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학

[스크랩] 예배가 이렇게 되어도 좋은가?

수호천사1 2010. 4. 22. 14:49

예배가 이렇게 되어도 좋은가?
글/이인규 권사


 한국에는 목회자가 너무 많이 배출되고 목회는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대형교회를 선호하는 교인들은 상가건물에 세를 얻어 시작하는 개척교회를 외면한다. 목회를 처음 시작하는 목사가 대중설교에 타고난 카리스마를 발휘하기도 쉽지 않다. 몇 년 동안 목회를 했지만, 고작 교인은 두 자리 숫자에 머무르고 있으며, 선교는커녕 목회자 개인의 생활비조차 어려운 교회가 대다수인 것이 현실이다. 이것이 개척교회를 시작한 목회자들의 현실이며 고충이다. 이러한 경우 목회자는 새로운 목회방식을 시도하는 경우가 많다. 이중에는 소위 기적과 표적을 강조하는 열광주의를 표방하는 부흥집회를 시작하는 목회자들도 있다. 소위 기복적인 축복성회, 은사 남용주의와 특별 신유집회가 열리게 된다.

 자극적인 집회를 계속하다 보면 좀더 자극적인 것을 시도하게 된다.

이제 웬만한 신비적 현상은 평범한 것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이제는 집회 중에 금가루, 금이빨, 쓰러짐, 춤, 웃음과 같이 특이한 현상적 예배가 등장하기 시작하였고, 너도 나도 천국·지옥 간증을 하게 되었고, 무당과 같이 교인들의 점을 쳐주는 교회가 등장하였고, 이제는 사람이 벽을 뚫고 나갈 수가 있다고 하며, 잘려진 다리가 자라난다고 하며, 죽은 사람이 수십 명 수백 명이 살아났다고 선전을 한다. 그 정도가 아니면 기적으로 쳐주지도 않기 때문이다. 목회의 방법과 목적은 오직 수적 부흥으로 나가게 된다.

 이미 몇몇 교회는 말씀을 잃어버렸다. 몇몇 교회는 그 본질과 사명인 ‘믿음과 영생’을 잊은 지 오래 되었고, 이미 예수의 십자가 대속을 잊어버린 교회도 있다. 몇몇 목사들은 능력있는 CEO가 되고 있으며, 기적과 표적을 보여주는 용한 무당들의 굿판을 벌이고 있다. 이제 쥐의 내장을 터트리는 장풍과 같은 성령불이 등장하고, 공상과학소설에 나오는 바이로케이션(한 사람이 두 장소에 동시에 나타나는 것)이 등장한다. 예수님이 예배시간에 춤을 추는 것을 흡족하게 감상한다는 간증도 나오고, 예수님이 빨간 스포츠카를 타고 나타나고, 천국에서는 수백, 수천 평의 맨션에서 살게 된다는 간증도 나온다. 일부 교회에서는 예배시간은 이미 성경이 필요가 없으며, 바닥에 깔아놓은 스티로폼에 쓰러지고, 넘어지고, 뒹굴고, 소위 거룩한 웃음소리라는 것과 짐승소리가 등장한다.

 또 필자는 1억원이라는 돈이 필요하면 그 1%인 100만원을 먼저 헌금하라는 어느 여자 목사의 부흥회 설교를 직접 들었는데, 100배 장사라고 하면서 입술로 침을 튀고 있었다. 물론 한국 기독교 전체가 이렇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아직도 어려운 환경에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붙잡는 신실한 하나님의 종들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필자는 알고 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표적과 기적을 강조하는 일부 엉터리 목사들에게 미혹되지 말아야 하며, 소위 영성운동이라는 조작된 용어에도 미혹되지 말아야 한다.

