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과 치유의 목회적 적용 강의/정태기 교수 1. 현대인의 상처 오늘 우리는 산업과학의 발달로 옛날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문명의 혜택을 누리고 있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인간의 생활은 어제보다 더 풍부해지고 더 편리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물질은 풍부해지고 생활은 윤택해지는 반면 인간의 마음은 더욱 더 생명력을 잃어 가고 있습니다. 물질문명과 사회보장제도의 혜택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받고 있는 국민이 스웨덴 국민인데, 반대로 자살률 또한 세계 최고인 것은 누구나 익히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이것은 물질문명의 혜택 가운데서 인간의 정신과 영이 함께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퇴보하고 있고 상상하기 힘든 상처로 인해 시달리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2천 년 전의 양치기는 양을 푸른 초장과 마실 물이 있는 시냇가로 인도하고 맹수로부터 보호해 주기만 하면 되었으나 현대의 양을 치는 데는 최첨단 과학적인 방법이 동원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대인의 영과 마음을 진단하고 병든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안목을 가져야 합니다.
시골의 어느 교회에 문젯거리 인물이 한 사람 있었는데 바로 장로님이었습니다. 이 장로님은 일제시대 때부터 최고의 학력에다 그 지방에서는 최고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던 분이었습니다. 30대의 나이에 장로 안수를 받아 계속 그 교회에서 봉사를 했는데, 교회에 부임해 오는 전도사나 목사는 그 장로님의 눈에 들지 못하면 1년을 못 넘기고 쫓겨나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이 짓을 30여 년 간 하다 보니 교회는 갈라지고 부흥되지 못했습니다.
30여 년의 세월이 흐르다 보니 장로님도 이제는 나이가 꽤 들었습니다. 몇 년 전에 그 교회에 젊은 목사가 부임해 왔습니다.하루는 목사님과 장로님이 함께 12시간을 운전해서 가야 할 곳이 생겼습니다. 12시간을 운전해서 가고 오는 동안 운전이 서툰 목사님은 장로님의 이야기를 계속 들어 주어야만 했습니다.그런데 이 장로님에게는 다음과 같은 증상이 하나 있었습니다. 예배 시간에 목사가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제일 앞자리에 앉아서 볼펜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데 째깍째깍 하는 소리가 교인들에게까지도 다 들릴 정도입니다.젊은 목사님은 서툰 운전을 하느라 긴장해서 계속되는 장로님의 이야기에 그저 “예.” 하면서 먼 길을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다음 주일부터 장로님의 볼펜 소리가 사라져 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장로님 때문에 교회 증축을 못하고 있었는데 장로님이 젊은 목사님에게 와서 자기 입으로 교회 증축을 하자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도 증축되었습니다.무슨 이야기입니까? 장로님의 상처는 설교에 의해서도, 기도에 의해서도 치유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목회자가 장로님의 이야기를 고개를 끄덕거리며 계속 들어 주었기 때문에 마음속 응어리와, 상처가 아물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치유입니다. 치유는 이렇게 남의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 주기만 해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생명체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절반은 동물적, 절반은 하나님께서 주신 신적 기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즉, 자연적인 요소와 초자연적인 요소가 한데 얽혀 한 인간을 형성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적인 요소인 신체만 건강하다고 해서 그 사람을 건강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한 인간이 건강하기 위해서는 자연적인 요소와 초자연적인 요소가 함께 건강해야 합니다.
초자연적인 영역이 건강하기 위해서는 인간으로 살면서 하나님의 속성이며 형상인 영이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요, 병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린아이가 어머니 품을 떠나면 아무런 사랑을 받지 못하고, 아무리 좋은 육의 양식을 먹는다고 해도 결국 병들고 마는 것처럼, 인간의 모태는 하나님입니다. 어머니의 품을 떠난 아이가 병이 나듯 인간 역시 하나님을 떠나게 될 때 병드는 것은 당연한 논리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광주 제중병원에서 위암 선고를 받고 올라온 한 여자 성도가 있었습니다. 그 성도는 위암 증세가 너무 심해 치료가 불가능하고 얼마 살지 못한다는 선고를 받았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기도원의 문을 두드렸던 것입니다. 거기서 강사가 자기 아내의 이야기를 하면서 펑펑 우니까 그 여인도 함께 얼마나 대성통곡을 하였는지 모릅니다. 그리고는 며칠 있다가 광주로 내려갔습니다. 광주로 내려갔는데 아픈 증상이 사라진 것입니다. 이상해서 병원에 갔더니 깨끗해졌다고 한 달 후에 다시 와보라는 것이었습니다. 한 달 후에 다시 가보았더니 깨끗하게 완쾌되었습니다.
