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와 이단 무엇이 문제인가?
I.이단문제로 진통을 겪고 있는 한국교회
한국교회는 오래 전부터 이단들로 인해 몸살을 앓기 시작했고,이제 그 심각성은 위험수위를 넘어가고 있다고 본다. 이미 그 실상이 하나씩 나타나고 있음을 실감한다. 사교로부터 가정이 파괴되거나 교회가 추한 모습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일은 이제 그리 흔한 일이 아닌 것 같다.
예컨대, 1991년 5월에 아버지의 신앙을 따르지 않는다고 아들을 16개월씩 밀실에 감금해 두었던 사건을 모르는 자가 없다(1991년 5월 29일자 조선일보)이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1990년 75차 총회시) 밤빌리아란 이단의 이야기이다.
그보다 우리는 1987년 8월 29일에 있었던 끔찍한 사건을 잊지 못할 것이다.경기도 용인군 남사면 불리에 소재하고 있는 주식회사 오대양 구내식당 천장속에서 발견된 32구의 시체들로 온 세상을 놀라게 한 소위 '오대양사건'이다. 그런데 이 오대양 사건이 또 다시 살아나서 1991년 여름을 서늘하게 했다. 한국 역사에 기독교 이단문제로 이렇게 세상이 시끄러웠던 일은 없었을 것이다. 구원파와 오대양의 관계, 자살이냐 타살이냐, 세모와 5공과의 관계등의 문제들이 밝혀지기를 숨 조이며 지켜 보았는데 별로 신통한 답을 얻지 못한 부분도 있었고 ,우리 정통교회편에서 볼 때 얻은 것도 많았다고 본다. 어쨌든 이제 이단문제는 이단에 빠진 자들이나 그들의 가족만의 문제이기보다 기독교 자체의 문제가 되었고 심지어 사회적 국가적 문제로까지 번져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마다 필자가 느끼는 안타까움이 하나 있다. 세상 사람에게는 정통교회와 이단을 구별할 능력이 없다는 점이다. 이단이나 사교에 속한 자도 똑같이 교회란 이름이나 목사라는 이름을 쓰고 있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기독교 자체의 문제로 오해하기 쉽고 또 그렇게 오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하여 어느 때보다도 기독교인들의 조직적이고도 연합적인,그리고 지속적인 관심과 대응이 필요한 것이다.
토의할 문제:
범람하는 이단으로부터 어떻게 정통교회를 보호할 수 있는가?
II. 왜 이단이 발생하는가?
[한국교회는 이단의 천국인가]라는 질문을 피하기 어렵도록 지난 1세기 동안 한국교회는 많은 이단을 배출시켰다. 왜 이렇게 많은 이단이 발생하는가?
물론 먹을 음식이 없으면 곰팡이가 필리 없고, 곡식이 없는데 쥐가 구멍을 뚫을 일이 없으며, 죽은 사람에겐 질병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교회에 이단이 많은 것은 역설적으로 한국교회의 부흥을 증명해 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단이 발생하는 부정적 요인은 위기이다. 그런 점에서 이단을 위기이 종교라고 할 수 있다. 집안 단속이 소홀할 때 도둑이 들어오고 몸이 약할 때 질병에 들기 쉬운 것과 같다. 그런 점에서 역사적으로 전쟁의 위기를 맞고나면 사이비종교와 이단이 많이 발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개인적으로는 사업에 실패하거나, 실연당한 후에 이단에 빠지는 자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가난한 동네에 이단교회가 훨씬 더 많이 존재한다. 필자의 상담경험에 의하면 사회적 위기, 가정적 위기,경제적 위기,인간관계의 위기를 통해 이단에 빠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전쟁 후에 이단이 많으니 것도 같은 현상이다. 이것을 교회의 측면에서 그리고 교리적인 면과 윤리적인 면으로 세분하여 살펴보자. 왜냐하면 정통교회의 교리적 윤리적 약점이 이단의 통로가 되기 때문이다.
