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학

[스크랩] 거룩한 강대상에서 성도들을 협박마라

수호천사1 2010. 9. 11. 02:35

목회 열정과 성경 오 남용

비판이 두려우면 교주가 되라

입력 : 2010년 09월 03일 (금) 16:24:48 [조회수 : 7292] 정용섭 ( 기자에게 메일보내기

김홍도 목사가 2010년 8월 22일 주일 낮 예배에서 선포한 설교 '주의 종과 성도의 신앙생활'을 텍스트로 읽고 동영상으로 보았다. 그의 이름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설교를 접한 건 처음이다. 설교를 접하고 다가온 전체적인 느낌은 다음과 같다. 두 가지로 구분하겠다.

 

하나는 금란교회를 세계에서 가장 큰 감리교회로 키운 목회자의 명성에 걸맞게 설교의 카리스마가 돋보였다는 사실이다. 청중들을 자신의 설교 안으로 끌어들이는 능력이다. 내용도 단순 명료하고, 전달 방법도 직설적이어서 청중들에게 강하게 전달된다. 이런 요소들은 대중적인 설교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들로 설교자의 진정성이 담보되지 않고는 이런 카리스마는 확보되기 힘들다. 다른 하나는 설교가 끝난 뒤에 내 영혼이 불편해졌다는 것이다. 소위 말하는 은혜를 받지 못했다는 뜻이다. 지금 간략하게나마 내 입장을 해명하려고 한다.

위 설교에 은혜가 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케리그마가 빠진 설교였기 때문이다. 성경 공부나 직분자 교육이라면 모르겠으나, 주일 낮 예배의 설교라면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행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 사건에 집중해야 한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배의 한 순서인 설교는 바로 그 사건을 선포하는 일이다. 위 설교는 한결같이 '주의 종'을 잘 섬겨야 복을 받고, 비방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이야기였다.

 

김홍도 목사도 당신의 설교가 주일 낮 설교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이런 설교는 평생에 처음 하는 것이라고 했다. 오해의 소지가 있어도 위의 설교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신자들이 복 받는 길을 막으면 안 된다는 판단 때문이라고 한다. 복 받는 방법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깊은 이야기를 듣고 싶은 사람들에게 위 설교는 공허하다.

복과 화, 축복과 저주라는 이원론적 구조가 김홍도 목사의 설교를 끌어가는 패러다임이다. 한국교회 설교의 일반적 행태다. 사람들은 누구나 그런 부분에 예민하고 취약하다. 길을 가는 사람을 붙들고 "당신의 오늘 운세가 나빠 보인다" 하고 말하면 누구나 기분이 언짢을 것이다. 그런 방식으로 포교하는 종파의 신도들을 간혹 만날 수 있다.

성서는 분명히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내리시는 화에 대해서 언급한다. 그런 구절은 모두 고유한 '삶의 자리'가 있다. 그것을 놓친 채 겉으로 드러난 구절을 그대로 청중들의 삶에 적용시키는 것은 영혼 구원이 아니라 오히려 영혼 파멸의 위험성이 있다. 성서의 놀라운 영적 세계를 놓치고 대신 세속적이고 기계적인 세계관의 포로가 되게 하기 때문이다. 성서의 놀라운 영적 세계에 발을 들여놓으려면 '성서 텍스트'를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작업이 없으면 결국 성서는 죽는다. 성구를 나열하고 예화를 나열하는 게 설교는 아니다.

위 설교에는 성구가 많이 나온다. 각각의 성구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문제는 그것을 이현령비현령식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위 설교에서 그런 현상이 어느 정도로 심각하게 나타나는지는 길게 설명하지 않겠다. 주의 종이 아무리 큰 잘못을 행했어도 멸시하거나 거역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술 취했던 노아, 처자식이 있는 몸으로 에티오피아 여자를 아내로 들인 모세, 밧세바를 범한 다윗,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 이야기를 인용했다. 아무리 큰 잘못을 범했어도 하나님은 주의 종들을 크게 들어서 쓰신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근거로 오늘 교회에서 목사의 뜻을 거스르지 말라고 외쳤다. 이런 식으로 성서 이야기를 끌어다 쓰기 시작하면 모든 일이 합리화된다.

김홍도 목사의 모든 주장이 무조건 잘못이라는 말이 아니다. 귀담아 들을 말도 있다. 목사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생각되면 개인적으로 찾아가서 권면하고 위해서 기도해 주고, 그래도 안 되면 혼자서 교회를 떠나라는 것이다. 모든 신자들이 목사와 똑같은 생각을 할 수는 없다. 자기와 생각이 다를 때마다 교회에서 파당을 짓고 모함하고 문제를 일으킨다면 견뎌 낼 수 있는 목사는 없다.

