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학

[스크랩] 21세기 목회와 세계선교 전략 (장창수)

수호천사1 2010. 4. 10. 11:45

21세기 목회와 세계선교 전략

 

장창수선교사

 
서론


20세기의 개방이 집의 문을 여는 국제화였다면 21세기의 그것은 집의 담을 허무는 세계화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교통과 통신 수단의 엄청난 발달로 민족과 나라 사이 국경선의 의미가 점점 사라지고 국제 교류와 무역이 더욱 활발해지면서 모든 나라들이 서로 의존하며 살아야 한다.  이렇게 한 나라가 독자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


그러나 미국으로부터 시작된 국제화나 세계화는 지금 많은 문제들을 야기하고 있다.  국제화와 세계화는 미국의 이익만 일방적으로 대변하며 그 결과 나라간 빈부격차가 더 벌어지고 있다고 학자들이 말하고 있다.  이에 따라 반세계화 운동도 더욱 강하게 전개될 것이다.


세계화를 반대하는 이유 중 하나는 유대인들의 세계 지배를 염려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집단은 유대인이다.  이들 유대인들은 미국의 정계와 경제계 그리고 문화계의 리더들이다.  이들이 자신의 영향력을 넓히는 방법은 국제화와 세계화이다.  이런 욕심 때문에 미국을 앞장 세워 이들은 일방적으로 각 나라의 문호를 개방하도록 압력을 행사한다.  우리가 잘 알듯이 부시 행정부의 주요한 각료들 대부분은 유대인들이다.  이들을 우리는 '네오콘'이라 고 부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제화나 세계화는 피할 수 없는 세계적인 흐름이 되었다. 특히 인터넷의 급격한 보급과 놀라운 발달 덕분에 나라간 관계는 더욱 긴밀해지고 있다. 이런 시대 각 나라가 갖는 새로운 문제는 나라 밖만 아니라 나라 안에서도 벌어지는 다른 나라와의 경쟁에서 살아 남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나라들은 남에게까지 자신을 개방 시켜야 하는 시대를 맞았다.


이런 시대 좋은 점은 이 경쟁에서 살아남은 기업이나 개인은 얼마든지 세계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전과 달리 해외의 우수한 정보나 기술과 지식 또는 인력을 이용하여 나라나 기업의 경쟁력을 더욱 높일 수 있다.  이렇게 민족주의나 애국심은 서서히 무너질 것이다.  오히려 세계 경제에 유익을 주는 기업이나 개인이 결국 자기 나라의 이름을 드높이는 새로운 애국 방식이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이미 이런 일이 스포츠계와 예술계 그리고 기업계에서 일어남을 본다. 좁은 한국의 운동 선수가 아닌 세계 무대의 운동 선수들과 경쟁하며 자신의 능력을 향상시킨 골프 선수들과 야구 선수들이 그 좋은 예이다.  이들은 미국 운동계에서도 인정을 받아 국경을 초월하여 운동하며 막대한 부를 쌓으며 동시에 한국을 선전하고 있다.  세계적인 상품으로 인정을 받음으로 보다 더 넓은 시장에서 제품이 팔리고 그리고 더 많은 인기를 창출하는 기업도 마찬 가지다.  이들이 좁은 한국에서만 활약했다면 세계적인 선수나 세계적인 기업으로 발돋움하기는 전혀 불가능할 것이다.  이 모두 높은 수준의 무대에서 활약할 수 있기 때문이며 결국 국제화와 세계화의 결과이다.  국제화와 세계화는 한 나라와 민족의 수준을 업-그레이드시키는 좋은 기회를 준다는 뜻이다.


최근 한국의 유전 공학자인 황 우석박사가 인간 배아세포의 복제를 최초로 성공시켰다.  한국 과학계가 엄청난 쾌거를 이루었다.  물론 나중 윤리적인 문제를 야기시키겠지만 한국 과학자들이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과 이에 관한 지식의 자유로운 교류나 실험에 필요한 기자재들의 자유로운 구입이 허락되지 않았다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장 영주와 장 한나를 비롯한 한국의 음악도들이 세계 무대에서 인정 받는 것도 인재라면 얼마든지 받아드려 기르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있기에 가능하다.  한국의 좁은 무대가 아닌 미국이라는 큰 무대에서 경쟁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기에 그들의 성공이 가능했다는 말이다.


