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주의와 종교개혁
이 은 재(감신대 초빙교수)
우리가 이 둘의 관계를 올바로 이해하려 한다면 먼저 다음의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경건주의는 종교개혁의 유산 없이는 생각할 수 없으며 반면에 경건주의는 이 유산을 비판 없이 수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경건주의가 종교개혁의 유산을 소홀히 여기는 것은 자신에 대한 인식과 토대를 약화시키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I. 경건주의
I-1. 경건주의의 자기규정
경건주의가 취급하는 주제들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먼저 다음과 같은 물음들에 관심하여야 할 것이다: 그 자신에게 도래한 종교개혁의 유산으로써 경건주의는 무엇을 시도하였는가? 종교개혁이라 말할 때 분명히 이해하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성서, 은총, 신앙 그리고 그리스도에로의 복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경건주의는 무엇인가? 분명히 그것은 종교개혁하면 떠올리게 되는 특정한 인물들과는 - 루터나 칼빈과 같이 - 거리가 멀다. 또한 고유한 교회를 세우거나 독특한 신앙고백을 형성하며 상이한 상징과 지적인 차이를 드러내지도 않았다. 우리는 단지 경건주의를 [경건운동] - 그것이 종교개혁에 대한 갱신이라 간주함으로써 - 이라 특징한다. 주의와 운동 가운데 후자의 [운동]을 강조하는 까닭은 그것이 경건형태를 넘어서는 포괄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사실 지나간 300여년의 교회사를 수행함에 있어 [-주의] 보다는 [-운동]이라는 보다 넓은 의미가 언제나 새로운 힘으로 역사의 전면에 부상하곤 하였다. 예로써 17세기의 바로크 시대에는 고전적인 경건주의 운동의 시대로, 18-19세기 초에는 각성운동의 이름으로, 19세기 후반에는 다시금 공동체운동으로 그리고 우리시대에는 복음주의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체험되고 있다. 매 갱신의 경우 그것은 보다 넓은 영역에로 교회와 사회의 관계를 세워 온 것이다. 또한 매 국면마다 그들의 고유한 각인을 남김으로써 그 자신의 발전시켜 왔다고 보겠다. 다양한 선교단체와 각종의 신학교, 종교교육 기관이나 협회들이 이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유사한 특성들에도 불구하고 경건주의의 복음적인 운동을 어떻게 규정지을 것인가? 이를 위해서는 한편으로 고전적인 경건주의를 늘 염두에 두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 현재와의 연관성에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만 오랜 기간의 경건주의 흐름을 그의 본래적인 관심사와 잘 결합시킬 수 있다. 즉 그것은 개인의 인격적인 구원의 확신/ 삶으로 드러나는 성화에 대한 요청/ 성서와의 인격적인 만남과 관심/ 복음화에 대한 열망/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한 수고 등이다. 특히 개인의 삶과 교회가 복음을 유지하는 한에 있어 이 모든 것은 종교개혁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게 된다.
I-2. 또 다른 이름 - 경건주의
안락한 물침대와 잔잔한 시냇가의 조류가 같지 않듯이 경건주의에도 다양한 차이와 반대현상이 존재한다. 차라리 그것은 자연적이고 길들여지지 않은 해류와 같아 계곡에서조차 좌-우편으로 나누이는 것이다. 이러한 상이함에도 불구하고 경건주의는 교회를 위해 봉사하고 투쟁하는 - 교회적인 각인을 인식할 수 있는 - 그러한 운동이다. 매 시대마다 교회에는 창녀로 간주되는 바벨과 부패의 경향을 발견할 수 있었다. 깊은 저수지와 같은 몰락의 때에도 교회와 그의 구원을 추구하였던 이탈자들이 있어 고유하고 새로운 삶의 질서를 제공하곤 하였다. 그것은 교회의 역사가 건조하고 단조로운 단색의 풍경화가 아니었음을 나타내 준다.
II. 종교개혁에 대한 경건주의의 입장
II-1. 비평에서 거부에 이르는 태도
개혁자 마르틴 루터에 전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던 열광주의적인 경건주의자들이 있었다. 이들의 선두에 딮펠(Johann Conrad Dippel)과 아르놀트(Gottfried Arnold)가 있다. 그들의 입장은 일찍이 신비주의적 영성주의자였던 호부르크(Christian Hoburg)의 문장을 반영하고 있다고 본다: [칭의론은 허구요, 신생(거듭남)은 실재이다.] 그에게는 약속되어진 것 보다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우위에 있다. 교회와 성례전은 외형적인 것이다. 경건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슈페너(Philipp Jakob Spener)의 주변에도 그러한 성향의 인물이 있었는데 그는 다름 아닌 슛츠(Johann Jakob Schuetz)이다. 이 같은 이야기는 과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늘에도 그러하다.
