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학

[스크랩] 한국교회를 위한 예배신학적 재고와 방향 (김순환)

수호천사1 2011. 3. 11. 07:04

한국교회를 위한 예배신학적 재고와 방향

 

김순환 교수 (Ph.D./한국성서대학교/예배학)

(이 글은 한국성서대학교 "일립논총"에 실려있는 글)

 

오늘날 구미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예전갱신운동(Liturgical Renewal Movement)의 전개와 더불어 한국의 실천신학자들 혹은 많은 목회자들이 교파적인 배경을 뛰어넘어 기존의 예배관행에 대한 신학적 반성과 더불어 그 방향과 전개에 대해 많은 고민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고민과 더불어서 우리가 현재 직면하고 있는 몇 가지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중 하나는 오늘의 예배가 기독교적 전통의 빛 안에서 정당한 신학적 반영 위에 기초한 내용과 형식을 띄고 있느냐는 것이다. 이미 서구의 예배개혁운동, 그 중에 특히 예전갱신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켜온 교회들은 현재의 개신교 예배가 매우 많은 상징적 영역을 잃어버리거나 배제한 황폐한 의식이 되어있음에 대해 공동의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종교개혁자들의 예배신학에 대한 후세의 그릇된 이해와 더 나아가서는 예배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적절한 이해의 결여에 기인한다.


다른 하나는 설사 예배개혁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나름의 적절한 반성적 대안들을 제시하고는 있다지만 획일적인 범주에서 그치고 있고 지역교회들의 상황에 대해 적절한 고려와 문화적인 변용에 대한 노력들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 개개 지역교회의 상황과 문화적 특징들에 대한 예배와 신학의 적절한 변용의 필요에 대한 것은 이미 세계교회 예배학계에서 상당한 합의에 이른 것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구체적이고 특수한 문화적 상황들에 대한 지역교회들의 후속적 작업들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한국교회 또한 이점에 있어서 예외가 아니어서 그 구체적 노력들이 미진한 가운데 있어왔다.


또 다른 하나는 교회 외적인 것과 관련하여 과연 오늘의 첨단 정보화시대에 대한 예배의 대응은 어떠하여야 할 것인가에 대해 과연 얼마나 진지한 대응을 하고 있느냐의 여부이다. 정보화의 상황은 인간의 인지(cognition)의 매개들(media)을 전격적으로 변화시켰다. 중세의 보는(visible) 예배도, 전통 개신교회의 듣는(audible) 예배도 더 이상 '이것만이...'라는 일원적이고 닫힌 사고로 안주할 수는 없는 상황이 우리의 현실 속에서 빠르게 전개되고 있다. 첨단 정보화 상황하에서 예배의 효율을 기할 수 있는 대안과 그 방향의 제시가 요청되며 이에 대한 대처도 불가불 오늘 우리들의 과제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러한 인식과 관련하여 그간 일부 교파적인 범주 안에서 나름대로 예배의 방향에 대한 대안적 제시들이 시도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나 몇 가지 문제점을 노정하고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 중의 하나는 일련의 노력들이 교회의 전통적인 예배관행에 대한 이해의 선행 없이 대체로 최근 일어나고 있는 에큐메니칼 합의에 의한 예배신학적 입장이나 모델에만 전거(典據)를 두고 논의한다는 점이다. 또 다른 하나는 문화적인 변용의 필요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토착적인 의식들을 적절한 기독교적 평가 없이 기독교예배에 수용할 수밖에 없는 빈약한 예배신학적 배경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산업정보화의 환경에 대한 대응이 미흡하다는 인식도 떨칠 수가 없다.


이러한 문제의식의 토대 위에서 건전한 예배신학적 재고를 심도 있게 다루고 그 실제적인 대책으로서의 예배 의식상의 대안적 방향들을 심도 있게 논의하는 일은 매우 뜻깊고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이러한 예배의식의 대안적 모델을 위한 논의는 한국교회의 예배의식을 풍부하고 균형 있게 발전시키는데 기여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교회의 하나됨에 크게 이바지할 것으로 본다.

 

B. 연구의 방법과 범위

 

이 연구의 방법은 여러 연구들이 최근의 에큐메니칼 모델에 전거(典據)의 대부분을 의존하고 있다는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탐구의 지평을 성서와 기독교 역사 속으로 확대하여 시원적으로 사용된 예배의 초기 유형들, 곧 성서적 혹은 성서외적 열례(列例)들로부터 시작하여 교회의 발전적 단계에서 각각의 문화적 상황하에서 제시된 제 예배유형들을 살펴보는데 우선의 관심을 두고자 한다. 단순한 유형의 제시는 이미 여러 연구들을 통해서 어느 정도 이루어져 왔다는 점을 감안하여 주로 특정의 문화 혹은 사회 상황하에서 예배의 비본질적 요소들에 대한 문화적 변용(變容)의 실례들에 대한 탐구에 초점이 맞추어질 것이며 주어진 상황과 어떤 상관 속에서 특정의 예배의식상의 내용과 요소들이 제정, 시행되었는가에 대한 탐색을 통해 예배신학적 재고와 더불어 새로운 대안제시에 적절한 방법들을 탐구하는데 주안을 둔다. 결과적으로 이런 과정은 오늘날 교회연합적 모델에 대한 일방적 수용에 대해 다소 비평적 논의의 개진을 예상케 한다. 더 나아가서 첨단 정보화시대가 가져온 변화들에 대해서 예배가 어떻게 적응하느냐의 논의도 아울러 병행될 것이다.

 

II. 오늘의 예배의 신학과 경향

 

오늘날 말씀중심의 전통개신교회의 예배와 달리 몇몇 두드러진 특징을 보이는 경향들이 있다. 물론 개신교 전통적 예배의 양식으로서 말씀 중심의, 지성적 예배가 지금까지 존속해 왔던 대로 기독교 저변에 상당한 비중으로 남아 있는 것이 사실이나 이들 가운데에서조차도 새로운 예배신학적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실정이다. 우선 전체적으로 보면 크게 몇 가지로 나눌 수가 있을 것이다. 그 한 가지는 초대교회의 전통을 나름대로 밝혀내고 그 시기의 내용과 유형으로 복귀하고자 하는 경향이다. 또 하나로는 형식과 틀을 벗어나서 성령의 현재적인 역사를 강조하는 경험주의적 예배경향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을 이루고 있는 대표적인 교파들은 특히 오순절주의나 은사주의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 경향은 근자에 발생한 것은 아니지만 끊임없이 지속되는 성장세로 신구교 양진영의 예배에 영향을 주고 있는 그룹이다. 그 외에도 동시대의 문화나 상황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에 따라 파격을 부여하여 형식화되고 지루한 예배에 새로운 도전을 가하는 예배 양식 등이 관심을 모으고 있다.

 

A. 전통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경향

 

오늘날의 예배신학의 동향은 예전갱신에 대한 관심이 큰 것이 사실이지만 전반적으로는 각 교파와 교단마다 다양성을 보여주고 있다. 예전갱신운동의 주요 특징은 예배 안에서 성례전적 기능을 회복하거나 강화하고자 하는 노력이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그 동안 개신교에서 예배가 너무 인지적(cognitive) 측면에만 기울어 설교만이 예배의 전부인양 이해될 만큼 예배가 지성화(知性化) 되어졌던 것을 반성하고 성례전적 기능을 회복하려는 노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을 더욱 고무시킨 것은 William Maxwell, G.J. Davies, Yngve Brilioth, 그리고 Dom Gregory Dix 등의 연구의 결과에 힘입은 바 크다. 더구나 H. Lietzmann, Oscar Cullman, J.J.von Allmen 등에 의해서 이루어진 초대교회에 대한 연구는 예배의 균형적 일부를 차지하고 있는 성례전적 예배에 대한 초대교회의 전거를 제공하고 전통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교회 일반의 관심을 고무시켰다. 개신교회의 예배가 전통적으로 강한 예전성을 지켜온 로마 가톨릭의 예배갱신운동에 의해서 영향을 받은 바 없지 않으나 거기에 더하여 20세기에 들어서서 생겨난 이들 초대교회 연구의 결과가 개신교 예배의 개혁의 개혁에 큰 영향이 된 것이 사실이다.