이런 시대를 맞아 미국을 비롯한 서구의 제 나라들은 좀 더 개방적인 정책을 세우고 있다.  자기 나라에 유익을 주는 인재라면 나라와 민족 그리고 인종을 가리지 않고 자기 나라로 영입하며 높은 자리에까지 등용시킨다.  앞으로 필요한 국가 경쟁력 제고와 항구적인 경쟁력의 유지를 위해서 이다. 그러나 한국은 여전히 폐쇄적인 대외 정책을 보이고 있다.  이락 파병안과 칠레와의 자유무역 협정(FTA)의 국회 인준 거부가 단적인 예이다.  이에 대해 외국 공관원들이 얼마나 비웃고 있는가!

 

신로마 제국 시대 도래


오늘날의 이런 시대는 옛날 로마제국과 그 이전 제국들의 시대와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로마 제국은 수많은 이방 민족들을 정벌하여 자신의 문화를 세계에 전파했다.  그러나 대제국의 효과적인 운영을 위해 로마인들은 민족간의 장벽을 헐어 우수한 비로마인들도 등용했다.  대제국을 운영하기 위해 자국민만으로 인재를 충분히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능력 있는 자라면 민족과 인종을 가리지 않고 로마 시민권을 주었다. 


그리고 "모든 길은 로마로!"라는 구호가 말하듯이 군마와 마차들이 로마를 중심으로 쉽게 다니도록 도로를 잘 만들어 놓았다.  이 당시 군대의 신속한 이동을 위해 건설된 도로는 오늘날 인터넷같이 정보를 주고받게 하는 중요한 통신 수단이었다.  이 도로를 이용하여 최신 정보를 얻고 그리고 신속히 조치할 수 있었기 덕분에 로마 제국은 오랜 동안 유지되었다(김 명혁교수의 초대 교회사 참고).


우리 기독교 교회가 주시해야 할 사실은 초대 기독교 교회가 이런 개방적인 로마 제국을 이용하여 쉽게 이방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 한 사람이 그렇게 많은 지역을 방문하며 교회들을 세울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 있다.  12사도 중 하나인 도마는 인도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이다.


이 모두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을 위해 준비하신 결과였다.  하나님은 아들의 복음이 신속하게 세상에 전파되도록 신흥 바벨론 제국을 비롯한 제국들을 세계 역사에 등장시켰고 유럽과 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하도록 하셨다. 신약 성경이 말하는 '때가 차매'는(막1:15, 갈4:4절) 선교학적으로 바로 이런 의미도 가진다.


그럼 오늘날 세계적으로 보편화되는 국제화와 세계화의 성향은 우리 기독교 교회와 무슨 관련을 갖는가?  21세기를 맞은 이 시대 하나님은 아들의 재림을 준비하시기 위해 초림 때와 같은 상황을 이 세상에 다시 조성하고 계신다.  바로 미국을 중심 한 새로운 세계 질서의 재편이 이를 증명한다.  오늘날 이런 미국을 '팍스 아메리카나'라고 말한다.  미국은 앞장 서서 국제화와 세계화를 강요할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미국은 자신의 문화를 세계 각 나라에 퍼지도록 하고 있다.  그리고 21세기 이후 '팍스 아메리카나'를 항구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미국은 과감한 그리고 아주 개방적인 이민 정책을 택해 민족을 가리지 않고 우수한 인재라면 자신의 사회에 과감하게 등용한다.  미국의 이런 힘 앞에서 모든 나라들은 생존을 위해 자신을 개방하여야 한다.  이 점에서 오늘날의 미국은 예수님 초림 때의 로마 제국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공산주의가 무너진 후 미국은 21세기 유일한 초강대국으로 등장했다.  예전 구 소련을 물려받은 러시아는 이제 하나의 변방 국가로 전락했다.  러시아는 미국의 1/30 수준인 국방비로 드넓게 퍼진 자신의 국경선을 지키기에도 벅차다.  미국은 세계 경제의 기관차 역할을 맡고 있다.  미국이 흔들리면 유럽이든지 일본이든지 혼자 버티지 못한다.  경제 개발이 한창인 중국도 미국이라는 시장이 없다면 곤란하다.  이런 것을 잘 아는 미국은 자신의 국제운영 능력을 제고 시키기 위해 국제화와 세계화를 만들어 주장해야 했을 것이다.  싫든 좋든  국제화와 세계화는 피할 수 없는 세계적인 흐름이 될 것이다.

 

새로운 목회와 선교 전략


이 사실은 오늘의 기독교 교회가 이 시대의 성격을 잘 읽어야 할 것을 말한다.  예수님의 초림 직전 상황이 예수님의 재림 직전 반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기독교계가 새로운 목회와 선교 전략을 수립하여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예수님의 초림 이전과 이후 유대 나라와 초대 교회를 통해 하나님이 보여주신 역사적인 선례들을 좀 더 살펴야 할 필요를 느낀다.  로마 제국의 등장 전후의 역사적인 상황으로 다시 돌아간다.


