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나쁜신앙)

[스크랩] 새생명말씀선교회(이요한, 대한예수교침례회)

수호천사1 2011. 2. 12. 13:30

새생명말씀선교회(이요한, 대한예수교침례회)  

어느 교인의 부인이 이 교회에 다닌다는 말을 듣고 이 교회에 관한 글을 올려 드립니다.
대한예수교침례회는 소위 구원파교회(안양중앙교회, 인덕원)이며, 이요한계열의 구원파로서 새생명말씀선교회라고도 부릅니다.
우리나라 구원파계통은 권신찬(유병언)계열의 기독교복음침례회(주식회사 세모, 삼우트레이딩), 박옥수계열의 기쁜소식선교회와 이요한계열의 새생명말씀선교회의 세가지로 크게 분류됩니다.
이요한은 원래 권신찬계열의 구원파였는데 유병언의 사업에 대해서 비판을 하다가 몰매를 맞고 쫓겨나 몇명의 지지자들과 교회를 시작하였습니다.
이요한의 교리는 그가 있었던 권신찬계열의 구원파와 매우 유사합니다.

(1) 이요한계열의 구원파에 대해서 공식적인 주장을 보면, 몇몇 이단들(지방교회, 베뢰아)과 같이 육체와 영혼을 별개의 것으로 각각 분리시켜 구별하고 있습니다.
즉 거듭난 자들은 예수를 믿음으로 이미 모든 죄사함을 받았지만 영혼만이 구원을 받은 것이며, 육체에만 그 죄성이 아직 남아있다고 주장하며, 사탄이 육체에 거한다고 주장합니다.
즉 이요한은 영혼의 구원과 달리 육체의 구원을 구별하여 그것을 생활의 구원이라고 부릅니다.
죄성의 문제에 대해서, 이요한계열이 기쁜 소식선교회(박옥수계열)와 대외적으로 다른 점은, 영혼은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육체에만 죄성이 남아있으므로 육체의 구원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2) 이요한계열의 구원파는 회개를 두가지로 분류하는데, 회개와 자백이라는 두가지로 구별합니다. 물론 회개라는 용어에 대해서는 일생에 오직 단회적이라고 주장하는데, 예수를 믿을 때에 회개를 이미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이요한계열과 박옥수계열은 조금 다른데, 결국 용어적인 차이점만 있을 뿐 동일합니다.
그러나 이요한이나 박옥수, 모두 거듭난 자는 반복적으로 회개하지 않는다는 점은 동일하며, 오직 단회적인 회개만을 주장합니다. 이것은 권신찬계열도 같습니다.
회개를 오직 단회적인 것으로 주장하는 것은 동일하며, 결론적으로 이들의 주장은 회개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단회적인 믿음의 회개뿐 아니라, 반복적인 범죄로부터의 회개도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3) 이요한계열의 구원파는 성경을 임의적 자의적으로 해석합니다. 특히 알레고리적(풍유적)인 해석을 자주 합니다. 특히 계시록의 적그리스도의 출현과 종말론을 유럽통합과 연관시키는 해석은 거의 시한부종말론과 같습니다.
박옥수계열과는 달리 종말론에서 극단적인 세대주의적인 전천년론적인 주장을 하고 있는 것도 그 특색입니다.
유럽통합이후 한 국가가 적그리스도로 등장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며, 중동평화조약후 7년 후에 종말이 시작된다고 시한부적인 종말론을 주장합니다. 666은 실제로 이마에 받는 바코드라고 주장합니다.
144000명은 실제로 회심하는 이스라엘 민족만의 숫자이며, 그들은 다시 죽고 부활한다고 주장합니다.
이요한은 2000년 전후가 종말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며, 임박한 종말을 강조함으로서, 현재적인 구원에 대한 믿음을 주장합니다.
즉 구원파교인들은 믿음은 매우 깊습니다. 그 이유는 종말적인 예수님의 재림은 임박하였으며, 구원은 오직 자신들의 교회에만 국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즉 그 교회 교인들의 생각은 이요한의 교리를 깨달음으로 그들만이 이미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원래 구원파는 독립적 침례교의 형제교회(Brethen Church)라고 하는 곳의 한 배타적이고 패쇄적인 한 분파의 선교사가 국내에 유입시킨 것입니다. 그들의 특징은 단회적인 회개, 목사제도와 신학체계의 부정, 극단적 세대주의 전천년론적인 종말론의 강조가 그 교리입니다.
그래서 구원파는 원래 일반교회의 신학체계와 목사제도를 부정합니다.

