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학

[스크랩] 변화하는 시대의 평신도 사역

수호천사1 2011. 4. 15. 18:36

변화하는 시대의 평신도 사역

강의/하용조 목사(온누리교회)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시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

 

저는 늘 이 말씀을 붙들고 목회를 합니다. 또 개인적으로는 제가 어렸을 때부터 저의 아버님께 이 말씀으로 양육을 받았습니다.“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롬 12:1).‘마음을 드리라’하지 않고 ‘몸을 드리라’고 했습니다.

 

예배는 몸을 드리는 것입니다.

참된 예배는 몸입니다. 마음으로야 안 되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참된 예배는 우리의 몸을 드리는 것이고, 우리 삶을 드리는 것이고, 우리의 시간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몸을 드릴 때 하나님께 드리는 참된 예배가 시작되는 것입니다.우리가 여기서 한 번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참된 예배에 대해서입니다.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릴 때 참된 예배가 됩니다.제사 또는 예배라는 것은 제물이 있어야지 제물이 없으면 예배가 아닙니다. 제물이 있어야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제물은 우리 몸입니다.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생각하시는 산 제물로 드릴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영적 예배라는 것입니다. 예배의 진정한 회복은 곧 교회의 회복입니다. 그것이 우리 신앙의 회복이고 부흥의 비결입니다.그러면 무엇이 부흥이고 무엇이 회복입니까? 부흥은 예배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공동체적으로, 민족적으로 예배가 회복되어야 합니다.2절에서 중요한 것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주제를 가지고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변화되는 21세기 21세기를 불과 몇 년 앞두고 있는 우리는 급변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농촌이 우루과이라운드를 맞이한 것처럼 우리의 교회도 우루과이라운드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괜찮은 줄로 알고 있습니다.사실 우리는 굉장희 중요한 역사의 전환점에 와있습니다. 2000년이라는 것은 한 시대의 단순한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심각하고 광범위한 역사적 변화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1999년에서 1년을 더하면 2000년이 된다든지 1900년에서 1000년을 더하면 2000년이 된다는 그런 수학적 의미가 아니라 2000년대는 심각하고도 광범위한 영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어야만 우리의 목회가 비전이 있고 분명한 방향을 설정할 수 있습니다.

 

이 세대는 결국은 없어집니다. 변화되는 것입니다.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이 세대 안에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대를 벗어나서는 살 길이 없습니다. 목회 현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만국이 목회의 현주소이기 때문에 여기서부터 광범위한 변화를 예고하는 2000년대, 어떻게 보면 A.D.와 B,C.로 나누는 것과 같은 획기적인 변화의 시대입니다.

 

예수께서 탄생하신 것을 기점으로 하여 역사의 B.C.와 A.D.가 갈라졌듯이 2000년대라는 것은, 역사적으로 획기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목회적인 발상을 한다든지 영적인 도전을 할 때도 이것과 맞물려서 비전과 계획을 세우고, 기도제목을 세워 목회를 해나가야만 당황하지 않게 됩니다. 아무리 세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은 복음입니다. 목회의 비밀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인간적으로 아무리 여러 가지 많은 방법이 있다고 하더라도 비결은 오직 하나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말씀의 역사와 기도보다 더 중요한 목회 전략은 없습니다.

 

2. 교회의 본질과 목회철학(1)

목회철학제가 온누리교회를 목회하는 데는 기본적으로 몇 가지 단계가 있었습니다.

첫째, 말씀사역입니다.처음에는 선교적인 비전과 틀을 가지고 시작했지만 훈련과 목회의 성립과정은 말씀 사역이었습니다. 우리는 열두 가정으로 시작할 때부터 철저하게 말씀훈련을 실시해 왔습니다.저는 영구에서 돌아와서 열두 명을 택하고 난 뒤 아무도 못 오게 문을 닫고 훈련시켰습니다.

 

주일인 경우 아침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점심을 먹으면서 TV 보는 것도 전부 포기하고 훈련시켰습니다. 3개월 후 문을 한 번 열었습니다. 이십사 명의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또 문을 닫았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신 방법으로 철저하게 훈련시켰습니다. 적당히 믿으려고 하는 사람은 다 뺐습니다. 저의 훈련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만 받아들였습니다. 6개월 후 또 한번 문을 열었습니다. 사십 명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일 년 후 정식으로 교회 문을 열었을 때는 팔십여 명이 되었습니다. 이 때가 1985년 10월입니다.그때부터 계획해둔 말씀훈련, 기도훈련의 프로그램으로 교회를 양육하니까 제가 생각하고 기대하지 않았던 광범위한 성장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말씀훈련과 제자훈련 사역을 열심히 하면 굉장한 변화와 역사가 일어나는데 문제는 날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비상을 해야 되는데 비상을 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많고 아는 것은 많은데 날지 않는 것입니다. 그때가 제 안식년이었습니다. 제가 안식년으로 일 년 간 밖에 나가 있으면서 이 문제로 굉장히 고민했습니다.