우선 하나님은 신흥 바벨론 제국의 등장을 통해 유대 나라를 멸망시키셨다. 그렇게 유대인들을 세계 여러 나라로 흩으셨다.  흩어진 유대인들은 포로에 지나지 않았지만 탁월한 인물을 통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만방에 보다 더 쉽게 전할 수 있었다.  그 인물들은 다니엘과 3 친구들, 에스더와 모르드개 그리고 에스라와 느혜미야등이었다.  이들은 한결같이 그 당시 제국 황제들의 총애를 받아 제국의 핵심 멤버로 눈부신 활약을 하며 대제국의 운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들은 황제로부터 인정을 받은 유능한 인재로서 제국의 운영에 충성한 신하였다.  그렇지 않다면 포로에 지나지 않는 이들이 황제에 의해 중하게 등용될 리 없다.


결국 이들의 우수한 자질로 인해 유대 민족은 보존되었고 나중 귀환하여 본토에 자신의 나라를 세우는 일도 도왔다.  이 이후 로마 제국 시대 유능한 유대인에 관한 기록은 없지만 이들 유대인들은 세계 곳곳에 퍼져 자신이 속한 나라와 사회에서 유능한 학자들로 활약했다.  초대 교회 시대 이들 유대인들은 복음 전파에 유용한 존재들이었다.  이들은 로마 제국 시대에도 세계 곳곳에 살고 있었다.  초대 교회 시정 사도들은 이들 유대인들을 이용하여 쉽게 복음을 세계 곳곳에 전할 수 있었다.

이들의 예들은 우리로 하여금 21세기를 위한 목회와 선교 전략을 새롭게 세우도록 돕는다.  이 시대 유대 나라와 같은 기독교 국가는 없다.  하나님이 핍박을 통해 유대 나라를 없애고 기독교 교회를 세계 곳곳에 퍼지게 했다.  이로 인해 기독교인들은 전세계 어디에나 발견된다.  이 점에서 하나님이 바벨론 제국을 통해 유대 나라를 멸망시켜 전세계에 유대인들을 흩으신 것과 같은 역사적인 상황이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다음과 같다. 세계에 흩어져 있는 기독교 교회들이 바벨론 대제국 이후 로마 제국까지 찬란한 활동을 보인 유대인들과 같은 역할을 이 시대에 잘 감당하고 있는가?  다시 말해 기독교 교회들은 자신이 처한 나라와 사회 속에 필요한 인재들을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많이 배출시키고 있느냐 이다.  만약 교인들이 교회에서도 유능한 일군이면서 예수님 탄생 전후의 유대인들처럼 사회와 민족이 필요로 하는 인물들이라면 예수님의 재림을 눈 앞에 둔 기독교 교회는 복음 전파를 좀 더 수월하게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교인들은 주님께 헌신된 성도이면서도 동시에 불신 세상의 지도자들이 보기에도 필요한 인재 또는 전문가여야 한다.  결국 예수님 초림 직전 하나님이 특별하게 준비하신 인물들을 염두에 두고 오늘날 교회들은 의도적으로 이런 인재들을 양성해야 한다.  예수님 초림 직전 유대인들이 자신의 나라의 국권을 되찾을 목적으로 그렇게 세상의 유능한 인재로 나타났다면 신약 시대 교회는 주님이 명하신 복음 전파와 하나님 나라 확장을 염두에 두고 인재를 배출하여 세상으로 보내야 한다.  유대인은 보이는 나라를 위한다면 신약 교회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다는 점에서 동질성과 이질성을 가진다.

 

