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선교의 필수 조건: 개인 접촉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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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번역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어 가는 상황에서 성경 번역은 기독교 선교의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번역은 기독교인이 문화와 전통이 다른 (선교대상) 국가의 언어와 문화를 배우기 위해 개인적인 접촉을 하는 데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이러한 접촉은 대개 친구를 사귐으로 이뤄진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나올 수 있다. “기독교인을 친구로 사귀는 무슬림이 얼마나 많을까?”, “기독교인과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는 힌두교도가 얼마나 될까?”, “얼마나 많은 불교도가 기독교인과 뜻 깊은 교제를 나누는가?” 위의 질문을 곰곰이 살펴보면 개인적 접촉이라는 개념이, 한 종족의 복음화 정도를 가늠하기 위한 하나의 척도가 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복음화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민족 언어(ethnolinguistic)로 분류되는 전 세계의 종족 복음화 정도를 추산하기 위해 20개의 변수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들 중 두 개는 모든 교파의 기독교인과 비(非)기독교인 사이의 개인적 접촉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참고로, 복음주의 기독교인은 전체 기독교인의 하위 분류이므로 복음주의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이 접촉할 확률이 전체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과 접촉할 확률보다 적다. 그렇지만 이것이 비(非)복음주의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의 접촉을 평가 절하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우선 개인 전도는 지역교회 기독교인이 비기독교인과 얼마만큼 접촉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다. 그 다음으로 이웃해 있는 타종족에 기독교인이 존재하는 가는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의 접촉을 더욱 극대화시킨다. 일반적으로 기독교인이 많은 곳에서 비기독교인은 기독교인과 접촉할 기회가 많다. 즉 기독교인의 수를 통해 전 세계의 비기독교인이 기독교인과 갖는 접촉 여부를 엿볼 수 있다. 기독교인과 접촉하여 개인적으로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의 수를 추산하기 위해 하나의 산출 방식을 도출할 수 있으며 이러한 방식을 통해 위의 표를 만들었다.
위의 표에 나와 있는 수치들은 추정치이지만, 이를 통해 아래와 같은 기독교 선교의 중대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1. 불교도, 힌두교도, 무슬림은 비교적 기독교인과 접촉하지 않는다.
세 종교 모두 80% 이상이 기독교인과 개인적인 접촉을 갖지 않는다.
2. 아시아를 제외한 모든 대륙에서 무종교인은 기독교인과 가까이 있다.
이는 어느 정도 예상이 가능한 부분이다. 서구 사회에서 비종교인 혹은 무신론자는 원래 기독교인이었다가 기독교를 떠난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3. 토착 종교인들은 기독교인과 접촉할 기회가 많다.
20세기 기독교 선교의 주된 대상이 부족민이었던 까닭일 것이다.
4. 아시아의 비기독교인은 다른 대륙에 비해 기독교인들로부터 떨어져 있다.
우선 아시아에서 기독교인은 불교도와 힌두교도, 무슬림으로부터 배척을 당하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다른 대륙에 비해 아시아로 파송된 선교사가 적었기 때문이다.
5. 아프리카의 무슬림은 다른 대륙의 무슬림보다 조금 더 기독교인과 접촉을 갖고 있다.
남반구의 기독교인들은 비기독교인, 특히 무슬림과 좀처럼 대면할 기회가 없다.
6. 기독교인을 아는 유럽 무슬림과 북미 무슬림은 규모면에서 차이가 크다.
이는 타종교와 섞이지 않으려는 유럽 무슬림의 폐쇄적 경향을 잘 보여준다.
7. 기독교권 지역에서 기독교인은 비기독교인과 더 많은 접촉을 갖고 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유럽, 북미로 이민하는 비기독교인은 기독교인의 환대와 우정을 받게 될 가능성이 높다.
8. 전 세계적으로 비기독교인의 80% 이상이 기독교인을 개인적으로 알지 못한다.
이 같은 접촉 부재는 기독교 사역과 복음화에 매우 치명적인 문제로 여겨진다.
