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과 기독교의 영과 구원론
이동주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선교학과교수)
서론
성령은 신약과 구약에만 기록된 창조주 하나님 자신의 영으로써 기독교 밖의 세상에서는 받지도 못하고 그 영에 관해서 알지도 못하는 영이다(요 14:16-17).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신구약 성경에 약속하심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서 죄 용서함을 받은 사람들에게 보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행2:38).
그러나 한글번역 이슬람의 경전에도 “성령”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그러므로 첫째로 그 “성령”은 어떤 영인지, 기독교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탐구하고, 둘째로 꾸란에서 나오는 다른 영, 즉 “진”에 관해 조사하고, 참 하나님의 영을 명시함으로써 기독교인들과 무슬림들이 영적인 혼돈을 일으키지 않기를 희망한다. 꾸란에서 “성령” 또는 “가브리엘”을 의미하는 ru:ḥ는 아랍어로 인간의 영혼(nafs)과 교체할 수 있는 단어로 사용된다. 그러나 여기서 인간의 영에 관해서는 다루지 않고, 꾸란에서 가브리엘이라고 말하는 “성령”과, 또 다른 영인 진(Jinn)에 관해서만 다루기로 한다. 또 한가지 겸하여 살펴볼 일은 보혜사 성령을 왜곡한 “아흐마드”라는 개념을 통해서 발전한 현대이슬람의 마흐디운동의 영적 실제이다.
1. 꾸란의 “성령”
순결을 지킨 이므란의 딸 마리아가 있었노라. 그래서 하나님은 그녀의 몸에 그분의 영혼 을 불어넣었더니 그녀는 말씀과 계시의 진리를 정언하고 순종하는 자 중에 있었노라 (Su:ra 66:12)
순결을 지킨 이므란의 딸 마리아가 있었노라. 그래서 하나님은 그녀의 몸에 그분의 영혼 을 불어넣었더니 그녀는 말씀과 계시의 진리를 정언하고 순종하는 자 중에 있었노라 (Su:ra 66:12)
성경적 성령의 개념과는 달리 사용된 “성령”이라는 단어로는 알라의 한 피조물로 소개된 꾸란의 “성령”이 있다. 만일 알라 자신의 영이 있다면 그것은 아랍어로 al-ru:ḥ al-qudus, 또는 al-ru:ḥ al-ila:hiy(the divine spirit)라고 써야 한다. 그러나 꾸란에서 “성령”은 지브리일(가브리엘)이라는 알라의 피조물을 가르치고 있음으로, 성령은 아랍어로 관사가 없는 명사 ru:ḥ al-qudus, 즉 “거룩함의 영”(Geist des Heiligen)으로 호칭되었다. 성경에서 신적 본질을 가리키는 하나님의 영은 꾸란에서 많은 영들 가운데 하나인 피조물 적인 영으로 이해 된 것이다. 「성꾸란」은 ru:ḥ al-qudus를 가브리엘이라는 뜻에서 “성령”이라고 번역했다.
그러므로 위에서 인용한 본문에는 신적 본질을 가진 영(ru:ḥ)을 부정하고 “영혼”(soul)이라고 해석한 것을 볼 수 있다. 마리아의 몸에 알라가 한 영혼을 불어넣었다는 것이다. 사실상 아랍어 사전에는 ru:ḥ를 하나님 자신의 영이 아니라 1) 인간적 nafs(soul)와 동일시하고 있다. 2) ru:ḥ는 하나의 인격이고, 3) 비물질적 존재이며, 4) 법적 본질과 같은 “essence"이고, 5) 마음의 용기와 담력을 의미하기도 하고, 6) 인간의 기분(mood)이나 7) 인간의 정신적 상태(mental state)를 의미한다. 또한 8) 알콜을 말할 때도 사용되고, 9) 화학의 뜻과 연결하여 사용되기도 한다.
꾸란 15:29에는 아담에게 불어넣었다는 알라의 영이 있다: 알라는 아담을 창조하고 "그의 영"을(his spirit) 불어넣었다. 그러나 이곳에도 그 영은 “나의 영으로부터”(min ru:ḥiy)라는 전치사와 함께 쓰여진 표현이고, 알라 자신의 영이라는 말은 없다. Su:ra 38:71-72에도 알라가 흙으로 인간의 형상을 만들고 그 안에 “나의 영으로부터”(min al-ru:ḥi) 불어넣으리니...라고 말하고 있다. 「성꾸란」에 기록된 이 ru:ḥ는 여러 피조물 중에 한 영이다.
Su:ra 19:17에 알라는 마리아에게도 그의 영을 보냈다고 기록하였다(ru:ḥana: 우리의 영을). “우리의 영으로부터”(min ruhina)라는 구(句)의 영을 보낸 일인칭 복수는 Su:ra 21:91에서와 마찬가지로 알라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꾸란의 알라는 영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아담에게 불어넣은 ru:ḥ역시 하나의 창조물이며 아담에게 불어넣은 것과 같은 피조물 중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꾸란에서 의미하는 ru:ḥ란 구약에서 창조자의 영을 의미하는 Ruaha에서 따온 말이지만 꾸란에서는 가브리엘이나 인간의 영혼과 같은 피조물을 칭할 때 사용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와 같이 무함마드는 성령을 알지 못한 결과로 “성령”에 해당되지 않는 “ru:ḥ al-qudus”라는 애매 모호한 단어를 사용하였으며 알라의 영(ru:ḥ)을 인간의 영혼(soul)과 같은 것으로 간주함으로 성경에서 창조주의 영을 꾸란으로 옮겨간 후 한 피조물의 영으로 바꾸는 오류를 범하였다.
그러므로 위에서 인용한 본문에는 신적 본질을 가진 영(ru:ḥ)을 부정하고 “영혼”(soul)이라고 해석한 것을 볼 수 있다. 마리아의 몸에 알라가 한 영혼을 불어넣었다는 것이다. 사실상 아랍어 사전에는 ru:ḥ를 하나님 자신의 영이 아니라 1) 인간적 nafs(soul)와 동일시하고 있다. 2) ru:ḥ는 하나의 인격이고, 3) 비물질적 존재이며, 4) 법적 본질과 같은 “essence"이고, 5) 마음의 용기와 담력을 의미하기도 하고, 6) 인간의 기분(mood)이나 7) 인간의 정신적 상태(mental state)를 의미한다. 또한 8) 알콜을 말할 때도 사용되고, 9) 화학의 뜻과 연결하여 사용되기도 한다.
꾸란 15:29에는 아담에게 불어넣었다는 알라의 영이 있다: 알라는 아담을 창조하고 "그의 영"을(his spirit) 불어넣었다. 그러나 이곳에도 그 영은 “나의 영으로부터”(min ru:ḥiy)라는 전치사와 함께 쓰여진 표현이고, 알라 자신의 영이라는 말은 없다. Su:ra 38:71-72에도 알라가 흙으로 인간의 형상을 만들고 그 안에 “나의 영으로부터”(min al-ru:ḥi) 불어넣으리니...라고 말하고 있다. 「성꾸란」에 기록된 이 ru:ḥ는 여러 피조물 중에 한 영이다.