경건주의의 주된 흐름가운데에는 교회를 새롭게 조직하기 시작하는 1525년 이후의 루터를 그 이전의 루터와 구별하려는 - 심지어는 루터 자신이 이전과 단절되었다거나 배반하였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 견해를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종교개혁(re-formare)의 고유한 관심사를 슐레지아의 귀족인 슈벵크펠트(Caspar von Schwenckfeld)와 오시히(Ossig)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바, 그들에게는 도덕적인 갱신이 칭의보다 훨씬 높은 관심사였다. 루터에 의하면 말씀과 성례가 특징인 교회의 자리에 이제는 그리스도의 순전한 신부인 신자들의 무리가 모여 교회를 이루게 되었다는 것이다. 반면에 덜 알려진 사실이지만 슈벵크펠트에게 예수의 인간적인 본성은 피조성에 참여할 수 없는 것이며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의 피조성이란 부분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죄성인 것이다. [피조물]에 대항하는 그의 투쟁은 중재된 하나님의 태도를 거절하는 것과 일치한다. 때문에 그는 성찬과 세례 때에 또한 고해성사된 혼인 시에 완전한 [침묵상태]를 권고한다. 특히 설교에 관하여는 적어도 강력한 제지를 하였다. 누군가가 슈벵크펠트에게 경건주의의 본래적인 선구자요, 공동체 운동의 아버지로 이해하기를 원하는 자는 진지하게 다음의 사실을 물어야만 한다. 루터의 강조인 [의인인 동시에 죄인-simul iustus et peccator]를 이 같은 방식으로 이행할 수 있을까? 눈에 보이는 외적인 형태나 조직을 구성함이 없이 신자들의 순수한 신앙공동체가 실재할 수 있을까?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접근과 본래의 기독교적인 것을 위한 거룩한 영의 직접적인 전달이 유지된다면 어디로 인도할 것인가? 결혼과 성을 포함하여 피조성의 극복이 실재로 성화의 목적일 수 있는가? 분명코 이 모든 생각이 우리로 하여금 항상 사려 깊게 하나 그것이 우리 자신의 것으로 고유하게 하길 진심으로 원하는가?
II-2. 루터를 넘어서
경건주의의 또 다른 경향의 하나는 비록 루터가 훌륭한 개혁자요 교회사의 위대한 공헌자라 하더라도 그를 넘어서려는 기운이 있다. 그러한 입장에는 테어스테겐(Gerhard Tersteegen)이 속한다. 테어스테겐은 종교개혁의 기원이라 할 루터에게 거리를 두려는 세력에게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물론 조건부이기는 하지만, 또한 슈바벤의 경건주의자들도 여기에서 언급되어야 하겠다. 특히 벵엘(Johann Albrecht Bengel)에게서 다음과 같은 숙고가 유래되었다. [분명히 루터와 같이 고요 가운데 사는 순수한 영혼들이 있다. 그러나 모두가 그렇게 하길 원했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어느 누구도 시끄러운 소리를 내기를 원치 않았더라면 무엇이 신비주의인지 신비주의자들은 알지 못하였을 것이며, 무엇이 기독교적인지 기독교인들이 알지 못하여 아무도 거룩한 문서가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지 않겠는가? 그들은 장군과 같이 조국을 위해 싸움터에 있길 원하나 신부에 대하여는 방에 머물러 있게 하고 오히려 왕을 더 소중히 여긴다.]
