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 교리
예정 교리'는 역사적으로도 수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켜 온 기독교 교리 중의 하나이다. 뿐만 아니라 이 교리는 바른 신학과 혼합된 신학을 분명하게 구분해 주는 핵심적인 교리이다. 우리는 이 교리를 흔히 '칼빈의 예정론'이라고 부르며, 단지 종교개혁자 칼빈이 내세운 하나의 주장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것은 어느 한 순간, 어느 한 사람에 의해 고안된 '설'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수많은 의견과 논쟁을 거듭하면서 검증되어 내려온 것임을 알아야 한다. 예정 교리는 어거스틴과 칼빈, 그리고 도르트 회의와 웨스트민스터 회의 등의 역사를 거쳐서 확고하게 정립되었다.
예정이라는 단어?
우리는 예정이라는 단어를 흔히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다'는 의미로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결정론' 또는 '운명론'과 가까운 말이고, 성경에서 말하는 예정은 어떤 역사적 사건들이 이미 정해진 하나님의 계획이나 결정에 따라 발생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을 믿는 우리들은 역사적 사건 하나 하나에 궁극적으로 종교적 가치를 부여하게 된다. 모든 일의 이유와 근거가 하나님의 결정이나 의지에 있으며, 그분의 뜻에 의해 지금 그 일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정 교리는 '하나님 주권주의'와 맞물려 있다.
칼빈은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기 전부터 사람의 결말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예견하였으며 스스로 그렇게 결정하고 명령하신 것이므로 미리 아셨다는 것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처음 사람의 타락과 그로 인해 후손이 멸망할 것이라는 것을 예견하셨을 뿐 아니라 그자신의 결정에 의해서 그렇게 되도록 하셨다."고 하였다. 우리가 택함 받은 백성인가 아닌가 하는 것도 역시 하나님께서 태초에 그렇게 예정하셨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몇 가지 신앙고백문서들을 참고하자면, 먼저 도르트 회의 결정 문서에서는 "하나님은 택자들의 마음을 은혜로부터 부드럽게 하시고 믿도록 하시며, 그의 택자들이 아닌 자들을 그의 의로운 판단에 따라서 그들의 악과 함께 강퍅케 됨으로 내버려두심"과, "이는 그 선택이 불변의 하나님의 작정임과 하나님의 뜻의 자유롭고 기뻐하심에 따른 것"이라고 쓰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는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그의 마음대로 가장 지혜롭고 거룩한 뜻을 따라서 자유롭게 장차 될 일을 불변하게 정하셨으나,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죄를 만드신 자가 아니요, 위법이 피조물의 의지 속에 주어진 것도 아니요, 또한 자유나 자유의지를 빼앗긴 것도 아니고 오히려 확립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렇듯 예정 교리는 인간의 생각이나 상상에서 유추된 것이 아니며,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게 오직 성경에서만 그 분명한 근거를 삼고 있는 참된 교리이다. 예정 교리는 결코 결정론적인 것이 아니며, 흔히 말하는 것처럼 인간의 자유 의지와 서로 충돌하지도 않는다. 예정 교리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지혜로우시고 자유로우신 작정을 그분 뜻대로 펼쳐 나가심'을 그 핵심 내용으로 하고 있다. 또한 예정 교리는 구원의 사역에 있어서 결코 인간이 중심이 되거나 그에게 어떤 역할이 주어지는 것이 아닌,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서만 이루어짐을 명백히 나타내는 교리이다. 그래서 인간으로 하여금 구원받은 기쁨으로 오직 하나님께만 그 감사와 영광을 돌리도록 하게 하신 것이다. 이 예정 교리는 지극히 선하시고 지혜로우신 하나님의 성정을 기초로 하기에 어느 누구도 이 하나님의 예정에 대해서 반발하거나 무시할 수 없다.
한국 교회의 예정 교리
예정 교리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고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가 됨에도 불구하고, 사실 한국 교회에서 이 예정 교리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깊이 있게 가르치는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다.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특히 한국에 처음 개혁교회가 전파될 당시 피선교지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많은 교회들이 정통 교리를 포기해 버렸던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쉽게 말해서, 깊이 있는 신학을 하지 못한 목회자들이 예정론을 복음 전도의 방해 요소로 잘못 이해하여 이 교리를 수정하거나 가르치지 않았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초기 선교지에서 전도를 쉽게 하기 위해 보편구원론을 추구했다는 것이다.
