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나쁜신앙)

[스크랩] 기독교 2천년 교리 속에 나타난 이단 사상

수호천사1 2011. 6. 30. 13:09

기독교 2천년 교리 속에 나타난 이단 사상

 

1. 인간론에 나타난 이단 사상

 

김광열 / 웨스트민스터신학교 박사  총신대 조직신학교수

 

한국교회의 이단문제는 그 심각성이 이미 공지된 사실이다. 그러나 심각성에 비해 대처와 처방이 미흡하고 적절하지 못했다. 이단 문제에 대한 진단과 처방은 다각적인 방법을 통해 분석하고 또한 대처해야 할 시급한 과제이다. 이단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는 교리적인 문제의 접근이 매우 중요하다. 이는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올바른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현재의 이단 사상에 대한 현실 인식을 위해서는 과거에 어떤 교리에, 어떤 이단들이 있었는지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본지는 이단이 발생할 수 있는 전 교리를 고찰, 오늘날의 이단 사상에 대한 올바른 기준을 제시하고자 '기독교 2처년 교리 속에 나타난 이단 사상'을 기획했다. 필자마다의 다소간의 학문적 차이점이 있고, 전문적인 용어 때문에 독자들에게 이해가 어려운 부분이 있더라도 집중해서 읽어 주었으면 하는 바이다. <편집자 주>

 

나는 왜 죄인인가?
죄의 전이교리(transmission of sin)에 대하여 역사상에 나타난 여러 견해들

 

들어가는 말

성서가 가르쳐주고 있는 인간에 대한 설명들 중에 중요한 내용으로서 '죄인된 인간'의 모습을 빼 놓을 수 없다. 그런데 인간이 죄인들이라는 얘기는 기독교인들만의 얘기가 아니며, 다른 종교인들도 그리고 또한 하나님을 거부하는 불신자들의 입으로부터도 흘러나오는 결론이다.


로마서 2장 14절부터 15절의 말씀과 같이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양심이 비록 하나님의 율법과 같이 분명하고 구체적으로는 아닐지라도 그들의 행위와 마음의 생각을 송사하게 되므로 자신의 죄인됨을 스스로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성서와 인간의 경험은 공통적으로 인간사에 있어서 그 죄의 보편성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신자들도 죄인됨을 인정하는 일에 있어서는 별로 어려움이 없다.


그런데 '죄인된 인간'에 대한 성서의 가르침 중에서 불신자들이 수용하기 어려운 다른 하나의 설명은 바로 '원죄'에 대한 내용이다. 즉 우리가 우리들의 못된 행위들을 생각해 보고서, 그것 때문에 죄인이라고 말하기 전에 우리는 이미 죄인이라는 뜻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저지른 실수 때문에 오늘 나는 죄인이라고 하나님에게 간주되고 있다는 말이다.


현대인들은 질문한다. 하나님께서 과연 공정하신 하나님이시라면 그런 식으로 우리를 취급하실 수가 있겠는가?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수천년(혹은 수억년)전의 한 아저씨(?)가 저지른 실수 때문에 나를 죄인이라고 뒤집어씌우신다면 올바른 처사일 수 있는가?


역사상의 많은 신학자들이 이 문제를 놓고 씨름해 왔다. 그들 나름대로의 신학적 원리를 적용하여 설명하며, 납득할 만한 대안을 제시하려 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한 가지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행정과 사역의 신비를 우리의 이성의 틀에 납득되도록 짜 맞추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그분의 계시의 말씀인 성서가 그러한 하나님의 행정원리에 대해서 어떻게 서술하고 있는지를 그 성서가 가르치고 있는 바대로 이해하여, 그 말씀의 권위 아래서 신앙으로 그 내용을 수용하는 것이 이 문제를 대하는 바른 자세인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성서의 설명을 제시된 바대로 이해하려는 목표를 향해 나아갈 것이다. 그 일을 위하여 우리는 먼저 원조의 문제에 대해서 취해진 역사 속에서의 여러 견해들을 두 그룹으로 분류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로 아담의 죄가 오늘날 인간들의 죄인됨의 사실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이 아니라고 보았던 이들의 입장을 살펴볼 것이며, 그 후에 그 연관성을 직접적으로 관련 짓는 입장들에 대해서 고찰해 보면서, 성서의 가르침을 바르게 정립해 나갈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해 보려한다.

 

직접적 연관성을 거부하는 견해들

 

펠라기우스(Pelagius)의 견해
오늘 우리의 죄인됨이 에덴동산에서의 아담의 행위와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사실에 대해서 강하게 거부했던 대표적인 인물로 펠라기우스(383~410)를 들 수 있다. 그는 영국 출신의 수도사였으며, 로마에서 인기 있는 설교가였다. 그러나 그가 이해한 인간의 모습을 설명해 줄 수 있는 그에 관한 또 다른 중요한 사실은 그는 흠 없는 성격의 소유자로서 엄격한 영적 생활과 도덕 생활을 강조하며 추구했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의 일생에 논쟁의 상대자였던 어거스틴이 인간 본성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평가하며 죄성을 강조하는 것은 거룩한 삶을 살려는 인간의 모든 동기를 제거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보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담의 범죄란 단지 자기 자신에게만 그 영향을 끼쳤으며, 오늘의 인간들은 범죄 전의 아담과 같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스스로 도덕적, 영적 생활을 영위해 갈 수 있는 존재로 태어난다고 주장한 것이다.


원조를 설명하는 주요 성구인 로마서 5장 12절 이하의 내용에 대해서는 언급하기를 아담 이후의 인간에게 죄성이라는 것은 없으며, 그들은 단지 죄의 전례(example)를 따라 죄를 범할 뿐이다라고 했다. 즉 12절 하반부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라고 할 때에 그 '죄를 짓는다'의 의미를 현재적으로 오늘의 모든 사람들이 범하는 개인적인 죄들을 말하는 것으로 보는 입장이다. 즉 오늘 우리들에게 죄와 사망이 임하는 것은 우리들 스스로의 죄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따라서 아담의 범죄는 오늘의 인간들에게 어떠한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없고 단지 죄의 선례를 보였다는 의미에서만 그 연관성을 보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아담과 그 이후의 인간들의 나쁜 습성들을 본받아 행동하고 있기 때문이지, 필연적으로 죄를 짓게 되는(non posse non peccare) 원죄로 인한 부패한 죄성을 가졌기 때문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펠라기우스의 견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문제점들을 지적해 볼 수 있다.
먼저 12절 하반절의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의 내용에서 언급되는(헤마르톤: '죄를 범하다'의 뜻)의 단어는 과거의 한 행위를 언급하는 데 사용되는 단순부정과거 형태라는 것이다. 펠라기우스의 견해와 조화되려면 현재 시제인(히마르타누신)을 사용하여 그 죄 짓는 행위가 계속적으로 진행되는 의미의 시제 형태로 대체시켜야 하는 부자연스러움이 발생되기 때문이다.


또한 죄의 전례가 있다고 해서 그 후의 사람들이 반드시 죄를 따르게 되는 것이라고 볼 필요는 없는 것이다. 불의한 행동을 보고 오히려 경각심을 느끼고 더욱 주의하게 되는 경우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으로 중요한 문제점은 로마서 5장 12절부터 21절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아담과 그리스도의 대비(평행구조)의 기본 내용에 조화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후에 직접적 연관성을 수용하는 입장들을 다루게 될 부분에서 그와 관련하여 설명되어질 것이다.


사무르(Samur)학파
아담의 범죄와 오늘 우리의 죄인됨 사이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부인하는 또 다른 입장은 간접전가를 주장하는 이론이다. 이 이론은 그 연관성을 근본적으로 거부하는 펠라기우스와는 달리 어떠한 형태로든지 관련 짓기는 하되, (어떤 납득될 만한?)다른 근거 위에서 그 연관성을 설명하려는 시도이다. 왜냐하면 이 간접전가 이론도 하나님께서 스스로 죄를 짓지도 않은 이들에게 먼 옛날 다른 사람의 실수를 근거로 하여 죄책을 전가한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 인간들을 죄인들로 평가할 수 있는 근거를 아담의 범죄행위 이외의 내용 속에서 설명하려고 한 것이다. 그 근거란 바로 아담의 후손들이 자연적인 출생과정을 통해서 아담으로부터 물려받게 된 부패한 성품이라고 보고 있다. 즉 아담의 지은 죄 때문에 오늘날 우리도 죄인들이 되게 되었으나, 무조건 아담의 범죄 그 자체에 근거해서 바로 우리를 죄인으로 보시는 것이 아니라,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생겨난 부패성을 우리도 함께 공유하게 되었으므로, 우리의 부패한 성품에 근거해서 우리의 죄책을 말하게 되는 것이라고 보는 입장이다.

 

이러한 견해는 프랑스의 사무르(Samur)신학교의 플라케우스(Josua Placaeus: 1595~1655)에 의해서 주장되어졌으며, 그 후에도 유럽에서는 캠페기우스 버트린거, 헤르만 베네마, 스태퍼(Campegius Vitringa, Hermann Venema J.F. Stapfer)와 같은 이들에 의해서 옹호되었고, 미국에서는 18세기의 뉴잉글랜드 신학자들과 19세기의 신학파(New School)장로교에서 채택되어졌다. 그들 모두가 언제나 동일한 설명을 한 것은 아니지만 아담의 범죄와 우리의 죄인됨의 사실 사이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부인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은 부류에 속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18세기 뉴일글랜드 신학자 중에 한 사람인 홉킨스(Samuel Hopkins)의 입장을 보면 그는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부패한 성품 그 자체를 우리의 죄책의 근거라고 보기보다는(위에서 설명한 전형적인 간접전가 이론), 그것은 오늘의 인간들이 도덕적 인격자로서 활동하게 될 때에, 그들이 반드시 죄를 짓는 행위를 시작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보장하고 있는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아담의 후손들의 죄성이 아담의 죄와 연관이 있기는 하나, 오늘의 인간들이 실제로 죄를 범하게 되기까지 그들을 죄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아담의 범죄에 동참하는 행위를 함으로써만이 그들의 죄책을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홉킨스는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부패한 성품에 대해서도 말하기는 하였지만, 오늘날 우리들의 죄책의 근거는 그 부패한 성품으로부터 발생되는 범죄행위에서만 찾아지게 되는 것이다. 홉킨스 이외에도 아담과 오늘의 인류 사이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거부하는 이들이 더 있으나 그들의 간접전가 이론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몇가지의 문제점들만을 지적하고 다음으로 넘어가기로 하자.


이 이론은 오늘날 인간의 죄인됨의 납득할 만한 근거를 제시하기 위하여, 아담의 부패한 성품을 물려받게 된 아담 후손들의 상태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나(전형적인 간접전가 이론) 사실은 그 설명도 그렇게 납득될 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아담의 부패가 그의 후손들에게 전이되어야 하는 근본적인 원리나 이유를 제시해 주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혹은 홉킨스와 같이, 아담 후손의 부패성을 말하되, 그 부패성 자체에서부터가 아니라, 그것으로 말미암은 실제적인 범죄 행위에 근거하여 말하게 되면, 위에서 펠라기우스 입장의 문제를 설명할 때에 앞에서 제기했던 12절의 '헤마르톤'의 용법에 관한 문제가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


그 외에도 몇 가지 문제들이 있으나 가장 근본적인 지적은 펠라기우스의 경우에서와 같이 로마서 5장 12절 이하에서 사도 바울이 제시하고 잇는 아담과 그리스도의 평행구조의 기본 내용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거기서 바울은 오늘 인간들의 죄인됨을 아담의 한 범죄 때문인 것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한 문제도 마지막 항목에서 다시 밝혀지게 될 것이다.

 

직접적인 연관성을 수용하는 견해들

여기에서 소개되는 입장은 근본적으로 성서의 가르침을 그 액면 그대로 수용하려는 자세를 가지고 있는 견해들이다. 피상적으로 보아 인간의 입장에서 납득되기 어려울 수도 있으나, 성서의 설명, 특히 로마서 5장 12절에서 21절에서의 바울의 가르침을 바로 인간을 취급하시는 하나님의 행정원리에 대한 명확한 진수인 것으로 보는 견해들인 것이다.


특히 로마서 5장 12절의 '죄를 범했다'에 대한 해석과 단순부정과거 형태로서 분명히 과거의 한 범죄행위, 즉 아담의 범죄와 관련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을 말하고 있다. 즉 로마서 5장 12절 이하의 본문에서 설명된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순수하고도 진지하게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담의 죄와 오늘 인간들의 죄인됨 사이의 직접적 연관성을 설명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두 가지 주장들이 제시되고 있다.

 

어거스틴(Augustine)의 실제설
어거스틴(354~430)의 인간에 대한 이해는 -펠라기우스의 그것이 펠라기우스의 성품과 삶의 경험에 영향을 입었음을 배제할 수 없듯이- 그의 생애의 경험과 연관되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어떤 의미로 그는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즉, 하나님의 은혜로!)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처럼 보여진다. 따라서 펠라기우스가 인간의 자연적 도덕 능력을 강조한 반면에, 어거스틴은 인간의 부패와 타락성을 분명히 했던 것이다.


아담의 죄와 오늘 인간들의 죄인됨의 연관성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터툴리안(Tertullian)의 영혼윤회설(Traducianism)적인 이해 위에서 설명해 나갔다. 즉 인간이란 아담 안에서 하나의 총체적 인성으로 창조된 것이며, 따라서 아담이 범죄했을 때에 우리 모든 인류는 사실상 아담 안에 함께 존재했었던 것이며, 아담과 함께 실제로 우리가 범죄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범하지도 않은 죄에 대해서 우리를 나무라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아담 안에서 우리가 실제로 저지른 과오에 대해서 죄책을 지우시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에 대한 중요한 성경적 설명으로, 히브리서 7장 9절에서 10절에 나오는 레위의 존재에 대한 진술을 사용한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을 만나 십일조를 바쳤으나, 레위가 바친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레위가 그때에도 아브라함의 허리에 존재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으로 여길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어거스틴(Augustine)의 실제설은 하나님의 공정성을 변호하는 데 있어서 변증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지니며, 원죄를 밝히 설명해 준다는 점에서 위에서 설명한 펠라기우스나 사무르학파의 이해보다는 성경적 가르침을 바르게 제시해 주고 있으나, 몇 가지 지적되어야 할 부분이 있다. 아담 안에 인류의 보편적 인성이 존재해 있을 때 아담의 범죄한 사실에 근거하여 설명하려 한다면, 왜 아담의 죄악된 처음 행위만을 말하고, 그 이후에 발생되었을 다른 죄에 대해서는 후손들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가의 문제이다.


또한 같은 부분에 대해서 제기될 수 있는 것은 하와의 문제이다. 왜냐하면 아담이 범죄할 때, 하와는 아담으로부터 이미 분리되어진 별개의 개체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와는 아담의 범죄 행위에 대한 죄책 전가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위에서 제시된 다른 이론들과 같이 이 이론도 로마서 5장 12절 이하에서 사도 바울이 설명하고 있는 아담과 그리스도 사이의 평행구조의 기본원리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점도 다음 항목에서 다시 취급되어질 것이다.

 

언약적 대표설(Federalism)
이 입장도 아담의 범죄행위와 모든 우리들의 죄인됨의 사실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성을 말한다는 점에서 어거스틴의 실제설과 같으나, 그 연관성의 원리에 대해 달리 설명한다. 그 다른 원리란 아담을 모든 인류의 혈통적 대표(조상)로 볼 뿐만 아니라 언약적 대표(머리)로 본다는 점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행정원리란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나머지의 모든 인류의 대표자로서 범죄한 것으로 보셨으며, 그의 범죄행위의 결과는 그의 후손의 행위로 간주되었고 그렇게 하여 모두 죄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언약적 대표설은 바빙크, 마첸, 머레이, 벌코프(H.Bavink, G.Machen, J.Murray, L.Berkhof) 등과 같은 위대한 개혁주의 신학자들에 의해서 주장되어졌으며 관련성구인 로마서 5장 12절 이하의 내용을 가장 적절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우선 위에서 언급했던 12절의 '죄를 지었다'에 대한 해석은 어거스틴의 실제설과 같이 본문의 단순부정과거 형태를 그대로 자연스럽게 따를 수 있다는 점을 들 수 있으나, 좀더 근본적으로는 로마서 5장 12절에서 21절에 나오는 아담과 그리스도의 평행구조의 기본원리에 가장 부합되고 있는 것이다.


로마서 5장 12절 이하의 말씀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두 사람의 대표자를 통해서 행정하셨는데 서로 평행적인 구조원리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즉 에덴동산에서의 처음 창조 때의 한 사람(아담)은 (행위)언약의 대표로서 모든 인류를 대표해서 행동했던 것이며, 그와 같이 재창조(새 창조)때의 한 사람(예수님)은 (은혜)언약의 대표자로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표하여 구속사역의 의를 이루셨다는 평행구조를 말하고 있다(롬5:15~19).


그러므로 오늘 성도들이 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게되는 것은 바로 우리의 대표자 되신 예수님의 의의 한 행동 때문인 것처럼(18절), 아담의 후손들이 모두 죄인되는 것은 그들의 대표로서 범죄한 아담의 한 범죄 때문인 것으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본문의 평행구조에 펠라기우스의 이론을 적용시켜 보면 아담 후손의 죄인됨은 그들이 아담과 같이 스스로의 행위로 범죄했기 때문인 것처럼, 오늘 성도들의 의인됨도 그들이 예수님과 같이 스스로의 의의 행동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해야 하므로 자력주의적(autosoterism) 종교로 전락하게 되는 문제를 낳게 되며, 간접전가 이론과 어거스틴의 실제설도 마찬가지의 방법으로 적용시켜 보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의 우리의 구원을 부자연스럽게 설명하게 되므로, 바울의 본문 내용에 부합될 수 없음을 알 수 있게 된다.