병이란 것은 우리 몸 속에 응어리가 쌓여서 모든 기를 막아 생긴 것이므로 그것만 풀어지면 낫게 되어 있습니다.목사가 큰 능력이 있어야만 되는 줄로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치유나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진귀한 보석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할 뿐입니다.건강하고 성숙한 인간의 심리를 연구했던 아브라함 마슬로우에 의하면 건강한 인간은 신비를 자주 경험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신비의 경험을 자주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보다 성장의 깊이와 넓이가 훨씬 빠르게 진행되는 것을 발견했답니다. 이 연구 보고는 인간이 하나님께 가까이 갈 때 건강한 삶을 살게 된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현대인의 질병은 한 마디로 하나님을 떠난 데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순간 자기 자신도 잃어버리도록 되어 있고, 동시에 이웃과 세상도 잃어버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자신을 모르며, 이웃과 세상을 모르는 삶은 만신창이가 되고 맙니다.하나님을 떠난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형사인 영이 원만한 기능을 발휘할 수가 없고, 영적 기능이 불완전할 때 정신적 기능 역시 정상적 기능을 상실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서 정상적인 관계를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하나님과의 분리는 자신과의 분리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이웃과의 분리도 함께 불러일으킵니다. 현대인의 병은 이런 하나님과의 분리, 자신과의 분리, 이웃으로부터의 분리에 뿌리를 깊게 내리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설교를 통해서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사람을 치유했다고 하는 자유주의 신학자이면서 유명한 설교가였던 미국 리버사이드 교회의 에머슨 포스트잉 목사가 어떻게 해서 치유의 설교를 하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에머슨 목사는 자기 교회 교인과 만나 상담을 하는데 상담이 끝난 후에는 그 사람을 위해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기도를 받은 교인은 나가면서 “이제 나는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다음 주일에 그 문제를 가지고 설교를 했더니 교인들 가운데 엄청난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방송했습니다. 이 원리를 깨달은 목사님은 계속 개인문제를 설교하고, 방송을 하였는데 주일이면 2억 가운데 1억의 인구가 에머슨 목사의 설교 방송을 들으며 은혜를 받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뉴욕을 방문하는 관광객이 가장 제일 먼저 방문하게 되는 곳이 리버사이드 교회라고 합니다.
현대에는 목사님의 설교와 기도를 통해서 많은 역사가 일어나고 있고 또 죽었던 생명이 다시 살아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미국 의학 연구팀의 연구 보고에 의하면 신체적인 문제로 의사를 찾는 환자들 가운데 50~70%가 신체적 문제와 함RP 영적 이상 증세를 보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연구팀의 한 의사는 자기를 찾아온 환자의 절반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의사의 도움보다는 목사의 도움을 훨씬 더 필요로 하고 있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환자들이 말하는 신체 증상을 자세히 들어 보면 환자 자신의 삶 전체를 도와줄 수 있는 어떤 사람을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현대 의학과 과학이 다 증명한 사건인데, 주일날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박장대소한 사람의 상태를 조사해 보면 적어도 몇 주 동안은 어떤 병도 감히 접근을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목사님 설교를 듣고 배꼽 잡고 한 번 웃었는데, 우리 몸 안에서는 엄청난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구체적으로 증명된 호르몬인 카테콜라민, 엔돌핀 등이 쏟아져 나오는데 평상시의 70~80배가 된다고 합니다. 호르몬이 분비되어 몸 안에 저장되는데 그것이 저장되어 있는 동안에는 어떤 병균도 근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몸 안에서 이런 호르몬만 분비되면 병이 없는 줄 아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영도 깨끗해야 합니다.그래서 미국에서는 사람의 웃음이 영의 활성화와 어느 정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지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다고 합니다.오하이오 주의 어떤 목사님이 웃음으로 교인들에게 은혜를 끼치고 치유한다고 해서 가본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단에 올라가서는 성경 본문을 읽고 그냥 웃습니다. 말씀을 조금 하다가 다시 웃습니다. 꼭 미친 사람이 웃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교인들도 처음에는 그냥 쳐다만 보다가 나중에는 같이 웃는 것입니다. 한 10분 이상 웃음이 계속되다가 나중에는 그 웃음이 울음으로 바뀝니다.그런데 우리가 크게 웃으면 우리 영의 때가 벗어지면서 죽어 가는 영이 점차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즉 정신이 달라지는 것입니다.열 명씩 거의 같은 성격의 소유자를 두 그룹으로 나누어 한 그룹은 계속 웃도록 하고 다른 그룹은 그냥 내버려 두었다가 며칠이 지난 후 충격적인 소식을 두 그룹 모두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웃는 그룹은 일어난 사건에 대해 의논을 한 후 해결 방법에 대한 의견이 나왔는데, 웃지 않던 그룹은 전부 다 혼이 나가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더랍니다.웃음이라는 것은 하나님RP서 인간에게 주신 놀라운 은총입니다.반대로 울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감격해서 눈물을 펑펑 쏟고 울었다면 그 효과는 엄청납니다.
