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영성,기도

[스크랩] 왜? 영성, 영성... 하는가? (이현주)

수호천사1 2010. 2. 17. 18:20

왜? 영성, 영성... 하는가?

 

이현주 목사|

 

 

  영성이라는 말이 최근에 와서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우리가 두통을 앓기 전에는 머리가 거기 있는지 없는지 생각지 않습니다. 눈이 아프기 전에는 눈이 있는지 없는지 별로 생각도 않고 사는데 눈이 아프게 되면 눈에 대해서 많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원래 영성이라는 단어도 삶의 내용과 방법들이 건강할 때에는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많이 병들어서 문제가 생기니까, 굳이 저마다 '영성''영성'하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영성이라는 말이 있으면 '육성'이라는 말도 있어야 할 텐데 아직 못 들어보았습니다. 영이라는 말과 대비되는 것을 생각해 보면 아무래도 물질, 혹은 육이 될 것입니다.


 
지난 300년 동안을 되돌아 봐도 인간의 정신적인 면의 발전보다는 물질적이고 물리적인 발달이 굉장히 빨랐다고 생각돼요.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빠르게 달리다가 가만히 멈추어 서서 무엇인가를 기다린다고 합니다. 무엇을 기다리는가 하면 자기 몸이 너무 빨리 달렸기 때문에 혹시 자기 영이 그 속도를 못 따라와서 날 놓치지 않았나 싶어 영이 올 때를 기다린다는 거예요.

 

  어쩌면 지금 우리 인류 전체가 그러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달리던 말을 멈추고 기다려야 하는데, 더욱 빨리 달리는 시대에 걸맞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서 영성, 영성, 하는 것이 아닐까요? 안 보이는 것을 좀 잘 보면서 살자는 것이 영성이기 때문이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중요한 게 많습니다. 우리가 많이 놓치고 있습니다. 제대로 살려면 눈에 안 보이는 부분을 좀 제대로 잘 볼 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런 반성이 이제 영성, 신앙, 그런 단어를 쓰면서 생겨나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생태적 삶을 우리가 추구하고 있다는 것과 우리가 생각하는 영성생활이라는 것이 같은 것을 다른 식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봅니다.

  생태적 삶을 저는 이렇게 이해합니다. '너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좀 알고 사는 것이 아닐까요? 지크 나트 하앙 스님이 쓰신 어떤 책에 "종이 한 장에서 강물을 본다"는 말이 있습니다. 종이를 본다고 물이 보입니까? 비가 보입니까? 사람들이 보입니까? 자기는 보인다는 겁니다. 비가 안 오면 나무가 못 자라고, 나무가 안자라면 펄프를 못 만들어 내고, 펄프가 없으면 종이가 없으니까, 결국 이 한 장의 종이가 있기까지는 비가 내렸기 때문에 나무가 있고 펄프가 있고 종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과정, 시간이라는 것만 빼버리면 요게 바로 비다 해도 된다는 거죠.

  헤르만 헤세가 쓴 싯다르타라고 하는 소설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돌멩이 하나는 언젠가 부서질 것이다. 언젠가 부서져서 흙이 될 것이고, 그러면 여기서 씨앗이 나오고 나무가 자랄 것이다" 그런데
종교적인 스승들의 말에 의하면 시간은 없다고 합니다. 종교적 스승들 뿐 아니라 아인슈타인도 시간이라는 것은 소위 정신적인 건축물(mental construction)이고, 인간의 정신이 만들어 낸 하나의 있지 않는 그 무엇이라고 합니다. 과학자, 물리학자들도 그렇게 증명을 했었어요. 벌써 옛날에 스승들은 "오늘이 있을 뿐 어제도 없고, 내일도 없다. 다만 있는 것은 지금이다"라고 가르쳤습니다. 돌이 흙이 되고 흙에서 씨앗이 떨어져서 나무가 된다. 그런데 이렇게 변해 가는 시간을 빼어 버리면 남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 돌이 즉 나무다. 그 나무에서 무슨 새가 산다, 그러면 그 돌이 곧 나무요, 새요, 이렇게 해서 하나의 모래 안에서 우주를 본다는 장난을 하는 거지요. 그것은 시가 아니라 다소 정확한, 과학적인 관찰이라고 봅니다.