 

맺는 말

서두에서도 언급했듯이, 우리의 목표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를 밝히고, 그에 따라 우리의 사고와 해석과 행위를 이끌어가는 것이다. 사도 바울의 기록을 통하여 밝혀진 사실은 아담 한 사람의 한 범죄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가 죄인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거기까지만 듣게 되면 불만이 생겨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울의 본문은 거기서 멈추고 있지 않다. 본문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바울이 말하려는 점은 죄인된 우리들이 한 사람 예수그리스도의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생명에 이르게 되었다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의 복임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하나님의 놀라운 행정원리의 오묘함의 사실을 선포하는 본문의 선언 앞에서 우리는 또한 겸손히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 사람들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월간 <교회와신앙> 1994년 1월호)


2. 신론에 나타난 이단 사상

김재성
합동신학교 조직신학 교수

한국교회의 이단문제는 그 심각성이 이미 공지된 사실이다. 그러나 심각성에 비해 대처와 처방이 미흡하고 적절하지 못했다. 이단 문제에 대한 진단과 처방은 다각적인 방법을 통해 분석하고 또한 대처해야 할 시급한 과제이다.
이단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는 교리적인 문제의 접근이 매우 중요하다. 이는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올바른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현재의 이단 사상에 대한 현실 인식을 위해서는 과거에 어떤 교리에, 어떤 이단들이 있었는지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본지는 이단이 발생할 수 있는 전 교리를 고찰, 오늘날의 이단 사상에 대한 올바른 기준을 제시하고자 '기독교 2처년 교리 속에 나타난 이단 사상'을 기획했다.
필자마다의 다소간의 학문적 차이점이 있고, 전문적인 용어 때문에 독자들에게 이해가 어려운 부분이 있더라도 집중해서 읽어 주었으면 하는 바이다. <편집자 주>

머리말

정통교리를 떠나서 제 나름대로의 독선에 빠진 나머지 급기야 불행한 최후를 장식하는 이단들을 보면 제 궤도를 이탈하여 사고를 낸 기차를 연상하게 된다. 어리석은 지도자들로 인하여 무지한 영혼들이 당해야만 하는 심리적, 육체적 고통을 생각하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인간은 과연 초월의 세계, 특히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나라에 대해 완전히 알 수 있는가? 만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면, 여기저기서 분출되는 다양한 사상들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으며, 진정 무엇이 진리인가를 누가 보장한다는 말인가?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적은 범위에서나마 깨달을 수 있음을 허용하셨다. 우리가 성경이라는 범위를 넘어서지 않으면 참된 지식과 지혜를 붙잡을 수 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 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이 글을 통해서 '이단'이란 '거짓교리'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사도적 교회가 믿어온 바를 버리고 참된 신앙을 포기한 무리들이 지닌 비성경적 신념을 의미한다. 미국 트리니티신학교의 조직신학교수인 해롤드 브라운(Harold Brown) 박사의 명저인「이단」(Heresis)라는 책을 중심으로 하나님에 대해 잘못된 교리를 가르쳤던 초대교회 시대의 논의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단의 아버지, 시몬 마구스
초대교부였던 이레니우스(Irenaeus)는 「이단들에 반대함」(Against Heresis)이라는 글에서 시몬 마구스(Simon Magus)를 향해 '모든 이단들의 아버지'라고 공격하였다. 이 사람이 사도행전 8장 9절에서 24절에 나오는 인물과 동일한가는 확실치 않다.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행 8:9)라고 하였다.
이레니우스가 공박한 시몬 마구스도 사마리아에서 크게 위세를 떨쳐서 주후 150년경에는 큰 집단이 되었다.
시몬 마구스는 자칭 '하나님의 권능'이라고 하면서 초월해 계신 하나님을 부인하였다. 따라서 성경을 거부하였고, 내재하는 영의 성육신을 강조하였다.
구원을 위해서는 '지식'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천지의 근원을 고요함에서 찾고자 하였다. 마치 신비적인 안개 속을 헤매면서 마음으로 그 속에 있는 진리의 빛을 찾아간다는 것이다.
시몬을 훗날 양태론(Modalism)으로 불려지게 될 신론을 갖고 있었다. 그에 의하면, 예수님은 인간의 형태를 입은 구세주가 아니요, 높으신 하나님도 아니다. 하나님과 구세주와(시몬 자신) 모두가 동격이다.

초창기의 이단들

말시온(Marcion)과 영지주의자들(Gnosticism)
헬레니즘과 유대교를 혼합하여 형성된 대표적인 이단사상으로 주후 150년경까지 큰 추종세력을 형성하였던 대표적인 이단사상이다. 주후 144년 이단으로 정죄를 받았다.
영지주의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창조교리를 변조시킨 초대교회 시절의 종교 철학운동이었다. '지식'을 지나치게 숭상한 나머지, 실재에 대해서 이원론으로 치달았다. 영혼과 물질, 정신과 육체, 선과 악, 구약과 신약, 이스라엘과 교회, 하나님과 예수님, 율법과 복음, 심판과 칭의 등의 대립과 대결 속에서 만물이 형성되어 나간다는 것이다.
말시온은 크레도(Credo)라는 시리아의 영지주의자에게서 이런 이원론을 배웠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을 '영적인 권능' 정도로 이해하였고, 물질 세계의 근원자가 될 수 없다고 격하시켰다.
성경과는 정반대로 물질 세계란 전혀 별개의 근원을 갖고 있다는 주장을 별개의 근원을 갖고 있다는 주장을 펴서 창조론을 거부하였다. 물론 성경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하나님 자신과는 완전하게 별도의 세계에 위치하고 있다. 하나님은 세상을 선하게 창조하셨으며 영원히 창조주이시다. 그리고 세상은 그의 피조물이다. 이러한 구분을 영지주의자들은 부인하였다. 이들은 이 세상을 의미있는 곳으로 볼 수 없었다. 따라서 육체를 죄악시하고 엄격한 금욕주의에서 신앙생활의 이상을 발견하였다.
말시온의 신론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극단으로 치달았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란 높이 존경할 필요가 없다고 역설하였다. 말시온이 생각하고 있던 것은 우주란 쇠사슬과 같은 영적인 연결을 이루고 있는데,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이란 그 일부에 지나지 않는 데미우르게(Demiurge)라는 것이다. 헬라의 신화 속에 나오는 대부분의 신들은 반은 신이고 반은 인간의 모습을 담고 있듯이, 일종의 그런 신이라고 본 것이다.
이 세상이 원죄로 인해 타락하게 된 것은 하나님이 소외되었다고 생각했다. 말시온은 구약의 하나님(야훼 Yahweh)은 이때부터 화를 잘 내고, 용서할 줄 모르고, 엄격한 정의만을 고집하는 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성경의 하나님을 헬라의 신화 속에 나오는 신으로 곡해한 것이다.
말시온은 더 나아가서, 이 세상의 창조자는 참된 하나님으로부터도 소외당했고 영적인 사람들로부터도 소외당했으며 이로 인해서 실수도 곧 잘하고, 금방 후회도 잘 하는 거친 신이 되고 말았다고 설명하였다. 이 신이 인간의 불행에 대해 책임이 있으며, 구약성경에 나오는 신이라고 보았다.
말시온은 예수 그리스도는 메시야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구약성경의 하나님이 진노하니까, 우리를 구하기 위해서 '잘 알려지지 않은 참된 신'이 인간을 구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이다. 말시온의 극단적인 이원론은 여기서 잘 드러난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러 오셨고, 신구약은 서로 내적인 지속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진리를 오해하였다. 예수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랑의 하나님'으로부터 온 분이라고 하면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신의 율법을 없애고 인간을 구원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말시온은 자신의 생애에 금욕주의적으로 살아가면 착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말시온의 눈에는 메시야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러므로 예수가 세웠던 신약시대의 교회들도 세계 역사의 일부가 아니다고 주장하였다. 세대주의의 창시자인 다비(J..N.Darby, 1800~1882)가 약 1천 8백년 뒤에 이 사상을 받아들여서 교회는 역사의 일부가 아니요, 괄호 속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말시온은 성부와 성자와의 관계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였다. 성자의 고난과 죽음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갖는 것인지 바르게 알지 못하고 있다. 말시온은 성자를 '구원의 영'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절대로 죽거나 고난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들은 성자는 성부의 다른 형태로 이해하여 양태론에 빠지고 말았다. 여호와의 증인들이 주장하는 교리의 일부가 여기서 발견되고 있다.
또한 말시온과 영지주의자들의 잘못된 출발점은 근본적으로 이원론에서 나왔다. 하나님을 구약의 야훼의 신과 '신약의 알려지지 않는 신'이 예수를 통해 나타났다는 대립으로 곡해한 것이다.

몬타누스
말시온과 몬타누스는 동일시대의 인물이다. 이들은 모두 안토니우스피우스 황제(Antonius Pius, 138~161 재위) 시대에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새 예루살렘이 곧 임박했으므로 결혼은 금하고 말세를 준비해야 한다고 서둘렀다.
몬타누스는 자신에 대해 맹종을 요구하면서, "나는 특별한 예언적 은사를 받았다"고 확신시켰다. 자기가 받은 계시에 따르면 새로운 성령이 넘쳐흐르고 있으므로 곧 말세가 온다는 것이다. 1992년 10월 재림설을 주장하다 실패한 이장림 등의 재림파들이 쓰는 용어가 이미 이때에 있었다.
몬타누스는 자신을 하나님의 선지자로 소개하면서, 추종자들은 기독교의 영적 엘리트로 확신을 불어넣었다. 막시밀라와 브리스가라는 두 여제자를 두었고, 소아시아 지방에서 큰 세력을 확보하였다. 막시밀라는 남편으로 하여금 몬타누스를 따르게 하고 자신은 소아시아 프리지아 지방의 페푸자라는 동네에 새 예루살렘이 임한다고 주장하면서 모든 세속적인 일을 중지하라고 했다.
"내 뒤에는 예언하는 자가 없을 것이며, 오직 세상의 종말이 있을 뿐이다"고 극단적인 종말론은 가르쳤던 이들의 초기사역은 재림에 대한 사도들의 교훈이 생생하게 살아있었기 때문에 잘 구별이 안되었다.
그러나 성경의 종결과 함께 몬타누스가 받았다는 '새로운 계시'의 정체가 차츰 드러나면서 이단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몬타니스트들은 금욕주의적 생활양식과 순교에의 자발적 참여 등으로 인하여 정통교리가 체계화되지 못했던 초대교회 시대에 정통교회들의 반발을 무력화시키는 위세를 발휘하였다. 심지어 터툴리안 같은 교부마저도 관련을 가질만큼 큰 해독을 끼쳤다.

가현설(Docetism)
영지주의자들 중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현설을 들고 나와서 육체적, 실제 예수의 존재를 부인하고 영적인 예수만이 있었다는 주장을 함으로써 혼란을 초래하였다. 이 사상은 시몬 마구스가 선창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육체 없이 그냥 외형상으로 존재하였으며, 우리의 신앙의 대상이 아니요,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없는 마술적 존재라는 것이었다.
가현설은 당시 헬레니즘의 합리적 사고와 부합하여 예수님의 탄생, 고난, 부활 등의 객관적 역사성을 모두 부인하기에 이르렀다.
트라얀 황제시대(Trajan, 98~117 재위)에 순교한 안디옥의 아그나시우스가 가현설의 오류를 간파하여 "예수님은 형상만 있던 분이 아니요, 참 사람이었다"고 강조하였다.
영지주의자들은 성부와 성자를 동일본질의 한 분 하나님으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양태론(Modalism)
일반성도들에게 양태론이라는 용어가 다소 생소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해서 이해하는 바 많은 부분이 양태론적 삼위일체임을 발견하게 된다. 일부 교역자들이나 주일학교 선생님들의 설명이 이와 유사함을 종종 목격하기 때문이다.
양태론이란 시대와 환경에 따라서 하나님이 자신을 각기 다른 '형태' 혹은 '양식'(Modes)으로 계시하셨다는 학설이다. 창조시에는 성부로, 구원시에는 성자로, 승천 후에는 성령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흔히 구약은 성부시대요, 신약의 초반은 성자시대요, 지금은 성령시대라는 말을 쓰는데 이는 잘못이다. 이를 '단일신론적 삼위일체론'이라고 부른다.
양태론은 그리스도의 신성은 받아들이면서도 창조부터 영원까지 성부와 함께 일하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또한 성령의 인격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한 하나님 안에서 세 인격들이 상호 동등한 권위와 경륜을 하고 계심을 인정치 않는다.
이레니우스는 그의 대전집(Magnum Opus)에서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체계화하여 초대교회시대의 이단사상을 막는 데 공헌하였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창조주이다. 따라서 유일하신 하나님이다. 영지주의자들의 가현설과 말시온에 대항하여, 삼위일체의 구별된 부분에 관해 언급을 하여 줌으로써, 훗날 터툴리안의 삼위일체론에 기초를 제공하였다.
잘못하면 3위(位) 3신(神)이라는 3신론(新論)에 빠질 우려가 있으므로, 창세전의 일이나 성육신 등에 대해서 지나친 의구심이나 상상력을 갖지 말라고 이레니우스는 충고하였다.

삼위일체론의 오해 -아리안주의
325년에 채택된 니케아신경(the Nicene Creel)과 451년의 칼케돈 신경(the Chalcedonian Creel)은 삼위일체의 교리를 체계화한 위대한 문서들이다. 니케아신경은 318명의 교계지도자들이 모여서 초대교회의 신론을 체계화한 것으로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아리우스가 이단으로 정죄를 받았다.
아리우스는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일종의 양태론을 주장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과는 다른 존재로서, 피조된 존재이기에 성부와 동일한 신성을 소유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타나시우스가 일어나서 성경에 명백히 언급된 성자와 성부의 동일 권위와 신성을 공박함으로써 삼위일체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진일보하게 되어졌다. 물론 니케아회의 때까지만 해도 성령에 관한 논쟁이 없었다. 니케아 회의를 통해서 삼위일체의 한 분 하나님을 이해하기까지 오랜 시간의 논쟁이 있었다.
무엇이 아리우스로 하여금 성자에 대한 이단적 사상을 갖게끔 하였는가? 아리우스는 지적 엘리트라는 자부심에 사로잡혀 하나님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새로운 철학적 진술들을 펴고자 하였다는 데 문제가 있다. 마치 루돌프 불트만이나 한스큉과 같은 현대 신학자들이 자꾸 새로운 것을 추구하면서 철학적 사고에 깊이 영향을 받아 버린 결과와 같다.

아리우스는 성부 하나님 외에 성자나 성령이나 다른 모든 여타의 존재들은 동등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성자는 성부에게서 낳았다(begotten)고 했으니, 이는 달리 표현하면 창조된 것이다(Created)고 해석하였다. 따라서 피조물(creating)의 위치에 있으므로 경배를 받는 것이 합당치 않다는 것이다.
아리우스는 니케아 회의에서 정죄를 받았으나 금욕적 생활로 자신이 거주하던 알렉산드리아서 존경을 받았던 까닭에 자연적으로 수명이 다하여 336년에 사망하였다. 핍박이나 물리적 사형을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죽기 전에는 거의 모든 명예나 지위를 회복할 정도에 이르렀다.
아리우스와 같은 사상은 훗날 미카엘 세르베투스(Servetus, 1511~1533)가 다시 들고 나와서 요한, 칼빈을 괴롭혔고, 끝내 회개의 권유를 받아들이지 않고서 시 의회의 결정에 따라 사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또한 소시니안파(Socinians)로 불리우는 일단의 무리들에 의해 삼위일체가 거부되었고, 성자의 신성이 도전을 받았다. 16세기에 인간의 자기 능력 속에서 구원받을 만한 공로가 남아있다는 주장을 하였다니, 종교개혁자들이 명성을 날리던 시대에도 역시 이단들의 활동은 집요하였다.
19세기 초 미국의 동북부, 뉴일글랜드 지방에서 역시 단일신교(Unitarians)라는 사상이 유포되어 하버드 대학교의 신학부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현대 이단들의 하나님 이해
이 글에서는 지면관계상 중세 시대의 이단들은 간략하게 넘어가고자 한다. 중세시대는 알셀름(St. Anselm)과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등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스콜라 신학이 풍미하였다. 여전히 지성주의적 신학이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체제 속에서 신을 이해하고 증명코자 시도하였다. 안셀름과 아퀴나스의 신 존재 증명은 유명하지만 논리적 사유의 부산물일 뿐이다.
피터 아벨라르드(Peter Abelard, 1079~1142)는 안셀름과 토마스 아퀴나스의 스콜라 신학에 반대하여 다른 종류의 극단으로 치닫고 말았다. 아벨라르드도 역시 지성적인 사람들만이 종교에 기여를 할 수 있다고 믿었다. 또한 교리와 정통을 강조하기도 했다. 아벨라르드의 실수는 삼위일체의 신비로움을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던 점이다. 그는 하나님을 3신(神)으로 이해하여 이단으로 빠지고 말았다.

여호와의 증인
모든 여호와의 증인들은 반드시 집집마다 방문하고 그 사역결과를 본부에 보고해야 한다. 따라서 어떤 종교단체보다도 열성적으로 포교활동에 주력하고 있다. 매월 정해진 양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이들은 목회자로 준비하는 동안이나, 전담 사역자로 일할 경우에 한 달에 140시간을 전도활동에 쏟아부어야 한다.
요한계시록 7장에 나오는 14만 4천명의 숫자를 문자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적은 수의 사람들만이 하늘나라에 들어간다고 주장한다. 정통교회에서는 이 숫자를 상징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들의 신학 중에서 보다 심각한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육체라는 옷을 입은 영의 사람'이라고 보는 데 있다. 마치 가현설과 흡사하다. 여호와의 증인의 창시자 러셀(Russel, 1852~1916)에 의하면,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천사들의 모습과 같은 일종의 현상화로 나타난 인간적 신체일 뿐이요(창18장), 예수님은 성육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음 후계자인 러터포드(Rutherford) 때에 급성장하기 시작한 여호와의 증인들은 예수님을 제 2의 신으로 전락시키고 오직 여호와만이 유일한 신이라는 단일신교에 확고히 뿌리를 내리게 되어진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보다 아래에 있는 존재이며, 영원하지 않고 창조된 존재이나 성육신은 아니라고 보고 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삼위일체를 완전히 부인한다. 예수는 제한적 의미에서 신이라고 보고 있으며, 성령의 인격성과 하나님으로서의 지위는 부인해 버린다. 성령은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힘으로 간주한다. 아리우스가 4세기에 주장한 것과 유사하다.

몰몬교(말일성도 예수 그리스도 교회)
몰몬교도들은 성경의 권위를 부인하고 있다. 대신에 요셉스미드(Joseph Smith 1805~1844)라는 창시자와 같은 성지자들을 통해서 계시하고 있다고 믿는다.
몰몬교에서는 성경의 하나님을 완전히 곡해하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명기 4장 28절이 이 견해를 지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너희는 거기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 바 보지도 못하여 듣지도 못하여 먹지도 못하여 냄새도 맡지 못하는 목석의 신들을 섬기리라" 육체적인 몸을 지진 하나님은 다른 신들과 구별되어서 인간들을 행동과 특징을 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같은 본문의 신명기 4장 15절에서 18절은 인용치 않는다.
"여호와께서 호렙산 화염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에 너희가 아무 형상도 보지 못하였은즉 너희는 깊이 삼가라 두렵건대 스스로 부패하여 자기를 위하여 아무 형상대로든지 우상을 새겨 만들되 남자의 형상이라든지, 여자의 형상이라든지, 땅위에 기는 아무 곤충의 형상이라든지,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아무 어족의 형상이라든지 만들까 하노라"
신명기의 가르침이나 성경 전체적으로 하나님은 만질 수 없는 초월자이심을 강조하고 있다. 몰몬교는 기독교의 삼위일체와는 완전히 반대에 서 있다.
몰몬교에서의 하나님은 '최고의 경지에 올라선 인간'이다. "인간처럼 하나님도 한때는 같은 존재였고, 하나님의 존재와 같이 인간도 변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나님은 최상의 회의에서 인도자의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이 회의에는 예수 그리스도, 에녹, 엘리야, 아브라함, 바울, 베드로, 요셉 스미드(몰몬교 창시자), 브링햄 영(몰몬교의 조직을 체계화함)이 참여하고 있다. 이런 식의 다신교의 색채로 점철된 하나님의 이해가 어떻게 나왔는지 성경을 읽는 성도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몰몬교에서는 출애굽기 20장 1절에서 6절, 이사야 40장 12절에서 31절, 45장 18절 등이 강조하는 주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지배하시는 주권자시오, 영원하신 하나님이며,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는 강조를 외면하는 무리들이다.
몰몬교에서 보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인간과 다를 게 하나도 없는 분이다.