위의 통계를 통해서 우리는 개인적인 접촉과 복음 전도의 상관관계를 얘기하는 성서 신학(biblical theology)을 되살피게 된다. 구약성서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과 친밀하고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 하나님의 특성을 발견한다. 야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이끌던 중 모세에게 “그들 중에 (내가) 거할 처소를 짓게 하라”(출 25:8)고 명한다. 여기서 ‘거하다’(sakan, 히브리어)라는 말은 성서의 다른 구절에 나오는 개인적 접촉과 다른 의미다. 사실 여기에 쓰인 히브리어 'sakan'은 ‘다가갈 수 없는 하나님의 신성함이 아니라 섬세하고 친밀한 그분의 접근’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나님은 잠시 이스라엘 백성을 방문하신 게 아니었다. 오히려 자기 백성에게 가까이 다가옴으로써 고대 근동의 다른 신들과 구별된 모습을 보이셨다. 그
는 창공을 배회하며 백성을 살피는데 만족하지 않고 백성 중에 가까이 머물기를 원하셨다. 신약 성서에는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다 풍성하게 나타난다.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인간과 함께하기 위해 내려오신 게 아니라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skenoo)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이 말씀에서 우리는 모음이 빠진 ‘skn'과 'skenoo'의 어원적 유사성을 주목할 수 있다. 'skenoo'는 하나님이 아들 예수를 통해 보다 가까이 임재한다는 신학적 의미를 주목한 단어다.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는 개인적이고, 지속적이며, 신성한 그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백성과 함께하기 위해 이 땅으로 오셨다. 따라서 개인적 접촉은 하나님의 사람이나 하나님의 사역에 있어 매우 중요한 특징이다. 초대교회 당시에 있었던 회심은 개인적인 접촉을 통해서 이뤄진 경우가 많았으며 이는 복음전도의 한 방법으로 간주되었다.
가령 사도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나 초자연적인 경험을 통해 회심을 했지만, 시력을 회복하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된 데에는 아나니아의 안수가 있었다(행 9:10-19). 집사 빌립도 에디오피아 내시와 직접 대면하여 복음을 전했다(행 8:26-39). 또 빌립보에서 자색 옷감을 팔던 루디아는 바울의 설교를 직접 듣다가 온 가족이 세례를 받게 되었다(행 16:13-15). 위의 몇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복음 전하는 사역을 함께 펼치기 원하신다는 것은 매우 분명한 사실이다.
초대교회의 회심 사건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서 나타나는 ‘성육신적 복음전도’(incarnational evangelism) 방법은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사이의 개인적 접촉을 중요시한다. 개인적 접촉은 하나님의 본질적인 특성이고 기독교 복음의 정수이며 복음화에 관한 성서신학의 기틀이 된다. 이런 점에 우리가 개인적 접촉의 방법을 취하는 것, 즉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들 속에서 그분의 말씀을 성육신적으로 전하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의 뜻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약한 자를 얻기 위해 약한 자와 같이 되고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기 위해 여러 사람 앞에서 여러 모습이 될 수 있다(고전 9:22). 20세기에 이르러 방송 매체와 기술이 발달하면서 우리는 복음전도와 성육신에 관해 새로이 주목하게 되었다.
윌리엄 노팅엄(William Nottingham)이 언급했듯이 “복음 전파의 방법은 변하고 있으며 복음 전파의 방식이 정체되어 있거나 교리적으로 규정되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시대적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진화되어야 한다.” 클래런스 존스(Clarence Jones)가 설립한 라디오 방송국 HCJB는 급변하는 사회에 발맞춰 지난 75년 동안 전 세계에 복음을 증거하고 있으며 그들의 메시지는 남미를 비롯한 여러 대륙에 전파되었다. 마찬가지로 ‘예수 영화’(the Jesus film)와 다른 영상을 통한 복음 전파도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을 통해 보급될 수 있다. 이러한 기술적 발달은 여러 모로 긍정적인 공헌을 한다. 사람이 직접 힘을 들이지 않아도 보다 넓은 세계까지 복음이 닿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선교사의 출입이 제한된 국가에서도 복음은 전해질 수 있다. 하지만 대중 매체와 기술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개인적 접촉이 결여된 복음 전도는 안타까운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고 노팅엄은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새로운 형태의 매체와 기술이 발달하고 있다 … 하지만 풍족한 사회에서 사람들은 점점 더 고립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인데, 그 이유는 지식을 제공해 주는 원천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특성 때문이다. 사람들은 결과적으로 타인과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기회가 드물어질 것이며, 따라서 단순히 인터넷의 ‘대화방’이 아니라 타인과 직접 대면하는 기회를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사랑과 섬김의 공동체 속에서 성육신되는 복음이야말로 현대를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다.”
토드 존스(Todd M. Johnson)는 미국 고든 컨웰 신학대학원(Gordon-Conwell Theological Seminary)의 세계 기독교 연구 센터(the Center for the Study of Global Christianity)의 소장이다.
찰스 티에스젠(Charles L. Tieszen)은 영국 버밍햄 대학교(the Universityof Birmingham)의 박사 과정에서 기독교인과 무슬림 관계를 연구하고 있다.
|출처:파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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