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학

[스크랩] 네비우스 선교방법이 한국 교회성장에 미친 영향 <2> (김영재)

수호천사1 2010. 5. 22. 16:29

네비우스 선교방법이 한국 교회성장에 미친 영향 <2>

 

4. 순회전도


선교사들은 네비우스가 특히 강조한대로 순회 전도를 열심히 했다. 순회전도가 네비우스 선교방법의 특징처럼 얘기되는데, 이는 초기 개척 선교사에게는 너무 당연한 일이다. 언더우드는 이미 1887년부터 혼자 전도 여행을 시도했으며, 1888년에는 아펜젤러와 함께 전도 여행을 떠났다. 이들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도시와 농촌을 가리지 않았고 개척자로서 한국의 지리와 풍습을 익히고 정리해서 후배 선교사들에게 남기기 위해 더욱 힘을 기울였다. 한국 문화에 특히 관심이 많았던 게일(J. S. Gale)은 1889년에서 1897년까지 8년 동안 계절을 불문하고 매번 다른 길로 한반도를 12번이나 돌았다. 1915년 보고에 따르면 무려 25번이나 전국을 다녔다고 한다. 「한국평론」(Korea Review)에 기고한 선교사들의 글을 보면, 한국의 역사와 문화 및 관습을 연구하려는 그들의 왕성한 의욕과 예리한 통찰을 엿볼 수 있다. 이들이 쓴 글은 한국학 연구에서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큰 결실은 복음이 전국에 확산되었다는 것이다. 1890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 서기 엘린우드(F. F. Ellinwood)는 한국은 특정 지역에 많은 힘을 투입하기보다 전도의 범위를 넓히고 전국에 전도소를 두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자유롭게 선교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자 선교부는 그 정책에 따랐다. 1930년의 통계에 따르면 인구의 73%가 농촌에 거주했는데, 전도소 수는 도시에 225개, 그리고 전국에 7,000개나 있었다.

5. 선교지 분담 정책


선교사들의 문화와 교육 및 의료사업 활동은 대체로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전도활동과 교회 정책은 여러 가지로 비판을 받고 있다. 그 중에서도 장로교의 특징적 선교정책이었던 ‘선교지 분할’은 지역 감정의 골을 깊게 하고 한국 교회의 지방색을 더욱 짙게 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19세기 선교는 열강의 식민지 분할 및 확장과 동시에 이루어졌다. 유럽 선교사들은 대체로 자기 나라가 개척한 식민지에서 활동했으므로 ‘선교지 분할’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한국에서 이루어진 선교지 분할 정책은 이익에 따라 지역을 나눈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선교사들은 공동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예의를 지키며 지역을 정리했다는 점에서 ‘분담’이 적합하다.


1893년 장로교 공의회는 소속이 다른 선교사들이 불필요하게 경쟁을 하거나 같은 일을 되풀이하는 수고를 덜자는 취지에서, 또 한국에 하나의 장로교를 세워 함께 선교하기 위해 선교지역을 나누어 담당키로 했다. 그래서 북장로교 선교회는 관서지방, 캐나다 선교회는 함경도 지방, 호주 선교회는 영남지방, 남장로교 선교회는 호남지방을 각각 담당했다. 또 미국 북장로교와 북감리교 선교회도 선교지 분담을 합의했다.


(1)인구 5천이 넘는 도시, 개항장이 특별히 필요하다고 인정된 곳은 예외로 한다.
(2)인구 5천 미만인 지역은 선교사가 1년에 2∼4차례씩 방문하는 전도소를 두며, 교인들이 정기적으로 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는 곳에는 다른 선교회가 들어가지 않는다.
(3)6개월 간 기능이 정지되면 자유롭게 그 지역에 들어가 전도할 수 있다.

