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 밟기의 문제, 인간의 교만함 |
인간이 대리하는 신들의 전쟁 |
정준영(Jay Chung)
사람들은 모두가 자신이 갖고 있는 종교가 인류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고 진정한 구원을 이루며 또한 절대 진리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의 종교를 전하고 구제, 봉사도 하며 그들의 신을 전하고자 한다. 그 전제 조건이 무엇일까?
진정한 신이 존재한다면 인간의 평화를 원할 것이다. 그러나 역사 이래 종교로 인해 수많은 분쟁, 반목, 테러, 전쟁이 그치질 않는다. 인간은 종교로 인해 더욱 큰 분쟁을 경험한다.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살인의 근원이 종교다.
모든 분쟁은 인간의 탓인가? 아니면 신으로 인한 것일까? 그 전쟁을 정당화하는 것, 그 깊은 뿌리, 그것은 그들의 신을 향한 인간들의 무지하고 맹목적인 충성심이 아닐까? 아니면 신의 자리에 스스로 올라 인간의 방법으로 그 나라를 확장시키려는 만용은 아닐까? 인간 구원을 위한, 혹은 진리를 위한다는 전도라는 명패를 달고 끝없이 피 흘리는 역사의 중심에는 그러한 자기 본위적인 정당성이 존재하는 것 같다.
전도와 선교, 포교라는 전쟁터에서 인간의 몫은 무엇일까? 그 몫을 알려면 신의 영역과 인간의 한계를 알아야 할 것이다. 그 전쟁은 신의 영역이다.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이 감당할 수 있고, 감당해야 할 영역이 평화의 한계까지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 평화의 한계는 서로가 서로의 인간됨을 인정하고, 한계를 인정하면서, 서로의 진리, 종교까지 최대한으로 이해할 수 있는 선까지일 것이다. 그것은 가슴 깊은 곳에서의 서로를 향한 사랑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신들의 영역까지 우리가 침범할 때, 신의 뜻을 오해하거나 만용, 혹은 과잉 충성의 결과로 그 근본의 사랑을 상실하게 되고 결국은 전쟁과 살인, 파괴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인간은 각자가 서로 다른 그들만의 신들을 위한 충성심과 주장을, 서로 다른 색을 칠한 진리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였다.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전쟁은 그 진리를 위한 전쟁에 비할 바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진정한 진리를 전쟁과 힘으로 밝힐 수 없다는 것은 인류의 역사가 말해 준다. 오히려 그들의 진리를 증명하고자 그들의 진리 속의 주장과 상반되는 수많은 일들을 행해 왔다.
전쟁과 살인, 증오, 침략, 그 진리를 위한 싸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결국 진리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그 진리를 부정해 가고 있는 것이다. 신들의 전쟁은 신들에게 맡겨야 한다. 그 시작은 신의 신됨을 인정하는 것이다. 신의 신됨을 인정하는 것은, 인간이 신의 영역을 침범해서 자의로 판단하고 결정하고 전쟁의 주체가 되어 총과 칼로 그 전쟁을 수행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신은 인간 위에서 신들의 전쟁을 할 것이다. 인간은 인간의 몫을 해야 한다. 인간은 신 앞에 겸손해질 이유가 있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 무엇이 진리라고 세상에 가르칠 수는 없지만, 각자에게 가르쳐 준 신의 가르침을 실행함으로 무엇이 진리인지, 누가 진정한 신인지, 인간이 신 위에 있어야 하는지, 신을 인간 위에 놓아야 하는지 밝힐 수 있을 것이다. 비난과 저주는 오히려 승리의 길에서 멀어지게 한다. 죽기 위해 태어나 죽기까지 인간을 사랑했던 한 신은 그 가르침을 한 단어로 말한다.
사랑하라, 그것이 인간의 몫이다. 그것이 인간 구원을 향한 진정한 진리라면, 인간은 그 몫을 감당함만으로 능히 그 구원을 이룰 것이다. 신도, 인간도 사랑하는 것만이 인간의 몫이다. 그 사랑으로 인해 인간을 향한 진정한 전도와 구원이 이루어질 것이다. 참진리가 밝혀질 것이다. 우리의 모든 행위는 가슴 속의 그 사랑으로부터 비롯되어야 한다.
인간은 인간을 판단할 능력도 권한도 또 책임도 없다. 오직 사랑함만으로 인간 존재의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사랑을 온전히 알 수도, 행할 수도 없지만, 인간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진리의 신은 인간의 몫인 그 사랑함도 도울 것이다. 땅을 밟고자 하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마음으로 그 땅을 밟는 순간, 스스로 인간임을 부정하는 교만함에 빠지게 되는 것일 것이다.
신을 믿고 그 신의 사랑, 능력을 믿는다면, 영적 전쟁에서 진정으로 군사의 몫을 감당하려면, 인간을 향한 예수님의 단 한 가지 계명이자 부탁인 이웃을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그 가장 깊은 뿌리까지 우리의 영과 혼 속에 집어넣어야 한다. 무엇이 진정한 사랑인지는 이미 기독교인들이 신으로 믿고 따르는 예수께서 보여 주셨다.