 

무엇인가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루어지는 것이 없었습니다. 현금이 있는데도 안 됩니다. 사람도 있는데 안 됩니다. 훈련을 받아도 안 됩니다. 도대체 날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고민을 아주 많이 했습니다. 교인들은 눈치채지 못하였지만 목회자인 저는 압니다. 비행기도 일정한 시간이 되면 날아야 됩니다. 일정한 시간에 날지 못하면 그게 무슨 비행기입니까? 거대한 자동차일 뿐입니다. 비행기는 날아야 됩니다. 교회는 독수리처럼 날아야 됩니다. 창공을 향해서 날개를 펴고 비상해야 합니다. 이것이 목회입니다. 도시의 뒷골목을 돌아다니는 것은 목회가 아닙니다. 안식년 동안 하나님께서 목회의 새로운 시야를 열어 주셨습니다.

 

둘째, 성령목회입니다.

저는 성령의 역사와 사역을 대담하게 받아들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저를 오해할 정도로 대담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성령사역이 불붙자 날기 시작하였습니다. 저도 놀라고 우리 교인들도 놀랐습니다.저는 돌아와서 안수 집사만 남겨 놓고 서리집사를 다 없앴습니다. 왜냐 하면 우리 한국 교회는 직분이 문제입니다. 직분이 교회 성장에 공헌을 하긴 했지만 교인의 신앙수준을 낮추어 놓았습니다. 장로제도가 한국 교회의 성장에 기여했으나 한편으로 성장을 막고 성숙을 막는 제도가 되고 말았습니다.성령사역이 시작되고 나니 저희 교회에 청년들이 구름 때같이 몰려 들었습니다.

 

그들이 왜 오는 것인지, 어디서 오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은 삼십 대 전후반의 사람들이 이천 명이나 됩니다.제가 그들과 만나면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비전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비전이 그 교회에 가면 있다. 그 목회자에게는 있다.’ 이런 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아무리 가봐도 비전이 안 보이면 사람들은 그 교회에 머물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성령목회를 대담하게 도입해 보니 교회는 날기 시작하였으나 또 다른 문제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교회가 커져도, 날아도 문제가 자꾸 발생하여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셋째, 기도목회입니다.

무릎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도를 드리자 마음이 안심되는 것입니다. 문제가 발생해도 안심이 되고, 아무 문제가 없어도 안심이 됩니다. 그래서 저는 제 개인적인 라이프 스타일을 다 바꿨습니다. 저녁 8시 반이면 자고 새벽 3시 반이면 일어납니다. 저를 만나고 싶은 사람은 새벽에 오라고 합니다. 강해도 새벽에 합니다. 이것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바로 기도목회입니다.여러분, 기도를 계속해야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기도목회가 목회의 핵심입니다. 결국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기도요, 성령의 역사입니다.

 

넷째, 거룩한 삶입니다.

우리가 지상에서 살면서 추구해야 할 목표는 거룩한 삶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능력과 은혜를 받아서 어쩌자는 것입니까? 결국 거룩한 삶을 살자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인 교제와 영성의 깊은 침묵 속으로 들어가면 자유함이 있습니다. 물질이 있거나 없거나, 이 땅에서 성공하거나 실패하거나, 건강하거나 병들었거나 어떠한 상황이든지 모두 괜찮습니다. 목회의 성공이란 것도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우리의 삶이 거룩해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얼마나 능력 있는 삶이냐가 아니라 얼마나 거룩한 삶인가가 중요합니다. 우리의 목회가 얼마나 능력이 많고 많은 영적인 능력을 미쳤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여러분과 제가 어떠한 상황에 있든지 영적으로 기뻐하고 만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우리가 이 곳에 온 것은 무엇인가 더 얻고 배우고 목회의 성공 비법과 교회 성장의 방법을 전수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정말 하나님의 비전이 무엇이가를 깨달아야 합니다.그래서 내가 왜 목회에 성공해야 하는가, 목회 성공이 나의 야망인가 아니면 하나님 홀로 영광받으시기 위해서인가, 내가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것이 한 영혼의 구원 때문인가 아니면 다른 만족감 때문인가, 교인을 성공의 수단으로 보는가 아니면 정말로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어린 양으로 보는가, 양들이 변하고 새로어지는 데 목회의 의미를 두는가 아니면 다른 무엇이 있는가 등등 이제는 진지하게 자기 자신을 정리해 보아야 합니다.데니스 레인 목사님과 함께 미국의 강해설교 세미나에 간 적이 있는데 그가 한 설교 중에 우리가 왜 강해설교 세미나에 왔는지 그 동기부터 생각해 보자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복음인 말씀을 한 영혼, 한 영혼에게 잘 전하고 싶은 뜨거운 열망에서 왔는지 아니면 무조건 설교를 잘 하고 싶은 욕망에서 왔는지 동기를 다시 한 번 가다듬어 보자는 것입니다.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헤쳐 나가야 할 목회 주변의 여러 가지 상황들을 한번 더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웬만큼 괜찮은 집이 하나 있습니다. 그 집 방안의 구조를 바꿔 보고 벽을 터 보고, 마루를 새로 깔아도 그게 그것입니다. 집주인이 굉장히 멋있는 집을 만들고 싶어도 현재의 집으로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 집을 아무리 뜯어 고치고 좋은 재료로 바꾸어도 그 집의 골격(구조)은 변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됩니까? 물론 허물고 다시 지어야 됩니다.