어느 기도원에서 하는 부흥회에 참석한 적이 있는데 설교 내용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다만 교인들을 계속 웃기고 계속 울리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끝나고 난 후 교인들은 한결같이 많은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웃고 울리는 설교를 한다면 교인들 마음속의 상처는 이미 다 아물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알려진 심리학자이자 치료자이기도 했던 칼 융이 죽기 2년 전, 영국 BBC방송국에 나와 고백한 바에 의하면, 비록 그가 치료한 환자들이 중년층 이상의 사람이었거나 정신적인 환자였다고 해도 영적인 장애가 병의 근원이 아닌 환자를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환자의 영적인 장애를 제거해 주었을 때 또한 회복되지 않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고 고백하였습니다.이런 측면에서 생각할 때 인간의 영적인 차원과 정신적, 신체적 차원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목회자는 인간의 병과 치유에 대해서도 중대한 책임을 지니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 교회에서는 치유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한마디로 치유의 기적이 거의 모든 교회에서 경시되어 오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2. 치유의 역사적 이해 초대교회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치유에 대한 교회의 자세는 그 당시 주위 세계를 지배하는 과학과 철학 사상이 미치는 주위 정세 변화에 크게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치유에 대한 교회의 태도 변화는 학문적?신학적으로 엄격한 연구가 되어진 다음에 영향을 받았다기보다는 어느 개인이나 또는 몇 사람의 왜곡된 사고와 사회적인 혼란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충격을 줍니다.
저스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오리게네스, 터툴리안 등과 같은 초기 기독교 학자들에 의하면 치유가 ‘영적 능력의 신들림’이라고 인정하는 듯한 태도가 조금 엿보입니다.그런데 이런 기독교 풍토에 영지주의가 침입하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을 마음과 육체로 구분하여 육체적인 면은 무시하고, 영적인 요소만을 중시하는 영지주의는 마음과 육체를 하나의 연합체로 보고 있었던 히브리나 유대 기독교인들에게는 낯선 사상이었지만, 헬라 사상이 그 당시 사회를 주름잡고 있던 상황에서 기독교인들은 큰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헬라 철학의 사상적 침범은 당장에 치유 목회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습니다.성 어거스틴의 신학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준 헬라의 철학자는 플로티노스에 의하면 인간이란 완성 단계를 향하여 가고 잇는 존재라고 합니다. 이 철학자는 육체를 영(soul)안에 내재하고 있는 존재로 보았고, 영은 육체에 생명을 부여하는 원존재이지만 영과 육체는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플로티노스에 따르면 인간은 완성으로 가는 도상에 서있는 존재이며, 여기서 완성은 영이 육체로부터 완전히 독립하는 상태에 다다르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육신이란 한 인간이 완성에로 향하여 가는 데 걸림돌이 될 뿐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헬라 철학 사상의 토대 위에 세워진 어거스틴의 신학 사상에서 인간의 신체적 고통이란 것은 영적인 완성단계의 도달을 위해 꼭 필요한 요소였습니다. 어거스틴의 초기 기록을 보면 치유나 기적을 용납하지 않았으나 말년에 임종을 앞두고 기적적인 치유 체험을 하면서 치유를 인정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치유 체험이 그가 남긴 방대한 교리를 뒤바꾸기에는 너무 늦었던 것입니다.기독교 치유 사상에 영향을 끼친 초기 교부 가운데 한 사람은 성 제롬(St.Jerome)입니다. 그는 광야의 교부로서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제롬은 헬라어 성경에 나오는 치유(heal and cave)라는 어휘를 라틴어로 번역할 때 영혼 구원을 위미하는 어휘인 'Salvo'로 번역하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습니다.이런 기독교의 치유 사상은 11세기 이후 헬라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사상이 기독교 신학 사상의 발판을 이루면서 더욱더 큰 타격을 받게 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증명 철학입니다. 그러므로 눈으로 확인하고 숫자적으로나 실험으로 결과를 얻어 내고 증명할 수 있는 것만이 진리요 참 지식으로 여겼습니다.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사상의 일부를 받아들여 중세기 최대의 신학 사상을 확립한 사람은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입니다.
이들의 신학에서 하나님은 체험보다는 지적인 활동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분으로 인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성령의 은사는 설자리가 없어지고 맙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의 삶 속에 파고들 수 있는 가능성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결국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이 지배하던 중세기 교회에서는 하나님과 인가의 만남에서 이루어지는 치유는 자리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기독교 치유에 대한 부정적인 사상은 16세기 종교개혁 이후에도 계속 이어져 내려오게 됩니다.
