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과 순자의 인간론 비교연구
서 대 인
Ⅰ. 서 론
A. 연 구 목 적
기독교가 이땅에 전래된 이후, 한국의 다종교 상황으로 인하여 기독교와 타종교간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행해지게 되었다. 기독교와 샤마니즘의 비교연구, 기독교와 불교의 비교연구, 그리고 기독교와 유교의 비교연구 등은 이러한 대화의 시도 또는 결과로써 산출된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연구사례를 볼 것같으면 기독교와 샤마니즘 또는 기독교와 불교의 비교연구에 비해 기독교와 유교의 비교연구가 상대적으로 열세하다는 사실이다. 기독교와 유교의 비교연구는 이들 연구들의 부록 정도로 취급되었다. 더우기, 이 작은 양의 기독교와 유교의 비교연구조차 근본이라 할 수 있는 예수.바울.요한등과 공자.맹자.순자등의 비교연구가 아니라 지엽적인 현상의 문제를 비교연구한 것이 대다수라는 사실이다.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논의된 토착화신학 이다, 1970년대 유신상황에서 발생한 민중신학 은 한국의 고유한 종교.문화.사상을 기독교와 관련하여 연구한 시도를 하였음에도 이러한 비판에서는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러면, 왜 이와같이 한국 기독교신학자들에 의한 유교연구는 소수였고 피상적이었을까? 한국의 신학자들이 유교를 종교로 이해하지 않고 하나의 학문으로 본 편견에서 기인한 것이다. '儒敎의 敎는 宗敎의 敎가 아니라 敎育의 敎이다'는 말은 이를 명백히 보여주는 통설이다. 문제는 종교를 어떻게 정의 하는가에 따라 달라지는데, 이러한 편견은 기독교의 종교정의에 입각하여 유교를 보는 데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 유교가 기독교에서 중시하는 신관, 부활관, 내세관등의 문제를 안다루는 것으로 보여지기에, 신학자들은 쉽게 유교는 종교가 아니다라는 판단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종교학자 기다가와(J.Kitagawa)처럼 "깨우침,해탈, 또는 구원을 목표로 하는 삶의 총체적 지향과 방법" 을종교의 일반적 특징으로 볼 때 유교는 종교인 것이다. 또한 만일 종교를 사람이 종교적 관심을 중심으로 한, 삶의 방식으로 정의 한다면 유교는 확실히 종교이다. 좁은 의미에서 인간 존재의 초월적 근거에 대한 관여라고 해도 역시 유교는 종교인 것이다. 더우기 우리가 고유한 신앙 사상체계와 실천체계 그리고 공동체 조직을 갖고 있으면, 이것은 종교일 수 밖에 없다는 바하(J.Wach)의 종교이해 를가지면 유교는 무엇보다 종교인 것이다. 왜냐하면 유교는 사상체계로써 이른바 四書三經을 실천체계로서 제사라는 종교의례를, 공동체로서 가족이나 국가라는 제의공동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민중신학자나 토착화 신학자들과는 달리, 유교를 분명한 종교로 보고 기독교와 유교의 비교연구를 한 이가 나학진 교수이다. 본격적인 기독교와 유교의 비교연구는 나학진 교수의 학위논문 "The Political Relevance of Jen in Early China and Agape in the Theology of Reinhold Niebuhr" 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 인물과 선진 유교의 인물의 비교연구가 아니라, 현대 신학자와 선진유교의 인물비교이기에 아쉬움이 있다. 비록 정치영역으로 양자를 비교연구하나 전체적인 핵심사항은 잘 다루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송기식 교수의 학위논문 "묵자와 Reinhold Niebuhr의 사회사상 비교연구"도 주목할 만하다. 비록 우리의 논의 밖인 기독교와 묵자의 비교연구이나, 묵자의 사상을 단순한 철학사상이 아니라 종교사상임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묵자의 天이해는 유교의 天이해를 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공자의 天사상이 단순한 철학사상이 아니라, 거의 동시대인인 묵자에 의해 당대 사회에서 실제로 사람들이 신앙했던 신앙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송기식교수 역시 현대신학자와 묵자의 비교라는 아쉬움은 있다. 이 논문은 사회사상적 측면에서 양자를 연구 하였으나, 전체적으로 핵심사상을 잘 비교하고 있다.
한편, 천주교 신자이면서 한국 유교의 권위자인 금장태교수의 학위논문 "동서교섭과 근대 한국사상의 추이에 관한 연구"(1978)라는 기독교와 유교의 비교연구가 있다. 이 연구역시 양 종교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초기사상의 비교 연구가 아니라 주로 한국 초기 기독교(천주교 중심)와 유교의 접촉에 한정되어 있다는 점이 아쉽다. 그러나 양자 접촉시의 사상사적, 사회적, 역사적 상황을 살피는데 있어서는 좋은 지침을 주고 있다.
3세대 토착화 신학자라 할 수 있는 이정배교수의 바젤대학 학위논문 "오늘날 한국 기독교 토착화의 관심의 빛에서 본 신유교와 신개신교 사이의 공동구조와 문제점들"(1986) 은기독교와 유교의 비교연구에서 돋보이는 논문이다. 유교사적인 흐름에서만 보더라도 공자의 인격적.주재적 天사상이 신유학에 흘러 철학적, 합리적 理(궁극적 원리)로 변천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 더우기 주희와 슐라이에르마허, 퇴계와 빌헬름 헤르만, 율곡과 트뢸치의 비교연구는 이제껏 시도된 바 없는 괄목할 만한 것이다. 필자의 입장에서 아쉬움이 있다면, 이들의 비교연구와 더불어 초기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비교연구가 있었으면 하는 점이다.
지금까지의 연구사적 맥락을 살펴 볼 때, 우리는 이제껏 초기 기독교의 핵심인물과 선진유교의 핵심인물 비교연구 즉, 초기 기독교의 사상과 선진 유교의 사상비교 연구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필자는 본 논문에서 양 종교의 핵심 인물인 바울과 순자를 비교 연구하려는 것이다.
바울과 순자를 비교 연구함으로서 필자는
첫째, 기독교와 유교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을 보여 올바른 대화의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최근 핫 이슈가 되고 있는 다원주의 논쟁이 같은 점에만 몰두하여 양자의 접촉점을 찾으려는 잘못을 범하고 있음을 밝히려고 한다. 형식적으로는 같아 보이나 양자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근본적으로 기독교는 신과 사람의 질적 구분을 인정하는 '참여의 원리'를 말하는 데, 유교를 비롯하여 동양의 종교는 신과 사람의 질적 구분을 인정하지 않는 '동일성의 원리' 유교의 天人合一, 힌두교의 梵我一如, 불교의 聖俗一如 - 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것을 억지로 같게 만들기 보다는 서로의 다름을 솔직이 인정하고 바로 거기서부터 대화는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둘째, 올바른 윤리관을 제시하고자 한다. 오늘의 한국적 상황에서 윤리성의 상실은 엄청난 사회적 혼란을 야기시켰다. 특히 한국 기독교의 윤리성의 상실은 신앙과 행위를 총체성에서 파악하지 못하고,'믿음만을' 강조하였기 때문이다. 본론에서 상술하겠지만 바울은 믿음과 행위를 결단코 분리시키지 않는다. 오늘날에 以信得義와 그리스도인의 윤리(성결)를 구원의 총체성으로 파악하는 웨슬레(J.Wesley)신학에 관심을 모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째, 한국의 기독교인으로 하여금 우리 민족문화의 큰 뿌리를 형성하고 있는 유교를 올바르게 이해하도록 돕고자 한다. 역으로 유교인들 역시 본 고를 통해 공자.맹자 뿐아니라 선진유가의 큰 산맥인 순자도 이해하며, 기독교의 핵심을 이해하였으면 하는 것이다. 큰 계명인 '이웃 사랑'을 한국사회에서 실현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이웃이자 형제인 한국인들이 어떠한 사람인가를 이해하지 않고는 불가능하여 그 이해의 관건은 문화의 내용인 종교를 이해함에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개종이 아니라 대화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본다.
네째, 이런 공감적 이해를 바탕으로한 이웃사랑을 근거로 하여 기독교와 유교 모두 올바른 선교 방향을 제시할 수 있겠다. 공자는 "아침에 道(The Way 또는 The Truth로 영역됨) 를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夕死可矣)라며, 道를 평생 추구하였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요 14:6,I am the way,the truth, and the life)라고 말씀하면서 자신이 바로 道이심을 보이셨다. 성현들의 말씀을 서로 익히고 신앙하며 비교연구하는 가운데서 우리는 선교의 접촉점과 방향성을 성찰할 수 있을 것이다.
B. 연구범위 및 방법
본 논문의 방법은 바울서신과 순자의 문헌 분석을 통해 이루어진다. 바울서신에 있어서는 어떤 서신까지를 인용할 것인가 라는 문제가 있다. 본문 비평학은 바울 서신을 1차 서신과 2차 서신으로 나누기도 하나, 필자는 13서신을 모두 바울의 서신으로 본다. 본문비평학의 공헌을 인정하면서도 1.2차 서신의 구별은 하나의 가설이며 전통적으로 13개의 서신을 바울의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본고는 바울을 통해 기독교의 정수를 이해하고자 하므로, 이른바 2차 서신에도 바울의 사상이 담겨 있을 뿐 아니라 여기서도 기독교의 정수를 이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순자에 있어서는 유교의 정수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왜 孔子.孟子(이하 공.맹으로 표시)를 논하지 않고 순자를 논하는가 라는 문제가 답변될 필요가 있다.
첫째, 순자를 이해 하려면 전이해로서 공.맹을 알아야만 하므로 순자의 논의를 진행 할 때, 공.맹을 언급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우리가 공.맹은 알았으되 제국시대 시작 이래 송대 신유학이 발생하기 이전 처음 천년 동안까지 맹자보다 정치적으로 학문적으로 더 영향력을 발휘한 순 에 무지하기 때문이다. 순자는 맹자와 아울러 거의 같은 시대에 공자의 道를 객관적으로 祖述한 대유학자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세째, 순자의 성악설 주장이 인간을 죄인으로 보는 기독교이해와 동일한 것으로 보는 유형론적 사고의 위험을 시정할 필요에서 필자는 공.맹보다 순자를 택하였다.