(4) 일반교회에는 구원이 없으며, 예를 들어 장로교의 예정론은 수많은 사람을 지옥으로 인도한다고 주장합니다. 또 이요한은 기독교는 생명이 없는 거짓교회라고 주장합니다.

먼저 구원파가 일반 기독교 교회와 비슷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구원파가 일반교회와 동일하다면 왜 박옥수 기쁜 소식선교회는 거듭남의 비밀이니, 죄사함의 비밀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겠습니까? 동일한 것도 "비밀"이라고 말하는지요?
이요한계열의 구원파 역시 기성교회와의 차이점을 분명히 강조하고 있습니다.....매우 이상한 일입니다. 그들은 대외적으로는 일반교회와 비슷한 것처럼 말하면서, 대내적으로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5) 이요한과 권신찬의 삼위일체에 대한 내용을 들어보면 아주 간략하게만 설명하며 구체적인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에는 양태론적인 요소가 아주 많습니다.
이요한은 예수님이 하나님 자신이 육체로 오신 것이라고 주장하며, 삼위가 동시에 나타나는 것을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며, 어려운 것은 그냥 넘어가야 한다는 식으로 설명합니다.
또 자신이 교회에서는 목사, 남편, 아버지라는 비유로 불린다는 것을 삼위일체를 사역적으로 설명합니다.
이들과 유사한 지방교회, 베뢰아, 권신찬계열이 모두 양태론을 주장하였습니다.

이요한계열의 구원파 교리 비판

(1) 우리 인간을 살아있는 상태에서 육체와 영혼 두가지로 분류하고 분리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러한 것은 헬라적인 이원론이라고 부르는 이단적인 주장으로, 정동섭교수를 비롯하여 이단연구가들이 구원파가 지방교회나 형제교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죄를 짓고, 우리의 영혼은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전인적(全人的)으로 죄를 짓습니다.

우리 인간은 죽었을 때에만 비로소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어집니다.
비록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라고 바울이 구별하여 언급하고 있지만, 바울이 "육체의 소욕"이라고 말한 것은, 인간에서 "영혼을 제외한 육체만의 소욕"이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에 유의하셔야 합니다.
바울이 말한 "육체"라는 것은 영혼에 반대되며 분리되는 개념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에 반대되는 개념이라는 것을 잘 알아야만 합니다.
육체의 소욕? 영혼이 없는 육체가 어떻게 소욕을 느낄 수 있는지요?
영혼이 없는 육체는 곧 시체입니다. 또 육체없는 영혼은 죽어서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만일 육체에만 죄가 있다고 가정하면, 사람이 죽어서 육체를 떠나면 죄가 없어지는지요?

사람이라고 하면 육체와 영혼을 함께 가진 전인적인 생명체를 말합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전인적으로 죄를 짓는 것이며, 사람이 거듭나게 되는 것은 전인적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원래 육체에는 죄가, 영은 하나님이, 혼에는 그 사람의 인격이 있다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곳이 지방교회라는 곳입니다. 지방교회는 형제교회의 영향을 받았고, 그래서 구원파는 지방교회와 형제교회와 유사한 곳이라고 말합니다. 베뢰아 귀신파도 이러한 주장을 합니다.

