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과 찬양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구약성경)의 핵심 메시지를 하나님 나라라고 정의한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란 모든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인격적 다스림과 그 다스림의 영역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말이다. 구약성경의 하나님 나라 신학이 가장 광범위하고 풍요롭게 표현된 곳이 시편이다. 시편신학은 찬양신학으로서 하나님의 왕적 다스림에 대한 갈망과 그 다스림의 결과에 대한 허다한 시적 고백들과 선언들로 가득차 있다. 시편(특히 150편)은 사람을 비롯하여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위엄과 창조주의 권능을 찬양하도록 초청한다. 구약성경의 찬양의 핵심은 찬양자의 주관적인 감정의 방출에 있지 않고 객관적으로 임하는 하나님 나라의 영접과 송축에 있다. 따라서 구약성경의 찬양은 노래방에서 불려지는 대중가요들이나 일반적인 발라드나 재즈류의 음악과는 전혀 다른 예배 장르로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사모하고 영접하는 경배 행위의 연장이다. 이 글의 목적은 다윗의 시편신학을 통하여 구약성경의 찬양을 하나님 나라 신학의 빛 아래서 살펴보는 데 있다.
시편과 찬양의 신학은 다윗의 신앙적 유산이다.
시편은 크게 보아 5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토라(Torah)의 다섯 권에 비견되는 구조라고 보여진다(1-41편[1, 2, 10, 33편 제외하고는 모든 다윗에게 獻呈된 시편임]/ 42-72편/ 73-89편/ 90-106편/ 107편-150편). 시편 1, 9, 119편은 토라(Torah) 시편으로 토라의 내용을 감미롭게 공부하도록 격려하는 노래다. 시편이 자주 사용되는 맥락은 예배(공예배와 사적인 일상생활에서의 예배), 교육과 제의(축제/절기)다.
예배에 시편찬양을 도입한 사람은 이스라엘의 국민가수였던 다윗이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노래하는 자”(삼하 23:2, 이스라엘의 “국민가수”; 삼상 16:18, 유명한 harp-player)라고 불린다. 즉 대부분의 경우 문서로 의사소통하지 않고 구두로 의사소통이 이뤄졌던 그 옛날에(주전 1000년 전후), 노래만큼 좋은 신앙교육 및 내면화의 도구는 없었을 것이다(신 31:21-22, “모세가 당일에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을 가르쳤더라”). 노래는 신앙을 내면화 및 개인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도구였다. 다윗은 이스라엘에게 시편(찬양) 장르를 도입함으로써 야웨 신앙을 대중화시키는데 결정적으로 이바지하였다. 이 시편 장르는 원래 블레셋-가나안 등의 성전 제의에서 필수적으로 등장하였는데 아마도 찬양 예배(제의)는 다윗이 망명시절에 습득한 선진(이방)문화의 일부였을 것이다(시 29편 미셀 다우드의 주장). 그러나 다윗에게 오면 바알과 하닷과 엘 등의 이방 신에게 바쳐진 모든 찬사들이 야웨 하나님을 향하여 재주형된다. 다윗은 짧은 시편들을 직접 작사 작곡하기도 하고 또 일부는 번역/번안하기도 하면서 일상생활의 현장을 하나님과 밀접하게 연결시켰다. 시편찬양은 성전에 가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책 대신에 노래 가사와 곡조에 담아 하나님을 찬미하고 예배하는데 사용되었을 것이다. 다윗은 많은 시편의 실제적인 저자로서 비파와 수금의 전문가적 연주자로서 야웨신앙을 일반 백성들의 삶의 현장 속에 접목시키는데 결정적으로 이바지하였던 것이다. 적어도 시편, 사무엘서, 열왕기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역대기서는 다윗의 예전적 기여에 대하여 아낌없는 칭찬을 바친다. 다윗은 실제로 망명시절에 블레셋과 두로의 선진문화에서 예배문화/시편의 노래문화를 배웠을 것이다. 그는 바알과 아세라, 혹은 하닷 등 이방 신들에게 바쳐진 많은 신적 자질들과 품성이야말로 야웨 하나님께만 속한 자질이요 성품인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과감하게 이방신들에게 부여된 신적 품성들을(하나님을 설명하는 서술어들을: 예) 구름타고 날아가는 바알--->구름타고 날아가는 야웨로) 야웨 하나님께 전용하였다.