흥미로운 것은 개신교회(Protestant Church)가 성례전적 예배의 기능을 회복 내지 강화해 가는 것에 비해 로마 가톨릭의 경우는 예배에서 말씀의 기능을 더욱 균형 있게 강화하려는 추세이다. 특히 로마 가톨릭의 예전갱신운동은 19세기 불란서를 중심으로 일어났었지만 오늘날의 변화는 주로 60년대의 제2차 바디칸 공의회를 전후해서 일어난 것과 더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이 운동은 로마 가톨릭 예배의 각 요소들을 나누고(take apart), 재구성한(reassemble)한 개혁을 단행한 것이었다.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회 양자는 서로에게 영향을 주어 그 동안 각자에게 결여되었던 예배의 측면들을 보완해 가면서 결과적으로는 함께 하나의 수렴점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추세이다. 우선 구교 쪽에서는 그간 교직자 중심의 미사의 성격을 개혁하여 평신도들의 참여 정도를 증대시키고, 예배언어를 모국어로 사용토록 허용하며, 회중찬양을 장려하고, 설교를 새롭게 강조하고 있으며, 평신도의 제사장적 역할을 인식하는 등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대표적으로 우리는 1963년에 제 2차 바디칸회의가 내어놓은 예전에 관한 헌장, The Constitutions on the Sacred Liturgy에서 이런 개혁적 방향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 개혁의 내용을 보면 사실 개신교회가 지니는 특징들을 상당부분 반영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로마가톨릭교회의 오늘날 개혁 노력이 개신교로부터 상당히 영향을 받았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실제로 개신교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미국과 독일에서 이와 같은 갱신운동의 열기가 확산되기 시작하였다는 점은 이런 사실을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로마 가톨릭 교회와는 달리 동방교회는 강한 예전적 전통을 지켜왔음에도 불구하고 예전개혁의 정도가 로마가톨릭의 경우와 매우 다르다. 우선 동방교회의 예전은 주로 4, 5세기에 만들어진 Chrysostom의 예전을 아직까지도 큰 변화 없이 사용하고 있으며 개혁이라는 것도 예배자들에게 지식, 이해, 참여를 증대시킨다는 차원의 개혁일 뿐이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영어권 회중들을 위한 예식 언어의 영역화(英譯化) 작업들이다. 미사가 이루어지는 제단(교회의 전면 단상)과 회중석 사이의 철저한 차단으로 참여와 개방을 막고 있으며, 여전히 일반 회중과는 무관하게 진행되는 비밀스런 기도 등이 남아있다. 또 서방교회가 개혁을 통해서 성경봉독 시 구약을 첨가하였지만 서신서와 복음서 봉독에 그치고 있어서 회중들의 이해를 깊이 고려하는 서방교회의 개혁노력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 밖에도 오늘날 개신교회 가운데서도 전통에 대한 새로운 존중의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영국 성공회와 루터교회가 우선 대표적인데 이들 두 전통은 그 출발부터 로마교회와 성만찬신학의 차이를 갖고는 있었지만 예전적 구조나 내용 등에서는 여러 부분에서 공유하고 있는 입장이었다. 이들은 근자에 와서 예전적 특성을 강화해 가고 있어서 예배의식만 보아서는 로마교회와 큰 구별이 힘들 정도로 변화를 가하였다. 또 성만찬에 대한 비중이 증대되어 매주 단위의 성만찬을 규범화하였다. 루터교회 역시 성공회 예배와 같이 예배가 4중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루터교회 최대교단인 Evangelical Lutheran Church in America의 예식서인 Lutheran Book of Worship(이후 LBW)의 예배순서에 보면, 성부성자성령의 이름으로, 죄의 고백과 용서(이 세 순서는 입례에 앞서 선택적으로 할 수도 있음), 입례 찬송, 인사, 기도송(kyrie)--사회자와 회중이 교창, 영광송(Gloria in Excelsis), 오늘의 기도(인사로 시작해서), 구약봉독, 시편봉독, 서신서봉독, 찬양, 복음서봉독, 찬송, 설교, 니케아신조, 중보기도, 평화의 나눔(배찬전 주기도후에 들어갈 수도 있음), 인사(성찬시작하면서), 봉헌(이때 찬송가가 동반되며 성만찬상도 준비함), 성만찬기도(마음을 드높이, 서문경, 삼성창, 제정사, 기념, 성령초빙 등이 포함됨), 수찬, 시므온의 노래(눅 2:20-32), 성찬후기도, 아론의 축도, 해산 등으로 이루어진다.


그 외에도 감리교회나 장로교회 등도 예전적 성향을 띄고 개혁에 동참하고 있다. 이들은 전통적으로 설교 중심의 교회들이었는데 최근에는 말씀과 성례전을 통전적으로 보아 예배에서 균형을 이루어야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성만찬의 횟수도 높이고 예배에서 교회력의 사용을 적극화하며 거기에 기초한 성서정과(Lectionary)등을 적극 권장하는 등 예전적 특성을 강화하고 있다. 교단 내 개교회별로 사용의 정도는 아직도 크게 확산되어 있지는 않으나 상당수 교회들이 예배서에 따른 예배의 실행을 늘려 나가고 있는 추세이다. 이들 예배도 앞서와 같이 4중적 구조를 띄고 전통적인 예배에서 볼 수 있었던 의식적 요소들이 많이 삽입이 되어 전통에의 회귀 노력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물론 이들 전통 속의 상당수 어떤 교회들은 여전히 즉흥적이고 자발적 기도 등에 더 익숙한 교회들도 있고 심지어 강력한 은사주의적 교회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나 대체로 예배의 고전적 전통에 대한 관심은 개신교 진영에서 폭넓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 분명한 현실이다. 그러나 고전적 전통으로의 무조건적인 회귀나 모방이 곧 포괄적 의미에서의 예배개혁의 전형이 될 수는 없다.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배경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계시의 매개수단이 과거나 지금이나 변화 없이 무차별 적용된다고 보는 것은 계시의 수단을 정체화하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B. 경험주의적 예배를 강조하는 경향

 

성령의 현재적인 역사를 강조하는 경험주의적 예배경향의 대표적인 그룹들은 오순절주의와 은사주의를 들 수 있다. 이 둘을 신학적으로 혹은 교회론적으로 엄격히 구분한다면 전자는 1900년도를 전후해서 시작하여 교단적 형성을 이루고 성령세례의 증거로서 방언을 중시하는 특징을 이루고 있는 반면 후자는 1960년대, 교파를 초월하여 발생한 뒤 성령세례의 증거로서의 방언을 주장하는 입장에 다소 유연한 입장에 있고 또한 교단을 형성하기보다는 각 교회가 원래 소속된 교단에 남아있거나 혹은 독립교회로 활동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들 두 그룹이 성령의 현재적 역사를 강조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공통적이며 그 예배의식이나 예배에 대한 정신에 있어서 상당히 흡사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근자에는 이들 둘을 분리하기보다는 함께 묶어서 예배학적 논의의 대상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오순절 및 은사주의적 예배성향이 현대교회의 주요한 예배형식임을 부인하기는 더 이상 어렵다. 교회성장의 추세에 있어서 타 교파들의 정체 혹은 퇴조에도 불구하고 가장 왕성하고 역동적인 성장률을 보이고 있는 진영이기 때문이다. 일례로 1980년부터 88년까지 미국 내 교파별 성장률은 그 교세에 있어서 상위에 속한 남침례교가 9%, 루터교회가 0%, 미국장로교회가 -13% 등의 저조한 성장세를 나타낸 것과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성회(Assemblies of God), 하나님의 교회(Church of God, TN) 등의 오순절 교단들은 각각 102%와 34%등의 성장세를 나타내어 가히 대조를 이루었다.


특히 이러한 성향을 띄고 있는 교회들은 오늘날 예전갱신운동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것은 아니나 대체로 형식성을 배격하고 간략한 예배 형식을 추구하면서 경험적 측면을 크게 강조한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오순절 교회나 은사주의 교회들은 일반적으로 예배의 구조가 비 형식적 특징을 지닌다. 전통으로 돌아가 예전성을 갖추고자 하는 예배구조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면서 이런 예배가 자발성을 방해하고 성령의 현재적 역사와 지시를 따름에 방해가 된다는 생각을 바탕에 두고 있다. 이들은 간략하고 자유로운 예배의 형식을 통해서 예배는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를 가능케 하며 성령의 자유로운 활동에 따라 예배가 인도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제도화된 범위 안에서 구두(vabal) 혹은 몸에 의한(somatic) 자유로운 표현, 모든 성원들에 의한 참여, 성령의 은사를 장려하고 구사하는 것, 또 성령이 각 사람에게 직접 사역하신다는 기대 등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경우에 따라서는 예배의 일반적 순서 중에 성령의 즉흥적인 개입에 의해서 잠시 중단되어 방언을 하거나 예언 등을 하는 경향이 있었다.


미국 성화운동(Holiness Movement)의 결과로 형성된 교파들의 예배 또한 예배 안에서 성령의 역할과 관련하여 경험주의적 강조를 갖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 주목할 필요가 있는 진영이다. 미국 감리교회가 웨슬리가 보여주었던 예전에 대한 관심을 되살려 전통으로 돌아가려는 경향이 강한데 비해 이들은 같은 웨슬리의 전통 중에서 그의 성화론에 관심을 기울여 성령이 베푸시는 두 번째 은혜에 큰 강조를 두는 경향이어서 전반적으로 성령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 속한 교단들로는 웨슬리교회, 기독교선교연합교회(C&MA), 나사렛교회 등이 대표적이다. 실제로 웨슬리교회의 경우 1849년경 예배서는 매우 간략한 예배순서만을 요구하였다. 즉, 찬양, 기도, 성경봉독, 찬양, 설교, 찬양, 기도, 축도가 전체 내용이었다.


그밖에도 오순절 및 은사주의의 범주에 속하지는 않지만 성령의 현재적 역사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다소 공통성을 지닌, 그러면서도 형식적 틀에서 가장 자유한 신앙그룹으로서 퀘이커를 들 수가 있다. 퀘이커는 그나마 설교, 공중기도, 회중찬양 등을 제외시켰다. 음악도 제한적으로 인정하여 오르간이나 악기 등을 배제한다. 퀘이커 예배는 구두적인 형식이 굳이 필요 없는 일종의 기도회 형식이다. 심지어 성경도 성령의 내적 조명을 강조하는 가운데 부차적으로 여겨진다. 즉, 모임 중 각 사람은 성령이 그에게 하시는 말씀을 기다리는 중 계시되어지는 바를 말한다. 다만 이들은 오순절에서 말하는 성령세례의 명시사건이라고 하는 방언 등을 인정하지 않았다. 비예전성의 극단에 서있다고 볼 수 있다.


이들 예배들은 분명 교리적 설교나 예배순서 등으로 채워진 전통개신교회의 단조롭고 무거운 예배형식과는 대조적으로 현재적인 경험 등을 내세워, 예배의 역동성을 높여 주고 예배자들의 자발적인 참여여지를 높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색다른 도전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예배들은 예배가 지니는 균형적인 신학의 틀을 지나치게 경험주의 일변도로 끌고 갈 위험이 자주 지적되고 있다.