이러한 바울과 순자의 모든 사상을 비교연구함이 좋겠으나 필자의 역량상 바울과 순자의 인간론에 촛점을 맞추려고 한다. 우리는 신론, 구원론 등으로 비교 연구할 수 있으나, 굳이 인간론을 중심으로 양자를 비교연구함은 "이 인간학들은 사람들이 비인간성의 경험속에서 묻는 바, 저 인간성의 구상을 내포하기 때문에 언제나 또한 구원론(Heilslehre)을 제공" 하기 때문이다. 실지로 인간론만 꿰뚫으면 양자의 핵심사상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는 인간론을 중심으로 양자를 비교하려고 한다.
방법론적으로 바울서신과 [순자]문헌을 1차 자료로 활용하되, 이들에 관한 학자들의 연구결과를 2차 자료로 활용하고자 한다.
바울서신의 인용에 있어서는 개역성경과 공동번역을 사용할 것이다. 그러나 필요한 경우에는 희랍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순자인용에 있어서는 한글역주를 활용하되, 한문은 주에서 사용하기로 한다.
이러한 방법하에 Ⅱ장에서는 순자의 인간론을, Ⅲ장에서는 바울의 인간론을, Ⅳ장 결론에서는 양자의 사상 대비및 전망을 해보고자 한다. 논문제목과 달리 순자가 바울보다 앞서 소개됨은 연대적으로 순자가 앞설 뿐아니라, 기독교적 전이해 없이 순자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였으면 하는 필자의 바람이 작용한 것이다.
Ⅱ. 순자의 인간론
[大學] 강령에 "사물은 근본과 끝이 있고, 일은 끝과 시작이 있으니, 먼저하고 뒤에 할 바를 알면 道에 가까울 것이다" . 순자의 인간론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순자의 天이해를 알아야만 한다. 왜냐하면 순자의 인간론은 그의 天이해 필연적으로 정립된 것이며, "중국인의 세계관에 있어서 근본은 天의 사상" 이기 때문이다.
A. 순자의 天이해
순자의 天이해는 그의 고유한 사상의 기초를 형성하는데, 이것은 중국의 전통적인 天이해에 대한 성찰을 통해 비롯했다. 따라서 먼저 전통적인 天이해를 살펴본다.
1. 전통적인 天이해
a. 天의 명칭
선진시대의 문헌을 볼 것 같으면, 天 말고도 여러 다른 명칭들이 병행되어 사용되고 있다. 이것들은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神을 시대와 지역의 차이에 따라 다르게 사용된 것이다. 天의 명칭에 대한 여러 설명이 있는 데, 필자의 검토 결과로는 정다산의 견해가 가장 뛰어난 것으로 판단되었다. 이에 주로 정다산의 견해를 중심으로 天의 명칭을 논한다.
天이라는 개념(명칭)은 주로 周대 이후에 쓰였던 것으로 그 이전에는 上帝, 帝, 皇天上帝, 皇天, 昊天, 旻天 등으로 나타났다. 어느 학자들은 호칭에 따라 다른 존재로 구분하고 있기는 하나, 다산은 上帝.天을 유일한 주재자로 확인하고 上帝가 天의 바른 명칭이요, 昊天이 정호이며, 皇天, 旻天도 별호가 되고, 天도 별호의 하나로 보았다. 이 한 天은 단순히 자연의 물리적 하늘(天)에 대한 숭배로 이해 되었다기 보다는 대체로 귀신이나 사람 또는 만물에 대하여 초월적.지배적 의미를 가지는 인격신으로 드러났다.
b. 전통적인 天이해
순자 이전까지의 天에 대한 이해는, 유교뿐만이 아니라 제자백가들이 天을 모두 인격적.주재적 天으로 파악하였다는 것이다. 먼저 고대 중국의 天이해가 잘 나타나 있는 [詩經]과 [書經]에 나타난 天이해를 살펴보자.
첫째, 天이 사람을 낳았다. "天이 민중을 낳으셨으니 사물에는 법칙이 있고, 백성들은 이 떳떳한 것을 잡고 있으니 이 아름다운 덕을 좋아한다."(天生烝民 有物有則 民之秉彛 好是懿德)[시경:大雅]
둘째, 天이 사람을 사랑한다. "크도다 상제여! 하계에 임하시어 빛나시니 사방을 감독하고 돌보셔 백성의 고통을 구제하신다." (皇矣 上帝 臨下有赫 監觀四方 求民之莫)[시경:大雅] "天도 또한 사방의 백성에 대해 슬퍼하시니 돌아보아 명하시고 용무(힘쓴다)하신다."(天亦哀于四方民 其眷命用懋)[서경:召誥]
셋째, 天이 사람에게 감응하신다. "상제가 너에게 임하신다."(上帝臨女)[시경:大雅] "오직 이 왕계(문왕의 조상)는 상제께서 그 마음을 헤아리신다."(維此王季 帝度基心)[시경:大雅]
넷째, 天은 사람의 제사를 흠향하신다. "지극한 정치는 향기롭고 향기로와 신명에 감흥되는데, 서직(제사에 드리는 제물)이 향기로운 것이 아니라 밝은 덕 이것이 향기롭다."(至治馨香 感於神明 黍稷非馨 明德是馨)[서경:君陣]
다섯째, 天은 사람과 사회에 상벌을 주신다. "天은 어지러움에게 멸망을 내린다."(天降喪亂)[시경:大雅]
여섯째, 天은 만물의 창조자이다. "天은 높은 산을 만드셨다."(天作高山)[시경:周頌]
이상에서 우리는 天이 자연의 물리적 하늘이 아니라, 기독교의 하나님과 비슷한 인격적.주재적 고유신임을 알 수 있다.
전통적인 제도나 사상을 전승하는 사람으로 자처한 공자 에게 있어서도 天의 이러한 성격은 그대로 유지된다. 匡땅의 사람들과 사마환퇴가 공자를 죽이려고 했을 때도 天에 대한 신뢰로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은 것이나, 天이 자신을 당대의 목탁으로 삼았다는 굳건한 사명의식에 있었다는 사실등에서 공자가 인격적.주재적 天을 신뢰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공자의 道統을 이어 받았다고 자처한 맹자에 있어서도 이러한 天觀은 그대로 이어진다. 맹자는 자신이 바라는 것은 공자를 배우는 것이라 하였다. 맹자가 당시대의 풍미했던 양주와 묵적의 사상을 배척하고 공자의 道를 높이려함 을사명으로 하였기에 이것은 당연한 사실이 되는 것이다. 선양이라는 것이 임금에 의한 것이 아니라 天에 의한 것이라고 한 점, 자신의 성품을 잘 닦으면 天을 알 수 있다고 한 점, 그리고 난세에 질서를 잡으려는 天의 의지가 있다면 반드시 자신을 사용할 것이라고 확신한 사실등은 그가 인격적.주재적 天의 전승을 이어 받았음을 보인다.
2. 순자의 天이해
순자의 天이해는 그의 저서 [순자]여러 곳에서 드러나는데, [天論]부분이 집중적으로 天에 대한 서술을 하고 있다. 그런데 그는 앞선 공자와 맹자의 天사상을 배격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의 天이해는 이전의 인격적.주재적 天의 죽음을 선언하고, 물리적 天만을 긍정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중국사상사에 있어서 코페르니쿠스적인 대전환을 가져온 것이다. 지고신의 天은 사라지고, 문자 그대로 푸른 하늘로서의 물리적 天만이 남은 것이다. 그리하여 비로서 진정한 의미의 중국의 인본주의가 비롯하게 되었다.
이것은 중국의 天人合一사상에 있어서 놀랄만한 일대혁명인 것이다. 순자이전의 사상가들은 어느 한 사람도 감히 공공연하게 天과 人이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들고 일어나지 못하였다. 孔孟이 비록 귀신을 말하지 아니하였다 하지만 天命을 믿었고, 老莊이 비록 천명을 믿지 아니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天人合一을 강조하였고, 墨子가 비록 非命을 주장하였다고 하지마는 귀신의 위력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제각기 天에 대한 관점이 서로 다르다고 하지만, 天에 대하여는 아주 깊은 존경을 지녔고, 또한 그들 모두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간에 天은 우리 인류의 운명을 지배한다고 믿었다.
그렇지만 순자의 눈에는 이와는 달리 天은 자연적인 天으로서 옛사람들이 神과 鬼를 의심하던 말을 전연 그의 안중에 두지 않았다. 그는 天人感應이 무엇이며, 天意天命이 무엇이냐고 철저히 부정하여 버렸다. 그는 晝夜의 바뀜이나 四時의 변환은 모두 자연적인 운행이며 그들 대로의 궤도가 있을 뿐이지 우리의 人事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라고 믿었다. 또한 일식이나 월식, 폭풍우, 지진, 산사태, 홍수나 가뭄 등등은 단지 자연의 본연인 것이지 그것이 국가의 정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하였다. 天은 인간이 추위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겨울을 있게 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天이 堯임금을 있게한 것도 아니고, 桀임금을 망하게 한 것도 아니며, 단지 기계적인 운동일 따름이라는 것이다.
" 天道 곧 자연이 운행하는 길은 일정불변한 것이다".
" 국가의 치란은 天에 달려있는 것일까? ... 치란은 天에 있지 않다".
" 군자는 자신에게 속한 것은 신중히 하고 天에 속한 것을 추구하지 않으며,소인은 자신에게 속한 것을 두고도, 天에 속하여 있다 하여 天을 추구한다".
이제 순자에게는 天은 더이상 인간에게 길흉화복을 내려주는 인격적.주재적 天이 아니였다. 그것은 물질적인 天으로 전통적인 하나님(天)에 대한 푸르른 하늘 만이 된 것이다. 중국사상사에서 혁명적인 無神論을 주장한 순자는 나아가 자연물이 된 天을 인간의 의지에 따라 인간유익을 위해 이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중국의 고금을 통하여 순자만이 갖는 고유사상이다. 인간을 주재하던 天이 순자에 의하여서는 인간의 지배를 받는 天으로 떨어진다. 즉 순자는 天의 의지와 天의 권위를 부정한 후, 한 발자국 더 나아가서 "사람은 반드시 天을 정복하여야 한다" (人定勝天)는 이론을 내세운 것이다.