결론

이단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잘못 이해하거나 성경을 왜곡하고 있다. 비록 성경에서 하나님에 대해 보여주시는 부분이 어렵고 난해할지라도 우리들에게 알려 주신 바 그 자체는 명백하다. 마태복음 11장 27절에서 성부는 성자를 알고, 성자만이 성부를 아신다. 요한복음10장 33절에서 성자는 하나님이심을 강조하여 참람하다고 공격을 받았다. 광야의 시험에서 사탄마저 "하나님의 아들"임을 가정하고 있다(마4:1-11). 예수님의 신성과 하나님 되심은 성경이 전해주는 바요, 우리의 신앙의 내용이다.
삼위일체는 한 분 하나님 안에 세 인격의 연합을 의미한다. 한 분 하나님은 세 인격의 상호관계 속에 일하신다(약 2:19).
삼위일체 교리를 불가해한 것으로 단정하는 사람들은, 3차원의 세계를 생각해 봄으로써 우리가 말하는 삼위일체(Trinity)교리에 대해서 과학적이고 자연적인 유추를 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공간은 길이와 넓이와 높이를 필요로 한다. 세 가지가 모두 다 똑같이 중요하며 서로 없어서는 3차원이라는 공간이 세워지지 않는다. 어떤 때에는 이중에서 개별적으로 취급하기도 하고, 때로는 전체 세 가지가 다 필요하다.

끝으로 두 가지만 첨언하여 둔다.
첫째로는, 삼위일체의 교리는 하나님이 자기 계시를 통하여 세우신 것이다.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를 심어주시기 위해서 친히 계시하신 것이며, 삼위를 통해서 구원을 베푸신 사역이 총괄적으로 정리된다.
두 번째로는, 하나님에 대한 학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하신 하나님을 대치하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우리의 구원과 신앙의 참된 기초를 추구하려면 삼위일체는 필수적인 신앙의 내용이 되고 만다. 이단들은 이를 버리고 인간적인 사색과 이성으로 맞추려다가 멸망을 재촉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한 성령님에 의해서 아버지께 나아가느니라"(엡2:18, NIV. "Through Him We both have access to the Father by one Spirit.")


(월간 <교회와신앙> 1994년 1월호)

3. 성경론에 나타난 이단 사상

이수영
장로회신학대학 조직신학 교수 역임. 현 새문안교회 담임목사

한국교회의 이단문제는 그 심각성이 이미 공지된 사실이다. 그러나 심각성에 비해 대처와 처방이 미흡하고 적절하지 못했다. 이단 문제에 대한 진단과 처방은 다각적인 방법을 통해 분석하고 또한 대처해야 할 시급한 과제이다.
이단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는 교리적인 문제의 접근이 매우 중요하다. 이는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올바른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현재의 이단 사상에 대한 현실 인식을 위해서는 과거에 어떤 교리에, 어떤 이단들이 있었는지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본지는 이단이 발생할 수 있는 전 교리를 고찰, 오늘날의 이단 사상에 대한 올바른 기준을 제시하고자 '기독교 2처년 교리 속에 나타난 이단 사상'을 기획했다.
필자마다의 다소간의 학문적 차이점이 있고, 전문적인 용어 때문에 독자들에게 이해가 어려운 부분이 있더라도 집중해서 읽어 주었으면 하는 바이다. <편집자 주>

계시와 신앙

신약성경 마태복음 11장 2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인간은 그 누구도 스스로 하나님을 바르게 알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을 알려 주시는 계시를 통해서만 우리는 그를 알 수 있다는 말씀이다.
따라서 신앙은 이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며, 이 계시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며, 이 계시로부터 나오지 않는 종교는 거짓 종교일 수밖에 없다.

계시와 말씀

하나님께서는 우주 만물의 창조와 그 다스림을 통해서도 자신을 드러내고 계심을 틀림없다. 구약성경 시편 기자는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 19:1)라고 말하며, 사도 바울은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롬 1:20)고 말한다.
그러나 죄로 말미암아 부패한 인간은 이러한 하나님에 관한 자연의 명백한 증거 앞에서도 하나님을 바르고 분명하게 알 수 없는 상태에 빠졌다. 인간이 자연의 증거를 통해서 스스로의 힘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어떤 신적 존재가 있다는 막연한 느낌이나 신에 관한 흐릿하고 부정확한 지식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들에게 말씀을 통하여 직접적이고 보다 분명하게 자신을 알리고자 하셨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없다. 말씀에 기초하지 않고 말씀 안에 거하지 않는 신앙은 참 신앙일 수 없다.

계시와 예수 그리스도

말씀을 통하여 직접적이고 보다 분명하게 자신을 알리시는 하나님의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그 절정에 이른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말씀 자체이신 성자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인간 역사 속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사시며 가르치고 능력을 베푸시며 영원한 언약을 주심으로써 가장 직접적이고 가장 분명하게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 보이신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의 기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계시성을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오 그 본체의 형상이니라"(히1:2-3).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골2:9).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없거나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거나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상치하는 모든 자칭 계시는 거짓된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지 않고 그와 함께하지 않는 신앙은 참 신앙일 수 없다.

계시와 성령

하나님께서는 자연과 말씀, 특히 말씀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자신을 완벽하게 계시하셨으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 인간들이 이제는 누구나 자동적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죄로 말미암아 영의 눈이 멀어 있는 인간들은 스스로는 여전히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없는 상태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눈이 먼 사람에게는 촛불 하나의 밝기 아래에서나 전기불의 밝기 아래에서나 보지 못하는 형편에는 아무 차이가 없는 것이나 같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진리의 빛이 아무리 눈부시게 비추었어도 영의 눈이 어두웠던 유대인들은 그를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던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자연과 말씀을 통해 외적으로 우리에게 자신을 알리실 뿐만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내적으로 우리의 영의 눈을 밝히 뜨게 해 주셔야만 한다.
성령의 내적 조명이라고도 부르는 이 성령의 역사가 하나님의 계시에 있어서 결정적인 요소임을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은 말로써 잘 증거하고 있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고전 2:9~10).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임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7~19).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계시와 성경

말씀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계시된 진리들이 어리석고 온전치 못한 인간의 실수나 게으름에 의해 손상되거나 변질됨이 없이 모든 세대의 사람들에게 온전하게 전해지고 알려지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특정한 사람들에게 성령의 감동을 주셔서 그들이 듣고 받은 계시의 말씀들을 기록하게 하셨다. 또한 그의 놀라우신 섭리 가운데서 그 기록된 말씀이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전해 내려오게 하셨다. 그것이 성경이다. 성경은 오늘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수단이며 변함없는 하나님의 진리의 기록이다. 따라서 성경은 계시의 진위를 분별하는 기준이다.
영원불변하신 하나님께서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 같은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치실 뿐, 시시때때로 변하는 새 말씀, 다른 말씀을 주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이 받았다고 하는 계시는 반드시 성경의 증거와 일치할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온 참 계시로서 인정될 수 있다. 성경을 무시하거나 성경의 증거와 다른 모든 자칭 계시는 거짓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종교개혁자 깔뱅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성령은... 일종의 검토를 받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성령께서 우리에 대하여 자신의 위엄을 확립하고자 하시는 검토인 것이다.... 사탄의 영이 성령의 이름으로 침투하지 않도록 성령께서는 성경에 기록된 형상대로 인식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성령은 성경의 저자이시다. 그는 변하실 수도, 자신과 다를 수도 없으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분명히 그는 성경 안에서 일단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 그대로 영원히 존속하실 것이다"(기독교 강요 1권 9장 2절).
이처럼 소위 성령의 직통 계시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성령께서는 성경에서 보여주신 자신의 진리와 아주 굳게 결속하여"(기독교강요 1권 9장 3절)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가르침과 상이한 것을 성령의 직통 계시를 내세워 주장하는 일들은 사탄의 역사이기 때문에 경계해야 한다. 참된 성령의 역사는 말씀에 의해 확인 될 수 있음을 깔뱅 선생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일종의 상호 결속관계를 통하여 말씀의 확실성과 성령의 확실성을 결합... 그 말씀을 따라 그를 인식할 때에 우리는 속는다는 두려움 없이 성령을 마음에 모실 수 있기 때문이다. 실로 이것은 사실이다"(기독교 강요 1권 9장 3절).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과 자신의 뜻에 관해 알리고자 하신 바를 온전히 계시하신 것이요 그 이상의 새로운 추가된 계시는 없는 것이다. 성령의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계시된 것들을 우리가 실제로 파악하고 알 수 있도록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역사를 말한다.
성령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는 이시며(요14:26),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도록 보내심을 받은 진리의 영이시고(요15:26), 자의로 말하지 않고(요16:13) 예수 그리스도의 것을 가지고 우리에게 알리시는 분으로(요 16:14)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성경의 신언성(神言性)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은 앞에서 이미 설명이 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성경의 모든 문장 한 마디 한 마디가 다 직접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왔다는 뜻은 아니다. 성경에는 사람들이 한 말도 많고, 더러는 악한 사람들의 말과 심지어는 사탄이 한 말까지도 들어 있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말들도 우리에게 바른 진리를 가르치고자 하는 근본적 목적에 사용된 것들이고, 그 글들을 쓴 모든 기자들을 성령께서 감동시키셨기 때문에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전무 하나님의 말씀은 아니며 50% 정도라든가 80%정도는 하나님의 말씀이라 해야 할 것이다.
성경은 전체가 다 사람들의 손에 의해 기록된 것인데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냐는 반문도 통찰력이 없는 질문이다. 왜냐하면 비록 쓰기는 사람이 썼어도 쓰라고 명하신 이가 하나님이시고(출34:27~28, 롬 16:26), 그 내용이 기자 자신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며(벧후 1:21), 앞서 이미 언급한 대로 성령의 감동에 따라 쓴 것이므로(딤후3:16, 벧후1:21) 성경은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의 완전성

계시는 어떤 궁극적 목적을 지닌 하나님의 행위이며, 성경은 그 기록이라 할 때에 우리는 성경의 완전성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성경의 완전성이라는 말 속에서 먼저 무오성을 생각한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당연히 무오한 것이어야 한다. 물론 성경은 사람들에 의해 기록되었으므로 거기에는 기자들의 경험이나 지식, 사고와 언어의 한계나 불완전성이 드러난다고 보아야 하며, 특히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본 성경에는 오래되고 반복된 필산 과정에서 인간적 착오나 실수가 담겨져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성령의 감동이란 바로 불완전한 인간의 유한한 지식과 경험과 사고와 언어를 사용하시면서도 그 인간의 불완전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전달하시려는 진리가 변질되거나 왜곡됨이 없도록 역사하셨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려고 의도하신 모든 것에 있어서 무오하다고 보아야 한다.
성경의 완전성이란 말이 의미하는 또 다른 것은 그 내용이 우리의 구원에 필요하고 우리가 알아서 유익한 것으로서 부족함이 없다는 사실이다. 물론 성경은 이 세상의 모든 종류의 지식과 인간의 온갖 호기심을 다 만족시켜 줄 답변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경의 완전성은 성경기록의 목적에 따라서 고찰되어야 한다. 요한복음의 기자는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1)고 말하고 있으며, 사도 바울은 "성령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함이니라"(딤후 3;15~17)고 증거하고 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성경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을 가르침에 있어서 더 보탤 것 없이 완전하며, 성경에 기록된 것으로 알아서 유익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이 완전한 것이다.
성경에는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의 신비에 관하여 침묵하거나 혹은 간략하게 언급하고 그치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것은 우리가 알 필요가 없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간단히 말씀하신 것은 그 정도만 아는 것이 우리에게 오히려 유익할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고 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한계를 넘어서서 더 알려지고 지적 호기심을 발동시키는 것은 대단히 위험스러운 일이다. 부분의 이단들이 성경이 침묵하거나 짧게 언급한 부분에서 상상력을 동원하여 무책임하게 근거 없이 주장하는 데서 출발하는 사실을 우리는 유의해야 한다.

성경의 도구성

앞서 성경의 하나님의 말씀됨과 그 완정성을 언급했거니와 그것은 그렇다고 해서 누구나 성경을 펼쳐 읽기만 하면 저절로 그 안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게 되고 하나님을 완전히 알게 된다는 뜻이 아니다. 이미 계시와 성령의 관계를 말하면서 지적했던 바와 같이, 성경은 분명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그 말씀을 우리가 실제로 듣고 깨닫게 해 주시는 것은 성경 자체가 아니라 성령이심을 잊어서는 안 된다. 즉 성경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나님과 그의 영원하신 뜻을 알게 하시는 데 외적으로 사용하시는 도구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고 바르게 이해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성령의 인도하심을 의존하여야 한다. 성경의 진정한 저자이신 성령께서 우리의 교사가 되어 주시는 것보다 더 확실한 일은 없기 때문이다. 성경의 기자들을 감동시키셨던 성령께서 우리 속에 들어오셔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게 하시고 그 말씀들의 참 뜻을 깨닫게 하시지 않는다면 성경은 우리에게 별 쓸모가 없는 한 권의 책에 불과할 것이다.

성경의 규범성

성경이 무오하고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진리를 위한 유일하고 절대적인 권위를 갖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신학적, 윤리적 사고와 언명 그리고 모든 종교적 체험이나 행동은 성경이라는 규범에 의해 그 진리성과 당위성을 인정받아야 한다. (월간 <교회와신앙> 1994년 1월호)

4. 기독론에 나타난 이단 사상

신복윤
합동신학교 조직신학 교수

한국교회의 이단문제는 그 심각성이 이미 공지된 사실이다. 그러나 심각성에 비해 대처와 처방이 미흡하고 적절하지 못했다. 이단 문제에 대한 진단과 처방은 다각적인 방법을 통해 분석하고 또한 대처해야 할 시급한 과제이다.
이단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는 교리적인 문제의 접근이 매우 중요하다. 이는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올바른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현재의 이단 사상에 대한 현실 인식을 위해서는 과거에 어떤 교리에, 어떤 이단들이 있었는지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본지는 이단이 발생할 수 있는 전 교리를 고찰, 오늘날의 이단 사상에 대한 올바른 기준을 제시하고자 '기독교 2처년 교리 속에 나타난 이단 사상'을 기획했다.
필자마다의 다소간의 학문적 차이점이 있고, 전문적인 용어 때문에 독자들에게 이해가 어려운 부분이 있더라도 집중해서 읽어 주었으면 하는 바이다. <편집자 주>


기독론에 나타난 이단사상
신복윤(캘리포니아신학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합동신학교 조직신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고대교회의 이단들

초대교회의 기독교 문헌들은,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람이요, 인자와 하나님의 아들이며, 무죄하신 분이요, 예배의 대상이라는 것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한 위(位, Person) 안에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의 두 성이 있다는 데 대하여는 충분한 이해가 부족하였다. 교회는 오랜 세월의 논쟁을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그리스도의 성과 위에 대한 원만한 사상을 확정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많은 이단과의 투쟁에서 승리를 거두웠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한 이단들
기독교 초기에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이단들이 일어났다. 그 첫째 이단은 1세기의 에비온파(Ebionites) 이단이다. 그들은 유대교적 입장에서 사도 바울을 계속 반대한 바리새형의 단체였다. 그들은 바울의 사도직을 인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를 율법의 배교자로 여겼으며, 모든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 때문에 그리스도의 선재(先在)와 신성, 그리고 동정녀 탄생을 부정하였다. 예수는 다만 율법을 준수한 점에서 다른 사람과 다르며, 그의 율법적 경건 때문에 메시아로 선택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예수는 세례를 받을 때 이 사실을 의식하였으며, 또한 선지자와 교사의 일을 완수할 수 있게 하는 성령을 받았으나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성령은 그에게서 떠났다고 주장하였다.
둘째로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한 이단은 알로기바(Alogi) 이단이다. 이 파는 2,3세기의 극히 적은 한 종파로, 요한의 로고스 교리가 신약의 다른 교훈과 충돌된다고 하여 요한의 저서들을 배척하였다. 그들에 의하면, 예수는 비록 동정녀에게 이적적으로 탄생하였지만 오직 인간일 뿐이며, 그가 세례받을 때 그리스도가 강림하시어 초자연적 능력들을 부여하셨다는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이 알로기파를 제 3세기에 나타난 역동적 단일신론(力動的單一新論 Dynamic Monarchianism) 의 최초의 형태로 보았다. 그 최초의 대표자인 비잔티움의 데오도투스(Theodotus of Byjantium)는 로마의 감독 빅토르(Victor)에 의하여 파문되었다.
이 종파는 그 세력이 점점 약해져 가다가 안디옥의 감독 사모사타의 바울(Paul of Samosata)의 노력에 의하여 다시 소생했는데, 그에 의하면 로고스는 성부와 동질(同質)이지만 신격(神格)에서 구별된 인격은 아니었다. 로고스가 하나님과 동일시될 수 있는 것은, 마치 인간 이성이 사람 안에 있는 것처럼, 그가(로고스)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이다. 로고스는 모든 인간 안에 임재하였으나, 인간 예수 안에서는 특별히 일하셨던 한 비인격적 능력일 뿐이라고 했다.
이 신적 능력은 인간 예수 안에 점점 침투하여 그 인성을 신화(神化)하였다. 이렇게 인간 예수가 신격화하였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그를 하나님으로 볼 수는 없으나 하나님의 존영(尊榮)을 받기에 합당하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사모사타의 바울은 예수와 로고스를 구별하여, 전자(예수)를 다른 사람과 동일한 인간으로, 후자(로고스)를 비인격적인 신적 이성으로 보았다.
그리고 이 신적 이성이 예수가 세례받을 때부터 그 안에 거주하시어 그의 큰 과업을 수행할 수 있게 하였다고 생각하였다. 이와 같은 로고스 교리를 구성함으로 그는 위의 단일성과 성의 단일을 의미하는 하나님의 다일성을 주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모사타의 바울의 기본적인 관심은 예수의 참된 인성을 옹호하는 데 있었다.
근세에 와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한 이단들은 종교개혁기의 소시니안파(Socinians)와 현대의 유니테리안파(Unitarians), 그리고 현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다.
16세기의 소시니안파는 삼위(三位)가 공통된 본체(本 )를 가졌다는 교리는 이성에 모순된다고 보았으며, 심지어는 성자의 선재까지도 부정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비록 특별한 성령을 충만이 받으시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많으며, 승천 후에도 만물의 지배권을 받았다고 하지만, 그는 본질적인 성질로 보아 단순한 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개념은 오늘날에 유니테리안과 현대주의자들의 선구자가 되었다.
유니테리안파는 종교개혁 이후 지금까지 교회 안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단으로, 단일신론과 아리우스파 중 그 선구자다. 유니테리안과는 신조(信條)를 부인하고, 다양한 신앙의 범위를 가지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단일성을 강조하고 그리스도와 성령의 신성을 부정한다. 그들은 자유, 이성, 관용을 인격적이며 사회적인 종교에 본질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을 부정한 이단들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정한 첫째 이단은 사도시대에서 볼 수 있는 그노시스파이다. 그들은 교회역사에 최초로 나타난 신학적 이단들 중의 하나였으며, 요한일서 4장 2절과 3절에서 이를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그들에 의하면, 예수는 인간으로 보여진 것뿐 실제적으로 육신을 입은 것은 아니었다고 하였다. 그들은 물질은 고유적으로 악하고 영은 선하다고 보는 이원론에 사로 잡혀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악한 물질인 육신을 입을 수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성육신의 관념은 이렇게 하나님이 볼 수 있는 형태로 나타나셨다는 것을 의미하며, 동시에 영과 물질의 직접적인 접촉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역사적 그리스도는 인간뿐이었으나 하늘의 그리스도에게 정렴되셨다. 하늘의 그리스도에게 정렴되셨다. 하늘의 그리스도는 인간 예수에게서 활동하였으나 성육신하지 않으신 것은 물질이 악하기 때문이다. 하늘의 그리스도는 인간 예수가 세례를 받으실 때 그에게 강림하셨다가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전에 하늘로 올라가시고 인간만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들의 대다수는 그리스도를 성부와 동체이신 영으로 보았다. 그 중에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탄생, 수난, 죽음을 부인하였다.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정한 둘째 이단은 제 4세기에 나타난 사벨리우스파(Sabellians) 혹은 양식적 단일신론 이단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단순히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신 한 형태로 생각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단일성을 주장하는데 관심이 있었으나, 그 기본적인 관심은 기독론, 즉 그리스도의 충분한 신성을 주장하는 데 있었다.
이 견해는 양식적 단일신론(樣式的單一新論)이라 불리워졌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3위를 하나님의 현현의 3양식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에 의하면 성부, 성자, 성령이란 명칭은 단순히 한 신적 본체가 자신을 나타낼 때의 3형상(形象)을 가리키는 것이라 하였다. 하나님은 자신을 창조와 율법수여에서는 성부로, 성육신에서는 성자로, 중생과 성화에서는 성령으로 나타나신다고 주장하였다.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완정성을 부인한 이단들
그리스도의 참되고 완전한 신성을 부정한 이단은 제 4세기의 아리우스파(Arians)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의 완전성을 부인하고 하나님도 아니요, 사람도 아닌 창조된 존재, 즉 일종의 반신반인(半神半人)의 그리스도를 만들어 놓았다.
예수 그리스도는 비록 창조된 모든 신적 존재들 중에서 가장 클지라도 하나의 창조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이 견해는 그리스도의 비하상태의 성경적 교훈을 오해하고, 지상에서의 일시적 예속을 영원한 불평등으로 오인하고 있다. 그들은 특별히 이성에 호소하였으나(요한복음 5장 19절, 빌립보서 2장 17절, 골로새서 1장 15절과 같은 성경에서도 호소하였다), 이 견해는 주후 325년 니케아 회의에서 정죄되었다.

