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교

[스크랩] 무함맏과 메카인들의 갈등과 사탄 구절

수호천사1 2011. 8. 9. 12:57

무함맏과 메카인들의 갈등과 사탄 구절

 

 

꾸란은 무함맏이 처음에 이슬람을 선포했을 때, 당시 메카의 모든 지도자들이 본능적으로 무함맏을 대적하여 일어나 이슬람을 금지시켰으며, 그를 모든 백성들의 적으로 선언했다고 말한다. 수라 5:104 “언젠가 그들이 ‘알라가 내려준 것과 선지자에게 동의하라!’ 라고 말해졌을 때, 그들은 ‘우리를 위해서는 우리 조상들을 무엇의 (즉 어떤 종교의) 위에서 발견했든지 그것으로 충분하다.’ 라고 말했다.

 

”  왜 꾸라이쉬 부족이 그렇게 화가 났는가? 꾸라이쉬족은 일반적으로 관대한 사람들이어서 무함맏이 그들의 우상들을 깔보기 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무함맏을 배척하지 않았었지만, 무함맏이 아라비아의 우상들에 대한 의식들을 금지시키자 그들은 대단한 상처를 받았고, 무슬림들을 적으로 취급하기 시작했다(A Western Attempt to Understand Islam, Karen Armstrong, Chapter 6: the Satanic verses, p 108-133, 1991). 무함맏이 갑작스럽게 자신을 선지자라고 선포하는 것은 메카 사람들에게 아무런 근거도 설득력도 없었다. 또한 모든 우상숭배를 중단하고 알라가 명령한 대로 우상숭배를 중단하라는 주장은 이슬람 발생 이전의 자신의 과거 40년 동안의 삶과도 일치하지 않았으며, 과거 아랍 조상의 전체 역사도 갑작스럽게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이었다.

 

무함맏이 그의 삼촌 Abu Talib에게 무슬림이 되라고 초대했을 때, Abu Talib은 자기 조상들의 신앙을 버릴 수 없다고 말했다. 무함맏이 메카의 사람들에게 오직 알라에게만 예배하고 다른 우상 숭배를 버리라고 요구했을 때, 전적으로 지금까지 자기들에게 친숙하고, 자기들을 모든 면에서 보호해 주었다고 믿었던 자기들의 모든 신들을 버리고 새로운 종교적인 태도를 선택하라고 요구한 셈이었다. 무함맏의 메시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신적인 유일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많은 그의 동족들은 역사적인 배경을 갖지 못한 이슬람을 전혀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으며,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도 설명도 제시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다신교 사회에서는 보통 다른 종파에 속한 새로운 의식이나 사람들을 받아들여 추가시킬 준비가 되어 있지만 전체를 부정하고 포기하고 새로운 종교를 받아들이라는 것에는 관대하지 않다. 따라서 아랍의 우상숭배자들에게 자신들의 모든 신들과 의식들을 버리라고 하는 요구는 그들에게나 그들의 신들에게나 재앙과 같은 것이었고, 그 신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는 것은 틀림없다. 꾸라이쉬족은 자기들의 상업적인 성공이 자기들의 신들에 대한 경건함에 달려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이다.

 

어느 날 무함맏의 삼촌이자 족장인 Abu Talib에게 아랍인 대표들이 도착하여 그를 보호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당시 아랍 사회는 부족이나 혈통이 사회의 기본 단위였기 때문에 보호자가 없이는 아무도 아라비아 사회에서 무사히 살아남을 수 없었다. 대표단은 Abu Talib에게 꾸라이쉬 모든 부족에게 자기들의 의무에 대해 상기시켰다.

 

“오 Abu Talib이여! 당신의 조카가 우리의 신들을 저주했고, 우리 종교를 모욕했고, 우리의 삶의 방식을 비웃었으며, 우리 조상들의 잘못에 대해 비난했습니다. 당신이 그를 중지시키든지, 아니면 당신은 우리가 그를 처리하도록 내버려 두세요. 그러면 우리는 그를 제거할 것입니다.” 상황은 극도로 민감했다. Abu Talib는 무함맏을 사랑했으나, 그는 모든 다른 종족의 불화가 일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무슬림이 아니었고, 오랜 아랍 종교에 대한 무함맏의 계속되는 정죄도 불편했지만, 만일 그가 쉽게 그의 조카가 살해되도록 내어준다면, 그는 가족의 일원에게 적당한 보호를 제공하지 못했기 때문에 족장으로서 실패하게 될 것이었다. 이것은 Hashim가의 특권에 대단한 타격이 될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족장들에게 책임을 회피하는 답변을 했고, 무함맏은 계속해서 그의 보호 아래에서 이슬람 신앙을 전파했다. 얼마 후 꾸라이쉬족은 Abu Talib에게 위협을 했다. “알라에 의하여, 우리는 우리 조상들이 악평되고, 우리 관습들이 조롱당하고, 우리 신들이 모욕을 당하는 것을 참을 수 없다. 당신이 우리에게 그를 내어줄 때까지, 우리 두 편 중 한 쪽이 멸망할 때까지 싸울 것이다.

