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학

[스크랩] 이성봉 목사의 삶과 부흥운동과 회개

수호천사1 2011. 4. 5. 09:02

이성봉 목사의 삶과 부흥운동과 회개

                                                                                      박명수교수 / 서울신대, 교회사

머리말
많은 사람들은 한국교회의 신앙이 1907년 대 부흥운동을 통해서 구체화되었다고 말한다. 1907년 대부흥운동의 핵심은 진정한 회개였다. 이것은 1907년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이성봉 목사의 삶과 부흥운동은 우리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 준다. 필자는 이 글에서 이성봉 목사의 삶과 목회와 부흥운동에서 나타난 회개를 살펴보려고 한다.

필자는 이성봉 목사의 자서전 <말로 못하면 죽음으로>를 중심으로 이 문제를 다루려고 한다. 우선 말하고 싶은 것은 그의 자서전은 어거스틴의 참회록과 같이 자신의 죄악과 잘못을 철저하게 회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자서전은 일종의 참회록이라고 말할 수 있다.

1. 유년시절과 회개

우리가 그의 자서전을 읽어 보면 그 첫 줄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나의 선조와 부모님은 이렇다 할 가문이 못된다. 그 보다 더욱 죄에 얽매인 하류층의 가정이었는지도 모른다.”(17) 보통 자서전의 첫 줄은 자신의 가문을 자랑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그의 자서전은 자신의 가문의 죄를 고백하는 것으로 출발한다. 이것이 그의 위대한 점이다.

그는 곳 이어서 “우리 부모님이 모두 예수를 믿고 자기들의 죄의 고민으로 증인삼아 나를 데리고 산중으로 들어가 아버지는 아버지의 죄를, 어머니는 어머니의 죄를 회개하는 것을 들었다. 그때에 나는 부모님들의 죄악의 혈통을 이어받았음을 알게 되었다.”(17)고 말한다. 이것은 이성봉 목사가 어려서부터 회개교육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부모로부터 받은 기독교는 신앙을 갖기 위해서는 자신의 죄를 고백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성봉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원래 장로교회와 감리교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하였다. 따라서 이 같은 죄에 대한 고백은 당시 한국교회의 보편적인 모습이었고, 이성봉 목사는 이것을 계승한 것이다.

우리가 이성봉 목사의 자서전을 읽어 볼 때 우리는 어거스틴의 고백록과 같이 인간의 죄악이 얼마나 큰가를 강조하는 것을 본다. 그는 7세 때 동생이 태어났는데, 동생에 대한 질투가 생겼다. 그런데 그 동생이 세살 때 죽었다. 이것을 보면서 시원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면서 자신의 내면에 “악착스러운 마음”이 있다고 고백하였다.(20) 이것은 인간의 내면에 있는 죄성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 내면의 죄성을 인식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삶의 자세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같은 고백은 그가 장성하여 기독교신앙의 깊이에 들어갔을 때 이루어진 것이다.

이성봉이 아홉 살이 되었을 때, 그는 주일에 교회를 가지 않고 아버지가 모아 놓은 돈을 훔치기 위해서 아버지의 전대를 뒤지고 있는데, 외할머니가 들어오셨다. 그래서 순간에 그는 아버지의 전대를 붙잡고, 들키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외할머니는 이성봉의 기도모습을 보고, 우리 손자가 신앙이 좋다고 칭찬하였다. 이성봉은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졌다고 감사 기도하였다.(21-22) 하지만 그 돈을 가지고 과자를 사먹었다. 여기에서 그의 기도는 죄에 대한 기도가 아니라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기도였다. 하지만 그 후 그가 참된 신앙을 가졌을 때 이것도 철저하게 회개하였다.

2. 이성봉의 최초의 회개

이성봉의 젊은 시절은 낙망과 좌절의 시기였다. 어머니가 교사로 있던 황해도 신천의 경신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평남 대동군으로 돌아와서 농사를 도왔다. 큰 꿈은 있었지만 시골에서 과수원 일을 하였다. 그에게 유일한 희망은 돈을 버는 것이었고, 신앙은 점점 쇠퇴하였다. 21세 되던 6월 어느 날, 주일을 지키지 않고 과일을 가지고 평양에 나가서 물건을 팔고, 온갖 타락한 일을 다 하였다. 그런 데 돌아오는 길에 오른 쪽 다리가 뜨끔하고, 쿡쿡 쑤시기 시작하더니 결국은 쓰러지고 말았다. 처음에는 하나님을 원망했지만 점점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고, 이것은 철저한 회개로 이어졌다. 이것은 이성봉 목사의 생애에 있어서 최초의 진정한 회개였다.