보편구원론이란
"그리스도는 전 인류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인데,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택함 받은 일정한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려있다는 말이다. 이 교리는 선교적 차원에서 설득력이 대단히 강한 교리로서 유아기적인 초기 한국 교회에 쉽게 접목이 되었다. 그러나 이는 당연히 정확한 예정 교리에 위배된다. 초기 한국 교회는 선교적 차원에서 복음을 받았기 때문에 교회의 핵심 교리인 예정 교리를 철저히 배우지 못하였고, 선교 지향적 목적을 위해 보편구원론적인 입장에 길들여졌다.
1907년 초기 한국 장로 교회가 교회의 신앙 고백으로 채택한 '12신조'는 영국의 장로 교회가 1904년 인도의 장로 교회를 위해 작성하고 채택한 것이었다. 12신조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내용을 그대로 발췌·요약한 것처럼 보이나, 1890년에 작성되어 채택된 영국 장로 교회의 신앙고백서도 참작하여 만든 것으로서 예정에 대한 고백이 분명하게 없는 것이었다. 이것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임의로 수정하려는 경향을 따른 것임을 알 수 있다. 초기 한국 교회는 선교가 가장 시급한 문제였고, 이를 위해 단일 교회를 형성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예정 교리 중 특히 유기론에 대한 고백이 빠졌고, 그리스도의 제한 속죄에 대한 고백이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는 신조를 만들게 되었다. 이것은 한국 초기 선교지 신학의 한계라고 볼 수 있으며, 유아기적인 교회로서 분별력이 없었기 때문에 일어난 잘못이었다.
보편 구원론은 "구원받을 자가 예정되어 있다면 택함을 받지 못한 자에게 전도하는 일은 무의미한 일이 된다"며 제한 속죄 교리를 강하게 반대하였다. 보편구원론자들은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 '전세계'를 위하여 죽으셨으며, 또한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받기를 원하신다고 주장한다. 디모데전서 2장 3,4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되어 있으며, 또 에스겔 33장 11절에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는 말씀이 있고, 베드로후서 3장 9절에도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는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모든 사람은 주님께서 택하신 백성 모두를 가리키는 것이며, 악인은 불택자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타락하여 하나님과 연합할 수 없게 된 인간의 상태를 말한 것이다.
예정론을 운명론으로의 오해
우리 의식 속에는 동양 사상의 전제들이 너무 많이 남아 있어서,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더라도 이러한 의식의 혼합이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만다. 대표적인 것이 예정 교리를 결정론 혹은 기계적 숙명론과 혼동하여 이해하는 경우이다. 때문에 한편으로는 예정 교리를 운명론으로 대체하여 가르쳐버리는 일이 발생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예정 교리를 거부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전자는 어떤 부작용을 낳게 되었는가? 이런 가르침은 사람들의 죄책과 책임감을 제거해 버린다. 죄의 원인을 하나님께 돌리고, 신자가 마땅히 이 땅위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야 할 신앙의 도리들을 외면하게 만든다. 자연히 그의 생활에서 절제와 인내는 사라지고, 방탕하게 된다. 또한 구원에 대해서도 결정론적으로 보아서, 전도의 필요성에 대해 오해하고 방관하는 자세를 취하게 된다. 예를 들면 '내가 전도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것이다'는 식의 잘못된 사고를 갖게 만드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는 대부분 예정 교리의 의미를 단순하게 이해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예정 교리에 나타난 하나님이 마치 인정머리 없는 폭군처럼 보이는 것이다. 또 하나님은 편파적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어떤 사람은 선택하시고, 다른 사람은 버리시는 것이 공평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이 그러실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수준을 인간의 그것과 같은 수준으로 격하시켜 생각한 결과이다.
