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비우스 선교방법이 한국 교회성장에 미친 영향
들어가는 말
한 사건의 원인은 상당히 복잡하고 다양하기 때문에, 그 사건이 다른 역사적 사건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 한마디로 평가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네비우스 선교방법이 한국 교회성장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도 그 평가가 분분하다. 긍정적 평가도 있지만, 일부는 네비우스 방법 자체가 결함이 있으며, 또 이를 적용하는 선교사들의 실천이 미흡해 부정적 결과를 초래했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어쨌든 네비우스 선교방법은 한국 교회성장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이에 긍정적·부정적 평가가 있음을 염두에 두고 네비우스 방법을 되새기며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1) 본 고는 네비우스 방법을 평가하기 위해 네비우스 방법의 내용과 이를 수용한 선교사들의 태도, 또 적용을 받은 한국 교회의 역사적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찰해 보려한다.
1. 네비우스 방법의 내용
파머 스펜서는 “네비우스 방법은 중국에서는 별로 실효를 거두지 못했으나 한국에서는 교회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했다.2) 그 이유에 대해, 1891년에 내한한 베어드(W. M. Baird) 는 한국 선교사들이 마음을 모아 이를 받아들이고 적용했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밝힌다. 1927년, 베어드는 한국 선교의 성공에는 네비우스의 힘이 컸다고 피력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선교회가 한국에 알맞은 선교방법과 원칙을 찾아 모색하고 있을 때 네비우스의 생각은 선교사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선교사들이 성실하게 기도하며 일치 단결해 이 방법을 따라 선교 일을 한다면 성공할 것임에 틀림없다.”3) 곽안련(郭安連, Charles A. Clark)선교사는 네비우스 선교방법을 적용하는 데 참여했던 초기 선교사의 입지에서 『한국교회와 네비우스 방법』4)을 저술했으며, 그 책에서 한국 교회의 급성장은 네비우스 방법에 기인한다고 했다. 또 그는 네비우스를 선교의 새 길을 연 선지자로도 언급했다.5)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말이 있듯이, 네비우스는 중국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며 그의 가르침을 따르려는 동료도 없었다. 그러던 중 1885년 상하이의 「차이니즈 레코더」(Chinese Recorder)에 실린 글이 1886년 소책자로 출판되었고, 그것이 한국 선교사들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6) 1890년 6월에 한국에 거류하는 7명의 젊은 장로교 선교사들은 네비우스 박사와 그의 부인을 초청해 2주간 동안 같이 지내며 토의했다. ‘선교 정략가들(missionary statesmen)’이라는 탐탁치 않는 칭함을 들을 정도였던 젊은 선교사들은 드디어 네비우스 원리를 선교를 위한 방법론으로 채택하고 과감하게 실천하기로 했다.
여기서 네비우스 방법의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자.
(1)선교사는 널리 순회하며 사람들을 일대 일로 만나 전도해야 한다.
(2)자립전도 : 모든 신자는 남을 가르치는 선생이 돼야 한다. 남에게 배운 사람은 남을 가르치는 일을 더 잘할 수 있다. 신자 각자나 신자의 회는 즉 새·결신자를 막론하고 성경을 배우고 가르쳐야 한다. 교회에 속한 모든 회원은 전도에 힘써야 한다. ‘양식(養殖)하는 방식’으로 전도 사업을 확장해야 한다.
(3)자립정치 : 모든 신자의 회는 무보수로 일하는 이들의 지도를 받도록 한다. 그러나 시찰회는 보수를 받는 조사(Helpers)를 둔다. 이들은 장차 목사가 될 사람들이다. 시찰회 모임은 장차 군, 도, 국가 단위의 지도자가 되도록 인물을 양성해야 한다.
(4)자립경영 : 교회 건물은 신자들 스스로 마련하도록 해야 한다. 신자의 회가 구성되면 곧 시찰회 소속 조사의 급료를 지불하기 시작한다. 학교도 설립 초기에만 부분적으로 보조해야 하며, 개체 교회 목회자는 일체 외국 선교부에서 돈을 받아서는 안 된다.
(5)모든 신자는 자기 회 지도자나 시찰회 조사의 지도 아래 체계적인 성경공부를 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지도자와 조사는 성경공부 반을 체계 있게 가르쳐야 한다.
(6)엄격한 신앙생활을 하도록 하고 성경 중심의 권징을 받도록 한다.
(7)다른 선교단체와 협력해서 일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지역을 나누어 일해야 한다.