카리스마의 원리에 따라서 교회의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은 옳다. 그렇다고 해도 위에서 인용한 성서 이야기를 근거로 목사에게 대들지 말라고 설교할 수는 없다. 교회에서 공연히 트집을 잡는 신자는 많지 않을 뿐더러, 목사가 진리에 열린 자세를 갖춘다면 굳이 성구를 들이대면서 공포심을 조장하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서 교회의 질서가 자리를 잡는다.

개신교회(Protestant)는 기본적으로 교회의 수직적인 질서보다는 말씀의 진리를 우선하는 종파가 아닌가. 감리교회도 그런 정신에서 시작된 게 아닌가. 문제의 핵심은 목회에 대한 반론 제기가 아니라 그 과정의 비민주성, 독단성, 비신학성이다. 목사는 비록 목회의 효율성이 떨어지더라도 교회 안에서 문제 제기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게 두렵다면 교주가 되라.

위 설교에서 성구 인용이 설교자의 주관적인 취향에 따라서 취사선택되고 오해되고 있는지를 한 구절만 구체적인 예로 들겠다. 위 설교의 성서 본문은 빌립보서 4장 16절과 시편 105장 15절이다. 앞의 구절은 주의 종을 섬겨야 할 이유에 대한 근거로, 뒤의 구절은 주의 종을 배척하지 말아야 할 근거로 인용됐다. 뒤 구절의 내용은 다음이다. "나의 기름 부은 자를 손대지 말며 나의 선지자들을 해하지 말라." 이 구절의 문맥을 살피면 이 구절이 무엇을 말하는지 쉽게 알 수 있다.

그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가나안에서 소수 씨족 공동체를 이루고 살 때 이방인들에게 공격당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이끌어 주셨다는 사실을 진술하는 시적 표현이다. 이를 본문으로 설교한다면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소수라 하더라도 하나님이 그분의 특별한 방식으로 지켜 주신다고 전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기본적으로 '기름 부은 자들' 아닌가. 거친 세상에서 외롭게 살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경험한 사람들 아닌가. 이 구절을 목사의 목회 절대권에 대한 근거로 제시한다는 것은 성서의 오남용이다.

성서의 놀라운 영적 세계를 눈치채지 못한 사람은 인격적인 진정성이나 목회 열정에 상관없이 성서의 가르침과는 다른 설교를 할 수밖에 없다. 목회의 열정이 강한 것만큼 기독교의 근본으로부터 더 멀어진다. 위 설교의 마지막 부분에서 목사의 설교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발언이 나왔다.

"
저는 심히 부족한 종이지만 47년 목회하는 동안 저를 거역하고 비방하고 공격하며 교회를 소란케 한 사람들은 후에 보면 10년 안에 아들이 죽거나 딸이 죽거나 손자가 죽거나 본인이 암으로 죽거나 많던 재산이 다 없어지고 알거지처럼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내 눈과 귀를 의심했다. 실체적 진실과는 거리가 먼 언급이다. 아무리 금란교회 설교 현장의 분위기가 특별하더라도 이런 정도로 과격하게 공격적인 설교는 다른 데서는 지금까지 들어 보지 못했다. 김홍도 목사도 아마 저 말에 확신이 있는 건 아닐 것이다. 자신의 기억에 그렇게 각인됐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설교자라고 한다면 저런 말을 할 수 없다. 선의로 해석하면, 자신이 욕을 먹는 한이 있더라도 신자들이 복을 받게 하기 위해서 좀 심하게 과장한 것일지 모른다. 목적만 좋으면 수단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일까. 사랑이 지나치면 거짓말도 진리가 되는가.

위 설교를 접하고 난 후나, 지금 그 설교에 대한 느낌을 쓴 후나 똑같이 필자의 영혼이 불편하다. 교회를 성장시키기만 하면 모든 목회 행위와 설교 행위가 용납되는 한국교회의 풍토를 우리가 어떻게, 언제까지 버텨 낼 수 있단 말인가!

정용섭 / 대구샘터교회 목사 · 대구성서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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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인을 세뇌하고 확인 사살하는 발칙한 신들의 망언

 

입력 : 2010년 09월 02일 (목) 12:19:38 [조회수 : 2549] 국인남 ( 기자에게 메일보내기

근래에 와서 인간의 수명이 길면 80수를 누린다 한다. 80년을 살면서 인간은 어느 누구나 희로애락(喜怒哀樂),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반드시 겪으며 산다. 불로초를 찾아 천 년을 살려 했던 진시황제도, 또한 미의 여왕으로 세상을 주름잡으려 했던 클레오파트라도 결국 생로병사를 거쳐 죽었다.