1. 교리적인 측면에서 본 이단의 온상
교리적인 면에서 볼 때 이단의 온상이 되는 토양은 두가지라고 본다. 첫째는 신비주의와 자유주의는 동전의 양면처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자유주의의 시조 쉴라에르마흐에르(scheleiermacher)는 독일의 경건주의를 바탕으로 생겨났음을 보아 알 수 있다. 물론 신비를 부정하면 이성주의자가 되고, 신비만 인정하고 신비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면 신비주의자가 된다. 그런데 대부분의 이단은 신비적 접촉을 시도하고 있으며 그런 점에서 신비주의자는 쉽게 이단에 빠질 수 있다. 한국교회에 이단이 많은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한국인들의 신비주의성 때문이다.
또한 자유주의는 대부분 이단자들에게 교리적 근거를 제시하는데 공헌하고 있다. 예를 들어 보자. 통일교도였던 김영운이 쓴 [통일신학]이란 책(서울,성화사 1981)을 보면 성경은 유오하다(p.40)는 것이요 그러기에 새로운 계시가 필요하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김씨는 성경이 유오하다는 5가지 증거를 제시할 때 교계의 모자유의 신학자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성경에는 모순이 많고,원본의 내용을 알 길이 없고, 또한 신화와 비과학적 설명이 포함되어 있으며,전설도 많고,도덕적으로 무가치한 구절이 있으며, 예수님도 구약성서의 무오성을 인정하지 않았다.(pp.40-41)는 것이다. 또한 자유주의 신학자 하비 콕스가 통일교를 극찬한 것이나 연세대 신학과 교수였던 서남동 교수가 통일교를 옹호한 것은 자연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2. 윤리적인 면에서 본 이단의 통로
교리적인 부패 못지 않게 윤리적인 부패는 이단의 온상이 된다. 교회가 교회의 사명을 망각할 때 우리의 양떼는 이리들에게 잡혀가게 되는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이단에 대한 무관심이 오늘날 한국교회를 이단의 천국으로 만든 것이다. 교회가 가져야할 관심이 있다는 말이다. 놀기에 힘쓰는 아이는 공부를 잘할 수 없음과 같다. 교회가 선교적 관심을 잃게 될 때 교회는 강도의 굴혈이 되고 만다.
하나님의 명령은 세상 속에 교회를 심으라는 것이다. 세상 속에 교회가 심어져 가고 있으나 반면에 교회 속에 세상이 심어지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교회 속에도 물질주의와 교권주의의 담이 높아만 가는 것을 보니 하나님의 영광의 탑이 낮아만 가고 있는 증거가 된다.
수십 종이 넘는 비성경적인 헌금을 만들어 강조하는 것은 면죄부를 파는 중세교회와 다를 바가 없다. 더우기 오늘날 노회나 총회의 기능이 권력 싸움의 최대 관심이 선거에 있거나, 순수한 교리적 논쟁이 아닌 교권주의적으로 논쟁이나 일삼으려 한다면 한국교회는 자멸할 수 밖에 없다고 본다.
기독교가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는 내적으로 교리적인 문제에 더 의존하고 있지만 외적으로는 세상사람들에게 도덕적으로 인정되느냐 인정되지 않느냐에 더 달려 있음을 알아야 한다. 교회의 도덕성이 흐려질 때 불신자의 눈에는 정통교회와 이단이 다를 바가 없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변증가들마다 기독교가 참종교임을 증명하는데 교리적 변증외에 기독교의 도덕적 우월성을 내세웠던 것이다.
토의할 문제 :
1) 이단발생의 사회적,국가적,경제적 원인과 교회편에서의 원인이 무엇이며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2) 이단발생의 교리적인 면과 윤리적인 면을 토의해 보자.