 

C. 동시대적 상황에 적응하려는 경향

 

오늘날 예배를 동시대적 상황에 적응케 하여 예배의 목적과 효율을 동시에 얻고자하는 두드러진 예배의 스타일은 최근 한국에도 많이 알려진 구도자 예배(Seekers' Service)--한국에서는 열린예배로 더 알려짐--라고 볼 수 있다. 시카고 근교의 Illinois 주, South Barrington에 있는 Willow Creek교회는 구도자예배를 시초한 교회로 유명하다. 이 교회가 1975년 처음 교회를 창립하던 당시 시장조사와 분석을 통해서 사람들이 교회를 잘 참석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질문하고 응답을 받은 결과 그 내용 5가지 중 특히 두 가지가 눈길을 끈다. 그 하나는 '예배가 지루하고 생명력이 없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설교가 실제 삶 가운데 일어나는 매일의 삶과 관련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교회는 이런 신자들에게 흡인력을 제공하는 예배를 고민하다가 소위 '구도자예배(seekers's service)를 창안케 되었다. 이 예배의 전략 중의 중요한 내용은 '사람들을 지루하게 하지 않기 위해 동시대적이며(contemporary), 창의적인(creative) 예배를 드리자'는 것이며 '기독교와 구도자의 일상적 삶 사이의 상관적 연계를 제공토록 하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전략과 실행은 성공하여 결과적으로 Willow Creek교회에 많은 부흥과 성장을 가져오게 되었고 한국의 몇몇 교회들도 이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타당한 검토를 거쳐 시도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 예배는 그 형식적인 면에서도 사람들이 익숙해져 있는 예술과 드라마 등의 장르를 사용하고 예배의 주제도 가정과 사회에서 발생하는 실제적인 문제들을 다룬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물론 우리는 구도자예배에 대한 비판적 관찰도 간과할 수는 없다. 참여자들에게 흥미 있는 공연으로 예배에 대한 참여에의 관심을 높이는 긍정적인 점이 있는가 하면 회중을 관객의 위치로 전락시킨다는 단점을 지니고 있다. 참여한 사람들에게 자발적으로 교회의 회원이 되기까지 등록이나 결단을 강요하지 않음으로써 불필요한 부담이나 거부감을 주지 않는다는 취지에도 불구하고 전도의 절박성에 대해 안이한 시각이라는 비판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구도자예배는 예배와 삶의 문제를 깊이 있게 연관시키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이게 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 많은 교회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지루하고 무미한 예배에 식상한 현대인들을 다시금 예배 속에 흡인키 위해 시도하는 전략과 기지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구도자 예배는 예배와 삶과의 관련성에 관심을 기울이고 예배의 주제가 우선 사람들이 생활 속에서 접하기 쉬운 주제들이 되도록 노력하고 있다. 예배의 교육적 기능도 중요하지만 현실과 유리되어있는 채, 교리교육이나 피부에 와 닿지 않는 예배의 내용들만을 너무 무겁게 담기보다는 생활 속에 일어나는 실존적 현실들을 다룸으로써 예배와 생활과의 연속선을 추구하는 노력이 중요하다는 생각에 기초한 것이다. 오늘의 예배가 그 형식이나 틀에서 구태를 보존하는 것을 능사로 알고, 또 과거의 문화나 역사의 배경에만 집착하여 그것의 설명으로 예배나 설교의 내용을 채우는 현실에 대해 이 구도자 예배는 오늘이라는 현실을 끝없이 염두에 두고 예배의 효율을 추구하고 있다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III. 성서와 전통 속의 예배

 

그렇다면 이러한 현대 교회들의 예배의 다양성을 보면서 과연 오늘의 예배의 형식과 스타일은, 또 그 내용은 무엇이 되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제공하기 위해서 전거(典據)로서의 중요한 두개의 기둥을 말하자면 그것은 성서와 전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성서의 수위성을 무시한 채 둘을 병립시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정당한 해석을 도출하기 위한 거울이 곧 전통인 셈이다. 그러므로 이 둘은 성경의 절대적 수위성을 전제하는 보완적 관계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회는 여러 시대를 거쳐오면서 결코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상황들의 변동 없이 고정 불변의 형식과 내용으로만 그 명맥을 이어온 것은 아니다. 새로운 시대의 변화에 대한 끝없는 적응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성서적 가르침과 현실과의 끝없는 긴장 속에서 형성된 다양한 논의들을 그 전통 속에 축적하고 있다. 이들은 바로 시대와 공간을 뛰어 넘어서 오늘의 예배를 향한 중요한 원칙들을 제시해 주는 자원의 보고이면서 중요한 전거가 아닐 수 없다.

 

A. 성서상의 예배의 모습

 

예배학자인 Robert Webber는 시내산에서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계약사건(출 19-24장)을 예로 들면서 그 예배의 형식을 다음과 같이 소상히 밝히고 있다. 그 첫째는, 예배는 하나님에 의해서 소집(convoked)되어졌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을 불러 시내산 기슭에서 만나셨다. 예배의 선행조건은 먼저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부르심'이 기선적으로(initiatively) 이루어져야 할 것임을 나타내고 있는 말이다(출 19:1-6, 20). 둘째는, 예배의 모든 참여자는 능동적이었다는 것이다. 즉, 모세에게 지도력이 부여되었는가 하면, 아론, 나답, 아비후, 칠십 장로, 그리고 청년들이 나머지 다른 역할들이 주어졌으며 그 부분들을 각자 수행함으로써 수동적인 관객이 아닌 능동적 참여자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장면은 지도자와 청중(audience)--수동적으로 구경만 하는--의 장면이 아니라 회집한(congregated) 모든 사람들이 각자 자기에게 주어진 일들을 수행하는 조화로운 참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출 24:1, 5). 세 번째는 '말씀의 선포'가 항상 중요한 매개였다는 점이다. 말씀이 없이는 온전한 예배가 되지 못하였다. 마지막으로, 예배에서 상징(dramatic symbol)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항상 사람과의 관계의 증거를 보여주기 위해 피의 희생을 사용하였다. 이것은 유일회적(唯一回的)인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지시한 것이었다. 십자가 희생 후 성만찬은 교회가 하나님과 지속하는 관계의 표가 되었다(출 24:6, 8).


Webber는 이어서 성막과 성전과 관련된 기록들에서 몇 가지 원리를 찾아냈는데 첫째는, 예배와 하나님의 임재를 서로 연계시켰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배하는 성막과 성전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이었다(출 25:8, 대하 6:7, 겔 43:7). 둘째는, 성막과 성전이 상징성을 고려하여 꾸며졌다는 것이다. 바깥뜰과 안뜰, 지성소 등의 배열은 지성소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과 예배자 사이의 거리를 표시한다. 그 외에도 번제단, 물두멍, 금등대, 진설병을 놓는 탁자, 향단, 언약궤 등의 모든 기구들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묘사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중요한 것은 여러 가지 희생제사들이 모두다 가시적이며 실체적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셋째는, 성전은 거룩한 직분들이 구별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거룩한 의식을 맡은 교직자들은 백성을 대표하고 하나님과 그들 사이의 중재자였다. 아무나 제사장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에 의해서 부름 받고 성별되어 정교한 예식에 참여하였다. 그들의 섬김에 적합한 예복을 입었으며(출 28:40-43, 39:1-31), 엄중한 규칙을 따라야 했다. 이러한 것은 실제로 기독교 예배의 발전 과정에서 상징성 및 직분의 구분 등에 영향을 주었다. 신약의 예배 또한 오늘의 예배를 위한 중요한 원칙들을 제시하고 있다. 예수님은 짐승의 희생 등을 인정하지는 않으셨으나 구약성경의 예배적 관습을 지지하셨다.(눅 2:21-51; 요 7:14-49, 10:22-23) 실제로 예수님은 정기적으로 회당에 가셨다.(눅 4:16절이하) 절기에도 참석하였다.(요 7장 2, 10장 22) 그는 또 유월절을 경축하셨다.(마 26:1-30, 막 14:1-26), 눅 22:1-23, 요 13:1-30) 중요한 사실의 하나는 예수님이 구약성경의 예배제도들이 바로 자신을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는 점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구약예배에 대한 태도는 신약에서 그대로 반영이 되고 있다. 매우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는 초기 기독교 예배의 중심은 바로 그리스도 사건의 경축이었다.


이상을 종합하여 보면, 성서의 예배는 a. 하나님이 부르심으로 시작된다. b. 예배는 지도자 혼자만의 행위가 아니라 모든 회중이 참여하여 각자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다. c. 신구약의 모든 예배사건의 중심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d. 예배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는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e. 예배에는 풍부한 상징성이 내포되어 있었다. f. 예배는 바로 하나님의 임재의 사건이다. g. 예배는 곧 갱신을 경험하는 자리이다. 이들은 곧 오늘의 예배를 향한 원칙들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B. 역사적 고찰

 

예배의 역사적인 발전과정은 곧 성서적인 원칙들이 역사적, 문화적 상황 속에 구체화되어 가는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기독교의 역사는 바로 이와 같이 복음과 그것을 담아 재현하는 틀로서의 예배가 특정 문화 속에서 어떤 형식과 스타일로 구현되어 가는지를 생생하게 반영하는 바탕이며, 이것은 오늘날과 같이 다원적 문화상황하에서 어떻게 개개 지역교회가 복음을 담는 틀로서의 예배를 시행하여야 할 지에 대한 적절한 대안적 원칙들을 보여주게 될 것이다.