그 사랑을 인간적으로 해석하고 감히 그분의 영역까지 침범하려는 교만함을 드러내서는 안 될 것이다. 무모함, 무지도 그 근본은 교만함이다. 맹종도 그에서 나올 수 있다. 십자가의 사랑을 잘못 해석한 중세의 기독교인들로 인해 마호멧이 이슬람을 탄생시켰고, 많은 성도들이 길을 잘못 들었고 하나님의 영광은 가려지고 그분의 사랑은 흑암으로 떨어졌다.
십자가의 사랑은 자신이 죽는 사랑이다. 남을 모욕하고 무너뜨리는 사랑이 아니다. 그를 온전히 이해한다면 남의 집 안방에서 침을 뱉는 것과 같은 이슬람 국가에서의 자랑스런 땅 밟기, 이웃, 형제를 무시하고 모욕함으로 스스로 선민의 대열에 오르고, 자신의 신앙과 충성을 보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
이웃을 모욕함으로 인한 증오로 인해 그들의 칼을 받는 것은 순교일 수도 없다. 진정한 순교는 사랑으로 행할 때, 그를 증오하는 인간이 아닌 그들을 조정하는 악한 영의 공격으로 생명을 잃는 것이다.
기독교인으로 형제, 이웃이 우상을 숭배하고 그래서 그들을 구원하여야 한다는 마음이 나쁠 수는 없다. 그래야 한다. 그러나 그 마음으로 인해 겸손과 지혜를 잃고, 교만한 우월감을 갖는다면, 그것은 이미 영적 전쟁에서 패배한 자일뿐이다.
예수님은 그 마음, 그 충성을 보고 기뻐하실까? 좀 더 지혜롭고 현명한, 그럴 수 없다면 그저 겸손한 기독교인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하늘에서 예수님이 영적 전쟁을 지휘하고 수행하실 수 있으실 것이다.
땅 밟기에 대해 저자가 글을 게재하기로 결정한 것은 젊은이들의 동영상을 본 후가 아니라 인터콥이라는 선교 단체의 지도자 되는 분이 그것이 문제될 것이 없다고 하는 기사를 보고 난 후이다. 그리고 그분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기도 하고, 그분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을 마치 전도라는 기독교인의 본질을 망각하는 이들로 생각하기도 하는 것을 보고 난 뒤에 먼저의 글을 게재하였다.
선교를 가고 여행을 갈 때에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밟는 땅, 그 나라, 그 백성들이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선교를 떠나기 전에 우리가 가고자 하는 그 나라를 위하여 얼마나 열심히 기도를 하는가. 그리고 그곳에 도착한 후에는 어김없이 그 기도의 능력을 경험한다. 그 땅을 밟고, 기도할 수도 있다. 소리를 지르고 두 손을 하늘로 향하고 간절히 하나님의 역사를 구할 수도 있다. 그 마음은 이웃 사랑이고, 간절하고 진실한 사랑이다.
그런데 왜 땅 밟기가 문제인가? 이방인, 불신자들을 위한 기도의 본질은 영적인 땅을 밟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눈에 보이는 세상으로 가지고 내려오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를 끌고 내려오는 것. 그것이 교만으로 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영적인 기도를 세상의 땅 밟기로 대체시키기 때문이다. 저자가 전에 게재한 글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신의 영역을 인간이 대신하려 함에는 필연코 교만이 존재하고 그것은 예외 없이 사단의 통로가 되는 것이다.
무엇인가 눈에 보이는 것을 행하는 것, 그것은 하나님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으로 인한 것이다. 그것이 교만인 것이다. 그것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자신의 무지로 인한 또 다른 교만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어떠한 교만이든 눈과 귀를 막아 버린다. 결국 예수님과는 무관한 방향으로 갈 수가 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서로에게, 자기 자신에게, 나아가서는 하나님에게 무엇인가 보이려는 마음, 자신의 행위를 누군가에게 확인받고 싶어하는 것. 그것은 은밀한 사단의 공격일 수 있다. 누군가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 하나님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조차도, 그것이 사단의 통로가 될 수 있다.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고, 그가 하나님 앞에 돌아오기를 진정으로 바랄 때, 누군가가 그 행위를, 그 기도조차 알아주기를, 하나님조차도 그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없다. 하나님의 마음이 자기 마음이 되었기에, 누군가가 그를 알아줄 것을 바랄 이유가 결코 없는 것이다. 그런 마음이 생기지 않은 이들은 더 기다리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그런 마음을 갖기 전에 선교나 전도의 사명에 젖어들면, 전투적이 된다. 하늘의 사명감이 아니라 세상적인 사명감으로 충만하게 된다. 그리고 예수님과는 다른 길을 달려간다.
봉은사 땅 밟기를 한 젊은이들, 나이로 보면 아들뻘 되는 젊은이들이다. 그리고 귀한 주의 자녀이고, 그중에서도 주님이 혼탁한 세상에서 일찍이 택하신 그분의 종들이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열성도, 주님에 대한 사랑도, 그리고 순수함도 가득한 귀한 젊은이들이다. 나는 그들을 인도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는 세대들, 소위 선교회나 교회의 지도자들이 그들에게 온전한 신앙, 예수의 본질을 가르치기를 바란다.