 

5층을 짓는 건설업자와 20층이나 60층을 짓는 건설업자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5층은 웬만한 건축업자라면 다 짓습니다. 그러나 20층 이상의 고층건물을 지으려면 고도의 설계도가 필요하고 전문기술이 필요합니다. 엘리베이터도 20층 건물과 60층 건물은 선이 다릅니다. 이음새 없이 만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우리의 목회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말해 5층짜리 건물입니다. 거기엔 엘리베이터를 둘 필요 없이 그냥 살아도 됩니다. 고도로 전문화된 기술 없이도 얼마든지 5층 정도는 짓고 살 수 있습니다.그러나 여러분이 아주 멋있고 최첨단의 정보능력을 소유한 빌딩을 짓고자 한다면 사고의 전환을 해야 합니다.

 

생각의 발상을 달리 해야합니다.

생각의 발상을 달리 해야합니다. 이것이 바로 패러다임 쉬프트입니다.속도라는 개념이 지금은 근본적으로 달라지고 있습니다. 몇 년 전의 속도의 개념과 최근의 속도의 개념은 우리의 과학적 변화 뿐만 아니라 우리 사고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옛날에는 장기 선교(Long-term missionary) 전략이 중요했지만 요즈음 선교는 단기선교(Short-term missionary) 전략이 중요합니다. 옛날에는 목사, 선교사가 필요했지만 지금은 전문인 선교사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전부 속도 개념의 차이에서 오는 것입니다.선교 현장이나 선교 방법론에 근본적인 전환이 없다면 그때에 선교사업은 사양길로 접어들고 말 것입니다. 과거에는 고전적인 선교단체의 선교방법이 먹혀들어 갔습니다. 그러나 지금 세대나 앞으로 21세기에 자라나게 될 신세대들의 사고구조의 틀 속에서는 과거의 방법이 맞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아무리 이야기를 해보아야 ‘가는 세대’ 아닙니까? 이제는 눈을 돌려 신세대의 관심을 이끌어야 하는데 이들에게 이데올로기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북한선교에 대해 요사이 관심이 많은데 어차피 북한에는 가게 되어있습니다. 빠르냐 늦느냐 하는 시간의 문제일 뿐입니다.

 

지금 동구권이 변하는 것을 보십시오.

중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런 변화는 세계에 대하여 정확한 영적인 통찰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중국의 개방과 내가 살고 있는 농촌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은 아무 연관이 없을지 모르지만 곧 변화의 시대, 정보의 시대가 옵니다. 바로 5년 전과 지금의 컴퓨터에 대한 개념을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5년 전만 해도 컴퓨터는 666이라고 해서 쓰면 안 된다느니, ○○마크라고 하며 기피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컴퓨터 없는 집이 없을 정도입니다. 컴퓨터를 모르면 대화가 안 될 정도입니다. 책도 마찬가지입니다. 저희 두란노 서원에서 CD롬을 만들기 시작하였습니다. CD 한 장에 찬송가 600곡, 복음성가 900곡 모두 1,500곡이 들어갑니다. 그리고 4,500커트의 사진이 들어갑니다. 그 모든 것이 한 장이면 다 입력됩니다. 아직은 대중화가 되지 않았지만 몇 년 안에 대중화 될 것이 분명합니다. 요즘 지구촌은 세계화라는 말을 많이 쓰고 있는데 유행이라서가 아니라 우리의 현실에서도 이 문제를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2) 목회 방법변하지 않는 복음을 위하여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 말씀과 성령의 역사를 추구하고, 무릎 꿇어 기도하는 것 이상 더 나은 목회방법이 없습니다. 그것은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가지고 앞으로 주님 오실 때까지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그러나 우리가 5층 건물이 아닌 20층 이상의 빌딩을 짓는 것처럼 멋진 목회를 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일들을 해야 하기에 몇 가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별로 중요한 이야기는 아닐지라도 한 번쯤은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이므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먼저 목회의 틀을 바꾸셔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5층 구조라는 개념을 가지고는 여러분이 계획하시는 그런 일들이 맞지 않는 것입니다. 부분적인 수정을 통해 되는 것이 아니라 전반적인 재구성이 필요합니다.

 

저는 이것을 ‘전통적인 모델’과 ‘선교적인 모델’이라고 부릅니다.우리가 지금까지 해왔던 목회구조는 전통적인 목회구조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전통적인 목회구조의 모델은 마치 권위적인 모습의 5?6공화국과 같습니다. 그 시대는 교회가 권위적이라서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누가 비판하거나 따지는 사람이 없습니다.그러나 이제 사회는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자주시대로 틀이 달라지고 있는데 교회 구조는 여전히 그대로입니다. 오히려 교회는 시대를 거꾸로 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1990년대를 살고 있지만 우리의 생각은 2천년대에 가 있어 21세기를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제가 처음으로 두란노 서원을 창설했던 1980년에 제자 훈련을 시작했습니다.

한 10년 하고 나서는 강해설교를 열심히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제는 대부분의 모든 교회가 성경공부, 제자훈련을 다 실시합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2천년대에 쓸 프로그램을 준비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도 3~4년 이내에 모든 교회가 따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역할은 끝났으니까 또 다른 프로그램을 개발할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세상보다 앞질러서 준비를 하고 있어야 됩니다. 길목을 잘 잡고 그물을 치고 준비하고 있으면 고기가 몰려오게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런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생각의 틀을 자꾸 바꿔야 합니다.그러면 전통적인 틀에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먼저 교파와 교단 중심의 목회를 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목회자에게 있어서 교파와 교단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교파와 교단을 너무 강조하게 되면 다른 교파 목사님은 우리 강단에 안 모시고 다른 교파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낮게 평가를 합니다. 이것이 전통적인 모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총회, 노회 언제나 이런 것을 중심으로 이야기해 왔습니다.

