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는 '한국 교회'인가? |
서구적 유행 신학에 함몰된 기독교, 고유의 영성과 감동으로 소생할 때 |
▲ 선교사가 입국하기 전에 황해도에 이미 교회 형태를 갖춘 교회가 있었다. 김학수 화백이 소래교회를 생각하며 그린 그림. (자료 제공 기독교100주년기념관) | ||
원래 '교회'라는 개념은 신학적으로 보면 보편적인 것으로 결코 '한국'이라든가, '미국'이라고 하는 어떤 특수한 한정에 매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사적으로 보면, 역사 속에 실재한 모든 교회는, 모두 '한국교회', '미국 교회', '일본 교회' 따위밖에 없었다. 결국, 진짜 존재한 교회는 특수한 시공에 제한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곧 실존 교회의 존재 양식인 것이다. 이것은 '신학적 개념'보다 '역사의 실재'가 더 힘이 센 현상이 아닐까 한다. 이것을 간파한 미국 선교사들도 이 땅에서 '미국 교회'를 세우고자 한 목표를 포기하고, '한국교회'를 세우려 했다. 심지어 첫 복음 선교사이자, 한국 프로테스탄트의 대표 선교사였던 언더우드는 자신이 장로교의 선교사로 파송받았으면서도, "내 생애에 감리니, 장로니 하는 교파의 구별 없는 한국의 단일 토착 교회를 세우는 것이 소원"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런데 한국 선교를 주로 담당한 미국의 교파 교회 선교사들이 활동하기 이전, 유럽의 가톨릭과 국가 단위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선교사들은 상대적으로 훨씬 강한 '제국주의적 선교관'을 지녔던 것이 사실이다. 그들은 대개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에서 정치적 확장 판도에 편승하여, 자국의 교회를 그대로 선교지에 이식하고, 팽창과 제압을 통해 선교 성과의 확장을 꾀한 측면이 강하다. 다행히 한국의 경우는, 이른바 '북방 선교 루트'를 개척하여 한국인들과 함께 만주에서 한글 성서를 번역한 로스, 매킨타이어 선교사들이 그러한 제국주의적 선교 판도와는 거리가 있는 변방 교회의 선교사들이었다. 뒤이어 실제 한국에 도래하여 선교를 시작한 '남방 선교 루트'의 미국 교회 선교사들도 상대적으로는 제국주의적 침략 선교의 특성에서 한참 벗어난 선교의 진정성을 지녔던 것이 사실이다. 즉 이를 앞서의 논리로 말하면, 자신들의 교회를 그대로 이식, 확장하고자 하는 의지보다는, 선교지의 역사와 선교 현장의 상황을 더욱 소중히 여기는, 선교 신학적 정서와 동기가 더 강하였다는 의미가 된다. 이것은 곧 한국에서 진정한 '한국교회'를 수립할 수 있는 남다른 조건의 역사성을 의미한다.
이에 더하여 실제로 한국교회는 선교사들의 남다른 이상과 선교 신학의 조건에서뿐만 아니라, 이미 한국인 스스로의 교회 설립을 통해 그 교회사를 시작함으로써 진정한 '한국교회'를 시작할 수 있었던 역사적 실재를 다 가지고 있었다. 만주에 머물던 스코틀랜드 장로교의 로스와 매킨타이어 선교사는 한국인 이응찬, 백홍준, 김진기, 서상륜 등과 함께 1880년대 초 한국의 민중 문자인 한글로 성서를 번역, 간행하였다. 성서를 스스로 번역하며, 진리에 감동하고, 신앙을 고백한 번역자들은 이른바 '권서 전도자'가 되어 금교 상황의 조국 전도길에 올랐다. 이들에 의해 선교사 입국 이전 이미 '의주 신앙 공동체', '평양 신앙 공동체', 그리고 마침내 교회의 형태를 갖춘 황해도 '소래교회'가 설립되었다. 이것은 미국 선교사들이 한국에 입국하기 이전의 일이다. 더구나 일본 유학생 이수정은 일본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후 조국 선교의 꿈을 역시 성서 번역의 열정에 쏟았다. 그 결과 한글 마가복음서가 일본에서 간행되고 이 성서를 첫 선교사들인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지니고 내한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는 세계 선교 역사상 첫 선교사가 선교지의 언어로 이미 간행된 성서를 휴대하고 선교지에 당도하는 초유의 역사를 만든 것이다. 더구나 언더우드 등이 한국에서 활동을 시작하자마자 서상륜 등 한국인 전도자들에게서 복음을 듣고 개종을 결심한 한국인들이 언더우드에게 찾아와 세례를 줄 것을 요구하였다. 첫 선교사 언더우드는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흰 눈이 소복이 내린 복음의 처녀지에 첫 발자국을 남기기를 원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사명의 땅에 당도하였는데, 이미 이 땅에 '한국교회'가 세워져 있었고, 많은 세례 지원자들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는 그 감격과 아쉬움이 엇섞인 당혹스러운 심경을 표현하였다. "그 무렵은 씨를 널리 뿌릴 시기였음에도 동시에 우리는 첫 열매들은 거둘 수 있었습니다."
