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세계관의 토대 : 삼위일체적 유일신론
기독교 세계관의 독특성은 기독교라는 종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가 믿는 하나님의 독특성에 있다. 그분은 어떤 종족이나 어느 종교에 속한 신이 아니라 열조의 하나님으로서 어느 곳, 어느 때, 공간과 시간의 장애를 받지 않고 살아계시고 주권적으로 인간과 역사의 과정을 지배하시는 살아계시는 신이시다. 그분은 창조주요 구속주로서 역사와 우주와 자연을 주권적으로 지배하시고 섭리하시는 신이시다. 이 세계가 그의 주권적인 섭리의 영역이며 그분이 왕으로 통치하시는 영역이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은 단지 구원받는 구속종교만이 아니라 세계와 역사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를 드러내는 세계관에 정위된 종교이다.
1. 삼위일체적인 유일신론은 기독교 세계관의 출발점이요 토대이다.
유일하신 창조자요 섭리자요 구속자요 주권자인 삼위일체 하나님은 기독교 세계관의 알파와 오메가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천지의 창조라는 사실은 기독교 세계관의 대헌장(the magna carta of the Christian world view)이다.1 기독교 학문은 이러한 기독교 세계관에서 나온다.
1). 영원부터 삼위일체의 교제가운데 계신 하나님.
기독교의 하나님은 우주 창조와 역사의 과정을 예정하시고 운행하시는 성부, 성자, 성령으로 계시는 신구약성경의 계시롤 통해 자신을 드러내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자신과의 온전한 교통 속에 계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철학자들이 말하는 최고의 존재, 순수존재로서의 신, 무감정의 신이 아니라 감정을 지니고 그 피조물을 긍휼히 여기시는 사랑의 신이다.
2). 그의 영원한 사랑의 대상으로 이 세상과 우주와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
이 세상과 우주는 그냥 있는 자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를 이루는 광장이다. 이 세상의 모든 일은 우연히 내지는 필연적으로 숙명적으로 불가항력적으로 이루어지는 무의미한 일이 아니라 세세한 일까지도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이 세상과 우주의 관리자로 인간을 만드셨다. 인간은 창조의 청지기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에 대한 바른 관점(세계관)을 가져야 한다. 세상은 우리의 정복의 대상도 아니고 우리의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이 나타나는 광장이다.
3). 세상과 우주를 섭리하시는 하나님
이러한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초월하여서 자족하는 분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는 이 세상 속에 흡수되어 있는 분이 아니다. 18세기 영국의 이신론자들은 하나님은 이 세상을 자동세계처럼 만드시고 간섭하지 않으신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 세상은 자연법칙에 의하여 자동적으로 돌아간다고 보았다. 이신론은 하나님의 내재성을 간과하였다. 이에 반해서 19세기의 낭만주의자들은 하나님이란 세상을 초월하는 분이 아니라 생동하는 자연의 생동력에 내재해 있거나 그 생동력 자체라고 보았다. 낭만주의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간과하였다. 개혁신학은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동시에 인정한다. 기독교 세계관이 고백하고 출발하는 삼위일체적인 유일신 하나님은 그가 창조하신 세상을 내두려 두시지 않으시고 그의 섭리가운데서 이 세상을 은행하시는 주권적인 하나님이시다. 이 세상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은 그러므로 이 세상에 초월하시면서 동시에 이 세상에 내재하시는 변증법적 방식으로 계신다.