예수님의 목회


인재 양육에 관련하여 이제 우리는 예수님이 어떻게 12사도들을 양육하셨는지 살펴볼 필요성을 느낀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공생애를 간략하게 기록한다.  이 마가복음은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며 곧 바로 제자들을 부르셨다고 기록한다(막1:15-16절).  복음 전파 즉 하나님 나라 건설은 사람들을 기름으로 가능함을 예수님은 몸소 보여 주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혼자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셨다.  자신이 하늘로 승천한 이후 복음은 계속 사람들에 의해 전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기독교 교회는 처음부터 사람 자체를 중요하게 본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어떻게 기르셨는가?  그는 대중을 상대하여 천국 복음을 외치셨고(설교) 그리고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을 상대하여 가르치셨다(보편적인 양육).  그러나 이들 제자들 중 12명만을 뽑아 이들과 함께 지내시면서 이들에게 특별한 훈련을 시키셨다(제한적인 양육).  보편적인 제자 훈련이 필요하지만 특수한 제자 훈련도 필요함을 뜻한다. 12명의 제자들 외에 예수님에게 적어도 70명에 이르는 제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이미 알듯이 이 둘 사이 차이는 분명하다.  보편적인 제자 훈련을 받은 사람들은 앞으로 교회의 구성원이 될 사람들이다. 그러나 제한된 수의 제자 훈련을 받은 12명의 제자들은 앞으로 교회의 지도자로 나설 사도들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역 방법은 3가지로 요약된다.  대중 전도나 대중 집회, 보편적인 제자 훈련과 특수한 제자 훈련이다.  이 해석이 맞는다면 기독교 교회는 처음부터 제한된 교회 지도자 양육 즉 인재 양육에 중요한 관심을 두어야 한다.  부활 후 승천하셔서 하늘에 계신 예수님은 교회 지도자를 통해 교회를 통치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지상 교회는 연약한 인간 지도자에게 달렸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를 알면서도 기쁘게 맡겼다.


한국 교회의 문제는 교회 지도자들이 대중적인 목회에만 치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른 지도자 양육이 없는 일반 목회만으로 한국 교회가 계속 질적으로 성장한다는 보장은 없다.  대형 목회를 지향하며 목회자는 대중적인 인기만 추구한다.  이 점에서 교회 성장론이 인기였다.  이런 교회에서 담임목사만 강조됨으로 후배 목회자는 길러지지 않는다. 


최근 대형 교회 목회를 한 후 한국 교회를 갱신하겠다고 하는 목사님이 있다.  대형 목회를 통해 성공한 후 먼저 세상 인기를 다 누리고 그리고 자신의 교회 영향력을 이용하여 한국 교회를 갱신하겠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 앞에 잘못이다.  자신이 먼저 다른 목회자에게 대형 목회의 안 좋은 본을 보인 후 무엇을 갱신하겠다는 것인가? 


우리가 알듯이 교회 성장론은 양적으로 교회가 한없이 크는 것을 추구한다.  그러나 인간은 신이 아니다.  그러므로 신만이 누릴 수 있는 영광스럽고 높은 자리를 보장하는 대형 교회를 추구하는 것은 이미 비성경적이다.  그런 교회의 담임목사가 되면 이미 주변 교인들이 그를 예수님이 앉을 자리에 놓고 그에게 아부한다.  인간은 이를 감당하지 못하고 서서히 부패하고 타락한다.  대형교회 목회자로서의 영광은 마치 로마 카도릭 교황이 누리는 그것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중세 교회가 썩었듯이 한국 교회도 부패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모든 것을 혼자 할 수 있지만 제자들을 부르고 길러 그들에게 일을 맡겼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대형 목회를 추구하지 않았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무리를 가르쳤다.  만약 그를 따르는 무리가 한 곳에 모인다면 그 무리가 점점 많아지면서 예수님은 그들의 왕이 될 것이다.  예수님은 이를 일부로 피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주 광야로 가셔서 기도하셨다.  그 모든 유혹들을 떨치기 위함이다.  신인 예수님이 그렇게 했다면 인간 목회자는 더더욱 대형 목회를 피하고 광야에 머무는 훈련을 해야 했다.  그러나 교회 성장론은 이에 대해 전혀 말하지 않는다.  미국의 영웅주의가 교회 성장론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한국 유교의 가부장적인 문화와 접목하여 목회론을 변질시켰다.


진실한 목회자라면 인간의 한계를 깨닫고 그리고 예수님의 겸손한 모범을 따라 교회 성장에 어떤 한계를 두고 그 이상은 그 동안 함께 일하며 양육한 훌륭한 후배들에게 나누어 맡겨 목회하도록 해야 한다.  한국의 대형 교회 목회자들은 이 점에서 실패했다.  그리고 목회 말년에 이를수록 도저히 상식으로도 이해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오랜 동안 왕 같은 지위를 누린 결과이다.

 

교육 평준화와 인재 교육


우리나라 교육 수준이 낮아진 이유는 교육 평준화에 있다고 본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마다 다른 능력과 은사를 준다.  이것이 불평등하게 보이지만 한 민족과 나라 경영은 다양한 은사를 요구하며 은사는 사람마다 다르다.  은사가 다 다른 사람들을 한 자리에 앉혀놓고 보편적인 교육을 시키는 것은 이미 부당하다.  능력과 은사가 탁월한 사람들을 한 곳에 모아 특별 교육을 시켜야 한다.  그리고 나중 혜택을 받은 만큼 더 나라와 민족을 위해 봉사하도록 하면 된다.  그러나 이를 무시하고 한국 교육은 평준화를 택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보듯이 보편적인 제자훈련과 특별한 제자훈련이 병행됨을 본다.  양들을 대상하는 교육과 목자를 대상한 교육은 분명히 달라야 한다.


