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학

[스크랩]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법

수호천사1 2011. 8. 5. 09:12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법



 

 

 

 

목 차

머리말
1. 인자한 은혜 /9
2.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 /23
3. 바리새인의 누룩을 주의하라 /35
4. 세상과의 전투 /47
5. 육체와의 전투 /62
6. 마귀 /71
7. 참소자 사탄 /87
8. 두려움과 죄책감이라는 무력증 /96
9. 참용서 /109
10. 육적인 그리스도인 /129
11. 교만이라는 죄 /141
12. 게으름이라는 죄 /154
13. 부정직이라는 죄 /165
14. 교리와 삶 /182
15. 포기하지 말라 /196

저자에 대하여

저자 스프룰(R.C.Sproul)은 개혁주의 신학계를 이끌어 가는 저명한 신학자로 심오한 진리들을 알기 쉽게 설명하는 글과 강의로 유명하다. 웨스트민스터 대학과 피츠버그 신학대학원, 그리고 화란의 자유대학교에서 공부했으며, 현재는 리폼드 신학대학원 교수이다. 저서로는 [그리스도인과 윤리]가 있다.

1
인자한 은혜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 가는 것을 보나이다”(막8:24). 참 이상한 체험이다. 걸어 가는 나무란 정상인의 눈에 비친 정상적인 상이 아니다. 하지만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 가는 것”을 본 사람은 변화 도중에 있던 사람이었다. 아무것도 보지 못하던 단계와 모든 것을 투명하게 보는 단계 중간에 서 있던 사람이었다.
성경에 예수께서 기적적인 병고침을 기록할 때 그 병고침은 대개 즉각적이고 완벽하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려낼 때 부분적으로 살려내시지 않았다. 팔이 말라붙은 사람은 단계적으로 회복되지 않았다. 다른 대부분의 기적들에게 당사자는 즉각 변화되었다.
따라서 마가복음에 기록된 일화는 좀 색다르다. 소경이 두 단계에 걸쳐 나음을 받은 일을 기록한다(마8:22-25).
예수께서 소경의 딱한 처지를 동정한 사람들의 접견을 받으셨을 때 맨 처음 취하신 행동은 소경의 손을 붙드신 것이었다. 소경의 손을 잡고서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다.
그 정경을 그려 보자. 하나님의 아들께는 분명히 그 자리에서 그 사람을 고쳐 주실 능력이 있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를 데리고 군중에게서 벗어나셨다. 그 사람 개인에게 사역하셨다. 그 소경은 잔뜩 호기심을 갖고 모여든 사람들의 구경 거리가 아니었다. 우리 주님은 그 사람의 손을 잡고 인도하셨다. 소경으로서는 평생 살아오면서 그처럼 든든한 인도자를 만난 적이 없었다. 주께서 손을 잡아 주시니 떨어질 위험도 걸려 넘어질 걱정도 없었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손을 잡고 인도하고 계셨다.
예수님은 소경을 데리고 군중에게서 멀리 벗어나신 뒤에 우리의 감성을 상하게 할 수도 있는 일을 하셨다. 소경의 눈에 침을 뱉으셨다. 만약 누가 우리 눈에 침을 뱉으면 그건 아주 치욕스럽고 저급한 모욕일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침을 뱉으신 목적은 모욕을 주려는 데 있지 않았고 눈을 뜨게 하시려는 데 있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만지시고는 무엇이 좀 보이느냐고 물었다.
소경의 눈에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인 것은 바로 이 순간이었다. 그는 소경이 볼 수 없는 것을 보았다. 희미하고 침침하긴 했지만 볼 수 있었다. 바로 조금 전만 해도 그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고, 눈은 아무짝에도 쓸 데 없었다. 그러나 이제 갑자기 움직이는 형상들을 식별할 수 있었다. 빛과 어둠의 차이를 감지할 수 있었다. 새로운 세상이 그 앞에 열렸다. 그는 더 이상 다른 사람의 인도를 받을 필요가 없었다. 이제는 늘 가지고 다니던 지팡이를 내던졌다.
예수님은 그것으로 끝내지 않았다. 두 번째로 소경에게 손을 대셨다. 그러자 그 사람은 희미하던 물체들이 또렸히 보였고,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가 또렷하게 본 첫 얼굴은 그리스도의 얼굴이었다. 그에게는 그것이 지복직관, 곧 부활의 날에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게 될 일의 시작이었다.
비록 성경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소경은 틀림없이 눈만 고침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어루만지심으로써 그는 마음가지도 고침을 받았다.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던 마음이 영적 생명으로 새롭게 고동치는 육체의 심장으로 변화되었다.

시작:중생
우리 눈을 여사 하나님께 속한 것들을 보게 하는 은혜 행위는 중생, 곧 영적 거듭남이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 이루실 수 있는 행위이다. 소경이 순전히 마음만 먹는다고 해서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스스로의 힘으로 거듭날 수 없다. 소경은 보겠다고 결심할 수는 있으나 눈이 치료되지 전에는 볼 수 없다.
중생은 여러 단계에 걸쳐 발생하지 않는다. 한 순간에 발생한다. 오직 하나님만 무에서 유를, 죽음에서 생명을 이끌어 내실 수 있다. 오직 하나님만 인간 영혼을 살리실 수 있다.
하나님은 인간 영혼을 살리실 때 즉각적으로 행하신다. 내가 “즉각적으로”라고 말한 것은 시간의 관점에서 즉각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물론 시간적으로도 즉시 발생하는 게 사실이지만 말이다. 내 말뜻은 하나님이 도구를 쓰시지 않고서, 즉 2차적 원인들을 쓰시지 않고서 그 일을 직접 하신다는 것이다. (라틴어 이메디아투스<immediatus. 이 단어에서 ‘즉각적인’이란 뜻의 영어 immediately가 유래했다>는 실제로 “매개물 없이”라는 뜻이었다.
우리의 중생도 그와 같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 권능으로 즉시 거듭나고 흑암의 왕국에서 즉시 빛의 왕국으로 옮겨가지만, 성화는 단계적으로 이루어진다.
우리의 영적 상태를 온전케 하는 일을 가리켜 영화라고 한다. 영화는 이생에서는 발생하지 않는다. 하늘에서 성화가 완성될 날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지금은 전에 볼 수 없었던 것을 보긴 하지만 여전히 희미한 유리를 통해서 본다.
이생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두 번째 만져 주심을 필요로 한다. 사실은 셋째, 넷째, 다섯째, 그리고 계속적인 만져 주심을 필요로 한다. 비록 우리 눈에서 비늘은 벗겨졌으나 예수께서 손을 잡고 인도해 주시는 일이 여전히 필요하다.
시지푸스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비극적인 주인공이다. 그는 신들의 비위를 건드렸다는 이유로 끊임없이 반복해서 절망을 맛보는 영원한 지옥으로 떨어졌다. 그가 하는 일이란 크고 둥근 바위를 가파른 언덕 위로 밀어 올리는 것이었다. 바위를 움직이려면 온 힘을 다 쏟아야 했다.
바위를 언덕 꼭대기까지 밀고 올라가면 그때마다 바위는 언덕너머로 굴러가 다시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리스도인들도 때로는 자기가 시지푸스와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진보가 너무 더뎌서 제자리 걸음을 하고, 손으로 바퀴를 굴리고, 곱절의 노력을 하나 아무런 입지도 얻지 못했다는 느낌이 든다.
저주받은 시지푸스의 고통에서 가장 크게 부각되는 이미지는 원의 이미지이다. 그 원은 시작도 끝도 없이 돌고 돈다. 끝없는 반복만 있을 뿐이다.
그것이 잔인한 원의 이미지이다.
지속:성화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렇게 덧없는 게 아니다. 원을 그리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이미지는 직선이다. 시작이 있고 중간이 있으며 끝이 있다. 영광이라는 최종의 목표가 있다. 우리는 어딘가를 향해 있는 직선 위에 있다. 그 직선은 앞으로 움직인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전진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전진을 한다. 우리를 조용히 서 있도록 허락지 않으시는 내주하시는 성령에 의해서 전진은 확실히 이루어진다.
사실 우리는 조용히 서 있으려고 한다. 심지어 뒷걸음질도 친다. 제자들처럼 우리도 두려움에 휩싸여 다락방에 모여 은신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다락방에 머물러 있도록 허락지 않으신다.
날 때부터 그리스도인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본성으로는 다 육체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령의 중생 사역과 더불어 시작한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란 말은 틀린 말이다. 거듭나지 않은 그리스도인도 없고 거듭난 비그리스도인도 없다. 거듭난다는 건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으로 태어난다는 뜻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한 선결 조건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원 곧 시작이기도 하다.
누구나 똑같은 방식으로, 즉 거듭남으로써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시작한다. 거듭남의 체험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으나 거듭났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
성화는 일종의 과정이다. 점진적인 과정이다. 성화는 안수와 같은 즉석의 체험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중생은 즉각 발생한다. 칭의도 즉각 발생한다. 그러나 성화는 죽는 날까지 이루어 가야 할 전진이다. 허다한 장애물들에 맞서 끈기있게 투쟁하는 일에 있어야 한다. 천로역정의 순례자가 행한 여행과 같이 숱한 함정이 깔려 있고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것은 영혼의 깊은 밤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유혹의 광야를 지나야만 하는 여행이다.
이 여행에는 한 가지 보증밖에 없다. 그것은 우리와 함께 가시고 우리를 맞은 편에 데려다 주시겠다고 하신 그리스도의 약속이다. 우리 주님은 한 번 시작하신 일은 반드시 끝내신다. 창조의 일을 중간에 그만두시지 않는다. 우리를 걸어 다니는 나무 같은 것을 보는 상태로 그냥 내버려 두시지 않으신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안전과 성숙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계신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방법에 대해서 더욱 더 배우기를 바라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데서 낙을 찾기를 바라신다. 고침을 받은 소경처럼 우리도 변화하여 시력을 되찾고 세상을 바라보고 그 안에서 행동하는데서 성장하기를 원하신다. 이런 뜻에서의 성장과 변화란 거룩하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법에 관해서 더욱 더 배우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데서 이루어 가는 성장이 곧 성화이며, 바로 그것이 이 책을 쓴 목적이다.
2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
광신자에 대한 정의를 읽어 본 적이 있다. “광신자란 목표 지점을 잃어버린 채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곱절의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이다.” 광신자는 열정적으로 이곳 저곳을 다니지만 어디에도 도달하지 못한다. 그는 골대 없이 경기를 벌이는 농구 선수, 네트 없는 코트에서 경기를 벌이는 테니스 선수, 잔디밭 없이 경기를 벌이는 골프 선수와 같다.
그리스도인의 성화, 즉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법을 배우는 데서 진보하려면 자기 목표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 성경은 그 목표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가르치지만, 사람은 그것을 잊기가 쉽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이 말씀에 담긴 요소들을 한 번 살펴보자. 첫째, 예수님은 구하라고 하셨다. 무엇을 구하려면 노력이 필요하다. 부지런히 찾아야 한다. 잃은 동전을 찾으려고 빗자루로 집안 구석구석을 쓰는 여자처럼 해야 한다. 마음을 놓고 있어서는 구하는 것을 성취할 수 없다. 노력해야 한다. 집요하게 노력해야 한다. 등을 기대고 앉아서 하나님이 우리가 구하는 것을 우리 무릎에 떨어뜨려 주시기를 기다려서는 안 된다. 행운이 아닌 노력의 결실말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법을 배우는 일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 나라를 구함
무슨 뜻일까? 불신자는 결코, 결코, 결코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불신자는 하나님을 피해 다니는 도망자이다. 사람의 본성적인 형태는 하나님께로부터 도망치고 숨는 것이다. 예수님은 길잃은 자들을 찾아 구원하러 오셨다. 찾으시는 분이다. 우리는 도망치고 있는 사람들이다. 죄를 지은 상태에서 복잡한 인생사에 대한 해답을 구할는지는 모르나 하나님을 구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왜 불신자들이 하나님을 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을까? 가만히 그들을 관찰해 보면, 그들은 행복, 마음의 평정, 죄책감으로부터의 해방, 의미있는 생활, 그리고 우리가 오직 하나님께서만 주실 수 있다고 알고 있는 그밖의 많은 것들을 구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구하지는 않는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유익들을 구한다. 자연인의 죄는 바로 이것이다.
정작 하나님은 제외시켜 놓은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유익들을 바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찾는 일은 평생 추구할 일이다. 그것은 조나단 에드워즈가 “그리스도인의 삶의 주된 사업”이라 부른 바로 그것이다.
의를 구함
예수님의 생애는 의의 불길이었다. 그분은 흠없는 어린양이요,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아들이었다. 성경은 아버지의 집을 사모하는 열심히 그분을 삼켰다고 말한다(요2:17). 우리는 그분의 신성을 모방할 수 없지만 순종하려는 올곧은 의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열의는 모방해야 한다.
영성과 경건은 그 자체에 목적이 있지 않다. 그 목표는 반드시 영성을 넘어서 의에 이르어야 한다.
영적 훈련은 의롭게 되는 데 절대로 필요하다. 성경 공부, 기도, 교회 출석, 전도는 그리스도인이 장성하는 데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들이 최종 목적이 될 수는 없다. 영성 없이 의에 도달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의에 도달하지 않은 채 적어도 표면상으로 “영적”일 가능성이 있다.
예수님은 기도의 사람이었다. 예수님의 기도 생활은 뜨겁고 권능이 있었다. 예수님은 방대한 성경 지식을 갖춘 분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달한 분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영성은 궁극적으로 권위 있는 의로 그 모습을 나타냈다. 따라서 예수님의 영성은 단순히 표피적인 것이 아니었다. 내면의 삶이 외면의 순종, 심지어 죽음도 마다하지 않은 순종으로 나타났다.
의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것을 행하는 것이다.
미가의 요약
공의, 인자(즉, 성실한 사랑), 그리고 겸손. 이 세 가지는 성취하기가 쉽지 않다. 하나님은 내게 공의와 자비 같은 비중 있는 문제들에 관심 갖기를 바라신다. 하나님은 겸손한 성도와 사귐을 갖기를 즐기신다. 겸손한 자들에게 은혜를 더하시고 교만한 자들은 쫓아내시겠다고 약속하신다.
미가는 “인자”라는 말을 할 때 “성실한 사랑”이란 뜻의 히브리어를 사용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 자녀들에게 품으신 사랑이다. 견고한 사랑이요 인내하는 사랑이다. 항구적인 사랑이다. 하나님은 자녀들이 하는 일마다 다 인정하시지는 않지만 항상 그들 곁에 서 계신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사랑에 대해서 생각할 때 가장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할 사항이다.
내 자녀들은 내 사랑을 얻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 나를 실망시킬 수도 있고, 좌절에 빠뜨릴 수도 있고, 화나게도 할 수 있지만, 그런다고 해서 내 사랑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탕자의 아버지는 아들에 대한 사랑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성실. 인자. 이런 덕성들이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엄존하는 자신의 죄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한다. 성실한 친구가 되려면 맹목적으로 수용한 해서는 안 된다. 인내와 오랜 고통과 온순이 필요하다. 이런 것들은 성령께로부터 흘러나오는 열매이다. 먼저 그리스도께서 이런 성실함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기 때문에 우리도 똑같은 태도로 남들을 대할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예수님의 요약
의롭다는 건 올바로 산다는 뜻이다. 사람들을 올바로 대한다는 뜻이다. 개인적으로 정직하게 산다는 뜻이다. 의로운 사람은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의 정직은 일관성이 있다. 겉치레가 아니다. 의로운 사람은 도덕을 내세우지 않은 채 도덕적으로 산다.
경건을 내세우지 않은 채 경건하게 한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해칠까봐 조심한다. 사랑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싶은 마음이 크게 때문에 사람들을 올바로 대하고 싶어한다.