III. 이단이란 무엇인가?
한국에는 어림잡아 백여개의 이단이 있는데 그중에도 외국에서 들어온 소위 외래파는 열개 밖에 없다는 점과 인간 예수, 인간 하나님이 오십여명이나 된다는 점은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한다. 아마 기도원이나 안방에 숨은 소수의 이단까지 합한다면 이백여개는 되리라고 본다. 이렇게 많은 이단에 대한 한국교회에 대책의 무엇인지를 말하기 전에 먼저 이단이 무엇인지 부터 밝혀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는 이단에 대한 대책은 커녕 아직 이단이 무엇인가에 대한 정립부터 안되었다고 한다면 지나친 말이 될까?평신도들은 이단의 논쟁이란 마치 감정싸움으로 인한 또는 시기 질투에 의한 정죄 수단이라고 잘못 느끼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예장(통합)에서의 김 기동씨의 귀신론과 조용기 목사에 대한 이단 시비 및 사이비 집단 규정 같은 것이 그런 경우일 것이다. 물론 이단이 아닌 자를 감정적 싸움이나 시기 질투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한다면 이단으로 정죄된 자보다 이단으로 정죄한 자가 더 악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먼저 이단이 무엇인지를 밝혀 알게 될 때 그것이 감정싸움인지 아닌지 알게될 것으로 믿는다.
그렇다면 이단이란 무엇인가?
이단이란 한마디로 교리적으로 잘못될 때 이단인 것이다.대부분 이단은 윤리적 부패를 수반하지만 비록 윤리적으로 선해도 교리적으로 잘못되면 이단임을 알아야 한다. 예컨대 안식교 같은 이단은 그들의 교리체계 내에서 선하게 살려고 하지만 교리적으로 잘못되었기에 이단이다. 그렇다면 자연히 생기는 문제가 있는데 교리적으로 무엇이 잘못되면 이단이 되며 이단을 규정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우리 신체를 예를 들어보면 눈이 멀었거나 팔을 잃어다고 죽지는 않는다. 그러나 생명기관에 병이 들면 죽을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역사적 신앙과 결정적인 교리가 한가지만 다를 때에도 이단으로 규정된다. 창조론,구원론,계시론,신론 중 단 하나만 잘못되어도 이단이 될 수 있다. 이것을 성경에서 들어보자.요한이서 1장1절에 보면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 그리스도니]라고 했다. 이 말은 요한이 예수님의 인성을 부정하고,신성만 인정하는 도케티즘(가현설 주의자)에 대한 말이었다. 즉 예수님은 영으로 오셨고,영으로 죽으셨고,영으로 부활하셨다고 주장하여 예수님의 인성을 완전히 부정하는 자들이 그들이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 말씀이 이단을 규정하는 필 충분한 조건으로써의 말씀인줄 오해함으로 인성만 부정하지 않으면 이단이 아닌 줄 알고 있다. 물론 예수님의 인성을 부정해도 이단이지만 그 반대로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거나 제한해도 이단임을 알아야 한다. 바로 예수님의 인성을 인정하나 신성을 제한하던 아리우스도 이단으로 정죄된 것과 같다.
이것을 김기동씨의 경우에서 살펴보자. 김기동씨와 그와같은 사상의 이초석씨는 동일한 주장을 하는데 자기들을 예수님의 인성을 부정하지 않는데 왜 이단이랴고 요한이서 1장 7절에 의해 따져 묻는 것이다. 그러면서 김기동씨는 신성을 노골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그는 예수님을 신이라고 하면 오히려 이단이라고 주장한다. 예수님은 신의 생애가 아니고 사람의 생애요 예수님이 물 위를 걷고 기적을 행하는 것은 신이기 때문에 일으킨 것이 아니요 인간으로 할 수 있는 보편적인 역사라는 것이다(제9기생 강의 테이프 29-2,19-2).그래서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은 성령을 자신보다 높혀서 성령에게 존칭어를 쓸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김기동,[성령을 알자] 베뢰아,1986,p.23). 사실 김기동씨의 경우에 예수님의 신성만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그토록 주장하는 인성도 역사적 기독교의 인성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뿐만 아니라 김씨의 창조론에도, 삼위일체에도, 계시론에도, 성령론에도,마귀론에도 이단사상은 가득차 있지만 그가 주장하는 다른 모든 것들이 꼭 옳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의 신성 하나가 부정되는 것만으로도 이단이 되기에는 필요충분하다.