이번에는 그리스도의 참되고 완전한 인성을 부정한 이단이 있는데, 역시 제 4세기에 나타난 아폴리나리우스파(Apollinarians)이단이다. 아폴리나리우스는 아리우스파를 강하게 반대하여 다른 극단으로 흐른 결과 그리스도의 인성을 축소하고 말았다.
그는 사람이 신, 혼, 영의 3부로 구성되었다는 헬라 철학의 3분설의 개념을 가지고 로고스가 죄의 좌소인 영의 자리를 취하셨다고 주장하였다. 그리스도는 신체와 혼만을 가지셨고 영의 자리는 로고스가 채웠다고 하여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축소하였다.
즉 그리스도는 영이 없는 인성을 입으신 것이다. 그는 또 주장하기를 그리스도는 신체를 가졌지만, 그 신체는 어떤 방법으로 승화하여 거의 사람의 신체가 아니었다고 하였다. 아폴리나리우스의 중요한 관심사는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을 희생시키지 않고 그리스도의 위의 단일성을 확보하며, 따라서 그리스도의 무죄성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입장은 381년 콘스탄티노플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그리스도의 인격의 통일성을 부정한 이단
제 5세기에 그리스도의 두 성, 즉 신성과 인성을 한 인격(位)으로 통일하지 못하고, 사실상 두 성을 두 인격으로 만든 이단이 나타났는데 그는 네스토리우스(Nestorius)였다. 그는 아리우스주의를 대항하여,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부인하지 않으면서 그의 참된 신성을 변호하려고 하였다.
결국 그는 두 위(二位)의 교리를 발전시키고 말았다.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강조하고 이 인성 안에 로고스가 내주하는 것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신자들도 누리는 것과 똑같은 도덕적 내주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두 성의 진정한 연합을 사실상 부정하고, 그 둘을 유기적인 연합, 즉 단일 의식화하는 것보다는 도덕적이며 동정적인 연합으로 제시했던 것이다.
인간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아니라, 신격(神格)의 소유자요, 하나님 지참자(持參者)였다. 그리스도가 경배를 받는 것은, 그가 하나님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안에 계셨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인간 인격의 진정한 경건과 도덕적인 훌륭한 모범을 교회에 남겼으나, 모든 영적 능력과 은혜와 구원의 근원이신 신인(神人)으로서의 구속주(救贖主)를 제거해 버렸다.
네스토리우스파는 431년 에베소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되고, 451년 칼케돈 회의에서 다시 정죄되었다.

그리스도의 두 성(신성과 인성)을 혼합한 이단
제 5세기에 네스토리우스파를 강하게 반대한 늙은 수도사 유티쿠스(Eutichus)는 콘스탄티노플에서 헬라 사상과 복음진리를 놀라운 방법으로 결합한 알렉산드리아 신학의 주장을 지지하였다. 유티쿠스는 그리스도의 두 성의 구별을 부인하고 그 둘을 하나로 혼합하여 신성도 인성도 아닌 제 3성을 만들었다. 유티쿠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그리스도의 인성이 신성에 흡수된 것처럼 표현하였다.
이것 때문에 그들은 일성론자들(Monophysites)이라 불리워졌다.
그들은 위(位)의 하나님을 유지하기 위하여 두 성의 혼합을 강조하였고 그 결과 성들의 구별이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이 경우 신성은 인성을 압도함으로 인성은 신성에 흡수되거나 변화되었고, 한편 신성도 연합 후에 모든 점에서 전과 같이 아니하였다고 주장하였다. 451년 칼케돈 회의는 앞의 네스토리우스파와 유티쿠스파의 두 견해를 아울러 이단으로 정죄하고 이성(二性)과 함께 위의 단일성을 주장하였다.

칼케돈 회의 이후의 이단들
제 5세기에 유티쿠스주의(一性論)와 본질적으로 동일한 관념에 새 이름을 가지고 나타난 소위 일의설(一意說, Monothelitism)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일어났는데, 7세기에 와서는 더욱 성행하였다. 그 명칭이 보여주는 대로, 그들은 위의 통일성을 출발점으로 하여 그리스도 안에는 한 성만이 있는 것처럼, 한 의지(意志)만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 설은 두 개의 형식을 취하였는데, 그 하나는 인간 의지가 하나님 의지 안에 연합되어 후자만이 역할 한다고 보았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 의지와 인간 의지가 혼합하여 합성적인 의지가 되었다고 하였다. 680년 제 3차 콘스탄티노플 회의는 일의설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두성과 아울러 두 의지를 가졌으며, 인간 의지와 하나님의 의자가 조화적으로 역사하여 인간 의지는 하나님 의지에 복종하였다"는 입장을 밝혔다.
7세기와 8세기는 스페인에서는 양자설 논쟁(養子說 論爭)이라고 불리우는 기독론 사상의 새로운 운동이 일어났다. 양자설의 옹호자는 스페인 우르겔라(Urgella)의 감독 펠릭스(Felix)였는데, 그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로고스인 신성으로는 본래적 의미의 하나님의 독생자였으나 인성 편에서는 양자의 형식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베들레헴에서의 자연적 출생과 세례받으실 때 시작하여 부활 때 완성된 주의 영적 출생을 구별하고, 이 영적 출생 때문에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양자가 될 수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이 양자설의 오류는 794년 프랑크푸르트 대회(the Synod of Frankfort)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19세기와 현대의 기독론
18세기에는 그리스도의 인격(位)에 대한 연구에 눈부신 변화가 일어났다. 그때까지는 문제의 출발점이 일반적으로 신학적이었으며, 그 결과로 생간 기독론은 하나님 중심적이었다. 그러나 18세기에 와서는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 아니라는 확신이 점점 자라게 되었고, 좀더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역사적 예수의 연구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더 가까운 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새로운 기독론의 세기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이 사상의 중심점은 인간학적이었으며, 그 결과는 인간 중심의 기독론이 되고 말았다.
이 새 방법은 건설적인 결과보다는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즉 권위와 초자연을 강하게 반대하고, 반면 이성과 경험에 호소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에 대하여 가르치는 것은 성경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활과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경험이라고 하였다. 영광의 주는 거의 모든 초자연적인 것을 박탈당하고, 그리스도에 관한 교리는 단순히 예수의 교훈으로 몰락하고 말았다. 그는 예배의 대상이었으나, 이제는 단순한 윤리적 교사가 되어버렸다. 그 대표자들을 몇 사람 찾아보자.

먼저 자유주의 신학의 조상이라고 일컬어지는 슬라이어막허(Schleiermacher)의 기독론을 보면, 예수는 단순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에 의하면, 예수는 하나님과의 완전하고 지속적인 연합의식을 가졌다는 점과 무죄하고 완전한 성격으로 인간운명의 완전을 실현하실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그 인격의 독특성을 찾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우리와 같은 참 사람이지만 좋은 환경에 처하여 무죄하게 지나며 순종하셨다는 것이다. 그는 완전한 종교적 인물이며, 모든 참 종교의 원천이시다고 하였다. 또한 동정녀 탄생은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칸트는 그리스도가 단순히 윤리적으로 완전한 이상에 불과하다고 본다. 구원은 이 이상을 신앙하는 데서 오는 것이며, 한 인격으로서의 예수를 믿음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이 이상은 이성의 진리에 계시되었으며, 합리적 신앙의 내용이 되었는데, 예수는 이 신앙의 내용이 되었는데, 예수는 이 신앙의 가장 탁월한 교사요, 개척자이시다. 칸트는 결국,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와 어떤 인격적 관계 없이도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만들었다. 그는 기독교에서 십자가를 빼버린 것이다.
헤겔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을 하나로 보는 자신의 범신론적 사상체계의 일부분이다. 헤겔은 인간의 역사를 하나님의 자기 전개의 과정으로 보고 이런 의미에서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 성육신(成肉身)은 하나님과 인간이 하나됨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대체로 그리스도를 교사로 보지만, 신앙은 예수를 하나님으로 또는 하나님의 초월성의 절정으로 본다. 그가 행하시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계시가 되며, 하나님은 그를 통해서 우리에게 가까이 오시며, 우리를 감화시키고, 하나님을 의식하게 하신다고 헤겔은 주장하였다.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신학적인 교리를 고치려는 주목할만한 시도가 있었는데, 그것은 게노시스 기독론이다. '게노시스'(Kenosis)라는 명사는 빌립보 2장 7절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라는 말에서 나왔다. 게노시스 설자들은 이 구절을 오역하여,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실 때 자신의 신성을 버리셨거나, 혹은 포기하셨다고 해석하였다. 그러나 "자기를 비어"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버리었다는 말이 아니고 권세와 영광에서 하나님과 동등됨을 버리셨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가 종의 형체를 취하신 것은 자신의 하나님의 본체(本體)를 포기하셨다는 뜻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비록 하나님의 본체로 선재(先在)하셨으나 하나님과의 동등됨을 잃어버릴 수 없는 보화로 여기지 않으시고 스스로 겸허하게 종의 형체를 취하신 것이다. 게노시스 교리는 범신론의 기초 하에 하나님의 불별성과 삼위일체의 진리를 파괴하고 말았다.

슬라이어막허를 제외하고는 릿츌(Albrecht Ritsohl)만큼 현대 신학에 큰 영향을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자신의 기독론의 출발점을 그리스도의 인격에 두지않고 사역(使役)에 두었다. 그의 관심사는 그리스도는 누구이냐가 아니고 그는 무엇을 하였느냐에 있었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그의 인격의 위엄을 결정한다.
그리스도는 단순한 인간이지만, 그가 이루신 사역과 그가 행하신 봉사를 보아서 우리는 그를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의 일을 하신 분을 하나님이라 부르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스도는 은혜와 진리와 구속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계시하여 우리에게 하나님의 가치를 보여 주셨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받기에 합당하다. 릿츌은 그리스도의 선재, 성육신과 동정녀 탄생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체험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하여 무시하였다. 릿츌의 기독론은 사실상 사모사타의 바울이 만들어 놓은 역사적 예수의 근대판에 지나지 않는다.
현대 신학의 그리스도는 현대 범신론적 개념을 기초로 하여 철저한 자연주의적 방법에 따라 표현되고 있다. 그 표현은 다양하지만 하나님과 인간의 본질적 통일이라는 그 근본적 관념에 있어서는 일반적으로 일치점을 갖는다.
그리스도는 자신 안에 내재하시는 하나님을 더 많이 의식했다는 점에서 보통 인간들과는 다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모든 사람은 다 신적(神的)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 안에 다 내재(內在)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우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보다 큰 감수성과 뛰어난 하나님 의식 때문이다.

(월간 <교회와신앙> 1994년 1월호)

5.  교회론에 나타난 이단 사상

김장진
교려신학교 조직신학 교수

한국교회의 이단문제는 그 심각성이 이미 공지된 사실이다. 그러나 심각성에 비해 대처와 처방이 미흡하고 적절하지 못했다. 이단 문제에 대한 진단과 처방은 다각적인 방법을 통해 분석하고 또한 대처해야 할 시급한 과제이다.
이단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는 교리적인 문제의 접근이 매우 중요하다. 이는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올바른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현재의 이단 사상에 대한 현실 인식을 위해서는 과거에 어떤 교리에, 어떤 이단들이 있었는지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본지는 이단이 발생할 수 있는 전 교리를 고찰, 오늘날의 이단 사상에 대한 올바른 기준을 제시하고자 '기독교 2처년 교리 속에 나타난 이단 사상'을 기획했다.
필자마다의 다소간의 학문적 차이점이 있고, 전문적인 용어 때문에 독자들에게 이해가 어려운 부분이 있더라도 집중해서 읽어 주었으면 하는 바이다. <편집자 주>

'진리는 시간의 딸이다'는 말이 있다. 기독교의 정통과 진리문제도 역사적 변수와 상관이 있다. 한때 이단으로 정죄되어 파문을 당한 교파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빛을 보게 되고 진리운동이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교회론적인 이단문제는 이와 같은 현상이 두드러진다. 정통의 표준이 객관화되어 있지 않고 소속교파 중심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누가 봐도 이단적인 사상과 교리체계를 가진 교파지만 그 세력에 눌려 말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로마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경우 서로 이단으로 규정하고 갈등을 빚어온 것이 역사적인 사실이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도 제 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인식이 변하여 '갈라진 형제'로 규정하며 이단시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일부 개신교에서도 로마가톨릭은 정통교단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단은 도대체 어떻게 정의되어야 하는가?

이단의 정의
시간이 경과됨에 따라서 반전을 거듭한 종교세력간의 다툼에서 패자에게 붙여진 이름인가?
역사적으로 그러한 요소가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이제는 분명한 표준을 설정하여 정통과 이단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하겠다. 그것이 무엇인가?
첫째, 성경을 최고의 표준, 최종의 판단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성경을 가감하면 이단이다. 신구약 66권만을 표준으로 삼을 때 정통과 이단을 가려진다. 둘째, 고대 에큐메니칼공의회(325)의 삼위일체 교리, 콘스탄티노플공의회(381)의 성령론, 칼케돈공의회(451)의 기독론, 에베소공의회(431)의 구원론, 다마서스공의회(382)의 신약의 정경론은 정통교리로 인정된다. 보편교회의 고대공의회가 아닌 최근의 WCC운동은 아직 표준으로 인정되지 못한다.
셋째, 종교개혁을 통한 성경적 기독교 운동을 판단기준으로 설정할 수 있다.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지향하면 그와 상반된 기독교의 각종 운동은 이단적 요소를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세 가지의 기준으로 본다면 이미 이단이라고 인정된 교파의 이단성은 더욱 뚜렷해지고 이단이 아닌 교단이라도 이단적 요소를 추출할 수가 있다. 필자는 교회론에 나타난 이단사상을 이런 기준 하에서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몬타니즘, 노바티즘, 도나티즘의 이단성


기독교 초기의 이단으로서 교회론에 관계된 3대 이단은 2세기의 몬타니즘(Montanism), 3세기의 노바티즘(Novatism), 4세기의 도나티즘(Donatism)이라 하겠다.

몬타니즘(Montanism)
200년 소아시아 교회들의 공의회에서 정식으로 파문되었다. 몬타누스는 156년경부터 예언활동을 하면서 교회의 세속화와 제도화에 강한 반발운동을 전개했다. 카타피리기안주의(Cataphrygian)라고도 하는 몬타니즘은 첫째, 자신들은 성령이 충만한 사람(Pneumatics)이라고 대조시켰다.
둘째, 천상의 예루살렘이 피리기아의 페푸자 근처에 강림한다고 주장했고, 셋째, 세례 이후에 저지른 죄는 결코 용서받지 못하며, 치명적인 죄는 순교로서 구원받는다고 가르쳤으며, 죽은 자에게도 세례를 베풀었다. 이들은 성령의 영감으로 교회의 형식과 비도덕성을 조화시키려한 이단이었다. 이로 인하여 교권은 더욱 강화되었다.

노바티즘(Novatism)
258년 교황 발레리안(Valerian)에 의하여 처형된 교파이다. 노바티누스는 본래 로마의 장로요, 삼위일체 교리에 관한 중대한 저술을 한 인물이다. 그는 251년 코르넬리우스(Cornelius)가 교황으로 선출되자 실망한 나머지 별도의 노선을 지향했다. 데시안 황제의 박해(Decian Percecution)때에 신앙을 배반하고 다시 교회로 돌아온 자들의 죄를 교회가 용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교회에 신앙의 규율이 해이한 것을 발견하자 다시 세례를 받고 교회의 순결을 위한 공동체를 결성하였다. 교리적으로 정통이라는 평을 받는 이단이다.

도나티즘(Donatism)
신앙이 없는 지도자에 대한 강한 반발로 아프리카에서 형성된 교파이다. 디오클레티안 황제의 대박해 때(303), 압등가의 펠렉스가 성경을 넘겨주는 배반행위를 자행했는데, 카르타고의 주교로 그가 임명되자, 수납치 않고 독자적으로 312년 주교를 선출하였다.
그들은 첫째, 엄격한 교회적 권징과 순수한 교회원의 자격을 주장하고 무가치한 성직자를 거부했다. 둘째, 종교문제에 대한 국가의 간섭에 반했다. 셋째, 배반자에 의하여 집행된 성례를 거절했고 그 교파에 들어오는 자는 세례를 다시 받게 하였다. 넷째, 예수만이 그들의 사제라면서 가톨릭 교회와 결별하였다.

카타리파, 보고밀파, 왈도파

중세기에는 수많은 종류의 이단이 등장했다. 로마가톨릭의 부패와 비성경적인 교리체계의 정립에 대한 반동이었다. 종교개혁의 여명기라고 할 수 있는 이때에 수많은 교단이 이단으로 정죄되었는데, 지면 관계상 교회론에 관계된 세 파에 대해서만 살펴본다. 왈도파와 함께 주목받는 위클리프파, 후스파 등은 종교 개혁사에서 매우 중요시하고 있으므로 별도로 살펴야 할 것이다.