 

따라서 총회, 노회는 참 좋은 곳이지만 번지상 정치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결과 교회는 정치적일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런 구조 속에서 교회가 움직여 왔습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겪어 왔던 목회의 틀입니다.교파와 교단을 강조하게 되면 자동적으로 강조하게 되는 것이 교리입니다. 그래서 교단 특유의 신학교를 만들게 됩니다. 왜냐 하면 교단성을 강조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순복음은 순복음의 교리를 강조하고, 침례교는 침례를 해야 되고, 장로교는 장로교의 교리를 강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교리로 말미암아 교단이 생겼기 때문에 교리 중심이 됩니다. 교리 중심이 되면 도그마화할 수밖에 없습니다. 도그마화하면 다이나믹한 영적 능력이 나타나는 삶이 강조되지 못합니다.

 

세 번째로는 그 교파, 그 교리, 그 목사입니다.

그래서 목회자 중심의 목회를 하는 것입니다. 목사가 왕이고, 제사장이고, 예언자이고 교인들은 종입니다.교인은 목사가 가는 방향에 따라 수행역할을 하는 것,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런 구조는 소위 중앙집권식으로 한 목사에 의한 권위주의 목회를 전개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 말로 하면 독재이고 좋은 말로 하면 권위 있는 목회인데 그것은 큰 교회나 작은 교회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구조 아래서는 장로와 목사가 계속 싸우게 됩니다. 피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 목회 에너지의 90%의 낭비는 당회에 있습니다.

 

교인들은 별문제가 없습니다. 원로목사와 담임목사와의 관계, 장로와 목사와의 관계, 언제나 이 두 가지가 문제입니다. 여기에 우리 목회는 말할 수 없는 낭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비생산적인 것은 목회구조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목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전통적인 방법을 존중합니다. 그래서 구보 하나 마음대로 바꾸지 못합니다. 예배순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선배들이 쭉 그렇게 해왔기 때문에 “의논해 봅시다.”라고 하면 그만입니다.젊은 여자라야 아이를 낳을 수 있듯이 교회도 젊은 교회가 생산을 합니다. 교회의 생각과 틀이 젊지 않으면 성장이 안 됩니다.

 

교회에 60세 넘은 분들이 많이 있는 것은 상관 없지만 생각이 젊어야 교회가 성장합니다. 젊은 사람은 모험을 하니까 실수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산전수전 다 겪다 보니 실수도 안 하고 안정만 바라게 되는 것입니다.여러분, 교회가 창립된 지 20년 이상 된 교회치고 제대로 성장하는 교회가 있나 보십시오. 교회 100년 역사, 교회 90년 역사 등 두껍게 책은 만들지만 현실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빈 껍데기만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오래 된 교회를 비판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생리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누가 감히 전통을 무시하겠습니까?

 

제가 얼마 전에 영국에 가서 데니스 레인 목사님 집에서 하룻밤 묵게 되었습니다. 우리 부부를 데리고 그분이 초등학교 때 다니던 교회, 결혼 전에 다니던 교회를 구경시켜 주었는데 교회가 거의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분 이야기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 없이 똑같다는 것입니다. 그 집이 그 집이래요. 영국 대부분의 교회들이 마치 박물관 같습니다. 적어도 백 년, 이백 년의 역사와 전통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중충한 곳에 s가 갑니까? “바꾸시지요.”라고 말씀드렸더니 역사학자들 때문에 절대 못 바꾼다고 합니다.

 

제가 이번에 프랑스에 가서 집회를 인도할 때 약 삼백 명 정도 모이는 우리 장로교회가 있는데 프랑스 교회를 빌려 쓰고 있었습니다. 프랑스 교회는 목사님 부부를 포함해서 교인이 전부 열 명뿐이었습니다. 좋은 자리에 교회가 있으니까 한국 교회에 빌려 주고 월세를 받습니다.이야기를 들어 보니까 교인도 적고 해서 건물을 무너뜨리고 아파트 짓고 다른 용도로 사용하려 해도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오히려 헐지 말라고 말린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이것이 전통입니다.어떤 의미에서는 교회가 생긴 지 20년이 넘으면 흩어야 됩니다. 흩으면 새 일을 합니다. 전통으로 남으면 저농 지키기에 바쁩니다. 전통은 교리를 만듭니다. 또 전통은 교파를 만듭니다. 왜 그렇습니까? 존재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설교자라는 것은 계승이 안 됩니다. 그 시대의 그 설교자는 그것으로 끝입니다. 위대한 설교자 밑에 10년, 20년 있었다고 해서 설교를 닮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의 역사, 복음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그 시대, 그 사람에게만 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만든 인위적인 전통이 세상을 변화시키리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착각입니다. 교회 건물도 다음 세대를 위해 너무 좋게 지을 필요가 없습니다. 다음 세대를 위하여는 오히려 선교사로 나가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는 예배당, 수양관, 공동묘지 등 여러 가지를 세우고 만들지만 이상하게도 예수님이나 사도바울은 선교센터는 전혀 만들지 않았습니다.저희 교회도 교육관 만드는데 아주 갈등이 많습니다. 이걸 지어야 되나, 안 지어야 되나, 기초공사를 위해 땅을 파면서도 고민입니다. 바울은 그런 것을 하지 않습니다.우리 선교사들이 나가서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먼저 땅을 파고 교회부터 짓습니다. 그 다음에는 무슨 센터를 만들려고 합니다.