사실 다윗의 생애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시편의 찬양이 다윗 개인에게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잘 알 수 있다. 다윗은 세 가지 일로 이스라엘 정치의 중심 무대에 진출한다. 가장 먼저는 십대 소년 시절에 사무엘에게 은밀하게 왕으로 지명되어 기름부음을 받았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늙은 예언자 사무엘이 추진하는 일종의 정치적 기획의 일환이었다. 두 번째로 다윗은 블레셋의 거인 장군 골리앗과의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일시에 유명인사가 되어 사울의 궁중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다윗은 사울 왕의 정신병(조울증) 치료를 위해 고용된 궁중음악치료사의 자리에서 이스라엘의 정치적 심장부에 진출하였다. “왕(고난을 거쳐 왕이 될)이 될 운명”을 타고 태어난 소년 다윗의 인생은 이 때부터 끝모를 심연으로 곤두박질친다. 이스라엘 국경의 끝자락이자 사막과 광야의 동굴과 암혈에서 젊은 날 사울의 단창을 피하느라고 눈물의 세월을 보냈다. 이스라엘의 국경 안에서는 어떤 안전한 피난처도 발견하지 못하여 모압과 블레셋 지역, 그리고 아마도 두로(시돈)지역까지 망명의 도주를 감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극한 박탈과 한(恨)의 세월 속에서 다윗은 비파와 수금을 치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기다리면서 인고의 세월을 참아내었다(특히 56-57편). 시편들에는 바로 다윗의 심장 속에 메아리쳤을 멜로디와 곡조, 강하고 느린, 고음과 저음, 단조와 장조의 애절하고 장엄한 비트(beat)가 살아 숨쉬고 있다. 다윗의 일대기를 상기하면서 다윗이 친히 저작한 시편들과 다윗을 위하여 지어진 시편들을 읽고 노래하면 저항할 수 없는 감동이 파도쳐옴을 느낄 수 있다. 처참한 전락과 망명생활, 가난과 불안의 삶 속에서 다윗이 자신을 두벌구이를 마친 고려 상감청자처럼 구어내신 하나님의 손아래 낮출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찬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마침내 33세에 헤브론에서 유다 족속의 두령이 되었고 40세 나이에 이스라엘 12지파의 왕이 되었다(삼하 5장). 그런 높은 곳에 올라가기 위하여 그토록 낮아지고 비참한 삶을 먼저 통과했어야만 했다. 시편의 찬양은 우리가 삶의 내리막길로, 특히 졸지에 굴러 떨어질 때 우리의 동반자요 하나님의 지팡이와 막대기같이 작용한다. 다이너스티나 에쿠우스를 타다가 어느 날 부도를 만나 시내버스를 타기 위하여 긴 줄을 서야하는 IMF세대의 아버지들에게 시편찬양은 심장을 파고드는 천사의 음악이다.
시편의 주요 저자들은 다윗 외에 고라 자손과 아삽 자손들이 있다. 고라 자손이 저작한 시편들은 주로 42편-60편까지에 집중되어 있고, 여기에는 주로 쫓기는 개인이나 공동체의 탄원시나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는 시편/찬양으로 가득 차 있다. 그것들의 주장은 “찬양은 고난받는 영혼을 위한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의 자양분을 가득 담은 신령한 음식”이라는 것이다. 아삽 자손의 시편들은 74-89편에 집중되어 있다. 이들은 현실이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살아계심을 의심하게 만들 때 시편과 찬양의 신앙으로 견디어 낼 것을 장려한다. 고라 자손과 아삽 자손들은 각각 찬양 및 예배지도자들서 예루살렘 중심의 예배 및 종교활동을 장려하는 예배 및 순례장려시편들을 많이 썼다. 두 집단들 모두 음악과 노래로 내면화된 신앙만이 현실의 모든 극한 환난과 시련을 극복할 수 있다는 시편신학의 선봉들이라고 볼 수 있다.
시편은 하나님을 향한 대듦의 언어(confrontational language) 및 불평의 언어를 믿음의 반경 안에서 포용한다. 특히 시편 137편은 원시적인 보복감정의 토로를 용인한다. 그것은 복수윤리를 가르치지는 않지만 복수심에 시달리는 인간의 연약한 감정을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시편에는 조직신학이나 교리신학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야성미’넘치는 하나님이 심심찮게 발견된다. 시편의 하나님은 야성미가 넘치시고 약자의 억울한 고난에 일방적으로 편드시는 하나님이다. 따라서 시편에는 인간의 가장 비참한 감정까지도 배려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신적 자비가 자주 발견된다. 인간의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쉼없는 권념과 간섭의지가 시편의 찬양곡들을 통하여 폐부에 전달되는 것이다.
