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서에서 나타난 성(性) -음행의 주제를 중심으로
최원준 (장신대 신학박사과정/ 신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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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작하는 말
지난 7월5일 금요일 제208차 미국 장로교(PCUSA) 정기 총회에서는 "성적으로 적극적인(active)" 동성연애자들을 교회 직분자로 안수하는 것을 금하는 수정안을 313대 236표, 77표 차로 가결시킨 바 있다. 얼마 전 이 정보를 알려준 필자와 같은 교회를 섬기는 목사님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앞으로 동성 연애자들이 목사님에게 찾아와 결혼 주례를 부탁하게 될 것이며, 그 때에 목회자들은 분명한 대답을 해주어야 한다. 실제로 그 분의 말이 현실로 다가올 시기가 먼 장래는 아닌 것 같다.
동성연애 문제뿐만이 아니다. 요즘 우리 사회의 성윤리 타락의 심각성은 기본적인 인륜조차 팽개쳐진 정도에 이르렀다. 자동차 사고 사망률에서 세계 금메달을 딴 것도 모자라 성폭력 세계 동메달을 따내고야 말았다(91년 인터폴 집계에 따르면 스웨덴, 미국에 이어 우리 나라가 성폭력 세계 3위다). 또한 성윤리 타락의 심각성은 성폭력 희생자 가운데 유아, 어린이가 전체 30%를 차지하고 있으며, 성폭력자는 아버지, 오빠, 친인척 등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 시점에서 성경이 말하는 "성"이 무엇인가를 살펴본다는 것은 목회적으로도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성이라는 주제는 거의 모든 학문 분야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질 만큼 포괄적이고 중요한 주제이기 때문에 짧은 지면에 체계적으로 정리되기는 어렵다. 따라서 필자는 신약성서에 나타난 성의 주제 중에서도 복음서와 바울서신에 나타난 "음행"(포르네이아=πορνε?α)의 문제에 국한하여 성문제를 다루어 보고자 한다.
그러나 음행의 문제를 살펴보기에 앞서 여자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를 간략하게 살펴보겠다. 이것이 비록 "신약성서의 성"과 직접적 관계에 있지 않다고 볼 수 있지만, 성문제에는 남녀가 서로를 어떻게 보는가, 또 그 사회의 구조와 헤게모니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가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고 할 때 언급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여자에 대한 당시 유대 사회의 통념을 완전히 뒤집는 예수님의 여자에 대한 태도를 통해서 성폭력이 일어나는 가장 중요한 이유인 여성을 성적 노리개 감으로 보는 왜곡된 남성들의 시각을 교정 받을 수 있을 것이다.
2. 여자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
예수님 당시 유대 남자들은 여성을 하나의 성적 노리개요, 하나의 재산 목록 정도로 여겼다. 가부장적 유대 사회에서 여자는 종이나 어린아이들처럼 종속적, 열등적 존재로 취급되었고, 심각하게 자유를 제한 받았다. 또 종교적 정결법의 관점에서 볼 때 여자는 부정한 사람이었다. 심지어 남편이 아내와 이혼할 수 있는 사유 가운데, 밥을 태우는 것이 있었고, 남편이 자기 아내보다 매력적인 여자를 발견하면 이혼을 요청할 수 있었다.
이러한 유대 남자들의 태도와는 달리 예수님께서 여자들을 인격적 존재로 대하였다.
먼저 예수님은 여자들을 치유해 주셨다. 특별히 종교적으로 부정한 여자,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고 손가락질 당하던 혈루증을 앓던 여인을 고쳐 주셨다. 또 18년 동안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여인을 고쳐 주시고 그녀를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불러 주셨다(눅 13:11-16). 요한복음 4장에 따르면 예수는 남편이 다섯이나 되는, 곧 창녀와도 같은 여자인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나누었고, 영원히 마르지 않는 물로, 곧 구원으로 초청하였다.
둘째, 여인들을 믿음의 예로서 드셨다. 눅 7:36-47에 나오는 향유를 부은 죄인인 한 여자, 수로보니게 여인(막 7:24-30), 두 렙돈을 헌금한 과부(막 12:41-44) 등이 있다.