마찬가지로 나라에도 백성이 있고 통치자가 있다.  이 사실은 백성 중에서 능력이 탁월한 자는 별도의 교육을 받아야 함을 뜻한다.  탁월한 재능을 가진 사람을 더 잘 무장시키는 것은 시기와 질투의 문제가 아니다.  능력의 문제이며 나라 장래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분명히 구분된 교육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한 교회도 마찬가지다.  하나님 나라 성장도 하나님이 보내신 인물 즉 지도자를 통해 가능하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런 인물들을 사전에 관심을 갖고 양육하여 교인들 중 교회나 민족을 위한 지도자로 자라도록 도와야 한다.  이것은 전혀 잘못이 아니다. 


미국은 21세기에도 최강대국으로 남으려는 전략을 세웠다.  이를 위해 국민을 대상한 보편 교육 수준도 향상시켜야 하지만 이것만으로 필요한 인재를 구할 수 없다.  이 때문에 미국은 인종이라는 장벽을 무너트리고 필요한 인재라면 인종을 가리지 않고 등용시키고 있다.  이런 영향이 미국 사회와 모든 단체에 미치고 있다.  이런 국제화 시대 유교의 잔재인 학연과 지역 또는 혈연에 매여 인재 등용에 인색한 한국 사회의 현실은 우리로 하여금 안타깝게 만든다.  나라와 민족을 위한 일이라면 능력 위주로 인재를 찾아야 한다.

 

개방 시대를 의식한 목회


바로 이런 개방적인 시대는 기독교에게 복음 전파의 호기를 제공한다.  이런 개인의 평등성이 강조되며 지나치게 개인의 자유가 보장된다.  그러므로 교회가 보편적인 제자 훈련만 아닌 특수한 제자 훈련을 통해 나라와 민족에게 필요한 인재로 배출할 수 있다면 교인들은 얼마든지 민족 사화와 국제 사회의 지도자로 나설 수 있다.


국제화와 세계화 시대의 또 다른 특징은 모든 종교가 동일하게 취급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기독교인들은 타종교인들과 동등한 조건에서 치열하게 경쟁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현대 기독교인들이 치러야 할 영적 전쟁이다.  이 전쟁은 어느 종교의 가치와 도덕이 더 우수한가라는 경쟁으로 나타난다.  이런 경쟁에서 교인들이 승리할 때 복음 전파는 더욱 용이해진다.  그렇지 못하면 복음 전파는 무용하게 된다.


이 점에서 오늘날의 기독교는 광야에서 40년 동안 살아야 할 이스라엘이 아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해야 하는 이스라엘과 같다.  광야 시대 이스라엘은 애굽과 강제로 분리되었다.  이 이후 광야에서 하나님만을 의존하도록 이들은 훈련 받았다.  이 이후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 이방인들과 맞서 싸워 정복해야 한다.  애굽에서 하나님은 직접 애굽인을 상대하여 싸우셨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선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을 직접 상대하며 싸워야 한다.  다시 말해 가나안 7족들의 우상들을 파괴하기 위해 혈과 육으로 싸워야 했다.  


구약의 이 기록은 신약 성도인 우리에게 구원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주어지지만 구원 이후 성도들이 싸워야 할 영적 전투는 주님을 대장으로 모시고 성도들이 직접 치러야 함을 가르친다.  그러나 구약과 달리 신약 시대의 이 영적 싸움은 어느 종교가 더 높은 윤리와 도덕 그리고 고상한 가치관을 가지는가를 삶으로 보여주어야 하는 싸움이다.  결국 어느 종교인이 실제적으로 그 나라와 사회에 유익한 존재인가를 증명해주는 싸움일 것이다.   


현대 기독인들이 치러야 할 새로운 양상의 영적 전쟁은 기독교의 가르침이 신자의 인격과 삶에 더 구체적으로 투영되어야 함을 말한다.  교회 제자훈련의 내용과 방법이 좀 더 구체적이어야 함을 뜻한다.  다시 말해 기독교 성경이 말하지 않는 이원론적인 세계관을 성도에게 가르쳐선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이원론은 성도에게 현실 도피적인 삶을 살도록 유도하며 결국 성도는 자신이 사는 사회에 빛과 소금 역할을 못하게 한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교회 안'만 아니라 '교회 밖'도 주되심을 고백한다면 예수님이 교회 밖에서도 주로 신앙 고백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주님이 교회 밖의 내 삶의 주인이란 신앙고백은 무엇을 뜻하는가?  주님이 명하신 규례대로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다.  이 삶은 사상과 철학 그리고 윤리와 가치관등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신자가 교회 밖에서 무엇을 하든지 주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목적을 갖는다.  그러나 그 목적을 이루는 것도 주님이 명하신 규례에 따라야 한다. 이런 삶은 불신자와 다른 아주 격이 높은 윤리적 삶을 살도록 신자를 돕는다.