3
바리새인의 누룩을 주의하라
“양의 가죽을 입고 오는 이리들을, 영성이란 옷을 입고 오는 탐욕스런 살인자들을 경고하셨다.
그 위험은 극소량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데 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를 파멸시킬 수 있는 전염성 강한 요소를 허용하지 말라는 경고이다. 그것은 아주 작은 데서 시작하며, 무시하면 하나님 나라를 잃을 수도 있다는 경고이다.
이렇게 무서운 바리새인의 누룩이 무엇일까? 한 마디로 그것은 우선(외식)이라는 누룩이다. 거짓 의라는 누룩이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 의로운 척하는 누룩이다.
내가 그리스도의 구원의 의를 갖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사실은 내 믿음이 가짜 믿음인데 진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줄로 착각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우리는 우리가 내놓은 열매로 구원의 믿음을 갖고 있음을 증명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께 참으로 영광을 돌리는 사람들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면서도 실제 생활에 영향을 줄 만큼 의뢰하고 살지는 않을 때 하나님은 기뻐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을 우리는 확실히 느낄 수 있다. 이것이 예수님의 경고에서 두려운 부분이다.

바리새인들은 전도자들이었다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23:15).
예수님은 이들을 가리켜 지옥의 전도자들이라고 하셨다. 그들은 마치 몰몬 교도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것과 같이, 공산주의자들이 자기들의 신념을 위해 열정적이기를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을 위해 열정적인 것보다 더 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을 부끄럽게 만든다.
전도와 선교에 열심히 없다면 경각심을 가져야겠지만, 열심히 있다고해서 그것이 곧 우리 믿음이 참되다는 증거는 아니다.
바리새인들인 십일조 생활을 철저히 한 사람들이었다
바리새인들은 사소한 것들을 지나치게 중시하는 함정에 빠졌다. 가치 위계가 뒤바뀌었다. 외양이 내면보다 더 중요하게 되었다. 자기들이 아주 중요한 문제들에 성실하지 못한 잘못을 모호하게 만들기 위해서 사소한 문제들을 높은 차원으로 끌어 올렸다. 그러나 그들은 적어도 십일조는 바쳤다.
최근에 설문 조사를 한 적이 있는데, 그 결과를 보면 스스로 “복음주의자”라고 여기는 교인들 중 십일조 생활을 하는 사람은 4%뿐이었다. 그 설문 조사 결과가 정확하다면 복음주의권 그리스도인들 중 96%는 정기적으로 체계적으로 하나님의 재산을 도둑질하고 있는 셈이다. 이 면에서 우리의 의는 바리새인의 의보다 낫지 못하다.
우리는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주의해야 할 뿐 아니라 바리새인들을 너무 함부로 비판하는 것도 주의해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려는 열의를 가지고 작은 의의 행동들을 강조했다. 이렇게 작은 일들이 흐지부지 끝내기가 얼마나 쉬운가. 만약 모든 일을 소홀히 한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에 있어서 바리새인들보다 조금도 나을 게 없을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기도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경건을 대중 앞에 드러내기를 좋아했다. 거룩한 자세를 취하여 웅변으로 기도했다. 다윗의 베개는 눈물로 젖었던 반면에, 바리새인들의 베개는 뼈처럼 메말랐다. 그들에게는 기도의 골방이 없었다. 골방에는 자기들의 기도를 들어 줄 청중이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은 성경을 읽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마음과 혼은 간과했다. 그렇지만 최소한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말씀을 찾는 데 있어서는 부지런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읽지 않는다. 그들은 선한 의도를 갖고 있지만, 어영부영하는 사이에 성경을 젖혀 두게 된다.
신학 논쟁이 벌어지면 그들은 본문을 여기 저기서 인요할 수 있겠지만, 성경을 근실히 공부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전도.십일조.기도.성경공부. 이런 것들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엄격히 준행한 사항들 가운데 몇 가지에 불과하다. 이런 사항들에게 그들은 아주 탁월했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은 지극히 외관적이었다. 그들은 위선자들이었다. 겉으로는 경건의 모양을 취했으나 마음은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 있었다. 율법 문서는 간직하고 있었으나 율법의 정신은 죽였다.
진정한 의는 정신과 문자를 동시에 지킨다. 이런 종류의 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의를 능가한다. 이것이 바로 주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순종이다.




4
세상과의 전투
마르틴 루터는 그리스도인이 살면서 벌이는 삼중 전투에 관해서 말했다. 그리스도인은 전선에서 세상, 육체, 마귀와 대치하고 있다. 이들은 가공할 적들이다. 이들은 언제나 공정하게만 싸움을 걸어오지는 않는다. 패거리로 공격한다. 원수가 사용하는 전술은 아주 교활하다. 사탄은 기습 공격의 명수이다. 육은 사람의 내부에 있는 원수로서 성령께 훼손을 끼치는 방해자이다.
성화의 과정에는 이런 대적들과 싸우는 일이 있고-만약 우리가 정말로 장성해 가고 있다면-승리하는 일이 자주 생긴다.
이 세상의 유혹
세상은 유혹자이다. 우리의 관심과 헌신을 이끌어 내려고 한다. 아주 가깝고 아주 잘 보이고 아주 매혹적이다. 하늘에 대한 우리의 시야를 가린다. 보이는 것이 우리의 관심을 끌어내려고 한다. 하나님이 세우시고 조성하시는 더 나은 나라를 바라보지 못하도록 우리 눈을 미혹한다. 그것은 우리를 기쁘게 하고-어쨌든 몇 배나 기쁨을 준다-슬프게도 우리는 세상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사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바로 거기서 투쟁이 이루어진다.
모든 세대 모든 문화에는 주도적이고 지배적인 정신이 있다. 독일인들은 그 뜻을 담아 “시대 정신”(Zeitgeist)이란 단어를 만들었다. 잘 알려진 두 개의 개념을 한데 엮어 만든 용어이다. “차이트”(Zeit)는 독일어로 “시간”(또는 시대)이란 뜻이며, “가이스트”(Geist)는 “정신”이란 뜻이다. 따라서 차이트가이스트는 “시간의 정신” 또는 “시대 정신”이란 뜻이 된다.
그리스도인들이 살고 있는 오늘날의 시대 정신은 세속주의적이다. 강조점이 이 세상에, 이 시대에 놓여 있다.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의 유혹을 거절하려면 시대의 물결을 거슬러 갈 각오를 해야 한다.
불순응을 하찮게 생각하기란 쉽다. 바리새인들이 그랬듯이 이것들 아주 단순한 형식들로 축소시킬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사회에 몸담지 않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변화하라는 부르심은 세상을 등지라는 뜻이 아니다. 더 이상 수도원이 필요 없다. 이 세상의 틀을 넘어선다. 이 세상에 변화를 일으켜야 한다. 예수님의 관점은 이 세상의 틀을 넘어선다.
우리는 세상에 굴복해서도 안 되고 세상에서 도피해서도 안 된다. 새롭고 다른 정신을 가지고 세상을 뚫고 들어가야 한다.
하나님의 구속 무대는 이 세상이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오신 곳은 바로 이 세상이다. 그리스도는 제자들이 두려워서 문을 걸어 잠근 채 다락방에 숨어 있는 것을 허락지 않으셨다.
변화산에 은둔처를 짓는 것을 허락지 않으셨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도피를 꾀하고 있는가.