 

목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다 짓고 나면 쫓겨나든지 진이 다 빠지든지 합니다. 저는 교회 지어 놓고 거기서 사는 사람 그리 많이 못 봤습니다. 집 짓는 은사가 있으면 열심히 지어도 괜찮지만 교회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느냐, 우리 목회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느냐 하는 기본적인 생각을 한번쯤은 해 보아야 합니다.그러면 선교적인 모델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교파와 교단 안에 있고 존경을 하면서도 방향이 선교적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복음을 전할 수 있다면 어느 교단의 누구라도 만날 수 있습니다. 어느 교단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복음을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교단이 다를지라도 신앙이 같으면 만나는 것입니다.교회의 궁극적인 지향은 바로 주님의 지상 명령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마지막 명령은 두 가지입니다.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것과 성령세례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즉 선교와 성령세례입니다. 비록 교회 건물은 없을지라도 내가 어떤 사람에게 주의 복음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양육했다면 그것으로 된 것입니다.저는 우리 교단 안에서 종종 하는 이야기입니다만, 저는 그리스도의 사람을 만드는 데 관심을 두지, 교단의 사람을 만드는 데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교인이 미국 갔을 때 꼭 우리 교단의 교회에 가라고 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 교회가 어느 교단 소속이냐보다는 어떤 메시지를 전하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정말 성경을 가르치는가, 성령의 역사가 있는가, 기도하는 교회인가, 선교의 꿈을 가지고 있는가, 목사 혼자 독재하는 교회인가 아니면 평신도와 리더십을 나누고 있는 교회인가 하는 점들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교회 안의 정치적인 행사에 대해서는 가능하면 침묵하는 것이 좋습니다. 몰라서가 아니라 삶에 변화를 주는 진짜 생동하는 신앙을 추구하기 위해서입니다.

 

3. 평신도 사역앞으로의 목회는 목회자 중심이 아니라 평신도 중심이어야 합니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지 않다면 절대로 평신도목회를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양이 양을 낳습니다. 목자는 양을 낳지 못합니다. 목자는 양이 양을 잘 낳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목사는 예수 안 믿는 사람을 만날 기회가 거의 없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의 90% 이상이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평신도들은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을 주로 만납니다. 누가 전도할 수 있습니까? 평신도입니다. 사역은 누가 합니까? 평신도가 합니다.우리 나라 교회는 일반적으로 여자 교인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가정이 변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나라 교회에 남자가 없으므로 세상은 안 변합니다. 남자가 있어야 세상이 변합니다. 어떻게 세상이 변합니까? 교회가 아무리 변해도 술집이 그만큼 늘어납니다. 세상은 안 변하는 것입니다.여러분, 40대 이후의 남자들이, 세상에서 자기 나름대로 전문성을 가지고 보람 있게 사는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할 일이 뭐가 있습니까? 부인 뒤따라 다니는 것 외에 뭐가 있습니까? 그 사람들이 흥분할 만한 프로그램이 있느냐는 말입니다. 자기의 전문지식과 에너지를, 세상에서 그렇게 쌓아 놓았던 그 에너지를 쏟아 부을 일이 있느냐는 말입니다. 교회가 그것을 주어야 남자들이 나옵니다. 부인네들 몇몇이 좋아할 프로그램이면 부인들만 옵니다. 부인들만 모셔 놓고 어떻게 프로그램을 운영하겠습니까? 50대 남자들이 교회의 주역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목사님들은 남자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그들을 키우고 그들을 애정을 감싸 주어야 합니다. 시간이 없다는 것은 정말 핑계입니다. 정말 말처럼 바쁘지 않습니다. 남자들을 흥분시킬 프로그램만 있으면 그들은 교회에 와서 삽니다. 훈련을 시키고 그들에게 사명감을 심어 주고 그 사람이 할 만한 자신감과 믿음만 심어주면 일 주일에 세 번, 네 번, 다섯 번이라도 교회에 나옵니다. 절대로 바쁘지 않습니다. 다만 애정이 없다고 여길 뿐입니다. 의미가 없을 뿐입니다. 그들에게 의미와 애정을 주면, 성령의 의미와 사명감을 평신도에게 주면 목사님보다 더 큰 일을 합니다. 영향력이 대단합니다.

 

지금 저희 교회는 평신도들이 자기가 하던 일을 다 놓고 선교사로 떠납니다. 한동대학 교수 일곱 명이 선교사로 갔습니다. 각 분야의 전문인들이 자꾸 움직입니다. 저희 교회에서 150명의 선교사를 섬기고 있는데 그중 1/3이 우리 교인들입니다. 한국에서 하던 일을 다 놓고 나갑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요새는 교회를 떠나서도 얼마든지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비전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잘 되던 병원도 뒤로하고 연변으로, 아제르바이젠으로, 우즈베크로 떠납니다. 거기서 그들의 40대 젊음을 불태우는 것입니다. 그들은 목사가 아닙니다. 신학교도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선교사가 될 수 있습니다. 평신도들이 움직여야만 세상이 변합니다. 교회가 남자들을 움직일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마다 여전도회에서 얼마나 많은 봉사를 하는지 잘 압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머물러 있는 한 세상은 변하지 않습니다. 대담하게 프로그램을 바꾸어야 합니다.

