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관념이 아니고 실천이다.
오늘은 '일'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일'이란 무엇인가? 국립국어원 발행의 표준국어사전 인터넷사전에서 '일'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를 찾아보았다. 자그마치 13가지의 의미로 설명하고 있었다. 우선 사전에서 설명하고 있는 의미들을 여기에 옮겨 본다.
「1」무엇을 이루거나 적절한 대가를 받기 위하여 어떤 장소에서 일정한 시간 동안 몸을 움직이거나 머리를 쓰는 활동. 또는 그 활동의 대상.
「2」어떤 계획과 의도에 따라 이루려고 하는 대상.
「3」어떤 내용을 가진 상황이나 장면.
「4」사람이 행한 어떤 행동.
「5」해결하거나 처리해야 할 문제. 또는 처리하여야 할 행사.
「6」문젯거리가 되는 현상.
「7」처한 형편이나 사정.
「8」과거의 경험.
「9」어떤 상황이나 사실.
「10」((동사의 관형사형 뒤에 쓰여))그 동사의 행위를 이루는 동작이나 상태를 이르는 말.
「11」용변(用便)이나 성교(性交) 따위를 완곡하게 이르는 말.
「12」((‘-ㄹ/을 일로/일이다’ 구성으로 쓰여))마땅히 그렇게 하여야 함을 이르는 말.
「13」『물리』물체에 힘이 작용하여 물체가 힘의 방향으로 일정한 거리만큼 움직였을 때에, 힘과 거리를 곱한 양.
갑자기 머리가 복잡해지는 것 같다. 단순할 것으로 여겨졌던 '일'에 대한 설명이 이토록 다양한 의미일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다. 이제 '일'에 대한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 본다. 사전의 설명대로라면, 일에 대한 설명이 너무 복잡하다. 그것을 짧은 말로 설명할 수는 없을까? 머리를 쥐어짜듯이 생각에 골몰해봐도 뚜렷한 해답을 찾을 수 없다. 오히려 머리속이 더욱 복잡해지는 것만 같다.
얼마동안을 생각에 잡혔을까? 불현 듯 떠 오르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일이란 삶이다.'라는 생각이다. 그렇다. '일이란 삶'이다. 또한 '삶이 곧 일'이다. '일'과 '삶'은 불가분리적(不可分離的)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 동전의 앞과 뒤와 같은 관계라면 어떨까? 왜 이런 생각이 든 것일까?
그렇다면 '삶이란 무엇인가?' 같은 사전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 보았다. 두 가지로 설명했다. 첫째는 '사는 일. 또는 살아 있음'이라고 설명했고, 다음은 '목숨 또는 생명'이라고 설명했다. 그랬다. 사전은 '일'이란 곧 '삶'이란 사실을 정확하게 확인시켜주는 것으로 여겨졌다.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면서 끊임없이 무엇인가 몸을 움직이거나 머리를 쓴다. 그런 움직임이나 머리를 쓰는 것이 맹목적(盲目的)인 경우는 없다. 어떤 이유나 원인이 반드시 있다. 그 이유로, 그 원인 때문에 사람은 끊임없이 무엇인가 몸을 움직이거나 머리를 쓰며 살아간다. 이런 일이 중단된 사람은 죽은 사람이거나, 식물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식물인간'이란 어떤 사고나 병으로 인해 몸을 움직이거나 생각하는 어느 한 가지도 스스로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상태의 환자를 지칭한다.