역사적으로 볼 때 가장 많았던 이단 논쟁은 예수님의 양성(신성과 인성) 문제에서 발생했던 것과 섬세한 차이에도 이단 논쟁이 발생했던 점을 상기시켜 볼 때 교리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유사하나 하나님이 아니라고 주장하던 아리우스가 이단으로 정죄된때가 니케아회의(325년)요,그리스도의 인성을 제한하던 아볼리나리스가 이단으로 정죄된 때가 콘스탄티노플회의(381년)에서 이며, 그리스도의 양성이 완전히 독립되었으나 승천 때 합해진다는 네스트리오는 에베소회의 (431년)에서 정죄되었으며,칼케톤(451년)회의에서는 그리스도의 양성을 부정하던 유디게가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이처럼 그 교리중 어느 하나라도 성경을 보면 역사적 기독교와 다를 때 이단이 된다.
토의할 문제 :
1) 교리의 이론성과 실제성이 무엇인가?
2) 이단은 정도에 따라 구별할 수 없는가?
3) 이단과 구원문제는 어떠한가?
4) 이단의 윤리성 문제를 토의해 보라.
5) 교회사 속의 이단 정죄와 현대의 이단 정죄에는 무슨 차이점이 있는가?
6) 기독교 중심의 신학의 장점과 단점이 무엇이며 정통신학의 최대 약점이 되고 있는 종말론이나 마귀론은 어떻게 해결해야 하겠는가?
IV. 이단과 성경
이단이 성경과 접촉점을 가지지 않았다면 기독교 이단이라고 할 수 없다. 성경과 접촉점을 가지고 있고, 최소한 성경적 분위기를 가졌을 때 기독교 이단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이단이 보는 성경계시는 두가지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성경계시 외에 자기계시를 가진 이단이요, 둘째는 성경계시만 계시로 인정하는 이단이다. 이단을 연구하는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단이란 성경 외에 자기계시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으나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예를 들어 통일교는 성경 외에[원리강론]이라는 자기계시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성경만 계시로 인정하는 이단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오히려 때로는 전자보다 후자가 더 무서운 이단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실제 예를 들어보자. 보는 사람의 견해에 따라 안식교나 여호와의 증인을 전자에 속한 이단으로 볼 수 있다. 안식교의 경우 화이트여사의 대정투를 성경 외의 계시로 인정한다고 볼 수 있으나, 표면적으로는 그렇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물론 세분하자만 성경만 계시로 인정하는 이단은 둘로 나누어 보아야 한다. 실질적으로 자기계시를 가지고 있으나 표면적으로 성경만 계시로 인정하는 것 같은 이단과 정말로 성경만 하나님의 유일한 계시로 인정하지만 성경해석에서 그 차이점을 들어내는 이단은 구별되어야 한다. 비록 안식교나 여호와의 증인은 내면적으로 자기계시를 가지고 있더라도 기성교인에 대한 표면적 주장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그런데 왜 이같은 구분을 하게 되는가. 그 이유는 실질적으로 성경만 계시로 인정하든,표면적으로 인정하든 여기에 속한 이단이 더 무서운 이단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것을 통일교에서 살펴보자. 통일교만큼 [원리강론]이란 자기계시를 분명히 가지고 있는 이단은 없다. 그런데 통일교마저도 성경만 하나님의 계시로 인정하는 것처럼 주장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통일교는 성경에 대해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하나의 얼굴은 친성경적인 얼굴이요, 다른 하나의 얼굴은 반성경적인 얼굴이다. 먼저 첫번째 얼굴을 보라.그들의 신조 두번째가 신구약성경을 경전으로 받든다고 했으며[통일교회소개](1982년 8월 13일 인쇄,8월 30일 발행 발행인 유광열, 발행처 성화사)라는 책자에서 문답으로 알아보는 통일교회라는 항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문 : 통일교회에서는 (원리강론)의 원리를 교리로 삼고 있는데 그 원리는 성경에 입각한 것인가?
답 : 문선명 선생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와 성경 가운데 이는 일관한 뜻을 가지고 종합해서 체계화시킨 것이 원리강론이다. 즉(원리강론)은 성경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일종의 조직신학서라고 말함으로 성서의 권위를 높이고 있고, 또한 성서를 이해하기 위한 보조자료로 보는 것 같다. 조직신학 서적에 불과한 원리강론이 결코 원전인 성서보다 더 높이 평가될 수 없을 것이고 더우기 성서를 경전으로 본다는 말같이 들릴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이다.