20대의 젊은이들, 지식도 지혜도 나이든 이들과 비교해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더 반짝이는 지혜와 열정이 있는 이들이다. 그러나 삶을 경험함으로 깨닫는 지혜와 그리스도의 깊은 인도는 아직 배워야 할 나이이다. 그들에게 가르치고 전승하는 것이 본질을 망각한 것이 될 때 그 속에 들어 있는 은밀한 교만함도 전수되어질 수 있다.
선생 되기를 두려워해야 한다. 그들이 찍은 동영상도, 그들만의 것으로 ,혹은 그들이 모인 모임 안에서의 보고용으로, 혹은 그저 기념으로 만들었던 것일 것이다. 그것이 밖으로 유포되어 문제가 터지게 된 것일 것이다. 그것을 처음부터 공개하려 했던 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그곳으로 가서 땅을 밟은 것,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저자는 개인적으로 그 필요성을 절감하지는 못하지만, 그곳에 은밀히 가서 은밀히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순수하게 기도하는 젊은이들의 신앙과 믿음도 탓할 수 없다. 문제는 그들을 그곳으로 가게 한 지도자, 그리고 그곳에 거주하는 이웃을 인간으로, 한 형제로 사랑함이 없이 단순히 전도의 대상, 자신의 전투의 한 노획물로 여기는 마음이다. 그런 마음으로 그 땅 밟기를 지지하는 이들, 만약 지도자의 마음이 그런 것이라면, 그는 기독교인이 아니다.
기독교가 이슬람, 타종교와 다른 것은 그리고 기독교가 기독교가 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그 피이다. 그리고 그 피는 예수님의 피이고, 그분의 제자 된 이들의 피다. 이웃의 피와 십자가가 아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잘 알고 그 본질을 전해야 한다. 십자가를 앞에 세우고 전쟁을 치르는 십자군 전쟁용 십자가가 아니다. 무엇을 가르치는가. 율법적, 구약의 하나님은 유대교, 이슬람에도 있다.
기독교는 다른 말로 예수교라고 불려야 하는 종교이다. 예수님만이 구약속의 하나님의 본질을 십자가와 그분의 피로 완성시키신 분이다. 예수님의 본질을 가르치고 전하지 않는 이. 그는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없다. 역사 속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그분의 하나님이심을 빛내신 이들은 모두 자신의 몸으로 십자가를 지고 세상의 칼을 받은 이들이다.
우리가 비록 그런 십자가는 지지 못하더라도 그 의미만은 제대로 전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특히 젊은 세대들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이들은 그들 속에 자신도 모르는 교만, 의를 집어넣지 않기를 바란다. 발목까지 밖에 차 있지 않은 성령의 물속에서 성령을 가르치지 않았으면 한다. 그 가장 깊은 곳에 이르지는 못해도 최소한 그곳을 바라보고 차라리 그곳을 온전히 볼 수 없음을 고백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지도자가 길을 잘못 가면 모두가 망한다. 하나님은 지도자에게 더 큰 책임을 물으시지만 그렇다고 따라가는 이들만 구원하시지는 않는다. 아니, 못하신다. 각자에게 결정권을 주셨기 때문이다. 땅 밟기를 하라. 그러나 눈에 드러나는 땅을 밟으려 하지 말고 영적인 땅을 마음껏 밟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땅 밟은 것을 어느 누구에라도, 자신에게도, 하나님에게라도 자랑도, 보이려 하지도 말라. 세상이 두려워서가 아니다. 그 길만이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길이고, 그 길만이 예수님의 길이고, 그 길만이 그들을 위해 하나님이 역사하실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웃을 존중하는 것, 그것이 사랑의 근본이고 뼈대이다. 그를 종교 다원주의라고 우기는 이들은 어떤 식으로 이웃을 사랑하는지 궁금하다. 예수님의 가신 길을 가르치는 지도자들은 기독교의 본질, 십자가를 가슴에 새기고 예수님의 사랑까지는 아니라도 그 겸손과 온유함만이라도 지녔으면 좋겠다.
고린도 전서 1장 21절의 말씀,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신다 하심의 의미를 너무 무지하게 해석은 하지 말았으면 한다. 하나님의 미련함은 십자가의 미련함이다. 그 안에는 순수함과 희생, 인내, 사랑, 그 모든 것이 들어 있다. 그것이 세상에서 미련하게 보이는 것이다. 그 속에서 누가 이웃에 대한 무례함과 전투적·공격적인 모습을 볼 수 있는가? 하나님의 미련함이 아닌 인간의 미련함으로 전도라는 전투는 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무지 아니면 교만일 수 밖에 없지 않을까? 그것을 순수한 젊은 영혼속에, 다가오는 하나님 기업의 계승자들에게 집어넣는 우를 범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필자의 마음이다.
출처/뉴스앤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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