분명히 루터에게 있어 성서의 중심은 죄인들을 그리스도안에서 신앙으로부터의 은총을 통하여 의롭게 하는 말씀인 것이다. 이점에서 루터는 성서 안에서 깊이와 높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명백히 루터에게 전체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그 모두가 동일한 것은 아니다. 때문에 루터는 선포 가운데 말씀을 선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만일 [순수한 성서]와 [단지 성서]에 [성서 속의 모든 것]을 첨부하게 된다면 성서에 존재하는 상이점에 대한 강요된 수평화 내지 평등화에 쉽게 도달하게 된다. 본래적으로 그 결과는 선포 가운데 지속적인 가르침(lectio continua)으로 이행하게 된다. 벵엘에게 있어 칭의론(Rechtfertigungslehre)은 [위대한 관심사]임에 틀림없으나, 그 곁에 또 하나의 정점이 있으니 그것은 구속사, 즉 하나님 왕국의 역사로써 신적인 가계家計의 계획인 것이다. 왜냐하면 벵엘에게는 성서의 중심이 이미 두 개의 초점을 중심으로 하는 타원처럼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로써 종말론, 즉 미래의 일에 대한 관심사가 강력하게 전면에 부상한다. 그러나 종말론은 이미 성서에서 발생하였고 완성되었던 것과 같이 역사 내에서 동일한 확실성과 명료함으로 진술되지는 않는다. 때문에 사변적인 신학이 애써야만 하게 된 것이다. 언제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는가?(벵엘에게 있어서는 대략 1836년.) 천년왕국이란 어떤 것인가? 그리스도 없이 죽어간 자들에게는 무엇이 발생하는가? 누가 적그리스도이며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등장하는가? 그것은 삶과 연관되는가? 벵엘에 따르면 그렇다. 즉 신자의 삶은 하나님나라를 마중하여 나가는 것이거나 적그리스도를 피하기 위하여 이주하는 것이다. 성서주해에서 주된 관심사는 로마서를 벗어나 요한계시록으로 이동하며 시편과 이사야에서 다니엘과 사가랴에로 향한다. 물론 거기에도 위험이 뒤따른다. 이 세상에서는 단지 부여된 피조물의 몰락을 보고 맨 끝에 세워질 하나님의 견지를 위해 도래하는 것들에로 몰두하는 것이다.
II-3. 그때그때마다 루터를 획득하다.
경건주의가 종교개혁에 대해 깨어진 관계를 가졌다는 견해는 잘못된 것이다. 보다 넓은 관점에서 볼 때 경건주의 내부에서는 매 시대마다 종교개혁에 대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깊은 이해관계를 가져왔다고 하겠다. 그 첫마디에 슈페너와 프랑케(August Hermann Francke)가 위치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친젠도르프(Nikolaus Ludwig von Zinzendorf)를 언급해야 한다. 슈페너는 자기 시대의 교회로 하여금 루터의 관심사를 생생하게 하였다. 물론 루터 사후 150여년의 상황이 이미 은총으로부터의 칭의와 그 자명성을 획득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 다른 많은 인물들을 확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경건주의를 이끌어갔던 인물들의 삶을 보다 정확히 눈여겨본다면 그들과 경건주의라는 총체성이 루터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경건주의를 위해 준비하였던 인물들, 세력들 그리고 운동들 가운데 지속적인 영향력이 (루터의) 고유한 가르침을 통해 선두에 서 있다]고 하겠다. 이 같은 연결은 슈페너가 항시 풍부한 인식으로 루터를 인용하고 가르침의 마지막에서조차도 이탈을 꾀하지 않았다는 데서 잘 나타난다.
이제 루터에 대한 인식이 개별자들에게 그리고 경건주의에 어떻게 실재화 하였으며 어느 정도로 루터의 가르침에로 나아가는지를 살펴보자.
III. 경건주의에 있어 종교개혁 관심사의 수용.
III-1. 성서중심
무엇보다 종교개혁은 성서운동인 것이다. 성서연구를 통하여 루터는 무엇이 [하나님의 의義]인지를 인식하였다. 성서를 인증으로 내세움으로써 루터는 황제와 제국의회 앞에서 파문선언을 거부할 수 있었다. 그의 일생의 작업 가운데 성서번역과 성서주해는 그 본래의 부분에 해당하는 것이다.