셋째, 사복음서 모두 예수를 따른 여인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들은 갈릴리에서부터 예루살렘까지(막 15:41; cf. 마 20:20), 예수의 십자가 처형 장소까지 따라갔다. 외출할 경우 반드시 면사포를 써야 했고, 밖에서 남자와 이야기할 경우 혼인 계약서에 약속된 돈도 받지 못하고 쫓겨나야 했던 당시 상황을 고려한다면 여인들이 예수를 따랐고, 예수가 이것을 허용했다는 사실은 유례없는 일이었다. 특히 눅 8:1-3에 따르면 누가는 예수를 따른 여인들을 12제자와 함께 언급하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예수의 여인에 대한 태도는 당시 여인의 사회적 지위와 편견에 비추어 볼 때 가히 충격적인 것으로서 장차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인간적 편견과 불평등이 제거된 곳이요, 하나님의 창조 질서가 회복된 곳임을 그의 삶으로 보여준 것이라고 하겠다.
또 예수의 여인에 대한 극단한 긍정과 수용은 그의 결혼 및 이혼에 대한 태도에서 가장 잘 나타나 있다.
막 10:2-12에서 예수님은 유대 남자들에게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를 선언하신다:하나님께서는 창조 때부터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여자도 남자처럼 동등한 하나님의 창작품이다. 이 둘이 때가 되면 부모를 떠나 한 몸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부부의 인연을 이기적일 대로 이기적인 남자들의 욕심 때문에 이혼을 강요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죄악이라고 선포하고 계신 것이다.
3. 복음서와 바울서신에 나타난 음행의 주제
음행이란 말의 헬라어는 "포르네이아"(πορνε?α)로서 신약에서 26회 사용되고 있다. 동사형 등 그 파생어까지 합하면 모두 55회 사용되고 있는데, 이 중에서 바울서신에 21회(고린도전후서에만 15회), 계시록에서 19회 사용되고 있다. 이 통계만을 볼 때 음행의 주제는 바울 서신과 계시록에서 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 또 주로 고린도 교회를 중심으로 이방 헬라 사회 내에서 음행의 문제가 심각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원래 음행이란 "모든 종류의 불법적 성관계"(예:혼외정사, 비정상적인=unnatural 성행위 등)를 뜻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음행을 단지 육체적인 죄로만 규정하지 않으셨다.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성적으로 방종한 생각까지도 음행이라고 부르셨으며(마 5:28), 이러한 음란한 생각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마 15:18f.)이라고 말씀하셨다. 당시 유대교에서는 육체적 정결함이 구원과 직결되어 있는 중요한 문제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예수님의 말씀은 마음까지도 정결할 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주장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한쪽 눈이나 손을 잃어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음란한 생각을 버려야(마 5:29f.)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음행이 구원과 직결된다는 생각은 바울에게서 더욱 강력하게 나타나고 있다:"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π?ρνο?)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엡 5:5);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π?ρνοι)나 우상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 6:9-10).
우리는 이상의 구절에서 음행의 문제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것과 직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두 본문 모두 음행하는 자와 우상 숭배자가 나란히 열거되고 있다는 것 역시 음행의 죄가 단지 윤리의 문제를 넘어서 신앙의 문제로서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보여준다(cf. 고전 5:10f.).
또 바울은 음행과 우상숭배의 죄를 병치시킬 뿐만 아니라 더러움과도 병치시키고 있다. 바울은 갈 5:19- 26에서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를 대조하고 있는데, 그가 육체의 일의 구체적인 사례로서 첫째로 제시하는 것이 바로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이었다. 그 다음에 "우상숭배"의 죄를 열거하고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불러서는 안 될 것이었다. 그것이 "성도의 마땅한 바"(엡 5:3)다. 예수님이 정결의 문제를 마음속의 음란한 생각 제거와 결부시킨 것과 상통한다.
바울이 이처럼 음행의 문제에 대해 할 수 있는 최대의 톤(tone)으로 말하고 있는 이유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는 것"(고전 6:18)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몸"이란 그 사람 자체, 통전적 자아를 뜻한다. 바울이 여기서 몸이란 말로 "소마"(σ?μα)를 사용한 것도 이 사실을 보여준다. 사실 가만히 생각하면 어떤 죄가 자신의 전인격과 관련되지 않은 것이 있겠는가? 거짓말이나 도적질 역시 그것을 행하는 자의 통전적 자아와 관련된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이 6:18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음행의 죄의 심각성을 부각시키기 위함일 것이다. 또 당시 고린도 교회의 성윤리의 문란이 그들의 잘못 이해된 종말론(이미 이 땅에서 구원이 완성되었다고 봄)과 영지주의 사상 때문에 비롯된 것임을 바울이 알고서 바른 "몸의 신학"을 주장하는 것이다.