그러므로 이요한계열은 박옥수계열보다 "이원론"이라는 이단성이 하나 더 추가되어집니다. 저 역시 이요한계열의 구원파 자료를 읽어보고 처음 알았습니다.
그러한 편협된 생각이 중세때에 카톨릭에서 있었고, 영혼만을 중요시하고 육체를 죄악시하며 학대하는 엄격한 금욕과 절제의 수도사 시대가 있었습니다.
최근에는 지방교회와 소위 영성신학이라고 하는 곳에서 영혼과 육체를 분리시키는 그러한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영혼"이라는 단어는 육체와 구별되는 정신세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전인적인 인간자체를 말하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육체"라는 단어도 영혼을 제외시킨 몸만을 말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육체"라는 용어도 대부분 전인적인 인간을 말합니다.
바울이 말한 “육신”이라는 용어는 영혼을 제외한 육신이 아니라, 총체적인 사람자체를 말하며, 바울은 육신(인간)의 소욕과 성령(하나님)의 인도를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시84:2)

"내 영혼(soul, 네페쉬)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니"(시63:1)

위의 성경본문들이 영혼 따로 육체 따로를 말하는 것일까요?
육체에 죄가 있다면, 어떻게 마음과 함께 육체가 하나님께 부르짖을까요?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후4:11)

육체에 예수의 생명이 나타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으며, 육체에 죄가 남는다는 구원파의 주장이 완전 거짓이 됩니다.

(2) 죄는 물질명사가 아닙니다. 죄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말합니다.

내가 A라는 사람에게 돈을 빌려 값지 않았다면, 나는 다른 사람 B에게 죄를 진 것이 아니라, A에게 죄를 지은 것입니다. 즉 나는 A와의 관계에서 죄를 가진 것입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면, 아담이 인류를 대표하여 하나님에게 지은 죄를 "원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즉 A에게 지은 죄가 뿌리가 되므로, 나는 A에게서 돈을 떼어 먹고 야간도주를 하든지, 혹은 또 다른 죄(사기, 도둑질등)를 지어 그 돈을 구하려고 할 것입니다.
즉 원죄라는 뿌리가 바로 자범죄의 원인이 되는 것이며, 그것을 "죄성"(罪性)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을 "오염과 타락된 죄성"이라고 말합니다.
즉 원죄가 원인이 됨으로서, 육체 안에만 죄성이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전인적으로 우리는 죄성을 갖습니다.

또 나는 A에게 돈을 주어야할 책임이 있으며, 안주면 법적으로 처벌을 받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책(罪責, 죄에 대한 책임)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죄사함을 받는다는 것은 죄책(심판)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예수를 믿으면 우리를 정죄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죄책의 면제, 즉 정죄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노라." (롬8:1)

죄는 물질명사가 아닙니다. 죄는 육체에 남거나 떠나는 것이 아니며, 죄란 "관계"입니다.
즉 "죄가 없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죄책을 묻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즉 정죄함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죄가 있지만 그 심판을 면제하여 주겠다는 뜻, 즉 정죄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죄책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를 믿는 자에게 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죄책을 묻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죄라고 하는 것은 물질적인 명사가 아니므로 구체적인 개념을 갖고 있지 않으며, 죄란 추상적인 개념이며 즉 "관계"를 말합니다.
결국 "죄"란 "죄성과 죄책"을 의미합니다.
앞서 설명하였듯이, 죄성은 자범죄의 원인이 되는 것이고, 죄책은 하나님께 죄에 대한 책임(심판)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죄를 사함을 받는다는 것은 "죄책"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원죄는 그 뿌리가 있음으로 인하여 죄성을 갖게 합니다.....그래서 거듭난 자도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영혼과 분리시켜 육체에만 죄성이 남는다는 주장은 잘못된 이원론적인 주장입니다.

(3) 또 회개에는 회개와 자백의 두가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 회개라는 단어 자체는 한가지의 의미밖에는 없습니다.
회개(동사: 메타노에오)라는 단어는 개념적으로 보면 "방향수정"을 말합니다..... 즉 신앙의 방향수정도 회개이고, 범죄로부터의 방향수정도 회개입니다.
"메타"라는 단어는 "후에(After)"라는 뜻이며 "후에 바뀐 마음"을 말합니다.