동일한 방식으로 경건주의는 그 자신의 시대뿐만 아니라, 매 시대에 자신이 성서운동이었음을 말한다. 경건주의의 개혁프로그램이라 할 [경건한 소원 Pia Desideria]에서 교회를 갱신하려는 첫 번째 제안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교회)에 풍성히 거하게 하려]하였던 점에 잘 드러나 있다. 곧이어 그 뒤를 따라 발생할 수 있는 일련의 가능한 현상들이 나타났다. 즉 신앙인 각자는 성서 자체를 손에 쥐어야만 한다. 공동체의 모임은 성서를 알도록 정돈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술과 이의 가운데에서도 서로 연구되어야 한다. 할레(Halle)의 경건주의는 성서출판을 위해 기여하였다. 프랑케는 라이프찌히에서 학생들과 함께 성서를 사랑하는 이들의 모임(collegia philobiblica)을 결성하여 서로 성서를 읽고 고전어를 사용하여 읽은 부분의 의미를 충실히 물었다. 또한 그는 대학에서 사강사로서 주석강의를 맡았다. 정통주의 시기에 여러 해 동안 주석작업(Exegeticum)은 개최되지 않았다. 주석강의가 폐강된 데에는 학생들이 수강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프랑케와 그의 동료들의 주석작업을 통해 신학에 있어 성서가 논쟁적인 교의학의 한 중요한 분과가 되었다. 에어푸르트(Erfurt) 시절에 프랑케는 그의 공동체에서 900권 이상의 성서를 반포하였다. 당시 성서는 극히 비쌌으므로 값싼 구입처를 마련하는 것이 필연적이었다. 이는 남작 칸슈타인(Baron von Canstein)의 놀라운 제안,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가난한 이들의 경건을 위하여 값싸게 그들의 손에 쥐어줄 수 있을까?]에 힘입어 처음으로 칸슈타인 성서공회를 세웠다. 종교개혁부터 1700년까지 대략 150만 부의 성서가 반포되었으나, 새 공회에서는 혼자서 첫 해에 매 5000권의 3판을 출판하였으며 이전에 있던 출판물의 대략 25%를 차지하였다. 1712년부터 1719년까지 10만 권의 신약성서와 4만 권의 신-구약 합본을 인쇄하였다. 1712년부터 1800년까지 총 2,770,282권의 성서가 매매되었다. 이 당시 독일어권의 전체 성서배포는 4백 만권에 이르며 그 다음 100년 동안 3천 만권에 달했다.
성서반포 외에 경건주의는 성서이해를 위해서도 노력을 기울였다. 대학의 세미나에서 고전어를 숙지시켰으며 매 신학생들이 적어도 일년에 한번 성서를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철저히 읽을 것을 고대하였다. 또한 일반 평민들이 성서를 더 잘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 성서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실이 지나간 300여 년간의 성서와 그에 대한 연구가 폭넓은 방식으로 접근 가능케 한 근거가 되었다. 그 가운데에는 칼렌더식의 성서와 각 연령과 학습현황을 고려한 성서읽기표 및 찬송이 포함된 간략한 성구집(오늘날 Q.T서적의 일종)을 들 수 있다. 이 모든 것에서 경건주의는 종교개혁의 從者종자임을 본다. 성서는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때문에 매 시대마다 성서 속에 있는 차이를 인식하려는 시도는 거절되었다. 로마서와 요한복음 외에 성서는 아가서와 레위기 그리고 에스더(하나님의 이름이 한 번도 언급되지 않는)서도 가지고 있다. 루터는 모든 하나님의 말씀, 그러나 그 모든 말씀이 다 나를 위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만일 누군가가 성서 도처에서 그의 경건을 추구하고 성서가 세상적으로 말하는 곳에서조차 영적인 것을 발견하려는 자는 성서본문이 말하려는 것을 더 이상 말하지 못하도록 하는 강요된 주해방법을 벗어나야만 한다. 수도원 지붕의 울타리는 공동체에 像상을 제공해주어, 예로써 라합의 붉은 줄(여호수아 2,21)은 그리스도의 보혈을 나타내고, 아가서의 호색적이며 도발적인 언어는 기독교사랑의 언어가 되었다. 성서의 문자적인 의미, 즉 sensus literalis에서 벗어나 비유를 사용하고 그때그때 마다 고유한 사고와 설명들을 성서에 등기시켰다. 이 점에서 루터의 성서해석을 위한 규칙에 주의하여야 하는데, 그에 따르면 문자의 의미야말로 본래의 의미로 성령이 원하는 바이다.
슈페너와 프랑케는 성서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 그에 상응하는 고려, 즉 문법, 개별단어들 그리고 연관성이 필요함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언어는 성령의 검이 꽂는 칼집이라는 루터의 격언을 기억하면서 옛 언어들을 공부해야만 한다. 확실히 성령으로 가득 찬 성서주해는 공동체의 형제들을 통해 드러난다. 왜냐하면 성서주해는 신앙의 경험과 성서에 대한 폭 넓은 지식으로부터 성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도구의 경시에로 이끌어서는 안 된다. 성서가 우리에게 타당한 것은 우리가 성서와의 교제에 상응하는 노력을 기울이려 준비하는 데에 잘 나타난다.