카타리파(Kathari)
일명 알비파(Albigeneses)라고 하는데, 흠 없는 순결한 삶을 살고자 노력한 교파이다. 로마가톨릭 교회에 큰 위협이 되었으며 많은 핍박을 받다가 1300년경 약화되어 버렸다. 성격상 카타리파는 동양의 철학과 엄격한 금욕주의를 도입하여 교회에 도전하였다.
그들은 물질과 정신의 기원을 서로 다른 두 존재에 두었으며, 성경에서 물질을 좋게 여기는 구절을 삭제하고 인류의 기원과 타락, 구원에 관하여 공상적인 견해를 주장했다. 예수의 가현설, 성령의 세 분류(Santus, Paracletus, Principalis)는 독특했다. 최고의 성령(Principalis)을 받아야 완전하고 무죄한 인간이 된다고 하면서 교회론적으로 다음과 같은 주장을 계속했다.
첫째, 가톨릭 교회의 교회적이고 의례적인 체계는 악마적이므로 거절한다.
둘째, 가톨릭 교회의 사제제도는 4단계의 완전한 성직자로 대치시켜야 한다. 즉, 주교(bishop), 큰아들(filius major), 작은 아들(filius minor), 집사(deacon)이다.
셋째, 가톨릭 교회의 7성례는 폐지하고 네 가지 성례를 행해야 한다.
즉, 안수식(consolamentm): 성령을 받아서 완전하게 되어 그리스도의 상속인이 되는 의식, 소환식(Convenencia): 신자가 죽기까지 안수식을 연장하는 의식, 인내심(endura): 소환식을 받고 죽기 직전까지 견디는 의식, 선혜식(melioramentum): 신자들이 무릎을 꿇고 완전한 축복을 받는 의식이다.
또한 매일 성찬식을 거행한다. 화체설은 거절한다. 서품식은 하되 서약은 하지 않는다 였다.
로마가톨릭과 대조시키면서 맹렬히 세력을 확대했으나 이단으로 낙인 찍혀 무력과 설득에 의하여 소멸되었다.

보고밀파(Bogomils)
발칸에서 일어난 보고밀파의 뿌리는 마니교이다. 보고밀이란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Theophilus)의 불가리아 말이다.
1110년 보고밀의 지도자들이 처형됨으로 점차 소멸된 그들의 주장은 첫째, 세상과 인간은 사탄의 창조물이고, 영혼만이 하나님이 만드셨다.
둘째, 진정한 성도는 물질 세계를 극복해야 하는데 결혼의 금지, 육식의 금지, 포도주의 금지, 재산의 포기를 통해서 가능하다.
셋째, 보통 신앙을 가진 자는 완전자에게 순종할 의무가 있으며, 죽음의 침상에서 영적 세례를 받을 수 있다.
넷째, 신약은 인정하나, 구약의 시편 외에는 사탄의 글이므로 인정할 수 없다.
다섯째, 그리스도의 몸은 실체가 아니며, 교회의 성례, 교회 조직 및 성상숭배는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왈도파(Waldensians)
리용의 부유한 상인 왈도(Peter Waldo)가 회심을 경험한 후 세속적 소유를 포기하고 청빈한 삶과 선교의 삶을 살기로 결심하고 전개한 운동이 왈도파이다. 1181년 정죄되어 1184년 파문이 되고 수 없는 핍박을 받았으나 이미 이단으로 기울어진 로마가톨릭을 향하여 '바벨론의 매춘부'라고 항거했던 운동이었다. 참된 교회를 주장했던 그들의 교회론은 무엇인가?
첫째, 교황이나 그의 파문령을 거절하므로 교황권의 우위성을 무시했다.
둘째, 성찬식을 제외한 모든 가톨릭의 성례들을 거절하거나 재해석하였다.
셋째, 왈도파의 남녀는 성례를 시행할 수 있으며, 성찬식은 1년에 한번 시행하였다.
넷째, 모든 가톨릭의 축일들과 절기, 기도들은 인간이 만든 것이며 신약성경에 근거가 없으므로 거절하였다.
다섯째, 연옥 교리 및 죽은 자를 위한 기도와 헌금의 효력을 거부했다.
이들의 반항운동이 종교개혁으로 승화된 것은 역사가 인정하고 있다. 후스파 및 위클리프파도 이와 같은 맥에서 파악되고 있다.

로마가톨릭과 급진 종교개혁파

1050~1300년경에는 기독교 사회가 교황에 의하여 통치되었다. 교황의 권위에 복종하는 크리스천을 정의한 시대이므로, 그렇게 하지 못하는 신자는 이단자(infidels, Schismatics 혹은 heretics)로 규정했다. 개인적으로 수많은 성도가 처형되었고 십자군 원정 및 종교재판은 조직적으로 소위 이단을 파문하고 박멸하였다. 종교개혁은 이러한 때에 발생했고 로마가톨릭의 트렌트공의회(1545~1563)의 기준으로 보면 프로테스탄트는 전부가 이단이 되었다. 새로운 이단(New Heresies)으로 분류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을 기준으로 삼고 고대 공의회(500년 이전)를 표준으로 할 때 로마가톨릭은 실제적 이단(real heresy)으로 평가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급진적으로 빗나간 재침례파(Anabaptist)도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로마가톨릭의 문제는 성경에 없는 내용이 너무 많이 첨가된 점이 지적된다. 교황의 우위권, 마리아론, 7성례론, 화체설 등이 거론되고 있다.
브로밀리는 그가 편집한 국제표준 성경백과사전(I.S.B.E) 2권 686쪽에서, 칼빈의 변증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로마가톨릭은 분명히 지정한 보편주의 교회로서의 가톨릭과 구분된다. 로마가톨릭은 덧붙힘에 의하여 왜곡시키고 변질시켰다. 믿음의 내용에서 떠나 있으므로 반드시 정정되어야 할 것들이다. 특별히 로마가톨릭은 성경의 권위를 침범했고 칭의를 오해했으며, 세례, 성찬, 고해성사, 연옥, 교황의 우위권 등의 문제들을 비사도적인 방향에서 창출했다"고 하였다. 로마가톨릭에서 이교적인 요소로 인정되는 것들을 제거하면 바른 기독교로 공인받을 것이다.
그리고 급진적인 종교개혁 운동도 이단적 정죄를 받았는데, 재침례교가 대표적이다. 기존의 교리를 부인하고 유아세레와 성만찬을 경멸하는 문제와 국가와 교회의 단절교리가 이단으로 정죄된 이유였다. 성경적 기독교에서 멀어지면 어느 교단이든지 이단의 시비에 휘말릴 수 있다는 교훈을 남긴다.

몰몬교, 재림예수교, 여호와의 증인, 크리스찬사이언스

19세기에 세계적인 이단으로 등장한 교파들의 교회론을 살펴보자.

몰몬교(Mormonism)
몰몬교는 세례요한 죽은 후 1830년까지만 교회가 유효하다고 주장한다. 그 이후에는 오직 자신들의 성례만이 유효하다고 가르친다. 매 주일 성찬식을 거행하는데, 8세 이상이면 참여한다. 3회 이상 성찬에 참여치 않으면 문책을 받으며, 떡은 성병(聖餠), 포도즙은 성즙(聖汁)이라고 한다. 마태복음 26장 29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포도즙 대신 물을 사용한다. 8세 이상의 몰몬교인은 여섯과의 기초 공부를 마친 후 침례를 받는다. 그들은 결혼이 영원한 귀속이라고 믿으며, 죽은 친척에게도 세례를 베풀고 있다. 술, 담배, 카피, 홍차를 마시지 않고 안식일을 준수한다. 매 주일 예배보다 교육에 치중하는 이단으로 한국에서도 맹렬히 활동하고 있다.

제7일 안식일 교회
이들의 교회관은 '남은 교회(Remnant Church)'의 개념으로 집약된다. 계시록 12장 17절의 말씀대로 안식일의 계명을 지키며, 하나님의 증거, 곧 예언의 영을 화이트 여사를 통하여 받았다고 자처하며, 자기들만 구원을 말세의 참 교회라고 주장한다. 그들의 세례는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기본적인 신앙고백 외에 제 7일 안식일과 예언의 영과 남은 교회와 십일조 등에 대한 신앙고백을 요구하며 침례를 원칙으로 한다. 성찬식은 세족식을 선행한다. 예수께서 성만찬 전에 제자들의 발을 씻긴 사실을 죄악을 씻는 하나의 의식으로 해석하여 시행한다. 그들은 예수님이 세례에서 '큰 씻음(Greater Cleansing)'을 받았고, 발을 씻김에서 세례 후에 묻은 죄를 씻는 '작은 씻음(Lesser Cleansing)'이라고 한다.

여호와의 증인 및 크리스천사이언스
여호와의 증인(Jehovah's Witnesses)은 기존 교회의 신도들은 악마의 추종자라고 규정하며,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14만 4천명에 속하며 천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한다고 주장한다.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단절하고 사회적응을 못하므로 큰 문제를 야기시키는 배타적 이단이다.
크리스천사어언스(Christian Science) 역시 배타적 교회관을 가진 이단이다. 에디 여사의 허락 없이 교리와 교회정치를 변경시키지 못하게 한다. 모든 교회는 보스톤의 모교회와 연계시켜야 하며, 아예 성례는 폐지하고 말았다.
끝으로 이단은 예수 재림 시까지 계속 발효할 것이므로 이단을 멀리 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단은 적기독운동이요, 반교회운동이며 탈성경운동임을 알고 대처하자. 그리고 이단은 성령을 빙자한 악령의 운동이며 영생을 약속하지만 멸망이 분명한 불법운동임일 기억하자. (월간 <교회와신앙> 1994년 1월호)

6. 성령론에 나타난 이단 사상

황승룡
호남신학대학 총장

한국교회의 이단문제는 그 심각성이 이미 공지된 사실이다. 그러나 심각성에 비해 대처와 처방이 미흡하고 적절하지 못했다. 이단 문제에 대한 진단과 처방은 다각적인 방법을 통해 분석하고 또한 대처해야 할 시급한 과제이다.
이단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는 교리적인 문제의 접근이 매우 중요하다. 이는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올바른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현재의 이단 사상에 대한 현실 인식을 위해서는 과거에 어떤 교리에, 어떤 이단들이 있었는지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본지는 이단이 발생할 수 있는 전 교리를 고찰, 오늘날의 이단 사상에 대한 올바른 기준을 제시하고자 '기독교 2처년 교리 속에 나타난 이단 사상'을 기획했다.
필자마다의 다소간의 학문적 차이점이 있고, 전문적인 용어 때문에 독자들에게 이해가 어려운 부분이 있더라도 집중해서 읽어 주었으면 하는 바이다. <편집자 주>

영(Spirit)이라는 낱말의 성경적 어원은 히브리어에서는 루아호(ruch), 희랍어에서는 프뉴마(Pneuma)라 하는데, 양자가 대기 운동을 가리킨다. 문맥에 따라서 이는 바람, 미풍, 폭풍이라는 말로 번역된다. 그러나 보다 더 자주 숨(breath)이라는 말로 사용하는데 이는 상징적으로 생명의 근원, 생명력(vitality)을 뜻한다. 하나님의 영은 인간 생명의 근원이요, 힘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그의 생명의 숨(루아호)을 불어넣어 인간은 살아 움직이는 생령(a living soul)이 된다(창2:7, 욥33:4). 인간뿐 아니라 동물도 하나님의 입김을 통하여 살아 움직인다(전3:19,21, 창6:17, 7:15,22).
세계 안에 있는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그의 생명의 영을 불어넣음으로써 생명을 얻으며, 거두시면 죽음으로 되돌아간다(창6:3, 시104:29, 욥34:14).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은 모든 피조물의 생명의 힘이요, 그들을 변화시키는 능력이다. 그러므로 성령은 창조와 재창조 중에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 자신의 영이시다.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 자신에 속한 것으로 어떤 피조물도 지배할 수 없다.
우리는 성령의 어원적 의미를 통하여 성령에 대하여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 성령은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 자신의 영으로서(life-giving Spirit)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언제나 다시 불러일으키시며,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시며, 하나님의 백성의 삶을 주관하시며, 하나님이 그를 통하여 그의 백성들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현존인 동시에 자신의 인격적 주체 속에서 언제나 새롭게 활동하시는 분이시다.

지금까지 우리는 성령에 관한 간단한 정의를 통하여 성령이 어떤 분이시고 어떤 사역을 감당하시는가를 살펴보았다. 이처럼 성령은 우리의 삶, 신앙, 신학에서 무관심하거나 지나쳐 버릴 수 없는 분으로 삶, 신앙, 신학의 요체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론을 조직화하고 체계화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물론 이에 관한 이유는 여러 가지이지만 이게 관하여서는 본 장에서 약하도록 하겠다. 여기에서 비롯된 성령에 대한 바른 이해의 부족과 또한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을 의도적으로 악용하여 성령론은 이단 사상의 온상이 되고 있다. 이제 우리는 본 장에서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교회사적 성령론에 나타난 중요한 4가지 이단 사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성령의 신성을 부인하는 이단

성령의 하나님되심, 즉 성령의 신성을 부정한 이단 사상이다. 성령의 신성은 처음부터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교리였다. 헤르마스는 성령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였고 유스리누스는 영과 로고스를 동일시하였다. 마태복음의 저자로부터 비롯하여 디다케의 저자 및 유스티누스에게도 성삼위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 것을 알려져 있다. 이레니우스도 성삼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것을 신앙고백의 학습문답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동방에서는 마케도니우스와 성령 훼손당(Pneumatomachen)이라는 이단이 일어나서 성령이 하나님의 피조된 능력 내지 도구라고 하였다. 특히 아리우스는 더욱더 성령의 피조성을 강조하였다. 사실 아리우스는 처음에는 성령의 인격성을 주장했지만 나중에는 성령의 인격성 및 신성을 부정했다.
아리우스를 비롯한 그들의 견해는 인정받지 못했으며 이단자로 낙인찍혔다. 지금까지 모든 정통적인 교회는 성령의 신성과 인격성을 주장하고 있다.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신조에 의하면 "만들어지지도, 창조되지도 않고 누가 그를 낳으신 것도 아니고 다만 나오신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또한 콘스탄티노플(Constantionople) 신조에 의하면 "주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으니, 그는 성부로부터 나오시고 성부와 성자와 함께 예배와 영광을 받으시며, 예언자를 통하여 말씀하셨으니"라고 확정적으로 말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신앙고백에도 유사하게 진술하고 있는데, "하나님 안에는 동일한 본질과 능력과 영원성을 가진 삼위가 통일을 이루고 있다. 즉,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이시다. 성부는 지존하셔서 나시거나 발생하지 않으셨고, 성자는 성부에게서 영원히 나오신 분이며(begotten),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영원히 나오신 분(proceeding)"이라 한다. 이 같은 교리의 가르침뿐 아니라 성경 역시 성령의 시적 본성을 주장하고 있다. 이는 무엇보다 성령의 주(Lord)라고 부르심에서 볼 수 있다.
성령의 신성을 부정하는 이단 중에는 앞에서 살펴본 마케도니우스(Macedonius)를 비롯한 성령 훼손당과 아리우스(Arius)와 함께 또 하나 유념해야 될 이단은 사벨리우스(Sabellius)가 주장한 양태론(Modalism)이다. 사벨리우스는 하나님의 통일성과 일체성을 보존하기 위하여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를 구별하지 않고 부정하여 성자, 성령은 단지 성부의 다른 양태(mode)의 나타남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이 같은 주장은 실제로 삼위일체론을 부정한 것이다.
성령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같은 속성을 가지고 계시는 동등한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는 구별되는 삼위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성부, 성자, 성령의 순서로 호칭하는 것은 서열, 우열, 순위를 뜻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관계만을 말한 것이다. 따라서 성령의 하나님되심, 즉 성령의 완전한 신성을 깨닫지 못하거나 믿지 못한 자는 성령의 본질을 전혀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기독교 이단일 수밖에 없다.

성령의 인격성을 부인하는 이단

성령의 인격성을 부인하는 이단이다. 성부 하나님께서 한 인격이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인격이신 것처럼 성령께서도 한 인격이라는 사실은 성경의 근본적 계시이다. 그럼에도 성령의 인격성은 수세기에 걸쳐서 여러 차례 부인되거나 등한히 여겨 왔으며 근대까지도 완전히 이해되지 못하고 있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성령의 인격성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대적한 아리우스는 성령은 단지 피조된 세계에 나타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에너지(energy)로 보았다. 16세기의 소치니우스(Socinius)와 그의 추종자 역시 성령은 단순히 하나님께로부터 흘러나온 세력이라고 주장한다. 이 같은 경향이 오늘날 여러 형태로 변형되어 성령을 비인격적 감화력, 능력, 세력, 힘 등으로 생각한다.
이것들은 다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성령론을 조직적으로 체계화시킨 오웬(J. Owen)의 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 모든 증거로 미루어 보아 우리는 그들로 말미암아 밝혀지도록 계획된 것들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즉, 성령은 어떤 이들이 말하는 것같이 신적 본성 안에 있는 하나의 물질이 아니며, 하나님으로부터 유출된 단순한 선도, 능력도 아니며 우리의 성결을 위해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도 아니다. 그는 거룩하고 지적인 실재, 또는 한 인격체이시다"
성령을 한 인격으로 보지 않는 이단은 교회사에 나타나기 이전에 벌써 그 기원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도행전 8장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사마리아성에서 큰 표적과 기사를 행하는 것을 본 마술사 시몬은 사도들에게 돈을 주고 이 성령의 권능을 팔도록 요청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마술사 시몬이 사도들에게 성령을 팔도록 요청한 것은 성령을 붙잡아 그의 뜻대로 이용하려는 뜻에서였다. 그는 성령의 인격성보다는 그의 욕망, 그의 뜻을 성취시키려는 수단 도구로서 성령을 이해한 것이다.

성경은 성령의 인격성을 세 가지로 나타내고 있는데, 첫째, 성경은 성령을 인격 대명사로 부르고 있다.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15:26)에서와 같이 성령을 그 분(He)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외에도 요한복음 16장 7절, 8절, 13절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둘째, 성경은 성령에 대해서 인격적 존재만이 할 수 있는 활동을 나타내고 있다.
-성령은 말씀하신다(계2:7).
-성령은 인간의 연학함을 도우신다(롬8:26).
-성령은 우리를 위하여 친히 기도하신다(롬8:26).
-성령은 우리를 가르치신다(요14:16).
-성령은 주님에 관하여 증거하신다(요15:26).
-성령은 그리스도인을 인도하신다(요16:13).
-성령은 주님의 사업을 도우신다(요16:6-7).
-성령은 일꾼을 선택하신다(행13:2).
-성령은 그리스도인을 위로하신다(행9:31).
-성령은 근심하신다(엡4:30).
셋째, 성경은 성령이 인격적 속성인 지?정?의를 가지고 계심을 나타낸다.
-성령은 지적 속성을 가지고 계신다(고전2:10).
-성령은 정적 속성을 가지고 계신다(엡4:30, 롬8:26).
-성령은 의지적 속성을 가지고 계신다(고전12:11, 행15:6-7).
성령은 단순한 힘, 능력, 영향력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와 자유를 가진 인격적 주체로서 피조물에게 생명을 주고 만나는 신적 인격이시다.