"天을 위대하게 알고 그것을 사모하는 것과 물질을 저축하면서 그것을 적절히 다루어서 쓰는 것과 어느 것이 나은가? 天을 따르면서 그것을 찬양만하는 것과 天으로부터 말미암은 성질을 잘 다루어서 그것을 이용하는 것과 어느 것이 더 나은가? 그러므로 인간의 노력을 버리고 天을 사모하면 만물의 실정을 잃어 버리게 될 것이다."
순자의 이러한 人定勝天의 사상을 극단화한 것은 그 동기의 하나로 老莊自然說에 대한 반발이었다 하는 것이 거론된다. "장자는 天에 가리어 仁을 알지 못한다." 라 하였다. 전체적으로 순자의 사상을 노자에 대한 안티-테제라 보는 자가 많다. 첫째로, 즐겨 관찰하고 분석에 정밀한 과학자로서 상당히 농후한 과학 정신을 지니고 있던 순자는 당시 사회의 최대 결점을 미신이라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미신은 한편으로는 불건전한 사상으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묵자의 明鬼, 고래로 내려오는 敬天畏命(하늘을 받들고 명을 두려워함)의 사상 등을 말하는 것인데, 한편으로는 인류의 惰性과 愚昧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이와같은 전통적인 병폐를 보고 날카로운 그의 制天論을 제기 하였다. 人勝天의 사상은 순자가 살던 역사적 상황과 그의 논리의 맥락에서는 이와같이 필연적인 결론이었다.
B. 순자의 인간론
순자의 인간론 역시 전통적인 인간론에 대한 성찰에서 부터 전개되었다. 따라서 전통적 인간론을 대표하는 맹자의 인간론에서부터 살펴본다.
1. 맹자의 인간론
공자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맹자나 순자같이 명백한 표현을 하지 않았다. "본성은 서로 비슷하나 후천적인 습관에 따라 서로 멀어지는 것이다." "오직 최상의 지혜자와 최하의 바보만큼은 바뀔 수 없다." 는 표현정도가 그가 인간본성에 대해 서술한 대략이다.
그런데 공자이후 맹자시대에 이르러 인간 본성에 관한 논의가 크게 일어났다. [맹자]의 [告子]편에 나오는 맹자와 고자의 본성 논의는 이를 잘 입증한다.
맹자시대에 인간 본성의 선악여부 문제는 3개 학설이 있었던 것 같다.
첫째, 인간의 본성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둘째, 인간의 본성은 선해질 수도 악해질 수 도 있다.
셋째, 어떤 인간의 본성은 선하고 어떤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는 것이다.
맹자는 이 모든 것을 비판하고 '인간 본성은 선하다'는 性善說을 주장한다. 물의 본성이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인간의 본성의 선함이 이와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맹자는 확실히 性 그 자체에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는 타요소가 있는데, 그 요소를 적절히 조절하지 못하면 악으로 이끌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맹자에 의하면 이런 것들은 인간과 기타의 생물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요소들이며 인간 생활의 동물적 측면이므로 이 측면은 엄밀히 말해 인간 본성의 일부라고 간주해서는 안된다고 보는 것이다.
맹자는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것을 유추와 직관에 의해서 설명한다. 사람들의 미각, 음감, 안목등이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인 것처럼 모든 사람의 마음은 인간의 선한 행위를 보면 좋아하므로 인간의 본성은 선을 좋아함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직관에 의한 성선설의 증명은 孺子入井(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것을 본 사람의 행동) 비유에서 볼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남의 고통을 차마 보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이제 어떤 사람이 한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보았다고 하자. 그러면 누구나 깜짝놀라서 惻隱한 마음을 갖게될 것이다. .....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서 惻隱한 마음이 없으면 인간이 아니요,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인간이 아니요, 辭讓하는 마음이 없으면 인간이 아니요, 是非를 가리는 마음이 없으면 인간이 아니다. 측은한 마음인 仁의 端이요.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義의 端이요, 사양하는 마음은 禮의 端이요, 시비를 가리는 마음은 智의 端이다. 인간이 이 四端을 가진 것은 마치 四枝를 가진 것과 같다. .... 이 四端이 자기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서 확충해 나가면, 마치 불씨가 처음 붙는 것과 같고 샘물이 처음 흘러나오는 것과 같다. 인간이 마음을 확충시킬 수 있다면 천하라도 保全할 수 있지만, 만일 이 마음을 확충하지 못하면 부모조차 섬길 수 없게 된다."
이 말 가운데 관건은 乍見(갑자기 언뜻 보는 것)과 將入(막 들어가고 있는 찰나)이라 하겠다. '갑자기 보는 것'이란 어떤 심리적인 준비가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막 들어가고 있는 찰나'는 현재 바로 진행되고 있는 과정속의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맹자의 성선설을 긍정하더라도, 현실적으로 드러나는 악에 대한 설명은 어떻게 되는가 라는 물음이 생긴다. 맹자는 이것을 침묵하지 않고 대답한다. 본성이 선한 인간이, 나쁜 일을 하는 것은 인간이 놓인 나쁜 환경에 의한 것이지 천성이나 인간적인 자질이 악해서 연유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자기의 성선을 다 발휘시키지 못한 데에 있다고 보았다. 맹자는 이를 우산의 나무비유로 설명한다. 그것은 마치 우산의 나무와 같은 것이다. 우산은 본래 아름다운 나무가 빽빽히 우거졌던 것인데, 인근의 주민들이 나무를 도끼로 찍어 내어 산을 깍아 버렸던 것이다. 이것을 보고서 우리는 "우산은 원래 나무가 자라지 않았다"고 말을 한다. 이와 같은 말은 사람이 악을 행한다고 해서 그것으로 말미암아 인성도 본래 不善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외부의 환경에 의하여 악에 빠진다고 하면, 결국 인간성 가운데 악으로 향하는 성질이 있음을 역설적으로 긍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인간이 악으로 향하는 성질을 완전히 가지고 있지 않다면, 어떠한 환경에 놓여진다고 하더라도 악한 일을 행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맹자의 성선설은 기독교와는 달리 악의 기원을 충분히 설명하고 있지 않다.
2. 순자의 인간론
a. 성악설
이때까지의 맹자의 성선설의 이해는 앞에서 본 것과 같이 유추와 직관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으로는, 이보다 맹자의 天이해 때문에 天에 내재한 인간의 性은 선한 것이다 라는 주장이 나온 것이라고 판단된다.
공자의 후손으로 맹자의 스승이며 [중용]을 저술한 것으로 알려진 자사(子思) 는[중용]의 첫 장을 "天이 명하신 것을 본성이라 하고, 본성을 따르는 것을 道라 하며, 도를 닦는 것을 가르침이라고 한다." 는말로 시작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맹자는 "자기 마음을 극진히 한 사람은 자기의 본성을 알고 자기의 본성을 아는 사람은 天을 안다." 고응답하였다. 물론 여기서의 마음은 앞의 성선설에서 언급했던 '不忍之心'(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과 '惻隱之心'(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말한다. 즉, 맹자는 子思의 가르침을 그대로 이어받아 인격적.주재적 天이 내재하던 것이 인간의 본성이므로, 그 본성을 온전히 안다면 天을 알 수 있다고 한 것이다. 맹자에게 있어 선을 대표하는 天이 본성에 내재화되어 있으므로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는 추론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다.
바로 같은 맥락에서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는 순자의 성악설을 잘 설명해 준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앞에서 순자의 天에 대해 보았듯이, 순자는 인격적.주재적 天을 부인하고 물리적 푸른 하늘만을 인정하였으므로, 순자는 공자나 맹자처럼 天과 사람의 인격적 관계를 긍정할 수 없었다. 따라서 순자에게는 인격적.주재적 天이 없는 인간의 본성은 자연상태에서 악한 것으로 관찰되고 해석되어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공자가 '인간의 본성은 서로 가깝다'라고 한 말이, 天을 어떻게 이해하였는가에 따라, 맹자에게는 성선설로, 순자에게는 성악설로 이해되어진 것이다.
자연상태에서의 인간을 '인간은 인간에 대하여 늑대'(homo homini lupus)라고 갈파했던 홉스(T.Hobbes)처럼, 순자 역시 전국시대의 약육강식의 사회를 보고는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순자가 살던 시대는 어지러운 세상으로 예의는 행해지지 않고 교화는 이루어지지 않으며 어진 사람은 핍박을 당하고 온 세상이 어두웠으며 행동이 온건한 사람도 중상을 당하고 제후들은 망해가는 그런 시대였다. 순자가 인간의 본성을 악이라고 본 것은 그러한 시대에 살다간 사상가로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순자의 성악설이 잘 드러나는 성악편은 시작부터 "인간의 본성은 악한 것이니, 선은 인위(僞) (거짓의 의미가 아니라 글자 그대로 人과 爲가 합쳐진 인위적 노력을 말한다)이다." 라는 명제를 사용한다. 우리는 성악편 곳곳에서 이 명제 즉 "人之性惡 其善者僞也"를 볼 수 있다.
순자는 맹자의 성선설에 대해, 맹자가 性을 선하다고 본 것은 선천적인 인간의 본성과 인간의 노력에 의하여 후천적으로 얻어지는 성향과를 잘 구별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비판하였다. 또한 순자는 맹자가 사람의 본성은 선한데, 그 본성을 잃기 때문에 악하게 되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만일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본성대로 내버려 둔다면 인간은 결국 악해질 것이라고 말하였다. 뿐만아니라 인간이 선한 행위를 하려 하는 것도 사실은 그 본성이 악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자기에게 없는 것을 가지고 싶어하는 성향을 가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보기 흉하면 아름다와지기를 바라고, 가난하면 부자가 되고 싶어하고, 좁으면 넓어지기를 바라는 것 등이 인간의 감정이라는 점을 근거로 하여 말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로써 보면, 사람이 선한 것을 좋아하는 것도 사람의 본성이 악하다는 증거가 된다.
