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3가지 축원
첫째는 삼위일체 하나님신앙은 일상적인 우리의 이성으로, 머리로 이해하기는 결코 쉽지 않은 신비하신 하나님의 본질을 말하는 진리이기 때문에 이론을 통해 머리로서 설명하거나 설득하려말고 삶을 통해 가슴으로 체험해야 할 신앙진리라는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이란 분리할 수 없는 동일본질(호모우시온)안에 3개의 구별된 위격: 인격이 함께 영원히, 함께 동등하게, 함께 본질적으로 존재하심을 의미한다. 동일본질 속에서 함께 영원히, 함께 동등하게, 함께 본질적으로 계시면서 서로 구분되고 서로 구별되시지만 분리되지 않는다. 삼위일체에 대해 여러 이견이 있는 것은 성경에 문자 적으로라도 삼위일체라는 말이 나오지를 않기 때문일 것이며, 또한 성경 어느 곳에는 삼위일체를 의미하는 것 같은 구절도 있고, 어느 곳에는 삼위일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 같은 구절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가 하면 삼위일체를 나름대로 설명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설명을 보면 완벽한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런 설명을 하는 사람들 스스로가 이 삼위일체는 인간의 머리로는 100% 완전하게 깨달을 수가 없는 하나님의 오묘에 속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기 때문일 것이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저 역시 그런 정도의 답밖에 드릴 것은 없겠으나 저는 그 외에도 우리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 삼위일체의 지식을 하나의 교리수호 차원이 아닌 실제 신앙생활에 적용하여 주님의 인격과 성품을 온전히 덧입을 수 있는데 도움을 얻고자 한다. 우리가 삼위일체를 이해하려고 할 때(삼위일체만이 아니고 다른 모든 성경을 깨닫는데도 같은 이치임) 성경은 절대로 오류가 없는 것임을 전제로 하고 성경 어느 곳에 삼위일체를 의미하는 말이 있다고 한다면 일단은 삼위일체가 분명히 맞는다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그럼에도 왜 다른 곳에는 삼위일체가 아닌 것 같은 말씀들이 있는지, 왜 그런 말씀들을 기록한 것인지를 깨달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 이 본문은 축도 할 때 하나의 모델로 사용되고 있는데 이것은 단순히 축도를 하는 것이 아니고, 긴장과 대립을 끝내고 화해하는 글에 나오는 축복임을 생각할 때 대단히 의미가 있는 말이다. 다시 말해, 이것은 관례적인 인사가 아니라 갈등 끝에 나온 말이기에 더 의미가 깊은 것이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축복하신 말씀이 있다. 우리가 바울의 서신을 접할 때마다 참 놀라운 사실은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하여 서신을 보낼 때에 제일 먼저 문안을 통해서 주의 백성들에게 평강이 있기를 기원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그들에게 충만하시기를 언제나 기도했다.
또 서신을 마무리할 때도 제일 마지막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주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큰복이 임하기를 기원하는 내용으로 기록되어 있다. 본문에 보면 바울의 3가지 축복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13절)바울 사도는 세 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도 했다. 이 축도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을 통하여 삼위 하나님에 대하여 주시는 가르침을 받고자 한다.
은혜라는 말은 헬라어 원어로는 카리스(cavri")다. 원래 이 말은 여러 가지 상황에서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됐다. 우선 ‘호의’,‘자비’,‘너그러움’,‘감사할 만한’ 이런 뜻으로 사용되었다. 아마도 이 말은 은혜를 베푸는 사람을 나타낼 때 사용됐다고 볼 수 있겠다. 다음으로는 ‘기쁨’, ‘감사’, ‘행복’ 이런 뜻으로 사용되었다. 아마도 이 말은 은혜를 받은 사람을 나타낼 때 사용됐다고 볼 수 있겠다. 이 카리스라는 말이 기독교 공동체에서 사용되면서 신학적인 의미로 발전됐다. 미국의; 신학자 뵈트너라는 분은 기독교에서 사용해 온 은혜라는 말의 뜻을 이렇게 정리했다.
“은혜는 무가치한 죄인에게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자유롭고 과분한 사랑과 호의를 말한다. 은혜는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호의이다.” 은혜란 값으로는 계산할 수 없고, 그래서 무상으로 받는 선물을 뜻한다. 물론 햇빛, 공기, 물, 삼라만상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요, 은혜다. 그러나 본문을 보니까 은혜는 은혜로되 다른 은혜가 아니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고 했다. 은혜는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호의이다.” 그러니까 기독교에서 말하는 은혜 안에는 몇 가지 빠져서는 안 되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은 많은 고난을 받으시고 마침내는 십자가에 달리셨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인하여 자신을 내어주시고 또 우리에게 믿음을 주사 그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무덤에서 부활하셨다. 이 은혜는 값으로 계산할 수 없으며 돈으로 살수가 없는 것이다. 오로지 하나님의 선물로 받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는 말이다. 축복 중에 제일 좋은 축복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다.
