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교

[스크랩] 이슬람교 시아파의 기원

수호천사1 2011. 10. 3. 11:28

 

이슬람교 시아파의 기원

 

 

사도의 죽음은 이슬람에 최초의 위기를 가져왔다. 무함마드는 한번도 자신이 유한한 목숨을 갖는 인간 이상의 어떤 존재라고 주장한 적이 없었다.

단지 자신은 신의 말씀을 전달하는 사람이자 백성들의 지도자였다는 점에서 보통 인간과 차이가 날 뿐, 결코 불멸의 존재도 신적인 존재도 아니라고 하였으며, 꾸란 3장 144절은 -무함마드는 한 사도에 불과하며 그 이전 선지자들도 세상을 떠났노라. 만일 그가 죽거나 혹은 살해당한다면 너희도 돌아서버릴 것인가 라고 하였다.

그러나 무함마드는 누가 그의 뒤를 이어 이슬람 공동체와 이슬람 국가의 지도자가 될 것인지 아무런 명확한 지시를 남기지 않았고, 이슬람 출현 이전의 아라비아의 정치적 경험이 그들에게 가르쳐주는 것 역시 거의 무에 가까웠다.

사도는 죽었고 더 이상 아무도 나타날 수 없었다. 공동체의 지도자가 사라졌기 때문에 누군가가 그를 대신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러한 긴박한 상황에서 그와 가까웠던 제자들은 가장 먼저 무슬림이 되었고 또 모두에게 존경받던 아부 바크르를 선택하여, 아랍어로 후계자와 대표자라는 의미를 동시에 내포하는 ‘할리파(Khalifa)’라는 칭호를 부여하고 그를 추대하였다. 말하자면 이러한 응급 조치로부터 칼리프 제도라는 것이 탄생되었고, 아울러 보편적인 합의에 의해 칼리프를 선출하는 원칙이 생겨난 것이다.

물론 세습의 원칙이 아랍인들에게 생소한 것은 아니었다. 아라비아의 북방에 있던 두 개의 거대한 제국, 즉 발달된 문명을 표상하던 비잔틴과 페르시아는 왕조적 군주들의 지배하에 있었고, 서남 아라비아의 정주 국가들 역시 얼마전까지만 해도 세습적인 왕들이 다스리고 있었다.

심지어 새 종교를 최초로 지지했던 북부 아랍인들 사이에서도 비록 확정된 계승 원칙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한 귀족 가문에서 선출하는 일종의 적통 관념이 존재하였다.

그러한 가문은 보통 고귀한 성자의 후예들로 이루어졌고, 그들은 대대로 사당이나 성물을 관리하는 권리를 갖고 있었다. 유대교와 기독교 역시 다윗 왕의 가문이 메시아의 출현을 통해 궁극적인 승리를 거두리라고 확신하고 있었고, 조로아스터교도 세상의 종말에 조로아스터의 성스러운 후손들 가운데 샤오샨스(saoshyans)라는 구세주가 출현할 것이라고 믿었다.

아랍인들 역시 왕정을 알고 있기는 하였으나 별로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고, 이슬람 이전 시기에 왕권에 대한 언급은 흔히 악의에 찬 것이었다. 새로운 부족장의 선출이 비록 한 가문으로 한정되어 있었다고 할지라도 어떤 특정한 계승의 원칙에 의해 규율되던 것은 아니었다.

선택은 개인적이었고 개인적인 자질, 즉 충성심을 발동시키고 지탱할 수 있는 능력에 따라 이루어졌다. 이슬람의 출현과 함게 이러한 기존의 반왕조적 경향은 반귀족적 감정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고, 그것은 신도들 사이의 평등성과 형제애에 대한 신념과, 종교적 혹은 개인적 자질을 제외한 어떠한 특권에 대한 거부로 표현되었다.

최초의 두 칼리프인 아부 바크르와 우마르는 모두 메카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가문 출신이었다. 그러나 세번째 칼리프인 우쓰만은 달랐다. 그는 메카에서 최대의 가문인 우마이야(Umayya)출신이었다. 그의 계승은 메카 귀족계층으로서는 하나의 승리였고 그 기회를 잘 활용하는 데도 성공하였다.

변경에서 전쟁이 당분간 멎자 부족민은 자신들의 고통을 돌이켜볼 시간을 갖게 되었고, 동시에 새로 탄생한 거대한 제국이 주는 긴장과 압박에 대해서도 눈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갈등과 대립은 내전으로 이어졌다.