또한 인간사회에 도덕과 예법이 있어야 하고 훌륭한 통치자와 법이 있어야 하는 것도 인간의 본성이 악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았다. 만일 통치자도 없고 도덕(禮)도 없는 사회가 존재한다면, 강한 자는 약한 자의 것을 약탈할 것이고 강한 집단은 약한 집단을 파괴시켜 버릴 것이기 때문에 한참을 기다릴 것도 없이 그 사회는 난장판이 되어 망하게 될 것이다. 순자는 바로 이러한 점을 예로 들어 인간의 본성은 분명히 악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또한 사람이란 자기에게 오는 이익을 좋아하고 물건을 소유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본성대로 놓아두면 형제사이라도 다투게 되지만 교육에 의해서 본성을 교화시키면 딴 남에게라도 사양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따라서 순자가 생각하기에 인간에게 있어 선함이란 인간의 후천적 작위에 의한 것일 수 밖에 없었다.
이상의 논의를 요약 정리하면, 순자는 세가지 방법으로 그의 성악설을 뒷받침함을 알 수 있다.
첫째, 인간이 덕을 추구함은 덕이 그 안에 없기 때문이요,
둘째로, 당시의 사회악 관찰에서 성악설을 정립했으며,
셋째로 天이 없는 인성은 악하기 때문에 거룩한 통치자와 도덕적 표준인 禮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순자의 인격적.주재적 天을 타파한 필연적 성악설에도 맹자의 성선설에서와 같이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첫째, 인성이 악하기만 하다면 어떻게 禮의 교육으로 인성이 순화되는 것일까? 禮에 의한 변화를 긍정한다면 결국 인간성안에 선으로 향하는 성질이 있음을 긍정하는 것이 아닌가? 만약 인간이 禮에 의해 선으로 향하는 성질을 완전히 가지고 있지 않다면, 어떠한 환경에 놓여진다고 하더라도 선한 일을 행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성인에 의한 예의 교육으로 인성의 변화를 긍정하더라도, 그럼 그 성인은 무엇에 의하여 자신의 인성 변화가 있었겠는가 하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순자에게서 찾을 수 없다. 그가 성인에 의한 예의 교육을 전제로 하여 그의 논리를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의 판단으로는 이 문제에서 순자는 자기 모순에 빠진다고 판단된다. 그가 말하는 성인은 순자이전의 사람으로 성선설에 입각하여 인격적.주재적 天을 내재화하여 그것으로 예를 발생시켰기 때문에, 성인의 예는 순자처럼 인격적.주재적 天을 타파하여 성악설에 입각한 인위에 의해 만들어진 예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순자는 고대의 예와 현재의 예를 같은 기원에 의한 것으로 잘못보는 오류를 범한 것이다.
맹자는 성선설에 관해서 인간이 본능적으로 갖추고 있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그대로 기르면 예로 된다고 역설하였다. 말하자면 예는 인간이 자연적으로 갖고 있는 천성에서 생겼다고 하여 자연발생설의 입장을 취하였다. 그런데 순자는 이 자연발생설을 부정하고 예는 군주의 자각적인 판단이라는 인위에서 생겼다고 한다. 이렇게 순자는 자신의 예를 맹자의 예와 구별하였다. 그런데도 때로 순자는 그의 저서에서 양자를 같은 것으로 혼동하여 사용하는 잘못을 범한 것이다.
b. 禮 論
성선설을 주장한 맹자에게는 인성의 선함은 'a priori' 이며, 그의 악함은 'a posteriori'이다. 그러나 성악설을 주장한 순자에게는 거꾸로 인성의 선함은 '후천적'이며, 그의 악함은 '선천적'이다.
순자에 의하면 자연 그대로의 인간은 무한한 욕망을 가진 것이다. 만약 이것을 방임하면 사람과 사람의 욕망은 상호충돌하여 사회는 커다란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 혼란을 평정하기 위하여 예의가 생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사람의 성품은 악하다. 반드시 스승의 법도를 기다린 뒤에야 바르게 되고 그 예의를 얻은 뒤에야 다스려진다."
"예는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 선왕은 그 혼란을 싫어하였다. 그러므로 예의를 제정하셔서 나누어 놓았다. .... 이것이 바로 예가 일어난 이유인 것이다."
순자에 의하면 예란 인간도리의 극치이며 성인이란 도의 극치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그는 예를 강조한다. 이른바 "예는 원래 원시적 종교의례라는 뜻에서 출발하였지만 귀족들 사이의 사제의례, 질서 문화의식 등은 의미하는 것으로까지 발전하였다." 순자에게서 우리는 이러한 예의 변화된 모습을 뚜렷이 볼 수 있겠다.
인격적.주재적 天을 배격하고 물리적 하늘을 얘기한 순자로서는, 묵자처럼 天에 의한 인성변화를 말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인성이 악하다고 본 상태에서 심성에 근원을 둔 인성변화를 말할 수도 없었다. 따라서 순자는 天도 심성도 아닌 인간 외부의 예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즉 "그는 먼저 천명의 관념을 타파하고 인성의 비밀을 끄집어 낸 후에 다시 禮의 정신을 강조하였다."
순자는 이 禮라는 것을 통하여 인간 욕망으로 발생한 혼란을 평정할 수 있으며, 또한 인성을 변화시킬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순자는 밖에서 안을 규정하는 禮로서 사람들이 살아가기를 권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성은 본래적으로 악한 것이므로, 선천적으로는 이 예의를 알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달리 말하여 禮의 無知에서 惡이 비롯한다고 볼수 있다. 따라서 순자는 악을 극복하는 예의를 알기 위하여서 인간은 스승을 통해 부지런히 애써 학문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의도에서 순자는 그의 저서에서 [勸學]편을 맨 앞에 두고 바로 다음에 [修身]편을 두어 학문에 의해 禮를 알고 이를 힘써 닦을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할 때 누구나 化性起僞하여 禹임금같은 성인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기독교적으로 말한다면 순자는 罪와 苦의 원인이 無知와 無明에서 온다는 동양적 사고에 있다. 그러나 성서적 인간관은 이 점에서 전적으로 다르다. 죄는 自由에서 온다고 본다.
자유의지의 남용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분리하여 죄가 발생한 것으로 본다. 또한 순자는 이 점에 있어 맹자와도 다르다. 맹자의 의가 안으로부터 항상 발전하는 일종의 덕이라면, 순자의 예는 밖으로 부터 안으로 마음을 향하여 압축하는 일종의 법인 것이다.
그러나 순자의 예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인성을 결속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일정한 범위안에 있어서는 그 정욕을 이루게 하는 도구이니, 곧 예는 적극.소극의 두 방면을 가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발생하는 또 한가지의 문제는 본래 예와 법은 다르고 예의 구속력은 약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혼란을 평정할 형벌의 뒷받침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예의 실행을 유효하게 하는 어떤 권위가 없다면, 그 예는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 그 권위를 순자는 성인에 두고 있다. '제 사람의 성품은 악하다. 반드시 스승의 법도를 기다린 뒤에야 바르게 되고 그 예의를 얻은 뒤에야 다스려진다.'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순자의 이러한 논리를 우리가 따라 갈지라도 앞서 제기한 바와같이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순자는 단지 인위로서 선을 풀이하였을뿐, 성품이 악한 사람이 어떻게 '인위적 선'을 가질 수 있는지는 설명할 수 없으며, 역시 스승의 법도가 어디로부터 세워질 수 있으며, 예의가 어디에서 생겨났는지를 설명할 수 없었다." , 성인도 보통사람도 한 가지로 인성이 악한데, 어디서부터 근거하여 그 성인은 성품을 변화시켜 인위를 일으킬(化性起僞)수 있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앞에서 예의 기능을 위해서 성인이 필요함을 말하였다. 성인은 혼란을 싫어하여 이를 평정하기 위하여 예를 만들었는 데, 성인은 동시에 예를 유효하게 하는 권위도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성인의 존재만으로 예의 유용성은 보증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욕망을 추구하는 악한 사람들에게는 성인은 고대의 사람이요, 지금 이 세대에는 없는 사람이기에 현세대의 예를 유효하게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예에 권위를 갖게 하기 위해 순자는 성인과 함께 '後王' 즉 현재의 왕을 존중할 것을 역설한다.
"성왕의 자취를 보고자 한다면, 그 찬란한 것으로는 후왕이 바로 그것이다. 저 후왕이란 천하의 임금이다. 후왕을 버리고서 상고를 말한다는 것은 비유컨대 마치 자기 임금을 버리고서 남의 임금을 섬기는 것과 같은 것이다."
바로 이것이 순자의 法後王사상 이는. 述而不作정신에 충실하여 복고성을 중시하는 유교에 있어 이 사상은 성악설과 더불어 매우 혁신적인 설이다.
c. 제사문제
순자는 당시 사람들이 신앙하였던 天이 자연물인 하늘일 뿐이라고 논파하였다. 따라서 이처럼 자연물인 天은 그 자체의 법칙에 의해서 운행하는 것이므로 天을 제사하여 행복을 얻고자 한다든가, 비가 오지 않아 가뭄이 들 때 제사를 지내는 것은 완전히 무의미한 것이라 한다.
그러면 제사라고 하는 인간의 행위가 완전히 쓸모없는 것이고 폐지해야 할 것인가? 라는 질문이 생긴다. 이에 대하여 순자는 역설적으로 제사를 긍정한다. 전통적으로 가장 중요한 졔사는 祭天과 祭祖였는데, 순자는 제천에 대해서는 소극적이요, 제조에 대하여 긍정한다. 역설적으로 순자가 제사를 긍정함은 순자가 가장 존중한 禮 가운데는 제례가 있고, 제례의 의식을 폐지하는 것은 불가능 하였기 때문이다. 또 天을 제사하는 의식도 이미 습속화되어 있었고, 이것을 한꺼번에 중지할 수는 없는 것이다. 더우기 가뭄에 기우제를 지내지 않는다거나, 큰 일을 결정할 때에 복서로써 神意를 묻는 것을 그만두면 민중의 불안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
그러니까 순자가 제사를 긍정함은 天이나 조상의 영이 살아있음을 믿는 까닭이 아니라 백성들의 불안을 해소시키기 위한 정서적 문식에 까닭이 있는 것이다.