  생태적 삶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줄 알고 살아라. 우리가 독자적으로 혼자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긴 그렇죠? 여러분과 제가 여기서 이러한 모임을 갖는다는 것은 아마 처음에 어떤 분이 생각을 했겠죠. 누군가 아이디어를 냈을 겁니다. 그 아이디어를 혼자만 갖고 있었다면 이런 사건은 없었을 겁니다. 한번 해보자 하고 광고를 했고, 광고를 보신 여러분이 판단했겠죠. “가볼까? 말까? 한번 가 보자.” 이렇게 해서 이 모임이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인간 존재 내지는 모든 지구상의 존재가 이렇게 살게 되어 있는데, 우리가 잊어버리고 사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단절된 삶을 살다 보니까 어딘가 아프게 되고 아프니까 영성을 거론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생태적 삶이라고 하는 것, 저보다 여러분이 더 잘 알텐데 내가 생태적 삶이란 이런 것이다 하고 말해 봤자 재미없을 것 같고 해서 제 이야기를 들려 드리려고 합니다.


  2주 전에 예산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한 며칠 사는데 저는 둘레가 전부 군부대인줄 알았어요. 빵빵 총소리가 하루 종일 계속 들립니다. 군부대 옆에 살아봤지만, 사격 훈련을 가끔 하는 건 봤어도 저렇게 하루 종일 하는 것은 못 보았기에 물어 봤습니다. 예산은 사과로 유명한 곳인데 과수원에 까치가 많다고 합니다. 까치가 맛있는 사과를 골라가며 쪼아 먹기에 까치를 쫓기 위해서, 자동으로 프로판가스 같은 것이 터지게끔 장치를 해 놓은 것이라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옛날에는 깡통에 줄을 달아 흔들어 새를 쫓거나, 할머니가 '훠이' 가라고 그러셨는데, 지금은 기술이 발달하여 총소리로 쫓는답니다. 까치들이 얼마나 기겁했겠습니까? 파리를 잡을 때 파리채로 '딱딱' 소리 내며 20분∼30분 두드리면 파리가 안보입니다.

  물론 그것도 계속하다 보면 그 소리에 익숙해져서 그 소리가 나도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알지요. 궁금하시면 한번 해보시죠. 이 총소리장치도 한 몇 년 해보니까, 까치는 도망도 안 간답니다. '저것은 소리만 나지 총알이 없어'라고 본능적으로 아는 것이죠. 그래서 별로 효과가 없는 것이죠. 까치가 와서 따먹으니까 못 따먹게 하기 위해서 총소리를 내고, 또 어떤 보도에 보니까 잣 농사를 하는 우리나라 농부들이 청솔모가 떼로 몰려오니까 허락을 받아서 무더기로 잡아서 매장하는 것을 봤습니다.
총소리로 까치를 겁주지 않으면 안 되는 세상, 청솔모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자기가 먹을 것이 있으니까 와서 먹은 것뿐인데, 하느님이 또 그런 것을 먹고 살라고 그래서 그렇게 했는데 그걸 총으로 쏴서 합동으로 매장시켜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세상, 이런 것들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지네는 죽어야 하는가?

  목포에서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거기는 산을 깎아서 집을 지었는데 그 산이 돌이 많은 석산입니다. 석산은 이상하게도 습기가 참 많아요. 물이 많고 돌이 많고, 그러니까 지네가 많습니다. 자다 보면 가끔 나와서 허벅지도 깨물고 어깨도 깨물고 그럽니다. 자다가 따끔하면 지네가 있는 거예요. 한번은 신경 줄을 건드렸는지 한 두어 시간 동안 온 몸이 전기 통하는 것같이 찌릿 찌릿 한 고통을 느끼곤 했습니다. 저를 문 놈은 요만한 놈인데 뭐 순간 작살났죠. 단번에 쳐서 죽여 버렸죠. 죽였지만 내 몸은 계속 찌릿 거리고 아팠어요. 그렇게 거기는 늘 지네가 비상입니다.