찬양은 입술로 드리는 찬미의 제사다.
시편신학은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보좌 위로 착석하시는 왕이신 여호와에 대한 믿음에 기반한다(시 22:3). 하나님의 백성들이 온 몸과 영혼으로 하나님을 찬미할 때 하나님은 비로소 백성들의 마음의 보좌 위에 착석하신다. 시편신학은 토라와 예언서신학의 완성이다. 토라는 하나님의 다스림의 대강령을 천명하고 예언서는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기도(企圖)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스리는 도구인 하나님 말씀을 음악적 선율과 시적인 정형 속에서 녹여 놓은 것이 구약성경의 시편들인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감미로운 선율과 내재율에다 실어 우리 영혼의 지성소에 실어 나르는 것이 바로 시편들이다. 시편은 찬양신학의 교과서다. 구약성경의 찬양을 연구하려는 학생들이 가장 깊이 연구하고 익숙하게 알아야하는 성경이 바로 시편이다. 시편은 오늘날의 음악적인 곡조없이 읽혀지거나 낭송되는 “시”들의 묶음이 아니라 노래말과 곡조가 같이 결합된 음악곡집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개별 시편들은 실제 찬송할 때 어떤 곡조/분위기나 멜로디로(발성법 혹은 화음) 불러야 할지를 지시하고 있다. 시편의 표제 옆에 붙어 있는 음악적인 노트들은 오늘날 원래의 뜻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다만 여러 시편들에 공통으로 붙어 있는 표제들인 경우 어렴풋이 추정할 뿐이다. 예를 들면 시편 56편에는 “영장[지휘자]에 의하여 지도받는 노래로서 요낫 엘레르호김에 맞춘 노래”라는 표제가 붙어있다. 이런 경우 직역하면 “슬픈 비둘기소리 곡조” 정도로 번역된다. 시편 5편은 관악기에 맞춘 노래요, 4, 55, 61, 67편은 현악기에 맞춰서 불려지도록 작곡된 찬양곡이다. 이외에도 어떤 시편에는 그것의 노랫말이 지어지게 된 개인적 혹은 역사적 계기가 첨부되어 있다. 예를 들면 57편에는 “다윗의 믹담시, 영장으로 알다스헷에 맞춘 노래.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굴에 있던 때에”라는 표제와 해설이 붙어 있다. 시편 102편에는 “곤고한 자가 마음이 상하여 그 근심을 여호와 앞에 토하는 기도”라는 해설이 붙어 있다. 시편 120-134편에는 ?성전에 올라갈 때 부르는 노래?(songs of ascent)라는 표제어가 붙어있다. 이것은 바로 유월절 등 국가적 절기에 지방민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순례여정을 떠나면서 불렀던 노래라는 뜻이다. 복음서들은 예수께서 유월절 어린양으로 자신을 드리기 위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올라가실 때 “찬미”하였다고 증언하는데 학자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 마지막 상경시 부른 찬미의 노래가 바로 이 시편 120-134편의 일부였을 것이라고 추정한다(막 14:26).
이러한 시편찬양이 가장 큰 위력을 발휘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붙들어준 때는 바벨론 포로기 동안이다. 국권을 상실하고 민족적 정체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던 위기의 순간에도 바벨론의 유다 포로들은 하나님의 왕적 다스림에 대한 비전을 완전히 상실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잘 알려진 대로 주전 587년에 바벨론 군대가 유다의 성전을 파괴하고 귀족들과 왕족들, 그리고 국가의 기간요원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바벨론 포로들 중에는 성전예배의 지도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고라자손과 아삽자손, 에단과 헤만 자손 등은 성전 찬양대의 지도자들이었다. 이들이 바벨론 포로생활의 고달픔 속에서도 하나님의 왕적 다스림에 대한 기대를 고조시킨 영적 지도자들이었다. 바벨론 포로기의 가장 지속적인 영적 지도자들은 이런 찬양지도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바벨론 포로 70년 동안에는 성전에서 드려지던 정규적인 예배인 황소와 염소의 희생제사는 폐지되었다. 하나님과 교통할 어떤 제의적(祭儀的)인 수단도 남겨져 있지 않았다. 그러나 유다의 포로들은 시온의 노래를 기억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비전에 다시 자신들을 결박하였다. 이런 바탕 위에서 마침내 유다의 포로들을 바벨론 포로들은 70년의 포로생활을 끝내고 다시 시온으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고 예배를 회복하였다.