이런 삶은 남들이 보기에 아주 투명하고도 개방적이다.  높은 자리에서도 민족과 나라를 위해 자기를 부정하며 낮아지는 자세로 나타난다.  이런 투명성과 개방성은 오늘날 국제화와 세계화가 요구하는 바이다.  이런 신자를 한국 사회가 안 알아준다 해도 결국 국제 사회에 그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이렇게 오늘날 사회는 기독교 교회가 피안적인 설교나 변증적인 설교만으로 부족하다고 말한다.  기독교 교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성도의 실제적인 삶과 그 가치관에 적용되는지를 가르쳐야 함을 말한다.  오늘날 기독교 교회는 광야의 이스라엘이 아니라 가나안을 정복하고 그곳에 하나님 나라를 세워야 할 이스라엘과 같기 때문이다.  복음을 전해 모든 사람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자신의 주님으로 모시고 살며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해야 한다.  가나안을 정복하고 난 후 다윗 왕국이 건설되었듯이 성도들의 삶을 통해 복음이 세상을 정복할 때 예수님의 재림으로 새로운 다윗 왕국은 건설될 것이다.


이 사실은 교회가 대중 전도나 대중 집회를 포기하여야 함을 뜻하지 않는다.  보편적인 제자 훈련 그리고 특수한 제자 훈련을 보다 더 현실적으로 접근시켜야 함을 뜻한다.  이방인의 나라인 애굽에서 국무총리가 된 요셉의 경우처럼, 포로이면서도 신흥 바벨론 제국에서 최고의 지위에 올랐던 다니엘과 3 친구들처럼 그리고 모르드개와 에스라와 느혜미야처럼 유능한 사회인으로 살도록 기독교 교인들을 가르쳐야 함을 뜻한다.  우리는 이들 인물들을 통해 이방인 제국 안에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드높게 높아진 것을 잘 안다.  이 점에서 오늘 시대는 보편적인 제자 훈련과 아울러 특수한 제자 훈련이 더욱 요구된다고 말한다.

 

세계 선교와 인재 양육


이런 특수한 제자 훈련이 요하는 이유가 또 있다.  그것은 선교가 필요한 나라들이 대부분 기독교에 적대하는 나라들이기 때문이다.  이들 나라에 필요한 지식과 정보 또는 기술을 가진 기독교인들을 교회가 의도적으로 배출시킨다면 이들 나라의 선교는 그 만큼 앞당겨진다.  이 점에서 유능한 청년을 무조건 신학교로 보내 목사로 기르는 것보다는 유능한 전문가로 길러 나라와 민족을 위해 그리고 세계 선교를 위해 일하도록 하여야 한다.  이렇게 세계 선교는 목사 선교사가 아닌 전문인 선교사가 주도하는 시대로 들어가고 있다.


평신도 전문가가 파송 되어 복음 전파 이전 그 사회에 유익을 주는 사역을 해야 한다.  그렇게 기독인들이 회교 사회에도 사랑의 수고를 아끼지 않는 좋은 사람들임을 먼저 보여주어야 한다.  이들은 비록 외국인이지만 목사 선교사보다 더 쉽게 그 사회에서 유능한 지도자로 인정 받을 수 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처럼…  결국 이들 친구들이 유대인 사회를 보존했듯이 이들 전문인들이 기독교 복음 전파의 길을 열 수 있다.


이런 개방적인 시대 교회에서 목회자만 중요하다고 보는 교회관과 목회관도 수정되어야 한다.  교회의 머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이고 나머지 제직들을 포함한 모든 성도들은 이 몸의 지체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목회자만 아니라 교인들도 세계 선교를 감당할 수 있는 시대를 맞았다.  이런 국제화와 세계화 시대를 맞아 교회는 보다 더 개방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목회자 자신의 의식 전환이 요구된다. 