장로교 내부에서, 또 장로교와 감리교 간에 이러한 분담이 가능했던 이유는 선교사들이 열린 마음을 가지고 서로를 복음전도자로 신뢰했기 때문이다. 또 장로교나 감리교나 기존에 교구제도에 익숙했기 때문에 이 일이 가능했다. 어쨌든 초기 한국 선교회 교파 상호간의 선교지 분담 정책은 협력선교의 좋은 예가 된다. 수많은 교단과 교파가 분열하고 개교회가 어지럽게 경쟁하는 오늘날 한국 교회는 이 역사를 깊이 되새겨야 할 것이다.

6. 성경공부와 신학교육 정책


토착 교회의 자립을 위해서는 목사 후보생 교육과 목사 장립이 선결 과제이다. 언더우드는 1888년부터 그의 사랑에서 여덟 명의 청년들에게 기독교 교리와 함께 성경공부를 가르쳤는데, 선교부에는 이를 ‘단기 신학 교습’이라고 보고했다. 1890년부터는 ‘보통 성경공부반’, ‘지역 성경공부반’, 교회 직분자를 위한 ‘고급 성경공부반’, 장차 신학 교육을 받을 사람들을 위한 ‘특별 성경공부반’이렇게 네 단계로 나누어 실시했다.11)


1891년, 장로교 선교사들은 성경공부를 필수로 정했다. 성경공부에 참석하는 교인 수는 전체 교인 증가와 병행했다. 헌트(W. B. Hunt)는 남녀 노소를 막론하고 교육 유무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이 성경공부반을 거쳤다고 기록했다. 1904년의 보고에 의하면, 학습교인의 60%이상이 하나 내지는 둘 이상의 성경공부반에 참가해 교육받았다고 한다. 1909년에는 북장로교 선교 구역에만 해도 약 800의 성경공부 반이 있었다. 여기에는 세례교인의 두 배가 넘는 5만 명이 참석했다.12)


1896년, 남장로교 레이놀즈 선교사는 목사 후보생의 일반 교양교육이 필요함을 역설했으며, 1987년 스왈론 역시 같은 주제의 글을 발표했다.13) 1901년 장로교 공의회는 신학교 설립을 결정하고 1902년 개교해 1907년에 7명의 첫 졸업생을 배출하고 독노회 조직과 더불어 그들을 안수함으로써 명실공히 자립적인 독노회로 출발하도록 했다. 감리교는 1901년에 두 사람을 목사로 안수하고 이어서 매해 한 두 사람의 전도자를 목사로 장립했다. 감리교는 대각성 운동으로 급속히 성장하는 과정에서 목회자를 수급하기 위해 정규 신학 교육을 받지 않은 전도자를 목사로 안수하던 정책이 있었다. 그러나 신학교육이 본격화되면서 장로교와 감리교는 그러한 전통과 상반되게 신학교육을 실시하게 된다.


18세기 중엽, 미국 장로교는 각성운동으로 목회자 수요가 급속히 늘어나자 감리교나 침례교에서 하듯이 단기 신학교육을 받은 사람에게도 목사 안수를 주자는 ‘뉴 사이드’(New Side)와 신학교육은 여전히 철저해야 한다는 ‘올드 사이드’(Old Side)로 나뉜 적이 있었다. 초기 한국 장로교의 신학제도는 올드 사이드 전통을 따랐으나, 교육 내용은 뉴 사이드가 주장한 대로 선교지 실정을 감안해 보다 낮은 수준으로 했다. 그러나 오히려 감리교는 목회자의 질을 높여야 한다고 하면서 올드 사이드 입장에 가까운 정책을 폈다.