찬양은 하나님 나라 도래에 대한 갈망을 음악적으로 선포한다
사실 에스라-느헤미야의 재건 프로젝트가 가능한 것도 시온에 대한 하나님의 계약적 신실성을 쉼없이 고취시킨 시온의 노래(시편들)들이었던 것이다. 다윗이 이스라엘에 도입한 시편들(찬양)은 바벨론 포로들을 극한 고난과 절망 속에서 지탱시켜 주었던 것이다. 그들은 성전예배를 그리워하면서 이방 땅 고난과 굴욕의 현장에서도 찬양을 드렸다. 시온의 회복을 그리면서 하나님의 왕되심과 살아계심을 갈망하면서 찬양을 드리고 비파와 수금으로 하나님을 계속 찬미하였다. 현실을 보면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 것 같고 계시더라도 하나님은 왕으로 다스리지는 않는 것처럼 보일 때에라도 시편 찬양곡들은 현실 너머에 역사하고 있는 하나님의 왕적인 통치를 믿고 갈구하게 하였다. 그래서 황소와 염소의 제사대신 제사를 입술로 드린 제사, 즉 찬미의 제사를 드린 것이다(히브리서 13:15-16:“찬미의 제사”). 입술로 드려진 찬미의 제사들이 150편들의 시편 곡조들에 보존되어 있다. 이런 찬미는 여호와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는 신앙고백이었다. 그래서 시편 22편 2절에는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왕으로 임하시는”이라는 노랫말이 나온다. 바벨론 포로생활은 바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던 거친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왕적 다스림을 확신하는 반전의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그 거친 강요된 무신론적을 정황 속에서도 바벨론 포로들은 찬양과 노래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왕적 다스림을 선포하였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곤 하였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는 차라리 우리의 수금을 걸어 놓아버렸네.
왜냐하면 우리의 정복자들이 노래 한 곡조 불러주기를 청하였었고
우리를 고문하는 자들이 자기들을 즐겁게 해 줄 시온의 노래 한 곡조를 청하였었기 때문이라네.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 손이 그 수금타는 재주를 잊으리.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않거나 내가 너를 나의 가장 큰 기쁨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나의 혀가 입천장에 붙어도 좋으리(필자 사역:시 137:2-6)
이 노래는 시온의 포로들이 이방 땅에서 그 극한 굴욕과 환난 가운데서도 망가지지 않고 부서지지 않고 마침내 시온으로 돌아갈 꿈을 버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마음속에 성전예배시 불렀던 찬양이 울림으로 살아있었기 때문임을 보여준다. 시편의 찬양은 극한 고난 속에 영혼을 지탱시키는 위력을 발휘한다. 시편의 저류에는 아둘람 동굴의 의기소침과 절망을 비파와 수금으로 깨우고 이슥한 밤의 어둠에 갇혀있는 새벽을 깨운 다윗의 영적 분투가 흐르고 있는 것이다.
회중은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찬양을 통하여 하나님께 말씀(기도)을 올려드린다. 찬양은 예물 드림(봉헌)이나 설교만큼이나 본질적인 예배요소다. 찬양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객관적인 찬미와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공적인 선포다. 찬양은 음악을 통한 한편의 설교와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에 찬양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회중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을 하신다. “찬양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시 22:3)이라는 표현은 회중이 찬양할 때 하나님은 회중을 다스리는 보좌 위에 앉으시기 시작한다는 말이다. 찬양은 하나님의 보좌 착석을 알리는 신호라는 것이다(시편 100편).
포로기 동안과 포로기 이후에는 성전/회당의 공예배(公禮拜)시에 불려진 찬양은 예배의 본질적인 부분이며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맛보는(God's loving care and reign) 순간이었다. 따라서 찬양이 풍성한 예배는 하나님의 임재를 풍성하게 경험하는 시간이며 공간이었다. 프로테스탄트 교회(개신교회)에 와서 설교가 예배의 중심부분을 차지하는 바람에 개신교회에서는 음악과 찬양의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반감된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지만, 우리는 설교(말씀 선포)와 찬양과 예물드림을 조화시킴으로써 하나님의 풍성한 임재를 맛보는 예배를 회복할 수 있다.