그래서 인간이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희(喜),락(樂)도 결국은 죽음을 향해 기뻐하고 있는 것이다. 항간에 하나님 말씀을 코미디로 번역해 많은 기독인들을 웃게 했다는 뉴스를 접했다. 필자도 잠시 웃고자 사이트에 들어와 그 기사를 보았다. 소문대로 쓴웃음이 나오며 김홍도 목사다운 설교를 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필자도 발칙한 신들을 한번 웃기고 싶다는 발상으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그렇다. 오늘날 한국교회 거반의 목회자들이 이러한 협박 설교를 한다. 특히 대형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목회자들이 하나님보다 더 높아지려는 교만에서 이러한 발칙한 발상들을 토설한다. 협박 설교 속에 담겨진 교만한 뜻은 바로 이 말이다. "이것들아, 보이는 신에게 먼저 무조건 순종해라"이다.

교회 내에서 목회자가 가장 싫어하는 성도가 있다. 그것은 깨어 있는 자다. 목회자 편에서는 이들은 마귀당이고 사탄이다. 그리고 교회 잘못된 점에 대해서 개선책을 말하고 개인의 소리를 내면 그 사람은 주홍글씨를 가슴에 달아야 한다. 그들은 '안티 성도', '부정적인 성도'로 낙인 찍힌다. 행여 이러한 성도가 병이 들거나 사고가 나면 그것을 기회 삼아 교인들을 세뇌시키며 확인 사살하는 발칙한 신들이다.

지난날 필자가 섬겼던 H 교회에서도 흔하게 이러한 일들이 발생했다. 교회 건축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거침없이 사탄, 마귀로 몰아 불순종의 사람으로 몰아세웠다. 그런데 그중 한 사람이 보증을 잘못 서서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 어김없이 목회자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교회 일에 반대하고 주의 종에게 불순종했기에 고난을 받는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 목회자와 가장 가까이 지내는 사람이 같은 죄목으로 감옥에 갔다. 그러자 참으로 위로가 되는 설교를 했다. "요셉은 의로웠으나 형들의 계략과 보디발 아내의 거짓 증언에 옥살이를 했다. 그러나 그 고난이 훗날 애굽 총리가 되기 위한 훈련이었다. 그래서 지금의 고난이 미래의 축복이 될 것이다"라 했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교회는 집단 사고에 빠져 깊은 병을 앓고 있는 것이다. 예일대 심리학자 어빙 재니스(Irving Janis)는 구성원들이 어떠한 공동체에서 합리적인 의사 결정을 할 수 없도록 왜곡된 사고방식을 '집단 사고'(Groupthink)라 했다. 이러한 집단 사고는 현실적인 판단을 내릴 때 무조건 만장일치로 응집력을 과시하며 방망이를 휘두르는 졸개 집단으로 전락되게 한다.

지금 한국교회는 무조건 맹종하는 '집단 사고'에서 파생되는 맹목적인 이기가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맹종이 교회라는 조직의 힘과 결탁되어 공동체의 편익에서 벗어나지 못하기에 부정을 긍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긍정과 순종만이 믿음 좋은 성도로 세워 주는 맹목적인 '집단 사고'의 허점을 한국교회가 그대로 안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망언을 하는 사람들의 가정과 자손은 굳이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것은 망언하는 자가 바로 살아 있는 신이요, 아버지요, 가족이니 어찌 불순종과 안티가 있겠는가. 이 집안은 기필코 10년 안에 자식이 죽거나 자손이 죽거나 암에 걸리거나 재산이 없어지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그 집안은 알거지가 아닌, 대부자로 영원히 육이 죽지 않고 이 땅에서 살아야 할 것이다.

성서에는 분명 하나님은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을 동시에 주신다 했다. 그것은 하나님을 기억하기 위함이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풍요와 형통함에 거하시는 것보다 가없는 곳(빈궁과 아픔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존재는 실존으로 살아 있다. 만사형통과 축복만이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발상은, 바로 풍요의 신 맘몬을 섬기는 발칙한 신들의 교만에서 나온 발상이다.