"자백"이란 회개와 달리 "자기 죄를 스스로 고백하는 것"을 말하며, 회개와는 다른 개념입니다.
우스운 것은 구원파도 자신들도 자백은 하여야 한다고 가르친다고 합니다.
믿는 자에게는 더 이상 죄가 없다고 하면서 자백은 하여야 한다고 하는 모순을 스스로 드러냅니다. 죄가 없는데 어떻게 자백을 합니까?
고문을 당하였나요? 죄가 없는데 어떻게 죄를 자백하란 말입니까?
구원파들은 이 질문에 절대 답변을 하지 않습니다.

이요한계열은 육체에만 죄성이 남아있다고 하면서, 또 영혼만이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서, 왜 자백을 하여야 한다고 합니까?  영혼없는 육체가 자백을 해야 합니까?
그들은 결국 자백과 회개를 다르게 구별하며, 회개는 단회적인 믿음이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회개라는 용어자체는 오직 한가지의 개념으로서, 두가지의 용례가 모두 언급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첫째 회개란 하나님께 돌아오는 믿음을 말하며 단회적입니다. 유대인들에게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는 세례요한의 말은 단회적인 믿음을 가르킵니다.(헬라어: 메타노에오)
하나님께로 신앙적 방향수정을 하라는 것입니다. 즉 믿음을 의미하며, 이러한 단회적인 회개에 대해서는 일반교회에서도  이미 정통신학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둘째, 회개란 범죄로부터 돌아옴도 회개이며, 이것은 지속적일 수도 있고 반복적일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회개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성경적인 실례를 올릴 것입니다.
구원파는 이것이 틀린 것입니다....그리고 회개를 더이상 하지 말라는 것은 죄로부터 방향수정을 하지 말라는 것이 되므로, 죄를 지어도 좋다는 결론이 되어 버립니다.

"죄를 지어도 좋다"....누구의 주장입니까? 사단의 미혹과 동일합니다.
"온전한 의인이 된다". 즉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것입니다....누구의 주장입니까? 사단의 주장과 동일합니다. 회개하지 말라는 것이 과연 누구의 주장입니까?

만일 성경에서 회개란 용어가 단회적인 믿음이 아니고, 지속적이며 반복적으로 사용된 경우가 있다면, 구원파의 주장은 이요한계열이든 박옥수계열이든 권신찬계열이든 모두 틀린 것입니다.
기독교인이라면 성경이 가장 권위가 있으며, 모든 기독교의 교리는 성경에 그 근거를 갖고 있다는 것을 반드시 믿어야만 할 것입니다.
(상세한 자료는 박옥수계열의 구원파를 비판한 글에 많이 있습니다)
구원파는 회개를 거듭남의 믿음으로만 생각하며 단회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자백과 회개를 구별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성경본문을 보십시요.....!!!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 일곱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메타노에오)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눅17:3-4)

위의 성경본문은 일곱 번을 회개한다고 하면 용서를 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위 성경본문에서 회개가 단회적입니까? 반복적입니까?
일곱 번을 죄짓고 일곱 번을 회개하는 것이, 일곱 번을 믿으라는 것으로 해석되어집니까?
일곱 번을 자백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자백은 하나님께 하는 것입니다.....형제에게 일곱 번을 죄를 얻고 그 용서를 구하라라는 것입니다.
위의 회개란 단어는 헬라어로 "메타노에오"(회개하다)이며, 반복적인 회개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구원파들은 예수님이 알려주신 주기도문을 외면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고.....”라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회개, 죄로부터의 돌이키는 회개에 대한 성경적인 증거는 많습니다.