하나님은 그가 창조하신 이 세상 속에 활동하시고 살아계시고 만유를 지탱하시는 섭리의 하나님이시다. 창조자 하나님은 동시에 섭리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택하시어 내시고 그에게 만백성의 아버지가 되는 축복을 주시고 약속의 백성의 조상이 되게 하신다. 그리고 그의 후손이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 될 것을 언약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언약을 지키기 위하여 400년 후에 그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내신다. 하나님은 10가지 재앙으로 이집트의 모든 신성한 것들과 신들을 벌하시고 그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신다. 그리고 홍해의 이적으로 바다에 길을 내시어 그의 백성들로 하여금 건너게 하신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스라엘을 언약의 산인 시내산으로 인도하신다. 거기서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시고 그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신다. 이 언약의 문서의 핵심은 십계명이다. 이 십계명의 서문에는 나는 너희를 이집트 종 되었던 곳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밝히신다. 그리고 1 계명, 나 외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2계명, 나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물에 있는 어떤 형상으로도 섬기지 말라. 이처럼 여호와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자요 인간 역사를 그분의 주권으로 이끄시는 분이시다. 그분 외에는 상천(上天)하지(下地)에 어떤 다른 신이 없는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다.
4). 기독교 세계관은 삼위일체 하나님론에 근거.
기독교 세계관은 그러므로 유신론적 삼위일체 하나님론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이슬람의 유일신론과는 다르다. 범신론적 구조를 지니고 있는 단일론과도 다르다. 정신과 물질, 신과 세상을 분리시키는 이원론과도 다르다. 창조주 하나님은 모든 존재 뿐만 아니라 가치와 소망, 목적의 원천이다. 인간도 그의 존재근거와 삶의 가치와 목적을 자기 자신이나 자연환경이나 역사 속에서 찾을 수 없고 오로지 창조주와의 관계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기독교 세계관의 알파와 오메가이다. 이 세상은 존재하기 이전에 하나님의 창조설계에 의하여 “이미 완벽하게 해석되었다.” 그러므로 반틸(Cornelius Van Til)이 말하는 바같이 “우리는 우리기 존재하기 이전에 이미 완벽하게 해석되었다.”2 이 세계에 대한 참된 지식은 창조자요 설계자요 섭리자이신 하나님 안에 있다.
2. 구약성경의 창조론
구약성경은 초월적인 유일신론(monotheism)을 선언함으로써 내재적인 단일론(monism)을 배격한다. 단일론은 하나님을 피조물로 흡수시켜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차이를 무시한다. 근동아시아의 다른 종교들은 신들을 자연현상이나 자연의 거주자들에게 붙어 있는 피조계의 한 부분으로 보았다. 예컨데,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천체들을 신들로 여겼다. 특히 월신과 태양신을 숭배했다. 하늘의 새들의 행동이나 땅 아래 있는 심연(the deep waters)도 신으로 여겼다.3
갈대아 우르에서는 난나(Nanna)를 섬겼고, 이집트 인들은 태양신을 숭배했고, 나일강을 찬미했고, 나일강 주변과 그 안에 있는 생물이나 피조물들을 거룩한 것으로 여겼다. 개구리나 메뚜기도 종교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가축들도 사랑의 여신과 관계되며 우상으로 숭배되었다.4
창세기 기사는 바벨로니아의 창조기사와는 대조적이다. 창세기의 기사는 천체와 물들, 공중의 새와 모든 생명체가 하나님에 의해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며, 그 안에는 신성이 깃들여 있지 않다고 선언한다. 시편기자는 하늘과 땅과 태양과 벼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며,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과 행위와 하나님의 선하시고 인자하심을 증거한다고 노래한다.
출애굽의 기사도 이집트의 신성시된 모든 신성한 것들이 바로가 하나님의 뜻을 거슬리므로 재난을 받게 되었다고 증거한다. 태양빛은 어두워져 흑암이 되었고 나일강은 피로 변하였다. 개구리와 메뚜기는 재난거리가 되었고 가축들의 첫소산은 죽었다.
창조자요 주권자이신 하나님은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그의 초월적 존엄성을 그대로 보이신다. 비록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의 바알신 제의에 동화되는 경우에서라도 하나님 자신은 조금도 그의 초월성과 존엄성을 상실하지 아니하신다. 여호와 하나님은 죽은 가나안의 바알종교의 신들과 대조되었다. 갈멜산상에서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하면서 응답이 없는 신들은 신들은 낮잠을 자고 있다고 비웃는다(왕상18:17-39). 여호와를 섬긴 죄로 사자굴에 던져진 다니엘은 아무런 해를 입지 않았다. 이에 반해서 그를 해치고자 했던 모함자들은 사자굴에 던져지자마자 사자들에 의해 찟김을 당한다. 페르시아왕 다리오(Darius)은 이 사건을 보고는 “살아계신 하나님은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시다”(단6:26)고 찬양한다.