"기우제를 지낸 뒤에 비가 내리는 까닭은 무엇인가? 아무런 이유도 없다. 기우제를 지내지 않아도 비가 오는 것이나 마찬가지 이유다. 일식이나 월식이 생길 때, 해와 달을 되살리려 한다. 날씨가 가물면 기우제를 지내고, 점을 쳐본 뒤에 중대한 일을 결정한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우리가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문식을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그것을 문식으로 생각하는 데 백성들은 그것을 귀신의 일로 생각한다. 그것을 문식으로 여기면 흉하다."
위의 말은 순자의 종교관과 제사관 등을 분명히 보여 준다. 영적 실재는 없는 것이요, 있는 것처럼 제사함은 정서적 고양을 위함이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순자는 중국 종교전통에 있어 획기적 전환을 요청하는 이론을 제시하였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첫째, 인격적.주재적 天을 타파하여 물리적 하늘로 세속화하였다. 둘째, 天의 세속화로 인하여 동양의 전통적인 동일성의 원리인 天人合一을 부정하게 되었다. 셋째, 그의 과학적.철학적 사고에 의한 天의 세속화는 필연적으로 귀신역시 미신임을 보임으로 중국에 있어 미신타파의 선구자가 되었다. 넷째, 제사라는 것이 영적 실재에 복을 비는 미신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되고 인간의 정서적 문식을 위한 것임을 보였다. 다섯째, 법후왕사상을 통하여 요순의 황금시대(Golden Age)를 이상향으로 하는 중국인들에게 그보다 지금 여기(here and now)가 더 중요하다는 현실주의를 주장하였다. 여섯째, 역사적 현실안에서 예의에 의한 인성변화를 강조하여, 인간의 초월적 개방성의 면을 모두 제거하였다.
Ⅲ. 바울의 인간론
지금까지의 바울의 인간론에 대한 신약성서 신학의 해석은 다음과 같은 세가지 방식이었다고 래드(G.E.Ladd)는 진술한다. "지난 세대의 학자들은 바울이 영과 혼과 몸의 보존을 위해서 기도한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을 인간학적인 진술로 이해하고 바울을 3분설적으로 - 영,혼,몸은 분리될 수 있는 인간의 세부분들이다 - 해석하였다. 다른 학자들은 바울을 헬레니즘적 이원론을 배경으로 해석하여 인간은 혼과 몸 두부분으로 구분되는 것으로 보았다. 최근의 학계는 몸,혼,영과 같은 술어들이 인간의 분리될 수 있는 여러 능력들이 아니라 전인으로 보는 여러 방식들에 불과 하다고 생각한다."
첫째와 둘째의 입장은 '현상'과 '본질'이라는 플라톤적 이원론의 세계관을 갖고 있는 서구인들에겐 쉽고도 효과있는 설명일 것이다. 불트만(R.Bultmann)의 바울 인간론은 이러한 유형의 대표적 본보기이다. 그러나 우리 한국인들같이 통전적 인간관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겐 이러한 설명보다 하나님의 형상의 상실과 회복이라는 면에서 바울 인간론을 이해함이 더 유익하다고 판단된다. 이것은 성서의 인간론과도 일치되는 것이다.
필자가 신약신학계의 거장 불트만식의 이분법적 또는 삼분법적 인간론 이해를 따르지 않음은, 그가 예수 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성을 신앙의 차원에서 제거하기 때문이다. 즉 하나의 역사적 사건으로서 부활을 무시하고 지나간다. 기껏해야 부활을 십자가의 의미표현에 불과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불트만의 [신약신학]이후 그의 제자들 뿐 아니라 대부분의 신약신학자들 역시 그들의 신약신학을 불트만의 체제를 따르며, 예수생애 문제에서 부활사건을 제거시켜 기술하고 있다. 그것이 아무리 신약신학계의 거장이라 할지라도, 부활의 역사성을 제거시키는 한 필자는 이러한 바울의 인간론 기술을 추종할 수는 없다. 더우기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14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이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성에서 그의 모든 인간론을 저술하고 있는데, 이것이 부인되면 결코 올바른 바울의 인간론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는 세번째 입장에 서서, 바울의 인간론을 하나님의 형상과 상실과 회복이라는 주제로 연구하고자 한다.
A. 하나님의 형상
성경은 인간의 존재를 단독자로서 보기 보다는 관계의 존재로 보고 있다. 즉,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이해되어지고 있다. 바 역시 "인간을 언제나 그의 신과의 관계에서 보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의 인간론을 말하기에 앞서 '하나님의 형상'을 다루어야 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창1:26-28)는 사실은 무엇보다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이 관계에서부터 출발하여 인간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설명된다. 즉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이웃과의 관계속에서, 자연과의 관계속에서 살아야 할 관계의 존재로 창조되었다고 성서는 바라본다.
이제까지의 하나님의 형상에 관한 논의는 그것의 성격이 무엇인가를 규명하는 데 촛점을 둔 것이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서로 다른 것으로 보는 -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론에 대한 카톨릭의 대표적 견해 - 이레네우스(Irenaeus), 이러한 이원론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바른 관계라고 말했으나 공적 형상과 사적 형상으로 나눈 루터(M.Luther),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의 책임성과 언어능력에 두었으나 내용과 형식으로 나눈 브루너(E.Brunner)등의 견해, 가 대표적인 것이다.
이러한 존재론적 해석외에도 하나님의 형상을 존재유비가 아니라 관계유비로 본 바르트(K.Barth)의 견해, 인간과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에서 자연에 대한 인간의 통치권으로 보는 기능론적 입장 ,삼위일체론에 근거한 사회.정치적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는 몰트만(J.Moltmann)의 견해,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하나님의 생기 곧 하나님의 영으로 보는 전성용 교수의 성령론적 해석 등이 있다.
필자는 이러한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설명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범죄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였는가 여부가 더 중요하다고 본다. 즉 "죄인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는가가 문제이다." 이것이 인간 구원론의 문제에 있어서 핵심요소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루터는 인간의 타락과 함께 하나님의 형상은 완전히 상실되었고, 칼빈은 조금 남았으나 거의 못쓰게 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성서에서 우리는 타락한 인간이 더 이상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는 말을 발견할 수 없다. 이 형상에 대한 언급은 창세기 1장 26,27절 외에도 5장 3절, 및 9장 6절에도 나타나고 있다.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창9:6)는 말씀은 야고보서 3장 9절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해서는 안된다는 말씀으로 이어져 있다. 이러한 성경말씀은 루터와 칼빈의 견해가 그릇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에 의해 원죄의 죄책이 제거되고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부분적으로 회복되었다는 웨슬레의 통찰력은 더욱 성서적이다. "구약성서나 후기 성서적 유대교 어디에서도 아담의 타락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상실되었다는 명백한 언급은 없다." 트필하스(W.Trillhass)는 "인간은 타락 이후에도 하나님의 형상이다." 고단언하고 있다.
그러나 타락한 이후에도 하나님의 형상인 것은 인간의 본래적 속성이 아니라 웨슬레가 강조하는 하나님의 '선행은총'(preventing grace)으로 봐야 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창3:17)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는 범죄하여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을 짐승을 댓가로 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는(창3:21)은총을 보이셨다. 같은 맥락에서 사도바울은 "죄가 .... 나를 죽였는지라"(롬7:11)고 말하면서 동시에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에서 너를 해방"(롬8:2)하였다고 선언한다. 따라서 죄인임에도 하나님의 형상인 것은 죄로 인한 죽은 몸에 하나님이 위로부터 주시는 선행은총으로 인하여 가능한 것이다.
B. 바울의 인간론
1. 죄인으로서의 인간
필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다룬 것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오해했던 것처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존재유비라는 연관성을 말하고자 함은 아니였다. 죄인인 인간에게 찾아와 주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의 은총을 말하고자 함이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에서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어리석음과 사람의 지혜, 하나님의 약함과 사람의 강함을 연관성에서 말하지 않고 구별, 대립된 것으로 보고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성서적 인간이해의 근본은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인 동시에 하나님 앞에 선 죄인이라는데 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임을 보임으로, 자연과 구별된 존재임을 강조하면서도, 인간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죄인임을 창조기사는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바울 역시 이러한 입장을 분명히 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라고 바울은 죄아래 있는 모든 인간의 상태를 말한다. 죄를 범한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왜곡 또는 단절되었다. "인간은 불순종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형상을 잃어버리기 시작" 하고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롬5:12).
인간론에 있어 바울은 "인간 자체를 서술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인간이 하나님과 맺는 여러가지 관계들을 서술" 함을 수 있다. 그런데 이 관계는 앞서 말했듯이 인간이 범죄함으로 단절 또는 왜곡되었다. 따라서 바울은 모든 인간은 남김없이 죄인이라는 명제에서부터 죄를 설명한다.
a. 죄의 성격
바울은 죄의 성격을 대인관계나 율법의 조항 이행 여부등의 수평적 차원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수직적 차원에서 논의하는 특징을 보인다. 즉 바울의 "죄의 인식은 그것이 단순히 인격의 죄라는 것만 아니고, 하나님과의 잘못된 관계에서 빚어진 인간의 조건이라는데 그 특징이 있다."
바울의 죄에 대한 이해는 다음과 같다.
첫째, 바울은 죄를 인격적 세력으로 인정한다. "기독교인 이전의 삶은 정녕 '죄의 세력 아래에'(롬3:9)있다." 이것은 죄의 성격에 대한 바울의 독특한 견해이므로 상술하려고 한다. '이 세상의 지혜'(고전2:6)와 '이 세상의 신'(고후4:4),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롬5:21)등의 표현에서 이 세상을 지배하는 인격적 악한 세력이 있음을 보이고 있다. 죄를 가리키는 대표적 단어 중의 하나인 αμαρτια(하마르티아)를 바울은 대부분 단수형으로 쓰고 있는데, 이에 대하여 모리스(L.Morris)는 그의 [신약신학]에서 이것은 죄가 우리가 범하는 악행일 뿐아니라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한 세력임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해석을 하고 있다. 이는 "인간 가운데 내재하면서 인간을 노예화 하는 적극적이며 파괴적인 원리나 능력" 이는"인간의 밖에 있는 외적인 힘으로.... 인간을 침범하고 그 속에 거처를 정하는 인격적인 마력이다."