복음주의적 도피
하나님은 변화된 정신을 요구하신다. 이것은 다른 관점을 가지고 세상을 보는 정신이다. 우리는 여전히 이교 철학자들을 공부한다. 그러나 “읽고 취사 선택하는 법”을 배운다. 다시 말해서 공부한 내용을 비판할 수 있는 능력을 주는 체계를 갖고 있다. 여기서 비판이란 말은 매사를 부정적인 정신으로 대한다는 뜻이 아니다. 주의하고, 분별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진리는 이 세상의 교훈을 평가할 수 있는 모눈 종이이다.
변화하라는 말씀은 정신을 새롭게 하라는 말씀이다. 새로운 정신은 하나님의 관점을 깊이 공부하는 데서 생긴다. 그렇게 하려면 성경을 능숙히 알아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정신을 드러낸다. 하나님의 정신을 더 많이 이해할수록 어네스트 헤밍웨이나 장 폴 사르트르에게 덜 위협을 받을 것이다.
세상은 우리가 성화해 가는 데 장애물이다. 그러나 바른 관점으로 대한다면 동맹자도 될 수 있다. 이곳은 여전히 우리 아버지의 세상이고 아버지께서는 세상을 멸시하시지 않는다. 구속할 만큼 세상을 크게 사랑하신다. 세상에 찾아오신다. 세상을 버리시지도 않고 포기하시지도 않는다. 이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닮아야 한다. 하나님과 똑같은 자세로 세상을 대해야 한다. 목표는 변화에 있다.





5
육체와의 전투

육체의 마음
“육체의 마음”은 단순히 “육체적 악에 관한 악한 생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육체의 마음은 하나님을 거스르는 “사고 방식”을 지닌 정신이다. 그것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원치 않는 타락한 인간의 정신이다. 성령께 인도를 받지 않는 사람의 정신이다.
바울은 육체(사륵스)와 성령(프뉴마)사이에 계속되는 전쟁에 관해서 설명한다.
갈라디아서5:16-21이 설명하는 대조는 사람의 영혼과 사람의 육체 사이의 대조가 아니라, 영 곧 성령께 인도를 받는 생활과 육체 곧 사람의 타락한 본성을 섬기는 생활 사이의 대조이다.
이것은 타락한 본성을 지배를 받는 옛사람과 하나님의 영계서 내주하시는 새사람간의 갈등이다. 여기서 성령과 육체는 반대된다. 화해할 수 없는 투쟁을 벌이고 있다. 본성이 타락한 육체는 성령께서 우리 생활을 주관하시는 것을 거부한다. 육체는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을 극복하려고 한다.
확실히 투기와 시기의 죄를 저지를 때는 우리 몸이 관련된다. 우리는 몸 없이는 어떤 일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투기는 육체적 행위가 아니다. 정신적 태도에 관련된다. 우리의 정신, 우리의 사고과정에 관련된다.
신약성경에 성령과 직접 대조하여 육체(사륵스)를 말할 때 주로 언급하는 것은 몸이 아니라 전인을 포함하는 우리의 타락한 본성이다. 두 가지 생활 방식간의 갈등이다. 죄에 대한 욕구에 지배를 받는 육체의 생활과 우리를 의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데로 인도하는 성령의 생활간의 갈등이다.
성령의 인도를 받음
정신만 옳다면 겉으로 어떻게 행동하든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자기 기만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온갖 죄를 정당화한다. “사랑”이 간음을 정당화한다고 말한다. 청소년들은 사랑하기 때문에 그랬다는 말로 간음을 변명한다. 저녁 식사를 한 뒤에 다이어트를 하겠다고 결심하기란 쉽다. 하지만 저녁 식사 전 시장기가 우리의 의지를 공격할 때는 상황이 달라진다.
성령께서는 절제를 가르쳐 주고 싶어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육체의 욕구를 억제하고 그것에 재갈을 물리라고 하신다. 식욕 자체는 죄가 아니다. 우리 몸의 정상적인 기능이다. 그러나 식욕을 절제하지 못하면 폭식을 하게 된다.
하나님은 육체적 쾌락 없이 자손을 낳을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여 우리를 지으실 수 있었다. 그러나 창조주께서는 더 나은 방법을 택하셨다. 성은 거기에 따르는 모든 신체적 즐거움과 함께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나 그 선물을 사용할 때는 하나님이 정하신 규제가 딸려온다. 죄는 하나님의 선물을 오용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허락지 않으신 방법으로 선물을 사용하는 것이다.
절제는 성 행위의 규율이다. 우리는 성 행위에 대해서 하나님께 책임을 지고 있다(엡5:3). 정신과 의사들은 혈기왕성한 청년들에게 음행은 아주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일이라고 말한다. 그들의 평가는 부분적으로는 옳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말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금하신다.
동성애의 성향을 갖고 있는 사람의 곤경을 생각해 보자. 이 사람은 심각한 딜레마에 빠져 고민한다. 하나님은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 사이의 성 행위를 분명히 허용치 않으신다.
육체는 세상과 동지이다. 칭의를 그리스도의 의에서 얻으려 하지 않고 이 세상의 표준에서 얻으려고 한다. 육체는 세상과 동지이며 세상은 사탄과 동지이다. 여기서 원수는 우리를 성령에게서 끌어내 육체에 굴복시킴으로써 우리를 파멸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성령은 신자의 동지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기들을 도우실 성령이 계시다는 점을 잊은 채 매일 우리 정신과 육체가 이 타락한 세상을 동지로 생각하는 게 얼마나 슬픈 일인가. 육체가 인간 행동을 지배하는 듯이 보이는 이 세상에 성령께서는 여전히 계시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게 한다.





6
마 귀

세상, 육체, 마귀. 이 세 원수 중에서 가장 가공할 원수는 마귀이다. 사탄은 그냥 우리의 원수가 아니다. 철천지 원수이다. 그는 어둠의 주관자, 거짓의 아비, 형제들의 참소자, 간교한 뱀이라 불린다.
우리가 마귀와 맞서 싸우는 가운데 반드시 이해해야 할 첫째 사항은 실제로 마귀가 있다는 점이다. 사회의 많은 부분에서, 심지어 일부 교회에서조차 마귀라는 실제 존재가 있다는 개념을 원시적 신화로 간주한다.
교만하고 강한 사탄
중세 교회는 사탄의 실재를 믿었다. 사탄이 지나친 교만으로 고통을 겪는 타락한 천사라고 생각했다. 교만은 사탄에게 가장 큰 약점이었다. 교만하되 타락한 피조물인 사탄을 거부하기 위해서는 격렬한 전투를 벌여야 했다. 전투는 사탄의 가장 취약점인 그의 교만에 초점이 맞춰졌다.
성경에 나오는 사탄의 이미지는 “광명의 천사”(고후11:14)의 이미지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숩 스페키에스 보니(sub species boni,선한 모습으로)로 나타내는 사탄의 탁월한 능력을 가리킨다. 사탄은 간교한 사기꾼이며, 웅변이 뛰어나고 외모는 놀랄 만큼 아름답다. 어둠의 주관자는 광명의 옷을 입고 다닌다.
두 번째 이미지는 울부짖으며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니는 사자의 이미지이다(벧전5:8).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데 쓰인 표상인 사자가 적그리스도의 원형인 사탄에 의해서도 사용된다는 점을 눈여겨 보라. 그 적(敵), 즉 사자는 게걸스럽다. 반면에 유다의 사자는 구속하신다.
두 사자의 인유(引喩)에서 힘의 상징을 발견한다. 물론 사탄에게는 그 힘이 악하고 마귀적인 힘이긴 하지만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만큼 강하지는 않다.
사탄이 우리를 속이는 데 자주 사용하는 방법 두 가지가 있다. 그는 한편으로는 자신의 힘을 과소 평가하게 만들려고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힘을 과대 평가하게 만들려고 하는 때도 있다. 어느 경우든 그는 우리를 속이고 우리를 걸려넘어지게 할 수 있다.
사탄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현혹할 수 있다면 감지되거나 배척되지 않은 채 자신의 간계를 실행할 수 있다.
베드로는 사탄을 과소 평가했다. 베드로는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다가 넘어졌다.
사탄을 과소 평가하면 멸망의 선봉인 교만 때문에 고통을 당하게 되고 과대 평가하면 그에게 과분한 영예와 존경을 주게 된다.
사탄은 피조물이다. 유한하고 제한되어 있다. 하나님께 종속된 존재이다. 사탄은 사람들보다는 강하지만 하나님과는 대할 수 없다. 신적 속성을 갖고 있지 않다.

귀신들에 대한 지나친 관심?
예를 들면 특정 단계의 예속과 관련된 뚜렷한 표시에 의해서 귀신이 인간 영혼에게서 떠나는 것을 알 수 있다는 말을 듣는다. 특정 귀신이 특정 죄를 일으킨다는 말을 듣는다. 술 귀신, 우울증 귀신, 담배 귀신 따위가 있다고 한다. 파악 가능한 모든 죄에는 귀신들이 있다. 이 귀신들 하나하나를 다 내쫓아야만 할 뿐 아니라 그들이 일상에 다시 돌아오지 못하도록 막는 데 필요한 절차들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건 당치도 않은 소리이다. 이런 가르침은 마술의 선을 넘는 것이며 그들에게 속는 신자들에게 치명적인 해를 끼친다. 슬프게도 사탄과 귀신들에 대해 지나치게 큰 관심이 형성되어 있다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께 초점을 덜 두고 있음을 뜻한다. 그것은 틀림없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지 못하고 사탄을 기쁘게 만들 것이다.
성경은 사탄이 우리를 억압하고 공격하고 유혹하고 비방하고 고소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인은 귀신에게 사로잡힐 수 없다. 주의 성령이 계시는 곳에는 자유가 있다. 성령이 내주하시는 사람이 동시에 악한 영에게 지배를 당할 수 있다면 우리의 구속은 물거품으로 돌아간다.
사탄과 귀신들을 이렇게 지나치게 강조하는 추세는 또 한 가지 중대한 위협인 바로 우리 죄로부터 눈길을 돌리게 만든다. 물론 마귀가 있다. 귀신들도 정말로 있다. 그러나 죄의 실재로 있다. 우리가 계속 죄를 짓는 데에 사탄이 동조자일 수 있다.
그러나 자기 죄에 대한 추궁과 책임을 귀신에게 떠넘길 수는 없다. 꼭 마귀에게 사로잡혀야만 술에 취하게 되는 건 아니다. 스스로 술 취할 수 있는 악한 성향이 우리 속에 충분히 자리잡고 있다.
유혹자와 아담
사탄이 우리를 공격할 때 사용하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유혹과 고소이다.
사탄의 질문은 하나님의 정직을 간접적으로 공격하는 것이다. 창세기3장에서사탄이 유혹하는 데 사용하는 데 사용한 방법은 하나님의 진실성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사탄은 하나님을 거짓말장이로 비판할 뿐 아니라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신 이유까지도 하와에게 제시한다.
하나님이 시기해서 그러셨다고 지적한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의 눈이 열리는 걸 원치 않으셨다고 거짓말을 한다. 사탄은 하나님의 정직성을 총체적으로 공격한다.
사탄은 지금도 매일 같이 인간의 정신에서 기생한다. 우리는 매번 죄를 지을 때마다 하나님이 내게 하기를 바라시는 일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어하기 때문에 죄를 짓는다. 우리는 마음속 깊숙이 하나님의 율법이 공정하지 않다는 패역한 생각을 품고 있다.
유혹자와 그리스도
이번에는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시험을 생각해 보자. 첫째, 아담과 하와가 시험을 받던 상황과 예수께서 시험을 받던 상황이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자. 아담이 받은 시험은 낙원 한복판에서 이루어졌다. 아담은 곁에서 위로해 줄 사람이 있었다. 배 고프지도 않았다. 손만 내밀면 맛있는 음식을 얼마든지 먹을 수 있었다. 모든 걸 쉽게 사용할 수 있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그리스도께서는 혼자였다. 고독한 중에 주변환경도 최악이었다. 유대 광야는 전갈, 덤불, 그리고 몇 종의 새들의 서식처였다. 온정을 나눌 사람이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예수님은 사십 일 동안 조금도 음식을 드시지 못한 채 시험을 받았다. 드실 열매도 없었고 고를 나무도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 판이한데도 아주 비슷한 점들이 있었다. 우선 쟁점이 똑같았다. 그것은 하나님 말씀의 진실성이었다.
불신앙의 시험
아담과 예수님이 받은 두 경우의 시험에서 쟁점은 하나님의 말씀의 신뢰성에 초점이 맞춰졌다. 만약 사탄이 하나님의 말씀의 정직성을 의심할 만한 상황이 된다면 우리가 타락할 여건이 마련되는 셈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것이 모든 죄의 근원이다. 일단 하나님의 진리를 제쳐 둔다면 우리 눈에 옳은 일을 하는 것을 막을 장치가 없게 된다. “우리의 일”을 하는 것이 불순종의 본질이다. 그리고 우리 눈에 옳은 것에만 계속해서 초점을 둔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려는 노력은 할 수 없게 된다.
불신앙이 왜 죄인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의로운 성품을 비방하는 죄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하나님 자신이 모르신다고 주장하는 것이거나,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사실상 악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어느 경우든 하나님의 정직성을 공격하는 셈이다. 하나님의 전지가 문제가 되든 하나님의 의가 문제가 되든 둘 중의 하나이다.
믿을 이유가 없는데 믿는 것은 덕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을 요구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친히 명확하고 뚜렷한 증거를 가지고 말씀하시는 것을 우리에게 믿을 것을 요구하신다. 먼저 예수님을 무덤에서 일으키신 뒤에야 비로소 부활을 믿으라고 하신다.
항상 거짓말만 하고 항상 약속을 어기는 사람을 아무리 무조건 믿으라고 해도 믿음이 잘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다. 그런 결함을 조금도 갖고 계시지 않다. 우리 자신에게서 발견하는 그런 부정직을 하나님께 전가해서는 안 된다.
만약 사탄이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절대적 신뢰를 무너뜨릴 수 있다면 그의 시험의 목표는 달성된다. 그러면 우리는 불신앙의 시험에 떨어진다. 아담은 떨어졌다. 그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힘입어 사셨다. 아버지께 대한 예수님의 신뢰를 사탄은 흔들 수 없었다. 예수님은 시험자에게 넘어가시지 않았다.
예수님은 거짓말장이 사탄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을 잘 구분하셨다. 이기적인 의심과 회의 대신 신뢰와 믿음을 보이셨다.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님은 자기 자녀들이 자신을 신뢰하는 데서 기쁨을 얻으신다.