 

1. 발전적 산물로서의 예배

 

초창기의 예배는 복잡한 내용과 구조를 갖지 않은, 단순하고 간결한 형식이었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이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발전적 형식을 띄게 되었다. 성서에 기록된 예배에 대한 이런 인식에 반하여 Dom Gregory Dix 등은 다른 견해를 취한다. '신약이 제공하는 정보는 예전적이라기 보다는 신학적이며 훈련목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이 예배의 양식에 대해서 기록하는 것은 관심 밖이었고 또 당시에 관행화 되어있던 예배의식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 적을 필요가 없었다'고 주장하며, 당시의 예배는 성경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전통에 기초하였다는 논지를 편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정당화 될 수 없음이 분명하다. 우선 성경이 기독교신앙의 주 관심사로서의 예배에 대해 매우 단순하고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며 그나마 단편적인 예배에 관한 근거들도 그 이후 교회문서들 속에서 발견되는 정규적인 예배형식과 비교해 볼 때, 이렇다할 전형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후 성경 외의 기록들에서도 다소 첨삭을 가하고는 있지만 비교적 기본적 형식만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의 후기 예배들과 중세교회의 화려한 예배들은 발전적 과정을 거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만 우리는 성서에서 제시하는 예배에 대한 중요한 가르침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한다.


실제로 150년경의 Justin Martyr와 200년경의 Hippolytus의 기록들을 보면 이것이 드러난다. 져스틴의 예배에 대한 기록은 1) 주일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주의 날에 함께 모여 2) 오늘날 우리가 구약이요, 신약이라 부르는 것들을 "시간이 허용하는 한도에서" 읽고 3) 사회자가 설교한 후 권면을 한다 4) 그 다음으로는 선 채로 사람들이 기도를 한다. 이상이 말씀예배이고 이어서 성만찬 예배가 뒤따랐는데 5) 집례자가 빵과 잔을 받은 뒤에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람들의 '아멘'으로 기도를 맺는다. 6) 이어서 빵과 잔에 참여한다. 이것이 바로 150년경의 예배의 모습이다.


그 후 약 50여년이 지난 215년경 히폴리투스는 좀더 발전된 예배의 문건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는 보다 체계화된 성만찬 인사 및 성만찬 기도가 나타나고 있다. 더욱이 성경에서 본 간결한 세례예식과는 대조적으로 이즈음에 와서는 무려 길면 3년이라는 준비 기간을 거친 후, 철저한 훈련과 검증 후에 받을 수 있었다. 4, 5세기가 되면서 예배는 지역적인 상황과 사회적인 상황에 따라서 영향을 받았다. 핍박이 사라지고(313), 주일은 시정 휴일이 되었으며 주일날 예배에 방대한 시간을 허용하게 되면서 예배는 화려한 예식이 되었다. 그에 상응하는 인상 깊은 건물들이 건립되고 성가대가 구성되고 정교한 행사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결국 교회의 초기의 단순한 예배형식에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복잡한 절차와 순서들이 삽입이 되고 각양의 의미들이 부가되었다. 이것은 교회가 예배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구속사의 전 범위를 재현하기 위해 각각의 문화적 상황하에서 주어진 매개들을 사용하여 시행한 결과였다. 결과적으로 예배는 고정 불변의 선험적 형식이 존재했다는 가정보다는 복음의 내용을 변질 없이 담되 그 형식과 틀은 발전적 과정을 필연적으로 수반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2. 예배와 문화적인 배경과의 관계

 

역사적으로 예배는 문화와의 깊은 연계를 지니고 변용을 거듭하였다. 그 한 예로 성만찬 떡의 변용 과정도 주목할 만 하다. 초대교회에는 보통 식사 중 먹는 음식과 거의 동일한 '누룩이 있는 보리떡'을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빵과 포도주는 신자들이 집에서 만들어 가지고 와서 집사들에게 전달한 후, 그것은 다시 교회의 지도자에게 전달되어 성물(성만찬 떡)로 사용되었다. 지금도 동방교회는 개신교회와는 달리 유교병을 사용한다. 유월절에 먹는 빵은 보통 누룩 없는 보리떡이었으나 성전의식에서는 보리떡을 금하는 전통이 있었다. 79년경 Vesuvius화산 폭발시 무너진 폐허에서 발견된 빵은 밀로 만들어져서 직경이 약 8인치(약 17센티 정도) 정도까지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때의 떡은 보리로 만들거나 밀로 만드는 것에 대해서, 또 누룩의 첨가여부에는 크게 개의치 않았고 다만 떡이 주식으로부터 채택되었다는 것이 주목할만한 특징이다. 이 때는 한 떡에서 떼어서 주는 관습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던 것이 약 9세기 무렵에는 무교병이 통상적이 되고 곧 의무화되었다. 이 당시의 떡은 크고 두꺼웠다. 봉헌식(떡과 포도주 및 헌물을 드리는 예식의 일부)도 많은 곳에서 없어졌다. 점차 성물은 수도자나 교직자들에 의해서 만들어 졌다. 새로운 천년이 되면서 결국은 빵은 'Host'로 바뀌었다. 오늘날 일부 교회들, 예를 들어 필리핀 그리스도 연합교회에서는 성만찬 떡을 위해, 빵 뿐만이 아니라 바나나를 드리기도 한다. 이미 우리 나라의 경우도 떡을 사용하면서 전통적 성만찬 예배의 엄숙하고도 축제적인 가치를 재현하고 있는 교회들이 많이 있음을 보면서 성물의 요소가 어떤 것이어야 하느냐에 대한 선험적 이해에 의한 고정화가 결코 바람직한 결론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문화적 상황에 따른 변화는 교회의 예배를 둘러싼 환경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곧 교회건축의 양식과 구조에서도 드러난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기 전에는 기독교 신앙은 로마제국 내에서 불법종교였기 때문에 핍박상황에 놓여 있었다. 이 시기에 예배는 우선 장소적으로 보면 70년, 성전이 파괴되기까지는 유대인들의 회당을 사용하거나 집에서 드렸고 이후부터는 주로 가정집(경우에 따라서 개조한) 등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러던 것이 로마의 기독교 공인 후 가정집에서의 예배는 곧 거대한 Basilica에서 드려졌고 갖가지 상징적 장식들을 갖추고 큰 규모나 화려함을 지닌 예배가 드려지게 되었다. 여기 바실리카는 법정 혹은 공회당으로 쓰이던 곳이었던 만큼, 그 규모가 크고 화려함이 있었다.


이런 전통이 줄곧 내려오다가 이차 대전 후 과거에는 생각할 수조차 없는 큰 변화들에 대해서 개방적 태도를 갖고 건축상의 획기적 변화들이 모색되었다. 예를 들어 2차대전후 독일이 폐허 속에서 건축을 하면서 값싸고 실용적인 교회건축(구교)을 짓게 되면서 로마가톨릭교회의 새로운 실험성을 보여주었다. 불란서의 어떤 교회는 150불을 들여서 조각목재로 넝마주의들의 교회를 지었다. 스위스의 건축가인 Senn은 1963년에 '재정적 한계가 건물의 출현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는데 즉, 빈곤의 상태에서 가장 요긴한 것을 먼저 생각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십자가 자리, 이미지(상), 옆제단(side altars) 등을 없애거나 측면 예배소(side chapel)로 옮기게 되었다.


예배처소의 변화는 곧 예배의 스타일과 양식의 변화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 거대한 바실리카 스타일의 건축물에 걸 맞는 예배는 화려하고 장엄한 예배였지만 간결한 교회내부의 건축구조 등은 예배의 내용과 형식의 간결화와 단순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예배의 본질은 여전히 동일하지만 그것의 실제적인 구현은 문화적 배경과 반드시 연계되어질 수밖에 없으며 또 문화와의 대화를 통해서 동시대의 옷을 입는 일은 당연한 요청이 아닐 수 없다. 예배는 바로 문화적 배경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음을 유념하여야 할 것이다.

 

3. 예배의 형식상의 다양성

 

초대교회 당시 기독교신앙이 발아한 곳은 바로 유대라는 특수한 문화에서였는데 초대교회의 예배는 다양성의 예를 잘 보여주고 있다. 초기 기독교 예배의 유형 상 몇 가지 다양한 예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아람어 계통의 기독교로서 이들은 성전의 기도시간을 준수하고, 성전을 복음선포의 장소로 사용하였다. 이들은 유대교적 관습의 상당 부분을 지키고자 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율법에 열심인 사람이 수만명 가량 예루살렘에 거주하고 있었다(행 21:20). 이들은 예루살렘 총회(행 15)를 통해 우상의 제물, 피, 목매어 죽인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교와의 구별을 분명히 하고자 하였던 특징을 지닌다. 즉 그들은 성전 말고도 집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사도들의 가르침과 교제에 전심하고 떡을 떼었다.(행 2:42) 이들의 예배에는 분명 그리스도가 예배의 중심에 있었다는 것에는 이의의 여지가 없다.


둘째는 헬라적인 기독교예배를 들 수 있다. 유대주의와 보다 과격하게 결별한 기독교인들은 헬라주의 기독교인들이었다. 이들은 성전과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관습을 따르지 않았다. 이들 가운데 7인의 구제위원들을 뽑았다. 안디옥은 후에 이들 헬라젹 기독교의 중심지가 되었고 예루살렘의 아람어 계통의 교회와 강한 유대를 갖고 있었다. 헬라주의자들의 문헌들을 보면, 그 특징은 유대교 의식의 거절과 이들 의식들의 '성취된 의미'에 대해 강조했다는 것이다. 7인 중에 하나인 스데반이 순교를 당할 때, 유대인들의 고소를 보면 이것을 알 수 있다.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스려 말하기를 마지아니하는 도다.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들었노라'(행 6:13-14) 스데반은 7장 49절에서 50절에서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라는 이사야서 66장 1절로 2절을 인용하여 헬라주의 기독교의 입장을 대표하고 있다. 즉, 구약성경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기 때문에 의식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뜻이었다. 유대교의 의식과 분명한 결별을 하였다.