살아 있는 사람은 누구나 모두 몸을 움직이고, 머리를 쓴다. 그래서 '갓난아기는 우는 것이나 몸을 바지락거리는 것도 일'이라는 말이 있다. 또 어떤 사람은 '노는 것도 일이다'라고 했다. 모두 맞는 말이라고 여겨진다. 사람이 살면서 몸을 움직이거나 머리를 쓰는 모든 것들이 '일'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코 말쟁이의 궤변(詭辯)이 아니다. '일'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한 설명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지금 살았다. 숨을 쉬고, 몸을 움직인다.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기 위해 머리를 쓴다. 지금도 나는 '어떤 글을 쓸 것인가?'를 생각한다. 떠오르는 생각들을 문자로 표현하기 위해 노트북을 실행시켜 부지런히 자판들을 두드린다. 이런 행동은 내게 있어서 일이다. 이런 일을 위해 한 순간도 몸을 꼼짝하지 않고 가만히 있거나, 머리를 쓰지 않고 아무 생각없이 지내는 경우는 없다. 부단히 머리를 쓰며 몸을 움직인다. 이런 것들이 지금 내가 살아 았음을 나타내는 증거가 되고 있다.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마다 나와 같다. 저들 모두는 무엇인가를 위해 머리를 쓰고 몸을 움직인다. 그것은 저들의 삶이요, 또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위해 모두 열심히 살아가며 일한다. 그렇지만 저들이 열심을 내고 있는 일들이 모두 자기에게나 다른 사람들을 유익(有益)하는 것은 아니다. 어느 것은 무익(無益)하게 되어 자기에게나 다른 사람들에게 해(害)를 끼치는 공연(空然)한 것이 되는 경우도 있다. 이런 때는 차라리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다. 그래도 여전히 그것은 삶이요, 일이다.
사람이 살아가며 무익한 일이 생겨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삶의 우선순위(優先順位)가 엉망이 되어 일어나는 현상이다. 일의 순서가 헝클어져서 질서와 규모가 없어 이루어진 결과다. 사람이 하는 일은 무슨 일이든 먼저할 일이 있고, 나중에 할 일이 있다. 일의 순서가 뒤바뀌면 아무 것도 이루어지는 일은 없다. 앞에서 언급한 공연한 것이 되어 삶의 낭비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어떤 사람이 찢어진 옷을 수선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바느질을 하면 된다. 바느질을 하려면 가장 먼저 바늘구멍에 실을 꿰어야 한다. 제 아무리 급해도 바늘없이 실만으로, 또는 바늘허리에 실을 묶어서는 바느질을 할 수 없다. 바느질을 못하면 옷을 수선하는 일도 못한다. 이것이 일의 순서다. 철저하게 순서를 지킬 때 비로소 바느질을 가능하게 하고, 바느질이 가능해야 옷을 수선할 수 있는 것이다.
독자들에게 묻고 싶다.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삶은 우선순위의 질서와 규모가 있는가? 무엇을 먼저해야 하고, 무엇을 나중에 해야 할 것인지 분명하게 정리된 삶을 살고 있는가? 행여나 삶이 무질서해져 있지는 않는가? 먼저 해야 할 것을 나중으로 미루고, 나중에 해야 할 것을 먼저 한다고 서두르고 있지는 않는가? 이제 곰곰이 생각해 보라. 현재 살아가고 있는 자기 삶의 현주소를 객관적인 시각으로 냉철하게 살펴 보라.
많은 사람들이 지금 혼란에 빠져 있다. 그래서 세상은 날마다 시끄럽고 요란하다.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실 때는 질서를 따라 만드셨다. 하나님의 질서는 시끄럽지도, 요란하지도 않는다. 결코 무질서의 혼란에 빠져들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무질서의 혼란 속에 자꾸만 시끄럽고 요란함에 빠져드는 이유는 무엇인가? 모든 사람들마다 삶의 우선순위가 뒤 엉킨 까닭이다. 먼저 해야 할 일과 나중에 해야 할 일을 분간하지 못한 까닭이다. 모든 일들을 순리대로 풀어가기 보다는, 자기 감정에 치우친 맹목적 태도로 풀어가기 때문이다.