 

” 꾸라이쉬족은 이미 더 이상 타협할 가능성이 없다는 것과 오직 한 쪽이 이겨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Abu Talib은 당황했다. 그는 무함맏을 불러 “너와 나를 살아남게 하라!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의 큰 짐을 나에게 맡기지 말라”고 간청했다. Abu Talib이 그를 포기하려고 한다고 생각하고서는, 무함맏이 눈물을 흘리며 자기가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대답했다.

 

“오 나의 삼촌! 알라의 이름으로, 만일 그들이 이 여정을 포기하라는 조건으로 해를 나의 오른 손에 두고, 달을 나의 왼손에 둔다 해도, 알라가 승리하게 할 때까지, 그렇지 않더라도 내가 그것을 포기하지 않고 죽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결렬되어 비통하게 울면서 그 방을 떠났다. 그러나 곧 Abu Talib이 그를 다시 불러 “가서 네가 하고 싶은 말을 하라! 왜냐하면 알라의 이름으로 나는 결코 너를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Abu Talib이 그의 보호자가 되어 그를 효과적으로 보호할 수 있는 한, 메카에서 아무도 그를 건드릴 수 없었기 때문에 안전했다.

 

Abu Talib은 메카에서 가장 재능있는 시인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전통적으로 모든 족종들이 하심의 동맹들이었으나, 이제 무함맏 때문에 자기들을 대항하여 군사를 조직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강렬한 싯구들을 썼다. 그들과 친밀한 관계가 있었던 al-Muttalib 족속은 하심과의 결속을 선포하는 것으로 응답했다. 그러나 이러한 좋은 소식 후에 슬픈 배신이 뒤를 이었다. Abu Lahab이 처음부터 무함맏에게 적대적이었으나, 그의 조카와의 관계를 개선시키기 위하여, 그는 자기 아들들 중 둘을 무함맏의 두 딸에게 약혼을 시켰었다. 그러나 무함맏이 결국 banat Allah를 인정하는 것을 거절한 후에, 즉 사탄의 구절들에 대한 번복이 있은 후에, Abu Lahab은 자기 아내의 종족인 Abd Shams과 더 친밀히 동맹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그의 아들들에게 그 두 여자들(무함맏의 딸들)을 버리도록 강요했다. Abu Lahab은 이제 무함맏의 주요 적들과 가능한 한 가까게 일할 것이었다. 이 반대하는 자들 중 우두머리는 makhzum 의 늙은 족장 Walid의 조카인 Abu al-Hakam이었다. 그래서 무슬림들은 그를 'Abu Jahl', 즉 무지막지한 자의 아버지라고 부렀다. Abd Shams 의 족장으로서 대단히 지적이고 무함맏의 개인적인 친구였던 Abu Sufyan을 포함한 다른 중요한 족장들이 그와 함께 했다.

 

그의 장인 Utba ibn Rab'ia와 그의 동생 Shayba도 반대하는 자들의 선봉에 섰다. Amir의 족장으로 우상 숭배에 깊이 빠져 있었던 Suhayl ibn Amr도 추가했다. 젊은 세대들 중 일부 Amr ibn al-As, 능력있는 용사이자 외교관인 Khalid ibn al-Walid, Safwan ibn Ummayah도 반대하는 자들 편에 섰으며, 이 모든 젊은 적들 중에서 가장 강렬한 반대자는 Umar ibn al-Khattab이었으며, 그는 무함맏의 꾸라이쉬족과의 결렬이 있었을 당시 26세이었다.

 

 Umar는 열렬한 우상 숭배자 Khattab의 아들이었다. 그는 자기의 이복 동생 Zayd가 오랜 종교를 헐뜯었을 때, 그를 도시 밖으로 추방시켰다. 이 모든 사람들은 이미 무슬림 진영으로 넘어간 자기 친척들을 잃어버렸고, 이들 사이에 평화적인 해결 방법이 없었다. 처음에 반대자들은 Abu Talib의 보호를 받고 있었던 무함맏을 죽일 수 없었기 때문에, 단지 제재 조치를 취하고 조롱할 뿐이었다. 그들은 사회적으로 중요한 어떤 사람이 무슬림이 되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비난과 조롱을 쏟아 부었다. “너는 너희 아버지의 종교를 버렸다. 너의 아버지는 너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었다. 우리는 너를 멍떵구리, 바보라고 선언하며 너의 명예를 짓밟을 것이다.” 만일 개종자가 상인이라면, “우리는 너의 상품을 불매 운동할 것이고, 너를 거지로 만들 것이다.