셋째는 이방인 기독교예배로서(행 10장-11장) 이들의 예배는 고린도서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이방인들의 예배는 앞서의 전통들과 달리 자유로움이 큰 특징이었다. 바울은 심지어 이들에게 덕을 세우도록 권한다.(고전 14:1-5) 고린도 전서는 여러 곳에서 단편적으로 예배에 대한 가르침을 계속하고 있다. 예배에 포함된 내용들을 보면, 축도의 형식(1:3, 16:23), 주일예배와 헌금(16:1-2), 오순절을 지키는 것(16:8), 유월절 지키기(5:7-8), 그리고 거룩한 입맞춤(16:20) 등등이 나타난다. 또 12에는 기독교 예배의 여러 측면이 기술되어 있다. 즉,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14:6)이 있고 찬송시, 가르치는 말씀, 계시, 방언, 통역함(14:26) 등이 있다. 또 응답의 형태로서 기도, 찬미, '아멘'을 말하는 것, 감사함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결국 이시기의 예배들은 동일한 그리스도 사건이 중심이었지만 예배의 스타일은 다양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역사적으로 다양성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났다. 예를 들어 세례를 포함하는 예배가 있을 경우에는 물 속에 들어가는 방법에 있어서도 침수(immersion), 관수(affusion), 뿌림(sprinkling) 등이 있었고 침수도 단일한 횟수의 침수가 있었는가 하면 삼중 침수(trinitarian immersion) 등이 있었다. 즉, 삼중침수의 경우 3위일체의 교리적인 기반을 허무는 세분의 하나님 논리를 인정한다고 여겨져서 스페인 지역을 기반으로 한 모자레이빅 교회들이 한 분 하나님을 상징하는 의미에서 단일적 침수방식을 선택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또한 침수 자체의 방식도 앞으로 구부려 침수하는 것이 있었는가 하면, 좌우전방으로 각각 물 속에 들어가는 침수가 있었다. 시대적으로 볼 때, 세례도 침수에서 관수로 변화가 있었다. 심지어 재세례파나 침례파들의 경우도 침수세례를 18세기나 되어서야 시행하였다 이들 모두는 오늘의 관점에서 볼 때, 정통 교회 안에서 있었던 형식상의 다양함이었던 점을 눈 여겨 볼 필요가 있다. 그 다양함에 대한 이유와 의미가 여러 가지지만 예배의 원리들을 역사적인 컨텍스트 속에서 적절히 구체화하고자 하는 노력의 산물이었다는 것을 확인케 한다.

 

4. 동적(動的, dynamic) 특성을 지닌 계시의 매개수단

 

초대교회의 예배의 중요한 내용들은 주로 유대교 회당의 예배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 내용들은 쉐마, 기도, 성경읽기(토라와 예언서), 시편찬송 등이 주를 이루었다. 이러한 예배의 양식은 150년경 져스틴의 저술 속에 나오는 말씀예배부분(성만찬예배 전 부분)에서 재현되고 있다. 다만 여기에는 그리스도의 사건이 중심인 신약이 추가적으로 읽혀지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이 당시의 예배는 오늘 우리가 판단하는 잣대에 의해서 성만찬 중심의 예배도 말씀 중심의 예배도 아니었다. 계시를 전달하는 매개로서 인지적(congnitive) 수단으로서의 말씀읽기와 설교(exposition)가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음과 동시에 성만찬 행사가 큰 비중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 점이다. 이러한 예배 스타일이 전체 기독교회의 모습이었는지, 아니면 져스틴 마터가 속한 공동체의 독특한 특징이었는지에 대한 확인은 논외로 하더라도 후기의 예배양식과는 다른 것으로서 오히려 말씀과 성례전의 균형성이 엿보이는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중세교회에 이르러서는 예배와 의식들은 말씀보다는 오히려 상징적 수단에 의한 예배가 주종을 이루었다. 예를 들어 6세기 전까지 체계화의 과정을 거친 세례식의 모든 순서에서도 대부분 상징적 행위로, 또 상징물을 사용하여 수세자와 사람들을 깨우치는 수단으로 삼았다. 세례를 받기 직전, 서쪽을 바라보며 세상의 악과 결별(renunciation)을 선언하고 동쪽을 바라보며 신앙을 결단하는 순서--동쪽이 태양이 떠오르는 곳이며 예수님은 이 태양과 같은 분으로 비유가 되었기 때문에 신성시되었고 그에 반해 서쪽은 악을 상징한다고 보았다--를 갖는다거나 기름을 바르는 일(anonintment)을 시행하였다. 기름 바름은 곧 영적 전투에 임하는 준비를 상징했다. 경기자가 몸을 민첩하게 하기 위해 기름을 발랐던 것에서 유래된 것이다. 또 지금과 달리 세례 시에도 완전탈의를 하였는데 이는 옛 자아, 부패한 옷을 말끔히 벗어버린다는 뜻이었다. 물에서 나온 후에는 새로운 생명의 상징으로 흰옷을 입었던 경우와 비교해 보면 의미가 더욱 분명해 진다. 또 세례를 마치고 나오는 사람에게 기름 바름이 있었는데 이것은 곧 성령이 수여됨을 의미하였다.


예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중세의 예배는 그야 말로 보는 예배였다. 예배언어가 라틴어였고, 거대한 장방형 바실리카에서의 예배는 인지적 방식의 예배 참여란 거의 불가능하였다. 그들은 교회의 유리에 새겨진 그림, 십자가수난역정을 새긴 조각들, 건축의 스타일 등으로 신앙을 배우고 익혔다. 그나마 성만찬도 사제 혼자서 제단에서 드려지고 회중들은 관객처럼 떡이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하는 순간 벨소리와 함께 성변화된 떡을 바라보며 수찬을 대신하였다. 이를 통해서 그리스도에 대한 절실한 신앙심을 강화하였다. 또한 성별된 떡을 교회 안에 두어 경배토록 하고 관람케 한 것은 교회 안에 늘 계시는 그리스도를 깨우쳐 주는 것이기도 했다.


종교개혁기는 초대교회나 중세가 문자적 인지수단--그 결과 지적 교육의 방식--이 희소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성경과 주석 등이 인쇄술의 발달과 더불어 활발해지던 시기였기에 중세의 이런 '보는' 예배나 의식은 큰 수정을 거쳐야 했다. 물론 중세의 의식이 원래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교직자들의 무지와 태만함 등으로 인해 신자들을 바르게 교육하지 못하여 수많은 오류와 미신을 낳은 것이 그 부정적 측면임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결국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계시의 매개수단은 분명 시대와 상황과 문화에 따라서 다른 형식과 수단을 취하였다고 볼 수 있다. 복음의 전달과 그 틀로서의 예배는 특정 시대의 교회가 속한 시대적, 문화적 배경 속에 보편화되었던 매개 수단에 의존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시대가 변화여도 복음은 변할 수 없지만 시대가 변하여도 진리의 매개는 변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IV. 한국교회 예배의식에 대한 비판적 성찰

 

A. 선교초기 예배형성의 배경

 

한국교회의 예배에 대한 재고는 그 형성과정의 예배신학적 배경에 대한 탐구에서 시작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의 예배는 크게 두 가지 영향과 관련지어서 설명할 수 있다.


그 첫째는 초기 선교사들과의 관련이다. 한국의 초기 선교사들의 배경은 매우 중요하다. 한국에 온 첫 번째 공식 선교사인 언더우드(Horace Underwood)와 아펜젤러(Henry Appenzeller)는 1985년 4월 5일 부활절에 한국에 함께 입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펜젤러는 독일개혁교회에 속한 부모의 영적인 영향하에 자랐다. 성경과 하이델버그 교리서에 입각하여 철저한 신앙교육을 받고 자랐다. 특히 그의 어머니는 메노나이트의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아펜젤러는 이런 어머니의 영향을 받고 자랐던 것으로 보인다. 메노나이트는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강조하고 그러한 특별한 강조는 상징성을 배제시키고 교회관습에서 성례전적인 기능을 최소화시키는 신학적 입장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Daniel Davies는 아펜젤러에게 영향을 준 것을 크게 세 가지로 본다. 첫째는 가정에서 배운 하이델버그 교리문답, 그리고 프랭클린 마샬대학에서의 공부, 그리고 마지막으로 드루에서의 수학으로 본다. 하이델버그 교리서는 독일개혁교회의 것으로 그의 부흥회적(revivalism)이고 경건주의(pietism)적인 경향에 영향을 주었다. 또 개인적 경건을 유달리 강조했던 프랭클린 마샬대학에서의 공부도 그에게 크게 영향을 주었다. 마지막으로 그가 Drew에 다니던 시기는 1867년에서 70년경으로서 초창기 미국감리교회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특히 설교사역을 강조하던 시기였다. 이것은 후에 그가 한국에 와서 선교사로서 활약하면서 보여주었던 예배신학적 관점에 적지 않이 영향을 주었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장로교 선교사였던 Horace Grant Underwood는 초교파적인 배경에서 자랐다. 그의 증조부인 Alexander Waugh of Scotland는 영국교회(Episcopalians), 장로교회(Presbyterians), 침례교회(Baptists), 독립교회(Independents), 감리교회(Methodists) 등이 참여하는 연합기구를 세운 사람이었다. 그의 신앙에 영향을 준 것은 그가 부교역자도 일하던 New Brunswick의 독일개혁교회였다. 그는 거기서 계속적인 부흥회 모임(revivialistic meeting)에 깊이 참여하였고 아침과 저녁의 기도회에도 참석하는 열정적 인물이었다. 그는 또 당시에 비예전적 특성을 지닌 구세군의 활동에도 참여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구세군은 성례전적 배경과는 거리가 먼 경우였다. 그의 가족과 교수들이 걱정스러울 정도로 그들의 활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즉, 그는 당시 성례전적인 회복을 모색하던 화란개혁교회에서 자라긴 했으나 Underwood는 오히려 그의 시대의 대각성운동(Revivalistic Movement)에 크게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둘째는, 한국교회 예배의 형성은 이들의 선교에 이은 한국 내 부흥운동과의 연관되어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이 활동을 시작하고 나서 얼마 후 한국교회는 대각성운동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대각성운동은 한국교회의 네비우스 방식(Nevius Method)에 의한 성경공부의 확산과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네비우스 방식은 곧 한국 기독교인들의 신앙적 경험을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는 자주적이며 토착적인 교회의 건설에 목표를 두고 체계적인 성경공부를 크게 강조하였다. 네비우스방식이 소개된 뒤로 대규모 성경공부반이 널리 확산이 되고 부흥운동이 확산되었다. 1903년 감리교선교사들이 일주일동안 원산에서 모여 중국주재 남감리교회 선교부 선교사인 M. C. White의 지도하에 성경공부를 시작하였고 후에는 감리교 외과의사였던 R. A. Hardie에 의해 인도되었다. 그 후 하디는 한국 내 여러 지역에서 부흥강사로 초대되었다. 그 결과 부흥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이 되었다. 각성운동은 곧 전국적인 운동이 되었고 한국교회를 크게 변화시켰다. 부흥운동이 확산되면서 1903년 원산에서의 부흥회 이후 5년만에 한국교회의 교인수는 4배나 증가했다.