Su:ra 19:17에 알라는 마리아에게도 그의 영을 보냈다고 기록하였다(ru:ḥana: 우리의 영을). “우리의 영으로부터”(min ruhina)라는 구(句)의 영을 보낸 일인칭 복수는 Su:ra 21:91에서와 마찬가지로 알라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꾸란의 알라는 영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아담에게 불어넣은 ru:ḥ역시 하나의 창조물이며 아담에게 불어넣은 것과 같은 피조물 중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꾸란에서 의미하는 ru:ḥ란 구약에서 창조자의 영을 의미하는 Ruaha에서 따온 말이지만 꾸란에서는 가브리엘이나 인간의 영혼과 같은 피조물을 칭할 때 사용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와 같이 무함마드는 성령을 알지 못한 결과로 “성령”에 해당되지 않는 “ru:ḥ al-qudus”라는 애매 모호한 단어를 사용하였으며 알라의 영(ru:ḥ)을 인간의 영혼(soul)과 같은 것으로 간주함으로 성경에서 창조주의 영을 꾸란으로 옮겨간 후 한 피조물의 영으로 바꾸는 오류를 범하였다.
2. 불어넣다
위의 본문에서 “불어넣었다”는 말은 원래 창 2:7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셨다”는 성경적인 단어인데, 꾸란에서는 알라가 그 영을 마리아에게 불어넣은 것이 아니라 남성단수(fi:hi)에 불어넣은 것이다. 즉 알라일 수밖에 없는 일인칭 복수인 주체가 마리아의 자궁에 불어넣은 것이다. Su:ra 21:91에도 알라가 마리아에게 “성령을 불어넣었다”는 말이 있는데 「성꾸란」 그 각주에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통하여 그렇게 하였다”고 설명을 붙이고, Su:ra 66:12 본문 각주에서는 “하나님께서 가브리엘 천사를 인간의 형상으로 하여 보낸 후 가브리엘 천사로 하여금 혼을 불어 넣으라 명령하니 그 혼이 마리아의 자궁으로 들어가 예수를 잉태하게 되었다”고 주석하고 있다. 그러므로 숨을 불어넣은 주체는 문법상으로 “우리가 불어넣다”(nafaḳna:)라는 복수형 주체임으로 알라가 되고, 해석상으로는 가브리엘이 되는 모순을 나타내었다.
이러한 모순은 성령을 알지 못하는 무함마드가 하나님께서 생기(nshama)를 사람의 코에 “불어넣으셨다”는 성경 말씀을 그릇 인용하여, 알라가 ru:h를 마리아의 자궁에 “불어넣은” 것으로 왜곡되게 인용함으로써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무함마드는 이 영에 관해서 성령론적 관심이나 기독록적 관심으로 쓴 것이 아니고 다만 무슬림 아내들의 순결과 순종을 교육하기 위한 목적으로서 마리아의 순결의 결과가 얼마나 훌륭한 것인가를 설명한 것뿐이다.
무함마드는 Su:ra 16:102에서 ru:ḥ al-qudus를 “주님으로부터 진리의 말씀을 전한”영이고, Su:ra 5:110. 2:87, 253에서 알라가 이 영으로 예수를 강하게 하였다(ayyad)고 설명하였다. 이와 같이 이 영은 성경의 성령(al-ru:ḥ al-qudus)을 대치한 개념으로써 꾸란에서 특별히 예수와 마리아와 관련시켰다. 그러나 성경에서 성령은 하나님 자신의 영이고 인격인데 반하여 꾸란의 “성령”은 하나님의 영도 아니고 인격도 아니다.
위의 본문에서 “불어넣었다”는 말은 원래 창 2:7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셨다”는 성경적인 단어인데, 꾸란에서는 알라가 그 영을 마리아에게 불어넣은 것이 아니라 남성단수(fi:hi)에 불어넣은 것이다. 즉 알라일 수밖에 없는 일인칭 복수인 주체가 마리아의 자궁에 불어넣은 것이다. Su:ra 21:91에도 알라가 마리아에게 “성령을 불어넣었다”는 말이 있는데 「성꾸란」 그 각주에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통하여 그렇게 하였다”고 설명을 붙이고, Su:ra 66:12 본문 각주에서는 “하나님께서 가브리엘 천사를 인간의 형상으로 하여 보낸 후 가브리엘 천사로 하여금 혼을 불어 넣으라 명령하니 그 혼이 마리아의 자궁으로 들어가 예수를 잉태하게 되었다”고 주석하고 있다. 그러므로 숨을 불어넣은 주체는 문법상으로 “우리가 불어넣다”(nafaḳna:)라는 복수형 주체임으로 알라가 되고, 해석상으로는 가브리엘이 되는 모순을 나타내었다.
이러한 모순은 성령을 알지 못하는 무함마드가 하나님께서 생기(nshama)를 사람의 코에 “불어넣으셨다”는 성경 말씀을 그릇 인용하여, 알라가 ru:h를 마리아의 자궁에 “불어넣은” 것으로 왜곡되게 인용함으로써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무함마드는 이 영에 관해서 성령론적 관심이나 기독록적 관심으로 쓴 것이 아니고 다만 무슬림 아내들의 순결과 순종을 교육하기 위한 목적으로서 마리아의 순결의 결과가 얼마나 훌륭한 것인가를 설명한 것뿐이다.
무함마드는 Su:ra 16:102에서 ru:ḥ al-qudus를 “주님으로부터 진리의 말씀을 전한”영이고, Su:ra 5:110. 2:87, 253에서 알라가 이 영으로 예수를 강하게 하였다(ayyad)고 설명하였다. 이와 같이 이 영은 성경의 성령(al-ru:ḥ al-qudus)을 대치한 개념으로써 꾸란에서 특별히 예수와 마리아와 관련시켰다. 그러나 성경에서 성령은 하나님 자신의 영이고 인격인데 반하여 꾸란의 “성령”은 하나님의 영도 아니고 인격도 아니다.
3. 가브리엘
성경에서 가브리엘이 처음 나타났을 때 자기의 이름을 가브리엘이라고 소개했던 바(눅 1:19)와는 달리, 무함마드의 “계시”와 관련된 영은 메카에서 12년 동안 한번도 자신의 이름을 언급한 적이 없다. 다만 주석가들이 이름 없는 그 영을 각주에 가브리엘이라고 주석을 하였을 뿐이다. 가브리엘이라는 이름은 모두 메디나에서 받은 “계시” 중 2장과 66장 두 장에만 나타난다(Su:ra 2:97-98, 66:4). 메카에서 12년 동안 무함마드에게 계시한 영은 이름 없는 “그 영”(Su:ra 97:4) 또는 “우리의 영”(Su:ra 19:16-22)이었다. 그러나 초기 계시에 속하는 Su:ra 97:4의 “al-ru:ḥ”(그 영)를 「성꾸란」은 “가브리엘 천사”로 그릇 번역하였다. 꾸란에서는 첫 “계시”로부터 12년간 그 영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있다. 그런데 성경에서 가브리엘 천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계시하였는데(눅 1:35) 반하여, 꾸란에서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계시”한 것이다(Su:ra 4:171; 5:75; 19:88-93). 그러면 무함마드에게 나타나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반성경적이고 반기독적인 “계시”를 준(Su:ra 3:54-55; 4:157.171; 5:75.116-117) 이 무명의 영은 과연 어떤 영인가?