  아무리 방비를 해도 어디로 들어오는지 방으로 들어옵니다. 장마철에는 정말 조심해야 돼요. 언제 이불 속에서 나올지 몰라요. 그래서 지네가 나오면 어떻게 하느냐. 거기 분들께 배운 방법은 이렇습니다. 우선 파리채로 때립니다. 너무 세게 때리면 터지니까 적당하게 때리면 기절을 합니다. 죽지는 않고요. 그럴 때 그 놈을 집게로 잡아서 유리병 속이나 페트병 속에 집어넣습니다. 그 안에서 정신을 차리면 말라죽거나 굶어 죽습니다. 이것이 댓마리가 되면 그걸 잘 말려서 허리 아픈 사람들에게 주기도 한답니다. 저도 이제 나타났다 하면 파리채로 잡아서 기절시켜 놓고 페트병에 넣고 … 하여튼 많이 죽였습니다.


  제가 걸레질을 잘 안 하는 사람인데 그날따라 걸레질을 하는데, 볼펜만한 큼직한 지네가 등장을 했죠. 기겁을 했죠. 나는 놀랐는데 이놈은 별로 안 놀래요. 슬슬 기어가지고 아주 천천히 바닥의 모서리에 들러붙는 겁니다. 제가 자동적으로 파리채를 찾아 때리려고 하는데 순간 이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느낌이 참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머리로 생각하는 것 보다 때로는 느낌이 빠르고 정확합니다. 생각을 따라 사는 것 보다, 느낌을 따라 살면 좀 덜 속지요. 사람하고 이야기할 때도 말을 듣지 말고 어감을 들으면 비교적 안 속습니다. 어감은 말보다 비교적 거짓말을 덜 하니까요.

 

  제 느낌에 확 때리려는 순간, 그 지네가 나를 쓰윽 쳐다보는 것 같았어요. 쳐다보니까 내가 움찔할 수 밖에요. 대체적으로 딴전 필 때 때려야지 그 눈과 눈을 마주하면 못 때리는 거죠. 그런 느낌을 받으면서 이번에는 제가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건 소리를 들었다고 밖에 표현을 못하겠습니다. 어떻게 들었냐고 궁금하시겠지만, 그런 질문은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내가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여튼 소리를 들었어요.

  지네의 음성입니다. "왜 때려? 니가 날 왜 때리느냐? 니가 날 왜 죽이려고 하느냐"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가 대답을 해야 할 것 아닙니까? "야, 임마 넌 지네잖아" 그랬죠. 그런데 이렇게 상당히 긴 대화로 오고 가는데요, 이것이 시간으로 따지면 한 4,5초밖에 안 걸린 겁니다. 순간적인 사고였죠. 그랬더니 그 지네가 하는 말이 "내가 지네이기 때문에 죽어야 되냐?" 내가 지네인 까닭에 죽어야 하냐 이거죠. 그래서 "그건 아니지만 내버려두면 넌 날 물을 것 아니냐?" 그랬습니다. "어, 그럼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가능성 때문에 죽인다는 거냐?" 이루어지지도 않은 가능성, 내가 널 물 수 있기 때문에는 아직 미래예요. 그러면서 "그러면 왜 너는 너를 안 죽이냐? 임마, 왜 내가 날 죽이냐? 니가 장차 무슨 못된 짓을 할 지 어떻게 알아? 니 몸 가지고 얼마나 기가 막힌 범죄를 저지를지 아무도 몰라. 그 가능성은 너한테도 있어. 내가 미래의 가능성 때문에 죽어야 한다면 너도 그런 가능성을 가진 존재니까 너도 죽어야 돼. 왜, 너는 안 죽이냐?" 그래서 "나는 절대 아무도 해코지 할 마음이 없어." 내가 그랬죠. 나는 그럴 가능성이 없다 이거죠.

  이런 이야기는 하면 할수록 인간이 비참해지는 겁니다. 지네가 엄숙하게, 단호합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나도 누구도 해코지 할 마음이 없다." 그래서 이걸 때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걸 내버려 둘 수도 없고 난감하죠. "그렇지만
넌 지난번에 날 물었잖아?" 그랬더니 "난 널 문적 없어" "너 같은 지네가 물었단 말이야, 임마." "그러니까, 나 같은 지네가 과거에 널 물었으니까, 그래서 내가 죽어야 한단 말이냐? 그러면 너는 왜 너를 안 죽이냐?" "내가 왜 날 죽이냐?" "너 같은 인간이 과거에 얼마나 못된 짓을 했냐? 사람만 무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숨통을 끊어버린 것이 얼마나 많냐? 너 같은 인간이 한 못된 짓을 생각해 봐라. 그러면 너도 죽어야 되는 거 아니냐?" 제가 할 말이 없죠. 참 난감했어요. 그냥 무지하게 죽일 순 없잖아요?

