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성수하는 역사적배경
주일예배의 근거를 성경에서 찾으려고 하는 많은 시도가 있었고 또 몇 성경 절들을 주일 예배의 근거로 제시하고 있으나 모두 성경의 원 뜻을 벗어난 것들이며 사실상 일요일 예배에 대한 성경적 근거는 없다고 인정을 하였기에 예수님께서 정하신 그 기원을 역사에서 찾아보며 성경적으로 제시해 보기로 하자. 이 자료는 마지막에 성경으로 답을 제시하였다. 중간만 보고 엉뚱한 소리하지말기를 바란다.
○ 일요일 예배의 기초
1. “내가 너희의 산당을 헐며 너희의 태양 주상을 찍어 넘기며 (레26:30)” “너희 제단이 황무하고 태양상이 휘파될 것이며 (겔6:4)” ▶ 일요일에 예배는 드리지 않았지만 일요일 예배의 기초는 창조 때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곧, 일요일 예배의 노선으로서 구약에는 태양신을 섬겼다.
2. “여호와의 전문 앞 현관과 제단 사이에서 약 이십오인이 여호와의 전을 등지고 낯을 동으로 향하여 동방 태양에 경배하더라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가 보았느냐 유다 족속이 여기서 행한 가증한 일을 적다 하겠느냐 (겔8:16-17)” ▶ 성전 안에 가증한 것들을 세움 (민11:16, 겔6:1-6, 겔8:1-7) 사람이 죄를 지으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을 하며 우상숭배의 장소로 변하게 된다. 하지만 사실은 백성이 하나님을 버린 것이다.
3. “너는 나의 성물들을 업신여겼으며 나의 안식일을 더럽혔으며 (겔22:8)” “그 눈을 가리워 나의 안식일을 보지 아니하였으므로 내가 그 가운데서 더럽힘을 받았느니라 (겔22:26)”
○ 기독교가 로마에 전파될 무렵
▶ 미트라 종교가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에서 파생된 종교로 기원전 1세기 경에 로마로 들어왔다. 태양신 미트라는 주로 군인 층에서 열렬히 신봉하였는데 이후 귀족과 황실에서 받아들여 제국과 황제의 수호신으로 격상되었다. 기독교가 로마에 전파될 무렵에는 이 미트라교가 가장 영향력 있는 종교가 되어 있었다.
○ 로마 교회의 시작
▶ 기원전 61년의 폼페이에 의한 전쟁 포로로서 로마에 끌려갔던 유대인들의 후손들에 의해서 세워졌다. 그 포로들은 그 후에 석방되어 로마의 유대인 공동체 내에서 강력한 구성원들을 이루고 있었다. 바울이 로마인들에게 편지를 쓸 당시인 기원후 57년경에는 이미 상당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유대인은 여전히 로마의 속국이었다.
○ 종교 갈등의 발단
1. 바울은 로마에 복음증거하기를 원했는데 길은 모두 로마로 통하기 때문이었다. 로마에 바울은 죄수의 신분으로 갔으며 사도행전 후반부에 배타고 로마로 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황실에까지 복음을 전했다.
2. 하지만 로마의 궁전 안에서는 이교도 제사를 매일 드리고 있었는데 황실의 여자들이 복음을 받은 후 제사를 드리지 않자 곧 로마제국과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3. 복음이 군대에까지 들어갔다. 고넬료를 비롯해서 군인이면서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후로 총을 버리고 제대하는 일이 생겨났다. 그러자 군대는 약해지기 시작했고 로마제국과의 갈등이 증폭되었다.
4. 이 미움이 유대인들에게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유대인은 원래부터 속국으로서 로마와 갈등이 존재하고 있었다.
○ 로마 황제의 핍박
1. 기원후 64년 7월에 네로황제는 신도시를 개발하려는 계획을 세웠는데 이것을 시민들이 반대했다.