-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메타노에오)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행8:22)

사도베드로가 성령을 돈을 주고 팔라고 하는 시몬에게 말합니다.... 너의 악함을 회개하라고 말입니다. 베드로가 거짓말을 하였겠습니까?
시몬에게 회개하고 기도하면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신다고 베드로는 말하였습니다.....위 본문에서도 회개는 악함으로부터의 돌이킴의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시몬이 진심으로 회개하고 용서를 받았는지 안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이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다만 베드로는 시몬에게 악함으부터의 회개를 충고하였던 것이며, 위 성경본문의 회개는 분명히 "악으로부터의 용서를 구함"이라는 용어로 사용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에게 성령께서는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이것도 단회적인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범죄와 타락, 악으로부터의 돌이킴을 말한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소아시아지역의 교회에게 쓴 서신입니다. 즉 교회 건물에게 회개하라는 것이 아니라, 에클레시아, 즉 "교회의 성도들"에게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계시록2장-3장을 읽어 보십시오....모두 "메타노에오"(회개하라)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소아시아 일곱교회의 교인들에게 예수를 다시 믿으라고 요한이 경고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범죄와 악으로부터 뉘우치고 용서를 구함으로 다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자백이 아닙니다....범죄와 악으로부터의 방향수정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도 죄로부터의 회개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들아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한대로 국문 할지라.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 그리한 즉 죄악이 너희를 패망케 아니하리라." (겔18:30)

각 사람의 행한대로 국문을 하겠다는 것이며, 죄에서 돌이켜 방향수정을 하라는 것입니다.

(4) 칭의

구원파의 주장은 스스로 오류가 있습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온전한 의인이 되었다면,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아야만 합니다.
그런데 구원파들도 죄를 지을 수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오류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온전한 의인이 되며 죄가 없다면, 더 이상 죄를 짓지 말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만약 온전한 의인이 되었다면 하나님과 동일한 속성을 가진 것이 되므로서, 더이상 성령의 인도도 필요하지 않게 됩니다.
구원파의 주장처럼, 온전한 의인이 되었는데도 자백을 하여야만 하고, 죄를 지을 수가 있다면 그것이 어떻게 온전한 의인이 된 것입니까?
구원파는 분명히 "온전한 의인이 되었으므로 죄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예수님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어 우리는 의인이 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온전한 의인이었던 예수님도 죄를 지을 수가 있었고 자백도 하였는지요?

예수를 믿음으로 인한 칭의란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인이라 불러주시는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를 말합니다.
바울의 서신문에서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라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음”의 용어의 개념을 보다 깊이 알기 위하여, 일련의 헬라어에 대해서 주목하여야 합니다.

헬라어 “디카이오오”(의롭다하다, 바르게 하다), “디카이오마”(의롭다함, 심판), “디카이오시스”(무죄선언)라는 용어는 주로 법정용어로 사용되어집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자력과 의지, 또는 행위로 의인이 되어지지 못하므로, 우리의 칭의는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가 되어집니다.
즉 우리가 의인이 되는 대가(보상)가 바로 그리스도 예수가 됩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죄인을 의롭다하심이라는 법적 무죄선언을 통하여 의인으로 여기십니다.
우리가 정말로 의인이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로 인하여 대신 십자가에 달리셨기 때문에, 우리 죄가 사하심을 받고, 가리우심을 받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면 우리가 차를 운전하다가 사람을 인명피해의 사고를 내었다고 가정하고, 사고를 내어 구속된 사람이 그 피해자측과 다행히 합의가 되어 보상을 하고 풀려났다고 합시다. 가해자는 보상을 통하여 무죄선언을 받고 석방되어진 것입니다.
그는 보상을 함으로서 법적으로 더 이상 죄인이 아니며 자유인이 되었지만, 그에게는 아직 실질적인 죄가 남아 있습니다.
이것이 칭의의 단계입니다. 즉 법적 신분적 변화를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 보상을 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대속입니다.
또한 대속을 곧 구원이라고 동일시 하는 것은 성경적인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즉 의인이란 하나님께서 죄인인 나를 향해 무죄선언하시는 사법적인 행위입니다. 다시 말하면 정죄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의 정죄의 관계에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의의 관계로 전환시켜 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으로 얻는 칭의란 "믿음으로 인하여 죄인을 의인이라고 불러줌"입니다.
칭의란 실제로 온전한 하나님의 무죄한 성품으로 만들어주는 상태가 아닙니다.
그레서 사실상의 의인은 없는 것입니다.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죄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그것이 무죄선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8:1)