자칭 보혜사라고 하는 이단

자기 자신을 스스로 보혜사 성령이라고 칭한 이단이다. 예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시며 제자들과 우리들을 위하여 보내시기로 약속하신 분이 보혜사 성령이시다. 이처럼 보혜사 성령은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분으로 요한복음서에 나온 성령에 대한 독특한 칭호이다.
보혜사라는 말의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parakletos)라 하는데, 이 칭호는 다양하게 번역되었다. 흠정역에서는 위로자(comforter)로, 개역성경에서는 위로자라는 말을 사용하면서도 난외 주에 대변자, 도와주시는 분을 의미할 수 있다고 하였다. 개역표준성경에서는 상담자라고도 번역하였다. 그러나 20세기 대부분의 신약성경은 도와주시는 분(helper)으로 번역하였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이 말은 여러 가지 의미로 번역되었다. 성령을 보혜사라 한 것은 성령이 삶의 용기와 힘을 주시는 위로자이시며, 생의 어려움 속에서 우리를 상담해 주시는 상담자이시며, 우리에게 도움을 주시는 분이시며 더 나아가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대변자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보해사라는 말 속에는 위의 네 가지 요소를 다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보혜사가 우리에게 계신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위로이며 힘이며 사람의 능력이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요14:16).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일 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시는 말씀이시다.
그러나 여기에서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예수님은 보혜사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다른 보혜사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의 '다른'이란 상이(defferent)하다는 뜻이 아니라 같은 또 하나(another, one more)의 뜻으로 동일하고 동질적인 것을 뜻한다. 따라서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셨던 똑같은 일을 하신 분, 즉 주님 자신과 똑같은 일을 하신 분, 즉 주님 자신과 똑같이 생각하고 사랑하며 행동하는 같은 분이라는 뜻이다. 이 같은 보혜사 성령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시켜 스스로 보혜사 성령이라고 한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바로 몬타누스(Montaneus)이다. 몬타누스는 이교도 제사장으로 주후 155년경에 세례받고 기독교로 개종한 것으로 본다. 그는 세례를 받은 후 자신이 성령을 받았다고 떠들었으며 그는 성령에 따라 예언한다고 주장했다.
곧바로 그와 함께 두 명의 여인 프리스킬라(Priscilla)와 막시밀라(Maximilla)가 가세하여 또한 예언했다. 그들은 성령께서 자신들에게 주신 새로운 계시를 따라 새로운 세대(dispensation)가 시작한다고 떠들면서 계시의 시대가 자신들에게서 끝나고 곧바로 이 세상의 끝이 온다고 보았다. 그들은 새예루살렘이 프리지아(Phrygia)의 페푸자(Pepuza)에 건설됨을 주장하여 많은 몬타누스주의자들이 그곳에 모여 최후의 날을 증언하기 위하여 준비하였다. 몬타누스는 그 자신을 가리켜 성령의 기관, 더 나아가 보혜사 성령이라 하였다. 특히 이 같은 경향은 후기 몬타누스주의자들에게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자기 자신을 보혜사 성령이라 한 것은 초대교회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이 같은 주장은 근래에 우리 한국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는 박태선 씨로 그는 1955년 12월 25일 '한국 예수교 전도관 부흥협회' 일명 전도관, 1980년 1월1일부터는 천부교로 이름을 바꾼 이단 종파를 창설한 자로 그는 스스로를 '감람나무' 또는 예수님이 보낸 보혜사 성령이라 칭하였다. 우리가 이미 앞에서 살펴 본 대로 보혜사 성령은 하나님 자신으로 삼위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보혜사 성령이라 한 자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하나님이라 칭하는 자이므로 이들은 더 말할 필요 없이 이단이다.

자아 도취의 이단

인간의 심령술과 사탄의 초자연적 역사를 성령의 역사하시는 능력과 혼동하거나 동일시하는 것은 이단이다. 성경은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요일4:1)라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는 시대가 혼란할수록 영들을 바르게 분별하는 영적 안목과 지혜가 필요하다. 특별히 오늘같이 혼란한 시대에는 이 같은 영적 분별력은 더욱 절실히 요청된다.
우리 시대에 신초월주의(noetranscendentalism), 뉴에이지 운동, 적극적 사고, 정신측정(phychometry), 영매(mediumism), 마술, 최면, 강신술(spiritualism) 등 다양한 방법으로 심령치유(phychichealing)가 성행되고 있다. 이 가운데 대부분의 방법은 성령이 엄격히 금하고 있는데(신18:9-13), 이 같은 심령치유 방법을 마치 성령께서 하시는 일로 악용하여 주장한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성령을 이용한 이단들이다. 우리는 심령(정신)의 치유, 즉 사고의 능력만으로도 가능한 치유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것을 성령의 치유하심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심령술을 통한 치유란 여전히 인간의 정신 영역에 속한 것이지만 성령의 치유하심은 위에서 오는 것으로 심리적 영역을 넘어서 뚫고 들어오는 것이다.
우리는 심령술을 통한 치유와 함께 초자연적 치유(supernatural healing) 역시 주의가 필요하다. 이는 초자연적 기적이 사탄에 의해서도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거짓 선지자들도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며(신13:1-2), 적그리스도도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또 그것을 통하여 미혹하여 우상을 섬기게 한다(계13:13-14).
예수님께서는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백성을 미혹케 하려 하리라 너희는 삼가라"(막13:22)고 하였다. 따라서 모든 초자연적 기적, 초자연적 치유가 바로 성령의 역사라고 우리는 말 할 수도 없고 이를 동일시 할 수 없다. 여기에는 우리가 이미 앞에서 언급한 대로 영적 분별력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우리는 교회사적 성령론에 나타난 이단 사상을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살펴보았다.
이 같은 이단 사상은 고대로부터 현대라는 긴 시간의 축을 중심으로 하여 이동하여 왔지만 이것은 일회적 사건이 아니고 역사 속에서 계속 일어나는 반복적 사건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이단 사상을 접할 때 이것이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라 단정하여 안이하게 대처해서는 안될 것이다. 역사가 되풀이되듯이 이단과 같은 사상이 시간과 장소를 초월해서 반복해서 되풀이되기 때문이다. (월간 <교회와신앙> 1994년 1월호)

7. 구원론에 나타난 이단 사상

이형기
장로회신학대학 역사신학 교수

한국교회의 이단문제는 그 심각성이 이미 공지된 사실이다. 그러나 심각성에 비해 대처와 처방이 미흡하고 적절하지 못했다. 이단 문제에 대한 진단과 처방은 다각적인 방법을 통해 분석하고 또한 대처해야 할 시급한 과제이다.
이단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는 교리적인 문제의 접근이 매우 중요하다. 이는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올바른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현재의 이단 사상에 대한 현실 인식을 위해서는 과거에 어떤 교리에, 어떤 이단들이 있었는지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본지는 이단이 발생할 수 있는 전 교리를 고찰, 오늘날의 이단 사상에 대한 올바른 기준을 제시하고자 '기독교 2처년 교리 속에 나타난 이단 사상'을 기획했다.
필자마다의 다소간의 학문적 차이점이 있고, 전문적인 용어 때문에 독자들에게 이해가 어려운 부분이 있더라도 집중해서 읽어 주었으면 하는 바이다. <편집자 주>

시작하는 말

431년 에베소 공의회는 펠라기우스의 구원론을 정죄하고 어거스틴의 구원론을 정통 구원론으로 삼았고, 529년 제 2차 오렌지공의회는 반펠라기우스주의자들의 구원론의 영향 하에, 그러나 이것에 반대하는 어거스틴적 극단론을 약화시켰으며, 중세교회의 구원론은 오렌지공의회의 그것을 물려받았으나 신인협동론적 성화를 더 강조하였다. 그리고 16세기 루터와 칼빈은 '이신칭의'를 구원으로 보아, 이신청의인 성화를 구별하면서도 불가분리한 관계 속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
로마가톨릭 교회의 구원론이 개신교의 그것과 얼마나 다른가? 아르마니우스주의자들과 경건주의 및 복음주의적 각성운동은 개신교의 주류인 루터와 칼빈의 구원론으로부터 얼마나 빗나갔고, 로마가톨릭 구원론과는 얼마나 다른가? 그리고 WCC의 신앙과 직제의 구원론은 어떠한가?
로마의 클레멘트(95) 등 속사도 교부들 이래로, 성령의 사역으로 복음을 믿음으로 은혜로써 구원받는 바울의 구원론(롬1:16,17 ; 3:21이하)은 점차 율법주의적 구원론으로 전락하는 경향을 보이다가,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율법까지도 무시하는 말시온(160년 사망)의 반율법주의적(anti-nomian) 복음축소 주의를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 로마에서 가르치기 시작한 영국의 신학자요, 성서주석 가인 펠라기우스(Palagius)는 고대 교회의 구원론들 가운데 가장 인본주의적이고 율법주의적인 구원론으로서 어거스틴의 바울에 가까운 구원론에 의해서 반론되었고, 431년 에베소 에큐메니칼 공의회에서 정죄되었다. 우선 우리는 펠라기우스의 구원론에 대하여 알아보자.

펠라기우스의 구원론

펠라기우스의 구원론은 자연인의 이성과 자유의지가 은혜의 선행(先行)없이 스스로 자연법과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명령을 성취함으로써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펠라기우스의 제자, 코일레스티우스(Coelestius)의 주장을 9가지로 요약하였다.

- 아담은 처음부터 죽을 수밖에 없는 숙명적인 인간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죄를 짓고 안 짓고에 관계없이 죽을 수밖에 없다.
- 아담의 죄는 그 자신에게만 손상을 입혔을 뿐이고 전 인류를 결코 손상시키지 않았다.
- 율법도 복음과 마찬가지로 자연인을 하늘나라로 이끌어 준다.
- 그리스도 이전에도 죄없이 살다가 죽은 사람들이 있었다.
- 최근에 태어난 갓난아기는 아담의 타락 이전 상태와 동일하다.
- 전 인류는 아담의 타락과 죽음으로 인해서 죽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부활과 더불어 부활하지도 않는다.
- 사람(자연인)은 자신의 이성과 의지로써 죄없는 삶을 살 수 있다.
- 세례받지 않은 유아들도 영생을 얻는다.
- 세례를 받은 부자라도 자신들이 소유한 재산을 포기하지 않으면 아무런 공로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한다.

펠라기우스는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God-man 二神?人)와 성령을 통한 특수 은혜, 그리고 교회의 세례와 성만찬을 통해서 매개되는 은혜를 거부하고 '창조의 은혜', '계시의 은혜', '용서의 은혜'를 주장한다. 즉, 자연인의 도덕적 성취를 가능케 하는 이성과 자유의지의 능력은 '창조의 은혜'요, 이 자연인의 도덕적 분별력을 일으키는 것은 '계시의 은혜'로, 이 자연인으로 하여금 죄를 회개하고 올바른 삶을 살게 하는 것은 '용서의 은혜'라는 것이다.
펠라기우스에겐 특수 은총은 없고 보편 은총만이 있다. 인간의 이성과 자유의지 그 자체와 그것의 능력 발휘 그 자체가 은혜라는 말이다.
펠라기우스가 이처럼 특수 은혜를 저버리고 자연인의 이성과 자유의지의 자기성취에 의한 구원론을 주장하게 된 동기는 마니교의 도덕적 결정론에 대한 반론에 있었다.
마니교는 선과 악의 원리가 영원한 원리로 존재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악한 본성은 결코 선해질 수 없으며, 반대로 선한 본성도 결코 악해질 수 없다고 보았다. 사실은 어거스틴 역시 마니교로부터 벗어나면서 「자유의지에 관하여」에 이에 대한 글을 쓴 바 있었다. 하지만 어거스틴은 펠라기우스와 나아가서 반(半) 펠라기우스주의자들에 반대하여 그의 은총의 신학을 펼쳤다. 그의 「의문과 영에 관하여」,「자연과 은총」,「원죄에 관하여」,「예정론」,「성도들의 견인」등은 '복음'을 통한 은혜와 신앙으로 말미암은 구원론을 그 중심 주제로 삼았다.

어거스틴의 구원론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타락 전의 인간은 죄를 짓지 않을 수도 있었고(posse non peccare), 죄를 지을 수도 있었는데(posse peccare), 타락 후에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노예의지가 되었고(non posse non peccare), 특수 은혜를 통해서 회복된 인간은 죄를 아니 지을 수도 있다(non posse peccare)는 것이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원조는 휴브리스(신처럼 되고자 하는 교만)인데, 이것의 결과가 죽음과 무지와 현세욕(concupiscentia)이고, 이 후자가 원죄와 더불어 자범죄의 뿌리라고 본다.
어거스틴은 말씀과 세례를 토하여 성령의 사역으로 원조의 제거를 받고 새로워진 의지로써 말씀과 성만찬을 통하여 성령의 사역으로 계속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구원이라고 본다. 그의 구원론은 은총의 선행을 전제하는 성화의 과정, 그것이다.
어거스틴이 행위보다는 은혜와 신앙을 우위에 둔 것이 사실이나, 그의 구원론에 있어서 공로를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보아 로마가톨릭 구원론의 기본틀을 이미 마련하였고 종교개혁자들(루터와 칼빈)의 이신칭의론과 입장을 달리하였다. 물론 어거스틴이 은총이란 인간의 공로에 따라 주어진다고 말하지는 않았어도 은총이 구원받을 자 안에서 활동하면 그는 선행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얻고 이 선행이 공로가 되어서 최종적인 구원으로 인도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의 불가항력 은총과 예정론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선행(先行)은총을 전제로 하는 공로주의는 중세교회의 구원론과 중세 수도주의에 크나 큰 영향을 미쳤다.
이미 어거스틴 시대에, 그리고 어거스틴 직후 시대에, '반(半)펠라기우스주의자들'(Simi-Pelagians)라 일컬어지는 사람들이 등장하였다.
이들은 구원론에 있어서 펠라기우스와 어거스틴의 중도를 걸었다. 즉, 이들은 자연인이 그의 이성과 자유의지에 의한 도덕적 성취를 최대한도로 해낼 때, 하나님의 은혜가 협조한다는 신인협동론적 구원론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들 역시 어거스틴처럼 성화의 과정을 구원으로 보았으나 선행(先行)은총과 계속 주어지는 은총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최선을 다하는 도덕적 성취가 하나님의 은혜를 초치하여 구원에 이른다는 것이었다.

529년 제 2차 오렌지공의회는 반펠라기우스주의자들의 영향 하에, 그러나 이들에 반대하여 어거스틴의 철저한(극단적인?) 은총론에 수정을 가했던 것이다. 본 공의회는 어거스틴의 구원론에 있어서 불가항력적 은총과 예정론은 약화시키고 인간의 이성과 자유의지의 역할을 강화시켰다. 다음의 인용문을 우리는 불가항력적 은총과 예정론 없이 읽어야 한다.

『 그 누구든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 믿고, 의지하며, 갈망하고, 애쓰고, 힘쓰며, 기도하고 주의하며, 연구하고, 찾으며, 문을 두들길 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자비를 베푸신다고 말하거나, 우리가 성령의 주입과 영감으로 신앙과 선행에의 의지 혹은 힘을 갖는다고 고백하지 않거나, .... 첫 사람의 죄로 인하여 자유의지는 그렇게나 손상을 입었고 약해져서, 그 후로는 하나님의 자비의 은혜가 선행하지 않으면 아무도 하나님을 마땅한 만큼 사랑하거나 믿거나 그를 위해서 선행을 할 수가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의인인 아벨,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및 사도 바울이 천거하는 모든 옛 성도들의 신앙(히11)이란 타락한 인간 본성이 성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이다. 주님의 초림 이후에도, 은혜의 도움이 인간의 겸손이나 순종에 달렸다고 하거나, 우리가 순종하고 겸손할 수 있는 것이 은혜의 선물 그 자체라는 사실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는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고전 4:7)와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전 15:10)라고 말한 사도와 모순된다(제6조).
이 은혜는 세례를 갈망하는 모든 사람들의 자유의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다(빌1:29, 1:6, 엡2:8, 고전7:25, 딤전1:13, 고전 4:7, 약1:17, 요3:27, 본문의 긴 성경구절들을 역자가 그 장절만 기록하였음).
.... 카톨릭 신앙에 의하면 우리는 세례로 은혜를 받은 후 모든 세례받은 신자들을 자신들이 성실하게 성화되기를 원하는 한 구원을 위하여 결정적으로 중요한 선행(성화)을 그리스도의 도움과 협력으로 수행할 수 있는 능력과 책임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그 누구도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버림받은 사람이 되도록 예정되었다고 믿지 않으며,....(결론)』

위의 인용에서 우리는 '불가항력적 은총'과 '예정'만을 제외하고는 어거스틴적인 선행은총에 의한 신앙(세례)과 성화의 과정이 구원이라는 사실을 확인 할 수 없다.

신인협동론을 강화한 트렌트 구원론

대체로 서양교회사는 600년 이후(교황 그레고리 1세)를 중세기로 보는데, 1500년까지의 중세교회는 위의 오렌지공의회(529)의 구원론을 어느 정도 반펠라기우스주의 방향으로 밀고 나갔다. 중세교회는 토마스 아퀴나스에 와서 중세 구원론의 체계화를 발견하나, 공의회 차원에서 그것을 확정짓지 못하다가 16세기 개신교 종교개혁의 반동으로 일어난 트렌트 공의회(1545~1562)에서 로마가톨릭 구원론을 공식화하였다.
따라서 트렌트의 구원론은 개신교(루터와 칼빈)의 구원론에 대한 대응 구원론일 뿐만 아니라 중세 구원론의 정리이기도 하다. 루터와 칼빈의 구원론에 앞서 우리는 트렌트의 구원론에 대하여 먼저 알아보자. 다음의 트렌트의 주장은 오렌지 공의회 구원론보다 좀더 신인협동론적 성화를 강조한다(선행-先行-은총을 전제하지만).

『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들(고전5:15)을 위해서 죽으셨으나 모든 사람들이 그의 죽음의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니라, 그이 십자가의 공로가 전달되어지는 사람들만이 그의 죽음의 은혜를 입는다. ..... '타락한 아담의 후예들'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중생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결코 의로워질 수 없다. 이 중생을 통하여 이들은 십자가의 공로로 자신들을 의롭게 만드는 은혜를 받는다(골1:12~14).(제3항)
이 같은 성향 혹은 준비 다음에 칭의 그 자체가 오는데, 이는 단순한 사죄가 아니라 내적 인간의 성화요, 갱신이다. 이 성화는 은총을 의지적으로 받아들여 의로워지고 하나님의 원수로부터 하나님의 벗으로 될 때 일어나는 것이다(제 7항)
이처럼 의로워져서 하나님의 친구 혹은 권속이 된 후 이들은 날마다(고후4:16) 덕목을 쌓아(시83:8) 갱신되고, 자신의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고(골3:5) 그 지체들을 성화로 위한 의의 병기로 드림으로써 갱신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들은 하나님과 교회의 계명들은 지키고 선행으로 협력하는 신앙으로써 그들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 받은 의를 증가시키고 계속해서 의롭다고 인정받아야 한다(약2:24, 외경中 Eccles. 18:22, Apoc. 22:11). .... (제 10항) 』

우리는 이상의 세 인용문들 가운데, 첫 번째 인용문(제3항)에서 중생을 통해서 의롭게 되는 바, 실제로 수세시에 의롭게 되는 은혜를 받는다고 하는 사실이 일어나며, 이 선행은총의 도움으로 계속해서 성화의 과정으로 나갈 수 있음을 발견한다.
그리고 두 번째 인용문과 세 번째 인용문은 성화의 과정에 대하여 주장하고 있다. 이처럼 트렌트의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트렌트 공의회 문서중 구원론 부분의 제목)는 결국 신앙과 순종, 나아가서 성화의 과정이다(fides formata Caritate=갈5:6=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그러면 루터와 칼빈, 하이델벨크요리문답(1562)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648)은 구원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고 있나?