대각성운동은 한국개신교회의 예배의 독특한 모양형성에 기여했다. 즉,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종교적 경험을 특징으로 하는 예배패턴을 지닌 부흥회 양식의 형성에 기여한 것이다. 개인주의적이며 타계적인 이원주의 등이 주요한 특징이었던 이와 같은 부흥운동은 한국교계의 엄청난 긍정적 파급력이기는 하였지만 예배의 상징성 영역이 지니는 역동성과 한국의 문화 안에 깃든 상징성들의 기독교 예배 안에서의 변용적 수용 등의 예배신학적 노력들에는 다소 미흡했던 것으로 평가되어진다. 이들 초기교회의 배경은 이후 한국교회의 예배의 성격규정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음은 부언의 여지가 없다고 본다.

 

B. 한국교회 예배의 어제와 오늘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과 관련하여 우리 나라의 주요 교단에서의 예배 전통과 그 실제는 어떠한지 살펴보는 것은 그 인과관계의 추적에 도움이 되리라고 여겨진다. 전통적으로 개신교의 주요교단으로 알려진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는 그들의 예배모범을 헌법(장로교, 성결교), 교리와 장정(감리교) 등에 기록하였다. '헌법'과 '교리와 장정'은 집례자와 회중을 위한 예배규범인데 당시 대표적인 장로교회들은 주일예배가 성경공부에 이어 찬송, 기도, 성경봉독, 전도설교, 찬송 등으로 구성된 아주 간략한 예배를 드렸다. 실제로 1920년대의 한국개신교의 주일 예배순서를 보면, 장로교의 경우는 묵도, 성경봉독(구약교독), 시와 찬미, 기도, 성경낭독, 특별찬송, 설교, 기도, 봉헌, 시와 찬미, 축도, 폐회로 되어 있다(1922). 성서일과(Lectionary)로 추정될 만한 구약봉독의 특이한 식순이 있긴 하지만 그러나 부흥집회의 식순과 같이 간략한 것이 특징이다. 또 성결교의 경우나 감리교회의 경우도 단순함에는 큰 차이가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근자에 와서 한국교회의 예배경향은 우선 세계교회의 에큐메니칼 양식에 대해 깊은 이해를 전제하고 있다. 1997년에 발간한 예수교 장로회(통합) 측 표준예식서에서는 주일예배순서의 실제 모델들을 소개하면서 그 첫머리에 에큐메니칼 모델의 기본구조를 소개하고 있다. 이어서 실제 예배의식들을 8개의 예로 소개하면서 몇몇을 제외하면 예배의 준비의식, 말씀선포, 성례전, 파송 등의 순서를 포함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기독교대한성결교회에서도 1996년도에 '새예식서'를 발간하고 교단적 차원에서의 예배모범을 선보였다. 우선 두 가지 모델을 소개하면서 하나는 그간 개신교회에서 일반화된 모델이고 다른 하나는 예전갱신운동의 결과로 소개된 예배모범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물론, 근자의 에큐메니칼 모델에 비교해 볼 때 그 내용과 순서가 모두 망라된 것은 아니지만 성결교회의 초창기 예배형식들과 비교해 보면 많은 예전적 갱신으로 상당히 근접해 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결국 이들을 종합적으로 평가해 볼 때, 오늘날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예전복고운동(Liturgical renewal movement)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나 한국교회의 토착적 상황에 대한 모색은 매우 빈약하다는 공통점을 발견하게 한다. 이들은 주로 에큐메니칼 합의를 충분히 반영하고 있는 리마예전을 답습하는데 그치고 있다는 아쉬움을 지니고 있다. 리마예전은 그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고전적 전통의 예배 모습을 담고자 노력한 흔적은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앞서 얘기한 대로 초대교회의 단편적 혹은 소수의 예배문서들이 시대적 상황과 배경 하에서 토착적 현실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리라는 점을 감안할 때, 또 그것이 복음의 긍정적 효과를 위해서 교회에 의해 의도적으로 이루어진 점들을 감안할 때, 오늘 우리의 예배를 위한 후속적 노력들이 여전히 과제로 남게 되는 것이다.

 

V. 한국교회 예배의식에 대한 대안적 모색

 

오늘날 세계는 더욱 좁아지면서 각 나라, 각 지역의 문화적 차이들을 극복하고 서로에 대한 이해를 넓혀가고 있는 상황이다. 교회 또한 이 점에서 예외가 아니어서 타문화의 가치와 중요성 및 필요를 인식하고 문화적으로 다양성에 대해 열린 자세를 가지고 나아가야 할 것이 요청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가 복음적 신앙의 바탕을 가지고 교회의 일치성을 추구하면서도 예배와 자신들의 독특한 문화와의 관련을 높여 가는 노력을 기울이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국 개신교 초기 선교사들은 대체로 미신과 우상숭배에 대해서는 단호한 입장에 서있었던 것이 사실이나 토착적 종교들과는 무관한, 순수한 문화적 내용들에 대해서마저도 무조건 배타적인 입장에 서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들이 한국문화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없었을 뿐더러 일부 선교사들 중에 기독교 신앙의 본질과는 무관한 서구적 문화의 옷을 마치 기독교 신앙의 체계를 가장 잘 반영하는, 우월한 문화로 생각하고 한국토양에 심으려 했던 점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한국교회는 우리 문화를 무조건적으로 터부로 여기기보다는 미풍양속적 문화의 내용들을 우리 신앙 속에서 적절히 적용하는 태도를 가져야 되리라고 본다. 예배와 관련해서 이런 문화적 적응의 문제가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한국적 문화와 정서를 담은 예배가 예배자들에게 우리의 예배라는 인식을 주어 참여의 깊이를 가져다줄 뿐만 아니라 생활 속에 배어 있는 한국문화와의 불필요한 갈등을 피하고 바람직한 선교적 가능성을 넓혀 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나아가서 기독교인들의 예배와 삶을 서로 더욱 깊이 관련시켜 연속성을 갖도록 도울 것이다. 예배와 문화의 관련을 도모하고 문화에 친숙한 예배를 위해서 다음과 같은 것들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A. 예배의 상징적 요소들

 

Leonel L. Mitchell은 예배에 관해서 말하기를, "바로 인간의 영적 삶의 본질인 상징을 우리가 감추고, 잘라내고 격하시킬 수는 있다. 그러나 우리 자신들을 거기에서 배제시킬 수 없다. 예배(ritual)는...합체적(corporate) 상징행위에 다름이 아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예배가 곧 상징행위들로 이루어진 의식임을 시사하는 말이다. 특히 예배가 표현하는 구속사건을 상징적으로 가장 잘 표현하는 의식이라면 성만찬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간 개신교 예배는 설교중심의 예배에 치중하여 왔기 때문에 성만찬은 주변적 의식이 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오늘날에 와서 초대교회에 대한 연구들을 근거하여 성만찬을 중시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움직임이 관심을 끌고 있다. 성만찬은 원래 초대교회에서는 온전한 식사(a full meal)로서의 구조를 가지고 있었으나 후에 이 가운데 식사 부분--이 부분이 후에는 아가페 식사의 형태로 한 동안 지켜졌을 것으로 보인다--과 분리되어 그 대신에 간결한 상징의식(a token rite)으로서의 성만찬이 교회의 역사와 더불어 발전되어 왔다.