  그래서 "야, 니 말이 맞긴 맞는데 난 아무래도 니가 겁나. 니가 좀 나가 주었으면 좋겠다. 여긴 내 집이잖아?" 그랬더니 지네가 하는 말이 "누가 정했냐? 여기가 니 집이라고." 누가 정했냐는 거예요. "내가 정했다." 그러니까 지네가 하는 말이 "나도 여기가 내 집이다. 너희 인간들이 여기 와서 터를 잡고 집을 세우기 전에 오래 전부터 여긴 우리 땅이여, 우리가 대대로 물려 수백 대째 여기서 사는데, 나중에 온 놈이 왜 이렇게 큰소리냔 말이야. 정말 임자를 따지려면 그 사실부터 좀 생각하고 따져 봐라."


  제가 논리적으로 완전히 졌습니다. "도저히 나는 너하고 같은 방을 쓸 수가 없어. 니가 스스로 안 나간다면 내가 내버려야겠다." 그랬더니, "아 그건 니 맘대로 해. 니가 나를 강제할 수 없듯이, 나도 너를 강제할 수 없어." 그래서 제가 걸레로 잘 쌌습니다. 맨 손으로 잡으면 물 것 아니에요? 잘 싸가지고 뒤꼍 풀 속에 가서 털어 주었죠. 한 두어 바퀴 돌더니 풀 속으로 싹 사라졌지요. 그게 제가 지네를 내 눈으로 보고 안 죽인 첫 번째 사건이었습니다. 못 죽인 거죠.


  다음날 비슷한 장소에 고만한 크기의 지네를 또 봤습니다. 이번에는 뭐 대화를 나누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어제처럼 그냥 바로 걸레에 싸가지고 던져 주는 순간, 이게 어제 그놈하고 부부였던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고 나서도 몇 번인가 지네를 발견했죠. 그럴 때마다 저는 그냥 걸레로 싸서 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 사건 이후에 저와 식구들은 한 사람도 지네한테 안 물렸습니다. 어떻게 보면 지네하고 사이좋게 그런 대로 살다가 떠난다고 볼 수도 있죠. 몇 번 그러고 보니까 나중에는 제가 손으로 지네를 잡아서 밖에 놓을 수도 있겠다는 착각이 들더라구요. 흉물스럽고 겁나는 지네를 맨손으로 이렇게 만질 수만 있다면 저로서는 꽤 괜찮은 삶을 연습해 왔다고 결론 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좀 해 봤습니다.

 
생태적 삶이 별 건가? 생태적 삶을 산다는 것은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아니 저 아담에서부터 인류 존재 전체가 유기적인 관련을 맺고 살고 있음을 머리로만 '아, 그렇지' 하고 인식하지 말고, 우리의 온 몸의 세포 하나하나에 그 지혜와 지식이 배어 들어감을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깨달음이란 머리로 아는 그 앎이 온 몸의 세포 하나하나에 그대로 배어 들어가는 것이라고 그러더라구요.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진정한 생태적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날이 이사야 선지자가 내다보았던 독사 굴에 어린아이가 손을 넣고 사자와 송아지가 같이 살고 하는, 말 그대로 꿈과 같은 세상을 살아가게 되지 않을까요?

  물론 이 지구상에 사는 전체 인간들이 본능적으로 함께 생각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뛰어난 한 개인이 어떻게 생각하느냐도 중요하지만, 그것은 인류 전체의 지식이나 지능의 발달이랄까, 인류 전체의 생각이 변화되는 것과 맞물려 연관 지어질 때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오늘날 환경에 대한 관심이 두터워지면서, 우리가 어떻게 소비생활을 할 것이며 또 자연을 상대로 하는데 어떤 마음가짐을 가질 것이며 상당히 인류적인 운동의식 같은 것들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그 동안 지나치게 물질적인 풍요와 편리함을 추구해 온 우리 인류의 유산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물론 누리고 있는 이것이 부정적인 역할만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을 겪었기 때문에 '이게 아니다'라는 것을 아는 것이죠. 마치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그렇게 고생을 해봤기 때문에 아버지하고 사는 게 얼마나 좋은지를 나중에 깨닫는 것처럼. 안 떠났으면 모르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세상에 살아도 좋은 세상인줄 모르면 할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 인간들이 그 동안 해온 일이나, 과거부터 지금까지 해오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느니 하지 말고, 그런 것들도 합쳐서 우리 인류를 깨우쳐가는 어떤 밑거름이나, 징검다리가 될 수도 있겠다 생각해봅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어도 지네하고 좀 덜 싸우고 파리하고 좀 덜 싸우는 것은 참 어렵더라구요.