둘째, 바울은 죄의 보편성을 말한다. 바울은 이것을 역사적 사실에서와 인간의 경험에서 증명한다. 로마서 1:18-3:20에서 죄의 보편성을 지적한다. 그리하여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3:11-12)라고 갈파한다.
셋째, 죄의 연대성이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5:12). 바울은 "인간의 연대성이라는 전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15:22).
넷째, "죄는 그리스도의 활동과 복음의 전파를 방해하는 것이다." 바울로 하여금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하지 못하도록 하는 자들은 그들의 죄를 채우고 있었으며, 그들은 그들의 죄를 분량껏 채우는 것이었다(살전 2:16).
다섯째, 죄는 믿음의 반대 곧 불신앙이다.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롬14:23).
여섯째, "죄란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대한 불복종" 이다. "한 사람이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되었다"(롬5:19).
b. 죄와 죽음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진노와 심판이다." 바울은 '죄의 삯은 사망'(롬6:23)이라고 못박고 있다. 이것은 창세기 2,3장의 인간타락 기사를 명제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죄는 단순히 죄된 행위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세계를 지배하는 힘으로써 인간의 사회와 세계를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다." 죽을뿐만 아니라, 자기모순과 자기 상실, 자유의 상실, 고독, 불안, 죄책감, 무의미, 무희망, 절망, 자살, 고난의 세계, 죄의 사회적.세계적 차원도 모두 죄의 결과이다. 이것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한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5:12). 이렇게 "죄와 죽음은 친밀한 동맹자들이며 인격화된 세력들 혹은 실체들로 나타난다."
그런데, 여기서의 죽음 곧 성서가 말하는 죽음은 첫째, "불안과 삶의 무의미, 양심의 가책, 절망, 죽음 이후의 것에 대한 불확실 가운데에서 이루어지는 죄된 인간의 죽음을 말한다." 둘째, "하나님 없는 인간의 삶 전체를 뜻한다." 미래의 의미에 있어서 삶이 하나님과의 사귐이라면 죽음은 하나님과 이웃으로부터의 분리, 그리고 자신의 삶의 자리를 뜻한다. 즉,"죽음이란 이 모든 관계의 파괴를 뜻한다."
c. 법과 죄의 인식
"바울은 율법과 죄를 밀접하게 관련" 된것으로 보고 있다. 첫째, 율법은 죄가 무엇인가를 사람에게 알려준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한다"(롬3:20). "율법이 있기 전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했다"(롬5:13).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다"(롬7:7). 둘째, "죄를 금하고 억제하려고 했던 율법이 오히려 죄를 환기" 한다. 즉 율법은 어떤 일을 금함으로써 그 일을 하고 싶은 욕망을 일깨워 준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롬5:20).
그러나 한편으로 루터와 같이 죄의 용서인 복음과 대립되는 의미에서 율법을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로만 이해함은 곤란하다. 바울은 율법의 역기능을 말하면서도 "율법이 죄냐 그럴수 없느니라"(롬7:7), "율법은 거룩하다"(롬7:12), "율법은 신령하다"(롬7:14), 나아가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이끌어주는 몽학선생"(갈3:24)이라면서 순기능을 함께 긍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구속사의 입장에서 율법을 관찰하면 그것은 예수께서 오시기 전, 구 시대에 나타난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 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단순히 인간의 행동을 규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락한 세계속에 있는 인간의 삶을 복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인간과 그의 세계를 유지하고 구원하기 위하여 인간과 계약을 맺으시는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이다."
이러한 율법의 순기능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신약성서 특히 바울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의 구원을 강조하기 위하여 율법을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가 더 농후함은 사실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10:4)고 까지 한다. 요컨대 율법의 기능은 죄의 상태를 불법으로 현실화시켜 그 죄의 성격을 드러내며 그것이 하나님과 원수된 것을 보여준다. 죄있는 상태의 잠정적 능력을 개인 행위라는 활동적 능력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죄에 가해질 사망선고를 발동시키고 죄를 하나님 앞에 책임있는 범죄로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d. 죄 아래 있는 인간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죄아래 있는 인간의 상황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비참함이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치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내가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15-24). "원함에는 행함이 없고 행함에는 원함이 없는" 인간의 모순, 달리 말하여 선악을 알면서도 선을 행하지 못하는 인간의 자유의지의 비참함을 바울은 자신의 체험을 통하여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죄와 고통의 원인을 無知또는 無明에서 찾는 이방의 종교철학과는 달리 죄가 자유의지에서 온다는 것을 보이고 있다.
"파멸은 인간이 신을 모른다는데 있지 않고 신의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을 '불법중에 가두어 두는'(롬1:18)데 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인간의 비참함을, 역사안의 그 무엇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인간 실존의 절규를 보는 것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역사 안에서는 구원이 없다는 것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
그러나 "바울이 그리고 있는 인간의 모습은 그리스도를 통한 인간구원에 관한 그의 메세지의 이면일 따름이다." 바울이 죄를 언급함은 죄아래 있는 인간 실존의 비참함을 강조하려 함이 아니라 죄의 세력보다 더 크고 더 깊은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을 강조하여 보이고자 함이다. 죄의 현실, 즉 고통으로부터 죄를 이해하는 이방 종교들과는 달리 "용서와 은혜로부터 죄를 인식하는 것" 이와. 그리하여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계속 인간을 사랑" 하심을 보이고 있다. 검은색 속에서 노란색이 가장 돋보이는 것처럼 죄의 검은색보다 더 빛나는 하나님의 은총의 노란색을 강조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롬5:8)하신 그 사랑의 은총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의 관심은 인간을 압도하는 죄된 세력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인간이 구원된다는 사실" 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바울이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할 때에도 그것은 인간이 심판앞에 있다는 사실과 회개하라는 경고를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않는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삶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니라"(롬11:32). "성경이 모든 것을 죄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함이니라"(갈3:22)는 바울의 말은 이러한 면을 잘 보여준다. 그러므로 "바울은 죄의 본질과 함께 그 기원에 관한 분명한 생각을 갖고 있다. 다만 그것은 믿음에 의한 창의를 설명하는 가운데 부수적으로 나타날 뿐이다." 고바로우(M.Burrows)는 말한다. 따라서 바울의 핵심교리가 "죄에 눌린 죄인을 향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 라고 말한 레흘러(Lechler)의 견해는 전적으로 옳은 것이다.
2.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
a.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죄의 해결
필자는 위에서 바울이 죄를 언급함은 죄된 세력을 강조함이 아니라, 인간의 죄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함이었다는 것을 밝혔다. "기독교적인 죄의 인식은 그것이 단순히 인격의 죄라는 것만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잘못된 관계에서 빚어진 인간의 조건이라는데 특징이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인간의 문제를 하나님의 은혜의 의지로 해결하려고 한다.
이 하나님의 은총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어 죄를 정복케 하시는 데에서 구체적인 모습을 띤다. 왜냐하면 죄는 외적세력으로 기원하여 존재하며, "인간의 언제나 이미 그의 본래의 존재를 상실했고 그의 노력은 처음부터 전도된 것, 악한 것" 이에 인간은 결단코 죄를 자신의 힘으로 정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롬8:3),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5:21). 첫 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죄와 사망이 인간에게 찾아왔지만, 둘째 사람 예수의 순종으로 죄와 사망이 물러가고 의와 생명이 찾아왔다.
바울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도 죄의 해결의 관점에서 보고 있다.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고후15:3),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4:25). 따라서 예수를 우리에게 보내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죄에 대한 해독제" 라고할 수 있겠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롬5:20)다. 그리하여 바울은 인간의 비참을 절규한 로마서 7장의 '인간의 절망'과는 달리, 8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죄로부터 해방된 인간의 '환희의 송가'를 노래하고 있다.
b. 부활의 역사성
그런데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언급할 때, 항상 부활의 주로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메섹 도상의 회심사건에서, 바울이 만난 분이 부활의 그리스도였기 때문이다. 그는 이 만남에서 율법에 의할 것 같으면 저주의 상징인 십자가에 달린 역사적 예수가 부활의 그리스도임을 체험한 것이다.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는 부활의 역사성을 통하여 또한 자신의 회심체험을 통하여 바울에게는 연속적인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이 부활은 십자가와 더불어 그의 신학의 핵심을 형성한다. 초대교회에서 구원의 조건으로 제시한 것은, 대개가 예수의 말씀과 그를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것(요5:24)등인데, 바울은 여기에 덧붙여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을"(롬10:9) 것을 제시하여 부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바울의 다음과 같은 언급은 그리스도 부활의 역사성과 더불어 그리스도 부활을 신앙의 중심으로 생각하는 바울의 사상이 단적으로 나타난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열두제자에게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전 15:3-8).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고전15:14이하).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기를 바랍니다"(빌 3:10-11, 공동번역).
위의 어디에서도 부활이 예수에게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일어난 신앙의 회상사건이라는 자유주의 신학자의 주장을 살펴볼 수 없다. 또한 "부활의 사건이 예수의 삶의 역사적 문제의 어떠한 부분도 형성하지 못한다" 는불트만과 그의 제자들의 한결같은 주장도 결코 찾아볼 수 없다. 필자가 불트만과 그의 제자들이 다룬 바울의 인간론을 따를 수 없음도 그들에게 간과되는 부활의 역사성 때문이라고 앞에서 지적한 바 있다. 바울의 인간론이 부활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되는데, 이것을 무시하면 그들이 말하는 전이해(pre-understanding)부터 잘못되기 때문이다.
예수는 오히려 하나님에 의하여 역사적으로 부활하셨다. 위에서의 제자들에게 나타난 현현사건과 빈 무덤은 부활의 역사성을 입증한다. 그리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셨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기독교 인간학의 출발점이요 중심점을 형성한다.
