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 운동이란
개혁주의 적인 신앙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신앙고백서는 1643년에서 1647년에 걸쳐 영국의 웨스드민스터 사원에서 작성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이다. 물론 하이델베르그에서 올레비아누스(Olevianus)와 우르시누스(Ursinus)에 의하여 작성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서나 드 브레(de Bres)에 의하여 작성된 벨직 신앙고백서, 그리고 도르트에서 작성된 도르트 신조를 개혁주의적인 신앙을 표현하는 문서들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그 가운데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개혁주의 신앙고백을 가장 잘 표현한 문서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영국과 스코틀랜드, 그리고 미국의 장로교도들 뿐만아니라 개혁주의 신학을 표방하는 세계의 모든 성도들이 그들의 신앙의 기준을 이에 두고 있다는 점이 바로 이를 증명한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 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 문답서가 바로 영국의 청교도들에 의하여 작성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신앙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청교도운동에 대한 이해가 요청된다.
그러면 청교도운동(Puritanism)이란 무엇인가 살펴보자. 청교도운동이란 영국에서 일어난 교회의 개혁운동이다. 청교도운동이 일어난 시기에 대하여는 학자들마다 다르다. 그라나 일반적인 견해는 청교도운동이 메리 여왕(1553-1559)의 피비린내 나는 박해를 피하여 유럽의 대륙으로 피신하여 있던 영국의 개혁자들이 엘리자베스(1559-1603)가 종교적인 관용정책을 펴면서 영국에 돌아와 일으킨 운동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청교도운동이 일어난 시기를 일반적으로 엘리자베스의 통치시기로 잡고 있다.
그러면 유럽대륙에 피신하였던 개혁자들이 영국에 돌아와 일으킨 개혁운동이 왜 개혁주의운동인가 어떤이는 회의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독일에는 루터파들이 있고, 화란에는 재침례파들이 극성을 부렸기 때문이다. 청교도운동이 개혁주의 신학에 근거한 운동이라는 것은 영국에 돌아온 개혁자들 가운데 중심적인 인물들이 바로 칼빈의 제네바나 하인리히 뷸링저의 취리히에서 개혁주의 신학교육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개혁자들은 영국에 돌아오자 요한 칼빈(1509-1564)에 의하여 체계화된 신앙과 신학을 그들의 토양에 접목시키려 하였다. 곧 그들은 칼빈의 제네바를 모델로 삼아 영국의 교회와 사회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칼빈주의적인 예배와 교리, 그리고 경건을 강조하면서 로마 천주교회에 의하여 영국교회에 뿌려진 무지와 미신적인 잔재를 제거하고 성경이 다스리는 가정과 교회, 그리고 국가를 건설함으로 영국을 개혁하고자 했다.
청교도 운동이란 개혁운동 - 창조질서의 회복
그러면 영국의 청교도들은 영국의 교회와 국가를 어떻게 개혁코자 하였는가 살펴보자. 청교도들은 개혁운동을 [창조질서의 회복]으로 이해하였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가정과 교회 그리고 정부라는 창조질서(creation ordinance)를 세우셨다. 즉 하나님은 이 사회를 유지하는 최초의 단위로 먼저 가정을 세우시고, 인간이 범죄하면서 죄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교회를 세우시고, 죄를 억제하는 수단으로 정부를 세우셨다. 청교도들은 이와 같은 창조의 질서들을 하나님이 원래 세우신 목적을 따라 그 기능을 회복함으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가 올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곧 가정과 교회 그리고 정부에 하나님의 말씀이 다스리므로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져간다는 것이다. 따라서 청교도들은 개혁운동이란 가정의 개혁에서 출발하여 교회를 하나님의 말씀이 다스리는 곳으로 만들고, 사회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말씀이 지배하도록 해야한다고 역설하였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임하도록(마 6:10)하기 위해서는 사탄에 의하여 왜곡된 질서를 바로 잡는 일이 요구된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는 사탄의 지배가 정지되는 곳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탄의 세력이 파멸되고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창조질서의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면 무엇을 개혁함으로 효과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할 수가 있는가? 어떤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하려면 먼저 사회의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다른이는 먼저 개인 개인이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면 하나님이 다스리는 사회가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청교도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사회의 개혁이나 개개인의 변화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데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왜냐하면 사회 구조적인 개혁은 혁명을 동반하여야 하고, 개개인의 구원의 강조는 극단적인 개인주의 또는 이기주의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진정한 개혁은 위의 두 견해를 동시에 포용하는데서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면 어떻게 개인의 구원과 사회의 구원이라는 상호 배타적인 견해를 수용할 수 있는가? 