얼마나 자가당착(自家撞着)에 빠진 어리석은 망언인가. 복음 없이 시와 문학을 논하며 살았던 사람들도 긍휼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마음을 닮고 살았다. "릴케는 자신의 시가 굶주려 죽어 가는 소녀에게 주어야 할 한 조각 빵만도 못한 것을 탄식했고, 카뮈는 자신이 내세우는 실존주의가 몽마르트 비탈길에서 얼어 죽어 가는 노숙자를 살릴 담요 한 장만도 못하다는 것에 신음했다." (<황홀한 글 감옥> 중에서) 릴케는 시인이며 알베르 카뮈(Albert Camus)는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문학가였다. 시와 문학에 묻혀 살았던 사람들도 이웃의 고통과 아픔을 함께 아파할 줄 알았는데, 참으로 부끄러운 발칙한 신의 모습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반드시 겸손한 설교를 먼저 한다. "대접받는 자리에 있다는 생각을 버리고 섬기는 자세를 가질 것, 헌신과 희생의 삶을 살아갈 것, 복음을 전하는 영혼 구원에 최선을 다할 것, 그리고 물욕·명예욕·육신의 정욕을 이겨야 한다"라 했다. 구구절절 아멘이다. 그런데 어찌 앞말과 뒷말이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어찌 섬기는 자의 자리에서 성도들을 향해 협박 공갈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헌신과 희생의 삶을 살겠다는 목회자가 어찌 강대상에서 말씀을 기만하는 망언을 해서야 되겠는가. 분명 물욕, 명예욕, 육신의 정욕을 이긴 자의 말은 아닌 것 같다.

하나님도 가끔은 에러를 내시는 것일까? 이렇듯 발칙한 신들은 공중파 방송을 타고 온갖 치부가 다 드러나며 그의 나라와 의에 치명타를 날렸다. 막장 시대에 복음을 변질시켜 부끄러운 망언들로 세상을 더욱 어둡게 했다. 참으로 그들은 하나님과 친한 것일까, 아니면 그들의 하나님은 또 다른 하나님이실까. 그렇지 않으면 워낙 물질이 풍족한 교회인지라 총 맞은 곳 보수 공사쯤은 감쪽같이 잘 처리하는 숨은 달란트들이 있는 것인지, 때로는 궁금하기도 하다.

이들 육신의 사람들은 몇 가지 비슷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가장 먼저 세습을 한다. 당연히 신의 아들이기에 말이다. 그리고 몸과 마음을 다해 죽도록 감투를 사랑한다. 마치 교회를 내 것으로 착각하기에 재정과 행정도 마음대로 움직인다. 그리고 어김없이 예수님의 이름을 앞세워 구제와 선교를 외친다. 더불어 자신의 이름을 높이며 승자의 논리를 축복과 부귀영화에 접목시켜 신앙을 샤머니즘화한다. 또한 방송과 언론을 통해 자신을 알리고자 텔레페서(telefessor)가 되어 여론몰이에 열중하는 바리새인들이다. 그야말로 독단과 독주가 화려하게 꽃을 피운 보암직 먹음직한 곳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거룩한 강대상에서 성도들을 협박하지 않는다. 또한 하나님보다 더 높아지지 않기 위해 매시간 자신을 내려놓는 훈련을 한다. 숫자와 물질에 매이지 않고 오직 한 영혼을 소중히 여긴다. 이들은 건물에 매이지 않고 성도를 조직에 묶어 두지 않으며 오직 복음이 주는 자유함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다.

그래서 잠시 속도를 멈추고 바벨을 향한 발칙한 신들을 향해 산상수훈 8계명을 제시해 보았다.

1. 세습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을 것이오.
2. 숫자에 집착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늘의 것으로 충만할 것이오.
3. 건축과 업적에 집착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함을 받을 것이오.
4. 물질에 집착하지 않은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오.
5. 이생의 자랑과 협박을 삼가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지혜를 얻을 것이오.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오.
7. 감투를 멀리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면류관을 받을 것이오.
8. 한 영혼을 소중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요즈음 막장 드라마와 막장 삶이 세상을 어둡게 하고 있다. 막장 삶을 비관하며 하루 40여 명이 목숨을 끊는 현실이다. 언제까지 막장 교회 치부를 드러내며 서로가 아픔을 주고받을 것인가. 막장으로 달려가고 있는 세상에 작은 빛을 비추어야 할 소명자들 아닌가. 우리가 병명을 모를 때는 난감하고 불안해 스스로 오진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그 병의 근원을 알면 완치도 가능하다.

그래서 총은 양을 향해 쏘는 것이 아니라, 이리 떼를 소탕할 때 쓰는 무기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분명 양은 적이 아니기에 양을 향해 쏘는 자는 자칫 살인자가 된다. 총부리를 자신을 향해 겨눌 때 발칙한 신의 모습은 사라질 것이다.ⓗ

출처 : †예수가좋다오
글쓴이 : (일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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