수학, 물리학, 철학 및 신학에 대한 새로운 이론들이 물밀 듯이 쏟아져 나왔지만 이런 이론들은 모두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사상 이론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들이었기에 기독교 치유가 자리잡을 수 있는 여지는 여전히 보이지 않고 있었습니다.16세기와 17세기의 과학자 지성 세계를 지배하다시피 했던 데카르트(Rene' Descartes)는 생각하는 것이 인간 존재의 총체적 본질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이성적 사고를 강조하면서 이성과 논리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데카르트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학문, 종교에서는 물질세계를 초월하는 영적인 세계가 인정되기는 어려웠습니다.18세기에 등장한 역사성서 비평학은 복음서의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려고 애썼지만 이들 역시 합리주의적인 철학 사상으로 옷 입고 살아온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신약성서에 나오는 치유 기사들을 조작된 이야기 정도로만 생각하였습니다.19세기에 접어들면서 자유주의 성서 비평운동이 일기 시작하지만 이들 역시 합리주의적 사상으로 무장되어 있었기에 성서의 치유를 전부 수용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이들에 의하면 복음서의 치유 기사 가운데서 육체의 치유는 사실이 아니지만 히스테리성 장님의 치유 기사 정도는 충분히 있을 수 있었던 사건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도 인간 예수에 의해서만 치유 행위가 가능했을 뿐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에 의한 치유는 아니라고 믿었던 것이 조금 아쉽습니다.근대에 들어서자 치유신학에 대한 새로운 시도가 일어났는데 치유기적에 관한 신학에 강조점을 두었던 성경운동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1800년대 후반에 ‘크리스찬 사이언스’ 운동이 시작되었는데 이들은 모든 질병은 정신장애에서 오고, 모든 치유는 올바른 믿음과 지혜로부터 일어난다고 보는 이교집단이었습니다. 이 운동은 마음과 영의 능력에는 강조점을 두었지만 육체의 가치는 부정하는 이원론적 사고를 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에 일어난 실존주의와 “신은 죽었다.”라고 선포한 니체의 초인 사상은 기독교에 의한 치유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었습니다. 오직 현재 존재하는 순간만이 진실이라는 사상으로 초자연적이고 영적인 실체를 전혀 인정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현존을 초워하는 어떤 세력도 자연세계에 파고들 수 없다는 사상입니다.20세기를 주름잡았던 신학자들 가운데 본회퍼, 불트만, 바르트 같은 학자들은 복음서의 치유 기사들을 초대 기독교인들이 믿을 강화시키기 위해 꾸며 낸 신화로 믿고 있을 정도입니다.
이들에 의하면 예수님 당시에도 일어나지 않았던 치유가 오늘날에는 더더욱 일어날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지금까지 이 세계를 지배해 왔던 철학 사상, 과학 및 신학 사상이 기독교의 치유사역을 용납하지 않는 상황 아래서 치유에 대한 생각은 신학교 교실에서나 교회에서 존중되기는커녕 무식한 사람들이나 믿는 미신으로 치부되어 왔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그러나 이렇게 기독교 치유가 푸대접을 받는 현실에서도 교회 여기 저기서 치유 사건이 일어나고 있었고, 1928년 영국 성공회 회의에서는 처음으로 치유를 교회 목회의 필수적인 활동으로 선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3. 복음서에 나타난 치유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행하신 세 가지 사역, 즉 말씀의 선포와 가르침과 치유가 예수님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 세 가지 구원사역 가운데서 예수께서 특히 치유사역에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셨다는 것은 우리 모두 익히 아는 사실입니다.예수님의 활동 당시 유대 사회가 지니고 있엇떤 치유에 대한 생각은 부정적이었습니다. 신명기에 의하면 질병이란 인간이 지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뜻에 거역하거나 율법을 지키지 않았을 때 나타난 결과가 질병이었습니다. (신 28장) 그래서 많은 경우 환자나 불구자는 사회로부터 소외당하거나 무시되었습니다.그러나 병자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는 전혀 달랐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예수께 있어서 치유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데, 인간의 신체와 정신 건강에 대해서 공자나 석가 혹은 이슬람 종교 지도자를 포함한 다른 어떤 종교 지도자들보다 훨씬 더 깊은 관심을 가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첫 번째로 복음서 중 가장 먼저 쓰여진 마가복음서에 의하면 치유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비해 더 많은 지면을 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체 복음서 기사의 25%가 치유 기사나 치유 이야기로 채워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치유를 몇 가지로 나누어서 분석, 정리하고자 합니다.
첫째, 예수님의 치유는 하늘나라가 우리에게 임하고 있다는 증거였습니다. 마가복음 기자는 예수께서 처음 보여 주셨던 권능이 마귀를 쫓아내는 치유 행위였음을 보여 주고 있고, 마태와 누가 역시 치유가 그리스도 자신이 누구이며 그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나타내 주는 데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는 요인 가운데 하나였음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마 11:4~5, 눅 13:22) 즉,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치유 행위는 구원사역의 핵심이었던 하나님 나라의 전파와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세례 요한이 제자를 보내어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낸 분이신가를 알고자 했을 때,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 11:4~5)라고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치유사역이야말로 그가 하나님께서 보낸 메시아이심을 확실하게 보여 주는 증거가 됩니다.
둘째, 그리스도는 기존의 우주법칙을 넘어서 치유한 것이 아니라, 다만 인간이 알고 잇는 상식을 넘어서는 고차원적인 세계의 능력으로 치유역사를 행하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에게는 있을 수 없는 기적이지만 하나님의 창조 질서 안에서는 자연스러운 역사일 뿐입니다.
셋째, 그리스도의 치유 동기는 인간의 아픔에 대한 깊은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인간을 너무도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 사람의 영, 정신, 육체가 완전해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병든 인간의 몸과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을 불어넣어서 그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서기를 원하셨습니다.
