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진선교(西進宣敎)는 하나님의 창조적 질서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말씀하신 '땅끝'은 선교의 '땅끝'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 '땅끝'은 내가 쓴 칼럼 [예수님께서 최후에 말씀하신 '땅끝'은 어디인가?]를 통하여 예루살렘이라고 했다. 지금의 중동지역 이스라엘에 위치한 도시다. 복음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전파되기 시작했고, 이동성을 따라 둥근 지구를 한 바퀴 돌아 복음전파가 끝나야 하는 끝도 예루살렘이어야 한다고 쓴 바 있다.
그렇다면 지구촌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예루살렘 선교에만 집중(集中)해야 하는가? 예루살렘 이외의 다른 곳은 선교가 불필요하다는 것일까? 오해하지 말라. 예루살렘이 선교의 땅끝이라는 것은, 오직 예루살렘 선교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선교가 일정한 방향을 중심으로 이동되어야 할 당위성(當爲性)을 이야기했을 뿐이다.
복음은 동서남북 어느 곳이든지 빠짐없이 전파되어야 한다. 지구촌 방방곡곡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마다 복음을 듣지 못한 이들이 없게 해야 한다. 모든 인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하신 은혜로 말미암아 영혼이 구원함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어찌 저들을 외면(外面)하고 오직 예루살렘 선교에만 집착(執着)할 수 있으랴. 복음의 전파는 전방위적(全方位的)이어야 하고, 또한 포괄적(包括的)이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진선교(西進宣敎)는 매우 중요하다.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는 항상 역동적(力動的)이어야 한다. 강력한 이동성(移動性)을 가져야 한다. 이를 위해 분명한 방향(方向)이 설정(設定)되어야 한다. 그런 방향이 바로 서쪽이다. 서진선교라 함이 바로 서쪽을 향하여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 따라서 서진사역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은 선교에서 가장 주력(注力)해야 할 방향이 서쪽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지구는 동서남북(東西南北)을 중심으로 방위(方位)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방위는 항상 질서(秩序)에 기초를 두고 있다. 과거의 남쪽이던 곳이 오늘은 북쪽이 되었거나, 오늘의 서쪽이 미래에 동쪽으로 바뀌는 일은 결코 없다. 옛날이나 지금이, 그리고 먼 미래에도 영원히 동쪽은 여전히 동쪽이요, 서쪽은 서쪽, 남쪽은 남쪽, 북쪽은 항상 북쪽이다. 이것이 바로 창조적 질서다.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만드셨다. 방위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부터 존재했다. 그러므로 방위는 하나님의 창조적 질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이 정하신 창조의 질서는 결코 사람의 힘으로는 변개(變改)할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도 결코 변개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질서는 하나님의 영원하심에 기초를 둔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전파를 위한 선교도 마찬가지다. 이것을 정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것은 시대와 환경에 따라 얼마든지 변화가 가능한 방법이 아니라 하나의 원칙, 곧 질서에 의해 정하셨다. 그것은 바로 서진선교다. 따러서 서진선교는 하나님의 창조적 질서의 하나다. 진정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서진선교가 하나님의 창조적 질서라는 것은 내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성경에서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교의 목적이 무엇인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것이다. 왜 복음을 전파하려고 하는가? 죄로 인하여 타락해 영원한 멸망으로 빠져가는 사람들을 구원해야 하기 때문이다. 저들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복음 뿐이다. 그렇면 구원의 본질은 무엇인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본래 사람을 창조하셨던 태초의 신분으로 복귀(復歸)하는 것이다.
태초에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다.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빛을 만드사 낮과 밤을 구분하셨다. 그리고 궁창을 창조하사 그것을 하늘이라고 부르셨다. 하나님은 계속하여 바다와 육지를 창조하셨고, 땅 위에 여러 가지 식물들이 자라게 하셨다. 하늘에 일월성신(日月星辰)을 창조하사 그것들로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셨다. 그 후에 하나님은 하늘의 새와 바다에 물고기, 땅위에 육축(六畜)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동물을 창조하셨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은 말씀 한 마디로 이루셨다.
하나님의 창조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가장 마지막에 당신의 모양과 형상을 따라 '아담'과 '하와'라고 하는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천하의 모든 만물들을 창조하시는 방법과는 다른 방법으로 저들을 창조하셨다. 친히 당신의 손으로 흙을 빚어 만드셨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 생령(生靈)이 되게 하셨다. 따라서 사람은 다른 피조물과는 현격(懸隔)하게 차별화(差別化)하셨다. 결국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이유는 사람을 창조하시기 위해서였음을 드러내신 것이었다.