7
참소자 사탄
사탄은 유혹하는 데도 유력하지만 고소하는 데도 가공할 힘을 발휘한다. 지난 장에서는 우리가 시험자 사탄을 배척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린다는 것을 보았다. 이 장에서는 우리가 죄를 짓더라도 고소자 사탄의 조롱을 귀담아 듣기보다 하나님의 자비에 우리 자신을 내맡기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신다는 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사악한 고소자
사탄은 하나님 백성의 고소자로서 자신을 성령으로 가장하여 우리를 도덕적 혼란이라는 수렁에 묻어 버릴 수 있다. 그는 우리가 죄책감을 느껴야 할 때 평안을 느끼도록 만들 수 있고 평안해야 할 때 죄책감을 느끼도록 만들 수 있다(슥3:1-7).
모든 그리스도인은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이다. 지옥에서 건져낸 그슬린 나무이다. 그것을 화염 한가운데서 끄집어 낸 뒤에는 열이 더 이상 그 나무를 태울 수 없다. 그 나무는 잠시 그슬리겠으나 살아 남는다.
그슬린 나무는 더럽다. 누가 쥐든 손에 검정 표식이 생기게 한다. 그 표면은 재와 검댕으로 덮여 있다.
우리가 바로 그렇다. 우리는 주님의 손으로 불 가운데서 꺼낸 바로 하나님의 구속된 자들이지만 여전히 재에 덮여 있다. 재가 그대로 남아 있다. 여전히 검댕으로 얼룩져 있다. 우리는 구속을 받았으나 철저히 무죄하지는 않다. 사탄은 즉각 검댕을 지목한다. 그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보다 우리 자신의 죄를 더욱 의식하게 만들고 싶어한다.
주님의 천사는 여호수아의 더러운 옷을 벗기고 아름다운 옷을 입혀 주었다. 깨끗한 관을 머리에 씌워 주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구속받은 자기 백성에게 이렇게 옷을 입혀 주신다. 우리는 그분의 의를 옷입음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당황하지 않아도 된다. 올바로 옷을 입는 게 참으로 중요할 수 있다. 하나님이 주신 옷은 누추한 속옷을 가려 줄 뿐 아니라 우리를 말쑥히 단장해 준다. 일단 이 옷으로 단장하면 다시는 당황할 일이 없다. 이 옷은 닳지 않고 유행에 뒤떨어지지도 않는다. 지금도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그러나 죄에 얼룩진 자기 백성들에게 옷을 지어 주신다.
스가랴는 주께서 여호수아의 죄과를 제거하신 뒤 깨끗한 옷을 입히셨다고 기록한다. 주께서는 여호수아를 훈계하셨다. 즉 친절하고 인자한 방식으로 그를 책망하셨다. 이 짧은 기사에서 여호수아는 사탄의 정죄와 하나님의 훈계를 동시에 들었다.
차이가 무엇일까? 사탄이 고소하는 목표는 우리를 해치려는 것이다. 그는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몰아내고 싶어한다. 성령께서 죄를 깨우쳐 주시는 목표는 우리를 죄에서 돌이키게 하시려는 것이다.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하여 하나님께 가까이 가도록 만들고 싶어하신다. 사탄은 우리를 우리 죄 때문에 망하게 하려고 한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우리 죄책에서 구원하시려고 하신다. 사탄과 성령 모두 똑같은 죄에 주의를 집중시키지만 그러나 목표는 판이하다.


8
두려움과 죄책감이라는 무력증

루스벨트 정부가 어려운 시기를 맞이했을 때 대통령은 “우리는 두려움 자체를 빼놓고는 아무것도 두려워할 게 없습니다”라는 유명한 발언으로 전국민을 결집시켰다.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두려움을 강력한 적으로 이해했다. 그것이 국민을 무력하고 단단히 예속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두려움은 여러 형태를 띤다. 신체적 손상에 대한 두려움, 실패에 대한 두려움, 책임과 기대가 수반되는 성공에 대한 두려움이 그 안에 포함될 수 있다.
두려움의 뿌리는 아마 무엇을 어리석게 말하거나 행동하는 데 대한 두려움에 있을 것이다. 묘하게도 두려움 자체가 그런 효과를 낸다.
변화에 대한 두려움
우리는 우리가 성취한 업적의 수준으로 만족해 하는 경향이 있다. 그 수준 이하로 떨어지면 신념과 자신감을 잃게 된다. 그것이 우리의 편안한 수준을 방해한다. 그러나 정상적인 수준 이상의 업적을 성취해도 마음이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이상하고 낯선 수역에 던져진다. 무엇을 에상해야 할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새로운 책임 영역에 서게 된다.
우리는 모든 분야에서 편안한 영역이 있다. 편안한 영역은 운동에만 있는게 아니다. 경제적, 학문적, 사회적, 영적으로도 편안한 영역이 있다. 너무 급하게 지나치게 많은 변화가 닥쳐오면 무력증에 이를 정도로 해를 받을 수 있다. 우리는 변화에 대처할 수는 있지만 너무 많은 변화에 대처하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현실에 안주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런 경향이 프로 선수들-그리고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지나치게 분투하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다.
우리는 “잘 적응한다”라는 말을 한다. 그 말이 무슨 뜻일까? 적응한다는 것은 살면서 일어나는 변화에 대처하는 것이다. 적응한다는 것은 안락한 영역에서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쉽지 않다.
그런데도 모든 그리스도인은 변화의 요구를 받는다. 영적으로 전진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하나님은 결코 완만한 분이 아니며, 우리에게도 완만히 지내는 것을 용인치 않으신다. 그러나 변화가 생기면 두려움을 주는 요소도 따라온다.
두려움과 죄책감의 연관성
두려움은 죄책감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둘 다 사람을 무력하게 만드는 강한 힘을 갖고 있다. 둘 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도록 가로막을 수 있다. 둘 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큰 목표에서 우리 관심을 멀어지게 할 수 있다.
현대인은 하나님의 공포에 대한 생각을 떨쳐 버리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는 듯하지만, 그런 두려움을 자기 양심에서 말끔히 씻어 버리지는 못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죄책을 물으시기 위해서 언제든 우리에게 닥칠 태세를 하고 계실 거라는 두려움이 항상 떠나지 않고 남아 있다. 우리는 여전히 밤에 길을 가다가 부딪히는 것들을 두려워한다.
우리 안에 영원히 내재해 있는 어둠에 대한 두려움은 아마 하나님 대한 두려움이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 같다. 하나님이 우리 죄로 하여금 결국 우리를 붙잡고야 말게 할 것이라는 두려움 말이다.
죄책감을 생각할 때 죄책과 죄책감을 구분해야 한다. 죄책감은 주관적이다. 그것은 우리 내부에서 생긴다. 실제로는 죄책이 없는 데도 죄책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죄책은 객관적이다. 현상을 그대로 포함한다. 죄를 지으면 반드시 죄책이 일어난다. 죄책은 하나님과의 채무 관계를 형성시켜 놓는다. 죄책은 죄와 결함되어 있다.

실제적인 죄책에 직면함
작위로든 부작위로든 하나님의 율법을 어길 때 죄책이 생긴다. 죄책은 실제적이고 객관적이다. 또한 그것은 사람을 황폐케 한다. 죄책감은 죄책에 따른 것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다들 아는 대로 죄책감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그런 감정을 없애기 위해서 사람들은 온갖 수단을 동원한다. 자신을 변명한다. 합리화한다. 책임을 다른 사람이나 상황에 떠넘긴다. 사회를 탓한다. 자기의 환경을 탓한다. 책임에 따르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한다. 피할 수 있는 온갖 장치를 다 사용한다. 죄책은 그만큼 현실적으로 크기 때문이다. 그것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크며, 정당한 방법으로 대처하지 않고는-즉,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에 호소하지 않고는-죄책에서 도망치는 데 무수한 시간과 정력을 들여야 한다.
사람은 살면서 각자의 마음을 강퍅케 하는 법을 터득한다. 그러다가 마음을 말끔히 닦을 수 있는 능력을 잃을 수도 있다. 예레미야는 유다에게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다. “네가 창녀의 낯을 가졌으므로 수치를 알지 못하느니라”(렘3:3).
여기서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것이 죄책감을 억누르는 것과 연관된 것을 보게 된다. 유다 백성은 줄곧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면서도 자기들의 무죄를 항변했다. 거듭 짓는 죄로써 창녀의 낯을 갖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수치를 모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죄책감이 들지 않는다고 해서 실제 죄책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죄책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때에만 사라진다. 그 바른 관계는 아무 때라도 얻을 수 있다. 우리는 용서의 하나님을 섬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녀들에게 용서를 구하라고 강요하시지는 않는다. 자녀들은 결심을 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정신과 의사가 시원스럽게 설명해 줄 수 없는 죄책을 끌어안고 고뇌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삶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다음 두 가지 기본적인 질문을 반드시 스스로에게 던져야 한다. 나는 영적으로 성장해 가는 동안 언제 무기력해지는가? 왜 무기력해지는가? 만약 이 두 질문에 정확히 대답할 수 있다면 반드시 해결되어야 할 두려움과 죄책의 영역들이 정확히 어디인지 진단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특히 사죄의 은혜-는 우리가 무력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구해 얻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력하게 살기를 바라시지 않는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안전감을 느끼고 삶으로써 세상과 그 장애물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되기를 바라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죄를 자각하기를 바라시지만, 죄책에 짓눌려 무기력하게 지내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세상의 여느 좋은 부모와 마찬가지로 우리를 두려움과 죄책에서 이끌어 내시고 그로써 우리로 하여금 옳고 즐거운 일을 자유롭게 하도록 만드시기 위해서 애쓰신다. 얼마나 큰 자유를 우리에게 내미시는 것인가? 죄책으로부터의 자유,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 우리의 모든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고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는 자유를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신다. 세상의 어느 정신과 의사도 그런 삶을 우리에게 줄 수 없다.