무함마드가 소위 계시를 받던 일은 다음과 같다. 권력과 향락에 빠진 쿠라이쉬족에 대한 회의를 느낀 무함마드는 40세가 되던 610년 라마단월에 메카에서 3마일 떨어진 광야에 있는 히라산 동굴에 들어가 명상을 하였다. 그때의 상황을 알 부카리와 사히흐 무슬림은 무함마드의 애처 아이샤로부터 전승된 무함마드의 신비체험을 다음과 같이 그들의 하디스에 전하고 있다: 무함마드는 히라(Ḥi:ra)동굴에서 여러 날 동안 알라를 경배하였다. 그때의 경험을 무함마드는 그의 첫째 부인 카디자에게 설명하면서 그는 한 “천사”(the angel)를 보게되었다고 하였다. 그는 그에게 다가와서 “읽어라”라고 명하였다. 그래서 그는 “나는 읽을 줄을 모릅니다”라고 대답하였더니, 그 천사는 그를 강제로 잡고(caught me forcefully) 눌러서 그를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게 하였다. 그런 다음 그는 그를 떼어놓고 재차 읽으라고 하였다. 이런 사태가 똑 같이 세 번 반복된 다음에 그 “천사”는 “읽어라! 너의 주의 이름으로! 그는 응혈(clot)로 사람을 창조하였느니라”고 말하였다. 이 “계시” 내용이 Su:ra 96장에 기록되었다. 무함마드는 마음에 큰 타격을 입고 그의 첫 부인 카디자에게 돌아와 “나를 덮어주시오! 나를 덮어주시오! 나에게 일어날 일이 무섭소!”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그에게서 그 공포가 다 지나기까지 그를 덮어 주었다.
성경에서 가브리엘이 처음 나타났을 때 자기의 이름을 가브리엘이라고 소개했던 바(눅 1:19)와는 달리, 무함마드의 “계시”와 관련된 영은 메카에서 12년 동안 한번도 자신의 이름을 언급한 적이 없다. 다만 주석가들이 이름 없는 그 영을 각주에 가브리엘이라고 주석을 하였을 뿐이다. 가브리엘이라는 이름은 모두 메디나에서 받은 “계시” 중 2장과 66장 두 장에만 나타난다(Su:ra 2:97-98, 66:4). 메카에서 12년 동안 무함마드에게 계시한 영은 이름 없는 “그 영”(Su:ra 97:4) 또는 “우리의 영”(Su:ra 19:16-22)이었다. 그러나 초기 계시에 속하는 Su:ra 97:4의 “al-ru:ḥ”(그 영)를 「성꾸란」은 “가브리엘 천사”로 그릇 번역하였다. 꾸란에서는 첫 “계시”로부터 12년간 그 영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있다. 그런데 성경에서 가브리엘 천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계시하였는데(눅 1:35) 반하여, 꾸란에서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계시”한 것이다(Su:ra 4:171; 5:75; 19:88-93). 그러면 무함마드에게 나타나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반성경적이고 반기독적인 “계시”를 준(Su:ra 3:54-55; 4:157.171; 5:75.116-117) 이 무명의 영은 과연 어떤 영인가?
무함마드가 소위 계시를 받던 일은 다음과 같다. 권력과 향락에 빠진 쿠라이쉬족에 대한 회의를 느낀 무함마드는 40세가 되던 610년 라마단월에 메카에서 3마일 떨어진 광야에 있는 히라산 동굴에 들어가 명상을 하였다. 그때의 상황을 알 부카리와 사히흐 무슬림은 무함마드의 애처 아이샤로부터 전승된 무함마드의 신비체험을 다음과 같이 그들의 하디스에 전하고 있다: 무함마드는 히라(Ḥi:ra)동굴에서 여러 날 동안 알라를 경배하였다. 그때의 경험을 무함마드는 그의 첫째 부인 카디자에게 설명하면서 그는 한 “천사”(the angel)를 보게되었다고 하였다. 그는 그에게 다가와서 “읽어라”라고 명하였다. 그래서 그는 “나는 읽을 줄을 모릅니다”라고 대답하였더니, 그 천사는 그를 강제로 잡고(caught me forcefully) 눌러서 그를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게 하였다. 그런 다음 그는 그를 떼어놓고 재차 읽으라고 하였다. 이런 사태가 똑 같이 세 번 반복된 다음에 그 “천사”는 “읽어라! 너의 주의 이름으로! 그는 응혈(clot)로 사람을 창조하였느니라”고 말하였다. 이 “계시” 내용이 Su:ra 96장에 기록되었다. 무함마드는 마음에 큰 타격을 입고 그의 첫 부인 카디자에게 돌아와 “나를 덮어주시오! 나를 덮어주시오! 나에게 일어날 일이 무섭소!”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그에게서 그 공포가 다 지나기까지 그를 덮어 주었다.
또 무함마드가 계시 받던 장면을 본 이븐 한발(Ibn Hanbal)은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계시 받을 때 그는 낙타새끼 같이 색색거렸고 땀이 이마에 맺히고 가끔 그의 입에서 거 품이 나오고 의식불명처럼 땅에 누워 있었다.
무슬림 하디스는 또 자비르(Ja:bir b. Abdulla:h)의 구전을 전하며 “It was terror-stricken till I fell on the ground"라고 하며 그 영을 만났던 무함마드의 고통을 서술하고 있다. 사실상 이러한 현상은 무속문화나 정령숭배 문화권에서 무당들이 겪는 신비체험과 병행되는 것이다.
서구 학자들은 그의 인격에 관하여 기만자, 간질환자, 히스테리환자, 도취자, 선지자라는 등의 여러 견해를 가지고있다. 무당들의 입무 과정에서 겪는 무병증세들은 M. 엘리아데나 유동식, 최길성 같은 무교 연구가들이 채집한 책들 속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입무 과정에서 무당들에게 나타나는 무병과 의례행사(굿)에서 나타나는 무당의 접신 형태에는 두 가지의 신비현상이 나타난다. 하나는 엘리아데(Mircea Eliade)가 북부아시아를 중심으로 세계 도처의 샤머니즘을 연구하며 수집한 신비체험으로서 사람의 영혼이 타계하게 되는 것과, 또 하나는 한국 무당들이 흔히 체험하는 강신 현상이다.
M.Eliade와 마찬가지로 유동식박사와 최길성박사 같은 무교연구가들은 무당이 되는 첫 단계가 그 소명을 증명하는 무병임을 밝혔다. 이 병의 증세는 Eliade 가 지적한 것처럼 정신병이나 히스테리 내지 간질병적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 무병이 정신병이나 간질병과 다른 점은 굿을 하고 무업을 시작하면 그 병이 치료되는 점이며, 또 계획적으로 실신 상태 내지 접신 상태에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이다.
Eliade는 샤만의 공통적인 성격을 네 가지로 정의했다. : (1)긴 혼수 상태 (2) 반 신적 존재와의 만남 (3) 영들에 의한 해부 (4)지옥 또는 지하계의 여행이다. 양자간의 차이점으로는 시베리아에서는 영들이 무당을 택하고,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사람의 의지적인 선택에 의해 주의가 된다는 것이다.
무당들의 위와 같은 신비체험은 공포와 혼돈과 함께 겪는 죽음의 상태와 재생의 체험이다. 신과의 교제가 그리스도인들이 체험하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롬 14:17) 이 아니라, 귀신에게 사로잡히고 짓밟히는 무서운 고통이다. 무당은 이러한 무병을 통해서 성립되며 귀신이 내려 강요함으로 두려워서 무당이 되는 것이다.
영적인 역사가 어디로부터인지 즉 귀신의 역사인지 성령의 역사인지를 구별하지 못하는 체험주의자들의 위험성은 대단히 큰 것이다.
무함마드 자신도 처음에는 이 방문자를 악령(Jinn)으로 생각하였다.