이러한 유일신 하나님은 이슬람교의 유일신 알라(Allah)와는 다르다. 알라는 초월적이며, 역사에 섭리하는 분이 아니며, 존엄만 있지 사랑과 긍휼이 없는 분이시다.
성경의 하나님은 유일신론으로 이원론을 배격한다. 이원론은 하나님과 물질 모두가 영원하다거나, 정신과 물질을 모두 영원하다거나 하나님이 모든 것의 창조자임을 부인한다. 그래서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를 혼동한다. 이에 반해서 유일신론은 하나님이 모든 것의 창조자임을 선언함으로써 하나님과 피조물을 분명히 구별한다.
3. 일반계시를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
그러나 기독교 유일신론은 일반계시를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다른 종교의 주장이 완전히 잘못되었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사도바울도 아테네의 아레오바고에서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행17:30상)라고 타종교의 역할을 인정하였다. “알지 못하던 시대”란 기독교가 전파되기 이전의 시대를 말하며, 바로 타종교의 시대를 말한다. 그러나 이 타종교의 시대는 끝났다고 바울은 말한다: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행17:30하).
브루너가 말하는 바 같이 타종교는 계시의 결핍이요, 부분계시이며, 그리스도 계시는 타종교의 심판이요 동시에 충족이시다.
그러나 성경의 초점은 일반 계시를 통한 하나님 인식이 아니며, 생물학이나 지리학이나 연대기를 우리들에게 알려주는 것이 아니다. 성경의 초점은 종교학도 아니라 바로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인류의 구속“이다. 바울은 아레오바고에서 다음같이 설교한다: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서를 주셨음이라“(행17:31)
4. 기독교 창조론의 8가지 특징
우리는 삼위일체론적 유일신론에 기초한 기독교 창조론이 갖는 8가지의 특징을 다음같이 말할 수 있다. 신론에 입각한 창조론은 자연과학에 입각한 창조론과는 다른다. 후자는 자연과학의 물리적 자료를 기초로 하여 하나님의 창조론을 증명하고자 한다. 이에 반해서 전자는 하나님의 계시된 성경에 근거한 계시적 신앙에 입각하여 하나님의 창조를 드러내는 것이다.
1).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
창1:1은 무로부터의 창조를 선언한다. 이 유일신론은 단일론과 이원론을 배격한다; 히브리서11:3,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은 것으로부터 만들어 졌다”고 증언한다. 하나님만이 모든 존재하는 것의 원천이다. 하나님 외에 어떤 영원한 물질이나 정신이 있지않다.
하나님은 피조물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이원론이 말하는 것 처럼 피조물에 의존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외부의 어떤 강요로 인하여 창조하셨던 것이 아니다. 내면적인 필연성에 의하여 창조하신 것도 아니다. 단지 만물은 단지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적인 의지에 따라서 창조하신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창조주 하나님은 네가지 함의를 갖는다.
첫째, 하나님은 피조계와 구별된다. 그는 피조계의 한부분도 아니고 피조계가 그의 한 부분도 아니다.
둘째, 피조물과 질적으로 다른 분이시다. 그는 영원자존적인 분으로서 피조물에 의존하지 않으시다.
셋째, 주권적으로 활동하신다. 그는 피조물이 그에게 의존하므로 그에게 독자적이다.
넷째, 초월적이다. 그는 항상 피조물 가운데 계시나 그 피조물 속에 흡수되지 않으시고 초월해 계신다.