최초의 내란은 656년(36 A.H) 우쓰만의 암살과 사도의 조카이자 사위인 알리(Ali ibn Abi Talib)의 계승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알리 역시 살해되었고, 이로써 선출에 의한 칼리프제는 종언을 고하고 우마이야 가문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칼리프제가 명확히 왕조적인 원칙을 기반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그들이 수도를 아라비아에서 시리아, 즉 고대 중동 제국들의 정치적 행정적 전통을 깊이 간직하고 있던 새로운 정복지로 옮긴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니었다.

이 복잡한 싸움에서 알리를 추종하는 집단이 매우 특별한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 예언자의 딸인 파티마의 남편이자 동시에 그의 조카인 알리가 계승에서 남다른 권리를 주장할 이유는 없었다. 일부다처제의 사회에서 그러한 관계는 특별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슬람 이전 시기 아라비아의 통념에 따라 무함마드의 친족으로서 예언자의 정치적 종교적 권위에 대해 부분적으로 계승권을 주장할 수는 있었던 것이다.

그는 개인적으로 탁월한 자질과 권위를 바탕으로, 이제 선출에 의한 칼리프제가 중단된 이상 예언자의 친족을 통해 이슬람의 진정한 복음을 회복해야 한다고 믿었던 많은 사람을 추종자로 얻게 되었다. 이들은 ‘알리의 무리’ 즉 시아 알리(Shiat ‘Ali) 혹은 간단히 시아(Shi’a)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우마이야 칼리프조는 끊임없는 타협과 잠정적 조치를 통해 이슬람 사회의 통일성을 유지하려고 애쓰면서 거의 1세기를 지속하였으나, 비아랍인들에 대한 아랍 귀족들의 우위 확립, 이슬람 출현 이전에 존재했던 제국들의 통치조직과 방법 인원들의 차용이라는 결과는 그 대가로 치러야만 했다. 이러한 변화에 저항했던 사람들도 많았다. 그중의 하나가 ‘하리지’(Khariji: ‘밖으로 나간 사람들’)라고 일컬어지던 집단으로 처음에는 알리를 지지하였으나 곧 그에게서 등을 돌렸고 나아가 우마이야조와 그 계승자들에 대해서도 완강한 저항을 계속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자유의사를 가지고 인정하지 않은 어떠한 권위도 거부하고 설령 한번 부여한 권위도 언제든지 철회할 수 있으며, 신도들의 합의에 근거하기만 한다면 어떤 출신이라도 칼리프가 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가장 극단적인 부족적 무정부주의를 표방하였다고 할 수 있다. 반면 끝까지 알리를 추종하던 시아파는 예언자의 가문에 속한 사람들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우마이야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정권을 세우려는 지도자들을 지원하였던 것이다.

두번째 내란은 사소한 소요로부터 시작되었다. 사소하다는 것은 그것이 미친 직접적인 군사 정치적 영향이라는 면에서 그러할 뿐, 종교적 역사적인 측면에서는 대단한 중요성을 갖는 사건이었다. 680년(61 A.H) 알리의 아들이자 예언자의 외손자인 후세인(Husayn)이 우마이야 정권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으나, 무하람달(이슬람력 정월) 제 10일에 이라크의 카르발라(Karbala)에서 우마이야 군대와 부딪혀 그를 비롯하여 그의 가족과 추종자들이 모두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전승에 의하면 약 70명 정도가 전투에서 사망하였고 생존한 것은 후세인의 아들로서 알리라는 이름은 가진 병든 어린아이 한 명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예언자의 후손들이 당한 이같은 극적인 순교, 그리고 그것이 불러일으킨 고통과 참회의 파문은 희생과 죄의식과 속죄라는 커다란 문제와 결부되어 그 뒤 시아파 운동에 새로운 활력이 되었다. 카르발라에서 흘린 희생자의 피는 시아파를 단순한 집단에서 교단으로, 당파에서 종교로 변용시켰던 것이다. 이 두번째 내란으로 말미암아 칼리프조는 다시 한번 격력한 투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지만, 결국 압드 알 말리크(‘Abd al-Malik)라는 또다른 우마이야 가문에 속한 사람의 계승과 왕조적 원칙의 회복과 재확인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승리가 가져다 준 휴식은 짧았다. 세번째의 내란은 결국 우마이야조의 붕괴와 예언자 가문의 한 분파인 압바스 집안의 등장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흔히 ‘압바스 혁명’이라고 일컬어지듯이 여러가지 변화를 몰고 왔다.

우선 왕조의 교체가 그것이고, 그 다음으로는 수도가 시리아의 다마스커스에서 이라크의 바그다드로 옮겨진 것이다. 이와 함께 아랍인의 민족적 우위가 점차적으로 힘을 잃어갔고, 그대신 아랍어를 공용어로 하면서도 이슬람을 공통의 유대와 지표로 하는 새로운 범민족적인 지배집단이 출현하게 되었다.

출처 : 내 사랑 중국 ♡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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