한국이슬람교 중앙연합회에서 발행한 「하디스」 선집에서는 무함마드의 영적 경험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인기척 없는 정막한 사막의 동굴로 예고 없이 나타났다가 돌연히 사라져버린 이 방문자는 악령의 통념적인 관념과 혼합이 되어 그를 경악시켰고, 그런가 하면 여러 가지 형상으로 변모해서 사생활 을 해롭게 간섭하는 정신상태에 사로잡히게 했다”
그러나 무함마드의 이 신비체험에 관해서 카디자는:
“나의 고귀한 분, 염려 마시고 기뻐하십시오. 이 일은 신께서 당신을 포기하시고 욕을 보게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좋은 분이고 친절하고 정직한 분이시니까. 당신은 지나가는 낯선 사람에게 후하고 가 난한 사람과 천한 사람을 도우시고 의로운 행동을 지지하는 분이시니까요”라고하며 무함마드에게 소명의식(Sendungsbewuβtsein)을 심어주었다. 그러나 카디자는 “계시”체험자도 아니고, 그 계시자를 이전에 본 일도 없고 들은 일도 없었다. 그는 예언자도 아니었고 성령 받은 자도 아니었다. 물론 성경도 읽어본 일이 없었다. 그 때 아랍어로 번역된 성경이 없었기 때문이다. 무함마드가 스스로가 자기가 만난 영을 “진”이라고 느끼고 있을 때, 카디자는 그것을 부정하고, 스스로 그것을 비판 할 아무런 척도도 가지고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무함마드가 만난 영을 참 하나님이라고 판단해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원래 문맹인 무함마드는 영 분별에 관한 어떤 지식도 없이 아내의 말을 그대로 진리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더욱이 당시 기독교인이었던 카디자의 외사촌 나우팔(Nawfal)의 아들 와라까(Waraqa)는 무함마드에게 나타났던 그 영이 “하나님이 모세(Mu:sa:)에게 내려보냈던 천사라고”까지 하였던 것이다.
무함마드가 부름 받든 모습은 이와 같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이나 가브리엘 천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영마” 또는 무함마드의 첫 생각과 같이 진의 일종이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무함마드가 경험한 무서운 고통과는 전혀 다른 체험을 한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과(요 3:16; 1요4:10) 평강과 희락을 체험하고(롬14:17) 하나님의 거룩한 새사람으로 변화를 받아 성령의 열매인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맺는다(갈 5:22).
4. 진
꾸란에는 알라의 창조물이 천사들과 인간과 그 외에 알라가 아담보다 더 먼저 창조한 또 하나의 영물인 “진”이 있다. 「성꾸란」은 진을 Su:ra 15:26-27과 같이 “영마”로 번역하였고 이븐 히샴은 이를 “악한 영들”(böse Geister)이라고 하였다. 무슬림들은 천사들은 빛으로부터, 진들은 무연의 불로부터(Su:ra, 7:12, 15:26-27, 55:15), 인간은 검고 묽은 흙으로부터(clay from black mud) 창조되었다고 한다. 꾸란은 알라가 인간과 진들을 창조한 목적을 알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고 한다(Su:ra 51:56). 그런데도 불구하고 진들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오히려 불지옥으로 들어간다(Su:ra 7:38). 진들은 하늘에 오르려고 시도해도 “힘센 수호자들과 빛나는 별들로 가득 차서” 들어가지 못한다. 그래도 그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늘의 소식을 엿듣는다(Su:ra 72:8-9). 진들은 그 엿들은 소식을 마술사들에게 일러준다고 한다.
무함마드는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진들과 접촉이 있었다. Su:ra 46:29-30에는 알라가 진들을 무함마드에게 보내어 꾸란낭송을 듣게 하였고 그 진들은 그 낭송을 듣고 곧 무슬림들이 되어 열심히 이슬람을 전파하였다.
진의 종류는 여럿으로 구분된다. 첫째 인간과 더불어 사는 아미르(Amir), 둘째 악의가 있는 사탄(Shaytan), 셋째 사탄보다 더 강하고 더 능력이 있는 이프릿(Ifrit)이 있다. 무스타파 아쇼르(Mustafa Ashour)는 진의 유형을 1) 공중을 나는 형, 2) 뱀이나 전갈 형, 한 장소에 근거지를 두고 여행 다니는 형으로 분류한다. 그는 진들 가운데는 몸이 있는 형과 몸이 없는 형이 있고, 소나 말이나 낙타, 양, 새의 형상도 있고,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힘이 있고 사람의 마음으로 들어 올 수 있다고 한다. 진들은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고 미치게 하고 마술능력을 행하게 한다. 꾸라이쉬 부족들은 진이 인간의 몸 속으로 들어와서 인간을 통해 말한다는 “예언자”신앙이 있다. 진을 만난 사람들은 점쟁이나 예언자(Wahrsager)가 되는 고로 메카 주민들은 진을 인간의 동료(Sahib), 동반자(Tabi), 예언자(Rai, Rii)라고도 하였다. 진 신앙에 젖은 메카 주민들이 무함마드를 미친 사람이라고 말하였다(Su:ra 23:70).
진 신앙은 광야 베두인들의 신앙으로써 자연신 신앙이다. “무지시대”(자힐리야 시대) 무함마드의 조상들은 주물숭배, 영들 숭배, 인격신, 최고신 숭배, 비 인격신으로는 현재도 카아바신전에 남아 있는 검은 돌에 대한 신앙이 있다. 이 검은 돌은 신의 거주지로써 그들은 이 돌에 입 맞추고 예배를 시작하였으며, 그 신전을 돌았다. 그 이유는 그곳을 둘러쌈으로써 그 안에 있는 힘을 그들에게 옮겨오기 위함이었다. 다른 달에는 메카근처 아라파트(Arafat)를 순례하였다. 그들은 마법적 행위로 돌무더기에 돌을 던지고 미나(Misa)에서 희생제를 지내고 머리를 자르고 순례 복을 벗고 다시 세속 옷으로 가라 입었다.
카아바 신전에 있었던 360종의 베두인의 신들 가운데는 후발(Hubal)이라는 남신과, 알-우짜(Uzza), 알-랏(Lat), 마나트(Manat)라는 여신들도 있었다. 후발은 자힐리야시대에 하나의 목우상으로써 “카이바의 주”신(Herr der Kaaba)이었고 알라와 동일하였다. 알-웃짜는 아랍인들이 섬기던 하나의 아카시아나무이며 이와 더불어 그들은 하나의 성석과 희생제의 피를 위해서 지은 동굴 속에 있는 성전을 숭배하였다. 그들은 알라의 딸이라는 알-웃짜를 여신으로 숭배하였고, 바빌론의 영향을 받아 일월성신을 숭배했던 예멘에서는 그것을 새벽별로도 숭배하였고 그에게 소년 소녀를 제사하였다. 자힐리야시대에 섬겼던 인격신 중에는 인간 같은 형상을 한 돌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는 마나트라는 운명의 여신, 특히 죽음의 여신으로 숭배하였고, 돌무더기 알-랏을 알라의 부인이며, 모신 또는 여주인 또는 해신이었던 알-랍바(al-Rabba)로도 섬겼고, 광야에 있는 돌덩어리 싸드(Sad)를 행복의 신으로 숭배하였다. 이 동상들을 무함마드는 메카를 점령하면서 깨뜨려버렸다. 그런데 꾸란에는 “사탄의 구절”(Satanic Verses)이라고 하는 Su:ra 53:19-22이 삽입되어 있다:
실로 너희는 라트와 웃자를 보았으며 세 번째의 우상 마나트를 보았느뇨 너희에게는 남 자가 있고 하나님에게는 여자가 있단 말이뇨 실로 이것은 가장 공평치 못한 분배라.