교과과정의 편성을 보면, 장로교는 성경을 비롯한 신학에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한 반면 감리교는 교양 과목에 거의 절반의 시간을 할애했고, 장로교에 비해 소수 정예교육을 실시했다.14) 목사 후보생의 수적인 차이는 후에 교세차이를 가져온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동시에 이미 교세가 차이 났기 때문에 목사 후보생 수도 달랐다고 볼 수 있다. 감리교는 소수정예와 교양교육을 지향한 반면, 장로교는 성경지식과 경건에 치중했음을 알 수 있다. 장로교는 지식보다 경건에 더 역점을 두어야 한다는 네비우스의 견해에 공감했다. 오늘날 신학교들은 지식과 경건의 균형을 강조하지만, 초기 선교 단계에서는 경건에 더 역점을 두었다. 한국 교회는 많은 지식을 갖추지는 못했으나 신앙이 두터운 목사들과 봉사자들을 통해 크게 발전했다.15)

7. 사회 계층에 차별적으로 대응한 선교 정책


선교사들이 상류층보다 근로층에 우선을 둠으로써 양반층이 기독교를 적대시하게 되었고, 교회가 양반층을 소홀히 하다 보니까 양반층에 의해 전수되는 전통문화도 소홀히 다루게 되었다.16) 독일 선교학의 아버지 구스타프 바르넥(Gustav Warneck)은 선교방법을 논하면서 선교는 온 국민을 대상으로 해야 하고 하층만을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했다. ‘건전한 국민층’(die gesunden Volkselemente), 즉 상류층과 중산층이 교회 설립에 필요하기 때문이다.17) 이 원칙은 선교의 과제를 위해서 뿐 아니라 선교의 목적을 위해서도 이상적이다. 바르넥에게 선교의 과제는 온 국민을 기독교인으로 만드는 것이며 선교의 목표는 교회를 설립하는 것이었다.18)


복음은 특정한 그룹이나 계층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고 만인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피선교국이 사회 계층간 격차가 클수록 이 이상적인 선교원칙을 적용하기 어렵다. 아마도 그래서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하류층 선교에서 활로를 모색한 것 같다. ‘먼저 하류층에’라는 원칙은 이상적인 것이 못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그것이 실제적이었다. “일본 사람들은 기독교를 지적인 결단으로 받아들였으나 한국은 거리나 시장, 시골에 있는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는 어린아이와 같이 신뢰하며 열광적으로 받아들였다”19)


한국의 양반사회는 이미 17세기 이후부터 몰락하기 시작했으며 19세기에 와서는 거의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다. 즉 권력을 가진 소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계층에 동화 되고 말았다. 동학농민전쟁, 일제 침략을 경험하며 양반층은 완전히 몰락하고 말았다. 로마 카톨릭도 처음에는 정치권력으로부터 도태되었던 양반층 시파를 대상으로 선교를 시작했다. 그러나 심한 박해로 이 양반 그룹이 거의 말살되자 주로 하류층을 대상으로 선교했다. 실제로 양반층은 유교적이며 보수적인 문화전수자로서 기독교뿐 아니라 모든 개혁 또는 개화운동에 반대했다. 개신교 역시 이러한 양반층에 복음으로 접근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상류층을 배제하지 않았다. 그들은 왕실의 총애를 받았으며, 상류층 출신의 많은 지성인들을 얻었다. 유교 양반 전통이 강한 남부 지방보다 북부 지방이 훨씬 빠르고 왕성하게 복음을 받아들였다.20) 선교사들이 학교를 세워 교육사업을 시작한 것은 유교적인 양반을 회심시키는 대신 새로운 지식층을 양성하는 결과를 낳았다.

맺는 말


처음부터 한국 교회는 재정 자립을 이룩한 교회로 시작했다. 조직적인 성경공부가 이루어졌으며 선교사와 사역자 뿐 아니라 초신자들도 열심히 전도했다. 1904∼7년에 일어난 대부흥은 성경공부와 기도 생활에서 얻게 된 선물이다. 선교가 시작된 지 불과 10년 만에 신자 수가 불어나기 시작해 1900년부터는 급속도로 성장했다.