은혜란 말은 헬라어로(카리스)라고 하는데 세 가지의 중요한 의미가 있다. (1) 모든 만물의 아름다움이나 만족한 혜택이나 은덕을 입을 때에 이것을 은혜라 한다. 모든 삼라만상, 풍성한 공기, 따뜻한 태양, 흘러가는 마실 수 있는 물, 목욕할 수 있는 물, 농사할 수 있는 물, 오곡백과 산천초목 금수 모두를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2) 가치나 갚아줄 것을 조금도 기대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호의를 베풀어 주어서 그것을 받게 되는 것을 은혜라고 한다. (3) 통상적인 생각이나 행위를 훨씬 넘어서 위대한 미덕을 행함으로 감탄하고 찬양할 만한 일을 한 것을 은혜라고 한다. 영원한 지옥의 불에 멸망할 수밖에 없는 우리 죄인들을 사랑을 받을만한 이유가 전혀 없는데 예수님께서 머리에 가시관을 쓰시고 양손에 쇠못을 박히시고 옆구리에 창을 받으시어서 물과 피를 다 흘려서 우리를 구속해 주신 그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된 것이다. 그런고로 에베소서 2:8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오 하나님의 선물이라"했다. 구원은 선물이다. 은혜로 받은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그러므로 항상 주님은 성령님을 통하여 "낙심하지 말라, 슬퍼하지 말라" 고 말씀하신다. 뿐만 아니라 성령님은 우리를 위로해 주시고, 눈물을 닦아주시고, 용기를 북 돋워주시고, 넘어졌을 때 일으켜 주시는 분이다. 로마서 8:14에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자녀라"고 했다.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우둔하다. 그래서 내일 일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할 때에 성령께서 방황하는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해 주신다. 이스라엘 백성을 보시오. 성령의 구름기둥, 불기둥이 광야 길을 인도해 주셨다. 그래서 순종하며 따라갈 때는 노래를 부를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인도함을 받으면서도 길이 험하고 괴롭고 목이 마를 때는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향하여서는 불평도 하였다.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선동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무엇인가? 광야에서 방황하다가 죽고 말았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를 못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는 것이 피곤하고, 방황하는 발길인가? 성령의 인도하심과 지도를 받아야 한다. 한 걸음 한 걸음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천국까지 갈 수 있어야 한다. 또 성령은 교통을 통해서 믿음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신다. 이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 슬픔과 고난이 많은 세상이 아닌가? 눈물과 아픔과 죽음으로 이어지는 고통이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사는 동안 낙심 날 때가 있고, 괴로울 때가 있고,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흐를 때가 있다.
그러나 낙망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보혜사 성령이 믿는 성도들 곁에 '보혜사' 이름 그대로 위로의 영으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주님은 성령님을 통하여 "낙심하지 말라, 슬퍼하지 말라" 고 말씀하신다. 뿐만 아니라 성령님은 우리를 위로해 주시고, 눈물을 닦아주시고, 용기를 북돋워주시고, 넘어졌을 때 일으켜 주시는 분이다. 성령의 교통하심이 없이는 축복도 없다. 성령은 어디에서나 역사 하신다. 바람은 어디에나 있는 것처럼 성령은 어디에나 계신다. 그러나 성령은 교회에서 더 크게 역사 하신다. 특히 예배드리는 시간에 더욱 강하게 역사 하신다. 성령이 우리 가운데 5가지로 역사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축도는 복을 기원하는 단순한 기도만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 주실 것을 선언하는 목회자만의 고유한 축복의 기도다. 예배드리고 세상으로 나아가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도록 하기 위한 축복의 선언 기도인 것이다. 이 축도를 통해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용기 백배하는 힘을 얻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일 일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인도하심을 구할 때에 성령께서 방황하는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신다. 이스라엘 백성을 보시오. 성령의 구름기둥, 불기둥이 광야 길을 인도해 주셨다. 이 성령의 인도함이 없었더라면 어찌될 뻔했는가?
그래서 순종하며 따라갈 때는 노래를 부를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인도함을 받으면서도 길이 험하고 괴롭고 목이 마를 때는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향하여서는 불평도 하였다. 다시 우리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선동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무엇인가? 광야에서 방황하다가 죽고 말았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를 못했다. 지금은 성령시대다.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다른(알로스)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기로 하셨다. 보혜사 성령이 보호해주시고 변호해주시고 보증이 되어주시고 도와주시고, 세상 끝까지 지켜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성령이 늘 교통하신다는 말씀이다.