9
참용서
절실하게 필요한 사죄의 확신
슬프게도 많은 프로테스탄트 교도들은 죄 사함의 확신을 느끼지 못한다. 그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다. 마치 십자가 사건이 발생하지 않은 것처럼 산다. 예수님의 대속으로는 우리의 죄를 충분히 덮을 수 없다는 해묵은 느낌을 품고 산다. 은혜는 다른 사람에게나 필요한 것처럼 느낀다. 자신의 죄를 속하기 위해서 어떤 배상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사람들에게 값없이 죄 사함을 주신다. 그러나 마음껏 죄를 지을 수 있는 면허장을 주시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회개치 않는 자들에게 평안을 주시는 분이 아니다. 그 평안은 잘못된 평안이요 거짓 평안이다.
우리는 우리 빚을 갚을 수 없는 채무자들이다. 우리는 불의한 청지기와 같은 사람들이다. 그 불의한 청지기는 주인으로부터 셈을 하라는 말을 듣고는 이렇게 생각했다.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자니 부끄럽구나”(눅16:3),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로 됨-한글 개역)
그것이 우리의 딜레마이다.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자니 부끄럽다. 그러나 빌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빚을 갚을 수 없는 채무자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이다.
우리는 은혜에 힘입어 산다. 사죄에 힘입어 걷는다. 우리 죄를 자백할 때 하나님이 용서해 주신다고 하신 그 확실한 약속을 기뻐한다.
용서와 반복되는 죄
결혼 서약을 파기한 상황에 대해서는 용서를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 간음을 범하고 참회하는 사람과 이혼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푸는 데에는 기본적으로 세 가지 해결책이 있다.
해결책1: 어떤 근거에서도 이혼은 정당화할 수 없다고 확신하는 많은 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이 사람들에게 해결책은 간단하다. 남편이 회개하지 않더라도 아내는 이혼할 수 없다.
해결책2: 남편이 회개하지 않을 경우 아내는 정당하게 이혼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남편이 회개하면 아내는 그를 용서하고 계속 같이 살아야 할 의무가 있다.
해결책3: 남편이 회개하더라도 아내는 이혼권을 정당하게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내는 남편을 반드시 용서하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형제로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계속 부부로 남아 있어야 할 의무는 없다. 결혼권 포기를 그 범죄에 대해서 가할 수 있는 사회의 형벌의 일환으로 본다.
이런 쟁점들은 해결하기가 대단히 어렵지만 한 가지 점은 분명하다. 그것은 용서한다고 해서 반드시 형벌도 배상도 가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용서한다는 것은 개인 관계를 경색시키지 않은 채 유지하겠다는 뜻이다. 개인 관계에 죄가 다시 끼어들지 못하게 하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남에 대해서 죄의 기록표를 작성해서는 안 된다. 먼젓번 죄에 대해서 형제를 용서하고 죄를 제쳐 둔다면 형제에게 그 죄 때문에 형제를 적대시 하지 않겠노라고 약속하는 것이다. 그가 다시 죄를 지으면 그 죄는 먼젓번 죄와 아무런 상관도 없기 때문에 “이번이 첫 번째요!”라고 말해야 한다.
“한 번 속으면 상대가 밉고 두 번 속으면 나 자신이 밉다”라는 말이 있다.
같은 죄를 두 번 용서한다는 건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일곱 번 용서하려면 인내력의 한계에 도달해야 한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명령을 듣고서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눅17:5)라고 말한 게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과거의 죄에 대한 용서
과거의 아내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고 자유롭게 재혼해도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종종 그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점을 근거로 댄다. 새로 태어났으므로 이제는 과거와 동일한 사람이 아니고 따라서 회심 이전의 행위에 대해 책임질 일이 없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성경 원칙에 대한 심각한 왜곡이다. 물론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인 건 사실이지만, 새로운 피조물은 다름아닌 “나” 곧 스프룰(R.C.Sproul)이다. 스프룰이 거듭날 수 있지만 새 스프룰과 옛 스프룰 사이에는 개인적 연속성이 있다. 새 스프룰이 됐다 하더라도 여전히 옛 스프룰이 진 빚을 갚아야 한다.
다음 시나리오를 생각해 보라. 오후 4시에 스미스씨가 사장의 돈 천 달러를 훔친다. 그러다가 오후 5시에 회심한다. 그러면 훔친 돈을 그냥 가져도 될까? 정반대이다. 회개는 개인의 의무를 없애는 게 아니라 오히려 늘려 녾는다. 거듭난 사람은 빚을 갚겠다는 생각을 훨씬 더 면밀하게 해야 하고 언제든 기회만 되면 충분히 갚아야 한다.
충분한 배상이 진정한 회개의 핵심이다. 진정으로 용서를 받으려면 진정으로 회개해야 한다. 정말로 철저히 용서를 받으려면 정말로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생각이라면 회개해야 한다. 그 대가가 클 수 있다. 사실상 그 대가가 크다는 것을 알 때에야 비로소 “값없는 은혜”의 진정한 뜻을 발견하게 된다. 온전히 용서를 받는 것은 가치가 무한히 크다. 온전히 용서를 받을 때 얻는 유익과 비교할 때 회개의 대가는 턱없이 싸다. 이 세상의 사죄의 은혜만큼 싼 거래는 없다.
우리가 섬기는 용서의 하나님은 친히 내미시는 용서를 우리가 감사히 받을 때 기뻐하신다. 또한 우리가 장성한 사람답게 책임을 지고 과거에 남들에게 저지른 죄를 바로잡을 때 기뻐하신다. 신약성경을 정확하게 읽어 보면 하나님 나라는 책임을 질 줄 알고 용서를 베푸는 사람들로 이루어지는 것 같다.





10
육적인 그리스도인
죄책과 두려움이 평생 지고 가야 할 무서운 짐이라는 것을 앞에서 살펴봤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악을 옮기실 때, 우리의 죄악을 우리에게서 옮기실 때 우리는 세상의 그 어느 것과도 비견할 수 없는 자유를 경험한다. 고대의 많은 문화권에서는 냉혹한 살인자를 희생자의 시체에 사슬로 묶어 놓는 관습이 있었다. 썩어가는 시체에 묶여 있는 것을 상상해 보라. 그냥 가까운 곳에 시체를 놓고 썩어가도록 방치해 두기만 해도 사람들을 미치게 만들기에 넉넉할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아주 적절한 유추이다. 우리의 옛 본성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 옛사람은 사형 판결을 받았다. 우리는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죽었다고 여겨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성령께서 살리신 새로운 피조물이다.
그러나 여기에 우리의 딜레마가 있다. 옛사람은 죽었다고 선언되었으나 우리가 그에게서 완전히 해방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비참한 옛 본성을 끌고 다닌다. 시체가 자기가 죽은 줄을 모르는 것과 같다.
나는 그 딜레마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 적이 있다. 우리의 옛 본성은 모가지가 잘린 닭과 같다. 닭은 온 마당을 뛰어다니면서 날개를 치고 꽥꽥 거린다.
모가지가 없는 닭은 울 수 없지만 우리 옛 본성은 미친 듯이 울어댄다. 도대체 죽었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난동을 부린다. 한마디로 옛사람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죄를 짓도록 자극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매일 신선하고 생명력 넘치는 사죄를 체험하길 바라고서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는 것이다.
반율법주의의 견해
로마서 7장은 많이 논쟁이 되는 주제이다. 복음주의 기독교권에는 그리스도인들에 두 가지 부류가 있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다. 두 부류란 육적 그리스도인과 영적 그리스도인이다.
육적인 그리스도인이란 함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항상 육욕에 지배를 받는 생활을 하면서 성령의 열매는 맺지 못하는 사람이다. 육적인 그리스도인이란 표현에는 엄청난 모순이 담겨 있다.
그런 사람은 육적인 그리스도인이라 부를 수 없을 것이다. 반율법주의는 불순종의 아들들 속에서 역사하는 불법의 영이다. 육적인 그리스도인이 말하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다. 그것은 불경건한 자에게 의롭다 함을 얻게 할 수 없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없다.
의롭다 함을 얻게 하는 믿음이 신자의 삶에 존재하는 그 순간 그 사람은 변하기 시작한다. 그 변화는 순종으로 향하는 삶으로 입증될 것이다. 선행은 참 믿음에서 필연적으로 흘러나온다. 그 행위가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이다. 그러나 선행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참믿음을 갖고 있지 않고 따라서 여전히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한 사람이라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따라서 결론은 구원을 얻으려면 입으로 믿음을 고백해야 하지만 단순히 믿음을 고백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고백하는 바를 소유해야 한다. 우리를 의롭다 하는 것은 단지 믿음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믿음을 소유하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육체의 옛 본성과 투쟁하는 한 “육적”이다. 그러나 육체가 삶을 전부 지배한다는 의미에서는 어떤 참 그리스도인도 육적이지 않다. 만약 육적인 면이 철저히 지배하고 있다면 우리는 아직도 거듭나지 않은 줄을 스스로 알 것이다. 우리는 옛사람을 극복하기 위해서 성령충만한 생활을 하라는 부르심을 받는다. 성령 충만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 속에 있는 죄의 세력 때문이다. 우리는 이 거룩한 충만을 구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린다. 하나님은 우리가 “완전한” 상태에서 즐거워할 때 기뻐하시지 않고 하나님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사망의 몸”을 혐오할 때 기뻐하신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그 사망의 몸은 하나님의 은혜로 점점 더 그 의미가 줄어들 것이다.