(8)선교사들은 소송문제나 그러한 유의 사건에 관여를 삼가야 한다.
(9)그러나 주민들의 경제 문제는 언제나 도와 줄 자세를 가져야 한다.
곽안련은 네비우스의 ‘새’방법과 비교해 ‘옛’선교방법을 요약 소개하였다.
(1)큰 지역 센터 선교사는 전도자들을 고용해 선교 현장으로 내보내고, 직접 나서지 않는 것이 좋다.
(2)신자들은 자기 고향에서 일하고 싶은 욕망이 강하겠지만 그런 소원을 이루어 줄 수 있는 계획은 거의 없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 일반 신자들이 그렇게 일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지 혹은 가져야 하는지 의심해 보아야 한다.
(3)선교사가 돈주머니를 쥐고 있는 한 자립정치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단순한 정도의 자립을 바라는 것이 최선이다.
(4)외국인 기금으로 읍이나 마을에 있는 집회 장소를 사거나 임대할 수 있으며, 이를 관리할 사역자 역시 외국인 기금으로 고용할 수 있다. 돈을 받고 개 교회에 고용된 사역자들은 보조금이 줄어들어도 아무런 대책이 없다.
(5)네비우스가 말한 유의 성경공부반이 한국에서 확장되어선 안 된다. 조직적인 가르침을 별로 강조하지도 않고 성경의 능력을 신뢰하지도 않는다.
(6)교인을 잃을까 두려워 엄격한 신앙 지도를 하지 않는다.
(7)지역 분담을 인정하지 않고 “우리 교회는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한다”는 명목으로 연합만 강조한다.
(8)극단적인 예로 중국 카톨릭은 사제들에게 관리가 가진 권리를 인정해 주기를 요구했으나 개신교는 그런 일이 없었다. 그러나 개신교 선교사들은 선교 초기에 불의를 잡는다는 명목으로 소송에 너무 자주 개입했다.
(9)교회의 유일한 의무는 영혼을 구하는 것이므로 주민들의 경제 생활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네비우스는 산둥(山東)성에서 자기가 주창한 선교 방법을 따라 선교했으나 1886년 7년 만에 포기했다. 곽안련은 8년 혹은 그보다 더 오래 참고 계속했더라면 긍정적인 결과를 보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한다. 네비우스는 약 60개 모임을 돌보고 있었는데, 14년이 지난 후 그 중 36개가 교회를 세워 꾸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옛 선교방법에 따라 운영되고 있었다.
네비우스 선교방법이 중국에서 실효를 거두지 못한 데에는 여러 가지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중국인이 한국인에 비해 자존심 내지는 자립심이 더 강하다든지, 외래 종교에 더 배타적이라든지, 종교심이 덜하다든지 하는 이유는 근거가 없으므로 타당하지 못하다. 보다 합리적인 이유는 당시 한국에서는 기독교가 기울어 가는 나라에 구원의 희망을 주는 종교로 간주된 데 반해, 중국에서는 기독교 종교가 식민주의 침략의 교두보 역할을 한다는 인식이 전반적이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또 한가지 네비우스 방법이 중국에서 실효를 거두지 못한 중요한 요인은 선교사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 네비우스의 동료 선교사 머티어(Mateer)는 ‘옛’방법을 주장하며 네비우스의 방법을 철저하게 반대했다. 심지어 네비우스가 죽은 후 7년 되는 해에는 『네비우스 방법의 재검토(Review of the Nevius Method)』라는 책을 써서 호되게 비판하기까지 했다.
네비우스 방법은 옛 방법보다 시행하기 어렵다. 중국은 한국보다 선교 역사가 오래됐으며 옛 방법이 이미 정착한 상태였다. 게다가 선교사들간 견해도 각각 달랐으므로 이를 적용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한국 장로교 선교사들이 네비우스의 처지를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방법을 한 마음으로 수용해 협력하며 적용한 점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
토착교회의 자립을 강조한다는 것은 네비우스가 새롭게 개발한 방안이 아니다. 윌리암 캐리와 헨리 벤이 이미 말한 바이다. 캐리는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복음을 전해야 하며, 그 나라말로 된 성경을 보급하고 설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비기독교인들의 사상과 그 배경을 깊이 연구하고, 가능하다면 빨리 본토 사역자를 양성해야 한다고 했다. 캐리는 이러한 현대적 선교방법과 선교사의 자립을 제안하고 실천했다.