이 구절은 특별히 여신들을 믿던 메카주민들이 좋아한 구절이다. 이 구절의 의미는 무함마드가 우상들은 깨뜨렸으나 메카주민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이 신들의 이름만이라도 꾸란에 첨가시킴으로써 이슬람의 신앙을 잠시 양보한 것이라고 풀이되고 있다. 그러나 사탄의 구절이 꾸란에 삽입된 것은 꾸란의 신뢰성에 큰 타격이 되는 것이다. 무함마드가 분별하지 못했던 이 구절을 살람 루쉬디(Salam Rushdi)가 “사탄의 구절”이라고 칭하였다가 사형언도를 받았다.
그러나 Su:ra 22:52-53은:
하나님이 그대 이전에 선지자나 예언자를 보냈을 때마다 사탄은 그의 욕망에 유혹을 던 졌으되 하나님은 사탄이 던진 유혹들을 제거하신 후 그 분의 말씀을 확립하시니 하나님 은 아심과 지혜로 충만하심이라고 함으로써 위의 구절을 수정하고 알라는 사탄 절에 대치한 더 좋은 구절을 계시한다는 것이다.
위와 같은 경우에서 발견할 수 있듯이 무함마드는 사탄의 유혹과 영마의 유혹을 두려워하며 살았다:
창조된 사악한 것들의 재앙으로부터 보호를 구하며 어둠이 짙어 가는 밤의 재앙으로부터 보호를 구하며 시기하는 자의 재앙으로부터 보호를 구하노라(Su:ra 113:2-5)
인간의 흉중에 도사리는 사탄의 재앙을 인간의 가슴속에서 유혹하는 사탄의 유혹을 영 마와 인간의 유혹으로부터 보호를 구하나이다(Su:ra 114:4-6)
Su:ra 33:56에 “실로 하나님과 천사들이 예언자를 축복하여 주셨으니 믿는 자들이여 그분께 축복을 드리고 정중한 인사를 하라”고 이른 바와 같이, 모든 무슬림들은 죽은 무함마드에게 평화를 빌어주워야 한다. 모든 “경건한 무슬림”의 서적에서 우리는 무함마드의 이름이나 선지자라는 칭호만 나오면 그 때마다 죽은 무함마드에게 반복적으로 “May the blessing and peace of Allah be upon him”이라고 축복하는 것을 읽을 수 있다.
왜 무함마드는 진들을 두려워해야 했고, 평화를 갈망했을까? 그것은 창 3:10의 말씀과 같이 그의 범죄 때문이다. 무함마드는 그 자신의 죄악 때문에 알라에게 기도해야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 외에는 신이 없음을 알라 그리고 그대의 잘못과 믿는 남성과 믿는 여성 의 과오를 위해 구하라...(Su:ra 47:19)
그것은 하나님께서 지나간 그대의 과오를 용서하고 그대에게 그분의 은혜를 충만케 하며 그대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시며(Su:ra 48:2)
위와 병행되게 Adel-Theodor Khoury의 저서 Gebete des Islams(이슬람의 기도들)에는 무함마드가 알라에게 자신의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많은 기도문들이 수집 되 있다. 무함마드는 죄인이었고 진과 사탄을 두려워한 평범한 베두인이었다.
베두인들과 무슬림들의 공통점은 진들과 사탄을 두려워하는 점이다. 그들은 화장실에 가면서도 “남녀 사탄으로부터 알라에게 피합니다.”라고 말해야 하고, 잠자러 갈 때도 알라의 보호를 구한다. 이들은 진과 인간의 “악한 눈”으로부터 피해야 한다. 또 사탄은 홀로 있는 사람과 함께 하기 때문에 사람은 늘 공동체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 무슬림들이 강력한 공동체를 형성해야하는 이유중의 하나가 바로 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무한한 사랑과 기쁨과 평화의 공동체에 관해서 전혀 알지 못하며 죄악과 영마의 속박에서 놓여나지 못하고 두려워 떠는 이 무슬림들의 공동체 속에 속히 복음을 전해야 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슬람교의 문제는 이러한 두려움 때문만이 아니라 Su:ra 19:71-72의 진술과 같이 모든 무슬림들이 지옥에 가도록 확정되었다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 거기에 이르지 아니할 자 아무도 없나니 그것은 너희가 피할 수 없는 주님 의 단호한 결정이시라 그러나 하나님께서 악을 경계하는 자들을 구제할 것이되 사악한 자들은 그 안에서 무릎을 꿇게 하리라.
이 구절은 주석 없이 문맥 속에서 읽으면 모든 무슬림들이 지옥에 가기로 확정된 것이로 읽혀진다. 그러나 주해는 “너희 가운데”를 “불신자들 가운데”라고 하여 불지옥이 무슬림에게 해당되지 않게 하였다.
5. 이블리스
5. 이블리스
꾸란에서 이블리스(Iblis)는 성경의 사탄과 비슷한 성격의 영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과 같이 타락한 천사가 아니라 무연의 불로 만들어진 일종의 진(영마)이다. 꾸란은 이블리스가 사탄이 된 이유를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Su:ra 2:34과 7:11-18, 15:27-33, 18:50, 38:76-85에 기록된 바와 같이 알라가 천사들에게 “내가 형상을 만들어 그 안에 내 영혼을 불어넣을 때 너희가 그에게 부복하라”(Su:ra 15:29)고 명하였다. 그래서 모든 천사들이 아담에게 부복하였는데 이블리스만 거절을 하였다. 이 이유는 그가 불로 창조된 진이기에 진흙으로 창조된 인간에게 부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알라는 이블리스를 불지옥에 들어가게 하였다. 그러나 이블리스의 유예신청에 알라는 그의 형 집행을 심판의 날까지 유예해 주었고, 이때로부터 이블리스는 모든 인간을 유혹하고 엿보고 속삭인다(Su:ra 7:27). 이와 같이 꾸란의 사탄은 타락한 천사가 아니라 타락한 진이다.
무슬림들은 이블리스가 독사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그의 보좌는 바다 위에 있고, 그는 한 짝의 샌달을 신고 저녁에 활동한다고 믿고 있다. 그러므로 무슬림들은 저녁에 아이들을 집으로 불러들이고 문을 닫는다. 또 무슬림들은 사탄이 인간의 몸을 통과 할 수 있음으로 인간의 마음 속에 들어가서 속삭이고, 인간이 잠 잘 때 꿈에 보이고, 잠자는 동안에 사람의 머리를 묶는다고 믿는다. 그러나 깨어 있는 사람과 우두와 기도를 하는 사람은 알라의 보호를 받는다. 사탄은 모든 일에 현재하기 때문에 부부관계를 할 때에도 남편은 “알라의 이름으로”라고 말해야 한다. 또 사탄은 아기가 태어날 때도 그 자리에 현재하여 모든 아기에게 상처를 준다고 한다. 그러나 성모 마리아와 그의 아들에게는 예외이다. 흥미로운 점은 사탄은 왼손으로 먹고 마신다는 것이다. 한국인들도 귀신은 왼손으로 식사를 한다고 믿어서 제사지낼 때 수저를 왼쪽에 놓는 점이 아랍인들의 사탄숭배와 병행된다.
6. 성령과 아흐마드
위와 같이 “알라의 영혼”이 아담에게 들어갔다는 이유로 이로 인해 이슬람 수피들의 범신론이 부추겨 졌다. 이슬람 수피(ṣu:fi:)들의 개념 중에는 알라가 인간에게 불어넣은 영을 꾸란의 묘사와는 달리 “영”이라는 명사 앞에 관사를 붙여서 “ar-ru:ḥ al-qudus" 또는 “ar-ru:ḥ al-ila:hiy"라 칭하고 이를 “성령” 또는 “창조자의 영”으로 본다. 그리고 일부 수피들은 알라가 이 영을 인간에게 불어넣었음으로 인간의 영을 알라의 영과 동일시하고, 특히 무함마드의 영과 같다고 한다.
