 우리나라에 전 세계가 주목하는 전무후무한 부흥의 역사가 있을 것이다. 아직 한국 교회에 본격적인 부흥은 오지 않았다. 장차 예루살렘 땅끝까지 열방을 태우는 부흥의 불길이 한반도에서 타오를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한국 교회는 마지막 때에 첨병 정도의 역할이 아니라 주력부대로서 세계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 대추수를 위해 사도적 권능으로 충만한 복음전도자들이 동방의 코리아에서 봇물 터지듯 열방으로 쏟아져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한국 교회는 마지막 세기에 예루살렘 땅 끝까지 복음 들고 달려가서 온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을 받게 할 것이다(사 46:10~13; 41:25~27; 52:7~10, 55:5, 계 7:1~8, 롬 10:12~15). 유대민족이 구원 받으면 예수님이 재림하신다. 바로 이것이 우리 겨레에게 주어진 구원사적 사명인 것이다. 즉 인류구원의 대업을 완수하여 다시 오실 주님의 길을 수축해야 할 사명이 욕단계 천손민족 우리 한국인에게 부여되어 있는 것이다.


  새벽이슬 같은 한국 교회 청년들이여! 이 위대한 비전을 가슴에 품어라! 예루살렘 땅 끝까지 열방을 치유하며 행진하는 영광의 그 날이 우리 겨레와 한국 교회 앞에 예비 되어 있다. 할렐루야!


  알이랑 고개를 넘어 예루살렘으로!

  복음의 마지막 주자 한국 교회여!

 

  


알이랑민족회복운동

유석근 목사

club.cyworld.com/alilang  

 

출처 : 알이랑 코리아 선교회 - 알이랑민족회복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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