기독교 교회는 요셉과 다니엘과 같은 유능한 인재를 배출하여 사회에 내보낼 수 있어야 한다.  이 때 이 세상에서 교회는 보다 더 잘 보호되며 복음 전파도 그 만큼 수월해진다.  이것이 지당하다는 것은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그 당시 유대인 포로들 중 지도자이면서도 동시에 이방인 사회의 최고 지도자였다는 사실에서 잘 증명된다.  다시 말해 바벨론 대제국 시대 교회에서 유능한 제직들이 사회에서 최고의 지도자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인재를 기른다는 것은 반드시 목회자를 양성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목회자 양성을 위한 신학원이 있기 때문이다.  교인들 중 사회의 유능한 지도자들로 나타나도록 그들을 가르치며 영적인 차원에서 교인들을 자극해야 함을 뜻한다.  영적이며 신앙적인 가치관이 정신적 가치관으로 나타나 그 사회에 유익을 주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 나라가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도 세워지도록 교인들이 힘쓰도록 해야 한다. 

 

이중 세계관


이를 위해 기독인의 세계관은 이중적이어야 한다.  기독인들은 이 세상의 시민이면서 동시에 하늘나라의 시민이기 때문이다.  이 땅의 시민으로 적극적으로 이 세상에 개입하며 살아야 한다.  이 점에서 기독인의 세계관은 지극히 낙관적이다.  그러나 기독인은 이 세상이 불로 심판 받아 멸망할 것을 잘 알고 믿는다.  이 때문에 기독인의 세계관은 동시에 비관적이다.  세상을 피하면서 살 필요 있다.  


이 이중적인 세계관은 성도로 하여금 더 잘 세상 삶을 살도록 돕는다.  출세를 위해 열심히 일하면서도 그 목적을 하나님 나라 건설에 둔다.  그러나 종국적으로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이 불로 심판 받아 멸망한 후에 세워질 것을 안다.  그러므로 그는 출세를 위해 힘쓰면서도 출세에 붙잡히지 않는다.  역으로 이 세상이 불의하여 기독인이 개입하기 힘들 수 있다.  그러나 기독인에게 이미 참 낙원에 들어갈 보장이 있기에 이 세상의 악과 불의에 맞서 더욱 적극적으로 이 세상 삶을 살 수 있다.  이런 이중적인 세계관은 성도로 하여금 비관적인 상황에서도 일어서도록 도우며 그리고 낙관적인 상황에서 자기를 부정하게 만든다.  다니엘은 그런 삶을 살았다.


기독인들이 이런 이중적인 세계관을 성경에 바탕하여 확실하게 세운다면 이들은 세상에 나가 적극적으로 활동할 수 있고 이 세상 유혹을 이길 수 있다.  이런 가르침을 교회에서 주어야 하며 이런 세계관에 바탕한 가치관을 정립하도록 교회는 도와야 한다.  그리고 성도들 중 우수한 자들은 보다 더 적극적으로 사회에서 활동하도록 특별 양육을 시킬 필요 있다. 이렇게 교회는 세상 일에 개입함이 없이 사회에 좋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  그리고 교인들이 이 세상에서 지도자로 활동할 때 교회는 말씀을 통해 이들을 지도하며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목회자의 사고와 인식 전환


국제화와 세계화는 모든 사회의 개방과 투명성을 요구한다.  이런 시대 성격을 알고 교회는 자신을 먼저 개방시켜 불필요한 권위주의에서 해방되어야 하며 모든 성도들이 교회 활동에 참여하도록 하여야 한다.  그리고 민족 복음화와 세계 선교를 위해 인재를 양육하는 특별 프로그램을 세워 진행시켜야 한다.  국제화와 세계화 시대 신자가 민족 사회나 국제 사회에 유용한 인재로 드러난다면 보다 더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대비하여 성경에 바탕한 바른 세계관과 가치관을 성도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21세기에도 계속될 국제화와 세계화는 주님이 재림하시기 전 모든 민족에 복음이 장벽이 없이 전해지도록 하시려는 하나님의 선교 전략을 감춘다.  기독교 교회는 로마 제국에 이르기까지 예수님 초림을 준비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보이신 역사적인 상황과 그에 응하는 유대인들의 처신을 자세히 연구하여야 한다.  국제화와 세계화는 세계 선교를 앞당기는 좋은 기회를 기독교 교회에 제공하기 때문이다.


목회자의 전향적인 사고 전환을 요구한다.  그리고 신학 방법이나 그 내용의 전환도 요구한다.  이원론적이며 변증적인 신학에서 이중 세계관에 바탕한 적극적인 현실 참여 자세가 요구된다.  예수님 재림이 가까울수록 모든 계층 사이 벽이 더욱 허물어져 성도 누구나 모두 자신의 능력과 은사를 충분히 발휘하도록 허락되는 사회가 출현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자유로운 사회는 더욱 쾌락주의로 흐를 것이다.  이 세계의 성격을 잘 알기만 한다면 이런 흐름을 무서워할 어떤 이유도 없다.