페르샤의 한 금욕주의자 알 비스타미(al-Bistami -875)는 자신의 마음을 비움(Entwerden)으로써 신과의 일치를 추구하였다. 그는 소위 “범신론적 신비주의”자 (pantheistischer Mystiker)로써 “나는 진리다; 나는 신적 경배를 통해서 숭배된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하나님과의 신비적인 일치를 주장하였던 동시대적인 신비주의자 알 할라지(al-Halladj -922) 역시 백성들로부터 성인으로 숭배를 받던 한 “범신론적 일원론자”(pantheistischer Monismus)다. 오랜 수련 끝에 그는 “하나님”에게 “나는 당신입니다”(Ich bin du)라고 말함으로써 그는 “하나님”과 하나됨을 경험하였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범종교적인 신비주의는 신과의 합일 내지 신의 사랑과의 합일을 추구하고 신적인 대상에게 전폭적으로 자신을 헌신함으로써 내적인 평화를 경험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이슬람 신비주의 역시 이러한 범주에 속하여, 인간과 접촉 가능성이 없는 초월자 알라에 대한 영적인 갈증을 해갈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슬람 신비주의의 목적은 “알라의 영혼”(divine soul)과 철저히 동일시하고 알라와 절대적으로 하나(absolute oneness)가 되는 것이다. 결국 “I am not, god is"라는 “divine soul”을 실현하는 것이다. Islamic Surfism이라는 책을 쓴 와히드 바크쉬 랍바니(Wahid Bakhsh Rabbani)는 존재의 유일성(oneness of being)을 주장한다. 그의 “존재의 유일성”이란 온 우주가 신 안에 있다는 뜻이며 그가 없이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신의 본질이 우주에 표현되었다는 뜻이다. 그것은 바로 온 우주가 신적 존재(god's being)라는 말이다. 그는 이러한 그의 사상을 “pure islamic pantheism and pure islamic monotheism"이라고 칭한다. 신은 어디나 계시고 오직 하나이며, 그 외에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이 사실을 실현하는 방법으로는 “알라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는 고백을 하루에 300번, 3000번, 6000번, 12000번, 70000번까지 반복적으로 고백함으로써 알라에게 접근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비주의는 인도 및 파키스탄의 “마흐디운동”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파키스탄의 아흐마디야(Aḥmadi:ya) 운동은 이슬람에 한 약속된 메시아가 있다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마흐디”(mahdi)라는 것이다. 파키스탄에서 나타난 마흐디란 미래적이고 종말적인 메시아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 나타나는 한 선생을 말한다. 그 첫 마흐디가 인도 태생으로 하즈라 미르자 굴람 아흐마드(Hazrat Mirza Ghulam Ahmad 1835-1908)였다. 그는 펀잡 지방에서 신적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고 자칭 마흐디라고 하였다. 그 추종자들은 그를 무함마드의 형상으로 이해하였다. 그는 알라의 계시가 무함마드 이후에 불가능하다고 하지 말 것을 주장하면서, 무함마드를 “마지막 율법계시자”로, 자신을 그 주어진 율법을 오염으로부터 정화하기 위해서 봉사하는 “선지자”로 칭하였다. 그는 꾸란을 일혹 일점도 달라질 수 없는 불변의 진리고 믿고, 이 땅 위에 오직 하나의 세계종교인 이슬람만이 존재하는 유토피아가 이루어질 것을 목표로 하였다. 그의 기독론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내려와서 부활절 이후에 스리나가(카쉬미르)로 가서 죽었다고 하고 그의 무덤이 오늘까지 그곳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 뒤를 이은 하즈라 알-하즈 마우비 두르-욷-딘(Harzat Al-Haj Mauvi Dur-ud-Din 1914)은 자신을 첫 번째 칼리프라 하였고, 그 뒤를 이은 칼리프들에 의해서 아흐마디야 이슬람은 학교와 병원선교를 통해 전 세계로 확대되어 나가면서 꾸란은 100개의 언어로 그 의미가 번역되었다.
그 밖의 마흐디 운동으로는 스스로를 문(ba:b)이며 “하나님의 숨의 거울”이라고 주장하고 그에게 Mahdi의 영과 선지자의 영이 임했다고 주장하던 페르샤인 미즈라 알리 마함메스(Mirza Ali Mahammes, 1821-1850)의 Babismus와, 스스로를 알라의 유출 내지 “알라의 광채"(Beha Allah)라 하고 모든 종교들이 희망하던 마흐디들(재림 그리스도, 크리슈나, 이맘 후세인의 출현)의 성취라고 주장하던 테헤란 출신의 미즈라 후세인 알리 누리(Mirza Hussein Ali Nuri, 1817-1892)의 Behaismus가 있다.
이 아흐마디야 운동들은 근본 꾸란이 그리스도를 하나의 피조물이며 선지자 중의 하나로 끌어내린 다음에, 무함마드 자신을 ”찬양 받을 자“의 위치에 올려놓은 데서 시작되었다. Su:ra 61:6은 다음과 같다.
마리아의 아들 예수가 이스라엘 자손들이여 실로 나는 너희에게 보내어진 선지자로써 내 앞에 온 구약과 내 후에 올 아흐맏이란 이름을 가진 한 선지자의 복음을 확증하노라.
아흐마디야 무슬림공동체의 제 4대 칼리파인 Hazrat Mirza Tahir Ahmed에 의해서 출판된 Der Heilige Qur-an에는 위의 절 “아흐마드”에 관한 각주가 있다. 그 내용은 아흐마드가 성경의 보혜사(Paraklet)와 동일하고, 그것은 무함마드가 온다는 뜻이라고 한다. Su:ra 7:157의 각주 157-1)에는 신 18:15의 “나와 같은 선지자”와, 요 14:16의 “또 다른 보혜사”가 바로 무함마드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전형적인 현대 기독교 이단과 병행된다. 이 아흐마드 예언은 동시에 무함마드의 대리인이 아흐마드의 이름으로 올 것에 대한 예언이라고도 하여 이슬람교의 마흐디 운동인 아흐마디야 운동(Ahmadiyya-Bewegung)을 부추긴 것이다. Su:ra 3:81의 주 81-1에는 신구약 성경에 무함마드가 올 것을 예언해 놓았다고 하고, 그 근거를 역시 신명기 18:18절과 요14:-16;에 두었다. 무슬림들은 요한복음의 보혜사 성령 “파라클레토스”(παρακλήτος)가 본래는 페리클뤼토스(περικλύτος, 찬양 받을 자) 즉 아흐마드인데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왜곡하여 무함마드에 관한 예언을 성경에서 지웠다는 것이며, 그들은 아흐마드를 무함마드라 하고 “찬양 받을자”(Der Gepriesene)로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무함마드가 출생하기 600년 전에 이미 모음이 찍혀 기록된 그리스어 파라클레토스(παρακλήτος)가 어떻게 600년 후에 모음이 안 찍힌 아랍어 꾸란에서 모음변경이 되는가? 그뿐 아니라 기독교 삼위일체 하나님의 성령의 위를 마리아로 대치해 놓은 꾸란이 소개하는 기독교의 “삼위일체”는 어디에서 구한 3신론이며(Su:ra 5:116), 그리고 또 성령을 가브리엘 천사로 대치히여 기독교를 거짓되게 선전하여, 온 인류의 1/5이나 되는 사람들을 속여서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한 꾸란의 거짓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
7. 성령과 구원
꾸란은 Su:ra 19:20-21절에서 동정녀 탄생을 말하면서도 결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긍정하지 않는다. 또한 Su:ra 4:157-158은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부인하면서 그리스도의 승천을 주장한다:
마리아의 이들이여 하나님의 선지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살해하였도다 라고 그들이 말하도다. 그러나 그들은 그를 살해치 아니하였고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했으며 그와 같은 형상을 만들었을 뿐이었느니라. 이에 의견을 달리하는 자들은 의심이며 그들에게 지식이 없음이며 단지 추측을 따르는 것이거늘 그들은 그를 살해하지 아니하였도다. 하나님께서 그 (예수)를 오르게 하였으니 하나님은 권능과 지혜로 충만하심이니라.
