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들에게 화 있을지니 |
송강호 / 개척자들 부설 코메니우스학교장
생명보다 돈을 더 사랑하는 의사들에게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신 사역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교육이고, 다른 하나는 말씀의 선포였으며, 마지막 하나는 치료였다(마 4:23). 미성숙한 사람을 성숙한 사람으로 가르치는 일, 죄를 짓고 관계가 파괴된 채 자기 자리를 떠난 이들을 다시금 돌이켜 자기 자리로 돌아와 자신의 본래 모습을 회복시키는 일, 그리고 연약하고 병든 자들을 건강한 몸과 영혼을 갖춘 온전한 인간으로 치료하는 일이 예수 사역의 핵심이었다. 이 세 가지 사역은 기독교 교육을 위한 '학교', 예배와 설교를 위한 '교회', 그리고 몸과 정신을 치료하기 위한 '병원'의 형태로 몸체를 형성하게 되었다.
의사는 하나님이 부른 자
우리는 일반적으로 목사는 성직이라고 믿고 있다. 어떤 목사가 설교를 잘한다고 사설 학원 세우듯 사설 교회를 세워 부수입을 올리는 것은 생각하기가 어렵다. 교사에 대해서는 조금 더 관대하다. 교사가 인기 학원 강사가 되어 영리를 추구하는 것에 대해서 인정해 주는 분위기다. 목회 산업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아도 지식을 팔아먹는 교육산업이나 그에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교육자에 대해서는 사회가 비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여전히 진정한 교육자라면 가난한 학생이나 부유한 가정의 학생 모두를 차별 없이 사랑하는 공직자여야 하며, 월급 이외의 다른 부수입을 올리는 일에 한눈을 파는 것이 옳지 않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의사의 경우는 사뭇 다르다. 우리 사회에서 의사가 공직자라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리스도인 의사일지라도 성직자라고 여긴다. 우리 사회 속에서 의사는 당연히 특권층이며 부유층일 수밖에 없다고 여겨진다. 그러니 의사가 되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려워질 거라는 이야기다. (마 19:24) 내가 이런 말을 해도 어떤 의사 한 명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거라고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는 영원한 진리라고 한다면 이 말씀을 우습게 여기는 의사들의 강퍅한 마음이 허망하게 무너져 내릴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분명히 천국에 대한 갈망은 이 세상에서의 부유와 안일에 반비례한다. 내가 독일에서 유학할 때 알게 된 스위스 청년의 초청으로 말로만 듣던 스위스를 처음 가 보았을 때 내 눈에 비친 스위스는 거의 천국에 가까울 정도의 낙원처럼 보였다. 만년설로 쌓여 있는 아름다운 알프스와 맑고 깨끗한 레만 호수, 그 호반에 늘어선 아름다운 가옥들과 그를 둘러싼 잔디밭 한가운데에는 푸른 수영장들이 있었다. 만일 이런 곳에서 죽지 않고 살 수만 있다면 천국이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어 보였다. 돈이 많아 주말이면 푸르고 너른 골프장과 아름다운 별장으로 돌아다니며 여유를 만끽할 수만 있다면 굳이 더 나은 천국을 바랄 것이 무엇이겠는가. 이 땅에서 모두 누린 사람들에게 천국에서 더 이상의 보상은 없다. 그들은 이미 다 받았기 때문이다.
이 땅의 의사들이 700만 원, 1,000만 원의 월급을 받아 투기 이외에 달리 더 이상 개인 용도로 쓸 곳을 찾을 수 없어 헤매는 동안, 가난한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는 의사를 찾아 사막 같은 광야에서 썩어 가는 팔다리를 거머쥔 채 여러 날을 헤매야 하는 또 다른 현실이 존재하고 있다. 더운 날 삼사일을 걸어 마침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가벼운 상처조차도 오는 동안 도져서 귀중한 팔다리를 잘라 내야만 할 때가 잦다.
이러한 현실에서 한숨과 신음과 통곡 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께서 멀쩡한 얼굴을 성형하고, 뱃살의 지방을 흡입하며, 태아를 살해해서 돈을 버는 탐욕스런 의사들에게 분노하시지 않겠는가. 의사 실업자가 늘어난다고 하지만 아프리카에서는 의사가 없는 병원이 많아서 병원을 찾아온 응급 환자들조차도 생명을 잃는 경우가 많다. 그리스도인 의사는 이 세상 땅끝까지 가서 환자를 치료하도록 부름을 받은 자들이다. 의사는 치료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다.