2. 로마시에 큰 불이 나서 시 전반을 태우자 시민들 사이에 “우리가 신도시 개발을 반대해서 네로황제가 불을 일부러 놓았다“라고 소문이 나자 네로 황제는 이것을 다시 기독교인들에게 뒤집어 씌웠다.
3. 이 때부터 네로황제의 핍박이 시작. 그 때 바울이 죽고 베드로가 그것 때문에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다.
4. 기원후 66년에 유대인들이 독립반항운동의 반란을 일으켰다. 로마는 칼과 철로 대항했고 이 때 많은 이들이 희생당했다. 하지만 이 반란에 기독교인들은 참여하지 않았었다.
5. 기원후 70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짐.
○ 로마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정책
1. 하드리아누스 황제(117-138)는 유능한 정치가였고 많은 속국들과 화친 정책을 펴서 매우 안정된 정치를 했다. 그 당시 반란이 삼하던 유대인들과 화친 조약을 맺기 위해 소원을 따라서 기원후 130년경에 예루살렘 성전 재건 허가를 해 주었다. 유대인들은 막대한 건축 자금을 거두었다.
2.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다음의 세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① 황제를 숭배하라 ②토라(모세오경) 사용금지 ③ 안식일 예배 금지
3. 얼마 후, 황제는 모든 속국들에게 자신을 신의 아들로 부르도록 하는 황제 숭배를 강요하자 유대인들이 반발하였고 황제는 보복으로 할례의식을 금지시켰다. 유대 랍비들의 항의가 일어나자 황제는 분노하여 성전 재건령을 취소하였다.
4. 기원후 132~135년 사이에 유대인들의 대규모 반란이 있었다. 황제는 로마 군대로 초토화시키면서 유대인의 마을 985개를 전멸, 약 80만 명이 죽었다.
5. 이미 내세웠던 세 가지 금지령을 내리고 어기면 사형으로 다스렸다.
○ 기독교인에게 문제발생
1. 이 결과로 기독교인들에게까지 문제가 생겼다. 당시 로마 제국 내에서는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이 공존하고 있었고 모두가 다 안식일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유대인 반란으로 인한 금지령 속에 포함된 안식일 준수 문제는 기독교인들에까지 해당되는 칙령이었다. ① 같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점 ② 구약성경을 사용한다는 점 ③ 안식일을 지키고 있다는 점
2. 로마제국은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을 동일시하면서 안식일을 지키면 박해를 했다. 왜냐하면 아래의 세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 교부들의 변증서
1. 그래서 당시 교부들은 “우리는 반항도 안했고 감정도 없으니 핍박 말라”면서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을 다르게 취급해 달라고 변증서를 내면서 계속 요청했으나 황제는 이를 거절하고 박해는 계속되었다.
2. 결국, 교부들은 유대인들과의 차별화와 로마의 이교도들과의 동질화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유대인과의 차별화와 이교도와의 동질화를 위해서 안식일 대신 당시 태양신을 섬기는 이교도들의 예배일인 일요일 예배를 교회에 도입하게 된 것이고 교회 내부에 분란이 일어났다.
① 안식일을 계속 지키려는 무리들 ② 안식일 대신 일요일을 지키려는 무리들 ③ 두 날을 모두 지키려는 무리들
3. 일요일 준수가 즉시로 안식일 준수를 대신하지 않았고, 기독교인들은 계속 두 날을 같이 지켰다.
○ 변증적 교부들의 타협에 의한 배도
1. 그리스도를 믿노라고 하는 사람들이 처음으로 일요일을 지킨 역사상의 증거는 '바나바의 서신'(15장)과 '저스틴 마터'의 "첫 변증서"(First Apolozy, 67장)에 나오는데, 이것들은 기원후 150년경의 것이다. 두 경우에 있어서 다 같이 안식일 준수를 비난하고 일요일 준수를 권장하고 있다.
2. 일요일을 "주의 날"이라고 일컬은 최초의 믿을 만한 증거는 경외서인 "베드로의 복음"과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Miscellanies, V. 14)에서 유래되었는데, 이는 모두 제2세기 말경의 것이다.