 

(1) 새로운 목회를 위한 제안1)

교회론의 재정립저희 두란노 목회연구원에서 많은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무척 놀랐는데 너무도 많은 목회자들이 목회론과 교회론에 대해 정립이 안 되어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신학교에서 다 배운 것이기에 관념적으로는 잘 알고 있겠지만 정말 하나님의 교회가 무엇이라고 하는 체험적인 교회론이 없었습니다. 교회론이 있어야 목회철학이 정립됩니다. 목회철학이 없으면 이곳 저곳 돌아다니며 방황하게 됩니다. 이것이 좋다면 이거 해보고, 저것이 좋다면 저거 해보고, 글다 보니 왜 목회를 해야 되는지 정립이 안되는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목사님들이 교회를 떠날 준비를 하면서 목회를 합니다. ‘가라면 가지 뭐.’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겠습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교인들도 그러한 사실을 다 알고 있습니다.

 

제가 우리 교회에서 성령사역을 하면서 놀란게 하나 있습니다. 교인들이 저보다 한 발짝 앞서 있습니다. 나중에 하는 말이, “목사님, 우리는 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가장 늦게 따라간 셈입니다. 교인들은 우리보다 더 순수합니다. 그들은 신학이 없기 때문에 더 순수합니다. 우리는 신학적이고 선입관이 많습니다. 교인들은 설교한 대로 삽니다. 그러나 목사는 설교한 대로 안 삽니다. 교인들한테 배울 것이 많습니다. 그들의 헌신은 우리보다 훨씬 깊습니다. 우리야 월급받고 목회하지만 그들은 월급 안 받고 헌신합니다. 헌금 내면서 봉사합니다.

 

여러분, 선교사와 목사가 얼마나 다른지 아십니까? 목사의 영성과 선교사의 영성은 절대로 다릅니다. 선교사는 기도 안 하면 선교비가 안 옵니다. 목사는 자동차, 집, 자녀 교육, 등 교회에서 다 보장해 줍니다. 특별히 기도할 일이 없습니다. 먹는 문제, 자녀 문제 여기서부터 목사의 영성은 뚝뚝 떨어지는 것입니다.여러분, 목회는 영성입니다. 목회자 이상 교회는 절대 안 큽니다. 만약 부목사가 담임목사보다 설교를 잘 한다면 부목사가 담임목사 되든지 아니면 내보내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 목회자 이상 목회가 안 됩니다. 여러분의 기도의 양, 헌신, 믿음 그 이상 절대 안됩니다. 남의 탓할 것 없습니다.

 

내 믿음의 분량만큼 되는 것입니다.목회는 영성입니다. 목회자가 얼마나 영성이 깊으냐에 설교가 달려 있고 기도가 달려 있고 성장이 달려 있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목회론이 있어야 성경적인 목회철학이 생깁니다.그런데 여기서 조심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목회자가 공부를 많이 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신학공부보다는 성경공부를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신학교를 갓 졸업한 목사의 설교가 왜 어려운지 아십니까?

번역서적을 너무 많이 읽어서 한국말을 못하고 번역된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지 한참 듣고 나서 나름대로 또 해석을 해야 됩니다. 그러니 그것이 무슨 설교입니까? 쉬운 한글로 설교하십시오. 번역식 설교를 하지 마십시오.그러나 우리가 읽는 대부분의 책이 번역서적이다 보니 사고가 분명치 않습니다. 가슴에 탁 와닿아야 합니다. 신학적 교회론은 그 다음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교회, 사도행전에 나타난 교회를 그냥 단순하게 생각하십시오. 절대로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설교 잘한다,  잘 한다고 소문난 목사의 설교 테이프를 구해서 들어 보십시오. 어려운 설교 없습니다. 알아 듣기 쉽습니다. 실제적이고 성경적입니다. 그것이 설교입니다.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많이 이야기할 필요도 없습니다. 교회는 주님의 영광스러운 신부입니다. 창녀처럼 대하면 안 됩니다. 너무나 많은 교회가 교인을 창녀처럼 대합니다. 이용 수단으로 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제도도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필요상 잠깐 만든 것뿐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2) 목회철학목회철학은 목회자의 부름입니다.