넷째, 그리스도는 죄와 믿음과 치유가 서로 깊은 연관이 있음을 아셨습니다. 지붕을 뚫고 내려온 중풍병자의 치유에서 볼 때 그리스도가 먼저 죄를 용서해 주셨고 그 다음에 치유의 말씀을 하신 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육체의 치유만이 아니라 마음과 영이 먼저 하나님의 깊은 사랑으로 치유함을 받을 때 그가 온전히 치유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하버드 대학교 의학부와 신학부에서 공장 노동자 1,200명을 상대로 ‘침’ 검사를 했습니다. 사람은 은혜를 받으면 침이 달라진다고 하는데 조그만 용기에다 골고루 침을 뱉도록 해서 세균을 넣은 다음 현미경을 통해 어떤 침이 저항력이 강한가를 알아 보는 실험이었습니다.
조사 결과 신앙을 통해 마음속에 뜨거운 사랑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침은 살균력이 있어 어떤 세균이 들어올지라도 그 자리에서 즉사한다고 합니다.그러나 마음속에 사랑이 식었거나 절망, 좌절감에 빠져 잇거나 불안, 초조, 걱정 속에 있는 사람들의 침에 세균을 넣으면 심할 경우 2시간도 안 돼서 30배 혹은 40배로 증식한다는 것입니다.우리가 예수를 믿고 신앙을 갖는 순간부터 우리 안에 엄청난 역사가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교인들의 질병 상태를 세계적으로 가장 권위 있게 연구한 사람이 웨인로치인데,
그에 의하면 교인들은 목회자의 영적인 젖을 먹고 사는데 목회자가 교인에게 영적인 젖을 주지 못하면 교인들은 병들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그런데 웨인로치의 보고에 의하면 미국 내 97%의 목사들이 교인에게 영적인 젖을 못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병이 들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교인들은 목회자의 영적인 능력과 힘을 받아 사는 것인데 목회자가 영적인 젖을 먹이지 못하면 신경과 정신이상, 가정 문제 등 여러 가지 문제가 범람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님의 영적인 능력이 회복되어 교인들에게 다시 부어 주기 시작하면 교인들의 병적인 모든 증세는 서서히 사라진다는 것입니다.그래서 병든 목사님들은 허전함, 무기력증, 우울증, 외로운, 도곡감 등을 느끼게 되는데 이 증세가 심하면 무슨 뾰족한 수가 없을까 하여 기적을 일으키는 방법을 배우러 다닙니다. 그러나 문제는 어떤 방법을 배우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속사람이 변해야 영적인 힘이 솟아난다는 것입니다. 먼저 내 자신부터 변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종종 믿음으로 인해서 치유가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했느니라”(막 5:34;10:52, 눅 17:19). 이와 같이 믿음으로 인한 치유는 인간의 믿음과 하나님의 능력이 상호 작용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어떤 유명한 학자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는데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적용되리라 생각합니다.
20대의 목사들은, ‘이 세상을 내가 한 번 변화시켜 보겠다.’라는 꿈을 갖고 삽니다. 그러다가 40대가 되면 세상을 바꾸기는커녕 자기 주위조차 바꾸지 못하여 이렇게 기도 제목이 바뀝니다. “내 주위 사람들만이라도 변화시킬 수 있도록 은총을 주시옵소서.”그렇게 기도를 하다가 어느덧 70대가 됩니다. 70대가 되어서 주위를 보니 하나도 변한 게 없습니다. 그제서야 깨닫는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여 내가 먼저 변해야 되겠습니다. 나를 변화시켜 주시옵소서” 결국은 70대가 되어서야 변화가 되는데 변화된 다음에 느끼는 것이 많아집니다. “내가 먼저 변해야 한다는 것을 일찍 깨달았더라면 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도 가졌을 텐데 일찍 못 깨달은 것이 한이로다.”라고 하면서 인생을 마감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면에서 현대 목사님들이 앓고 있는 병을 진단해 보고자 합니다. 현대 목사님들이 앓고 있는 병이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목사들이 예수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가장 많은 이야기를 하고 가장 많은 지식을 갖고 있지만 예수님과의 거리는 가장 멀다는 것입니다.하나님과 가까이 있게 되면 그 안에서 엄청난 역사가 일어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엄청난 역사는 일어나지 않고 반대로 무기력증, 좌절감, 외로움, 허전함 등이 끊임없이 목사들을 따라다닌다는 사실입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제가 미국에서 공부하고 올 때 제 목적은 평신도들을 훈련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 와서 보니 진짜 병들어 있는 사람은 목회자들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우리 한국이 사는 길은 목회자가 먼저 변화되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도대체 어떤 병에 걸렸기에 예수에게서 가장 멀리 있을 수밖에 없는가를 진단해 보았더니 사탄의 세력이 목회자들을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가로막고 있는 사탄의 세력이 무엇입니까? 인기 있는 목회자가 되려는 욕구입니다.
능력 있는 목회자, 훌륭한 목회자가 되어 보고 싶은 것입니다. 이런 욕구, 저런 욕심들이 마음속 깊은 곳에 들어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들어가 역사할 자리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본인이 그것을 전혀 모르고 ‘나는 왜 이렇게 힘이 없나’, ‘나에게는 왜 능력이 안 나타나나’라고 하면서 시험에 빠지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이런 시험에 걸렸던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께서 사십일 동안 금식하시고 나왔을 때 가장 먼저 사탄이 유혹한 것은 돌덩이로 빵을 만들어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돌로 빵을 만들면 저 사람이 얼마나 능력있는 사람인가 모두들 우러러볼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유혹에 빠지지 않으셨습니다.