상징성이 지니는 큰 비중에도 불구하고 그간 한국교회에서는 성만찬에 사용되는 떡이 우리에게는 매우 낯선 종류의 빵을 사용하여 왔다. 이것은 성만찬의 의미를 충분히 살리기에는 적절치 못한 관행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상징성은 그것을 공유하고 있는 특정 문화 속에서 공동의 합의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그 문화의 산물이 아닐 경우 결과적으로 상징성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에 예배자들을 예배에서 소외시킬 수 있는 것이다. 실상 예수님의 성만찬 제정시 성물로서 사용되었던 빵은 그가 살아가셨던 유대 사회의 배경에서 나온 문화적 산물이었다. 예수께서는 식사 중 떡과 잔을 취하여 성만찬을 시행하였는데 이것들 속에는 유대인들의 주식이면서 생명의 음식이라는 상징성이 깊이 배어 있었다.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 건너편에서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실 때에도 그는 곧 바로 이 떡을 예수님의 생명수여적(生命授與的)인 삶에 비교하셨다. 그가 곧 생명의 떡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백성들이 주로 먹는 주식을 사용하여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 자신을 드러내시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한국어 성경에 떡이라고 번역한 일은 참으로 다행스럽고 지혜로운 선택이었다고 보여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의 예배에서 성만찬 떡은 여전히 국적 불명의 빵이 아무런 고려 없이 오랜 동안 자연스레 사용되어 오고 있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농경사회요, 그 가운데서도 특히 쌀농경 중심의 사회였다. 쌀은 여전히 우리의 주식이며, 그것으로 만든 떡은 우리 전통사회 안에서 통과의례와 주요 축제적 행사에서 빠지지 않는 의식적(ritual) 매개(媒介)였다. 우리 전통 속에서 볼 때 쌀과 떡 안에는 생명, 평화, 감사, 희생, 나눔 등의 의미들이 깊이 각인(刻印)되어 있다. 사람들은 떡을 먹으면서 더 깊고 친숙한 의미들을 풍부하게 경험하게 되고 성만찬 예식의 본문 속에서 나타나고 있는 그리스도 사건에 대한 계시를 들으면서 구속사건의 현재화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떡이 토속종교와의 관련성 때문에 기독교신앙의 혼합성 여지에 대한 우려가 있을 수 있으나 전통적인 예식본문 설교가 동반되는 예배에서 그것은 기우일 뿐이다. 문화적 변용이 된 성만찬 떡이 사용되는 성만찬은 한국의 예배자들로 하여금 기독교 신앙을 주체적이면서 친숙하게 경험하고 삶 속에서 구현하도록 도와줄 것이다.

 

B. 예배의 보조적 수단들

예배의 본질적 내용은 하나님의 계시와 이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다. 이러한 본질적 내용의 효과적인 교환을 돕기 위해서 예배음악은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고 보여지며 그 비중만큼이나 문화와의 관계도 심도 있게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예배의 음악이 문화적인 옷을 입는다는 것은 매우 필요하면서도 중요한 관건이 아닐 수 없다. 예배 속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 예배자가 응답하는 방식은 그들의 배경에 따라서 다양하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자신들에게 낯선 것보다는 자신들의 문화적 특성과 기질에 맞는 응답을 통해서 신자들은 보다 온전하게 응답할 수 있는 것이다.


근자에 예배음악도 각기 문화에 따라 자신들의 음악을 사용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한다는 주장이 널리 공감을 얻어가고 있고 실제로 실행되고 있다. 아프리카 등지에서는 외국선교사들에 의해서 시작된 교회의 경우도 아프리카 문화의 특성에 의해서 크게 영향을 받아 토착적인 음악을 예배에 활용하고 있는 예가 많다. 간혹 전통적으로 사냥 때 부르던 곡에 복음의 가사를 붙여 찬송하는 일 등이 구체적으로 시행되고 있다.


그간 한국교회의 일부에서는 한국의 전통음악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보는 사례가 없지 않았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선교역사가 1세기를 훌쩍 넘은 현재의 시점에도 찬송가의 대다수가 외국 곡조에, 외국가사로 된 것을 번역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세계교회와 동일한 곡조와 내용의 찬송가를 부른다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또 그것들의 수용에 대해 결코 배타적 입장에 서서도 안될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친숙하고 우리의 정서에 어울리는 곡조들이 우리 찬송가에 너무 희소하다는 것은 매우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악기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오르간만이 장엄하고 성스럽다는 인식은 잘못 이해된 것이다. 실상 중세 초기까지만 해도 오르간은 금지되었었으며 9세기가 되어서야 서방에 소개, 사용되어졌다. 종교개혁자들 가운데 일부는 오르간을 사치스런 중세 예배의 상징으로 보고 사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악기를 부수기까지 했던 역사를 보면 아이러니를 느낀다. 특정 악기에 대한 옳고 그름에 대한 견해는 상대적이며, 문화적 배경에 의해 형성된 편견일 수 있다. 예배의 악기는 예배곡과 마찬가지로 엄밀히 말하면 중립적이어서 그 자체가 성과 속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더욱 중요한 것은 어떤 가사를 담느냐에 의해 예배의 중요한 수단이 될 수 있다. 실제로 우리에게 익숙한 찬송가 중에도 외국 곡으로서 대중들이 부르는 노래에 찬송가 가사를 붙인 곡들이 적지 않다. 예를 들면, '천부여 의지없어서'와 '하늘가는 밝은 길이'는 한국교회 성도들의 가슴속에 아주 깊은 감동으로 남아 있는데 실제로 '천부여 의지없어서'는 스코틀랜드 민요인 'Auld lang syne'에서 온 것이고 '하늘가는 밝은 길이'는 'Annie Laurie'라는 가요에서 온 것이다. 그 외에도 찬송가 40,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는 스웨덴 민요에서 온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전통적인 가락이나 악기를 사용한 음악에 찬송가 가사를 덧붙여 사용한다면 서구화된 오늘의 상황이긴 하지만 우리들의 내면 속에 잠재된 친근한 정서로 인해 보다 깊이 공감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종종 우리는 예배에서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곡 등으로 연주하여야만 질 높고 가치 있는 음악이 드려지는 양 생각하는 편견이 있는데 적절치 못한 태도이다. 오늘날 서양음악은 이미 우리의 음악의 일부로 익숙한 것이 되어 있고 배타적인 태도로 구분하는 것은 곤란하지만 우리의 문화와 정서를 잘 반영하고, 또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교회음악을 위한 노력은 계속되어져야할 과제이다.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공감을 끌어내는 음악에 대해 보다 열린 자세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노력은 결과적으로 예배가 우리의 삶과 격리되지 않는 채 삶의 중심에 있음을 피부로 느끼도록 도와줄 것이다.

 

C. 예배의 시간적 요소들

 

기독교의 예배는 단순히 그 예배의 순서나 내용에 의해서만 다 설명될 수 없는 다른 요소들을 지니고 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예배의 시간적 요소들이다.


예배의 시간적 요소는 흔히 교회력에 따른 예배의 운용을 지칭하는 말이다. 즉, 년 중 모든 주일들 위에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의 소 주제들을 순서대로 부여하여 기념하는 것이 바로 교회력이다. 이것은 곧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이 우리의 시간 혹은 역사와 동떨어진 채, 무시간적으로(timeless)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실제적 역사의 시간 안에서 일어난 일들인 것처럼 구속사건을 우리의 실제 시간과 연계시키는 노력이다. 그리스도의 사건은 우리가 현재 역사적으로, 또는 문화적으로 경험하는 시간대 위에 위치되어질 때 더욱 현실감 넘치는 의미를 지닐 것이라는 기대를 내포하고 있다.
한국 교회가 예배를 현실의 시간 안에 두어 현장감을 불어넣을 수 있는 중요한 방법은 우선 우리의 문화 속에 있는 명절들과 역사적 사건과 관련된 기념일들에 대해서 보다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이용하여 교회의 관심영역을 통전적으로 확대하는 것이다. 이렇게 예배에서 우리의 명절과 기념일들에 따른 의미들의 반영은 예배자들로 하여금 예배에서 보다 깊은 현실감을 느끼게 도와줄 것이다. 교회는 세속의 절기나 기념일에 대한 배타적 태도나 무관심보다는 예배에 참석한 뒤 세상으로 나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결국은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섭리 속에 부속되어 있음을 인식케 할 필요가 있다. 다만 기독교적 변혁과 재평가가 항상 선행되어져야 함은 물론이다. 그간 한국 교회에서는 역사적인 기념일들--예를 들어 삼일절, 육이오 기념주일, 해방기념주일 등등--을 예배에 비교적 잘 반영해 왔다고 평가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절기의 반영이 주로 설교에만 국한되었을 뿐, 예배의 각종 순서 속에서는 잘 반영되지 못하는 감이 없지 않았다.


그밖에도 전통적 민족 명절들에 대해서도 무조건 꺼리고 배타적인 태도로 대하기보다는 적극적이고 문화변혁적인 태도로 기독교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리라고 본다. 우리의 경우 농경사회의 전통과 유교적인 전통이 복합적으로 자리하고 있어서 이들 전통을 잘 변혁하여 기독교적 선포의 효과를 거둘 수 있는지에 대한 깊은 고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민족명절 등에 대한 변혁적 노력은 일반 사회의 역사에 대해서 예배가 기독교적 답을 제공하고 실제 삶의 현장에서 살아가는 신자들에게 적절한 방향을 제시해 준다는 목적이 들어 있다.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터전과 거리가 멀고,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가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끊임없이 변혁을 통해서 하나님나라로 확장해 가야하는 터전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한 것이다. 세속사회의 사건은 하나님의 시간과 별개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그의 섭리 안에서 발생한 사건들이다. 이런 것들과 별개로 예배를 이해하기 시작할 때에 기독교인들은 삶으로부터 더욱 더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볼 때 그들의 삶의 현실은 곧 예배의 장이었다. 하나님은 현실적인 감각을 잃지 않기를 원하신다. 삶은 예배의 균형을 위해서 반드시 동반되어져야 하는 사항이다.