성서가 어느 정도로 경건주의에 타당했는가는 무엇보다도 영감설에 관한 진술에 있다. 이러한 진술의 의미는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확증하는 때에만 가능할 수 있다. 비록 성서 자체가 그 점에 관해 말한다 하더라도 신적인 기원에 대한 강조는 성서의 역사적 과정이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루터는 그랬을지 모르나, 이제 더 이상 성서에서 모순을 체험할 수는 없게 되었다. 모순이란 이제 그들이 바른 인식에 도달하지 못하였든지 또는 강요된 방식이다. 성서의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 자신의 고유한 두려움의 표현이다. 성서는 경건주의 역사에서 그의 능력을 힘껏 발휘하였다.
III-2. 칭의에 대한 관심
루터는 죄인들의 놀라운 양심으로 稱義칭의에 도달하였다. 그는 성서에 관하여 하나님의 義의는 그의 심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 가운데 있음을 인식하여,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그가 행한 것을 통하여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것을 통하여 의롭게 된다는 것이다. 이미 정통주의라는 다음시대에 교회의 문제는 그리스도께서 인간들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다는 작은 것에 매여 있었다는 것이다. 다음의 두 물음이 있다: 어떻게 실제로 칭의를 체험할 것인가? 칭의론 옆에 도덕적인 의미의 인식을 깨어 유지할 수 있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정통주의는 이점에 있어 세례를 지시하였다. 그 곁에 고해성사를, 특히 개인고해성사를 나타내었는데, 그것은 목회자 앞에 행하는 것이요 그때그때마다 새롭게 용서가 선포되었다. 슈페너에게 있어서 전체 기독교의 삶은 칭의론에서 규정된다. 칭의론을 바르게 경험하는 것은 개인적인 제자됨에로 인도하고 분명한 인식을 전제하는 신앙 안에서 항상 다시금 새롭게 검증 받아야만 하며 갱신된 삶의 형태를 결과로 갖는다. 갱신은 칭의로부터 구별될 수 없다. 때문에 슈페너는 여기에서 신생(거듭남)의 표현을 선호하였다. 내적인 출생은 - 필연적으로 날짜를 따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 하나의 결과, 즉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난 죄인을 돌아서게 하고 새 사람을 만드는 것이다. 이 새 사람은 단번에 중심이 된다. 그것은 슈페너가 베를린에서 행했던 66편의 신생에 관한 설교 가운데 잘 나타나 있다. 이 중에서 한편은 옛 사람에 관하여, 8편은 그 과정을 그리고 57편은 새 사람에 대해 할애하고 있다. 신생의 확신은 바로 새로운 삶에서 매우 쉽게 추구되었다. 따라서 사람들이 그리스도보다 자신의 내적성찰에 보다 더 주의를 갖게 되었다.
슈페너의 의도는 무엇인가? 그는 확고부동하게 루터의 칭의론을 대표하고 있다. 신학사의 법칙(?) 가운데 속하는 것으로 어떠한 선생도 그의 생각과 말의 영향력을 손아귀에 쥐지는 못하였다. 종종 그들은 자신들이 의도하고 바랐던 바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할레의 경건주의 역시 칭의의 진정성을 경험할 수 있는 참회의 투쟁의 깊이에서 이를 확증하였다. 이러한 방식으로 경건주의에서는 신생과 참회의 역사가 기술되었다. 신생은 한 인간의 삶을 그리스도에로 이끄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그들의 확신은 여기에서 이미 볼 수 있는 것으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무엇을 행하셨는가? 에서 발견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경건주의자의 종교개혁적인 유산을 기억해야만 한다. 그에 맞게 회심(방향전환으로써)은 항상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로 돌아감이요 그 다음에 말씀, 기도, 신자들의 공동체에로 인도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에게 거역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돌아서야만 한다.(비교: 마가1,14f/ 살전1,9f) 이 같은 이해로써 [신실한] 백성은 회심에로 불릴 수 있다. 다만 유혹받은 양심의 위로는 [새 사람]에 관해 무엇을 확인할 수 있는가에 놓여있지 않으며, 여전히 어떻게 회심을 경험하게 되는가에 있을 뿐이다. 때문에 진정한 위로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어야만 한다. 이미 그리스도는 우리와 세례 가운데 연합되었고 항상 다시금 그의 살과 피가 우리에게 분여되는 곳에서 가르쳐진다: [이것은 너희를 위해 깨어진 그리스도의 몸이요, 너희를 위해 부어진 그리스도의 피이다.] 그렇게 우리는 종교개혁에 근거한 회심과 신생의 의미를 칭의론의 빛에서 획득하여 다시금 성례전에로 나아가는 통로를 가지게 되었다.