이 최초의 회개는 몇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다. 첫째, 자신의 죄인 됨의 자각이다. “나는 이제 죄인인 것을 알았다. 법률상으로 지은 죄, 도덕상으로 지은 죄, 양심상으로 지은 죄 등등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나는 죄인인 것을 깨달았다.”(32). 그는 이것을 놓고 간절하게 회개하였다. 둘째, 어머니의 교육이다. 회개는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회개에 대한 분명한 교육이 있을 때 가능하다.

이성봉의 어머니는 그에게 “회개하라. 죄 지은자가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고, 회개하지 않은 자가 지옥에 가는 것이다.”(32) 셋째, 사명에 대한 자각이다. 이성봉은 회개를 위한 기도를 하면서 이제는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겠다고 고백하였다. "한번만 살려 주시면 이 몸을 주님께 바치고, 이 사실[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 증거 하겠습니다.“(33)

넷째, 회개는 새로운 삶을 제공해 주었다. 그의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평안을 주었고,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새롭게 보게 되었고, 과거의 모든 죄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회개는 과거와 단절하게 만들었다. 다섯째, 그의 회개는 신유와 연결되었다. 하지만 당장에 신유가 일어난 것은 아니다. 이미 은혜가 시작되었으나 병에서 완전하게 치유된 것은 3년 후였다. 그는 독립운동에 가담했다는 연유로 조사를 받았으나 이 병 때문에 수감을 면하였다. 어쨌든 그의 회개를 결국에 가서는 신유로 이어졌다.

3. 경성성서학원과 회개

이성봉 목사는 1925년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하였다. 은혜를 체험한 그가 신학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중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것이 장애물이 되었다. 그런데 경성성서학원의 소문을 듣고, 입학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성결교회 교역자가 되는 훈련을 받게 되었다. 그는 이곳에서의 생활을 이렇게 설명한다. “그곳에서는 나를 3년간 불가마에서 빚어냈는데, 지적으로는 별것이 없었으나 영적으로 부흥과 말씀과 신앙을 통하여 깊이 지도해 주시는 선생님들 … 그 중에서도 이명직 목사님은 나의 잊지 못할 은사이니, 그의 성경강의와 설교 때는 시간 시간이 은혜로왔다.”(38)

먼저 이명직 목사는 부흥회의 중심이 진정한 회개에 있다고 보았다.(이명직, <기독교의 사대복음> (서울: 성결교회출판부, 1952), 22-23.) 이명직 목사는 회개를 위해서는 첫째 철저한 죄의 각성이 필요하다고 본다. 죄의 각성을 위해서는 율법이 필요하다. 루터는 율법은 병을 주고, 복음은 치료한다고 했다. 이명직 목사는 진정한 부흥회는 죄에 대한 설교에서 시작한다고 보았다.

죄에 대한 분명한 설교가 없이는 회개는 가능하지 않다. 이명직 목사는 죄와 더불어서 지옥에 대한 분명한 설교를 하였다. 심판을 말하지 않는 죄에 대한 설교는 파괴력이 없는 망치와 같다. 이런 점에서 이명직 목사는 설교의 목적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것이지 그들의 흥미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다.

둘째는 통회가 필요하다. 통회란 마음 속 깊이 뉘우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명직 목사는 부흥회 때에 통회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통성 기도를 하게 한다. 통성 기도는 한국교회와 성결교회 부흥회의 중요한 전통이다. 성결교회의 부흥회는 보통 설교 후 통성 기도로 이어진다. 성결운동은 부흥회 동안에 죄를 회개하고, 은혜를 사모한다는 의미에서 은혜좌, 곧 앞의 제단으로 신자들을 초청하였다. 이명직 목사도 상해의 집회 기간동안에 신자들을 은혜좌로 초청하기도 하였다. 이런 초청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분명하게 하도록 한다.

셋째는 고백, 혹은 자백(자복)이다. 이명직 목사와 한국 성결교회의 부흥회 기사를 보면 수 많은 죄의 자백이 나타나고 있다. 〈활천〉은 자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자복에 대하야,” 〈활천〉 (1924년 8월), 21.) “자복에 대하야 죄를 자복하야 바리지 아니하면 시톄를 방안에 둔 것과 갓하야 하나님의 말삼을 드를 마다 내암새가 나게 된다. 죄를 자복하는 것은 가나안 7족쇽을 멸하는 것이다. 죄를 자복하는 것은 나의 죄를 十자가에 못 박는 것이다. 죄를 자복지 아니하면 항샹 마귀의게 위협을 당한다. 더러만 하는 자복은 아해낫고 후산 못한 것 갓다.”