청교도들 에 의하면 개인 구원이나 사회 구원은 어떤 것에 시간적인 우선권을 주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인 순서를 강조하는데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즉 어떤 기관의 개혁을 먼저 강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한다면 청교도들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가정이 하나님의 말씀에 지배를 받고, 그러한 가정들이 모여 교회를 이룰 때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지배를 받는 교회가 될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교회들이 모인 사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다스리는 국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청교도들은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먼저 가정이 개혁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그들의 가정을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이 다스리는 가정을 만들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가정의 개혁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다스림을 받는 가정을 만들기 위해서는 가정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우선 되어야 한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최초의 창조질서이다. 가정제도는 교회가 존재하기 전에 있었고, 국가제도가 생기기전에 있었다. 그러므로 가정의 개혁은 그 어떤 창조의 질서의 개혁보다 우선한다. 청교도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이 다스리는 가정을 만들기 위하여 가정의 시초가 되는 부부관계의 정립이 우선적으로 요청된다고 보았다. 그러면 청교도들의 의중에 있던 가정이란 무엇인지 대표적인 청교도요 케임브리지 대학의 교수였던 윌리엄 퍼킨즈(William Perkins)를 중심으로 몇 가지살펴보자.
가정의 기원
윌리엄 퍼킨즈는 [기독교인의 가정](Christian Oeconomy)이라는 책에서 가정은 죄와 상관없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가정이 죄와 상관없이 시작되었다는 말은 결혼제도는 어떠한 제도보다도 신성하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청교도들은 모든 사람은 결혼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로마 천주교회는 경건을 핑계로 성직자의 결혼을 금하고 있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부부생활은 성직자들이 추구해야 할 금욕을 깨는 것이며, 금욕을 깨는 것은 바로 죄라고 한다. 이와 같은 성직자의 독신사상은 성경의 교훈을 오해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성경은 가정의 기원이 인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왔다고 선언한다(창 2:18). 곧 아담이 여자를 그리워하여 가정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담을 위하여 가정을 세운 것이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신 후 그의 갈빗대로부터 하와를 만드신 후 두 사람의 결혼을 주례하셨다. 주례사로 하나님은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1:28)라고 말씀하셨고, {생육하며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고 축복하셨다. 그러므로 청교도들은 성직자 의 독신을 강조함은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는] [양심이 화인 맞은 자들]의 외식(딤전 4:1-2)일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에 순응하기 위하여 가정을 이루어야 한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임박한 환란을 인하여](고전 7:26) 홀로 지낼 수는 있으나 독신주의는 성경적 교훈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정생활의 원리
청교도들은 에덴동산에서의 첫번째 가정은 모든 인간의 모범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에덴에서의 가정은 아가페적인 사랑에 기초하였다. 왜냐하면 아담이 하와를 보고,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창 2:23).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이라는 말은 최상급의 사랑고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최초의 가정은 지고한 사랑고백 위에 세워졌다고 볼수 있다. 이와같은 성경 교리에 근거하여 총교도들은 가정의 기초는 바로 사랑이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와같은 사랑을 유지하는 방편으로 하나님은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는 가정생활의 원리를 주셨다(창2:24). 이 말씀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남자가 부모를 떠나는 것이요, 둘째는 아내와 연합하는 것이요, 세째는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부모를 떠난다]는 것은 남자가 부모로부터 공간적으로 떠나 분가 하여 살라는 말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독립할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연합하라]는 말은 의견의 일치를 보라는 말이다. 20년 또는 30년간 각기 다른 환경에서 자라온 사람들이 어떻게 의견의 일치를 볼 수 있나? 그것은 반푼이가 됨으로 가능하다. 자신의 의견을 50%만을 내세우고 상대방의 의견을 받아들이는데서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리고 [한 몸을 이루라]는 말은 육체적으로 하나가 될 것을 시사한다.