그리고 20년이 지나 장로교는 선교사들로부터 교회의 치리권을 넘겨받았다. 감리교는 남북 선교부 아래 있던 교회들이 1930년 하나의 감리교회로 출발하면서 한국인 감독이 치리하는 교회로 출발하게 되었다. 1915년부터 감리교는 신학교육에 한국인 교수가 참여했고, 장로교는 30년대 초부터 참여했다. 초대 선교사들의 선교 활동은 다양했는데, 한국 교회는 주로 선교사들의 전도활동을 넘겨받아 전도하는 교회로 발전했다.


선교사들의 관심과 기여는 다양했다. 한국 교회는 선교사들이 한국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기여한 것을 충분히 계승하지 못해 유감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일제 식민지로 말미암아 참여할 사회를 상실했고 늘 생존을 염려하는 처지였다. 선교사들은 복음 전파와 교회의 설립을 위해 본국 선교부가 우려할 정도로 한국의 역사적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다. 식민지 시대를 지나 1950년 대 이후 교회는 분열되었고 보수적 교회는 전도와 선교에만 치중하게 되었다. 1950∼60년까지 구제봉사활동은 계속 선교사들이 맡아 했으며, 신자들은 봉사활동을 한다고 하더라도 주로 개인적인 차원에서 외국 교회의 선교부나 봉사기관의 원조를 받아 했다.


한국 교회의 부정적 현상들을 선교사들의 선교정책 때문이라고 전가시키는 사고는 지양해야 한다. 교육과 사상이 그렇듯이 신앙은 짜여진 틀에 똑같이 찍혀 나오는 공산품이 아니다. 백 년이면 몇 세대가 살고 가는 긴 세월이다. 그 세월에서 얼마든지 변수가 작용할 수 있다.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들포도를 맺었다는 이사야의 탄식이나 가라지 비유가 그것을 말해준다. 한국 교회가 보여주는 부정적 모습의 원인은 선교사들 때문이라기 보다 우리 민족이 경험한 역사적 과정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한국 역사는 일제의 식민통치와 한국전쟁, 독재정치가 시작된 흔적은 있는데 그 끝은 말끔하지 않다. 그것은 교회에도 동일하게 반영되어 교회가 역사를 주도하기보다는 종교의 이름으로 역사 속에서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경우가 더 많았다. 따라서 부정적인 현상의 원인은 초기 선교사들에게 있기보다는 주로 역사의 과정에 있었던 복합적인 사건들과 한국 교회와 지체된 우리 각자에게 있음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1800년대 후반 그리고 1900년대 초에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오늘날로 말하면 후진국에 와서 복음과 서양문화를 전수하며 다양하게 사역했다. 오늘날 한국 선교사가 그대로 모방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머티어가 주장한 ‘옛’방법보다는 네비우스의 ‘새’방법이 훨씬 배울점이 많다. 따라서 네비우스의 방법을 충분히 참고하고 현지 사정을 고려해 융통성 있게 활용하길 바란다. 선교지 상황은 항상 다르기 때문이다.


초기 한국에서 일한 외국 선교사들이 네비우스의 방법을 따른 것 가운데 가장 배울 점은 성경강조와 더불어 ‘선교지 분담 정책’이다. 선교사들이 서로 존중하고 협력하며 복음을 전한 모습은 참으로 배울 점이다. 한국 교회는 수없이 분열돼 일치와 연합을 지향하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 시점에서 파송받은 선교사들이 현지에서 하나의 협의체를 구성해 협력하며 선교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본다. 1945년 이전까지 한국에서 활동한 외국 선교사 수는 1,529명에 달한다. 네비우스 선교정책은 몇 사람에 의해 수행된 것이 아니었다. 이제 한국 교회도 선교사들을 세계 각 곳에 흩어져 고군분투하도록 하기보다 서로 연합하여 하나의 지역을 전략적으로 선교하는 방안을 제안하며 말을 맺는다.

김영재 교수
서울대 문리대를 나오고 현재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중이다.

출처 : 내 사랑 중국 ♡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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