3. 약200년 동안 핍박을 당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은 목숨을 걸고 안식일을 주장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 시대에는 유대인의 모든 풍습을 회피하고 경멸하며 학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과 다르다고 열심히 황제에게 변증하는 글이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려는 무리가 발생하고 그리스도인들도 점차 정치상황에 맞춰 안식일도 지키고 또 일요일에도 모임을 가졌던 습관이 있었음을 바나바의 서신, 저스틴 마터의 글, 도마의 복음서, 폴리캅의 순교 등에 나타난다.
4. 기독교 교회 지도자 두 명이 핍박에 못 이겨 이교도와 타협에 의한 배도에 이른 과정을 보자. 첫 변증의 내용은, "기독교인들은 유대인과 다르므로, 다르게 취급해 달라!"는 것이었는데 로마황제는 그 변증을 거부했고, 그러자 그 후 변증의 내용이 바꾸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5. 저스틴 마터의 변증 (기원후 100-165년)
①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시84:11)”
②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1:5)”
③ 빛은 예수님이요, 어두움은 이 세상이다.
④ 영광 중에 재림하시므로 일요일에 재림하실 것이다.
⑤ 그러므로 일요일이 주의 날이다.
⑥ 일요일을 신성시해야 핍박이 없어지므로 일요일에 성도들을 모이게 하고 태양을 향해 기도하게 함. "소위 태양의 날이라고 부르는 날에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회집합니다!" <저스틴 마터 변증서>
6. 마르시온의 변증 (기원후85-160년)
① 안식일은 예수님이 무덤에 계셨던 날이다. 이토록 슬픈 날에 어떻게 먹을 수 있느냐 하면서 금식일로 지정.
② 안식일에는 성만찬도 폐지하고 우울하게 보내다가
③ 일요일에 만찬을 벌이고 축제의 날로 지정해서 일요일을 기다리게 만들었다.
④ 나중에 이단시 되어 로마교에서 쫓겨났는데 (기원후 144년) 이는 영지주의의 창시자이다.
7. 초대교회 이후부터는 무시무시한 핍박이 있었던 서머나 교회 (AD100-313년까지)시대에 초대교회 이른 비 성령으로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된 후, 사단은 그냥 놔 둘 수 없어 이때부터 황제 6명이상을 동원하여 그리스도인들을 핍박으로 다스리던 시대였다. (트라얀, 아우렐리우스, 막시미누스, 데시우스, 발렐리안, 디오클레시안 황제로서 ,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온건정책을 쓴 콘스탄틴 황제 전 까지) 이때 많은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순교당했다. 그러나 이 엄청난 박해 속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은 감소되지 않았다. 계시록 2장의 서머나 교회의 상황이 그것을 증거 해준다. ※ 요한계시록 2장의 에베소, 서머나 교회 참조
○ 로마황제의 기독교 공인
1. 로마제국의 정치지도자이면서도 디오클레티아누스(기원후 284-305)는 기독교에 대한 "인종청소"를 실시할 정도로 심한 박해를 가했지만, 뒤를 이은 황제인 콘스탄티누스(기원후 304-337)는 기독교와 타협(내지 유착)을 시도한다. 이는 기독교를 권력유지의 도구로 이용하기 위한 정치적 행위였다. 콘스탄티누스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병상에서 갈레리우스 황제는 말했다. “그리스도인들을 죽이려고 했더니 국고만 바닥나고 나라만 분열되었으니 차라리 그들을 포용하라”
2. 당시에 로마는 동서로 분열되어 있었는데 콘스탄티누스가 유명한 십자가 환상 (성당 강대상에 새겨져 있는 십자가)을 보고 제국을 통일하였다. 그 후 기원후 313년 2월에 칙령을 내리면서 기독교에 대한 탄압을 중지하였으나 아직 기독교에 대한 전면적 수용이나 국교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고 단지 제국의 다른 종교들에 비해 동등한 법적 지위, 곧 양심의 자유를 인정한 수준이었다.