목회자의 부름이 목회철학의 시작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목회자로 만들어 주셨다면, 그 부름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너는 청소년들에게 가거라’ ‘너는 선교사로 나가라’ 등등 이런 게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 철학이고 부름입니다. 목회철학은 부름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부름과 상관없으면 목회가 재미없고 피곤하기만 합니다. 절대로 일이 많아서 피곤한 법은 거의 없습니다. 좋으면 밤을 새도 기쁩니다. 절대로 피곤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취미는 돈 내고 시간 들여 가며 하는 것이 취미입니다. 목회도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목회는 신나고 재미있어야 합니다. 기쁨의 에너지가 흘러넘처야 합니다. 그거은 부름이 있어야 생깁니다.절대로 월급쟁이가 되지 마십시오. 교회에서 월급 얼마 더 주나, 안 주나에 대해 절대로 말하지 마십시오. 생활비 안 주면 굶어 버리십시오. 그러나 절대로 그 말을 해선 안 됩니다.물론 목회철학은 목회자의 부름과 비전에 연관되어 있습니다. 어떤 지역에 간다면 지역교회의 부름이 있습니다. 그것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 지역에 그 교회를 세워 주신 것은 뜻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그것과 나의 목회 비전에 맞아야 합니다. 그런 것이 안 맞는데도 교회가 크다는 이유라면 절대로 가지 마십시오. 조건 좋다고 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재앙이 생깁니다. 교회는 목회 비전과 맞아야 합니다.

 

3) 목회 비전목회 비전은 목회철학에 따라 좌우됩니다.

목회 비전이 생길 때는 성도들도 목회자와 같이 생길 것입니다. 적어도 자기 목회철학을 교인에게 설득시킬 수 없다면 목회를 포기하시기 바랍니다. 절대로 목회자 혼자 가지 마십시오. 교인들과 함께 가야 합니다.여러분에게 목회에 대한 비전이 없는데 누가 같이 가려고 하겠습니까? ‘2000년대를 향하여 우리 교회를 이렇게 끌고 가겠다. 목회를 이렇게 하겠다’라는 비전이 그림을 보듯이 한눈에 보여야 합니다. 누구든지 볼 수 있어야 따라갈 것이 아닙니까? 비전이 있으면 고생 정도는 아무 문제가 안 됩니다. 왜 교인들이 불평하고 또 고생이 무제가 됩니까? 비전이 안 보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교인을 흥분시킬 만한 비전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제시하셨습니까? 상식적인 것에는 감동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너도 나도 모두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비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만 할 수 있는 것이 비전입니다. 땅의 꿈은 비전이 아닙니다. 하늘의 꿈이 비전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가 함께 누릴 수 있는 영광스러운 비전을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절대로 전라도 교회를 만들거나 경상도 교회를 만들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세계를 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세계를 품는 비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유럽의 전통적인 교회에 가보면 박물관화된 대리석 건물에 웅장한 파이프 오르간이 있고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가 있고, 노인 몇 명이 있습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런 것 있는 것이 굉장히 위험한 사인입니다. 스테인드글라스가 있으면 사람들이 교회 안에만 있으려고 합니다. 아름답기 때문에 밖으로 안 나갑니다. 그러니까 스테인드글라스를 딱 떼어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는 복음을 한 번도 듣지 못한 22억을 향하여 가야 합니다. 예수 믿는 지역 말고 주님을 모르는 지역에 가도록 비전을 주어야 합니다. 북한에 대하여, 중국에 대하여 비전을 심어 주어야 합니다. 몽고, 터키, 우즈베크, 카자흐스탄 등 이슬람권에 계속 초점(focus)을 맞추어서 교인들로 하여금 다른 생각 못 하게 해야 됩니다.

 

오로지 그 생각만 할 수 있도록 초점(focus)을 맞춰야 됩니다.

그래서 기도하게 하고 헌금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도 언젠가는 가야지’하는 생각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돈을 벌어도 선교를 위해 벌도록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이 차 살까 저 차 살까’ ‘아파트는 어떤 것으로 살까’ ‘무슨 옷을 입을까’ 등 밤낮 돈 벌어 땅의 것만 사도록 만들면 아무것도 못합니다. MBC방송국에 다니던 교인 하나는 나이 40세가 되면 하나님께 헌신한다는 생각을 갖고 다녔는데 40세가 되자 정말 사표를 썼습니다. 그리고 생각했던 일을 합니다. 그런 고급 인력을 우리가 어떻게 월급 주고 일을 시킵니까? 다 주님이 시키니까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일하는 것입니다. 돈받고 일하는 사람은 받은 만큼 일합니다. 그러나 돈 안 받고 일하는 사람은 무지하게 일을 많이 합니다.

 

저는 우리 목사가 월급받는 것에 대해 생각이 많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우리 목사도 선교비를 받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영성이 떨어지는 것보다는 문제가 있어도 낫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목회자는 목사가 직업입니다. 아주 심각합니다. 그런 영성을 가지고 어떻게 이 시대를 이끌어 나갈 수 있겠습니까? 민주화되면 예수 안 믿습니다. 노인 복지가 잘 되면 교회 안옵니다. 사람들은 생활이 안정되고 사회보장이 잘 되면 하나님 생각을 안 합니다. 그리고는 휴가 갈 생각만 합니다. ‘어디로 놀러 갈까?’ 하는 생각만 하니 교회 전체가 폭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영성이 생길 수 없는 것입니다.

 

4) 지도자 양육비전이 있을 때 비전을 수행할 사람이 양육되는 것입니다.