 예배란 헬라어로 "프로스퀴네오"(worship)라고 한다. 그 정확한 개념은 "존경을 나타내다" 혹은 "최상의 가치를 돌리다"라는 뜻이다. 즉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께 존경을 나타내는 경건과 의식을 뜻하며, 최상의 가치를 하나님께 돌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참된 예배란 예수님을 잘아는 것이고 예수님이 영광받아야 하는 것이다.요한복음 4장을 보면, 사마리아 수가라는 곳의 우물가에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과 다음과 같은 대화를 하신 것으로 기록돼 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요 4:20).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배를 그리심산에서 해야만 하는 것으로 알았고, 유다 족속은 오직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서만 예배를 해야하는 것으로 알았다. 그래서 여인은 예수님께 예배를 어디서 하는 게 옳은가 질문한 것이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께 ‘예배의 장소’에 대해서 질문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장소가 아니라 ‘예배의 방법’에 대해서 말씀해 주신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3∼24).

 ‘신령과 진정’이란 말은 (in spirit and in truth)라고 영어로 번역이 되었는데, “성령 안에서” 그리고 “진리 안에서” 예배하라는 뜻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러한 예배를 드리는 예배자를 찾으신다는 것이다. 즉 예배의 장소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예배의 방법이 중요한 문제라는 뜻이다. 신령과 진정으로 하는 예배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과연 오늘날 몇몇 교회가 행하고 있는 그러한 무질서하고 기적과 표적의 현상만이 난무하는 집회가 소위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예배인가?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예배는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산제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로마서 12장의 삶자체가 예배이다. 또한 성령 안(in Spirit)에서 드려지는 페리코레시스적인 영적 예배와 영적 교통을 말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되는 진리 안(in Truth)에서 드려지는 올바른 예배를 말한다. 누구보다도 가장 많이 기적과 표적을 행하셨던 예수님 자신이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다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마 24:2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마 12:39).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막 8:12).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눅 11:29).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요 4:48).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며 권능을 행하던 소위 선지자들에게 예수님은 이와같이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3).

 물론 일부 목사들이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영성운동은 성령과 전혀 관계가 없으며, 그들은 표적과 기적의 현상만을 중요시할 뿐, 진리의 말씀을 외면하는 경우가 있다. 아마 그 목사들은 기적과 표적을 강조함으로서 숫적인 부흥을 일으키는 것이 교회의 본질적인 목적으로만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부흥(復興)이라는 국어사전적인 의미는 명사로서 “쇠퇴하였던 것이 다시 일어남”을 뜻한다. 또한 “부흥”(revival)이라는 신학적인 개념은 원래 “회복, 복원”을 의미하는데, 마틴 로이드 존스는 “부흥이란 영광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이고, 그분께로 돌아가는 것이며, 그분께 기도하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런데 부흥이라는 단어를 “교인 숫자가 늘어나는 것”으로 알거나 “교회에 헌금이 많이 들어오는 것”으로 이해하는 목사들도 간혹 있고, 더욱이 “다른 교회의 교인들이 자신의 교회로 수평이동하는 것”을 부흥으로 이해하는 목사들조차 있는 것 같다. 특히 기적과 표적을 강조하고, 과대 선전을 함으로서 교인수를 늘리려는 시도는 부흥이 아니다. 그들이 말하는 예배는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목회 성공주의의 한 수단이 될 뿐이다.

 "성령의 부흥"이란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전권적인 행위이며 성령께서 직접 개입하시는 질적인 변화”라고 정의된다. 실제로 18세기 영국에서 웨슬레에 의하여 성령부흥운동이 일어났을 때에, 술집이 스스로 문을 닫고, 악인들과 범죄자들이 단지 설교 말씀을 듣는 것으로 회개를 하는 일이 일어났으며, 나아가서는 영국 사회 전체가 변화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던 것이다. 다시 말하여 단순히 교인 숫자가 늘어나는 숫적인 변화만이 부흥이 아니며, 내면적인 질적인 변화를 포함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참된 부흥이란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해짐으로서 나타나는 현상, 즉 하나님께 돌아오는 변화를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행 6:7)ⓗ

출처 : †예수가좋다오
글쓴이 : (일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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