이는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십자가와 부활을 부정하여 기독교 복음의 핵심을 분쇄한 구절이다.
이슬람교는 이와 같이 꾸란을 통하여 의도적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을 부인하고 속죄행위를 부정하는 전형적인 기독교이단 형태를 띄고 있다.
꾸란은 그리스도의 속죄행위 대신에 인간의 속죄행위를 진술하였다. 그 속죄란 Su:ra 5:92에 기록된 바와 같이 “알라의 언약”이라 하여, 10명의 불쌍한 자에게 음식대접을 하거나 옷을 입혀주고 노예를 해방시켜 주거나 3일간 단식함으로 속죄함을 받는다거나, Su:ra 5:98과 같이 고의적인 짐승 살해 죄에 대한 속죄로서 자기 가축을 잡아 카아바 신전에 제물로 바쳐 굶주린 사람들을 배불려 주고 단식으로 속죄하면 알라가 “그 이전의 모든 죄를 용서해 준다"고 한다. Su:ra 2:196에도 성지순례를 할 수 없을 때 이와 비슷한 보상법에 관해 기록하고 있다. 3일간 단식을 하거나 60명의 불쌍한 자들을 배불리 먹이거나 양 한 마리를 잡으면 된다. 최영길은 Su:ra 2:271에서 남몰래 베푸는 자선이 죄를 ”속죄“해 준다고 번역하였다. 그러나 영어 꾸란은 It will remove from you some of your evil이라 하였고, 독일어도 마찬가지로 Er wird eurer Sünden von euch hinwegnehmen이라 하여, 속죄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옮겨 주거나 없애주는 뜻을 의미하며, 그 “속죄”의 방법은 인간 스스로가 자신의 죄 값을 보상하는 방법이다.
무함마드의 생업이 상업이었던 것과 병행하여 이슬람의 구원도 지불과 보상이라는 상업적 원리에 따라 설명된다. 보상은 인간의 선행에 갑절(Su:ra 4:40) 또는 10배의 배상으로, 악에도 그와 같은 비율로 보상된다(Su:ra 6:60). 그러므로 알라의 구원을 받으려면 선행을 그에게 지불해야한다. 선을 행함으로써 악행을 제거한다는 원리이며(Su:ra 11:114), 선행에 대한 보상으로 잘못을 용서해준다는 것이다(Su:ra 7:161). 무슬림들은 기본실천사항 5주(五柱)를 행한다. 하디스 학자 알-부카리(al-Bukhari, d. 870)와 무슬림(Muslim, d. 875)은 공동체 기도(금요예배)가 개인기도보다 27배나 더 좋다고 주장하고, 결혼한 사람이 두 번(기도의식의 통일체) 절하는 것이 독신이 70번 절하는 것이나 오랜 금식보다 알라의 마음에 더 든다고 한다. 꾸란에도 알라는 믿고 선을 행하고 예배하고 이슬람 세를 바치는 사람에게 보상해 준다고 기록하고 있다(Su:ra 2:277). 꾸란 35:29에는 알게 모르게 자선을 베푼 자들은 불멸의 이익을 얻는다고 기록되었는데 이 “이익”은 무역, 거래, 상업과 같은 뜻이다. 무슬림의 선행은 알라와의 상업행위이다. 알라는 심판의 날에 겨자씨 만한 무게까지도 저울에 달아 계산한다고 한다(Su:ra 21"47). “이사”의 어머니 마리아는 모스크에 가서 바른 기도방향(mihrab)으로 기도했기 때문에 그 대가로 천사로부터 양식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슬람의 구원관은 꾸란의 진술과 같이 보상의 원리를 따른다. 교전상태에 있는 적군 속의 믿는 자가 실수로 살해되었다면 한 명의 노예해방으로 충분하고(Su:ra 4:92), 10명의 불쌍한 사람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노예를 해방시켜 주거나, 사흘 간의 단식을 하면 속죄해 줄 것을 알라는 약속하였다(Su:ra 5:89).
이슬람에서 가장 큰 보상은 모든 죄를 용서받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성전에 참여하여 “순교”하는 길이다. 무슬림이 전사하면 천국(Paradise)으로 직행하고 알라의 심판을 받지 않게 된다. 꾸란에:
나의 길에서 순교한자 성전 하였거나 살해당한 그들을 속죄하여 줄 것이며 강이 흐르는 천국으로 들어가리니 이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보상이라(Su:ra 3:195).
하나님의 길에서 순교한자가 죽었다고 생각지 말라. 그들은 하나님의 양식을 먹으며 하나님 곁이 있노라(Su:ra 3:169).
고 함고 같다.
그런데 생존시에 수많은 출전에도 불고하고 “순교”하지 못한 무함마드는 어떻게 되었겠는가? 해마다 성지를 순례하는 쉬아 무슬림들은 무함마드의 묘소에서 “알라는 그에게 평화를 주소서”라고 빌어 주어야 한다.
예수께서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4)고 하신 말씀과는 대조적으로 무함마드는:
금지된 달이 지나면 너희가 발견하는 불신자들마다 살해하고 그들을 포로로 잡거나 그들을 포위할 것이며 그들에 대비하여 복병하라(Su:ra 9:5).
너희가 전쟁에서 불신자들을 만났을 때 그들의 목들을 때리라. 너희가 완전히 그들을 제압했을 때 그들을 포로로 취하고 그 후 은혜로써 석방을 하던지, 아니면 전쟁이 종식될 때까지 그들을 보상금 으로 속죄하여 주라(Su:ra 47:4)
위와 같이 전쟁시 포로로 잡은 노예를 보상금을 받고 놓아주는 꾸란의 “속죄”란 성경에서 인용한 개념이지만, 죄사함을 주는 기독교 고유의 구원개념과는 전혀 의미가 다르다. 성경적인 속죄란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받을 형벌의 대가로 자기의 생명을 지불함으로써 우리의 죄를 속하고, 우리와 하나님과의 끊어졌던 관계가 회복되고, 하나님의 영을 선물로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속죄 행위는 하나님만이 할 수 있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일을 시행하셨다. 그러나 꾸란에는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속죄개념이 없고, 다만 인간이 알라에게나 이웃에게 협상하는 방법만이 있을 뿐이다. 오히려 꾸란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대속의 십자가를 부정함으로써 복음적인 하나님의 대속행위를 철저하게 배격하고 있다.