2). 지속적인 창조(creatio continua)
하나님의 창조는 두가지 측면을 가진다. 하나는 존재적 창조이고, 다른 하나는 보존적 창조이다. 전자는 없는 것을 있게 한 창조이며 이것은 일회적이다. 후자는 창조된 세계를 지속적으로 돌보시는 창조이다.
하나님은 창조하신 세계의 실존유지를 위하여 지속적으로 관여하신다. 이 피조 세계는 하나님에 의존해서만 존재하기 때문에 스스로는 자기 유지를 할 수 없다. 하나님은 그가 창조하신 세상의 질서를 유지하시며, 섭리적인 배려를 하시며, 타락한 세상의 구속을 섭리하신다. 하나님은 구속적 섭리를 통해서 옛 창조와 새 창조를 돌보신다.
출애굽기에 모세에게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신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출3:14)이다. 이 말은 “존재한다” 라는 히브리어의 하야(hayah)(존재한다}에서 나왔다. 이 말의 뜻은 에띠엔 길송(Etienne Gilson)이 해석하는 바 존재의 본질이라는 형이상학적 주장이 아니다.5 이 말은 머레이(John Courtney Murray)가 해석하는 바같이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존재하시며 우리와 함께 하시는 전능자라는 약속이다.6
3). 인격적인 목적론: 무제약적이며 선하신 창조
하나님의 창조는 전적으로 무제약적인 그분의 인격적인 의지에서 나온 것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충족하시며 필요를 느끼지 아니하시고, 자신의 만족 외에 어떤 것도 요구하시지 않으신다. 그는 내부나 외부의 강제성에서가 아니라 스스로 인격적인 목적을 가지시고 창조하셨다. 그의 선택은 마구잡이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목적을 지니신 것이다. 무로부터의 창조와 지속적인 창조행위에 있어서 하나님은 변덕스러운 분이 아니라 동일하신 선하신 목적을 지니고 계신다.
이 창조는 몰트만이 그의 저서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말하는 것 처럼 고난의 필연성에서 나오는 것처럼 해석되어서는 않된다.
역사는 전체의 목표나 궁극적 목적이 없이 끊임없는 순환으로 이어지는 희랍의 시간이 아니다. 역사는 목적을 추구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행위이시며 그의 은혜로우신 목적 실현의 장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창조론은 목적론적 창조론이다. 이 우주는 힌두교나 불교가 말하는 바 비인격적인 존재가 역사 안에서 그 존재를 이루어가는 비인격적인 목적도 아니다. 오히려 이 우주는 초월적인 창조주께서 자신의 선하신 목적을 이루어가시는 인격적인 목적을 갖고 있다.
4). 자신 밖으로 창조(creatio ad extra)
하나님은 “자신 밖으로” 창조하신다. 그는 자신의 피조물에 독자적인 실재를 부여하고 그것에게 권력을 위임하신다. 이것이 바로 창조의 명령(creation mandate)이다. 하나님은 일반 은총으로서 그의 피조물들에게 정치, 경제, 예술, 언어, 문학 등 각종 영역에서의 재능과 권력을 부여하시고 문화적 활동을 하도록 하신다. 그러므로 피조물은 의존적이고 부수적이며, 유한한 실재이다. 이에 반해서 하나님은 독자적이며, 원천적이며, 무한한 실재이다. .하나님은 일반 섭리 가운데서 그의 창조적 사역을 행하신다. 그러나 특별섭리를 통해서 그의 섭리를 이루신다. 예컨대, 이스라엘의 선택, 가나안으로 인도하심, 유배생활, 귀환 등에서 그의 특별하신 뜻을 이루신다. 그러나 어느 것도 변덕스럽게 일어나지 않는다.