몸의 신학이란 통전적 구원관이다. 영혼만의 구원이 아니라 통전적 자아로서의 구원이다. 구원받은 자의 몸은, 즉 구원받은 자 자신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고전 6:19)이요 "그리스도의 지체"(6:15)이다.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20절)이기에 그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19c-20절). 구원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은"(고전 6:11) 사람들이다.
바울이 음행을 그토록 열정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음행이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을 무효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리스의 이름과 성령 안에서 죄인들의 죄를 씻기고 의롭게 하신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훼손시키기 때문이다.
또한 음행은 믿는 이들을 거룩케 하려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에 위배된다:"하나님의 뜻은…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고…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다"(살전 4:3-7). 성적 방종함이 통용되고, 이방 신전이 수두룩한 당시 헬라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신자들에게 음행이야말로 그들의 거룩함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성적인 방종에 있어서 당시 헬라 사회에 결코 뒤질 것 없는 오늘의 사회를 살아가는 믿는 이들에게도 음행과 거룩케 됨은 타협될 수 없는 양자택일의 사항이다.
또 음행의 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한 죄의 세력으로의 회귀를 뜻한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자는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롬 6:11)로 여겨야 한다. 그러므로 "죄로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려야"(롬 6:12f.) 한다.
나아가 몸의 신학은 교회론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교인들은 그리스도의 지체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비유한 것은 그리스도와 교회간의 연합과 일치의 신비스러움을 나타낸다. 고전 6:16에서 바울이 〈창기와 합한 자=창기와 한 몸 vs. 그리스도와 합한 자=그리스도와 한 몸〉의 도식을 사용하여 음행을 비판하면서, 17절에서 그리스도와 신자와의 일치가 영적인 것이라고 말한다("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이 말의 뜻은 먼저 그리스도와 신자와의 연합은 상호간의 사랑, 존중, 보호를 의미하며, 또 신자가 성령의 지배하에 있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구절은 이같은 영적인 의미를 넘어서 부부가 서로 한 "몸"이 되듯이 서로 한 몸이 된다는 신비스러움(μυστ?ριον)을 말하는 것까지 내포한다(공동체적인 차원에서는 교회와 그리스도간의 신비스러운 일치를 말한다). 우리는 6:16에서 남녀가 한 몸이 됨을 말하고 있는 창 2:24이 인용되고 있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 이런 맥락에서 음행은 교인과 그리스도간의, 교회와 그리스도간의 신비스러운 하나 됨을 깨뜨리는 큰 죄악인 것이다. 영성을 "하나님과의 하나됨"(union with God)이라고 정의할 때 음행은 기독인의 영성에도 가장 큰 적인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고전 5:1-8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아버지의 첩과 통간한 교인에 대해 통한히 여기지 않고 또 그를 내쫓지 않은 것에 대해서 신랄하게 꾸중하고 있다. 그를 내쫓지 않은 것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도록 방치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음행하는 자에 대한 준엄한 심판을 명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순결함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바울은 교회가 유월절을 지키되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5:8)으로 지켜야 한다고 역설한다. 바울은 진정 자기가 개척한 모든 교회를 정결한 신부처럼 만들어 재림하신 주님 앞에 세우고 싶었던 것이다.
4. 끝맺는 말
우리는 예수님의 여자에 대한 태도를 통해 남녀간의 상호 인식이 하나님의 창조 섭리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남녀 윤리에 기초해야 함을 알 수 있었다.
또 음행에 대한 복음서와 바울 서신의 진술들을 통해 믿는 이의 정결함, 구원과 성화,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신비스러운 일치에 음행이 결정적 죄악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오늘날의 타락한 성윤리의 회복은, 적어도 믿는 이들의 경우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바로 깨닫고, 또 자신이 어떤 몸으로 주님께 나아가야 할 것인가를 심각하게 결단할 때 시작될 것이며, 이 입장을 단호히 견지해 나갈 때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필자에게 남는 고민은 동성연애의 경우 "태어날 때부터, 즉 본능적으로" 동성애를 가진다는 사실이다. 이들을 일종의 "선천적 장애인"으로 볼 수 있다면 이들에 대한 시각과 접근은 새로운 것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다. 동성연애를 포함한 음행에 대한 단호한 엄격주의와 동성 연애자들을 선천성 장애인으로 보아야 한다는 시각의 대립은 앞으로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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