두 번째 유혹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것이었습니다. 높은데서 떨어져도 하나도 다치지 않는 것은 현대적인 의미로 인기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도 거절합니다. 마지막으로 세상 권세를 주겠으니 저을 하라고 유혹하지만 모두 다 거절합니다. 이 세 가지 유혹에서 벗어났을 때 그는 비로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일으킬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인기 있는 목사가 되고 싶은 유혹에 시달립니다. 오늘도 이런 유혹에 걸려들지 않게 해달라고 수없이 기도했습니다. 저는 이 시험에서 제대로 빠져나갈 길이 아직 없습니다. 저는 육신의 정욕과 날마다 싸웁니다. 왜냐 하면 이런 유혹에 걸려들면 그나마 내게 있던 생명력이 사라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현대 목사님들의 병은 인간을 잘 모르는 데 있습니다. 사람을 가장 심도 있게 만나는 사람이 바로 목회자입니다. 그런데 목사님들이 인간에 대해 가장 어둡습니다.성경에 보면 목자가 양을 알면 양도 목자를 알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목자가 양에 대해 잘 모릅니다. 그 결과 목자와 양이 함께 병들어 둘 다 수렁 속을 헤매다 병원에 입원하게 됩니다.
결혼해서 3년 된 부부가 이혼하려고 어느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랬더니 이 목사님이 노발대발하면서 이혼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므로 절대로 허락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 부부는 돌아가서 몇 달 후 이혼했고 결국 그 교회를 떠났습니다.그런데 똑같이 3년 된 부부가 이혼문제를 가지고 다른 목사님을 찾아 갔습니다. 이 목사님은 양을 아는 목사님이었기 때문에 인간의 만남은 고정적인 것이 아니고 반드시 사이클이 있으므로 하나하나의 과정을 거쳐 간다고 전제하고 권태기를 넘어서면 동반자로 일생을 함께 살 수 있는 성숙기로 접어들테니 사랑으로 모든 것을 참고 견디라고 권면했습니다.이 부부는 다시 정말로 좋은 부부가 되어 그 교회에서 충성된 집사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인간을 안다는 것은 상담을 할 줄 알고, 치유를 할 줄 안다는 것이며, 올바른 진단을 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인간을 볼 줄 알고 치유할 줄 아는 목사님은 교인들에게 예방과 처방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런 교회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는 엄청난 봉사를 감당합니다.인간을 잘 아는 목사님은 자기 교회의 교인들을 청소년 때부터 건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신앙적으로 잘 훈련시켜 놓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자라 40, 50대가 되면 엄청난 역사를 일으키게 됩니다.그런데 오늘날 우리 한국은 중고등학교 때부터 건전하고 건강한 삶을 살 수 없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왜냐 하면 공부 때문에 사람들과 어울려 기도하고 생활하는 삶이 없습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청소년기에는 이성에 대한 욕구가 강렬합니다. 이성에 대한 욕구가 청소년 시절에 교회에서 함께 활동하면서 충족이 되면 어른이 되어서 틀히 40, 50대에 가서도 별문제 없이 잘 보낼 수 있습니다.
4. 인간의 병든 마음에 대한 예수님의 분석현대인의 심리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후반 프로이트에 의해서였습니다. 프로이트는 왜 인간이 병드는가를 연구하면서 병의 원인이 인간의 정신기능에 이상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의식과 무의식을 이야기하면서 무의식이 인간의 정신 기능에 중요한 작용을 한다고 주장했습니다.그런데 2천 년 전 예쉐서도 위와 같이 인간의 심리를 꿰뚫어 보시고 병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진단하셨습니다.
첫째,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면 병들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인간의 마음 한가운데 하하님의 계실 자리를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 안에 하나님과 만날 수 잇는 하나님의 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자리에 하나님을 모시지 않으면 인간은 영이 흔들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영과 마음과 육체는 서로가 깊은 상호작용을 하고 있기 때문에 영이 흔들리면 곧 이것을 병이라 하셨고 영이 하나님을 잃어버리면 신체까지 병들게 되므로 그 영부터 먼저 치유하시고 신체를 치유하셨습니다.
둘째, 예수께서는 씨 뿌리는 비유(마13:3~9, 눅 8:4~8)에서 병든 인간의 심리를 분명하게 설명하셨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는 예수님의 위대한 심리학 강의라고 생각합니다.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유대인들을 상대로 말씀하셨는데 유대인들의 심리 상태, 즉 병든 심리 상태를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분석하셨습니다.
(1) 길바닥 마음길바닥 마음은 바리새인들의 마음으로서 딱딱한 마음이요, 도저히 뚫고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자기 방어적인 마음입니다. 자기 교리, 자기 생각, 자기 전통, 자기 의견으로 꽉 차서 다른 사람의 어떤 것도 받아들일 수 없는 마음입니다. 자기만 옳고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은 잘못되었다고 하는 심리가 유대 종교인들의 마음입니다.위와 같은 길바닥 마음은 오늘 우리 종교사회에서 자주 만날 수 있습니다.