3. 바울의 구원론
a.객관적 구원 -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의
바울의 인간론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근거하고 있다. 바울에 있어서는 죄인과 의인의 구분도 어떤 면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의 인간과 오신 후의 인간으로 환원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과거와는 다른 하나님의 새로운 구원사가 계시되었다고 바울은 곳곳에서 말한다(롬3:21). 이제는 제사나 율법의 준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죄의 해결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바울은 로마서 1:18-3:20에서 인간의 불의를 말하고 이에 대하여 3:21-8:39에서는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고 있다. 바울은 "이제는 율법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3:21-22)고 말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에 나타난 하나님의 새로운 계시를 강조하고 있다. 로마서 3장21절의 '그러나 이제'( υνιδε) 이는 말은 하나님의 계시사건의 분수령이라 할 수 있다. 루터는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라는 동시대성을 표현하였는데, 바울은 '그러나 이제'라는 말로써 과거와 현재를 명백히 대조한다. 이는 율법에 의한 구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새롭게 보이셨음을 바울은 강조하는 것이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은 구원을 보이셨다. 즉 이제부터는 율법을 행함으로 죄에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3:28).
이제부터는 율법과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가지고 구원의 새 길을 보이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지은 인간이 '의롭게 되는' 길 ,즉,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는 길을 제시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안에서 인간을 용서하시고 자기와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게 하시는 은혜로운 뜻을 선포하신다. 그 분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용서의 수단으로 정하셨으며 인간 편에 요구되는 것은 신뢰와 순종인 믿음이다."
바울이 로마서 3:21의 '그러나 이제는' 에서 강조하는 것은 이렇게 새롭게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강조하는 것이다. 계시자체인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에서부터 하나님의 새로운 구원의 의지가 분명히 나타난 것이다.
바울의 구원론은 무엇보다 이렇게 새로이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롬3:22-24, 갈2:16)는 말은 바울에게 있어 1차적으로 그리스도에 역점이 놓인 말이다. 그것은 개인적 업적으로서의 행위와 믿음을 대비시키는 것이 1차적인 것이 아니라 율법과 그리스도를 대비시켜 그리스도를 강조하는 것이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 므로 "그리스도 사건을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곧 구원에 이르는 올바른 길이다."
b. 주관적 구원 - 인간의 믿음으로 하나님의 형상 회복
그리고 이 객관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건이 믿음으로 나의 구원사건이 되는 것은 성령의 은총을 통한 인간의 믿음이다. 죄가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대한 불복종이라면 인간의 믿음은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순종적 반응이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엡 2:8) 여기에 믿음의 중요성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이 율법이 요구하는 행위 대신에 신앙의 행위를 택함으로써 자기자신을 의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 그의 신앙의 행위가 그를 의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신앙을 그의 의로 간주하시기 때문이며 그리스도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칭의가 그의 신앙속에서 인식되고 현실화되기 때문이다." 인자는 이것이 올바른 以信得義의 이해라 생각한다.
우리는 이것을 앞서 언급한 하나님의 형상론에 입각하여 설명할 수가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고후4:4) 즉,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골1:15)이라고 말한다. 나아가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빌2:6)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바울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가 믿음을 통하여 신자에게 회복되었다고 말한다. 구약시대에는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이 상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타락이후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앞서 언급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의 은총이 예수 그리스도로 나타났으므로 이를 믿음으로 수용할 때만이 하나님 형상이 회복된다고 바울은 보고 있는 것이다.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은 아니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바뀐다" 고바울은 본다.
"우리가...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15:49).
"우리가...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고후3:18).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롬8:21).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골 3:10).등의 말씀은 죄인조차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됨을 보이고 있다. 즉,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생명을 소유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그런데 여기서 '그리스도 안에'라는 표현은 동양의 일반 종교들 처럼 신과의 완전한 합일을 말함이 아니라 위에서 언급한 그리스도와의 관계회복을 말하는 것이다. "바울의 'εν Χριστω'(en Christo,그리스도 안에)사상은 그리스도의 통치아래 있는 인간과 그리스도 사이의 일치와 연합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 연합은 그러나 신비주의적-영지주의적 의미에서의 神과 人의 하나됨을 의미하지 않고 그리스도와 그의 통치아래 있는 자들의 정신과 의지에서의 일치를 의미한다." 이 외프케(A. Oepke)는 "en Christo는 신비적인 교제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고 믿는 자가 그리스도에게 속하여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고후5:17)은 신비적인 사실이 아니라 종말론적인 사실을 지칭한다." 고설명한다. 그것은 철저히 동일성의 원리가 아니라 참여의 원리이다. 바울은 롬6:5에서 이것을 연합(be united)되었다고 설명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신자사이의 차별없는 일체성은 모르고 연대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와 함께 죽은자'(골3:3)요, '그와 함께 장사지낸 자요'(롬6:4),'그와 함께 부활한 자요'(골2:12), '그와 함께 사는 자'(롬6:8)이기 때문에 '그와 함께 영광을 받으며'(롬8:17),'그와 함께 다스린다'(고전4:8)는 것이다." 그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들과 똑같은 품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아들의 형상을 본받을 뿐이다.(롬8:29) 아 의 형상을 본받는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다. 이것을 바울은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자"(엡5:1)라고 한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통한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은, 죄로 말미암은 단절을 회복하여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게 한다. 바울은 이 관계회복을 세가지 차원에서 보고 있다. 첫째, 인간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회복되었다. "사람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이는 길이 ...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데 있다"(갈2:16, 공동번역). 인간의 불순종의 결과 하나님의 형상이 상실되었고 죄와 사망이 인간을 속박하였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사람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므로 이제 인간은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었다(롬6:21,8:2). 둘째, 사람과 사람의 올바른 관계가 회복되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 죄로 인한 아담과 하와의 주종관계가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평등한 하나됨을 이룬다. 셋째, 사람과 자연의 올바른 관계가 회복되었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롬8:19)이었는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피조물과의 관계도 회복된 것이다. 이리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만의 구세주가 아니라 우주적 그리스도가 된 것이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1:20).
4. 그리스도인의 윤리
그리스도인의 윤리를 말하기에 앞서 "바울의 구원의 개념은 관계성의 개념이며, 따라서 구원의 실제는 하나님의 은혜 및 인간의 복종의 노력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점을 충분히 이해하지 않으면 구원과 윤리는 분리하게 된다." 이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바울사상에 있어 구원과 윤리는 구분지어 생각할 수 있으나 결단코 분리되지 않는다.
위에서 언급한 바울의 구원론을 요약해 보면, "바울의 구원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객관적인 사건에 기초를 두고 있다. 또한 그 사건을 하나님의 구속 사건으로 받는 개인의 주관적 믿음에 의해서 의롭게 된다는 사상이 그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믿음을 무엇보다도 순종 즉, 순종행위로서의 신앙행위로 이해한다. 구약의 개념을 관계성의 개념으로 파악한다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간편의 믿음과 복종 즉, 신앙의 순종과 관련하여 생각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제 구원받은 인간은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롬8:29)아 생활해야 한다. 순종의 삶을 통하여 구원받은 인간은 그리스도의 主權을 증언해야한다. 그리하여 "예수께서 성화되지 않은 것을 성화함으로써 자신을 성화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성화되지 않은 것을 성화함으로써 그들 자신을 성화해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윤리의 기초이다. "칭의란 실존적 면에서 볼 때에 방향의 전환에 불과할 뿐이므로 계속해서 자신을 세속에서 구별시키는 도덕적 변화 즉, 성화가 뒤따라야 한다." 새로운 존재가 되었기에 구습을 버리고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골1:10,갈5:22-23).
사도 바울의 서신을 볼 것 같으면 전반부에서는 以信得義를, 후반부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윤리를 다루고 있음도 이 때문이다. 로마서에서도 칭의를 말하는 전반부에 이어서 12:1부터는 그리스도인의 윤리를 말하고 있다. 바울은 "십계의 총요약을 예수의 말씀에 의하여 '이웃사랑'이라는 데서 찾고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일컫는다(롬13:9-10,갈5:14,비.마22:37-40)." 교회가 전도표제로 내세우는 중생과 성결의 道理도 이러한 복음에 충실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윤리는 단순히 종교철학이 말하는 윤리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윤리이다. 즉 "기독교 윤리는 계시에로 향한 것이지 도덕성에로 향한 것이 아니다." 인간 스스로가 善惡과 正邪를 판단하는 것을 문제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인지의 여부를 문제삼는 것이다. 우리는 "바울의 윤리는 한마디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 이다, "매일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복종이다" 라는 것을 꼭 기억해야만 한다.
그러면 왜 그리스도인의 윤리를 필요로 하는가? 그것은 기독교가 직면하고 있는 세속주의에 응답하여 올바른 세속화를 확립하기 위함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윤리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첫째, 소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신자의 불법적.비도덕적 생활로 훼방받지 않기 위함이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딛2:5). 둘째,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신자의 윤리생활로 돋보이게 하기 위함이다. "이는 범사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려 함이라"(딛2:10). 이것은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한다.
그리스도인의 윤리는 한마디로 선교적 차원의 복음선포를 위해 요청된다고 할 수 있다. 초대교회는 매일 구제(행6:1)를 하였고, 바울 역시 가난한 자들을 위해 힘써 행했는데(갈2:10), 이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이웃 사랑의 차원에서 불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은총을 깨닫게 하기 위함으로 행해졌다는 것이다.
말씀의 사역과 섬김의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데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믿음이란 예수의 인격을 신뢰하며, 그의 메시지의 진리를 믿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그의 인격과 메시지에 전적으로 복종" 하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시대에 결정적인 것은 우리가 그를 얼마나 믿었느냐가 아니라 ... 우리가 그를 믿고 따랐느냐에 달려" 있 때문이다. "믿는 자는 순종하고 순종하는 자는 믿는다."
(Nur der Glaubende gehorsam, und nur der Gehorsame glaubt!)