5) 구원의 시제

이단에 빠지는 이유가 성경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을 부분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교적 쉽고 간단하게 설명하여 드립니다.
성경에서 “구원”에 대한 시제는 세가지로 언급됩니다.
즉 우리가 이미 얻은 구원(과거적 시제의 구원)과 현재 구원의 길을 걷고 있다는 표현(현재적 시제의 구원)과 궁극적으로 얻게되는 구원(미래적인 시제의 구원)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성경구절은 과거적인 시제의 구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요5:24도 현재완료수동형입니다. 즉 믿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지 않으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것입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3:18)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사함을 얻었도다“(골1:13-14)

골1:13-14는 이미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동사는 모두 과거형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현재형의 구원을 함께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현재적인 면과 현재에도 계속되는 진행적인 구원을 함께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

“이루라”라는 단어는 work out의 의미로 현재동사입니다.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2:2)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롬8:16)

성경은 이미 얻은 과거적인 구원의 개념뿐 아니라, 현재적인 시제를 갖는 구원의 개념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성경은 장래적이고 궁극적인 구원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shall be saved)....”(롬5:9)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며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롬8:23)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1:9)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롬14:1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3:20-21)

특히 우리가 잊으면 안되는 것은 그 구원의 시제가 과거이든 현재이든, 장래이든, 인간의 구원의 수혜자이며, 하나님이 구원의 주체이시며, 즉 인간은 구원에서 피동적인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이란 무조건 내가 스스로 구원을 얻었다고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갖고 있는 믿음의 확증이어야만 합니다.
즉 구원이란 “믿음의 현재적인 과정”이어야만 합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13:5)

그것이 과거의 시제만을 생각하는 형태의 구원, 즉 현재시제의 구원을 전혀 무시하는 믿음의 확증이나 미래의 종말적인 구원만을 의미해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즉 구원의 시제와 연속성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과거의 구원만을 구원으로 알고, 현재의 구원만을 구원으로 알든지, 또 궁극적인 구원만을 구원으로 아는 것도 균형잡힌 구원관이 아닌 것입니다.

내가 과거에 예수를 어떻게 믿었는지, 내가 과거에 교회를 열심히 다녔는지는 구원의 확신이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내가 지금 예수를 믿느냐는 것이 중요합니다.

믿는 성도들에게 성령이 함께 하신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구원을 얻었다는 인침과 보증이 될 수도 있으며, 아직 성령이 우리를 보호하고 인도하신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얻은 구원이 아니라는 증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에 대해서 Already, but not yet 이라고 말해야만 합니다.
예수를 믿는 성도들은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으며 지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최종적인 구원은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며, 그 최종적인 완성을 이루기 위해 우리가 이루어야만 하는 책임적인 측면이 있다는 것도 잊으면 안됩니다.
내가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은 나의 현재적인 믿음의 확증입니다. 구원의 확신이 남용되어서 내 자신이 심판주, 구원주가 되면 안되는 것입니다.

대속의 개념을 구원과 동일시 하거나,  혹은 과거적인 구원만을 구원의 전부인 것으로 착각하여, 이미 얻은 구원, 나는 몇월몇일에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주장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도 구원파 목사의 주장을 깨닫는 것을 구원받은 날짜라고 아는 것은 큰 오류입니다.
그들은 구원받은 날짜를 알아야만 한다고 주장하는데. 그 날짜는 바로 이요한의 주장을 깨닫는 날을 말합니다.

 

출처:비공개

 

출처 : 야곱의 우물가
글쓴이 : 장미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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