11
교만이라는 죄
칼바르트(Karl Barth)는 타락한 사람이 다른 모든 죄의 뿌리가 되는 세 가지 주된 또는 기본적인 죄를 갖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것은 교만, 나태, 부정직이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다. 패망은 붕괴를 뜻한다.
무엇이 교만일까? 자기 일에 자부심을 갖거나 아름다워 보이기를 바라는 것은 악하지 않다. 이런 문제들은 단순히 인간의 존엄에 관한 관심사들이다. 좋은 직업을 가지고 싶어하는 건 죄가 아니다. 뛰어나려고 노력하는 것은 덕이지 악이 아니다. 자기 해 놓은 일을 보고 마음이 뿌듯한 것은 일이 잘 된 데 대한 만족감을 갖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도 친히 이루신 일이 보시기에 좋았다고 했다.
잠언은 자부심과 교만을 관련짓는다. 교만은 건방진 자세를 갖는다.
에덴 동산에서 최초의 죄는 교만의 죄였다. 뱀의 유혹은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는 말과 함께 왔다(창3:5). 뛰어나게 된다는 것과 하나님과 동등하게 된다는 것은 전혀 별개이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유혹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크다. 우리는 법에 예속되기를 싫어한다. 상대방의 권위가 너무 클 때는 그 밑에 들어가기를 주저한다. 자유로운 것을, 모든 규제에서 모든 책임에서 자유로운 것을 좋아한다.
참된 겸손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라고 하신다. 그리스도는 육신이 되심으로써 자기를 비우셨다. 신성을 비우시거나 신적 속성들 가운데 어느 하나를 비우시지는 않았다. 자신의 지위를 버리셨다. 하나님으로서 갖고 계시던 대권을 포기하셨다. 자기 지위 이하에 해당하는 대접을 받기로 작정하셨다. 지극히 존귀하신 분이 보이신 이러한 모범은 순종보다 교만을 앞세우는 모든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든다.
지위의 매력은 대단히 크다. 장성하려는 그리스도인에게 두려운 장애로 나타난다. 우리 모두가 그것에 취약하다. 모두가 남들의 존경을 갈망한다.
1960년데 초반에 있었던 쿠바 미사일 위기 때 케네디 대통령은 러시아의 미사일들을 쿠바에서 철수시키라고 요구했다. 미국은 쿠바에 함대를 파견했다. 그와 동시에 니키타 후르시초프도 소련 함대에게 쿠바로 향하도록 명령했다.
세계가 숨을 죽였다. 월터 크론카이트는 매시간 소련 함대의 진행을 뉴스로 알렸다. 군대들이 아마겟돈을 향해 질주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러시아는 눈을 깜박거리고 말았다. 소련 함대는 항로를 바꾸어 귀대했다. 케네디로서는 큰 승리였다. 후르시초프로서는 대단한 치욕이었고, 결국 그 사건으로 인해 그는 실각했다.
그런 다음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케네디는 쿠바에 현지 사찰을 요구했다. 후르시초프는 거절했고 케네디는 자신의 요구를 철회했다. 기자들이 케네디에게 왜 요구를 철회했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분쟁에서 이겼습니다. 이제는 소련 수상에게 명예스러운 퇴로를 내주는 게 중요합니다.”
케네디의 외교는 후르시초프의 자존심을 약간이나마 지켜 주는 쪽을 지향했다. 그는 소련 수상을 코너로 몰아 그에게 아무런 위엄도 남아 있지 않게 만들기를 원치 않았다. 나는 케네디가 덜 민감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생각할 때마다 몸이 오싹해진다. 그런 대결 국면에서 자존심 싸움이 벌어졌다면 세계는 파멸로 치달았을지도 모른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자존심은 어떤 위치를 차지할까? 아무 위치도 차지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만 그리스도의 겸손을 드높인다. 순종, 겸손, 자존심과 교만을 끊임없이 거둬들이는 것-이런 것들은 지위와 명성을 가치 있게 여기는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어리석게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우주의 주재를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이 세상과 다른 가치관을 갖고 사는 것임을 확신한다. 그분은 우리에게 겸손하게 사는 게 무엇인지 아주 탁월한 모범을 보여 주셨다. 우리에게 그냥 교만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시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방법을 몸소 보여 주셨다.



12
게으름이라는 죄
하나님은 일하시는 하나님이다. 성경이 하나님께 대해서 맨 먼저 묘사하는 내용은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다. 하나님은 최초이자 최고의 생산자이다. 모든 생산의 근원이 그분이다. 타락한 인간에게 내린 저주가 노동의 유쾌하지 못한 면을 강조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노동 자체가 인간에게 내린 저주의 일부라는 결론을 지레 내린다. 그러나 죄가 세상에 들어오기 전부터 남자와 여자는 창조주께로부터 할 일을 받았다.
에덴 동산에서 일하는 아담을 상상해 보라! 그때에는 가시도 엉겅퀴도 잡초도 없었다. 잡초가 없는 동산을 관리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아담이 동산을 관리하며 할 일이란 가지를 치고 열매를 따고 다듬는 등 아주 쉬운 것이었다.
잡초와의 끝없는 전쟁을 벌일 필요가 없다. 손톱과 피부 사이를 찌르는 가시도 없었다. 매일 할 일을 하면 풍성한 소출을 기약할 수 있었고 땀을 흘릴 정도로 애써서 일하지 않아도 되었다. 타락 이전에 하나님은 사람으로 하여금 동산에서 일하게 하시기를 기뻐하셨다. 그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사람으로서는 하기가 즐거웠고 창조주로서는 지켜 보는 게 즐거웠다.
일단 죄가 세상에 들어온 뒤에는 모든 게 변했다. 동산을 관리하는 게 아주 힘든 노동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아담이 받은 저주이다.
가시, 엉겅퀴, 땀, 죽음 이런 것이 저주의 요소들이다. 이것이 피와 땀과 눈물이라는 인간 고통의 3대 요소의 기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 자체가 저주는 아니다. 타락 이전과 마찬가지로 이후에도 노동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일하는 모습을 보고서 기뻐하신다.
노동자 인간
우리는 우리 인간을 생각할 때 자신을 대개 호모 사피엔스(homosapiens),즉, “지혜자 인간” 또는 “생각하는 동물인 인간”으로 정의한다. 우리의 사고 형식을 인간의 독특한 특성으로 지적한다. 또 하나의 라틴어로 호모 파베르(homo faber)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생산자 인간” 또는 “노동자 인간”이란 뜻이다.
칼 마르크스(Karl Marx)는 노동이 인간 삶의 핵심이라고 확신하고서 인간에 대한 정의도 노동과 관련지었다. 달리 말해서 노동은 저주가 아니라는 말이다. 노동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정의하고 만족과 보람을 주는(또는 당연히 주어야 하는)어떤 것이라는 말이다.
우리가 하는 일은 우리 자신의 정체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하는 일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 하는 것도 똑같이 중요하다. 생산적이고 열매맺는 사람이 되려면 헌신하는 자세로 일해야 한다.
일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인간이 가장 근본적 의무 중 하나를 이행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우리는 때로 아담에게 내린 저주의 무게에 짓눌려 신음하지만, 가시, 엉겅퀴, 땀 때문에 일을 할 수 없다고 핑계할 수 없다.
직업(vocation)이란 단어는 “부르다”라는 뜻의 라틴어 보카레(vocare)에서 유래했다. 우리의 직업은 부르심이다. 하나님께서 내리신 소명이다. 직업을 회피하는 것은 의무를 저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일을 해야만 한다.

게으름과 가난
게으름은 생산의 적이다. 게으른 사람은 자기만 해칠 뿐 아니라 사회에 짐이 된다. 게으른 사람은 자기가 속한 사회의 생산 활동에 보탬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남들의 노동의 결실을 깎아 먹기 시작한다. 이것이 게으름이 갖는 반사회적 면이다. 게으른 사람은 부지런한 사람들에게 보살핌을 기대한다.
재난 때문에 당하는 가난: 재난을 당해 가난하게 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질병, 상해, 홍수, 또는 그밖의 재해로 노동력을 잃은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은 마음을 열고 따뜻하게 지원하라는 부르심을 받는다. 우리에게는 이런 불행을 당한 사람들을 구제할 책임이 있다
압제 때문에 당하는 가난: 어떤 사람들은 불의한 권력자들에게 희생되어 가난을 맛본다. 그들은 도둑질, 강탈, 야만적 행위에 희생을 당할 수 있다. 그들은 노예로 팔려가 짐승 취급을 당한 사람들이었을 수도 있다. 수탈을 당한 고아와 과부들이었을 수도 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취하는 가난: 스스로 가난을 선택함으로써 자진해서 세상 재물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궁핍한 자들을 좀더 구제하기 위해서 단순히 생계만 유지하고 살기로 결심한 이 세상의 테레사 수녀들이다.
게으름 때문에 당하는 가난: 이러한 자들은 하나님께 긍휼을 얻지 못한다.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산다(잠6:6-11).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라는 게 사도의 명령이다. 바울은 일하려고 하지 않는 자들을 일만 만드는 사람들로 표현한다.
그들은 “빈둥거리면서” 뒷공론을 일삼는다. 그들의 일은 생산적인 일이 아니다
일벌레
일벌레(workaholic)라는 용어는 우리 문화에서는 두 가지 다른 방식으로 쓰인다. 일반적인 의미로는 정말 쉴틈도 없이 생산적인 일을 하느라 바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정신과 의사들의 용어인데, 이는 현실적인 일은 하지 않고 뒷공론만 일삼는 비생산적인 사람을 가리킨다. 이런 유의 일벌레는 매우 바빠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일에 대한 망상을 만들기에 바쁘다.
신경성 일벌레는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을 좋아한다. 사무실에 맨 먼저 출근하여 맨 나중에 퇴근하는 경우가 많고, 그의 책상에는 밤에도 불이 켜져 있고, 어디를 가든 무거운 서류 가방을 들고 간다.
그리고 사무실에서 종종 불화를 일으킨다. 동료의 실수를 비판하기를 좋아하고, 책임을 남에게 떠넘긴다. 자신의 잘못을 효과적으로 가린다. 언제나 바빠 보이지만 별로 이루어 내는 일이 없다는 게 그의 현저한 특징이다. 무가치하거나 하찮은 일을 하는 데 바쁘다. 생산적인 일과는 상관이 없다.
가짜는 생산성과 책임감의 부분을 빼놓고는 진짜와 똑같다. 가짜 직원은 바빠 보이지만 비생산과 고질적 책임 전가라는 두 가지 치명적인 결함을 갖고 있다. 그가 남들을 비판하는 것은 자신의 실수를 은폐하려는 시도이다. 이런 유형의 일벌레는 변장한 게으른 사람이다. 일벌레는 종종 동료 사원을 속인다. 사실은 자기 자신마저 속인다. 그러나 하나님을 속이지는 못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바쁘게 보여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자라났다. 사회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은 오랫동안 이르바 프로테스탄트 노동 윤리의 근원에 관해서 논쟁을 벌였지만, 북유럽과 북아메카의 프로테스탄트 교도들이 노동을 중시하는 가치관을 지녀왔다는 데에는 대체로 동의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노동을 저주로 생각하지 않고 인생의 큰 목표로 보도록 배웠다. 문제는 그런 인생관이 지배적인 상황에서도 여전히 게으르고 비생산적인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그런 식으로 평가를 받고 싶지 않기 때문에 자기들의 생활을 은폐한다. 이 사람들은 비생산적인 습관으로뿐 아니라 일관된 기만으로도 자신에게(그리고 남들에게)무거운 짐을 지운다.
노동자의 단잠
일을 해야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일을 하되 어디서 일해야 하는가라는 것은 지혜의 문제이다. 덕이 있는 사람은 일하는 사람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갈고 닦은 능력을 직업에 연계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능력에 맞는 완벽한 직업을 찾기란 참 어렵다. 그러나 잘 살펴서 자기 능력을 헤아리고 자기 능력에 맞는 직업을 찾으려고 노력한다면 죄책감과 좌절감을 상당히 덜 수 있다. 그러나 직업이 자기와 잘 맞지 않는다고 느끼는 상황에서도 우리는 하나님께 일을 잘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능력과 필요에 잘 들어맞는 직업에 종사하는 것을 기뻐하시지만, 어떤 상황에 처해서라도 헌신감을 가지고 일하는 것도 기뻐하신다.
성경은 노동자가 달게 잠을 잔다고 말한다(전5:12). 생산적인 일은 힘도 들지만 상당한 보람도 준다. 근심과 좌절 때문에 잠을 설치지 않고 단잠을 자게 한다.
근심으로 잠을 설치는 이유는 책임을 다하지 못한 데서 오는 죄책감 때문일 경우가 종종 있다. 일을 다 하지 못한 채 미루어 두는 만큼 근심도 크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께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복된 말씀을 들으려면 지금 부지런해야 하고 지금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라고 맡기신 일에 충성해야 한다. 이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게 된다.