자기 신앙만이 최고라고 생각해서 자기와 다른 어떤 신앙도 용납하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로 인해서 많은 싸움과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내 신앙, 내 사상, 내 의견을 절대화하는 순간 이미 우리는 길바닥 마음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예수께서는 이런 마음을 병이라고 하셨습니다. 교회에서 기도하다가 갑자기 방언이 터졌습니다. 방언을 받아 한참 교만해지다 보니 나중에는 방언 못하는 사람들을 다 바보로 여기면서 판단하기까지 합니다. 이런 것들이 다 길바닥 심리입니다.
(2) 바위 덩어리 마음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으나 무의식 가운데 자기도 모르는 저 밑바닥에 어떤 응어리가 들어 있어서, 그 응어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문을 가로막고 잇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복음의 씨앗이 들어가서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헌대 심리학은 바로 이 무의식 가운데 우리의 영적, 정신적 기능을 마비시키는 이 바위 덩어리를 병의 원인으로 지적합니다. 이 바위 덩어리는 자라는 성장 과정에서 깊은 상처를 받았을 때, 어른들로부터 자주 들었던 부정적인 이야기가 하나의 관념이 되어서 우리 마음 저 밑바닥에 자리를 잡게 됩니다. 마음속에 자기 부모와의 사이에서 풀리지 않고 맺힌 응어리가 있으면 이 응어리는 그가 성장한 후에도 그의 영, 정신, 신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성장 과정에서 ‘누구는 나쁘다’라는 이야기를 부모 또는 다른 어른들로부터 자주 듣고 자라면 우리 마음속 밑바닥에 큰 바위 덩어리가 자리잡게 됨으로 성장해서 어른이 된 후에는 그 바위 덩어리가 시키는 대로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이것을 ‘한’이라고 불렀습니다.
제가 자주 이 예화를 듭니다만 어느 목사님이 교회에 부임해 가서 1년쯤은 괜찮았는데 1년이 지나자 장로님 한 분이 사사건건 제동을 거는 것입니다. 내성적인 목사님은 ‘저 장로가 나를 미워하는구나’라고 생각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습니다. 나중에는 설교를 시작하면 맨 앞자리에서 신문을 읽고 설교가 끝나면 읽던 신문을 내려 놓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다가 이 목사님의 눈이 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히스테리나 신경증 환자에게서 얼마든지 볼 수 있는 현상인데, 신앙적으로 사이가 좋으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수 있지만 부정적이 되면 상대방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기도 합니다.목사님은 결국 교회에서 쫓겨나게 되고, 1년 후 그 장로님은 췌장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목사님은 그 후 집에 그냥 있었는데 2년이 지난 후 눈이 다시 회복되어 지금은 훌륭한 목사로 목회를 잘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설교할 때 신문을 들고 읽을 정도면 그 마음속에 엄청난 응어리, 바위 덩어리를 안고 있는 것인데, 그것을 가진 채 장로 생활을 해온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목사님들이 이 장로의 바위 덩어리에 의해 상처를 입었겠습니까? 양을 아는 목사님이라면 즉각 치료를 했을 텐데 그러지 못하고 적대자로 보았으니 둘 다 피해를 보게 된 것입니다.나중에 알고 보니 장로님은 유명한 목사님의 장남이었는데 아버지는 그 장남을 목사로 키우려고 어릴 때부터 호되게 훈련을 시켰다는 것입니다. 어린이를 어린이로 여기지 않고 고된 훈련을 시키다 보니 ‘떠들지 마라’ ‘울지 마라’ ‘욕하지 마라’ ‘싸우지 마라’ 등등 어른도 하기 힘든 일을 어린아이한테 강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아이는 한 번도 자기 감정을 아버지한테 발산하지 못한 채 자기 내부로만 자꾸 억눌렀습니다.분노의 감정을 발산하지 못하고 억누르면 응어리로 내재하게 됩니다. 결국 이 응어리는 아버지에 대한 바위 덩어리로 존재했던 것입니다.그 장로님은 자기 아버지를 얼마나 증오했는지 모른답니다. 그런데 아버지와의 응어리가 풀리지 않은 채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다 보니 장로님의 바위 덩어리는 목사만 보면 들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목사한테 어떤 명분만 생기면 그걸 잡고 늘어지는 것입니다. 환자들은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는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려고 합니다.