루터의 신앙고백

루터는 어거스틴의 죄론과 은총론을 더 철저히 밀고 나갔다. 루터는 이중적인 하나님의 말씀에(율법과 복음) 비추어, 거룩하시고 심판주되시는 하나님 존전에서 인간의 죄성을 철저히 들여다보는 동시에 복음을 통한 은혜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이신칭의를 주장한다. 루터는 그의 「두 종류의 의」(1519)에서 율법과 십자가에 노출되어 죄인으로 드러난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복음)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의에 의하여 오직 믿음으로 의로워지고, 이 구원론적인 의에 의하여 실제적으로 의로워진다고 주장한다.
전자는 밖으로부터 온 의(alien righteousness)요, 후자는 믿는 자(칭의 받는 자) 자신의 실제적인 의이다. 루터에게 있어서는 로마가톨릭 구원론과는 달리 믿음과 순종, 나아가서 성화의 과정이 구원이 아니라, 복음을 성령의 사역으로 은혜와 믿음으로 받아들여 실제로 의롭지 않으나 '이신칭의' 얻는 것이 구원이다. 「두 종류의 의」에서처럼 구원론적인 이신칭의와 성화 차원의 실제적 의는 구별이 되어야하고 동시에 전자는 후자를 낳는다.

루터는 좋은 나무(이신칭의)에서 좋은 열매가 열린다고 본다. 아욱스부르크 신앙고백(1530)은 다음과 같이 '이신칭의'를 제 4항에서, 은총의 수단인 '교역의 직무'를 제 5항에서, 그리고 성화에 해당하는 '새로운 순종'을 제 6항에서 다루고 있다.

『 이신칭의 :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공로들, 선행들, 만족케 하는 일들에 의해서 하나님 존전에서 죄의 용서와 의(義)를 얻을 수 없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이 그리스도 까닭에 우리에게 사죄함과 의와 영생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믿음으로써 은혜로 하나님 존전에서 사죄함을 받고 의인(義認)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신앙을 의로 여기시는 것이다(롬3:21-26, 4:5).(제4항)
교역의 직무: 하나님께서는 복음 설교와 성례전(세례와 성만찬: 역자 주)을 통한 교역의 직무를 세우시사, 우리에게 이(구원의=이신칭의= 역자 주) 신앙을 베풀어주시다.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은총의 수단들을 통하여 복음을 듣는 사람들 안에 그가 원하시는 때와 장소에서 신앙을 일으키는 성령을 주신다.....(제5항)
새로운 순종: 그와 같은 이신칭의의 신앙은 좋은 열매들과 선행들을 산출해야 하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그 같은 선행들을 행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선행들로써 하나님 존전에서 호의를 따낼 수 있듯이 이 선행들을 신뢰해서는 안되고, 다만 하나님을 위하여 그런 선행들을 행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만 사죄와 칭의를 얻기 때문이다(눅17:10)....(제6항)』

칭의와 성화

칼빈의 구원론 역시 루터의 그것과 동일하나, 율법의 제 3 사용(성화)과 하나님의 주권을 루터보다 더 강조하고 있고, 하이델벨크 요리문답 역시 마찬가지이다. 하이델벨크 요리문답은 그 내용 구조가 세 부분으로 '첫째 인간의 고뇌에 대하여(Von des Menschen Elend), 둘째 인간의 구속에 대하여(Von des Menschen Erlosung), 셋째 감사에 관하여(Von der Dankbarkeit)'로 되어있다. 인간은 하나님과 그의 율법 말씀 앞에서 심히 죄인인데(첫째), 복음을 통하여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둘째), 기쁘고 감사한 마음에서 기도하며 하나님의 계명들을 따라 살아야 한다(셋째)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칭의와 성화가 분명히 구별되면서, 곧바로 이어져 있는 사실을 발견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개신교 주류의 구원론에 있어서 이신칭의와 성화는,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한 위격 안에 두 본성이 서로 혼동되거나(without confusion), 하나가 다른 하나로 변하거나(without change), 다른 두 개의 분리된 범주로 갈라지거나(without separation), 양성의 영역 혹은 기능에 있어서 제각기 활동하지 않으며(without division), 서로 구별은 되지만 서로 혼동되거나 떨어져서는 안 된다.

맺는 말

우리는 이상에서 펠라기우스의 구원론이 AD 431년 에베소공의회에서 정죄되었고, 어거스틴의 구원론이 500년 이전 고대교회의 정통 구원론으로 확립되었으며, 이것이 반펠라기우스주의자들의 구원론에 대응하여 529년 오렌지공의회의 구원론으로 변모하였고, 이것이 중세기를 지나면서 약간 반펠라기우스주의 방향으로 움직였으며, 이것이 트렌트공의회에서 로마가톨릭 구원론으로 확정되었다고 하는 역사적 사실들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루터, 칼빈, 하이델벨크 요리문답 및 웨스트민스터로 대표되는 개신교 주류의 구원론을 살펴보았다.
여기에서 우리는 제 2 바티칸공의회(1962~1965) 이후에도 변화가 없는 로마가톨릭 구원론에 대해서 평가해야 한다. 분명히 펠라기우스는 정죄되었고, 반펠라기우스주의에 대한 대응으로 오렌지공의회의 구원론이 나왔는데, 로마가톨릭 교회는 오렌지공의회의 구원론으로부터 약간 이탈하였다고 보여진다.
물론 1540년대에 루터교와 로마가톨릭교회는 주로 이 구원론 문제로 애석하게도 나뉘어진 서방교회가 되었지만(동방 정통교회의 구원론은 로마가톨릭 구원론과 대동소이하지만), 개신교와 로마가톨릭교회가 모두 복음과 사도신경 및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를 믿고, 말씀 설교와 세례와 성만찬이라고 하는 은혜의 수단을 공유하고있으며,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과 하나님의 백성으로 보는 바, 우리 개신교는 로마가톨릭 구원론을 이단으로 볼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개신교 내에서도, 알미니안주의적 구원론과 경건주의 및 복음주의적 부흥운동 계통의 구원론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저 로마가톨릭적 구원론에 접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끝으로 우리는 구원론에 대한 에큐메니칼 표준으로서 WCC의 신앙과 직제가 제시한 은총, 이신칭의와 성화에 대하여 인용하려고 한다. 아래의 내용은 1937년 에딘버러에서 열린 신앙과 직제 제2차 세계대회의 공식문서에서 온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은혜의 의미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말할 때 우리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그가 행하시는 모든 것은 그의 의로운 목적들을 사랑하고 성취하시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은혜의 의미를 진실로 인식할 수 있다. 그의 은혜는 우리를 창조하셨고 보존하시고 축복하시는 일과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응한 우리의 구속과 거룩하시고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파송 및 사귐과 말씀, 성례의 선물을 통해서 나타난다.

칭의와 성화
값없이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칭의하시고 성화시키신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데, 이 믿음 자체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칭의와 성화는 죄인과 관계를 맺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행동의 불가분리의 두 측면이다.

하나님의 주관과 인간의 반응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자유와의 관계에 관하여 우리 모두는 성경과 기독교적 경험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주권이 최고라고 하는 사실에 동의한다. 우리가 의미하는 주권이란 하나님의 주권적인(all-controlling and all-embracing) 의지와 목적이다. 그리고 이 영원하신 목적이 하나님 자신의 사랑과 거룩한 본성의 표출이다. 이처럼 우리 인간은 우리의 전(全) 구원을 하나님의 은헤로우신 의지에 빚지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인간 자신의 의지는 이 하나님의 은혜를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하고 인간은 이 같은 수용의 결단을 해야 할 책임이 있다.

교회와 은혜
우리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요, 모든 믿는 사람들의 축복된 사람이요, 땅에 있건 하늘에 있건 성도들의 교제라고 하는 사실을 믿는다. 교회란 창조와 구속을 통해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은혜로운 목적들의 실현이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성령을 통해서 계속 매개시키는 기관인데, 이 성령이란 교회 속으로 침투해 들어오신 생명이시오, 끈임없이 교회에 속한 사람들을 거룩하게 하신다.
교회의 기능은 자신의 삶과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모든 사람들을 성령의 사귐과 생명 안에서 세워나가는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말씀 설교와 성례전을 통하여 교회 안에서 그의 지체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성령의 항존 안에서 은혜를 베푸신다.

은혜, 말씀 설교와 성례전
우리는 말씀 설교와 성례전이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교회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고, 주어지는데, 신앙에 의해서 수용된다. 이 은혜는 나뉠 수 없는 하나의 은혜이다.

오직 은혜로(Sola Gratia)
어떤 교회들은 'Sola Gratia'를 강조하고 어떤 교회들은 그것을 피한다. 이 구절은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우리는 구원이 하나님의 선물이요, 그의 은혜의 열매라고 하는 점에서 의견이 일치하다. 그것은 인간의 공로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 가운데 죄인에게 베푸시는 사죄와 성화에 달린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의 행동은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무시하지 않는다. 신앙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할 때 우리의 참 자유가 성취되는 것이다. (월간 <교회와신앙> 1994년 1월호)

8. 종말론에 나타난 이단 사상

이종성
장로회신학대학 조직신학 교수 역임, 기독교학술원 원장

한국교회의 이단문제는 그 심각성이 이미 공지된 사실이다. 그러나 심각성에 비해 대처와 처방이 미흡하고 적절하지 못했다. 이단 문제에 대한 진단과 처방은 다각적인 방법을 통해 분석하고 또한 대처해야 할 시급한 과제이다.
이단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는 교리적인 문제의 접근이 매우 중요하다. 이는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올바른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현재의 이단 사상에 대한 현실 인식을 위해서는 과거에 어떤 교리에, 어떤 이단들이 있었는지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본지는 이단이 발생할 수 있는 전 교리를 고찰, 오늘날의 이단 사상에 대한 올바른 기준을 제시하고자 '기독교 2처년 교리 속에 나타난 이단 사상'을 기획했다.
필자마다의 다소간의 학문적 차이점이 있고, 전문적인 용어 때문에 독자들에게 이해가 어려운 부분이 있더라도 집중해서 읽어 주었으면 하는 바이다. <편집자 주>

먼저 성서적이고 정통적 종말론의 요점을 밝히고자 한다.
첫째 하나님은 그의 창조목적과 인간과의 계약을 성취하기 위하여 세상(역사)에 마지막을 오게 한다. 그것이 모든 존재의 마지막이 된다.
둘째 예수의 재림이 곧 세상의 마지막이 된다.
셋째 예수는 세상의 모든 것의 삶에 대한 최종적 평가를 한다. 그것을 최후심판이라고 부른다.
넷째 예수의 재림의 시기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하나님이 알려주시지 않았다.
다섯째 예수는 직접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모양으로 온다.
여섯째 예수는 승리자로 재림한다.
일곱째 최후심판이 끝나면 모든 사람을 두 종류로 나누어 영원한 구원과 영원한 버림의 세계로 나누어준다.
여덟째 그것으로써 현재의 우주와 세상과 역사는 종결이 된다. 성서가 가르치고 교회가 이때까지 믿어온 종말신앙은 위에서 지적한 것과 같다.

그런데 신자들 가운데 이와 같은, 성서가 가르치는 정통적 신앙과는 다른 종말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나타나서 교인들을 현혹하고 있다. 많은 교인들이 이단적 종말사상에 현혹되어 개인뿐만 아니라 온 가족이 잘못된 신앙을 가진 사람이 부지기수이기 때문에 차제에 이단종말사상을 밝힘으로써 신앙적 피해를 최소화하려고 한다.

종말이 없다는 이단

17세기부터 산업과 과학이 발달됨에 따라 역사에 대한 낙관주의가 강하게 나타났다. 천재인재(天災人災)도 사람의 지혜로 막을 수 있으며, 인간의 행동도 발달된 지식과 상식과 이해심으로 공존을 위해 조절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이신론자(理神論者)들의 주장대로 지상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자연법에 의하여 인류의 공존과 번영을 위하여 얼마든지 이끌어갈 수 있다고 한다. 세상에 종말이 있다면 종말사건으로써 해결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되나 지상에는 인간의 지혜와 힘으로써 해결할 수 없는 것은 별로 없다고 한다. 따라서 예수가 와서 역사의 손을 대어 수술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낙관적 역사관과 강한 인본주의 신봉자들은 세상에는 종말이 없다고 한다.
이러한 생각을 이단적 종말관이라고 하는 이유는 성서가 가르쳐준 것과 같은 역사관을 무시하고 상대적 존재를 절대화하고 인간의 능력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마치 인간이 역사의 주인인 것처럼 오해하고 오도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종말은 있으나 예수가 재림할 필요는 없다고 하는 이단

일반적으로 역사나 세상에는 종말이 있다고 믿는다. 지식인들은 논리적으로나 체험적으로 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풀도 일년초가 있고 일년을 더 산다해도 몇 년 가지 못한다. 동물의 수명이 길다 해도 십수 년에 지나지 않으며 인간은 1백년 안팎이 한계 수명인 것을 알고 있다.
옛날 시인이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 데 없네"라고 읊었으나 의구(依舊)한 그 산천에는 사실은 매순간 퇴화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것에는 종말이 있다고 느낀다.
일반 대중은 지식인들보다 세상에 종말이 있을 것을 일상생활에서 민감하게 느끼고 있다.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최근 한국인이 체험한 공중재난, 지상재난, 해상재난 등을 통하여 매우 불안해하고 있으며, 다음에는 지중 재난이 일어날 것이라고 불안해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교통사고나 화재사고 등으로 하루의 삶의 보장을 받기가 어렵다고 느낀다. 그래서 그들의 입에서는 무심코 말세라는 말이 쉽게 나온다.
그러나 그러한 사건과 예수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하다. 예수는 2천년 전에 유대 나라에서 살다가 십자가 위에서 처형된 사람으로서 역사와는 관계를 끊어버렸는데, 20세기의 오늘에 있어서 우리의 역사와 무슨 관계가 있을 수 있는가 하고 반문한다. 그러므로 세상에 종말은 있을 것이나 예수와는 관계가 없다고 한다.
이러한 사상이 이단적이라는 이유는, 성서에 의하면 모든 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에 의하여 지배되며, 특히 예수 그리스도와 역사와 직접적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마지막 날에 모든 것이 예수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하기(롬11:36, 마28:20) 때문이다.

예수가 직접 오시지 않고 대리인을 보내리라고 하는 이단

일반 평신도나 신학자들 가운데는 예수가 이 세상에 다시 직접 오시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사실 세상에는 환생(還生)을 가르치는 종교가 있다. 인도교와 불교다. 그들은 윤회설을 굳게 믿고 있기 때문에 전생과 현생과 내생이 연결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기 때문에 전생에서 한 행동에 따라 현생에 사람으로나 동물로 환생한다고 한다. 그러나 같은 사람으로 환생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는 여기저기에서 자기가 재림주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간혹 나타나기도 한다. 최근에 미국에서 물의를 일으킨 짐 존스나 코레쉬가 그러한 사람이었다.
한국교회 안에도 심심치않게 그러한 사람이 나타난다. 해방 전에도 있었고 현재도 있다. 통일교 교주는 자기가 예수를 대신하여 세상에 와서 예수가 실패한 그 일, 즉 육체적 구원을 완수하려고 포교한다고 한다.
이러한 생각이 이단적인 이유는 인간은 아무도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거나 대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가 그렇게 위임한 일도 없거니와 이간으로서는 그 일을 감당할 수가 없다. 유한자가 영원자를 대행할 수가 없다. 성경은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마24:5)고 말하고 있다.
또한 그러한 낭설을 믿지 않고 참예수가 오실 것을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24:13)라고 했다. 그리고 예수가 분명히 말씀했다.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요143, 행1:11). 이러한 성서의 가르침을 보아 마지막 날에 예수가 자기 대신에 다른 사람을 대리인으로 보내리라는 생각은 이단적인 생각이다.

예수가 영적으로만 오신다는 이단

많은 사람들은 영과 육은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 양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이원론) 서로 혼합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영은 영으로, 육체는 육체로 따로따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성서에 의하면 예수가 부활했을 때, 육체를 가진 것 같았으나 그것은 사람들(제자들)의 착각이었지 실제로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 하늘에서 영적으로 계시므로 예수가 오실 때에는 육체를 가진 분으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오실 것이라고 한다.
여호와의 증인이란 단체에 속한 사람이 그렇게 가르치고 있으며 프로테스탄트의 시나들 가운데에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성서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부활하신 후의 예수의 존재양태는 영과 육을 동시적으로 완전한 합일체로 존재한다. 그리고 승천하실 때의 그 모습 그대로 오신다고 한다(행1:11).
초림(성육신) 때와 마찬가지로 육체적으로 살고 있는 사람을 구하러 오시기 때문에 재림하실 예수도 육체를 가지고 오실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예수는 영적으로만 오신다는 것은 성서적이 아니며 따라서 이단적인 생각이다.

아무도 모르게 이미 재림했다는 이단

재림을 열심히 기다리다가 지친 사람들이나 자기를 재림예수로 착각한 사람들 중에는 예수가 아무도 모르게 이미 재림했다고 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주로 사이비 기독교 종파를 형성하여 그들의 추종자들을 모아 별개의 집단생활을 하게 된다.
자기가 재림주라고 하거나 재림 예수의 특별한 영을 받았다고 한다. 그들은 추종자들과 함께 집단생활을 하면서 현세를 떠나 독특한 공동체를 구성하면서 현세를 죄악시한다.
그러한 예로서 미국에서 일어난 몰몬교와 여호와의 증인과 크리스천사이언스 등을 들 수 있다. 한국에서 일어난 유사한 운동은 통일교를 들 수 있다. 여호와의 증인에서는 예수가 이미 1914년에 하나님의 우편의 보좌에 앉게 되었는데, 그것이 곧 지상에 있는 우리에게는 그의 둘째 현존(역사 안에서의)이며 재림이다. 그때부터 예수는 지상의 왕으로 군림하게 되었다고 한다.
통일교의 주장은 더 극단적이다. 예수가 세상에 온 초림 목적은 인간의 영과 육의 구원이었으나 그가 십자가 위에서 처형됨으로써 인간의 영적 구원에는 성공했으나 육체적 구원에는 실패했다고 본다. 재림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죽은 예수가 아니라 사람과 똑같은 몸을 갖춘 다른 사람의 몸으로 올 것인데, 이미 일제 때 왔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교회는 이 사실을 모르고 육적 구원 사업을 하고 있는 그 사람을 박해하고 있다. 그리고 원리 강론에서 그가 바로 문선명이라고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통일교의 재림관은 두 가지 점에 있어서 이단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예수의 구원사역을 영적 구원과 육적 구원으로 나누고 예수는 완전한 인류구원을 수행한 것이 아니라 그 중 반만 수행했다고 함으로써 예수의 유일의 구주성을 부인한다.
또 하나의 이단적 요소는 현재 한국인으로서 살고 있는 문선명을 재림주처럼 선전하는 점이다. 이외에도 한국에는 재림주를 자칭하는 사람들이 심심치않게 출현하고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재림의 날짜를 예고할 수 있다고 하는 이단

예수의 재림은 성서 여러 곳에서 언급하고 있으므로 이에 대해서는 의심할 수 없다. 그러나 재림의 날짜에 대해서는 성서는 어느 곳에서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 날짜는 하나님이 아무에게도 알려주지 않았다고 예수가 직접 말하고 있다.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24:36, 행1:7).
바울은 그 날이 도적같이 임한다고 누차 말한다.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살전5:1,2,4). 주의 날이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쉬이 동심(動心)하지 말라고 주의한다(살후2:2).
이와 같이 성서는 주의 재림의 날짜에 대해서는 경솔하게 말하지 말도록 주의시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재림을 인간이 사용하는 시간으로 측정하여 몇 년 몇 월 몇 일 몇 시에 예수가 재림한다고 예고했다가 거짓말쟁이가 된 사람들이 많이 있다.
대표적인 예로 미국교회를 어지럽게 했던 윌리엄 밀러(1782~1849)와 한국의 이장림이다. 밀러는 재림의 날짜를 1843년 3월 21일에서 1844년 3월 20일 사이라고 일차적으로 정했다가 그 동안에 재림사건이 없었으므로 다시 10월 20일까지 연기했다가 실패했다. 이장림은 1992년 10월 28일을 예수의 공중 재림일로 정하고 그날에 휴거가 대대적으로 일어날 것이라고 예고했다가 역시 불발로 끝났다.
이러한 예고는 하나님의 경세섭리(經世攝理)의 심부까지 파헤치려고 하는 행동이기 때문에 교회는 그들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먼저 알 것은 경(經)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것이 아니니라"(벧후1:20)고 경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사로이 예고했다가 실패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감행했다.