넷째 배상이다. 배상은 지은 대로 갚는 것이다. 금전적인 죄는 금전으로, 말로 지은 죄는 말로 구체적으로 배상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회개의 열매이다. 이런 것은 초기 한국교회에서 보편적인 것이었고, 특별히 성결교회에서는 더욱 강조되었다.

이성봉은 경성성서학원에서 특별히 “회개와 합당한 열매”를 강조하는 것을 배웠다. 그는 21세 때 회개했지만 아직 거기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 자신을 돌아보니 철저하게 회개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오래 전에 기차를 탈 때 나이를 속이고, 반표를 산 것이 생각이 나서, 총독부 철도국장에게 사죄 편지와 함께 4배의 요금을 보냈다. 그랬더니 사죄장과 함께 돈도 학비로 쓰라고 다시 보내왔다.(39)

이성봉의 부흥운동은 그의 신학교시절 주일학교 부흥운동부터 시작한다. 성서학원에 다니면서 그는 1927년 경북김천에서 여름에 봉사하게 되었고, 이 때 주일학교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이성봉은 주일학교 학생들에게도 역시 회개를 강조하였다. 그랬더니 순진한 어린 심령들이 다 자백하고 무서운 죄를 회개하였다. 여기에 놀란 사람들은 이성봉을 비난하였고, 신문기자들은 찾아와서 어린이를 마취하였다고 공격하였다.(40)

성결교회는 소아 부흥집회를 종종 개최하였는데, 역시 죄의 회개에서부터 시작하였다. 이것은 어린아이도 원죄 아래 있으며,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죄를 깨달을 수 있고, 참된 회개에 이를 수 있다는 신학에 근거한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본성의 낙관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일반교육과는 구별되는 것이다.

4. 이성봉의 목회시대와 회개

이성봉 목사의 첫 번째 목회지는 수원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회개의 복음을 외쳤다. 그 결과 어느 날 새벽기도 후 한 청년이 일곱 가지 죄를 써가지고 와서 죄를 자복하였다. 그 중 하나가 황해도 국무농장에서 사무원으로 있을 때 공문서를 위조하고 횡령한 것이었다. 이 청년은 죄에 대한 변상으로 교회에 헌금하겠다고 말하였다. 하지만 이성봉은 변상은 그 대상자, 곧 농장에 하라고 권하였다. 결국 이 청년은 고민하던 중, 말씀에 순종하여 자복서를 농장 주임에게 보냈다. 얼마 후 농장주임은 자복서에 감복했다는 내용과 함께 용서한다는 편지를 보내왔다. 이것은 초기 한국교회와 성결교회의 전통이었다.

이성봉에게 회개는 일회성이 아니라 평생의 과제였다. 수원교회에서 목회하던 중, 몸이 몹시 쇠약하여 졌는데, 혼몽 중에 “이제 살기 어렵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는 다시 한 번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고, 자신 속에 회개하지 못한 것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아내를 불러서 증인을 삼고, 자기 청년시절에 연애하던 시절을 고백하였다. 사탄은 이것을 방해했으나 끝까지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하고, 회개하였다. 긴 고통의 시간이 지난 다음에 그는 큰 은혜를 받았고, 몸은 온전히 치유를 받게 되었다. 여기에서도 회개, 은혜 체험와 신유는 연결되어 나타났다.

이성봉 목사의 두 번째 목회지는 목포였는데, 여기에서도 그는 회개의 복음을 외쳤다. 이 설교를 들은 그곳 신문사 사장 소실이 회개하고 첩살림을 청산하였다. 이것을 핑계로 신문은 이성봉 목사가 가정을 파괴했다고 신문에 기사를 내 보내기도 하였다. 또 일부 청년들은 이성봉 목사를 축출하고자 그가 설교에서 너무 죄를 많이 지적한다고 총회본부에 불만을 보고하기도 하였다.(53-54)

이성봉 목사의 세 번째 목회지는 신의주였다. 이곳에서 그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의 자서전은 이곳에서 회개한 이야기를 길게 설명한다. 그것은 주일 아침에 설교준비를 하는데, 아내가 닭을 잡으라고 해서 싫지만 억지로 닭을 잡으러 나갔다. 그러나 닭은 이성봉 목사의 오른 손에 상처를 남기고 날아갔다. 매우 아팠다. 아픈 손을 잡고 기도하다가 그는 자신의 이기적인 모습을 발견했다. 지금까지 자신은 주의 종이라는 이유로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 미루었다. 그는 “다시는 나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 미루지 않겠습니다.”라고 회개하였다.(60) 이성봉의 회개 이야기는 거창한 회개만이 아니라 일상에서 일어난 것들도 많이 나오고 있다. 매일 매일 주와 동행하려고 하는 그의 삶은 회개로 이어졌던 것이다.