Ⅳ. 결 론
A. 바울과 순자의 인간론 대비
이제까지 우리는 바울과 순자의 인간론을 각각 살펴보았다. 여기서는 양자의 인간론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을 살펴 보고자 한다. 양자가 서로 다른 시대와 문화권속에 살았기에, 양자의 대비가 위험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이들은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보편성 가운데 그 시대의 문제점을 직시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려 했던 면에서 우리는 조심스레이 대비연구할 수 있겠다.
양자는 사고의 출발점에 있어 인간을 구원받아야 할 존재로 보는 비관적 입장에 서는 공통점을 갖는다. 바울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면서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 보아 사람은 죄에서 해방받아야 한다고 보았다. 순자는 모든 인간의 본성을 악하다고 보아 사람이 禮에 의해 化性起僞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이와같이 양자는 공히 시작에 있어 인간을 죄된 존재로 보는 비관적 입장이나, 끝에 있어 인간의 새로운 변화를 믿는 낙관적 입장을 취하는 공통점도 아울러 가진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의 새 존재', 순자는 禹임금같은 성인이라는 낙관적 인물상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죄된 현실에 대한 치료책에 있어 전혀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 차이점은 악에 대한 양자의 이해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바울은 죄라는 것을 단순히 인간의 법적 차원에서만 보지 않고, 사람을 노예로 만들고 그의 의지를 마비시키는 심각한 인격적 세력으로 보고 있다. 또한 죄를 무지로 보지 않고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에 있어 인간의 자유의지의 잘못된 반응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 아니하며 ...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의 형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1:21-23)고 한다.
순자는 죄를 인격적 세력으로나 자유의지의 잘못된 반응으로 보지 않고, 전국시대의 혼란한 현실로서의 고통으로 이해한다. 당시의 사회악을 성악설과 연결한다. 따라서 순자에게는 악이란 질서자체인 禮에 대한 무지와 같은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의 무지를 계몽하는 교육을 중요시 하였고, 그의 저서에서 <勸學>편을 서두에 두었다. 순자는 인격적 세력으로서의 죄의 심각성을 보지 못하였기에, 인간의 악은 이성에 의해 쉽게 극복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여기에서 "그리이스 고전철학과 동양의 고전에 따르면, 罪와 苦의 원인은 無知와 無明에서 온다. 그러나 성서적 인간관은 죄는 自由에서 온다." 김경재 교수의 말은 음미할 가치가 있다.
이렇게 양자의 악에 대한 견해가 다른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양자의 신에 대한 이해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바울이 모든 사람을 죄인이라 할 때에 그 판단은 인간은 선하신 창조주 하나님 앞에 거역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1:18에서 인간의 악을 말하나, 그 앞 17절에서 먼저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복음의 능력을 제시하고 있다. 인간은 인간 앞에 선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선 죄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순자는 중국의 전통적인 인격적.주재적 天을 없애고 물리적 天만을 긍정하였기에, 天 앞에 선 죄인을 상상할 수 없었다. 또한 天命之謂性에 입각한 인간의 선한 본성을 말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인간은 天 앞에 선 죄인이 아니라 사회앞에 선 죄인이라고 본 것이다. "기독교의 경우처럼 용서와 은혜로부터 죄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현실 즉 고통으로부터 이해" 이는 차이점을 보이는 것이다. 이 차이는 대단히 중요하다. 바울과 순자의 인간론의 차이점이 여기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하나님을 전제하고 하나님과 관계하는 인간을 보는데, 순자는 天을 부정하고 인간과 인간의 관계하에서만 인간을 본다.
바울은 초월성과 관련하여 인간을 보기에 창조주 하나님, 부활하신 구원자 예수, 성화자 성령, 죽음 이후의 문제를 늘 염두에 둔다. 그리고 이 성삼위 하나님께 대한 주체적 인격의 결단을 통한 참여의 원리에 서 있다.
순자는 天을 단순히 물리적 하나님으로만 규정하여, 인간의 초월적 개방성의 면을 모두 제거하였다. 따라서 개체가 전체속에 몰입 일체화되는 동일성의 원리인 동양의 전통적인 天人合一도 부정한다. 또한 죽음에 대한 치열한 사고도 없다. 귀신 역시 미신이라 하여 미신타파의 선구자가 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순자는 제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하였다. 제사라는 것이 있지도 않는 영적 실재에 복을 비는 미신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되고, 인간의 정서적 文飾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하여 순자는 天 대신에 인간의 사회적 산물인 禮에 권위를 둔다.
따라서 우리는 양자의 결정적 차이가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인간론을 전개하나, 순자는 禮로부터의 인간론을 전개함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인간론과 禮로부터의 인간론은 구원의 방법에 있어서도 현저한 차이를 낳게 한다.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은 철저히 타락한 죄인이므로 그 스스로의 구원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순자의 禮와 형식상 유사한 것으로 판단되는 율법을 행함에 의해서도 인간구원은 있을 수 없다. 역사 안에서 절망에 빠진 인간의 비참함이여!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구원을 작정하셨다. 인간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객관적 사건에서 비롯된다. 인간은 이전의 불순종을 회개하고 오직 믿음의 순종으로만 하나님의 객관적 구속사건을 주관적 구원사건으로 만들 수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다. 달리 말하여, 죄로 인하여 단절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을 믿음으로 올바른 관계로 회복된다. 그리하여 절망의 비관적 존재가 영생에 참여하는 '새로운 존재'(new being)가 된다.
순자는 바울처럼 신에 의한 구원을 말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天과 귀신등을 미신으로 보고 타파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인성이 악하다고 본 상태에서 심성에 근원을 둔 인성변화를 말할 수도 없었다. 따라서 순자는 天도 심성도 아닌 인간 외부의, 그러면서도 인간의 사회적 산물인 禮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즉 禮에 의한 구원을 강조한다.
禮의 無知에서 인간 악이 기원하는 것으로 본 순자는, 禮를 추구하는 학문을 강조했고, 이 禮를 실행함에 의해 인간의 악한 본성이 선하게 된다고 보았다. 악이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기독교와 같은 철저한 회개도 필요없다. 단지 禮에 의한 化性起僞하여 禹임금같은 성인이 될 수 있다고 한다.
피상적으로 양자의 구원론을 살펴 보면, 양자가 인간 심성에서가 아니라 외부에서 구원을 발견하는 같은 점을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밖으로부터 인간 안으로 들어오는 존재이듯이 禮 역시 밖으로부터 마음 안으로 향하는 일종의 법이라는 점에서 그렇게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바울은 역사를 초월하는 실재에게서, 순자는 역사안의 실재에서 구원을 파악하는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인간 세계 밖으로부터의 구원과 세계 안에서의 구원의 차이이다. 신앙의 구원과 도덕적 구원의 차이이다. 그것은 신이 있는 인간과 없는 인간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과 禮에 의한 구원은 적용 범위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모든 인간관계가 평등하게 되는데(갈3:28,골1:20), 禮를 통하여는 인간관계가 서로 구별된다. "禮는 신분의 차별을 규정함과 동시에 그 신분에 따른 권리 의무를 규정하는 것" 이 때문이다. 이러한 차별을 극복하려고 순자는 <樂論>편에서 조화를 주장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차별된 신분관계를 긍정하고, 서로 다른 신분의 조화에 촛점을 맞춘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인간관계를 그리스도 안에서 평등한 것으로, 순자는 禮안에서 차별적인 것으로 보았다고 할 수 있겠다.
B. 전 망
위에서 필자는 바울과 순자의 인간론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을 다루었다. '상대방을 알고 나를 알아야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知彼知己百戰不殆)는 비교종교학적 기독교변증론의 입장에서, 양자를 비교연구 하였다.
브라아텐(C.E.Braaten)은 그의 저서 History of Hermenutics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한 구세주이나 유일한 계시자는 아니다."(Jesus Christ is the sole Savior, not the sole revealer) 고 말하면서, 일반계시의 하나인 역사를 강조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만일 우리가 일반계시의 차원에서 역사와 문화를 이해한다면, 타민족의 역사와 문화의 핵심을 드러내는 종교를 무조건 배타시 할 수 만은 없을 것이다. 더우기 올바른 선교를 하려면, 피선교지의 역사.문화.종교를 올바로 이해하여야만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선교하려는 사람들은 종교가 없는 불신앙인들이 아니라, 대개의 경우 특정 종교를 믿는 신앙인이기에 더욱 올바른 이해가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우리는 타종교를 있는 그대로 바로 파악하여야만 한다. 유교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가 부인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기독교와 유교의 근본적 차이를 무시하여서는 안된다. 바울과 순자의 분명한 차이는 앞에서 살펴 보았듯이, 신에 대한 이해에 있으며 바로 여기에서 양자는 신본주의와 인본주의라는 이질적 특징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차이점을 바르게 인식하고, 올바른 신관과 인간론을 정립할 때에 보다 효과적인 선교가 수행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자연계시를 아무리 긍정한다고 할 지라도 세상의 모든 것은 계시자체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아래서 새로운 조명을 요구한다. "곧 새계관의 중생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역사 안에서 행한 모든 것들이 하나님 앞에서 잘못된 것이기 때문이다. "첫째는 자연속에 나타난 하나님을 알만한 것을 바르게 깨닫지 못하여 창조주를 피조물의 형상으로 뒤바꾼 것이며(롬1:18이하), 둘째는 성육신된 지혜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를 인간의 종교성을 이용하여 십자가에 못박는 악을 행했다(고전2:8)는 점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시(자연계시와 특별계시)에 대한 인간의 종교문화적 응답이었던것이다." 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하여야 한다.
우리가 종교다원주의에 대하여 긍정적인 태도를 부인해서도 안되지만, 종교다원주의를 비판함은 이러한 이유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유교를 비롯한 타종교에 대한 기독교의 태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입장에 선 긍정과 부정의 변증법이 바람직하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한편,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롬3:9)는 바울의 선언에 주의하여 과연 오늘의 기독교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중심에 서 있는가를, 그리고 그 복음의 빛아래서 새롭게 개혁하고 있는가를 늘 반성해야 할 것이다.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 하게 하려 하심이라 ...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롬15: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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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숙, "[詩經]에 나타난 福사상 연구",석사학위논문,서강대대학원,
1984.
정인재, "맹자의 天에 대한 고찰",석사학위논문,고려대대학원,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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