이를 위해 목회자 자신의 의식 전환이 필요하며 교회의 교육 프로그램은 좀 더 구체적이면서 실제적이어야 한다.  교리만 아니라 그 교리가 실제 삶 속에서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신앙의 차이가 그렇게 강조되지 않는 시대 복음을 더 잘 전하도록 교인들은 자신을 사회에 유익한 인재나 전문가로 드리도록 성도를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여전히 목회자가 이원론적인 사고에 빠져 영적 권위의식을 탐닉한다면 율법주의자로 드러나 제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할 것이다.  아니면 그는 사상가나 철학 또는 종교를 바탕 하여 사람을 선도하는 도덕가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최근 한국 교회의 문제점들 중 목회자의 자질 문제가 65%의 찬성을 얻었다.  영적 권위와 유교적인 권위의식에 젖은 목회자는 중세 교회의 신부들처럼 자신의 성장을 위해 진력하지 않는다.  목사라는 신분만 얻으면 다 된다는 무의식이 목사의 자질 향상에 방해를 주기 때문이다.  한국의 공교육이 무너진 이유도 선의의 경쟁이 없는 교육 환경 때문이다.  교사만 되면 선의의 경쟁이 없고 평생 철통 밥통처럼 보장된다.  누가 자신의 자질 향상을 위해 노력하겠는가?  교사 평가제가 도입될 필요가 있다.  한국 교회의 문제도 비슷하다.  목사라는 신분만 얻으면 마치 철통 밥통처럼 평생 보장된다.  성도는 그의 권위에 도전하면 안 된다.  이런 목사 제도는 결국 목사 자신의 성장을 막는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도 목사 평가제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결론


이제 글을 정리하며 신구약에 바탕하여 교회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말하고자 한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것이 곧 예루살렘이라. 내가 그를 이방인 가운데 두어 열방으로 둘러 있게 하였거늘 그가 내 규례를 거스려서 이방인보다 악을 더 행하며 내 율례도 그리함이 그 둘러 있는 열방보다 더하니 이는 그들이 내 규례를 버리고 내 율례를 행치 아니하였음이니라.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 요란함이 너희를 둘러 있는 이방인보다 더하여 내 율례를 행치 아니하며 내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를 둘러 있는 이방인의 규례대로도 행치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 곧 내가 너를 치며 이방인의 목전에서 너희 중에 벌을 내리되 네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내가 전무후무하게 네게 내릴지라."(겔5:5-9절) 


여기 남방 유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망한 원인이 기록되어 있다.  선민의 사명은 오실 메시야로 인해 새롭게 부여되도록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 땅에서 멸하셨다.  그러나 분명한 교훈은 이 지상의 교회와 신자들이 모든 면에서 이방 사회와 이방인들보다 못하여 빛과 소금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이 교회를 심판하여 멸하신다는 것이다. 


구약에서 약속한 메시아인 예수님은 앞으로 자신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성령 강림으로 세워질 교회에 대해 이렇게 말하셨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4-16절)

 

교회는 산 속에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사람 가운데 그리고 사회 가운데 존재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구성원들인 신자들은 불신자보다 모든 면에서 빛과 소금 역할을 하여야 한다.  이 역할은 다만 종교적인 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예수님의 초림 전 구약의 진실한 성도였던 다니엘과 세 친구들의 세상 속에서의 높은 위상이 이를 잘 증명한다.   이 때문에 목회자 자신이 먼저 이원론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야 하며 성경적인 세계관으로 무장해야 한다. 


이런 주장은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 정당의 출현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과 무관하다.  이들 시대 유대인들은 자신의 정당을 소유함이 없이 개인적으로 불신 사회의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세상 속의 순례자였다.  기독교 정당의 출현은 다른 종교를 가진 신도들의 정당 출현을 부추기며 이것은 결국 좁은 한국 땅 안에 종교 분쟁으로 발전하여 민족 자체를 파멸시킬 것이다.  성도 개개인이 주 앞에 바로 서서 사회의 빛과 소금 역할을 못하면서 수에 의존하여 나라를 개혁하자는 시도는 이미 바른 신앙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정치적인 정당을 소유함이 없이 세상을 바꾸었음을 기억하자!

 

국제화와 세계화가 진행되는 시대 교회와 목회자의 역할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정립하고 새로운 목회 전략과 선교 전략을 세워야 할 때이다.  특별히 목회자가 아닌 성도들의 역할이 강조된 목회와 선교 전략이 요한다.  그 전략은 좀 더 구체적으로 신자들로 하여금 이 사회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출처 : 내 사랑 중국 ♡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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