이제 두번째 얼굴을 살펴보자.통일교 원리강론은 결코 조직신학이 아닌 새 계시,새 성경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김영운씨가 쓴 [통일신학]이란 책(서울 성화사 1981)에서 보면 성경은 유오하기 때문에 (pp.40-41) 새로운 계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점은 [통일교의 소개]책자에서 살펴보면 똑같은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왜 통일교가 출현해야 하는가(p.11)에서 세가지 이유를 들고 있다. 1.기독교 역사의 추이로 보아서, 2. 종교와 과학을 통일할 수 있는 진리의 필요성에 의해서.3. 성서예언에 따라 그렇다는 것이다. 이 점을 그들이 주장하는 원리강론에서 들어보자. 성서의 문자는 진리를 표현하는 하나의 방법이요, 진리자체가 아니요(p.139) ,그런 점에서 새진리가 나와야 하는데 성서는 진리 자체가 아니요 진리를 가르쳐주는 교과서이므로 말세에는 반드시 새진리가 나와야 한다(pp.140-141) 고 하며 이 교과서인 성경을 절대시 해서는 안된다는 (p.9).결국 원리강론은 성서에 대한 조직신학이라 하면서도 반대로 구약은 소생기의 것이요,신약은 장성기의 것이요,원리강론은 완성기의 성경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볼때 문제는 성경임을 알 수 있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성경만 계시로 인정하는 이단이 더 무서운 이단이다. 그러나 성경만 계시로 인정하든 성경 외에 자기계시를 가졌든 논재의 촛점은 성경에서 찾을 수 밖에 없다. 비록 성경 외에 자기계시가 있는 이단이라도 그들이 주장하는 최소최대한의 성경적 접촉점,그것이 우리 논쟁의 핵심이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보자. 이단에 수십년씩 빠졌다가 돌아온 자들마다 정통교회의 이단 비판서적을 보고 이단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없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본인이 볼 때 이단에서 나온 자들은 이단에 대한 이해는 깊으나 비판의 기준은 강하다 이단에 대한 이해가 약하다. 이단자들이 가진 성경외의 자기계시나 교리기준을 이해하기가 이렇게 어렵다는 말이다. 이것이 이단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자들에게도 어려운데 일반 목회자나 하물며 평신도야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네것]은 모르더라도 [내것]은 분명히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내것]이 바로 성경이다. 잠언기자는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는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14:12)라고 했다.
토의할 문제:
1) 이단자들의 성경해석과 정통교회의 성경해석에는 어떤 차이가 있겠는가?
V. 왜 하나님은 이단을 내버려 두시는가?
이단에 대하여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은 "왜 하나님은 이단을 내버려 두시는가? 왜 하나님께서 이단교회의 부흥을 보고만 계시는가?"라는 것이다. 과연 하나님께서 이단을 그냥두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하나님은 통일교의 재력을 꺽지 아니하시며, 한국의 100여개나 되는 이단의 왕국을 그냥 보고만 계시는가?
결론론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이단을 부정적 도구로 사용하시기 때문이다.예컨대 모세에 대하여 바로는,예수님에 대하여 가롯유다는,아다나시우스에 대하여 아리우스는,어거스틴에 대하여 펠라기아는 부정적 도구로 사용된 것이다. 교회사를 살펴볼 때 정통신학이 먼저 형성되고 이단 사설이 생겼던 경우보다 이단사설이 생김으로 정통신학 형성을 자극하게 된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님 나라에는 구원의 역사와 심판의 역사를 동시에 이루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성경은 밝히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악대로 극대화시키시고 선은 선대로 극대화시키시어 심판과 구원을 동시에 이루시는 것이다. 한국교회에 이단이 많다는 말은 한국교회에 교리적 윤리적 약점이 많다는 말이 된다. 이제 종말론은 기도원 신학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며, 펄시콜레의 종말론이나 이장림의 종말론에 선량한 양떼들을 잃어서는 안될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토의할 문제 :
1) 더 많은 이단 전문연구가의 필요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2) 해외에서의 이단들의 활동에 어떤 조치가 필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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