교육과 치료의 방임
예수의 사역 중 말씀 선포 이외에 교육과 치료는 마치 고아처럼 버려졌다. 그래서 오늘날 학교는 국가에, 병원은 의사 개인에게 맡겨졌고 신앙 공동체 안에는 교회만이 남아 있다. 그 결과 교회의 교육적 책임은 주일학교로 제한되었고, 우리의 자녀들은 일주일 내내 국가 이데올로기와 세속 사회의 가치관에 세뇌당하고 있다. 국가는 맹목적인 애국심과 국가 공권력에 대한 두려움을 주입하여 학생들이 자신의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실천하려는 의지를 말살시키고 있다.
아이들은 자신을 둘러싼 채 자기 얼굴을 쏘아보는 많은 사람 앞에서 자기가 불의하다고 생각하는 일에 대해 '아니요'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잃어 간다. 돈과 권력을 얻기 위해 의리도 우정도 다 팽개친 채 끝없이 싸우고 경쟁하게 하는 탈출구도 없는 검투장에 우리 아이들이 갇혀 있는데도 신앙 공동체는 마음이 편하다. 이런 현실 속에서 대부분의 크리스천 교사도 학생을 하나님나라 시민이 되게 하고 그 나라의 정의를 실천하도록 가르치는 데 사명을 느끼기보다는 대한민국이라는 세속 국가의 월급쟁이로 안주하고 있다.
크리스천 의사의 경우는 더 심각하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공부도 잘해야 할 뿐 아니라 억대의 수업료를 들여야 한다. 집안이 가난할 경우는 이웃과 친지들에게 손을 벌려야 할 정도로 재정 부담이 크다. 그렇게 힘들게 의사가 되었으니 남들보다 더 부유하고 윤택하게 사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생각할는지 모르겠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의사라면 별로 대답할 말이 없다.
그러나 크리스천 의사일 경우는 다르다. 간단히 말해서 자신의 뛰어난 두뇌도 성실성도 또 어떤 경로로 전달된 수업료일지라도 이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믿음이 없다면 크리스천이란 이름을 굳이 달고 다닐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런 믿음이 없이 자신의 욕심과 가족의 부당한 요구에 떠밀려 다니는 우유부단한 그리스도인 의사들로 인해 하나님나라가 파멸해 가고 있다. 오늘날 제자도를 진심으로 실천하는 의사들이 필요하다. 때때로 주님이 가르쳐 주신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를 진정으로 드릴 수밖에 없을 정도로 검약하고 단순하게 살아가는 그런 의사들이 많아져야 한다. 그래야 지금의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아무런 의료 혜택을 못 받고 죽어 가는 하나님의 백성을 살려 낼 수가 있다.
하나님은 온 인류의 영혼과 육체를 치유하시기 위해 의사들을 부르신다. 만일 크리스천 의사들이 이 하나님의 부름을 듣는다면 한국 땅에 늘러 붙어 자신이 아니라도 치료받을 수 있는 환자들에게서 돈을 버는 데 시간 대부분을 소모할 것이 아니라, 지구 끝까지 왕진을 가서 치료비 한 푼 낼 수 없는 가난하고 연약한 하나님의 백성을 치료하고 보살피는 의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특별히 전쟁이나 재난, 기아와 절대적인 빈곤 속에서 치료의 손길을 기다리는 환자들에게 나가서 의료 행위를 하기 위해서는 때로 위험을 무릅써야 할 경우도 있다.
실제로 '적십자'나 '국경없는의사회'에서 사역하는 의사들이 분쟁과 갈등 지역에서 의료 행위를 하다가 피살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래서 이런 열악하고 위험한 현장에서 의사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더 철저한 안전 조치뿐 아니라 더 깊은 영성을 스스로 계발하는 일과 자신의 가족을 돌봐 줄 공동체가 필요하다. 이처럼 가난하고 단순한 삶, 영적인 삶, 더 깊은 사귐과 나눔, 그리스도 증거, 남겨진 가족의 돌봄을 위해서는 핵가족적이고 개인적인 형태의 삶보다는 공동체적인 삶이 훨씬 유익하다. 그러나 거기에는 어려운 난관도 함께 있다.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자기를 부인하는 삶과 타인들을 인정하고 사랑하기 위해 자기를 변화시키는 삶을 끊임없이 배워 가야 하기 때문이다.