결혼의 목적
이와같이 청교도들은 가정의 기원, 가정생활의 원리를 제시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다스리는 행복한 가정은 바로 가정을 세우신 목적을 아는데서 시작된다고 보았다. 하나님이 가정을 세우신 1차적인 목적은 종족의 보존에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류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명령하고 있기 때문이다(창 1:28). 그러면 자녀를 두지 못하는 결혼은 잘못된 결혼인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자녀들은 결혼으로 반드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시 127:3). 그러므로 결혼의 궁극적인 목적을 단지 자녀의 생산에 두는 로마 천주교도들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성경에서 제시하는 결혼의 다른 목적은 음란을 방지하는데 있다. 성경은 인간들에게 음란을 방지하기 위하여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고 하였다(고전 7:1-2). 결혼의 다른 목적은 거룩한 자녀를 두기 위함에 있다(말 2:15). 그러나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결혼제도를 세우신 궁극적인 목적은 서로 [돕는 배필]이 되는데 있다(창 2:18). 하와를 지으신 목적은 [돕는 배필]이 되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퍼킨즈는 남편과 아내는 서로 도와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소명을 이루어 나아가야 한다고 하였다.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이루어 가는 그 때에 하나님의 나라, 곧 말씀과 성령이 다스리는 가정이 이루어지며 가정의 개혁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청교도의 자녀교육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이 넘치는 행복한 가정은 부부의 관계만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부모와 자녀가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청교도들은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녀를 말씀에 근거하여 양육할 것을 주장하였다. 자녀를 양육하는데 있어서의 부모의 역할은 자녀의 양육에 필요한 물질을 공급해 주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청교도들은 물질적인 것 이상으로 영적인 양식을 공급하는 것이야말로 부모의 의무라고 주장하였다.
교육의 궁극적 목표
청교도들은 인간을 죄악 덩어리라고 믿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죄악 가운데 태어나며, 죄악 가운데 생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목사 또는 장로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나지 않고는 천국의 보화를 상속할 수 없다. 이와같이 어떤 아이가 목사의 자녀 또는 믿는 집안에서 태어나 은혜 계약 아래 있다고 하더라도 영적인 교육을 받지 않고는 지옥의 고통을 벗어날 수 없다. 자녀들 을 지옥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 청교도들은 현세적인 교육보다는 영적인 교육을 우선시 하였다.
청교도들에게 교육의 목적은 하나님과 성경을 아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교육의 과제를 이 세상에서 출세하는 것보다는 성경을 가르치는 일을 우선적인 과제로 생각하였다. 이와같은 맥락에서 뉴잉글랜드 보스톤의 목회자 존 놀튼(John Norton)은 말하기를 {부모가 자녀들의 영적인 성장과 축복을 누리는데 관심을 가지는 것보다도 세상적인 성공만을 바라는 것은 신발에만 관심을 갖고 발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것과 같다}고 지적하였다. 사실상 우리가 우리의 자녀를 세상적인 일에 출세하는 것을 교육할 때 그 부분에서는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교육의 전부는 아니다. 이점에서 하바드대 학이 좌경화할 때에 예일대학교(Yale College)를 세운바 있는 코튼 매더(Cotton Mather)의 지적은 옳다고 할 수 있다. 매더는 지적하기를 {만일 당신 자녀에 대한 당신의 관심이 단지 현세적인 부귀와 영화라면 당신은 이 세상만을 위하여 사는 자녀를 만들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자녀를 이 세상만을 위하여 살아가게 한다면 당신과 당신 자녀의 몫은 이 세상 밖에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청교도들이 이와같이 영적인 교육을 강조한 것은 인간은 누구나 성경과 구원에 대해 무지하게 태어나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성경적인 교육을 받지 않고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가 행하신 일이 무엇인지, 성령께서는 무엇을 행하시는지를 전혀 알지 못하는 가운데 살아간다. 따라서 그들은 영적인 무지 가운데 살 수 밖에 없으며 천 국과 지옥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 짐승과 같이 본능을 따라 살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영적인 교육없이는 비록 목사의 자녀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죄성을 따라 살아가는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세상지식과 하나님의 나라
그러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하나? 영적인 변화를 받아야한다. 곧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체험을 통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다. 거듭남의 체험은 어떻게 가능한가? 거듭남의 체험은 인간의 수행이나 세상적인 많은 지식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접함으로 가능하다. 왜냐하면 거듭남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이루어지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은 들음에서 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코튼 매더는 말하기를 {세상적인 지식이 없어도 하늘나라에 갈 수 있으나 기독교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청교도들은 그들의 자녀를 먼저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고자 하였다. 뉴잉글랜드의 대표적인 청교도 설교자였던 존 코튼(John Cotton)은 맹목적으로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라}하지 않고,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글을 가르치라}고 하였다. 다른 말로 한다면 자녀를 교육하는 목적은 성경을 읽게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또한 벤쟈민 워드워스(Benjamin Wordwrth)는 {만일 귀하의 자녀가 글을 읽을 수 없다면 글을 가르치시요. 그러나 글을 읽을 수 있다면 성경을 읽지 않고 하루가 지나가지 않게 하시요}라고 하였다. 이와같이 청교도들은 자녀 교육의 궁극적인 목적을 신앙교육에 두었다.