일은 사람이 합니다. 여러분의 교회에 비전을 이룰 만한 사람이 있습니까? 저는 장로가 있느냐, 목사가 있느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있으면 일이 됩니다. 사람이 있으면 일이 됩니다. 따라서 교회는 사람을 키워야 합니다.절대로 교인을 가지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모두 자기 얼굴에 침뱉기입니다. 그 설교 듣고 그렇게 되었으면 설교가 문제인 것이지 교인에게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앞소리 다르고 뒷소리 다른 게 인간입니다. 제가 알기에 여러분을 제일 위하는 사람이 여러분을 제일 행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앞에서 제일 좋은 말을 하는 사람이 뒤에 가서는 여러분을 제일 비판합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저 역시 그런 인간이고 그 인간들을 데리고 목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들을 키우는 것 또한 중요합니다.지난 1980년대 우리 한국 교회는 제자훈련이 유행했습니다. 그러나 리더십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리더십 없는 제자훈련, 제자훈련이 없는 리더십은 다 문제가 있습니다. 교회는 제자훈련과 리더십의 밸런스를 가져야 합니다. 제자훈련을 통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며, 리더십을 통하여 이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합니다.

 

(2) 평신도 양육분명한 목회철학과 목회구조,

교회론적인 명확한 기초를 가지고 있으면 평신도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게 됩니다.제가 책 제목을 잊어버렸습니다만 캐나다에 계신 한 목사님이 목회를 열심히 하다가 ‘평신도로 돌아가자’라는 취지로 평신도로 돌아가 평신도의 입장에서 책을 썼습니다. 평신도로 돌아가 보니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새로운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여러분, 목사는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평신도가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여러분, 평신도를 믿어 주십시오. 좀 부족해도 믿으십시오. 실수도 많이 할 것입니다. 신학을 안 했으니 어떻게 실수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실수합니다. 그래도 믿고 맡기십시오. 어차피 목사 혼자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분들에게 대담하게 사역을 맡기십시오. 성경공부도 맡기고 훈련도 맡기고 프로그램도 다 맡겨 보십시오.

 

그러면 그분들이 목사만큼 성장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타이틀 없는 목사고 우리는 타이틀 있는 목사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됩니다. 우리가 다 왕 같은 제사장이 되어야 합니다. 그 정도 수준이 되어야 세상이 변합니다.평신도 사역에 있어서 생각하여야 할 중요한 것은 예배와 사역입니다. 사역은 예배로부터 흘러넘치는 것입니다. 우리 목회는 사역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들은 영적인 수입은 없고 지출만 있으므로 지치게 되어있습니다. 산에 가서 기도하든지 영적 훈련을 받든지 하여 꼭 안식하시기 바랍니다. 목사님에게는 안식년이 꼭 필요합니다.

 

예배를 통하지 않고 사역을 시키는 것은 사람 죽이는 것입니다.

그것은 평신도나 목회자나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평신도를 양육할 때는 그들을 예배 안에 있게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전체적으로 봤을 때 예배공동체입니다.어떻게 보면 예배를 제일 잘 안 드리는 사람이 목사입니다. 주일 날 예배를 목사님이 인도합니다만 인도하는 그 순간부터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프로그램만을 생각합니다. ‘기도는 누구지?’ ‘성가대는 왜 저렇게 노래하지?’ ‘저 사람은 왜 왔을까?’ ‘누구누구는 왜 안 왔지?’ ‘다음 순서는 뭐지?’ 등등 끊임없이 프로그램만을 생각합니다. 예배에 들어가면 찬송가를 무엇을 부르는지조차 잊어버리고 하나님께 빠져야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배를 인도하기 때문에 잘 안 빠집니다.진심으로 예배를 드리면 사람이 변합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표정이 달라집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예배의 깊은 경험이 필요합니다.여러분, 이 시대는 변화하는 시대라는 사실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목회의 틀을 새롭게 하셔야 됩니다. 이것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고 무엇을 해보겠다는 것은 계속 붙였다, 뜯었다 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 틀을 바꾸십시오. 그리고 교회론을 확정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온누리교회가 세 번째입니다.첫 번째 목회는 연예인 교회로 7년 동안 목회를 했습니다. 그 곳은 지금 생각해 보면 교회라기보다는 선교단체를 운영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교회라는 생각을 많이 느끼지 못하고 사역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영국에 있는 3년 동안 이민 목회를 2년간 했습니다. 그때도 교회에 대해 눈을 많이 못 떴습니다. 정말 교회에 대해 눈을 뜬 것은 온누리교회에서 목회하면서부터 입니다. ‘이런 것이 교회구나’ 하는 것이 제 가슴속에 와닿았습니다.

 

눈물과 감격이 있고, 회개가 있고, 찬양이 있으며, 주의 영광이 있는, 기쁨과 기적과 축복이 흘러넘치는 주님의 초상을 처음 보았습니다. 이젠 너무 사람이 많아 못 합니다만 저는 새신자들을 꼭 저희 집에 모셔다가 저녁을 대접했습니다. 세 시간 동안 같이 식사하면서 간증을 하면 거의 대부분이 눈물을 흘립니다. 저는 그들을 보면서 전율을 느낄만큼 ‘저런 것이 주께서 사랑하는 교회구나’ 하는 것을 느끼곤 하였습니다. 주님의 교회는 이렇게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그 안에 주님의 양들이 있습니다. 양들이 새끼를 잘 낳고 잘 자랄 수 있도록 활용을 잘 하십시오. 이것만이 앞으로 다가오는 21세기에 우리 한국 교회가 나가야 할 길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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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예수가좋다오
글쓴이 : (일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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