'정치적 민족 중심' 성향의 초대 교회
한국 초대교회가 모름지기 '한국교회'였던 것은 앞서의 사실들에만 머물지 않는다. 한국의 주류 선교부를 형성한 미국 교회는, 정치와의 관계를 형성하는 신학적 입장, 즉 '교회와 국가' 관계를 이른바 '정교분리'를 모토로 하고 있었다. 그래서 한국에 도래한 선교사들은 되도록, 한국의 정정에는 간여하지 않으려 하였고, 그들의 조국이나, 파송한 본국 교회로부터도 강력히 그런 지침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들은 한국인들에게, "교회는 나라일 보는 데가 아니라 심령상의 문제를 다루는 곳"이라고 누누이 강조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한국 상황은 국권이 일제에 의해 위협당하고 비운의 황제와 백성들은 안위를 염려해야 할 지경이었다. 결국 한국 기독교인들의 독립 운동 참여를 끝내 막을 수 없었다. 때로 가장 강력한 '정교분리' 신학을 주장하던 선교사들 스스로가 일부이지만 한국 황제의 자문이 되고 밀사가 되어 깊은 정치적 개입을 하게 된 것이다. 즉 헐버트 선교사는 고종의 비밀 특사로 워싱턴 백악관과 헤이그 만국 평화 회의에 파송되었으며, 언더우드 등 초기 선교사들은 불안에 떠는 고종황제의 침전 밖에서 불침번을 서고, 그 신변과 정치적 판단의 자문역을 다했다. 즉 '정교분리'의 교회가 한국교회로 와서는 지극한 '정치적 민족 교회'가 되는 일탈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때 선교사들이 복음 전수의 주체가 되었던 때는 오히려 '한국교회'가 '한국 교회'였던 역사적 전거를 상당히 되짚어 낼 수 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한국교회'는 '한국교회'의 길을 비켜나는 면면을 발견치 않을 수 없다. 이는 오히려 한국교회의 신앙상 자유가 온 해방 이후, 특히 한국교회가 자체적 역량을 갖추기 시작한 1960~70년대 이후에 더 두드러진다. 한국교회의 신학은 일부 소수의 창출 신학을 제외하고는 서구적 유행 신학에 함몰되어 버렸다. 한국교회와 한국 신학의 리더십은 서구 신학 유학 경험자들로 채워져 버렸다. 서구 교회의 자취를 그대로 답습해 나가는 길이 기독교 복음과 그 확장의 정도(正道)로 인식하는 도식이 고착되어 버렸다. 서구 신학과 목회의 현장에서 실험되지 않은 것은 그것 자체로 이단이요, 변방이었다. 때로는 서구 교회의 현장에서 실패한 담론과 수많은 부작용이 잉태된 방법론도 그대로 모방되어 그보다 더한 실패와 변질을 경험해 나갔다. 이제는 바로 그러한 서구화 기준만이 '세계화', '세계 복음화'의 모범 답안이 된 지 오래다.
고유의 영성과 감동이 서구를 소생시켜야
지금의 시대는, 기독교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의 목표와 화두가 '세계화'이다. 그러나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그것은 '세계화'가 아니라 '서구화', 혹은 '미국화'이다. 사고의 방식, 언어, 방법론, 가치관 모두가 미국의 것이거나 최소한 서구의 공통적 터미널을 통과하지 않은 것은 '세계화'의 항목도, 내용도 될 수 없는 지경이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에서의 경우가 어느 다른 비서구권보다 극성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화'는 결국 아무리 하여도 이류이며, 변방의 것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세계화의 가치와 질서에 순종하는 한 영원히 그 종속을 감내할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세계화'의 또 다른 방식은 '지역화'를 통한 '세계화'이다. 즉 진정한 세계화는 '지역'과 '지역'의 특수성이 '소통'을 이루며 함께할 때 진정으로 이룩될 수 있는 의미이다. 진부할지 모르지만, 결코 '미국적인 것'으로 한국이 세계의 으뜸이 되기는 불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으로 나아갈 가능성은 의외로 확실하며, 가능하다.
기독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우선 서구의 교회는 기독교에 있어서 우월한 전승과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겸손하게 배우고 참고해야 한다. 더구나 기독교회는 '사도적 전승'을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종교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러나 현상 속의 서구 교회는 이미 복음의 역동성을 거의 상실했다. 오히려 한국적 영성과 그 감동이 서구 교회를 소생시켜야 할지 모른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의 신학적 동지들과 기독교의 감동, 그 문화, 신학적 정서들을 교류할 단계에 와 있다. 따라서 한국교회와 신학은 이제 서구의 모방과 번역, 답습이 아니라 스스로의 창조에 사활을 걸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같은 기독교 수용 역사의 경험을 지닌 변경의 신학과 대화하여야 한다. 그리하여서 새로운 신학적 감동보다는 그동안 축적된 방법론만을 파는, 서구 신학에 대해 새로운 자극과 도전을 주어야 할 사명 앞에 당도해 있다. 그리고 또 하나 지금 한국교회의 또 다른 관심 사항인 세계 선교에 있어서도, 그동안 서구 교회 다수가 실패했던 그런 유사한 방식이 아닌, 새로운 한국 선교 신학을 창출해야 할 과제에 서 있다.
이미 양적 측면에서 한국의 주류, 다수 종교가 된 한국 기독교에 대해 한국 사회는 묻고 있다. '한국 기독교'는 '한국 종교'인가? 여기에 대해 우리는 내부적으로 먼저 묻고 성찰해야 한다. 오히려 선교사가 주체였던 초기의 '한국교회'는 진정한 '한국 교회'를 지향했는데, 바로 지금 우리들이 주체인 오늘의 '한국교회'는 아직도 '서구 교회', '미국 교회'를 지향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는 신학적 이상으로서의 보편적 '교회'로도 나아가지 못하는 길일 뿐만 아니라, 역사적 실존 교회로서의 진정한 '한국교회'도 수립하고 있지 못한, 어긋난 길임이 빤히 보인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소수의 자각하는 힘을 기대하며, 미미한 성찰과 작은 변화가 또한 보이고 있다. 고맙고 다행한 일이다.
서정민 / 현 연세대학교 신학과 교회사 교수․한국기독교역사학회 이사․한국종교학회 이사
출처| 뉴스앤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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