여러분의 교회에도 이런 환자들이 가득 차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교인을 사랑해야 하는데 교인을 적으로 보면서 사랑하면 됩니다. 나의 모든 것을 털어 놓으며 편하게 지낼 수 있는 동료로 보면 그런 목회자는 오래 못 갑니다. 이런 환자들은 만나서 몇 달 동안은 계속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기만 하면 됩니다. 자기 아버지에 대해 맺혔던 한에 대한 이야기를 적어도 일고여덟 번이라도 털어 놓았더라면 응어리가 전부 녹아져서 나가 버릴 텐데, 그것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장로님은 한의 응어리가 췌장으로 들어가 암이 돼서 죽었고 목사님도 피해를 입게 되었습니다. 모든 교인들의 문제는 교인들의 환자 심리에서 발생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3) 가시덤불 마음이것은 무의식이 아니라 눈에 드러나게 의식적으로 나를 괴롭히는 사건들에 의해서 병든 마음입니다. 자기를 괴롭히는 요인이 무엇인지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 시달리다 보니 결국 생명력을 잃어 죽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바꾸면 내가 나 스스로 자유를 누리며 사는 것이 아니라 나의 힘을 다른 사람들에게 다 주어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사람, 다른 어떤 사건들이 나에게 힘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자진해서 내 힘을 주어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은 수없이 많은 사람들과 사건들에 에워싸여 이 세상을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많은 사람, 많은 사건들에 에워싸여 있으면서도 이런 주위 환경에 자신의 힘을 빼앗기지 않고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지나치게 주위에 신경을 쓰다 보니 자신의 힘은 간 곳 없고 기진맥진하다가 결국에는 쓰러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과 어울리며 싸우며 살면서도 자신의 힘을 그들에게 빼앗기지 않는 마음이 바로 건강한 마음입니다.예수께서는 씨 뿌리는 비유에서 길바닥 마음, 바위 덩어리 마음, 가시덤불의 마음을 병든 마음으로 단정하시고, 이 마음이 아직도 남아 있는 한 육십 배, 백 배의 열매를 맺는 마음, 건강한 마음, 치유함을 받은 마음, 구원받은 마음이 될 수 없다고 가르치십니다. 한마디로, 우리의 병든 마음을 바꾸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5. 인간의 병 ① 신체적인 병부상당했거나 병에 걸린 상태 또는 선천적인 결함에 의한 병으로 신체를 직접 치유해야 됩니다.② 정서적인 병감정의 상처로 인해 생긴 병을 의미합니다. 어린 시절에 사랑받지 못했거나 어떤 일로 마음에 상처를 받은 것이 원인이 되어, 병적이고 파괴적인 행동을 일으킬수 있는 것으로 내적 치유가 필요합니다.③ 관계로 인한 병병든 인간관계로 인해 발생하는 것으로서 화해와 용서만이 치료제가 될 수 있습니다.④ 사회구조와 자연 생태계에서 병 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6. 치유과정(1) 치유 방법의술이나 상담, 교육 등에 의한 자연적인 치유와 말씀, 기도, 성경, 예배에 의한 초자연적인 치유 방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연적이거나 초자연적이거나 모두 다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으므로 치유를 위해서는 둘 다 사용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2) 치유 과정첫째,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합니다.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들어와 임재하실 수 있도록 마음의 자리를 마련해야 합니다.둘째, 문제를 명료화시켜야 합니다.나에게 무엇이 일어나기를 원하는지 분명히 해야 합니다.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신체적, 심리적, 영적인 것 중 어느 것인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눅 18:35~43)셋째, 용서가 선행되어야 합니다.치유가 일어나기 전에 먼저 용서가 이뤄져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용서와 이웃을 향한 나의 용서가 치유 이전에 선행되어야 합니다.(눅 7:47~50)넷째, 치유가 일어납니다.이 과정은 우리를 새롭게 변화시키는 과정인데 과거를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상처를 넘어서 새로운 소망을 발견하는 거입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도 아직 상처 자국을 가지고 계셨지만, 그 상처 자국으로 인해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으셨습니다. 과거의 부정적인 상처들을 넘어서서 사랑의 음성을 듣는 과정입니다.다섯째, 상처입은 치유자의 적극적인 삶은 이웃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7. 결론치유목회란 한 인간의 육신적인 질병 자체에만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질병은 그 사람의 삶 전체의 균형이 어디에선가 파괴되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현상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한 인간의 질병을 치유한다는 것은 그를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도록 하는 일인데 이것은 바로 인간 구원, 그 자체입니다. 이런 치유이자 구원의 역사는 부분적으로 환자를 관찰하기보다는 그가 살고 있고 관계 맺고 있는 삶 전체를 통찰할 때 전인 구원, 전인 건강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폴 투르니에는 인간에세거 영적인 세계와 육신적 세계가 있는데 의학은 육신적 세계만 치유한다고 보고 이런 치유는 부분적인 치유라고 단정하고 있습니다.이런 면에서 생각할 때 인간의 영적인 삶에만 관심을 갖는 목회를 한다면 부분적인 목회요, 부분적인 구원 행위에 불과합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의 목적은 인간을 전체적으로 치유하고 구원시키는 전인 차원의 건강이기 때문입니다.예수님의 삼대 구원사역은 말씀 선포와 가르치는 것과 치유하는 거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치유하는 역사가 복음서의 기록 중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토록 치유가 복음서에 중요하게 다루어졌는데 오늘날 우리 교회에서는 거의 무시되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중세기를 지나는 동안 많은 오류를 통해 잠적해 버렸기 때문입니다.이제 우리 교회는 상담과 치유의 역사를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목자로서 우리의 양을 정확히 알 수 잇는 안목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여러분의 목회는 놀라운 기적과 역사가 일어나는 목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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