○ 일요일 예배의 법제화
1. 밀라노 칙령 (321. 3. 7)
① 200여년 이상 그리스도인들을 무섭게 핍박하던 로마제국은 그리스도교를 힘으로 박멸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달았으며 기독교를 제국을 통일할 수 있는 유력한 수단으로 여긴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마침내 밀라노에서 최초로 일요일을 공식적인 휴일로 선포하게 되면서 신교 자유를 허락하는 획기적인 조치를 취했다. (밀라노 칙령 The Edict of Milan)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태양을 존경하는 날에 모든 관공리들과 각 도시의 주민과 제조 공장의 종업원들은 휴업하라. 그러나 농촌에서 경작에 종사하는 농민은 자유로이 노동할 수 있다. 이는 씨를 뿌리고 포도를 심는데 불리할까 염려됨이라” (단 7:24 ⑤그가 또 때와 법을 변개코자 할 것이며 )
② 태양신을 숭배하는 이교도들과 기독교들을 일요일로 묶어서 단일 종교로 융합해 보려는 야심적인 종교 정책을 시도했던 것이다. 콘스탄티누스는 이 정책의 성공을 위해서 자신이 기독교로 개종할 것을 선포했으나 이것은 세상을 기만하는 전략상의 개종이었다. (대세계의 역사 3권 p211)
③ 바벨론 시대부터 휴일을 일요일로 쓰고 있었는데 바벨로니아의 점성술에서 따온 요일제도도 오늘날의 요일제도로 바꾸었다. 그 날에 따라 해당되는 행성이 지배한다고 생각. 원래 태양신을 숭배하였으므로 첫째날을 일요일(日, Sunday)로 지정했다.(2003. 12. 1. 월. 한국일보)
④ 하나님의 시간은 해질 무렵이 하루의 시작인 것을 자정부터를 하루 시작으로 바꾼 것도 로마. 1년, 1달, 하루는 행성주기에 의한 것이지만 1주일은 성서로부터 왔다.
⑤ 모세 5경 때부터 이집트-바벨론-페르시아-헬라-로마-지금에 이르기까지 모든 우상들이 태양신과 관련이 있다.
⑥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을 걸고 반대했다.
2. 니케아 종교 회의 (325. 6. 19~ 8. 25)
① 콘스탄티누스가 참석한 가운데 니케아의 황제의 궁에서 8월25일 폐회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② 태양의 날 일요일을 부활절로 성수 하도록 결의함.
③ “금번 소집된 총회에서 지극히 성스러운 부활절 일자에 관한 문제가 토의되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참석자 전원의 연합 일치된 판정으로 잘 해결되었다. 즉 이 부활절은 각처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같은 한 날에 반드시 준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④ 이 해에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고 게르만민족이 서쪽에서 대 이동으로 침입하여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30년 수도를 로마에서 소아시아(터키)의 비잔티움으로 옮기고 콘스탄티노플로 개명했다.
3. 로마교회 감독의 영향력 강화
▶모든 면에서 하나의 로마를 지향했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니케아 공의회를 통해 다양하게 난립해 있던 교회와 경전을 정리하여 하나의 교회, 하나의 성경으로 국가 공인화를 실시한다. 하지만, 정정이 어지러웠던 로마는 결국은 동서로 갈라진다. 거기에 따라 교회도 AD440년경부터 동서로 갈라진다. 연대적으로 AD312(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집권)~476(서로마제국의 멸망)의 기간이다.
① 로마에는 기독교의 5개 합회가 라틴어 계열의 서로마에, 그리스어 계열의 동로마의 도시 콘스탄티노플, 안디옥,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에 각각 있었다.
② 이방인들의 침입 때문에 서로마를 중심으로 합치려는 경향이 생기며 지도자의 필요성을 느낌. 왕들이 없었기 때문에 라틴파의 대주교가 맡아서 물리침. (이때 서로마는 라틴어를 쓰는 라틴파, 동로마는 그리스어를 쓰는 그리스파) 갑자기 황제가 떠나감으로써 공백이 된 서로마의 정치 환경에서 당시 서방의 유일한 정신적 지도자인 로마교회 감독의 입지와 영향력이 막강해졌다. (국왕의 일을 맡으면서 교회를 지도함. 대주교가 후에 교황이 되고 왕과 황제를 폐위시킨다.)