5. 이성봉의 부흥회와 회개

1937년 성결교회 총회는 이성봉을 전국순회부흥사로 임명하였다. 이제 이성봉 목사는 개교회 목회에 구애받지 않고, 전국으로 돌아다니면서 집회를 인도하였다. 이성봉 목사의 부흥집회는 수많은 회개운동을 일으켰다. 특별히 여성들은 이성봉 목사의 회개 외침에 진정으로 응답하였다. 당시 한국여성들의 가장 큰 문제는 축첩이었다. 이성봉 목사의 집회에는 많은 첩들이 나오게 되었고, 이들은 복음을 받아들이자 첩 생활을 청산하였다.

그 중의 하나가 함북 웅기교회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어느 부잣집 소실이 복음을 듣고 첩살이를 포기하였다. 이 여인에게는 자식이 3남매가 있었는데, 남편은 자식을 생각해서라도 돌아 올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돌아오지 않고 혼자 장사를 하며 교회에 충성하였다. 남편은 나중에 이 소식을 듣고, 재산을 나누어 주었다. 이 여인은 이 재산으로 자녀를 키우며 교회를 섬겼다. 믿음으로 승리한 것이다.(71)

이성봉 목사는 일제말 평양의 3개 노회(평양, 강서, 안주) 연합집회를 인도한 경험이 있다. 이 때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는데, 그 중 가장 클리이막스는 살인죄의 회개였다. 이 집회에 참석한 최경자라는 신자가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평양경찰서에 찾아가서 살인죄를 회개하였다. 원래 이 여인은 결혼해서 아니 셋을 나았는데, 얼마가지 않아서 남편이 죽고, 곧 이어서 아들이 죽고, 따 둘 남았다. 이 두 딸을 데리고 친정에 갔으나 부모는 이혼했고, 어머니에게 갔지만 박대하였다.

그래서 작은 딸을 죽여 버리고, 큰 딸을 데리고 동해바다에서 자살하려고 했는데, 딸이 “어머니 살자”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돌아와서 선교사집에서 식모생활을 하다가 이성봉목사의 집회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고 회개한 것이다. 경찰이 조사를 해 보니 사실이었다. 그러나 정상을 참작한 경찰은 이 여인에게 일년 징역에 3년 집행유예를 선고하였다. 이 여인은 기간을 지나고 나와서 아름다운 신앙생활을 하였다.(89)

그러면 이성봉 목사의 일제말 행적은 어떠했는가? 일제 말을 지나온 한국교회 지도자들에게 묻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이다. 이성봉 목사는 일제 말, 가능한대로 신사참배를 피해 보려고 노력했다. 당시 집회를 열려면 경찰의 허락을 받아야 했고, 이 과정에서 뇌물이 오가기도 하였다. 이성봉 목사는 이것을 마음 아파했다. 이성봉 목사는 이런 상황이 싫어서 일제 말에는 만주로 가서 활동하였다. 하지만 종종 조선으로 와서 집회를 인도하였다. 그는 집회에서 재림의 복음을 주장하였고, 이것이 일본경찰에게 들어갔다. 그래서 사리원에서 검거되었다. 하지만 6개월 만에 기소유예로 풀려나왔다. 이렇게 일제에 의해서 고난을 받았지만 이성봉 목사는 자신의 신앙이 완벽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일제말의 행적이 오십보, 백보였다고 말한다. 그것은 정도의 차이일 뿐 실지로는 신앙의 정조를 다 지키지 못하였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는 화간과 강간을 구분한다. 화간은 자신이 원한 것이요, 강간은 강제로 당한 것이다. 자신의 모습은 일제에 의해서 강간을 당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강간인지 화간인지는 하나님만이 판단할 문제라고 보았다. 그러나 그는 항상 일제 말 자신이 보다 강하게 신앙의 종조를 지키지 못한 것을 회개하고 있다.(91-92)

6. 이성봉 목사의 회개의 특징

우리는 이상에서 이성봉 목사의 자서전에 나타난 회개를 살펴보았다. 이제 그의 자서전에 나타난 회개의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그는 철저한 회개의 교육을 받았다. 그의 부모는 신앙을 가진 후 자식을 증인삼아 회개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하나님 앞에 회개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성봉의 회개는 부모의 회개교육에서 출발한다.