5). 창조의 질서정연함
하나님은 그의 창조세계를 그의 일반적 섭리에 따라서 창조하셨다. 때문에 창조세계는 질서정연하다. 하나님은 로고스에 따라서 그의 창조세계를 지으셨다. 그러므로 창조세계는 우주법의 영역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등 각 영역의 법들이 있다. 이것들은 영역주권을 가지고 서로 다른 것으로 환원될 수 없고 혼동될 수 없다. 그 고유한 영역의 주권과 질서는 지켜져야 한다. 화란의 기독교 철학자 도이에베르트(Herman Dooyeweerd)는 이 다양한 법 영역(law spheres)이야말로 우주법(cosmic law)의 영역이라고 보았다. 그것들은 궁극적으로 창조주에 귀일되며, 학문적 탐구의 영역이다. 창조의 각 영역은 그 자체 영역주권을 가지고 있으며 이 영역의 본질적인 법(essential laws)은 모든 이들을 규제한다.7
요한복음은 이러한 하나님의 창조의 법을 로고스라는 단어로서 표현하고 있다.(요1:1-4). 여기서 사도 요한은 로고스 개념을 그리스도의 인격과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와 밀접히 연결시키고 있다. 요한은 당시 헬라문화의 로고스개념을 기독교적으로 사용하였다. 헬라클리투스(Heraclitus)는 비인격적인 로고스가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에 합리적 질서를 부여한다고 보았다. 스토아 학자들은 모든 생명체 안에 적은 로고이(logoi)를 통해서 다스리는 우주적 로고스(cosmic logos)에 대하여 말한다. 필로(Philo)는 이 우주적 로고스가 하나님에게서 유출된 것이며, 그것은 종속적인 신이라고 본다.
교부들은 이러한 로고스 전통 속에 확고히 서 있었다. 이러한 로고스 개념은 기독교 교리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아리안 논쟁(Arius controversy)에서 아리우스는 그리스도가 성부와 다른 본성(heterousios)을 가졌다고 말하는 자와 같이 유사한 본성(homoiousios)을 가졌다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로고스인 그리스도의 온전한 신성이 부인되었다. 니케아 회의는 로고스인 그리스도가 성부와 동일본성(homoousios)임을 확인하였다. 로고스인 성자의 본성이 성부와 동일본성이 아니면 하나님과 피조계의 모든 관계는 중개적인 존재에 의해서 혼동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은 더 이상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니므로 우리의 구속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6). 모든 가치의 근거로서의 창조의 목적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그의 창조물 보시고 “좋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이 창조에 대해 가치판단을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는 그의 목적대로 지으졌다. 그,러므로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창조목적은 가치의 근거이다. 이것은 창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긍정이다. 이것은 물질적인 것에 대한 플라톤적 경시나 동서양의 신비주의의 현세부정적 태도와 대조를 이룬다. 이처럼 창세기의 창조교리는 세상과 인생을 낙관적으로 보게해 준다. 어떠한 비관주의도 자리잡고 있지 않다.
악과 고통은 하나님의 창조 내에 자리잡고 있지 않다. 하나님은 악행을 행하지 아니하셨고, 피조물을 악하게 만드신 것도 아니다. 그런데 선하게 창조된 세계에 악이 발생한 것이다. 종교개혁적 전통은 자연적인 악과 도덕적인 악을 구별한다. 이 두가지 악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아니라 피조계 안에서 발생한 것이다. 뱀의 유혹과 이에 반응한 인간의 불순종에 의하여 악이 존재론적인 관점에서 발생한 것이다. 이것은 풀 수 없는 난제다. 그리하여 자연적인 악과 도덕적인 악이 발생한다.