예정론에 대한 복음주의의 이해
한국 교회에 자유주의의 도전이 심각해질 때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등장한 것이 복음주의였다. 그러나 복음주의의 근본 원리는 칼빈주의와 달라, 개인적 회심의 체험과 경건한 삶 등을 특별히 강조하게 되었다. 따라서 성경의 근본 원리인 예정 교리를 간과하는 개인주의, 주관주의에 빠지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 결과 인간의 모든 행동이 영원부터 예정되어있다고 할 때 인간이 어떻게 자유와 책임을 갖는 행동자가 될 수 있겠느냐는 딜레마를 갖게 되고, 이를 나름대로 해결하다 보니 원래의 교리가 변질되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을 인간의 구원 서정에 삽입시킨 것이었다. 그러나 예정을 구원의 서정에 삽입하게 될 경우,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보다 오히려 인간의 책임과 개인의 회심 체험이 강조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이 한국 교회는 성경의 진리가 바르게 이해되지 못한 상태에서 지속되었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예정 교리에 대한 무지는 이미 전반적인 현상이 되어버렸고, 따라서 이러한 논의가 오히려 낯선 것이 되어버렸다. 더구나 개교회 성장과 부흥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성경 해석과 설교가 이용되고 있으며, 올바른 교리를 가지고 시작한 신학교마저 점차 변질되어 가는 바람에 이같은 현상은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이에 따라 성도의 신앙은 기복적, 미신적, 신비적 신앙 모습으로 변질되어 갔다. 구원관이 왜곡되었고, 이로 인한 개인의 신앙 모습 또한 주관적이며, 감정적 요소에 호소하는 신앙의 양상을 띄게 되었다.
이러한 신앙은 그들에게 환란 속에서 아무런 위안을 주지 못하며, 구원의 확실성마저도 사라지게 만들었다. 그들은 자신의 운명을 자기의 것(어떤 조건이나 노력)으로 돌려버리는 오류를 범하게 되었다. 이것은 교회 역사에 등장했던 이단 '펠라기우스'나 '알미니우스'적 신앙으로 돌아서 버리는 것인데, 이들의 특징은 열심과 노력, 의지에 따르는 신앙, 즉 신앙의 근거를 자기 자신에게 두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 중심의 신앙이 아닌 자기 중심적 신앙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설정이 잘못된 것이다.
성경의 바른 이해와 바른 교회상
예정론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냉혹함과 황무함만을 주는 이론이 아닌, 창조주와 피조물(인간)과의 관계 있어서 가장 중요한 설명이며 우리 신앙의 은혜의 근거요 소망이자 그를 향한 찬송이 되는 것이다. 예정 교리는 성도들이 환란과 곤고와 위험한 자리에 있게 될 때 평안과 용기의 근원이 되어서 항상 자기의 책임과 의무를 담당케 함으로 꾸준히 덕행을 지켜 나가게 한다(행5:41).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3장 8항에는 다음과 같이 예정론의 유익(有益)을 소개하고 있다. "지극히 신비로운 예정의 교리는 특별히 지혜롭고 조심스럽게 다루어져야 한다. 예정의 목적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지켜 순종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자신들이 효과적으로 부름을 받은 사실과 영생 얻은 줄을 확신케 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교리는 하나님께 찬송과 경외와 존귀를 돌리게 되며, 진실히 복음에 순종하는 자들은 이 교리로 말미암아 겸손해지고 근면해지고 풍성한 위로를 받게 된다."
예정 교리에 구원이 기초하면,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의존한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인한 감사의 생활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인간론 중심에서 벗어나 자신에 대해 비판적이고 겸손케 된다. 그런 구원론은 성도에게 견인과 강한 인내를 가져다주고, 정치,사회에 대한 비판에 있어서도 이신칭의론보다 훨씬 더 엄밀하게 비판할 수 있다. 예정 교리는 단순히 사변적인 기독교 교리의 하나로 보기에는 너무나 근본적인 문제를 가르쳐 주고 있다. 하나님의 위치와 사람의 위치를 분명히 규명해 주며,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인 인간이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가능성을 찾아보려는 끝없는 욕망을 억제시킨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과 은혜 속에 인간의 존재 의미와 구원의 확신을 세우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예정 교리는 신앙과 신학의 중요한 준거점이 되며, 특히 알미니안적 요소가 이 시대의 교회에 깊이 들어와 진리를 왜곡하고 있는 오늘의 상황 속에서 한국 교회를 성경적 신앙으로 돌이키는데 매우 중요한 준거점이 된다. 도르트 회의의 승리는 우리의 신학과 교회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했다. 그 신조는 교회에서 지켜야할 최소한의 예정 교리를 고백하고 있다. 이것조차 포기할 때, 한국 교회의 미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다.
우리가 예정 교리를 대할 때
우리는 논쟁을 위해서, 또는 변증을 위해서 예정론을 언급하기보다는 구원의 확신을 위한 교리로서 고백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나님께서 드러내 보이시지 않는 것을 사람의 지적 호기심으로 알려고 해서는 안된다. 바울은 이 교리에 대해서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라고 고백하고 찬양하였다. 우리는 이 교리를 전파하는데 있어서 함부로 과장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예정 교리는 한국 교회에서 다시금 진리로서 선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