보람있는 삶을 살아가기 원하는가? 만족한 일을 이루기 원하는가? 이제 지금까지 행동하던 삶의 방식을 바꿔야 한다. 일의 우선순위를 독단적(獨斷的)으로 결정하던 습관을 바꿔야 한다. 그것은 참 어리석은 결정이다. 그래서 일이 꼬여 삶은 더 힘들고 고달플 때가 많았다. 시끄럽고 요란한 혼란속에 빠져들어 허우적거리며 살아왔던 것이다.
이제는 어떤 일을 결정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을 찾아야 한다. 질서와 규모 있는 삶을 회복해야 한다. 어떻게? 하나님께 엎드려 간절히 기도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지혜를 따라 일의 우선순위를 결정할 수 있어야 하고, 순차를 따라서 일을 처리해야 한다. 그것만이 질서와 규모를 회복하는 삶이다.
하나님이 깨닫게 하시는 삶의 지혜를 구하라. 그러려면 자신의 생각을 먼저 온전히 내려 놓아야 한다. 스스로 자기 삶의 주인됨을 포기해야 한다. 오직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어,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 삶의 우선순위를 결정하실 수 있게 해야 한다. 하나님의 결정하심에 묵묵히 순복해야 한다. 인내로 참고 기다리며, 마음에 조급함이나 성급함으로 서두르지 않아야 한다. 초조하거나 불안해 하지도 말고, 오직 하나님의 때를 바라는 것이 하나님이 깨닫게 하시는 삶의 지혜를 구하는 바른 태도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를 통해 이루실 크고 놀라운 일을 반드시 준비하신다. 크고 놀라운 일이란 상대비교적인 것이 아니다. 각자를 향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계획 아래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따라서 때때로 다른 사람에게는 보잘 것 없는 일로 여겨질지 모른다. 하지만 각자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아주 크고 놀라운 일이다. 그러므로 자기와 관계없는 다른 사람들의 일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보거나 무시해서는 안된다.
사람의 삶은 어떤 업적을 쌓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그날그날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복하며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세상을 살아가며 정말 필요한 것은, 그날그날에 하나님이 바라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찾기 위해 힘써야 한다. 힘쓰는 자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깨닫게 하신다. 그리고 깨달음을 따라 순전한 마음으로 순복해야 한다. 그것이 가장 우선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 있는가? 하루를 시작하기 전인 새벽, 조용히 마음을 모아 하나님 앞에 고개를 숙여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지혜를 구해야 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깨달음의 지혜를 베푸신다. 이렇게 깨닫게 하신 지혜로 하루동안에 해야 할 일들을 정리해야 한다. 그것들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정해진 순서를 따라 질서있고 규모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은 결코 무질서 속에서 당신의 뜻을 이루지 않으신다. 결코 무질서를 통해 역사하지도 않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질서를 존중하는 삶을 태도를 가져야 한다. 이런 삶의 태도는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심의 지혜를 통해 가능할 수 있다. 이런 지혜를 깨달은 이가 자기 삶의 우선순위를 바르게 설정할 수 있다. 또한 설정된 바를 따라 묵묵히 순복하는 삶을 이룰 수 있다.
삶은 관념이 아니고 실천이다. 그러므로 일이란 머리를 써서 생각하는 것이나 몸을 움직여 행동하는 것의 조화로 나타나는 삶의 현상이어야 한다. 하나님은 이런 삶의 현상을 기뻐하신다. 이것저것이 뒤죽박죽 서로 헝클어진 상태로 무질서해진 삶의 현상을 결코 기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궁극적(窮極的)인 목적이 아니던가?!
하루하루 맞이하는 삶을 소홀히 여기지 말아야 한다. 하루하루는 매우 소중한 날이다. 소중한 날,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일의 우선순위를 바르게 정하여 살아가는 질서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 참으로 하나님은 오늘도 나와 이 글을 읽는 모든 독자들이 더불어 각자의 일에 대한 우선순위를 명확하게 정하여 규모있게 살아가는 것을 원하신다는 사실을 추호도 잊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2011. 7. 31 (주일)
글/ 불꽃 石一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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