예배의 지도자로서 찬양대의 위치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예배 지도자로서의 찬양대의 위치를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다. 원래 교회 찬양대는 음악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들의 음악 동호인회(혹은 합창단)가 아니라 회중 전체가 하나님의 임재와 다스리심을 구체적으로 맛볼 수 있도록 자신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리는 사람들의 모임이다(롬 12:1-2). 찬양대를 비롯한 예배공동체 회중 전체는 날개달린 스랍(winged seraph)천사가 아니라 두 다리로 걸어다니는 스랍 천사들이 되어야 한다(walking seraph; 참조. 이사야 6장 3절을 보라: 거룩 삼창의 쉼 없는 찬양을 올리는 스랍 천사들이여! 온 땅을 가득 채우는 그의 영광이여!). 특히나 흙먼지 이는 세상 한복판에서 생업의 노동에 매여 있으면서도 시간과 생명을 바쳐 아침 일찍부터 나와 혹은 주일 오후 늦게까지 교회에 남아 찬양연습을 감당하는 찬양대원들은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수종들던 스랍천사들이다. 찬양대가 가장 신령한 영적인 지도자들로 구성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찬양대는 하나님의 임재(臨在, holy and near presence)와 다스리심에 대한 비상한 갈망과 굶주림을 가진 신령한 모임이어야 한다. 주기적인 찬양연습과 똑같이 중요한 것이 찬양대의 주기적인 기도교제이며 삶을 나누는 영적 친교다. 찬양대는 하나님의 임재와 다스리심을 일상생활 속에서 예민하게 맛보고 그것을 표현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찬양대원들 자체가 하나의 걸어 다니는 멜로디가 되고 찬양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정의는 실제의 찬양대원들에게 다소 부담스러울 수 있으나 우리는 원칙적으로는 그렇다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개신교회는 음악과 찬양의 신학적인 이해를 한층 더 깊게 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전반적으로 찬양의 역할과 그것들의 중요성에 대한 이해가 깊어져야 하며 교회의 공적인 예배나 기타 여러 순서에 음악과 찬양을 통한 신앙의 나눔과 표현이 더욱 장려되어야 한다.
결론
시편 103편 1절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은밀한 감정, 오장육부 속에 감춰진 감정들을 불러내어 찬양하도록 권유하신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여호와의 성호를 찬양하라(시 103:1).” 여기서 말하는 “내 속에 있는 것”은 창자 곧 오장육부를 가리킨다. 오장육부 속에는 분노, 수치심, 당혹감, 실망, 원한 등이 숨겨져 있다. 찬양은 우리의 감정의 일시적 정지와 부정을 요구한다. 찬양은 우리의 기분이나 정서에 의하여 발동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객관적인 성품이나 하나님의 구원행위에 의하여 발동되기 때문이다. 우리 감정은 우리의 입술을 얼어붙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숨은 감정들은 하나님의 성호를 찬미하는데 동참하여야 한다. 이것이 바로 노래방에서 부르는 노래와 교회에서 부르는 찬양의 차이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갈망을 음악적으로 선포하고 고백하는 시편신학의 내용을 좀 더 세분하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시편(찬양)은 감사와 찬미의 음악이다. 하나님의 객관적인 성품이나 창조사역(지혜/권능) 찬미가 찬양의 주요 요소이다. 피조물로서 드리는 찬양이 바로 이런 유형이다(시 104). 둘째, 시편(찬양)은 죄사함과 치유에 대한 감사의 노래이다. 죄인으로서 드리는 감격적인 회복의 음악이다(시 103). 셋째, 시편(찬양)은 하나님의 성도로서 이 세상을 살면서 느끼는 딜레마를 극복해 나가기 위한 영적인 싸움의 일종이다.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드리는 찬송(행전 16장)과 예수님이 마지막 수난주간에 감람산으로 가시면서 부른 찬미(시편 118편이상)는 바로 이런 유형의 찬미다. 찬양의 신학적인 메시지는 하나님의 말씀이 노래와 깊은 영혼의 음악처럼 승화되고 내면화되지 않고는 순종되어 질 수 없다는 주장이다(시편 1편; 103편).
자료출처 : 한국성서학연구소 - 김 회 권 (숭실대학교 교수 / 구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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