13
부정직이라는 죄
“모든 사람은 거짓말장이라”고 시편116:11은 말한다. 이것은 사도가 인류를 정죄하는 말의 결론에서도 울려퍼진다. 바울은 이렇게 단언한다.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롬3:4).
부정직은 우리 모두가 안고 있는 심각한 문제이다. 우리는 말과 행동과 관계로 진리를 범한다. 서로에게, 하나님께, 그리고 자신에게 거짓말을 한다(요8:44).
하나님과 사탄간의 투쟁은 진리 문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하나님은 모든 진리의 근원이신 반면에 사탄은 거짓의 아비이다.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간의 초미의 쟁점도 진리 문제이다. 적그리스도를 묘사하는 접두사 “적”(敵, anti)은 “거스르다” 또는 “대신 하다”를 뜻할 수 있다.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와 맞서 싸운다. 그가 주로 사용하는 계략은 그리스도를 대체하는 것이다. 그는 자기가 그리스도를 대신할 자라고 주장한다. 진짜를 밀어내기 위해서 일하는 사이비요 사기꾼이다. 적그리스도는 거짓 그리스도이다. 한 마디로 거짓말장이이다. 아니면서도 진짜인 척한다.
적그리스도는 최악의 위선자이다. 그는 큰 기만에 빠져 있다. 거짓 표적과 기사를 일으킨다. 그에게 관련된 건 모두 사이비이다. 그의 목표는 진리를 훼손하고 진리를 흐려 놓는 것이다. 사탄이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듯이, 적그리스도도 자신을 그리스도로 속이려고 한다.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그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육 칠 가지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잠6:16-17). “거짓 입술은 여호와께 미움을 받아도 진실히 행하는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잠12:22). “가난한 자는 거짓말하는 자보다 나으니라”(잠19:22).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21:8).
남들에게 하는 거짓말
거짓말을 할 때는 주로 다른 사람들에게 한다. 남에게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진실이 우리의 체면을 손상할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자신에 관한 진실이 밝혀지는 것을 자존심이 허락지 못할 때 거짓말로 자신의 행적을 덮어 버린다. 형벌이 두려워, 죄책을 덮기 위해서, 게으름을 은폐하기 위해서 등이다.
남들에 관한 거짓말
남들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과 남들에 관해 거짓말을 하는 것은 별개이다. 남들에 관해 거짓말을 하는 것은 명예 훼손이다. 그것은 남들에게 중대한 해를 끼친다. 마귀가 중상 모략의 대가이다. 그는 자기 제자들을 부추겨 뒷공론, 험담, 비방을 하도록 한다. 남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은 그의 재산을 훔치는 것보다 더 해로울 수 있다.
“중상하다”라는 동사의 의미와 효력을 간단히 생각해 보자. 남을 중상한다는 것은 그에 관해서 거짓말을, 그를 해롭게 하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중상에는 부당한 고소도 포함된다. 아마 모든 사람이 중상을 당하는 게 얼마나 뼈아픈 일인지 경험해 보았을 줄로 안다. 자기가 저지른 죄 때문에 해를 당하는 것과 저지르지 않은 일 때문에 벌을 받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예수님은 공생애 내내 중상의 희생자이셨다. 죽음의 고통을 당하는 중에도 비방을 받으셨다. 십자가에 달려 계시는 동안 함께 처형을 당하던 두 강도 사이에서도 변론 거리가 되셨다. 여기서 우리는 둘째 강도의 태도를 눈여겨 볼 만 하다.
둘째 강도는 오해를 바로 잡았다. 그가 얼마나 타락한 사람이었든간에 그는 마지막 숨을 진리를 위해 싸우는 데 사용했다. 정의에 대해 증거하고 자비를 호소하면서 죽었다. 예수님은 자신의 무고함이 이런 사람에게 변호를 받게 된 데에 가슴이 뭉클하셨을 것이다. 그 강도는 지금도 낙원에서 예수님과 함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귀는 그렇지 못하다. 그리스도의 나라에서는 중상이 자리 잡을 곳이 없다. 남을 중상하는 것은 그 사람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이다. 명예, “선한 평판”이 우리의 삶에는 중요하다. 악한 평판을 받으며 살지 않더라도 삶은 그 자체만으로도 아주 어려운 일이다.


좋은 의도로 하는 거짓말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한 뜻을 이루시는 데 인간의 죄를 요구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죄를 주관하시되 죄를 내신 분은 아니다. 유다를 통해서도 자기 뜻을 이루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다의 죄악을 사면해 주시지는 않았다. 요셉 형들의 경우를 보더라도 그들은 악한 의도로 그 일을 했지만 하나님은 그 일을 선한 쪽으로 사용하셨다.
우리는 여호수아 2장에서 기생 라합의 거짓말을 본다.
과연 라합은 거짓말 때문에 하나님께 복을 받았을까, 아니면 거짓말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복을 받았을까? 어떤 사람들은 라합을 기브가와 같은 범주에 두면서, 라합이 거짓말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복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이 견해는 거짓말이 항상 나쁘다는 주장을 취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진실을 말할 만한 때에는 당연히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견해이다. 이 견해는 언제나 다 진실이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즉, 모든 사람에게 다 진실을 말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견해이다. 진실은 그것을 들을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말해 주어야 한다. 진실을 들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진실을 말하는 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이 아니다.
자신에게 하는 거짓말
우리가 지닌 가장 어려운 과제는 우리 자신에 관한 진실을 우리 자신에게 말하는 것이다. 얼른 생각하면 그게 어렵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우리 자신보다 우리에 대해서 더 잘 아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에 대해서 좋은 평판을 갖게 해야 할 대상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엄격한 진실을 가지고 우리 인격의 어두운 부분을 들여다 보는 건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다. 대개는 죄를 깨우쳐 주시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능력이 개입되어야 자신의 실재를 파악하게 된다. 성령께서 우리 자신에 관한 모든 진실을 한꺼번에 우리에게 들춰 내 주시지 않으시는 건 실로 다행한 일이다. 자신의 정체가 남김없이 드러나는 것을 과연 누가 참을 수 있겠는가? 이사야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희미하게나마 잠시 접하고서 스스로를 저주했다. 욥과 하박국도 하나님이 그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들춰 내실 때 거의 혼절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위대한 왕 다윗은 나단으로부터 죄를 지적받고 난 뒤 산산히 부서졌다. 죄를 지은 만큼 혹독하게 회개를 했다. 베게를 눈물로 적셨다.
양심에 잔뜩 상처를 입은 채 시편 51장의 불멸의 시를 썼다. 그러나 다윗은 직접적으로는 자기 죄를 볼 수 없었다. 나단이 죄를 은폐하고 있던 그 앞에 거울을 갖다 대자 비로소 그 죄를 볼 수 있었다. 그 죄가 다른 사람의 죄 이야기로 전달될 때는 뚜렷이 그것을 알아봤다. 그러나 그때에도 나단이 손가락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키기 전까지는 그 죄가 자기 죄인지를 알아보지 못했다.
다윗만 그랬던 게 아니다. 이러한 자기 기만의 경향에서는 모두가 다 다윗이다.
하나님께 하는 거짓말
우리는 남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우리 자신에게 거짓말을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 거짓말을 할 때는 죄가 말할 수 없을 만큼 커진다. 하나님께 하는 거짓말은 불손할 뿐 아니라 어리석다.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참 어리석은 짓이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있는 모든 은밀한 생각을 다 아신다.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의 시선으로부터 우리의 죄책을 가릴 만큼 큰 산은 없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작정 헌금을 할 때 작정한 액수의 80-85%이상 실제로 헌금하는 것을 기대할 수 없다 교회는 아직도 하나님께 거짓말을 하던 아나니아의 정신을 갖고 있다.
예수님은 진리에 대해서 증거하시려고 오셨다. 그의 백성은 진리의 백성이라고 불린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거짓말하는 타락한 성향을 벗어 버려야 한다. 거짓말하지 않고 살아야 한다. 성실하게 살려고 한다면 정직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진리는 신성하다.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거짓과 아무런 상관도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다. 진리에 대한 그런 성실함을 본받아야 한다. 진리를 말하고 진리를 행하고 진리대로 살아야 한다. 그렇게 사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14
교리와 삶

실제로 문제가 되는 것은 교리가 아니라 삶이다. 즉,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믿느냐 하는 것보다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에 더 큰 관심을 갖고 계신다. 신조와 교리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겉으로 나타나는 행위이다. 정통신학(orthopraxy)이 아닌 정통실천(orthopraxy)이 중요하다. 바른 사고보다 바른 행동으로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다.
이것은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는 그릇된 딜레마이다. 바른 사고와 바른 삶은 병행한다. 이 둘을 구분할 수는 없으나 따로 생각할 수는 없다. 마귀는 신학 시험을 보면 아주 높은 점수를 얻을 수 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줄을 제자들도 모를 때에 맨 먼저 알아본 것은 귀신들이다. 그러나 귀신들은 자기들이 뚜렷이 아는 진리를 미워한다. 하나님께 관한 진리를 알면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없는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지도자들의 반란
기독교권에서는 신학에 대해서, 특히 학문적 신학에 대해서 깊은 의혹이 있고,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교회는 어느 학자가 “지식인들의 반란”이라 부른 일을 겪어 왔다. 성경적 기독교에 반기를 든 많은 회의주의가 교회 안에서 나왔다. 하나님이 죽었다고 선언한 자들은 교회의 신학자들이었다. 성경의 신빙성을 공격하는 것은 신학교들이다.
신학자라고 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안수받은 목사라고 해서 반드시 그리스도인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슬프게도 잘못된 이유로 사역에 들어온 사람들이 많다. 어떤 사람들은 신학적 회의주의를 직업으로 삼고 있다. 기독교를 반증하고 중립화하고 변화시키려는 타오르는 의지로 기독교 신학을 공부하기로 결정한 사람들도 있다. 자연인은 평생 하나님을 대적할 만큼 하나님께 대해 반감을 갖고 있다. 교회 안에 대적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처럼 가장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하나님과 전쟁을 벌이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새로운 게 하나도 없다.
예수님의 지상 사역 때 그분에게 가장 적대적이었던 집단이 당시의 성지자들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한다.
하나님을 찬송할 수 없는 사람이 자신의 방대한 학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겠는가?
그러나 반면에 진실한 목자들이 있다. 이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자기들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사랑한다. 비록 실패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려고 하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하도록 인도하려고 노력한다.
교리의 필요성
교회는 헌신적인 목사들을 필요로 한다. 헌신적인 신학 교사들도 필요로 한다. 교회는 어느 시대나 건실한 신학자들의 사역으로부터 큰 유익을 얻었다.
신학에서는 고도의 역량과 지식과 아울러 하나님께 대한 깊은 사랑을 갖춘 교사들이 필요하다.
결실한 교리가 필요하다. 성결의 성령께서는 진리의 영이기도 하시다. 진리와 의는 함께 진행한다. 바른 삶은 바른 사고에서 흘러나온다. 속이 바뀌지 않고도 겉으로 바뀐 듯이 살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얻는 것은 우리를 바리새인으로 만든다. 성령께서는 문제의 뿌리를 건드리신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 변화된 정신이 변화된 삶을 내놓는다.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이 하나님께 반응을 내놓는 데 가장 중요한 영향을 준다. 회개 자체도 행동의 변화가 일어나기 전에 생긴 마음의 변화이다. 교리와 삶을 구별하는 그룻된 이분법을 배척해야 한다. 거룩한 생활을 하지 않고서는 견실한 교리를 지킬 수 없다. 그러나 견실한 교리 없이 거룩한 생활을 해나간다는 것은 극히 어렵다. 그렇다고 견실한 교리를 갖고 있다고 해서 저절로 거룩하게 살게 되는 건 아니다. 견실한 교리는 성화에 필요 조건이다. 아주 중요한 선결 요건이다. 산소와 불의 관계와 같다. 산소가 있다고 해서 저절로 불이 나는 건 아니지만, 산소 없이 불을 일으킬 수는 없다.