 

” 만일 사회에 전혀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를 때리고 그를 대항하여 분노를 자극시켰다. 가장 많이 고통을 받은 사람들은 어떠한 보호도 받지 못한 종들이었다. 주마의 족장 움마이야는 그의 무슬림 종 Bilal을 하루 중 가장 뜨거울 때 밖에 매어 놓고, 그의 가슴에 큰 돌을 달아 놓았는데, 빌랄은 기죽지 않고 계속 “하나, 하나”(다신교를 배척하고 유일신을 주장하는 말)라고 소리쳐 댔다. 근처에 살던 Abu Bakr는 참을 수 없어서 고통받는 빌랄을 움마야로부터 사서 그에게 자유를 주었다. 좋은 가정에서 태어난 무슬림들은 자기 가족의 손에 의해 고난을 당했다. 타오르는 불구덩이의 꿈에 의해 개종한 젊은 Khafid ibn Sa'id는 그의 아버지에 의해 감금되어 음식과 물을 제공받지 못했다. Makhzum 부족은 자유인 Ammar ibn Yasir의 가족을 너무 심하게 다루어 Ammar ibn Yasir의 어머니가 결국 죽게 되었다.

 

무슬림들에 대한 메카인들의 핍박이 거세지자 무함맏은 가장 고통스러운 핍박에 노출되어 있는 무슬림들을 위해 안전한 장소를 찾기로 결정했고, 당시 기독교 국가였던 에디오피아 황제(Negus)에게 그들을 받아달라고 요구했다. 에디오피아 황제는 허락했고, 616년에 일부 무함맏 자신의 식구들을 포함한 약 83명의 무슬림들이 Uthman ibn Ma'zum 에게 인도되어 그들의 가족들과 함께 메카를 떠났다. 또한 무함맏은 Abu jahl의 무역 제재 조치로부터 고통당하는 무슬림들을 위해 남쪽으로 가는 다른 독자적인 무역로를 세우려고 시도했다.

 

꾸라이쉬족은 무슬림들이 거기에 도착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두 파견단을 에디오피아 황제에게 보내서, 무슬림들이 메카인들의 신앙을 거스려 모독을 했으며, 사회를 어지럽혔고, 따라서 그들은 극도로 위험한 자들이며, 믿을 수 없는 자들이라고 말하며, 그들을 집으로 돌려보낼 것을 요구했다. 에디오피아 황제는 무슬림 이민자들을 소환하여 그들에 관한 것을 물었다. Ja’far가 무함맏은 그의 계시가 예수에게 확증되었던 참 하나님의 선지자라고 설명했다.

 

 그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는 마리아의 자궁에 있었던 예수의 처녀 잉태에 관한 꾸란 구절을 암송하기 시작했다. 그 암송을 듣고 황제는 아주 심하게 울기 시작했다. 에디오피아 그리스도인들은 황제에게 꾸란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지적하여 문제를 삼으려고 했지만, 황제는 여전히 무슬림들을 메카로 돌려 보내는 것을 거절했다. 에디오피아의 그리스도인들은 명백히 이단적인 사람들을 지지해 주는 황제에게 화를 냈으나, 황제는 무슬림들이 에디오피아에 남아 있기로 선택하는 한 자유롭게 종교적인 의무를 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한편 메카에서는 Abu jahl과 그의 동료들이 계속해서 무함맏과 그의 동료들을 괴롭혔다. 그들은 새로운 이견을 발견했다. 왜 알라가 al-Walid과 같이 더 중요한 사람을 선택하지 않고, 무함맏을 선택했는가? 왜 무함맏은 기적을 행하지 않는가? 왜 알라는 모세가 시내 산에서 받은 것과 같은 하나의 인상적인 계시를 보내지 않고, 조금씩 조금씩 꾸란을 내려 보내는가? 왜 알라는 일반적인 인간을 사용하는 대신에 그의 메신저로서 천사를 보내지 않았는가? 꾸라이쉬족 중의 얼마는 무함맏이 알라 자신으로부터 온 계시를 받기보다는 유대인이나 기독교인들에 의해 지시 받았다고 생각했다.

 

많은 핍박과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메카에서도 무슬림들이 서서히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반대자들의 대표가 ‘무슬림들은 자기들 종교대로 알라를 숭배하고, 다른 사람들은 계속해서 세 여신을 숭배하게 하자’ 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무함맏은 이미 끝까지 밀고 나가기로 결심했다. 그는 소위 ‘거절의 수라’ 109장으로 답변했다.