런던 ‘교회선교회'(Church Missio-nary Society)’의 총무였던 헨리 벤은 1854년 이미 선교는 ‘자립 정치, 자립 경영, 자립 전도’할 능력을 갖춘 교회 설립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선교의 안락사’를 언급했다. 즉 선교지에 교회를 설립하면 선교회는 곧 그 지역에서 죽어 없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선교사들은 즉시 미복음화 된 지역으로 가야하고 세워진 교회는 성령의 인도 아래 기능을 다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곽안련도 네비우스도 전혀 윌리암 캐리나 헨리 벤에 관해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것은 아마도 그들에 관한 정보가 없어서 그런 것으로 추정된다. 여하튼 인도와 중국에서 네비우스 방법과 비슷한 원리가 나왔다는 것은, 이것이 곽안련이 말한 대로 모든 선교지에 필요한 보편적인 선교방법이라는 점이다.
2. 네비우스 방법에 근거한 선교정책 및 그 실효
장로교 공의회는 1893년 회합에서 네비우스 방법에 의거해 아래와 같이 한국 선교 정책을 정식으로 채택했다.
(1)상류층보다는 근로 층을 상대로 전도하는 것이 더 낫다.
(2)부녀자들에게 전도하고 소녀들을 교육하는 데 주력해야 할 것이다. 2세의 교육에는 부인들이 더 크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3)초등학교 교육은 기독교 교육 목표 달성에 매우 유익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사 양성에 힘써야 한다.
(4)장차 한국 목사들도 이 학교에서 배출될 것이므로 이 점을 더욱 유의해야 한다.
(5)사람을 회개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좋은 성경번역이 중요하고도 시급한 과제다.
(6)모든 기독교 서적이나 출판물은 한문을 쓰지 않고 한글로만 쓰도록 한다.
(7)생명 있는 교회가 되려면 자립적인 교회가 되어야 한다. 선교사의 도움을 받는 사람 수는 될 수 있는 대로 줄이고 자급해 세상에 공헌하는 사람을 늘여야 한다.
(8)한국 대중들은 동족의 전도에 의해 믿게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직접 대중들에게 설교하는 일보다 비록 수가 적다 하더라도 한국인 전도자 양성에 주력해야 한다.
(9)의료 선교사들은 환자들과 오래 사귈 때 더 효과적으로 선교할 수 있다. 말하자면 성경 말씀을 가르칠 기회도 얻고 마음을 주고받으며 조언할 수 있다. 치료만으로는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
(10)지방에서 와 치료받은 환자들의 마을로 찾아가 계속 치료해 주며 안부를 물어야 할 것이다. 여태까지 경험으로 보면 사랑으로 치료할 때 전도의 문이 열렸다.
네비우스 방법과 그에 기초한 선교정책의 초점은 토착교회의 행정과 재정의 자립, 또 조직적 성경공부 및 전도이다. 장로교 뿐 아니라 감리교도 네비우스 방법을 따랐다. 아펜젤러는 1890년 첫 사분기 북감리교 선교 보고에서 집사들은 적극적으로 교회 재정을 담당한다고 보고했다. 돈이 없으면 빚을 지지 않기 위해 냉방에서 예배하고, 전도사업에 필요한 문서보급과 말씀 전파가 고무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도 있었다. 무엇보다 이 일들이 무료로 봉사하는 일꾼들에 의해 진행된다는 것과 선교부는 전도사업을 위해 단 한 명만을 고용하고 있다고 했다.7)
선교사들은 한국 교인들이 자력으로 예배당을 짓고 운영하도록 격려했으며 한국 교인들은 기대 이상으로 그 원리를 따랐다. 선천(宣川) 선교지부의 보고에 의하면 1906년 당시 이 지역의 기독교 학교 수는 56개이고 기독학생 수는 1,192명이었다. 그런데 이중 외국 선교회로부터 보조를 받는 학교는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또 이 지역에는 건물을 가진 교회가 70개나 되었는데, 단지 두 교회만 선교회의 보조를 받았다.8) 1910년에는 전국을 통틀어 80%의 교회가 이미 자립했다.