내가 불신자들의 마음을 두렵게 하리니 그들의 목을 때리고 또한 그들 각 손가락을 때리라(Su:ra 8:12),
너희가 전쟁에서 불신자들을 만났을 때 그들의 목들을 때리라. 너희가 완전히 그들을 제압했을 때 그들을 포로로 취하고 그 후 은혜로써 석방을 하던지, 아니면 전쟁이 종식될 때까지 그들을 보상금 으로 속죄하여 주라(Su:ra 47:4)
위와 같이 전쟁시 포로로 잡은 노예를 보상금을 받고 놓아주는 꾸란의 “속죄”란 성경에서 인용한 개념이지만, 죄사함을 주는 기독교 고유의 구원개념과는 전혀 의미가 다르다. 성경적인 속죄란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받을 형벌의 대가로 자기의 생명을 지불함으로써 우리의 죄를 속하고, 우리와 하나님과의 끊어졌던 관계가 회복되고, 하나님의 영을 선물로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속죄 행위는 하나님만이 할 수 있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일을 시행하셨다. 그러나 꾸란에는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속죄개념이 없고, 다만 인간이 알라에게나 이웃에게 협상하는 방법만이 있을 뿐이다. 오히려 꾸란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대속의 십자가를 부정함으로써 복음적인 하나님의 대속행위를 철저하게 배격하고 있다.
위에서 연구된 바와 같이 꾸란은 하나님 자신의 영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성경의 진리를 크게 왜곡 인용한 거짓 영의 산물이다. 꾸란에 의하면 알라는 가장 간교한 영이다. Su:ra 3:54에 “알라는 가장 간교한 자”(Alla:hu ḳayru al-maki:rina)라는 문장에서 사용된 표현 ḳayru al-maki:rina는 makara(“속이다”, “기만하다”, “간교하다”, “교활하다”라는 의미를 갖는 3인칭남성단수능동완료형 동사)의 의미를 나타내는 최상급 표현이다. 이 구절을 영어 꾸란은 “And they plotted (to kill Isa), and Allah plotted too. And Allah is the Best of those who plot"라고 정확하게 번역하였다.
이와 병행하여 이슬람교에서는 법적으로 속임을 허용하는데 1) 성전을 하는 동안에, 2) 두 원수를 화해시킬 때, 3) 남녀관계에서 거짓이 허용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영은 진리의 영이고(요14:17) 의와 희락과 평강의 영이며(롬 14:17) 주의 영이 있는 곳에는 자유함이있다(고전 3:15). 하나님의 영이 부어지면 보복과 폭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용서를 하며, 만나는 불신자들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 목숨까지도 희생한다. 오늘날도 이슬람권 선교사들이 목숨을 바치면서도 무슬림 영혼들을 사랑하는 모습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은 증거 되고 있다.
성령이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실 수 있는 최대의 선물이며, 무함마드가 태어나기 1400년 전부터 하나님께서 구약을 통해 예언하신 말씀으로써(욜 2:28-29), 누구든지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은 자에게 선물로 내려 주시는 하나님 자신의 영이며(행2:38), 무함마드 출생 1000년 전에 이미 선지자 에스겔선지자을 통해서 약속하셨던(겔 36:26-27) 하나님 말씀의 실현이다. 이 약속과 같이 실현된 성령강림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근심하는 제자들과 다시 한번 확인하셨던 가장 중대한 사건이고(요 14-16),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또 다시 약속하셨던(행 1:4-8) 임마누엘을 체험하게 하는 가장 중대한 선물이다. 이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생을 얻은 것이다(요 3:5; 롬8:11).
우리 피조물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관계는 하나님이 친히 사랑으로 인해 맺어주신 관계이며(요 3:16), 오순절에 오신 성령께서 그리스도인 속에 내주 하시기 때문이고(행 2:38; 요 14:16f), 피조물이 하나님의 본질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고(갈4:6) 하나님의 영이다(롬8:9f). 그는 진리의 영이며(요16:13, 14:17),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행1:8, 요15:26),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게 하며(요16:14) 그리스도를 믿게한다(고전12:3).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고백한 베드로의 기독론이 하나님에 의한 것이며, 고전 12: 3의 기독론적 고백도 성령에 의한 것이다. M. 루터 역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성령의 증거로 인함이라는 것을 그의 소요리문답(Der Kleine Katechismus)에 명백히 하고 있다. : “나는 나의 이성으로나 나의 힘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거나 그에게 나아올 수가 없다. 내가 주를 믿는 것은 성령께서 복음을 통하여 나를 부르시고 그의 은사로서 깨닫게 하시며 올바른 신앙으로 거룩하게 하시고 또 지키시기 때문이다. E. 브룬너는 성령을 받는 것을 높임 받으신 살아 계신 주를 만나는 것이며, 그 이유는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자를 성령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아버지에 대한 신앙과 아들에 대한 신앙도 오직 성령의 조명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성령의 조명이 없기 때문에 이슬람교에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모든 피조물은 오직 “종”일 뿐이라고 고백한다. 종은 하나님과 체험적인 사랑의 교제나 사랑의 은사나 대화가 전혀 없다. 가브리엘 천사와 대화했다는 무함마드 조차도 알라와는 대화한 일이 한번도 없다.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없기 때문이다(요일 2:23).
결어
위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메카에서 12년 간이나 나타나서 무함마드를 지배했던 꾸란의 “지브리일”(가브리엘)은 성령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보낸 천사도 아니다. Su:ra 53:7, 13-14, 81:23의 서술에서 무함마드가 바라본 영은 하나님도 아니었고 가브리엘도 아니었고 성령도 아니었다. 하나님의 영과 성령은 바라보는 영이 아니다(출 33:20). 꾸란보다 600년이나 일찍 기록된 성경에서는 가브리엘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계시하였다. 그러나 무함마드가 만난 그 무명의 영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철저히 배척한다. 그 영은 무함마드가 처음 생각했던 바와 같이 그리고 그의 체험이 말해주는 바와 같이 베두인의 개념으로 진이었다. 그가 체험한 영적 경험은 상식적으로 악령의 역사이다. 무함마드는 성령을 알지도 못했고 받지도 못했다. 무함마드는 하나님께서 보낸 선지자가 아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하는 적그리스도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이었다(요일 2:22-23).
이슬람교는 구약과 신약을 무수히 인용하면서도 기독교 신앙과 핵심교리를 크게 왜곡하고, 무함마드를 메시아 위에 올려놓은 세계에서 가장 큰 전형적인 “기독교 이단”이다. 이슬람교는 기독교를 파괴하려는 의도로 설립되었고, 21세기에는 전 세계 기독교와 투쟁을 벌이는 반 기독교 운동단체로 등장할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은 영이시라”고 한 바와 같이(요 4:24) 영이 없는 하나님이란 전제될 수가 없다. 그러나 꾸란은 ru:ḥ를 하나님의 영과 인간의 영혼을 혼합하여 “하나님의 영혼”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한다. 이와는 달리 성경의 하나님께서는 삼위일체로 계시기 때문에, 초역사적인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면서도 이 세상에 오실 수 있고, 인간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땅에 찾아오셔서 우리를 만나주신 “하나님의 아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에 의해서 죄 사함 받고 정결해진 사람에게 임하시는 하나님 자신의 영(성령)을 죄사함도 성령도 받지 못한 13억의 무슬림들에게 부지런히 전해야 할 것이다. *
출처 : 내 사랑 중국 ♡ MyLoveChina
글쓴이 : null 원글보기
메모 :
'이슬람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이슬람은 왜 지하드를 선포하며 과격하게 나가고 있는가? (정형남) (0) | 2011.10.03 |
---|---|
[스크랩] 기독교와 이슬람교와의 다른 점 (0) | 2011.10.03 |
[스크랩] 이슬람 의복과 의복에 대한 설명 (0) | 2011.10.03 |
[스크랩] 오늘의 중동, 이슬람교에 대하여 (0) | 2011.10.03 |
[스크랩] 고대 아라비아의 예언자(nabi) ·이슬람교(敎)의 창시자 마호메트 (0) | 2011.10.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