의식, 신념, 양심
그리스도인의 삶에 진정한 성화가 발생하려면 적어도 세 가지 절대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의식에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신념에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양심에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의식, 신념, 양심-이 세 가지 모두가 우리의 성화에 대단히 중요하다.
의식은 지식을 포함한다. 하나님이 명하시는 것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계획적으로 행할 수 있으려면 먼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율법에서 죄에 대한 지식이 나온다. 또한 율법에서 의에 대한 지식이 나온다.
신념은 깊이와 강도의 문제이다. 어떤 행동이 옳다고 의식하는 것과 그것을 확신하는 것은 별개이다. 신념을 거슬러 행동하는 것보다 알고서도 슬쩍 넘어가는 것이 훨씬 더 쉽다. 확신은 정착된 지식이다. 그것은 우리를 단단히 붙든다. 두뇌를 넘어 양심까지 파고든다.
양심은 행위에 대해 감독관 역할을 한다. 내면의 음성이 우리를 고소하기도 하고 변명하기도 한다. 승인하거나 승인하지 않은 방식으로 우리 행위를 감시한다. 문제는 양심이 언제나 진리를 말하지만은 않느다는 데 있다. 우리는 자신을 승인하는 쪽으로 양심을 길들이는 데 능숙하다.
죄의식을 가지고 사는 것은 힘겨운 일이다. 죄책감이 우리를 무력하게 만든다. 죄의식에 사로잡히면 행동을 바꾸거나 의식을 바꿀 수 있다. 양심을 무감각하게 만들 수 있다. 합리화로 고소하는 강도를 무디게 할 수 있다.
같은 죄를 반복해서 짓다 보면 양심의 소리를 죽일 수 있다.
최근에 나는 필 도나휴 쇼(the phil Donahue show)를 잠깐 시청했다. 포르노 영화에 출연한 남녀 배우들과 대담하는 내용이었다. 그 배우들은 주장하기를, (1)자기들은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고, (2)자기들은 급진적인 성 폭력에 가담하거나 어린이 성학대에 참여하기를 거부하기 때문에 높은 기준을 갖고 있다고 했다. 그들은 폭력과 어린이 학대에는 반대하면서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기능이 약한 양심을 갖고 있었다. 포르노 배우들은 자기들이 자기들보다 더욱 사악한 성 행위를 회피한다는 사실에 호소함으로써 자기들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그들의 주장은 더할 나위 없는 자기 기만이었다. 그것을 가리켜 그들은 악한 선(evil good)이라고 했다. 그들은 악한 것과 더 악한 것에 대한 구분을 이용했다.
자기들의 행위는 더 악하지 않기 때문에 앆한 선이라고 간주했다. 이렇게 되면 그들의 악은 상대화하고 따라서 그들의 양심은 그들을 변명할 수 있게 된다.
양심이 경건하게 작용하려면 경건한 신념에 영향을 받아야 한다. 경건한 양심을 가지려면 옳고 그른 것에 대한 의식이 예리해져야 한다. 그것은 교리의 문제인데 교리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온다. 성령께서 성경을 영감하신다. 성령은 진리의 계시자이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는 성경을 영감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성령께서는 말씀을 조명하시며 그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하신다(고전2:10-11).
인간은 자기가 갖고 있지 않거나 모르는 것들을 추구한다. 성령께서는 성삼위 하나님의 한 분으로서, 하나님의 진리를 몰라서 그것을 필사적으로 찾으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이시다. 아버지가 아시는 것을 성령께서도 이미 알고 계신다. 그것을 추구할 필요가 없다.
변화한 의식에서 변화된 신념으로 그리고 변화된 양심으로 전진하는 일을 성령께서 인도해 주신다. 성령은 말씀을 쓰셔서 일하신다. 말씀을 거스르거나 말씀 없이 일하시지 않는다. 말씀과 성령은 동행한다. 교리와 삶과 의지와 정신과 동행한다. 그것을 구분하는 것은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화 사역을 좌절시키고 성령을 슬프시게 하는 것이다. 그것을 구분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총체적이고 헌신적인 생활을 하지 않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15
포기하지 말라
원스턴 처칠 경(Sir Winston Churchill)이 옛날에 자기가 다녔던 이튼 학교로 돌아갔다. 학생들은 이튼 학교가 배출한 가장 유명한 선배의 연설을 듣기 위해서 모였다. 처질은 말장사였다. 견줄 사람이 없을 정도로 영어의 달인이었고 재담의 귀재였다.
이튼 학교로 돌아올 당시 처칠이 연단에 오르자 학생들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처칠은 연단 끝을 붙잡고 불독처럼 사나운 얼굴을 쑥내밀고는 “결코, 결코, 결코......포기하지 마십시오”하고는 자리에 돌아가 앉았다.
그 한 마디가 온 청중을 전율케 했다. 그 젊은이들이 위기 순간을 맞이할 때, 싸울 것인가 도망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할 두려움에 흔들리는 순간에, 그들의 은밀한 생각에 그 말이 얼마나 많이 떠올랐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 이것은 성경이 거듭거듭 외치는 메시지이다. 우리 구원의 창시자이자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생각해 보라. 예수님은 시작하신 일을 끝내신다. 예수님은 잠시라도 마귀와 접전을 벌이시지 않았다. 전투에서 그 원수를 끝까지 옥에 감금해 두셨다.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 가운데 대단히 중요한 것은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은 이 참혹한 상황에서 죽음의 마지막 고통을 당하실 때 마지막 숨을 헐떡이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생명을 마치실 때였다. 임무를 다 완수하셨을 때였다. 그 이전도 그 이후도 아니었다. 그 임무를 다 이루셔야 했다.
예수님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눅9:62)고 하셨다. 예수님은 시선을 앞쪽에 고정시키셨다. 예루살렘을 향해 얼굴을 드셨다.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이 되었다. 예수님은 앞을 바라보셨고 세상의 구속을 성취하셨다.
우리는 높은 부르심의 푯대를 향해서 전진하라는 부르심을 받는다. 전진하려면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좇아가야 한다. 사도는 우리에게 노력하라고 한다. 의를 추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편안하게 앉아서 성화를 이룰 방법은 없다. 결단이 중요하고 노력이 중요하다.
수동적인 동시에 적극점임
성화에는 행위가 필요하다(빌2:12-13).
성화는 협력적이다. 두 동반자가 이루어가는 일이다 내가 반드시 일해야 하고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일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뒷짐지고 앉아서 모든 일을 하나님께 다 맡기라고 하시지 않는다. 일하되 아주 열심히 일하라고 하신다. 어떤 일을 두렵고 떨림으로 이룬다는 것은 경건하고 성실하게 일한다는 것이다. 마지막 결과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일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서 산다면 우리 노력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항상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거듭날 때 끝나지 않는다. 물론 거듭남은 성령께서 친히 하시는 사역이다.
거듭남은 신인 협력적인 사역이 아니라 신단세적(神單勢的,monergeistic)사역이다. 성령께서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고유한 일을 하실 때 나는 잠잠히 수동적인 자세로 있다. 그러나 그 뒤부터는 일이 시작된다. 나는 내 구원을 이루어가야 한다. 표적을 향해서 좇아가야 한다. 성령께서는 항상 우리를 도우시지만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침노하는 사람들
예수님의 그 말씀에 대해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새 신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추구할 때 나타내는 열정을 가리킨다”고 했다. 세례 요한이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고 선언하면서 이스라엘에는 대각성이 일어났다.
이 일은 유례없는 전국적 회개 운동을 일으켰다. 각성한 사람들은 달려가 그리스도를 영접했다.
회개한 죄인은 자기 왕을 영접하기 위해서 백방으로 손을 썼다. 새로 각성한 사람들의 열의와 열심은 강력하다. 그것은 물리적 무기를 사용한다는 뜻에서 침노가 아니라 절박함과 강렬함이란 뜻에서 침노이다.(NIV는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고 번역하지 않고 “강한 사람들이 빼앗느니라”고 번역한다. 이것이 좀더 정확한 번역인 듯하다.)
이 절박함과 강렬함은 하나님 나라로 침입할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눈을 목표에 고정시킨 채 쏟는 단호한 노력을 뜻한다.
우리를 포위하고 있는 죄들을 이겨내려고 할 때 우리는 쉽게 좌절하고 쉽게 패배한다. 엎친 데 덮치는 일을 당한다. 우리는 피흘리기까지 싸우기 전에 굴복한다.
거듭되는 실패는 확신을 불러일으키는 데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뒤에 있는 것들을 잊어버리라고 하시는 것이다. 과거의 실패를 잊어야 한다. 패배감에 사로잡혀 있어서는 안된다. 푯대를 향하여 좇아가야 한다.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푯대는 하찮은 게 아니다. 쟁취할 만한 가치가 있다. 두려워하고 떨 만한 가치가 있다. 그리스도의 고결한 부르심이다. 참으로 그것은 가장 고결한 부르심이다. 골프 토너먼트에서 우승하는 것보다 더욱 노력할 만한 가치가 있다. 나무 주변의 잔디를 정리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그것은 예수님의 명령이다. 피를 흘리고 땀을 흘리고 눈물을 흘릴 만한 가치가 있다.
히브리서는 우리가 사생아들이 아님을 분명히 말한다. 우리는 아들들이다.우리 아버지께서 우리를 징계하시는 이유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때로는 하나님의 손길이 견디기 힘들 만큼 무겁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중압적인 방법으로 대하시지 않음을 뜻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징계의 손은 우리를 쉽게 엄몰한다. 그 연단은 가혹해 보인다. 우리는 손을 떨구고 무릎이 약해진다. 하나님의 징계를 당하면서 무릎이 약해지지 않을 사람이 더디 있겠는가?
열매를 맺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징계는 우리를 멸하시려는 게 아니라 고치시려는 데 목적이 있다. 징계는 한동안 고통스럽다. 무릎이 편치 않다. 그러나 아버지가 징계하시는 목적은 연단에 있다. 연단은 우리 모두가 추구하는 열매, 즉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는다.
그 열매는 노력해서 얻을 만한 가치가 있다. 투쟁해서 얻을 만한 가치가 있다. 우리가 견디는 징계는 그 뒤에 기다리고 있는 열매와 견줄 만한 가치가 없다.
우리는 새 이스라엘이다. 우리의 출애굽은 애굽에서 나온 사건보다 무한히 위대하다. 우리의 중보자께서 모세 곁에 서시면 모세는 난장이에 불과하다. 우리의 산은 시내산이 아니라 영원한 시온산이다. 우리는 하늘에 들어간다. 허다한 천사들과 합류한다. 모든 성도들과 사귐을 나눈다. 과거에 드려졌던 어떤 제물의 피보다 더 중요한 그리스도의 피로 뿌림을 받는다.
우리가 인내하는 것은 이 영원한 본향에 가기 위해서이다.
그런 모험을 누가 중단시킬 수 있겠는가?
그런 목적지를 두고서 누가 넘어진 뒤에 다시 일어나지 않겠는가?
이 문제에 대한 결론이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히12:28-29).
우리가 사는 것은 이 소멸하는 불을 위해서이다. 우리가 기쁘시게 해드리려고 하는 분이 바로 그분이다. 우리가 거듭 실패한 뒤에도 다시 일어서는 것은 그분을 위해서이다. 그분이 바로 우리의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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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봉서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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