청교도들에게 자녀들을 영적으로 교육하는 것은 부모의 가장 큰 의무였다. 만일 자녀를 영적으로 교육하지 않을 때 언제인가 그들의 자녀는 그들을 저주 할 날이 오게 될 것이라는 것이 청교도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청교도들에게 자녀들을 영적으로 교육하는 것은 부모의 가장 큰 의무였다. 만일 자녀를 영적으로 교육하지 않을 때 언제인가 그들의 자녀는 그들을 저주 할 날이 오게 될 것이라는 것이 청교도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코튼 매더의 조부인 리차드 매더(Richard Mather)의 다음과 같은 설교에 귀를 기울여 보자. 그는 그의 회중에게 설교하기를 언제인가 우리가 우리의 자녀를 신앙으로 양육하는 것을 우선시하지 않고 차선으로 할 때 자녀들이 지옥에서 부르 짖기를 {내가 받는 지옥의 고통은 모두 부모님 때문입니다. 당신들은 내게 기독교에 대한 진리를 알려주어야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죄와 악으로부터 멀리 하여야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당신들의 죄와 죄값이 내게 전가되어 왔지만 당신들은 그것들로부터 나를 구원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죄 가운데 살아가는 나를 보고도 당신들이 침묵하였기 때문에 나는 죄 가운데 살았고, 그 죄로 인하여 지옥의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화로다 나여! 세상적이고 생각이 모자란 부모를 두었던 나여!}
정기적인 교육과 수시교육
자녀들을 영적으로 교육하기 위하여 청교도들은 자녀들을 수시로 또는 정기적으로 교육하였다. 청교도들은 앉았을 때나 서 있을 때, 길을 걸을 때, 옷을 입을 때나 벗을 때, 아침이나 저녁을 막론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그들의 자녀들을 수시로 교육하였다. 또한 그들은 정기적으로 자녀들에게 말씀을 교육하였는데, 주로 가장의 책임 아래 이루어졌다. 청교도들은 아침과 저녁으로 가정 예배를 드리면서 가장은 가정예배를 통하여 그의 자녀들에게 정기적인 신앙교육을 실시하였다. 또한 매주일에 한 번씩 모든 식구를 불러 모아 요리문답서를 교육하는 것도 등한시하지 않았다. 기독교 교리의 핵심을 다루고 있는 요리문답교육은 루터와 칼빈 이후 기독교교육으로 크게 활용되었는데, 대부분의 영국과 뉴잉글랜드의 청교도 목사들은 요리문답서를 작성하여 자신의 교회에서 사용하곤 하였다. 또한 피터 벌클리(Peter Bulkely)가 {어린아이는 입이 좁은 병과 같아서 조금씩 하나님의 말씀을 불어넣으면 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랄 수 있다}고 말한 것처럼, 청교도들은 시간이 허용하는대로 자녀에게 조금씩 말씀을 주입하므로 그리스도의 신실한 백성으로 양육코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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