 

D. 예배의 공간적 요소들

 

예배의 공간적 요소들이란 곧, 예배의 건축구조나 내부 장식 등과 관련된 것들을 지칭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기독교가 국교화 되기 이전의 예배는 주로 비밀리에 가택환경(domestic setting)에서 드려졌다. 이때의 교회건물은 건축학적 미의 개념보다는 실용성에 바탕을 둔 건축 양식이었음을 몇몇 고고학적 발견들은 보여주고 있다. 그 후 4세기에 로마정부가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 교회가 사용하게된 바실리카(Basilica)는 장엄함과 화려함을 특징으로 하였다. 우리가 흔히 오랜 교회의 건물을 떠올릴 때마다 연상하는 웅장함이나 화려함도 바로 이때 이후의 건축물에 대한 지식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에 법정이나 공회당으로 쓰였던 건물의 사용은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생소함이나 거부감을 주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다만 기독교적 특성에 맞게 신학적 의미를 부가하면서 변형시켰을 것이다. 전통적인 건축에 대한 인식은 그후로 더욱 시대적인 변화를 겪었다. 동방교회의 비잔틴(Byzantin) 양식(4-15세기), 로마네스크(Romansque) 양식(8-13세기), 고딕(Gothic) 양식(중세 후기 이후), 르네상스(Renaissance), 바로크(Baroque) 양식, 로코코(Rococo) 양식 등은 건축문화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제 2차 대전 이후 유럽에서는 전후 폐허 속에서 저비용의 실용적 건축물을 지으면서 건축에 대한 큰 변화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결국 건축물에 대한 발전 과정도 문화적 배경의 영향이 큼을 보여주고 있다. 근자에 한국의 보수교단 가운데 어떤 교회들이 한국식 건축양식을 사용하고 기와로 꾸민 교회건물을 짓는 모습이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비록 과거의 건축물이 항상 우리에게 친숙하다는 맹신은 곤란하지만 우리의 정서와 심성에 맞는 건축 구조와 그 속에서의 예배는 예배와 삶을 연계시키는 중요한 일이라고 여겨진다.


그밖에 예배 집례자나 성가대원들의 복식도 문화적 변용에의 관심이 필요한 영역이다. 예를 들어서 복식의 경우 안수 목회자의 의미를 담은 영대(스톨, stole)와 까운에 들어가는 무늬, 또는 교회력 상의 절기에 따른 영대(stole)의 색깔 등은 세계교회들이 오늘날 거의 일치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대로 따르는 것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으나 디자인이나 복장 자체의 색깔은 한국의 복식을 충분히 연구하여 반영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성탄절이나 추수감사절과 같은 절기 때에 한복을 입고 교회에 나가는 모습들이 이미 널리 보편화된 것을 보면 이러한 문화적 적용의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한국 개신교회들이 그간의 분열의 양상을 벗어버리고 이런 부분에서라도 서로 합의된 결과들을 도출하도록 노력한다면 예배와 삶의 일치는 물론 교회와 교회의 일치도 한층 가속화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E. 기타의 요소들

 

예배 안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접하고 응답하는 데 있어서 매개의 수단은 시대별로 변화가 있었다. 초대교회와 중세교회의 예배를 통해서 살펴보면 당시의 예배들은 오늘의 우리 예배와 그 형식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비록 중세교회의 적지 않은 오류가 있기는 하지만 중세 천년의 역사를 범주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또 다른 오류가 될 수 있다. 초대교회 및 중세교회의 예배를 오늘의 예배와 비교하여 볼 때 중요한 통찰을 발견한다. 초대교회와 중세교회는 예배 안에서 상징성을 매개로 해서 계시를 전달하는 체계였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중세교회의 예배와 의식들은 상징성을 통한 진리의 전달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서 6세기 전까지 체계화의 과정을 거친 세례식(예배)의 모습을 보면 이런 특징이 역력하다. 세례식이 시행되는 예배에서 모든 순서들은 대부분 상징적 행위로, 또 상징물을 사용하여 수세자와 사람들을 깨우치는 수단으로 삼고 있는 많은 예를 발견한다. 예를 들어 세례를 받기 직전, 서쪽을 바라보며 세상의 악과 결별(renunciation)을 선언하고 동쪽을 바라보며 신앙을 결단하는 순서--동쪽은 태양이 떠오르는 곳이며 예수님은 '의의 태양'과 같은 분으로 비유가 되었기 때문에 신성시되었고 그에 반해 서쪽은 악을 상징한다고 보았다--를 갖는다거나 기름을 바르는 일(anointment)을 시행하였다. 기름바름은 곧 영적 전투에 임하는 준비를 상징했다. 경기자가 몸을 민첩하게 하기 위해 기름을 발랐던 것에서 유래된 것이다. 또 지금과 달리 세례 시에도 완전탈의를 하였는데 이는 옛 자아, 부패한 옷을 말끔히 벗어버린다는 뜻이었다. 물에서 나온 후에는 새로운 생명의 상징으로 흰옷을 입었던 경우와 비교해 보면 의미가 더욱 분명해 진다. 또 세례를 마치고 나오는 사람에게 기름바름이 있었는데 이것은 곧 성령이 수여됨을 의미하였다.


예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중세의 예배는 그야 말로 보는 예배였다. 예배언어가 라틴어였고, 거대한 장방형 바실리카에서의 예배는 지적 깨닳음의 방식으로 예배에 참여하기란 거의 불가능하였다. 그들은 교회의 유리에 새겨진 그림, 십자가수난역정을 새긴 조각들, 건축의 스타일 등으로 신앙을 배우고 익혔다. 그나마 성만찬도 사제 혼자에 의해 제단에서 드려지고 회중들은 관객이 되어 벨소리를 듣고 무릎을 꿇고 성변화된 예수님의 몸과 피를 바라봄으로 만족하여야 했다. 또한 성별된 떡을 교회 안에 두어 경배토록 하고 관람케 한 것은 교회 안에 늘 계시는 그리스도를 깨우쳐 주는 것이기도 했다. 물론 중세의 의식이 원래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교직자들의 무지와 태만함 등으로 인해 신자들을 바르게 교육하지 못하고 수많은 오류와 미신을 낳았으며 신자들의 무지를 초래하여 복음의 본질을 빗겨간 오류를 범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중세예배는 계시의 전달과 깨우침을 바로 시각적(visual)인 수단에 의해서 행하려고 하였다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종교개혁기는 초대교회나 중세가 문자적 인지수단--그 결과 지적 교육의 방식--이 희소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성경과 주석 등이 인쇄술의 발달과 더불어 활발해지던 시기였기에 중세의 이런 '보는' 예배나 의식은 큰 수정을 거쳐야 했다. 즉, 사람들에게 상징물을 보고 경배하는 차원을 탈피하여 듣고 익히는 예배로 전환된 것이다. 일례로 칼빈은 세례못을 본당과 분리된 곳에 설치하는 것을 반대했다. 항상 잘 설교가 잘 들릴 수 있는 설교단과 가까운 곳에 설치하도록 하여 중세적인 미신성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이런 역사적 과정에서 확인하게 되는 것은 결국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계시의 매개수단은 분명 시대와 상황과 문화에 따라서 다른 형식과 수단을 취할 수 있었음을 확인케 한다. 이 점은 오늘날 소위 첨단 기술을 이용한 예배들에 대해서도 적절한 답을 제시해 준다고 볼 수 있다. 최근에 알려진 멀티미디어를 사용한 예배 등도 어떻게 사용되느냐에 대한 적절한 방안에 대한 논의를 거친 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자막으로 찬송가 가사, 성경구절 및 설교의 진행과 더불어 있어지는 각 내용에 대한 강조나 요지 등을 화면을 통해서 보여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예배와 생활의 관계를 고찰함에 있어서 짚고 넘어 가야할 것은 첨단 정보화 시대의 중요한 수단으로 떠오른 사이버 세계와 그것이 예배에 주는 영향에 대한 고민이다. 사이버는 분명 현대인들에게 훌륭한 문명의 이기로서 기능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사이버를 통한 예배를 생각할 때 매우 조심스러움을 금할 수 없다. 사이버를 통해서 접하는 가상현실 속에서는 타자와의 만남 자체가 왜곡되거나 불완전한 만남이 되기 쉽다. 또한 사이버상의 만남은 실제적인 관계의 역동을 경험케 할 수 없다. 예배는 오히려 이런 불완전한 만남의 현실과는 달리 물리적 현실을 지닌 채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서로 어울리고 서로에 대해 연대와 책임을 느끼는 그런 만남이 되어야 한다. 예배가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인간을 진실로 잇는 이음매가 되어야 하기에 서로 만남으로서 체득되는, 역동이 있는 예배가 결코 사이버 예배로 대치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VI. 나오는 말

 

이상의 연구에서 살펴 본대로 오늘의 예배의 경향은 대체적으로 기독교신앙의 본질을 지키면서도 전통적인 예배관습을 회복하려는 노력과 더불어 지역교회들이 속한 시대와 문화 및 상황에 맞는 예배의 옷을 입고 예배의 효율을 기하는 노력들이 다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모습이다. 이러한 현실 하에서 한국교회의 예배는 과연 어떠한 반응과 대책을 가지고 그 방향을 모색하여야 할 것인가? 이미 논의를 충분히 밝힌 대로 오늘의 한국교회는 예배신학적 관점에서 기독교의 예배 전통에 대해 먼저 귀를 기울이고 그 거울을 바라보아야 함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면서 동시에 오늘의 현실에 대해서도 열린 자세로 예배의 내용과 형식들에 대해서 변화를 추구하여야 할 것이 요구되고 있다. 동시대의 문화와 정서 및 수단에 대해서 민감해야 한다. 기술적 수단들, 영상 등, 다양한 장르에 의한 예배 메시지의 전달에 대해 닫힌 사고로만 대해서는 안된다. 사물과 인간에 대해서 학자와 예술인, 작가들이 서로 보완적으로 표현하여 전체가 통전적인 안식(眼識)을 제공하듯이 예배의 다양한 장르에 대해서 깊은 이해를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 비로소 한국예배의 대안적 모델은 가장 적절하게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다. 

출처 : 내 사랑 중국 ♡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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