삼발이 공동체
교육·목회·치료, 이 셋이 분립할 수 없는 예수 공동체의 삼 요소이며, 신앙 공동체는 이 세 개의 다리 위에 세워질 때라야 비로소 온전하게 성장할 수 있다. 여기서 학교를 담당하는 교사들은 교육 사역자로, 교회를 담당하는 목사들은 목회 사역자로, 병원을 담당하는 의사들은 치료 사역자로 구분되며, 이들은 모두 직능과 역할은 다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자들로 지위상 동등하다.
신앙 공동체의 대표는 반드시 목사일 이유는 없다. 교사나 의사 혹은 그 공동체에 속한 또 다른 평범한 직업인일 수도 있다. 대표란 공동체 전원이 원하는 사람을 투표로 결정하면 된다. 이들이 모두 동일한 사역자라 함은 모두가 스스로의 직업을 거룩한 공직으로 여겨 일체의 영리를 꾀함이 없이 오로지 타인을 위한 봉사로 여길 뿐 아니라 모두가 자신을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여겨 십자가를 지고 예수의 고난과 죽음에 동참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다. 이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안 되는 이유는 우리 안에 있는 그릇된 편견 때문이다.
편견 극복, 이런 병원을 세우자
나도 한때는 의사란 원래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이라는 편견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다. 그러나 1994년 르완다 전쟁으로 아프리카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아프리카 그 열악한 오지의 구석구석에서 아무런 물질적 욕심도 없이 오로지 사람을 살리고 치료해야 한다는 열정으로 가득 찬 가난하고 순수한 의사들을 만나면서 평생토록 품어 왔던 딱딱하게 굳어진 의사에 대한 편견이 깨어지게 되었다. 그렇다. 의사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단지 입술로만 예수를 고백하고 주일만 그리스도인의 외피를 입는 그런 껍데기 신앙인이 아닌 진정한 제자다운 그리스도인 의사가 될 수 있고 그런 의사들에 의해 무소유로 살아가는 의사들의 치료 공동체가 세워질 수 있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이 땅의 의사들이 성경으로 돌아가기를 간곡히 호소한다. 의사라도 십자가를 지고 주의 고난과 죽음의 길을 따르는 제자가 되자. 목숨을 바칠 각오가 섰다면 무소유로 사는 것은 하등 어려운 결정이 필요치 않다. 신앙 공동체는 예배당을 세우듯이 이런 의사들이 의료 행위를 할 병원을 세우고 재정적으로 자립할 때까지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만일 의사들이 당연히 받을 급료를 포기한다면 이들이 일 년에 한두 달 혹은 사오 년에 일 년 정도는 이라크·팔레스타인·수단과 같은 분쟁과 갈등 지역에서 희생된 환자들을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야전병원처럼 전쟁이나 재난이 닥치면 준비된 대기조가 24시간 이내에 현장에 급파될 수도 있을 것이다. 병원은 주로 정형외과, 열대 의학과와 같이 활동 현장에서 계속 경험이 깊어지는 분야로 전문화해 나간다면 나름대로 전문 병원이 될 수도 있을 것이고 의사들이 무소유로 살아간다는 사실만으로도 병원을 광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의사가 이렇게 낮아진 삶을 스스로 선택한다면 위계질서나 빈부 격차 등의 문제로 간호사나 사무직원과의 갈등을 벌일 일도 없을 것이다. 이런 의사들이 전장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 가는 무고한 시민들, 아기와 어린이들, 부인과 노약자들을 신속하게 찾아가서 치료해 나가면 이들은 그 처절한 현장에서 피비린내를 맡고 찾아오는 다른 나라의 의사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세상의 막장과도 같은 이런 열악하고 위험한 현장에서 촉각을 다투는 환자들을 살려 내는 일에 함께 협력했던 의사들의 거룩한 우정은 또 다른 나라에서도 이런 병원들을 세우고, 이런 병원 간의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만들 수밖에 없는 생명력을 지니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하나님나라와 그의 정의를 위해 목숨을 건 두세 사람의 의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만나 이런 비장한 결사를 이루어 함께 기도하며 이 새로운 의료 역사의 장을 열어 가기를 기도한다. 훗날 이들이 자신들을 의사로 배출한 의과대학을 순회하며 의학 초년병들 앞에 서서 과연 의사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는 멋지고 당당한 선배들이 될 날을 떨리는 가슴으로 소망한다.
눈을 감은 채 숨을 멈추고 전쟁과 재난 지역에서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이 용기 있는 의사들이 땀을 흘리는 야전병원들의 늘어선 천막들을 바라보자. 꿈은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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