성령께서 초대 교회의 교인들에게 임재하셨을 때 성도들은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했으며, 믿는 무리가 한마음 한뜻이 되었다. (행 4:32)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이것이 성령의 은혜입니다. 즉 성령은 말씀 증거의 역사를 도우시며 성도 간에는 서로 한마음 한뜻으로 화해하고 일치하여 믿음 안에서 기쁨의 교제를 나누도록 역사하신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 일체이신 하나님이시다. 성부 하나님의 사랑과 성자 예수님의 은혜와 성령님의 교통 속에 함께 하는 모두가 되자.
여기에서 ‘교통’이란 ‘아주 밀접한 교제’를 의미한다. 항상 성령님과 밀접한 교제 속에 성령님의 뜻을 순종하고, 성령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만 하고, 성령님이 감동하시는 대로 행동하는 삶을 사시기 바란다. 성령의 교통이라고 했는데 교통이란 코이노니아 라는 말이다. 교제란 말이다. 펠로쉽이란 말이다. 교제라는 말은 참여한다. 나눈다. 공유한다. 동업자가 된다는 의미다. 때로는 결혼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성령의 교제라는 말은 성령과 동업한다는 말이다. 인간과 동업하면 이용당하기도 하고 배신당하기도 한다. 성령과 동업하면 만사형통 한다. 성령과 함께 의논하고 대화를 나누며 성령의 가르침을 따르면 성령께서 나를 확확 밀어주신다. 성령은 우리와 어떻게 교제하시는가? 성령은 우리와 지적인 교제를 가지기를 원한다. 지적 수준이 맞아야 대화가 이루어진다. 성령과 우리와 대화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진 성경을 통해야 가능하다.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는 가운데 성령과의 지적인 교통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말씀을 무시하면 안 된다. 말씀이 우리 마음에서 떠나지 않아야 대화가 이루어진다.
다음에는 성령과의 정적인 교제가 있어야 한다. 성령은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오셨다.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은 우리를 영생으로 이끌어갈 뿐만 아니라 우리 삶의 모든 부분에서 함께 하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성령을 보혜사라고 했다. 파라크레토스는 가까이 오사 위로하시는 성령, 가까이 오라고 부르시는 성령이란 말이다. 파라는 곁에 란 의미이며 크레토스는 부른다는 의미다. 지금 여러분들은 성령이 오라고 부르는 음성을 듣기를 원한다. 성령과 교제하시기를 원하신다. 교제, 교통의 수단은 언어다. 곁에 있는 사람과 안녕하십니까? 평안하십니까? 인사나 하고 오랜만입니다 악수한다고 교제가 다된 건 아니다. 참다운 교제는 언어가 통한다. 말이 통한다. 요즘 우리는 답답한 시대에 살고 있다. 말이 안 통하니 뜻이 통하지 않는. 기업인과 근로자와의 사이에 말이 안 통한. 병원을 경영하는 경영자와 일하는 종사자들 사이에 말이 안 통한. 그러니 대립이요, 분열이. 철의 장막으로 굳게 닫혔던 남과 북은 대화의 문이 열리는데…… 초대교회는 성령님과 교통했다. 도무지 풀지 못하는 어려운 문제들도 성령의 교제를 통하여 풀어냈다.
행2장에 보면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니 자기 소리는 없어지고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을 말하기를 시작했다. 오순절에 모였던 많은 무리들이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말이 통했다. 막혔던 것이 소통이 되었다. 교통이란 말은 교제, 협력, 보급, 연합, 일치, 하나됨, 나눔이란 뜻이다. 우리는 성령의 교통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 속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 교제가 곧 영생이요 구원이다. 우리는 그 교제 속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협력과 보급을 무한히 받게 되었다. 하나님 아버지와 연합하고 일치하여 하나가 되고 모든 것을 나누게 되는 놀라운 구원의 특권을 누리게 되었다.
또한 이 성령의 교통하심으로 인하여 우리는 모든 시대의 성도들과 교제하게 되었다. 성령의 교통하심은 성도의 교제를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다. 그래서 모든 사도적 신앙을 가진 교회는 이렇게 고백한다.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사오며 성도의 교제가 곧 교회다. 우리는 이 교회에서 천국을 느끼며 이 땅위에서도 충분히 행복을 누린다.
오늘은 이와 같은 교통, 곧 하나님과의 교제, 성도와의 교제를 가능케 한 성령님의 교통하심의 성격에 대하여 알아보자. 가치의 인식, 독특한 개성에의 존중 이것이 성령의 교통하심이 오늘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이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유별난 존재로서 하나님과의 내밀한 교제 속으로 이끌어 주신다. 사나 죽으나 우리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자녀라는 인식을 심어주신다. 동시에 성령의 교통하심을 받은 모든 사람들간에 이와 같은 공동인식을 가지고 만나게 해 주신다. 우리는 모두들 한 분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도의 교제를 나누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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