 

“오 불신자들이여! 나는 너희가 섬기는 것을 섬기지 않고, 너희는 내가 섬기는 것을 섬기지 않는다. 또한 나는 너희가 섬기는 것을 섬기지 않을 것이고, 너희도 내가 섬기는 것을 섬기지 않을 것이다. 너희에게는 너희 종교가 있고, 나에게는 나의 종교가 있다”  금지가 있은지 2년 후 금지 사항이 점차적으로 풀려가고 상황이 갑자기 무함맏을 위해 좋아지는 듯 했다.

 

그리고 이 소식이 에디오피아에 있는 이주한 무슬림들에게도 전해져 Uthman ibn Ma'zum 의 인도로 약 30 가정이 돌아왔다. 그러나 이주자들이 너무 이른 시기에 돌아왔다. 그 금지 조치가 불가피하게 몇가지 고통을 초래했다. 619년 초에 한 사람, 그의 보호자인 삼촌 아부 탈립의 죽음이 무함맏의 메카에서의 위치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621년에 이르러서 무슬림들은 극적인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메디나로부터 온 한 사절단 일행이 무함맏의 부름에 응답했고, 무함맏과 언약을 맺고서 자기들이 무슬림들이라고 선언하게 된 것이다. 1년 후 622년에, 메디나에서 온 지도자 70명은 비슷한 선언을 했으며, 모든 잡다한 사람들과 대항하여 무함맏을 보호하기 위해 싸우기로 맹세했다.

 

 메디나의 지도자들이 한 이 맹세 또는 언약은 이슬람의 전환점이 되었다. 이로 인해 무슬림들은 군사 작전을 위한 안전한 기지를 제공받았고, 메카에 있는 무슬림들을 메디나로 이주(소위 하지라라 부른다. 이 때 이주하지 않은 무슬림들은 무함맏에 의해 혹독한 정죄와 저주를 들어야 했다)시켰다. 얼마 후 메디나는 완전히 무슬림 사회로 선언되었다.

 

13년 동안 무함맏의 포교는 메카에서 적은 성과 밖에 거두지 못했다. 조용하고, 비정치적인 접근 방법을 취했고, 단지 포교만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메디나에서 완전히 그의 전술은 바뀌었다. 그는 자신을 종교적, 정치적 그리고 군사적 리더로서 입지를 굳혔다. 그의 인도 하에서 무슬림 신도들의 움마 공동체는 가족이나 종족보다 더 중요했다. 이슬람은 위협과 힘으로 전파되기 시작했다. 모든 종족들과 도시들이 전쟁의 위협과 정복에 의해 정복되었다. 성공은 더 큰 성공을 초래했다.

 

메디나에서 무함맏은 이슬람 공동체(Umma)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아라비아 반도에서 최초로 생성된 이념과 신앙 공동체이다. 무함맏은 이 공동체를 세움으로써 단위 부족의 요직인 부족장, 점술사, 중재자 및 전시 지도자의 기능을 자신의 한 몸에 집중시켜 이를 확대 발전시켜 나갔다. 그는 신의 사도로서 계시를 받음으로써 공동체의 우두머리와 점술사, 중재자의 기능을 확대 계승할 있었으며, 또한 군사령관으로서 비신자와의 전쟁 수행을 통하여 자기의 권위를 부족의 지도자보다 한층 더 높이 확립할 수 있었다. 그가 세운 종교는 유일신 알라에 절대 순종한다는 뜻으로, 이슬람이라 명명되었다. 이 속에서 무함맏은 고대 셈 족의 종교적 전통을 계승 발전시켰다.

 

무함맏은 622년에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한 후, 메카와의 세 번에 걸친 전쟁 끝에 무슬림 군은 629년에 이 곳을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을 만큼 압도적인 힘으로 무혈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무함맏은 메카인들에 대해 대사면을 선포하였고, 이 때 카바의 모든 우상을 파괴하였으나 마리아의 성화는 부수지 않았다. 그리고 카바를 알라를 위한 예배 장소라고 선언했다. 메카의 정복으로 이슬람은 아랍 반도에서 권력자가 되었다. 종족들과 도시들이 줄줄이 이슬람과 그의 선지자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들에게 선택은 결코 허락되지 않았다. 무함맏은 메디나로 돌아와 거기에서 계속해서 그의 왕국을 통치했다. 이렇게 해서 이슬람 공동체는 아랍인이 세운 최초의 커다란 국가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 후, 이 국가는 급속히 성장 발전했으며, 632년에 무함맏이 63세에 죽을 때까지는 아라비아 반도의 대부분을 복속시키고 있었다. 23년 안에 그는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아랍 세계를 지배하는 종교와 사회 질서를 확립했다.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봉서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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