둘째, 이성봉 목사는 인간 본성의 타락을 믿었다. 그는 신학적으로 원죄를 믿었고, 실질적으로 자신은 죄 중에 태어났다고 고백하였다. 성결교회의 목사인 그는 단지 자범죄만이 아니라 인간 내면에 있는 죄성, 곧 죄악의 쓴 뿌리를 해결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것은 그의 회개 운동이 깊은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셋째, 이성봉 목사는 구체적인 자범죄를 지적하였다. 이성봉 목사는 인간의 죄를 구체적으로 지적하였다. 죄에 대한 구체적인 지적이 없는 곳에 죄에 대한 구체적인 회개가 없다. 이성봉 목사는 죄를 지적한다는 이유로 교회에서 배척운동을 당하기도 하였다.

넷째, 이성봉 목사는 자백을 강조하였다. 우리가 그의 회개 모습을 보면 단지 하나님 앞에서 혼자 회개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증인 삼아서 회개하였다. 그의 부모는 자식을 증인삼아서 죄를 자백하였고, 자신은 아내를 증인 삼아서 연애사건을 자백하였다. 이것은 죄의 고백이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이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 그의 회개 운동의 강점이 있는 것이다.

다섯째, 자백에는 변상, 곧 회개의 열매가 강조되었다. 이성봉 목사는 죄의 고백에는 거기에 합당한 대가를 치룰 것을 요구하였다. 물질적으로 훔친 것이 있으면 그것을 배상하고, 마음에 상처를 입힌 것이 있으면 가서 사과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배상할 대상이 없으면 그것을 교회에 헌금하라고 가르쳤다. 이런 회개 운동은 구체적인 역사로 나타났다.

여섯 번째, 변상은 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이것을 변상할 때 일반사회는 놀라게 되었다. 지금까지 한국사회에는 부정한 물질이 많이 있지만 이것을 회개하고, 변상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이런 변상운동은 사회로 하여금 기독교인의 다른 모습을 보게 만들었고, 결국은 기독교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도록 해 주었다.

일곱 번째, 이성봉 목사의 회개운동은 신유운동으로 이어졌다. 이성봉은 여러 차례 질병을 앓았다. 하지만 그는 이럴 때 마다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고, 회개하였다. 이런 신유와 함께 그는 병에서 치유되었다. 죄의 회개는 내면의 치유뿐만이 아니라 육체의 치유로 이어진 것이다.

여덟 번째, 그의 회개운동은 종말론적인 차원에서 이해된다. 이성봉 목사는 항상 그리스도의 재림의 빛 아래서 매일 매일 살았다. 재림의 복음은 자신을 살펴보게 만들고, 다시 오시는 신랑되신 그리스도 앞에서 순결하게 서기 위한 몸부림이 바로 회개였던 것이다.

맺는 말: 이성봉 목사의 회개와 한국교회

이성봉 목사의 회개운동은 1907년 대부흥운동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이미 잘 알려졌듯이 1907년 대부흥운동의 특징은, 회개와 자백과 변상이었다. 이것은 한국교회를 갱신했고, 한국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성봉 목사의 회개운동은 이것을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성봉 목사의 회개운동은 성결교회의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 성결교회는 자범죄의 용서와 원죄의 정결을 강조한다. 전자를 중생이라고 하고, 후자를 성결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것은 신유와 재림과 연결된다. 이성봉 목사의 회개운동은 사중복음적으로 전재된다.

이성봉 목사의 부흥운동은 회개를 통한 진정한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것은 그 이후의 부흥운동과 구분되는 것이다. 이성봉 목사 이후의 부흥운동이 회개를 통한 진정한 변화 보다는 신비적인 은사와 물질적인 축복에 강조점을 두어왔다. 물론 이성봉 목사의 부흥집회에 이런 요소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의 강조점은 회개를 통한 진정한 변화였다. 이런 점에서 이성봉 목사의 부흥운동은 그 이후의 부흥운동과는 구분된다. 지금 한국교회는 진정한 회개를 통한 참된 부흥을 갈망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성봉 목사의 회개운동은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있다.

출처 : 기독교상담실한국상담교육원
글쓴이 : 아카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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