③ 이때 당시 라틴어 계열의 서로마에서는 게르만족이 북서쪽에서 대 이동으로 침입이 잦았고 이를 모두 서로마가 막아내고 있었기 때문에 콘스탄티누스는 이 서로마 주교의 편을 들어주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3. 사르디카 회의 (343)
▶ 태양의 날 일요일을 ‘부활의 날’이란 미명아래 일요일 신성론으로 부각시키면서 “주의 날”로 개칭하고 교역자가 여행으로 “주의 날‘을 세 번 범하면 제명시킬 것을 종교 제11조에 명시하도록 의결했다.
○ 예수님께서 정하신 날과 성경적 근거
요 20장 19절, 26절
19절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창세기1:5절에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유대인들의 안식일은 금요일 해지는 저녁부터 토요일 해질때까지가 안식일이다. 우리나라 식으로 성경을 보지말기를 바란다.요20 :19절에 안식후 첫날 저녁에(土)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찾아오셨다. 제자들은 안식후 첫날을 주님의 날로 지켰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찾아오신 이날을 거룩한 날로 여겼다. 다시 여드레를 지나서 예수님께서 다시 찾아 오셨다.
26절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그날도 역시 안식후 첫날이었다. 예를들면 1일날 오시고 8일날 오신 것이다. 안식일을 주장하는 자들이나 주일을 부정하는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정하신 거룩한 날이 이렇게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만 제시를 못해서 늘 엉뚱한 성경을 대주고 주일이 있느니 없느니 싸움을 하니 답답할 뿐이다.
유대교에서는 계속 토요일을 안식일이라고 주장하나 기독교에서는 초대교회부터 안식일과 주일을 겸하여 지키다가 (행20:7절 참조) 점차적으로 주일을 더 치중하여 안식일을 지나서 주일로 지키게 되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은 자신을
가르쳐서 "안식일의 주인"(마 12:8)이라고 말씀하셨으며 또한 주님은 안식 후 첫날, 즉 주일에 부활하셨다. (마 28:1, 막 16:1, 눅 24:1, 요 20:1) 그리고 안식 후 첫날 즉 주일 밤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고(요 20:19,) 또 안식 후 첫날 즉 주일에 제자들에게나타나셨다.(요 20:26) 주님의 나타나심은 단순히 제자들에게 부활의 모습을 보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안식일이주일로 완성되었고, 주일을 성수(聖守)하라고 하는 의미이다. 그래서 초대교회 시대부터 안식 후 첫날인 주일을 지키면서 사도 요한이 주일(주의 날 계1:10)로 결정지으며 그후로는 안식일 시비가 없어지게 된 것이다.
안식일 교인들은 자꾸 십계명에 나타난 안식일을 고집하는데 십계명 제 4계명에 계시된 안식일은 반드시 토요일만 고집하는것이 아니다. 다만 제 제 칠일...즉 한주간에 한날인 ..그 날을 정하여 안식한다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안식일의 주인 되시는 주님께서 안식일 후 첫날 새벽에 부활하시므로 그 부활한 날을 안식일의 완성된 날 ...즉 주일로 정하여 주님께 거룩케 지키는것은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부활하기 전에는 주님도 안식일을 지켰지만 (눅14:6) 부활 후에는 오직 주일에만 나타나심은 의미있는 사건이다. 그리고 구약의 안식일은 아무일도 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지만 신약의 안식일 즉 주일은 율벌적으로 지키기보다는 복음적으로...즉 선을 행하는 일(병자 치유, 봉사등)로 지켜야 할 것이다. 일맥이 제시한 성경구절이 잘못되었다면 성경으로 답을 주시길 바란다.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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