왜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신 것일까? 교제(交際)의 대상으로 삼으시기 위함이셨다. 더 나아가 사랑의 대상으로 삼으시기 위함이셨다. 당신의 모양과 형상을 따라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피조물로, 당신과 격의(隔意) 없이 교제하며 사랑하기 위한 대상으로 창조하신 것이다. 일방적인 사랑이 아니라 쌍방이 소통(疏通)되는 사랑의 대상으로 창조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위해 특별히 에덴동산을 창설하셨다. 사람으로 하여금 그곳에 살게하시면서 당신이 창조하신 모든 자연만물을 다스리고 정복할 권한을 위임하셨다. 그리고 오직 한 가지, 동산 가운데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도 있게 하시고,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계율(戒律)을 정하사 순종을 원하셨다.
하나님께서 태초의 사람에게 분부하신 하나의 계율은 사람을 통제(統制)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셨다. 오히려 독립된 인격을 부여(附與)하여 사람과 더불어 진정한 쌍방적 관계의 소통을 바라셨다. 따라서 사람은 하나님의 분부하심에 순종해야 했고, 순종을 통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모든 권한을 영원히 누릴 수 있게 하셨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시는 방법이셨다.
그렇지만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첫 사람들은 하나님의 기대(期待)를 무너뜨리고 말았다. 마귀의 궤계(詭計)에 넘어가 하나님의 계율을 지키지 않고 불순종하는 죄를 범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發生)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죄를 용납하실 수 없는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이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죄로 인해 타락하게 된 사람들과 더불어 격의 없는 교제와 사랑은 불가능했다. 따라서 더 이상 죄인된 사람들을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게 하는 생명나무가 있는 에덴동산에 머물게하실 수 없었다.
그래도 하나님은 사람을 여전히 사랑하셨다. 불순종의 죄를 범한 사람들을 당장이라도 죽어야 마땅했지만 저들의 죽음을 유예(猶豫)하셨다. 이를 위해 짐승을 잡아 그 가죽으로 옷을 친히 지어 입히셨다. 그리고 더 이상 저들이 살 수 없는 에덴동산에서 동편(東便)으로 쫓아내셨다. 더 나아가 에덴동산으로 돌아오지 못하도록 그룹과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막아 원천봉쇄(源泉封鎖)하셨다. 이는 범죄한 죄인이 에덴동산 가운데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 먹고 영생하게 될 것을 염려하신 특단(特段)의 조처(措處)였다.
이제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에덴동산으로 복귀하는 것 뿐이다. 그 길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부터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그렇다. 창세 이후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죄를 범하고 쫓겨나면서 구원의 길,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은 오직 서쪽에 있다는 새로운 질서의 시작이었다.
내가 성경을 억지로 해석하는 것이거나 궤변(詭辯)처럼 여겨지는가? 오해하지 말라. 결코 성경을 억지로 해석하거나 궤변이 아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서쪽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며, 서쪽을 향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사실들을 여러번 반복하여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인류의 역사도 이것을 밝히는 증거들은 얼마든지 있다. 구체적인 사례들은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기로 한다.
성경에서 확인이 가능하고, 역사가 이것을 증거하고 있는 인류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일은 모두 서쪽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은 아주 놀라운 일이다. 그것들은 모두 사람들이 임의적(任意的)으로 판단하여 결정된 것들이 아니었다. 어떤 절대적인 능력에 의해 수동적(受動的)으로 이루어진 것들이었다. 따라서 내가 서진선교가 하나님의 창조적인 질서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어떤 절대적인 능력은 곧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선교가 하나님의 구원의 도리인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라고 믿는가? 그렇다면 창세시대부터 변함없이 계속되었던 하나님의 창조적 질서에 충실하게 순응해야 한다. 하나님의 창조적 질서가 지켜지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기대는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그러므로 진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선교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창조적 질서인 서진선교를 결코 간과(看過)하지 말아야 한다.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서진선교는 변개할 수 없는 하나님의 창조적인 질서다. 창조적 질서는 마땅히 존중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서쪽이 아닌 다른 방향의 선교를 등한시(等閑視)하거나 무관심(無關心)하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일은 전방위적이고 포괄적이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서진선교를 그것들 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을 상기(想起)시키고 싶어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아직도 서진선교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잘 이해되지 않는가?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성경에서, 그리고 역사에서 증거되는 사례들을 알게된다면 충분히 이해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러므로 이제 그 충분한 이해를 돕기 위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서쪽과 관련된 성경과 역사적인 증거들을 두 번에 걸쳐 간략하게 쓸 것을 약속한다. 그리고 오늘은 여기서 이야기를 끝내려 한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임하시길 위해 축복한다.
2011. 7. 11 (월)
글/ 불꽃 石一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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