자연적 악이란 쓰나미, 지진, 태풍, 가뭄, 조류독감, 광우병, 에이즈 등이며, 도덕적인 악은 인간이 저지르는 각종 부정부패와 사회적 악이다. 그러면 이러한 악들은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의 목적 아래서 무슨 의미를 갖는가? 2004년 12월 26일 동남아에서 순식간에 20만명의 목숨을 빼앗아 간 쓰나미(Tsnamie), 2006년 인도와 파키스탄 국경지역에 일어난 지진 등 자연적 악은 우리 인간이 모르는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이 있다. 물론 그것에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경고가 있으며 그것들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기여한다는 선정론(theodicy)을 내포한다. 욥의 경우가 그러하고 나면서부터 소경된자(요 9장)가 그러하고 바울이 가졌던 육체의 가시(고후12:7-10)가 그러하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나님이 더 큰 선을 위하여 악을 허용하시며, 하나님은 고통을 사용하셔서 신앙을 세우신다고 주장하였다.8
도덕적인 악은 자유로운 주체인 인간이 저지르는 것으로 그에게 책임이 있다. 성 어거스틴이 그 대변자이다.9 도덕적인 악을 허용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인가? 우리는 일반은총과 초월적 목적을 그 해답으로 발견할 수 있다.10
첫째, 일반은총을 통해 하나님은 악을 제한하신다.
둘째 악이란 하나님의 초월적 목적에 기여한다. 악에 대한 기독교적 접근은 인간 중심이 아니라 신중심적이다. 인간의 최고 선이란 인간의 복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을 섬기는 것이다.
악이 어떻게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가는 우리 인간에게는 항상 깨달을 수 없는 수수께기로 남을 수 있다. 이러한 유익이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나타나지 않으며 전혀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유익을 주시는 자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인간 편에서 악의 문제는 욥의 문제처럼 항상 미종결로 남는다. 인간은 이 역사에서 자기의 삶의 시간과 공간에서 나왔다 사라지는 연기자이다. 역사의 드라마는 하나님이 주관하시며 그의 선하심으로 목적을 지닌다. 그는 주권적이므로 악은 궁극적으로 그의 선하신 목적에 기여한다.
7). 창조명령(creation mandate)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문화적 명령을 주셨다. 인간은 창조세계에서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질서와 만드신 것의 선한 가능성을 발견야야 하는 사명을 부여받았다. 인간은 이 창조세계에서 일하는데 주인이 아니라 청지기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창조세계에서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사용하면서 학문과 예술, 노동, 경제활동, 기술활동을 하여야 한다. 창조세계는 하나님의 창조명령을 실천하는 주권적 영역이기 때문에 성과 속, 가치와 사실, 하나님의 목적과 사람의 목적이 분리될 수 없다.
8). 하나님의 왕국과 새 창조(구속)를 위한 섭리
창조와 역사는 하나님의 나라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창조주는 성자 그리스도의 왕국과 연결되어 있다. 창조는 “그리스도에 의하여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만물이 그 안에서 선 것이다”(골1:16, 17). 이 세상과 역사를 이루는 것은 비인간적인 자연이나 자의적 운명이나 인간의 고안이 아니라 역사 안에서 그의 초월적인 목적을 실천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이다.
각주
- 'Nicholas Wolterstorff, \ [본문으로]
- Cornelius Van Til, The Defense of Faith, Revised 3. Edition (Philipsburg, N. J: P & R, 1967), 4o.-45, 신국원역, 변증학, 기독교문서선교회, 57, 63 [본문으로]
- Helmer Ringgren, Religions of the Ancient Near East (Philadepphia: Westminster Press, 1977) [본문으로]
- Henry Frankofrt,Ancient Egyptian Religion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48) [본문으로]
- Etienne Gilson, God and Philosophy (Bloomington, IN:Indiana University Press, 1941), chapter 2 [본문으로]
- John Courtney Murray, Problem of God, Chapter 1 Claude Tresmontant, Christian Metaphysics (London: Sheed and Ward, 1965), Arthur Holmes, op. cit.,95 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 Herman Dooyeweerd, Roots of Western Culture (Toronto: Wedge Publishing Fundation, 1979), chapter 2 [본문으로]
- Thomas Aquinas, Summa Theologica, I,48-49 [본문으로]
- Augustine, On Free Choice of the Will, Alvin Plantinga, God, Freedom and Evil (New York: harper & Row, 1974), C. S. Lewis, The Problem of pain (London: Geoffrey Bles, 1940; New York: Macmillan, 1962) [본문으로]
- Arthur Holmes, op. cit.103-104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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