III-3. 성화의 이해
바울에게서와 마찬가지로 루터에게서도 신앙과 사랑, 칭의와 성화가 분리할 수 없이 함께 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의 저서 [기독교인의 자유에 관하여(1521)]에서 기독교인은 두 개의 [자신 밖에서] 존재하고 있다고 시작한다. 즉 신앙에서 그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사랑에서 그는 이웃과 함께 산다. 신앙이 진정한 곳에서 그는 결코 다른 요구들을 -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 옳고 이웃에게 무엇이 유익한지 하는 - 필요치 않는다. 신앙이란 단지 그 자신의 구원만을 추구하거나 하는 일 없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 가운데 인간을 입으신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써 항상 활동하신다. [선행에 관한 설교(1521)]에서 루터는 십계명에 근거하여 신앙과 사랑의 행위가 기독교인들에게 어떻게 보이는가 하는 것을 개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교황청과의 신학적인 대질이 종결된 이후로, 즉 대략 1521년 이후부터 루터는 종국에는 게으르고 나태한 복음주의 기독교가 발생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이제부터 그의 투쟁은 단지 카톨릭의 공로에 의한 거룩함 뿐만이 아니라, 개신교적인 나태함/ 실천적인 행위 없음/ 사랑과 신앙의 열매에 대한 궁핍함이 되었다. 그는 탄식하기를 [하나님은 열매가 잎사귀를 따라 나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단지 무성한 잎사귀에만 머무는 것, 즉 신앙에 관하여는 많은 말을 하되 행함이 전혀 없는 것이다. 또는 [공로나 행위만을 설교하여 신앙은 가라앉히는 것, 그리고 신앙을 선포하나 아무도 무엇인가를 행하지 않는 것이다.]
그 다음시대에 개신교는 삶의 갱신에 관한 말씀을 복음을 통해 올바르게 선포하는 일에 성공하지 못하였다. 분명히 믿음이 강하고 거룩한 인격의 소유자들은 있었다. 그러나 정통주의 시대의 종국에 우리는 개신교의 도덕적인 타락을 만난다. [술취함, 격투, 난폭, 사기 및 매춘]은 신학자들과 학생들의 모습에서도 나타난다. 30년 전쟁과 바로크 시대의 인간상이 이 점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가장 가슴 아픈 일은 신학적인 결손이었다. 왜냐하면 루터에게서 성화가 여전히 칭의 가운데 저장되어 있었으므로 이제 성화는 완전히 무효화되었던 것이다.
슈페너가 [교회의 갱신]을 위한 세 번째 개혁안에서 [기독교는 앎에 있지 않고 행함에 있다]고 한 것은 그리 놀랄 일이 못 된다. 그때 당시로부터 경건주의는 항상 성화운동이었다. 총체적으로 볼 때 경건주의는 루터의 가르침과 바램의 선상에 있다. 행함을 향한 의지 그것은 많은 사람에게 안녕과 구원을 위해 봉사하고 하나님나라의 확장을 이끄는 데에서 발생한다. 또한 그것은 봉사(Diakonia), 내/외의 선교를 충만하게 하였다. 이러한 연장선이 오늘의 우리에게까지 이른다. 공동체운동을 통해 드러난 것은 [주는 기쁨]이요 동시에 [섬기는 기쁨]으로 여기에는 희생과 시간 및 정열을 드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전체 삶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 도구와 힘으로 사용하기 위해 한정지을 때만이 가능한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을 바로 볼 때 우리는 강조점의 변화를 인식하게 된다.
종교개혁은 [새 사람]도 여전히 죄에 붙잡아 매어 두고 있는 원죄의 상태를 끊임없이 드러내주고 있는데 이는 반항, 불순종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사랑에 사로잡힘이다. 이 같은 태도에서 모든 행위가 나오듯 역시 거듭난 자의 행위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거듭난 자의 [착한] 행위도 하나님 앞에서 선한 것이 아니다. 단지 그들은 하나님 앞에 호감이 가는 것으로 왜냐하면 선한 행위조차도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한 용서가운데에 감추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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