 

  오늘 아침에도 급한 원고가 있어서 쓰는데, 파리가 서너 마리가 얼마나 성가시게 구는지... 이놈의 파리는 쫓으면 갔다가 영락없이 제 자리에 돌아옵니다. 겁도 없이 펜을 쓰고 있는 손등을 막 기어 다녀요. 요걸 어떻게 하나, 일어나서 콱 잡아버리고 말까? 그러면 내가 쓰는 그 내용하고 너무 안 맞아. 성가시고 귀찮은 것들을 내가 어떻게 하면 좀 받아들인다고 할까요? 수용한다고 할까? 이런 열린 마음이 있어야 우리가 추구하는 생태적 삶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제가 어느 소나무 하나를 만났어요. 보는 것이지요. 소나무가 아주 건강하게 잘 자랐어요. "야, 참 잘 생겼다 건강해 보이고. 비결이 뭐냐"하고 물었죠. "비결은 무슨 비결이 있냐? 그냥 아래위로 열어 놓고 살면 돼." 그래요. 그게 뭐냐 하니까 위로는 하늘을 향해 열어놓고 아래로는 땅을 향해 여는 것이지요. 뿌리가 건강하고 잎이 건강하다는 것은 열린 것이지요.


 
폐쇄적인 것은 병들었다는 것이지요. 건강한 사람은 다 열어놓고 살지요. 내 양심에 하나 걸림이 없다면 닫혀 놓을게 뭐가 있겠습니까? 양심에 걸림이 없다는 것이 건강한 삶이겠지요? 보디빌딩을 해서 근육이 나오는 것이 건강한 삶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어디다 갖다놔도 전혀 감출 것이 없는 삶을 누가 산다면 저는 그 사람이야말로 건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무가 그렇더라구요. 만약에 뿌리가 대지하고 단절됐다면, 막혔다면 또는 하늘과 이 나무의 잎이나 가지가 어떤 이유로든지 막혔다면 은 이 나무는 병들어 죽겠지요. 요새 코팅 기술이 발달되었는데 누가 나무 잎을 전부 코팅해놓으면 그 나무는 금방 병들어 죽을 것입니다.
닫힌 건 죽는 것이지요.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사람이 열려있지 않은 것 같아요. 선사라든가 다른 종교의 스승들이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가리지 말고 열어 놓으라고 합니다. 가리지 말고..... 요것은 마음에 드니까 너는 오고 너는 마음에 들지 않으니까 너는 오지마 그런 게 아니라, 어떤 누가와도 다 받아들일 수 있고 또 간다면 누구나 다 보낼 수 있는 그게 열려있는 것이지요. 들어왔다가 못 나가면 그건 닫혀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들어왔으니까 마음대로 나갈 수 있고 또 나가면 언제든지 들어올 수 있고 이게 열려있는 문이지요.


  절에 갈 때마다 저는 일주문을 보면서 참 기막힌 아이디어로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일주문이 뭡니까? 문은 문인데 문이 없잖아요. 빗장도 없지만 누가 봐도 문입니다. 그런데 열어 잠글 수가 없어요. 항상 열려있는 문이지요. 그러니까. 누구든지 들어가고 싶으면 들어가고 나가고 싶으면 나가고 그게 일주문입니다.

 

  사람이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런 마음가짐으로 살아간다면 영성적 삶이요, 생태적 삶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처음부터 살도록 만들어주신 그대로 살아가라는 것이지요. 억지를 부리지 말고. 움켜잡으려고 하니까 잡는 것이지요. 못나가게 하니까 잡는 것이지요. 그런 것 없이 그냥 언제든지 삼라만상이 다 터져있는 동서남북 좌우 어디를 향해서나 문이 열려져 있는 그런 인간, 혹은 인간 사회, 그것이 건강한 인간이고 생태적으로 건강한 사회일 것입니다.

 

(출처 :어둠 속에 갇힌 불꽃)

출처 : 내 사랑 중국 ♡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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