재림신앙 때문에 세상일을 포기하는 이단

교회와 신자는 반드시 역사와 사회 안에서 활동해야한다. 아무리 좋은 신앙을 가졌다해도 현 사회를 부인하고 사회 안에서 세상 사람들과 관계를 가지면서 살아가는 문화적 생활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 예수는 이 점을 분명하게 경고하고 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하리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5:13-14).
세상에서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행동의 대상에는 둘이 있는데, 하나님과 이웃이다.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주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요한도 말한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이니라"(요일4:20). 이와 같이 신앙생활은 예수의 재림 날까지 이 세사에서 구체적으로 활동하는 삶을 말하다.
그런데 예수재림의 날짜를 예고하는 사람들은 재림이 임박했으니 세상에서의 모든 육체적 삶의 멍에를 끊어버리고 오로지 찬송과 기도로만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 물론 신앙생활을 원숙하게 하려면 주님만을 생각하고 경건한 생활에 몰두하며 기도에 힘써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가정을 버리고, 이혼하고, 직장을 떠나고, 학교도 다니지 않고, 일체의 사회활동을 단절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생각이다. 사회와 문화를 떠난 신앙생활은 불가능하다.
모든 종교에는 현세의 구체적 생활을 단념하고 일정한 장소에서 세속적인 생활양식을 버리고 영혼의 안식만을 추구하는 제도가 있으나 그것이 정당한 신앙생활은 아니다. 예수님은 그런 생활을 원치 않으셨다. 세상에 나가서 소금이 되고 빛이 되기를 원했다.
그렇다면 예수재림을 기다리면서 사회를 버리고 문화생활을 부인하고 기도에만 힘쓴다는 것은 성서적 종말신앙은 아니다. 성서가 분명하게 가르치는 것은 언제 예수의 재림이 있을지 알 수 없으므로 항상 깨어있는 생활을 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재림신앙 때문에 세상의 일을 전적으로 포기한다는 것은 비성서적인 이단사상이다.
한국교회는 상기한 것과 같은 잘못된 종말신앙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세상이 혼란할 때 그러한 사상이 일어나기 쉽다. 그러나 그러한 이단사상에 현혹되지 말고 예수의 재림이 언제 있을지 모른다해도 항상 깨어 있는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월간 <교회와신앙> 1994년 1월호)

9. 교회역사에 나타난 이단 사상

피영민
침신대 역사신학 교수

한국교회의 이단문제는 그 심각성이 이미 공지된 사실이다. 그러나 심각성에 비해 대처와 처방이 미흡하고 적절하지 못했다. 이단 문제에 대한 진단과 처방은 다각적인 방법을 통해 분석하고 또한 대처해야 할 시급한 과제이다.
이단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는 교리적인 문제의 접근이 매우 중요하다. 이는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올바른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현재의 이단 사상에 대한 현실 인식을 위해서는 과거에 어떤 교리에, 어떤 이단들이 있었는지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본지는 이단이 발생할 수 있는 전 교리를 고찰, 오늘날의 이단 사상에 대한 올바른 기준을 제시하고자 '기독교 2처년 교리 속에 나타난 이단 사상'을 기획했다.
필자마다의 다소간의 학문적 차이점이 있고, 전문적인 용어 때문에 독자들에게 이해가 어려운 부분이 있더라도 집중해서 읽어 주었으면 하는 바이다. <편집자 주>

교회는 예수님의 재림시까지는 영적인 전쟁을 지속해야 할 집단이다. 그런데 교회의 전쟁은 원수를 파괴하고 멸망시키려는 전쟁이 아니라 도리어 원수를 사랑하고 원수를 구원하여 영생을 주려는 이상한 전쟁이다.
그러나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기독교가 자기 진영의 반역자에 대해서는 매우 가혹한 면을 보여왔다. 이방 철학자들과 이방 종교인들에게는 사랑과 연민의 정을 가지고 복음을 전파하던 사도 바울도 다른 복음을 전하는 교회 내의 배반자들을 향해서는 "저주를 받을지어다"라는 표현을 반복하여 사용하였다(갈1:8). 또 유다서에서도 거짓 교사들에 대해서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나무요....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에 돌아갈 유리하는 별"이라는 어두운 비유로 묘사되었다. 사랑의 사도인 요한조차도 이단자는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요이1:10)고 권면했다.
기독교라는 아군 진영 안에 존재하며 아군을 훼파하는 반역자요, 거짓 교사들이 바로 이단들이다. '이단'이라는 영어단어 heresy는 신약성서가 기록된 헬라어 '하이레시스'(hairesis)에서 파생되어 생긴 말이다. 사도행전 5장 17절이나 15장 5절 등에서는 사두개인이나 바리새인같이 어떤 특정한 사상체계를 가진 분파들을 가리킬 때 '하이레시스'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이 없이 중립적인 입장에서 사용된 경우들이었다. 그러나 '하이레시스'라는 단어가 나쁜 의미로 사용된 예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우선 고린도전서 11장 19절에서는 '편당'이라고 번역이 되었는데, 옳다고 인정함을 받을 수 없는 무리들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갈라디아서 5장 20절에서는 '이단'으로 번역되었고 성령의 소욕을 거스리는 육체의 일 가운데 하나로서 소개되었다. 또한 베드로후서 2장 1절에서는 '멸망케 할 이단'이라고 했는데, 거짓 선지자나 거짓 선생들이 가르치는 교리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단에 대한 성서적인 개념은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은 거짓된 교리나 그러한 교리를 가르치는 집단'이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이단'은 '정통'(Orthodoxy)과 대립되는 표현이다. 정통 신앙이 없으면 이단도 존재할 수 없다. 이단이 먼저 존재할 수 없다. 이단이 먼저 존재하고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정통이 나온 것이 아니라,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유1:3)가 먼저 존재했고, 이 도를 묵상하다가 도에서 이탈된 현상이 이단인 것이다.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가 무엇이냐 하는 것도 단순한 질문은 아니다. 로마가톨릭의 정통, 루터교의 정통, 개혁교의 정통 등의 다양한 정통 개념이 존재하는 것은 바로 이 '도'에 대한 해석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 역사에 나타난 이단의 개념은 무엇을 정통으로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밖에 없다. 로마가톨릭을 정통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바티칸 2차 공회(1963~1965) 이전에는 개신교를 이단이라고 불렀다. 개신교도들은 로마가톨릭에 참된 교회의 흔적이 조금 남아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전반적인 교리나 행습이 미신적이고 이단적이라고 생각해 왔다. 개신교 내부에서도 이단 시비는 그치지 않았다. 종교개혁기에도 많은 재세례파는 이단으로 정죄되었으나, 20세기에 이르러 많은 학자들은 재세례파가 지닌 긍정적인 면들을 재평가하기도 했다. 개신교 내의 칼빈주의자들을 알미니안주의자들을 이단으로 정죄하기도 했고 그 반대 현상도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단에 대한 서술은 각자의 신앙 주관에 따라서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고 한 집단의 이단이 다른 집단에서는 정통이 될 수도 있다. 필자는 종교개혁의 신앙노선을 따르는 개신교도의 입장에서 서술해 나갈 것이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보다도 유난히 이단의 출몰이 많았다. 이단에 대한 기독교의 반응은 가혹하다 못해서 잔인하기까지 했다. 말뚝에 박아 불태워 죽이는 일이 빈번했고 군대를 일으켜 집단을 몰살하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현대인들은 이단과 정통간의 피비린내 나는 살육행위를 이해할 수 없는 야만행위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단을 향한 잔인한 반응이 잘못된 한 극단으로 볼 때, 이단에 대해서 무관심한 것도 바람직하지 못한 다른 극단으로 간주할 필요가 있다.
현대인들은 무관심이라도 이단을 경계해야 한다. 한 사람의 육신을 죽인 돌팔이 의사가 있다면 큰 관심을 가지고 경계할 것이다. 그런데 수천 수만의 영혼을 멸망케 하는 이단에 무관심한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가장 좋은 것이 부패하면 가장 나쁜 것이 된다'는 격언이 있다. 참된 진리를 왜곡시키면 무서운 독극물이 된다.
교회 역사에 많은 이단이 존재하는 데에는 하나님의 섭리도 있다고 보아야 한다. 고린도전서 11장 19절에는 "너희 중에 편당(즉 이단)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고 했다. 이단이 교회를 해치는 역기능이 있는 반면에 정통신앙을 예리하게 정립케 하는 긍정적 기능도 있다는 말이다. 이단과의 교리적 논쟁과정에서 정통신학의 핵심 내용들이 보석 같은 결정체로 드러나게 된 것은 역사가 증명하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현대의 성도들도 역사의 이단을 살펴보면서 자신의 신앙을 재확인하고 정립하는 유익이 있을 것이다.

니케아회의 이전의 이단들

네케아 종교회의(325)부터는 그리스도론과 삼위일체론에 관한 여러 가지 이단들이 출현했으나, 니케아회의 이전에는 유대교와 이방 종교들이 기독교와 혼합되면서 이단들을 형성했다. 주로 유대교에 뿌리를 둔 에비온파, 이방 종교적 요소를 많이 포함하여 기독교와 뒤섞인 영지주의, 이방 종교와 기독교가 절반씩 혼합된 말시온주의, 그리고 주로 기독교적 요소가 강하면서 신비적인 이단성을 지닌 몬타누스주의가 대표적인 이단들이었다.

에비온파
유대인으로서 기독교를 받아들인 사람들 가운데는 주후 70년 예루살렘이 로마에 의해 완전히 멸망된 후에도 유대교적 관습을 유지하려는 집단이 있었다. 이들은 나사렛파(Nazarenes)라는 이름으로 4세기까지 시리아 지방에 존속했다.
예수의 신성과 메시야 직분을 인정하면서도 모세의 의식적 율법을 엄격히 지키려 했다. 동족의 불신앙을 애도하면서 미래에 이스라엘이 민족적인 회심과 함께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지상 천년왕국이 올 것을 기대했다. 나사렛파는 이단이라고 하기보다는 유대교적 특성을 강하게 지닌 기독교 분파로 볼 수 있다.
나사렛파와 유사하면서도 이단적인 집단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에비온파였다. 에비온파에 대해서는 교부들의 설명도 구구하고 자료도 미약하다. 에비온파의 창시자는 '에비온'(Ebion)이라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의 이름은 히브리어로 '가난'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에비온은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 펠라(Pella)지방으로 피신하면서 2세기 초에 많은 유대인들을 에비온파로 끌어갔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가난한 분이었고, 사도들도 가난한 사람들이었으므로 자기들도 그리스도와 사도들을 추종하여 가난한 사람들이 되었다고 했다. 산상수훈의 8복 가운데 "심령이 가난한 자"란 바로 자기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간주했다. 주로 요단강 동쪽 지방에 많이 퍼져 있었고 구브로섬이나 심지어는 로마에도 존재했다. 4세기경가지 존속하다가 사라졌다.

에비온파는 대체로 기독교를 유대교의 수준으로 끌어내린 것으로 볼 수 있다. 에비온파에는 크게 두 종류의 무리가 있는데, 하나는 율법적 에비온파이고 다른 하나는 명상적 에비온파이다.
율법적 에비온파는 에비오나 가운데 다수파에 해당되는데, 나음과 같은 특징들을 지니고 있다. 우선 그리스도에 대한 견해가 이단적인데, 예수는 다윗의 자손이요 약속된 메시야이기는 해도 단순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예수의 동정녀 탄생도 부인하여, 예수는 인간 요셉과 마리아가 자연적 출산과정을 거쳐 탄생했으며, 요단강에 침례를 받을 때에 성령이 임했다고 보았다. 할례를 포함한 구약의 의식법을 준수하는 것이 구원에 필수적인 요소라고 주장함으로써 기독론에서도 이단성을 보였다.
이들은 신약성경 가운데서 유대적 요소가 강한 마태복음만을 변형해서 사용했고 바울 서신은 모두 거부했다. 특히 바울을 배교자요, 이단자라고 간주하면서 심한 적대감을 보였다. 종말론에 있어서는 오늘날의 시한부 재림론자들과 흡사하게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을 강조했고, 재림 후에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지상 천년왕국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명상적 에비온파는 주로 엣세네파 사람들이 거주하던 사해 근처에 존재했다. 이들은 그 창시자가 '엘카사이'(Elkasai)라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엘카사이파'라고도 불리운다. '엘카사이'란 말은 원래 어떤 책의 제목이었는데, 그 저자를 그 책의 제목으로 이름을 삼아 부르게 된 것이었다. 그 책은 천사의 계시에 의해서 기록된 것으로 믿어졌으며, '엘카사이파'에서는 중요한 경전으로 간주되었다.
그리스도는 단순한 피조물로 보고 신성을 부인하였다. 그러나 천사들이나 다른 피조물을 주관하는 매우 높은 피조물로 보았다. 성령에 대해서는 기묘하게도 여성으로 간주했다. 할례의식을 침례의식과 함께 구원의 필수 요건으로 간주한다든가 바울을 이단자로 보고 바울서신을 거부하는 점은 율법적 에비온파와 마찬가지이다. 예루살렘을 종교의 중심지로 생각하는 유대 민족주의적 요소도 있다. 재미있는 것은 핍박시에 신앙을 부인하는 것을 정당한 일로 생각했다는 점이다.
'엘카사이'는 후대에 영향을 끼쳐서 많은 문헌들을 산출하게 되었는데, 그 문헌들은 '가짜 클레멘트 저작들'이라는 명칭으로 알려졌다. 클레멘트라는 사람이 로마인으로서 베드로나 사도를 만나서 설교도 듣고 또 마술사 시몬과의 대화도 들어서 그 내용들을 기록해 놓았다는 것이데, 사실이 아니고 꾸며낸 이야기이기 때문에 '가짜'라는 형용사를 붙인 것이다.
그 내용은 허황된 것들이 많이 포함되었다. 아담은 '원 인간'(primal man)으로서 전지하고 무오한 존재인데 일곱 번에 걸쳐서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및 예수의 모습으로 성육신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세를 믿는 것이나 예수를 믿는 것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라고 했다. 내용면으로는 명백한 이단이지만 그 문학양식은 우수하고 매력적인 것이었다.

 

말시온주의
에비온파가 구약적 요소를 지나치게 강조한 이단이었다면, 그 반대로 말시온주의는 구약을 지나치게 배척한 이단이었다. 말시온은 흑해 남단에 있는 작은 마을 '시노피'(Sinope) 출신이었는데, 선박제조업으로 부를 누리던 사람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비두니아지방의 감독이었는데, 아들 말시온의 부도덕한 행위를 보고 아들을 파문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서 말시온은 140년경에 로마로 이주하여 거액의 헌금을 로마 기독교 공동체에 제공하였다. 그러나 로마의 영지주의자였던 '세르도'(Cerdo)라는 사람의 영향으로 로마교회의 가르침과는 다른 교리들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서 그는 로마교회에서 파문당하였고 그가 헌금한 거액은 돌려받았다.


144년경부터는 로마 교회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이단 집단 말시온파의 지도자가 되었다. 150년경에 「변증서」라는 책을 쓴 순교자가 져스틴(Justin Martys)에 따르면 말시온파의 활동이 매우 활발했다고 한다. 이레니우스(Irenaeus)라는 리용의 감독은 150년대와 160년대에 말시온파의 확산이 급속했다고 말했다. 이레니우스에 따르면 서머나교회의 유명한 순교자 감독 폴리캅(Poly carp)이 말시온을 만나서 대화하고는 '사탄의 맏아들'이라고 공박했다고 한다. 말시온은 「반대명제」라는 책을 저술했는데, 그 책 자체는 현존하지 않지만 2세기 말과 3세기 초에 활동한 아프리카의 교부 '터툴리안'(Tertullian)이「말시온에 대항하여」라는 책에서「반대명제」의 내용을 대부분 수록하여 논박하였다.

 

말시온은 후술할 영지주의와 비슷한 사상도 가지고 있었지만 차이점도 많기 때문에 독립적인 이단 집단으로 간주된다.

말시온의 이단사상은 기본적으로 그의 신관에서 비롯된다.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은 도무지 조화될 수 없는 별개의 존재라는 것이다. 이 사상은 '세르도'가 먼저 가르치기 시작한 것인데, 말시온이 더욱 발전시킨 것이었다. 그의 「반대명제」는 구약의 신과 신약의 신이 반대되는 점들을 열거한 것이었다.


구약의 신은 복수와 공의의 신이지만 신약의 신은 사랑의 신이라는 것이다. 구약의 신은 열등한 물질계 창조주로서 전지 전능하지 못하지만, 신약의 신은 전지 전능한 신이라는 것이다. 구약의 신은 유대인의 신이지만 신약의 신은 모든 사람에게 자비로운 신이라는 것이다. 구약의 신은 알려진 신('데미우르게'라는 헬라철학의 신)이지만, 신약의 신은 원래 알려지지 않은 신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신약의 신은 구약의 신에게 얽매인 인간을 해방시키고자 예수로 나타나셨다는 것이다.
예수의 육신은 참된 육신이 아니라 환상적인 육신으로서 육신처럼 보였을 뿐이라고 했다(가현설). 구약의 신은 의인들만 받아주었지만, 예수는 모든 죄인들도 받아주고 심지어는 음부에 내려가서 구약의 신을 반대하는 영혼들을 구원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제 물질계를 벗어난 영혼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왕국을 이루고 있는데, 구약의 신은 다시 나타나서 지상에 천년왕국을 이루고 그리스도의 영적 왕국을 대적한다는 것이다. 말시온은 구약을 모두 거부하고 신약에서도 누가복음과 바울 서신 가운데, 열 개만을 정경으로 보았다. 이 가운데서도 구약의 인용 부분은 삭제해 버렸다. 말시온은 바울을 좋아했고 바울 서신 중 사랑의 신에 대한 구절을 좋아했으며 금욕주의적인 생활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은 바울에 대한 철저한 오해자에 불과했다. 말시온으로 인해서 교회는 신약 27권의 정경화를 추진하게 되었고, 구약의 신과 신약의 신의 관계를 더 깊이 묵상하게 되었다.


(월간 <교회와신앙> 1994년 1월호)

 

출처 : ╋예수가좋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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