네비우스 방법에 충실해 선교사들이 재정 자립을 이루는 일에는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치리권’을 넘겨주는 데 인색했다는 비판이 있다. 1907년이면 선교를 시작한 지 20년이나 지났지만 선교사들은 목사를 장립하지 않았다. 장로교회가 독노회를 조직한 1907년 보고에 의하면, 당시 장로교 교세는 목사 7명, 장로 53명, 교인이 7만 이었고 그 가운데 세례교인이 1만9천 명이었다.9) 이러한 교세를 감안한다면 독노회 조직은 상당히 늦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교회가 처음 10년 간 더디게 성장하다가 1895년경부터 교인수가 불어나기 시작해 1900년도에 들어서며 급성장했음을 감안해야 한다. 복음에 대한 한국인의 대단한 호응은 미처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선교사들은 한국의 지성인들과 애국자들이 정치적 동기에서 교회를 찾는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들 중 많은 수가 애국과 신앙을 조화시키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한국인에게 치리권을 넘겨주기 힘들었다. 선교사들은 교회 자립을 투쟁을 통해 식민주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정치적인 독립과 동일시해서는 안 되며, 저항과 투쟁하는 민족운동과 선교와 교육을 통해 성장하는 교회운동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로 선교사들이 한국 교회의 재정적 자립은 독려했으나 영적으로는 계속 지배하려 했다는 비판이 있다.10) 그 예로 한국인 전도자에게 설교는 허락됐지만 성례 집행은 허락되지 않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외국인 선교사와 선교지 교인의 문제가 아니라, 목사와 평신도라는 교회론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치리와 말씀, 성례 집행은 개혁주의 신앙고백이 규정하는 목사의 중요한 직무이다. 교회 자립을 위해서는 사역자 양성이 중요하지만 이는 단 시일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세 번째로 많은 사람들이 한국 교회의 개교회주의 성향을 네비우스의 교회 자립 경영 정책의 영향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감리교회나 장로교회나 교구 교회로 성장해 왔다. 장로교는 1950대 초반까지 시찰회와 노회가 감독기관으로서 그 기능을 다했다. 요즘 말로 하면 교회를 개척할 경우, 지교회는 기도소를 설치해 장로나 집사를 불문하고 그 지역에 속한 교인들로 하여금 기도소에서 집회를 갖도록 해 교회로 성장하도록 했다. 예배당을 건축할 경우는 시찰회와 노회가 이를 도왔다.
한국 교회가 개교회주의 성향을 띠게 된 것은 교회 분열로 인해 교단간에 교세 확장 경쟁을 시작하면서 부터다. 1950년 한국전쟁 이후 피난 교인들의 교회와 더불어 무지역 노회가 생겨난 것도 하나의 요인이다. 산업화 과정에서 농촌 인구가 도시로 이주하고 신도시가 조성되면서 교인들은 설교자를 찾아 이동했다. 그러면서 대형교회가 형성되고 이 과정에서 개교회주의 성향도 심화되었다.
3. 성경 번역과 문화 사업
우리 말 성경 번역은 만주와 일본, 국내에서 1800년대 후반부터 시작되었다. 만주에서는 1870년대 스코틀랜드 선교사 로스와 맥킨타이어가 한국 청년들의 도움을 받아 시작했다. 1883년 일본에서는 미장로교 선교사 낙스와 감리교 선교사 맥클레이가 이수정에게 성경을 번역하도록 했다. 1887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성경위원회를 조직하고 그 아래 성서 번역 위원회를 두어 한국어 성경의 번역과 개정, 출판 및 반포를 맡도록 했다. 성경 번역과 기독교 문서활동을 위해 한글을 발굴하고 사용한 일은 신앙 전파를 위해서 뿐 아니라 한국 문화 창달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1890년 경 대한 제국이 문호를 개방하긴 했지만 아직 선교사라는 신분은 입국이 허용되지 않았다. 1984년 최초로 입국한 헤론과, 언더우드, 아펜젤러, 그 뒤를 이은 스크랜튼 가족은 의사 자격으로 입국했다. 이들은 서울과 지방 각처에 병원을 세우며 정부의 방역사업을 지휘함으로써 왕실을 비롯한 유력자들의 호의와 국민들의 신뢰를 얻었다. 동시에 선교사들은 배재, 이화, 경신, 정신, 고등교육기관으로 세브란스 의학교를 세워 교육을 실시했다.
선교사들은 서양 의학, 서구교육제도, 청년운동과 여성운동, 서양 음악과 스포츠에서부터 과수원 재배법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지식과 서양의 문물을 한국에 도입했으며 교회는 그 통로가 되었다. 기존 문화와의 갈등이나 조화에 대해 선교부가 공식 입장을 표명한 적은 없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개인적으로 전통문화를 보존하는 일에 배려를 했다. 신교육이 학생들을 서양화하는 교육이 아니므로 한국인은 정체성을 보존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찬송가도 한국 가락에 맞춰 부르도록 배려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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