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학

[스크랩] 불교(佛敎)권 선교(宣敎)전략을 위한 불교의 교리(敎理) 이해론 (서재생)

수호천사1 2009. 11. 8. 22:02

불교(佛敎)권 선교(宣敎)전략을 위한 불교의 교리(敎理) 이해론


1. 들어가는 말

불교(佛敎)와 기독교(基督敎)는 동서양을 대표하는 종교(宗敎)로서 가장 큰 단점은 종교 간의 긴장과 갈등, 알력과 반목이 끊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지금까지 한국 기독교가 공격적 불교권 선교전략 때문에 한국 불교의 피해(방화, 불상회손, 파괴)가 가볍지 않습니다. 다종교 사회에서 종교 간의 평화로운 공존가운데도 얼마든지 전도의 목적을 이룰 수 있다고 봅니다. 불교권 선교를 위해서 불자들에게 기독교를 이해시키기 위한 첫걸음은 다름 아닌 기독교인들이 먼저 불교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불교에 대한 이해 없이 불자들에게 기독교를 이해시킬 수 없다고 필자는 생각합니다. 불교에 대한 이해도 없이 그들에게 기독교복음만을 전도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런 전도는 오히려 반발만 조장합니다. 타종교를 이해하는 정도와 타 종교인에게 자기 신앙을 이해시킬 수 있는 능력은 정비례한다고 봅니다.


불교는 BC 6세기경 지금의 네팔인 동북인도에서 창시된 종교입니다. 불교는 기독교, 이슬람교, 유교와 더불어 세계 4대 종교 중 하나로서 전 아시아인들의 정신적, 사상적, 문화적. 사회적 삶에 크나큰 영향을 끼쳐왔습니다. 한국의 국보급 문화재는 99%가 불교 문화재들이라고 합니다. 그러기에 교회 안에서 무의식 속에 불교교리 용어를 아무 생각 없이 사용하고 있으면서도 모르고 있는 현실입니다. 기독교인들이 불교인들에게 복음을 전도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불교의 교리에 대한 이해부족 때문입니다. 필자가 기독교인을 대상으로 “불교 경전을 보았습니까. 불교의 교리를 들어 보았습니까” 라고 물었을 때에 80% 이상이 듣지도, 보지도 않았다고 대답했습니다. 필자는 불교와 기독교 중 한 특정 종교의 우월성을 위한 기술보다 단지 불교에서 개종(改宗)한 목사로서 불교인들을 전도하기 위해서 먼저 그들의 사상(思想)을 올바르게 알고자 하는 마음의 자세를 가졌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야만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불교에 대한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의 대화나 불교권 선교는 독백에 불과합니다.

2. 불교의 교리(敎理)

한국인이라면 불교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별로 없으리만큼 한국 민족사에 큰 영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불교권 선교 전략을 위해서 불교의 근본교리 이해가 필요합니다.


근본교리란 불교의 창시자 석가모니의 설법을 중심으로 가장 원형적이고 불교사상의 기초이자 근본이 되는 것을 근본교리라고 합니다. 근본교리는 삼법인, 사성제, 팔정도, 십이인연, 업사상, 윤회설 등 있습니다.


불교사상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는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불타(佛陀)로서 불보(佛)와 둘째로는 깨달음의 내용인 교리의 법보(法)와, 셋째로는 이러한 석가모니의 불도(佛道)와 설파함으로 추종하는 제자를 얻어 이를 조직화한 교단의 승보(僧)입니다. 이를 <불, 법, 승> 삼보(三寶)라 하여 불도들은 이 삼보귀의(三寶歸依)를 가장 중요한 신앙고백으로 삼습니다.


이 시간은 삼보 중에서 법보(法寶)인 불교의 교리를 이해하고자 합니다. 법보는 석가모니의 가르침, 곧 고뇌의 세계에서 벗어나 고뇌 없는 니르바나(해탈)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인간의 구원이요, 진리를 깨달은 자 곧 불타(佛陀)가 되는 목적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석가모니께서 성도 후 다섯 비구들을 찾아가서 첫 설법(說法)한 사성제와 팔정도가 근본교리로 오늘에 이르러 8만4천 대장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성경 66권의 총주제가 요한복음 3장16절이라고 한다면, 불교에서는 8만4천 대장경의 총“주제”를 삼법인, 사성제, 그리고 팔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 강의에서 불교권 선교전략을 위한 불교교리 이해론 주제로 삼법인(三法印)과 사성제(四聖諸) 불교교리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삼법인(三法印)


불교의 근본 교리의 시작은 인간이 일체의 고통이란 전제하에 고통의 세계에서 해탈 하려는 것에서부터 찾을 수가 있습니다. 만약에 인간의 삶에 고통이 없다고 한다면 불교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 이라고 필자는 이해하고자 합니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의 모든 존재의 고통으로부터 해탈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학의 출발점이 삼위일체 하나님이었다면 불교의 교리의 출발점은 석가모니께서 깨달은 교리인 삼법인(三法印)(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삼법인은 원시불교 교리의 대표적인 것입니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은 불교의 세계관으로서 일체 모든 생성 발전의 모습을 말한 것이며, 제법무아(諸法無我)는 불교의 인간론으로서 일체 모든 것의 실체(實體)의 진실한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며, 열반적정(涅槃寂靜)은 불교의 지향점인 본체계(本體界)의 진실한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삼법인은 불교의 진리를 세 가지로 함축하여 말한 것입니다. 법인(法印)이란 법의 도장이라는 말로 도장을 찍어 결제를 하듯이 참된 이치를 가리켜 이것은 진리다 하고 결정 확인하여 간주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인(印)자를 둔 이유는 이 세 가지 진리가 거짓된 것이 아니라 변함없는 진실한 가르침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일체개고를 더하면 사법인이 됩니다.

(1) 제행무상(諸行無常)


불교의 세계관인 제행무상(諸行無常)은 “만유 정신적 세계이든, 물질적 세계이든” 이 세상의 현존하는 모든 존재를 총칭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석가모니는 이 세상에 상주불변하는 존재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즉 모든 존재는 시간적으로 볼 때 시시각각 변하여 상주(常住)하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모든 형상 만물만사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멸하며 시간의 지속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이러한 현상세계를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는 명제로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행무상(諸行無常)에서 행(行)이란 뜻이 “옮기고”, “흐른다”는 뜻입니다. 즉 현실세계의 모든 것은 매 순간마다 생멸성쇠의 변화를 계속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항존 불변하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으며 그 때문에 인간은 실상(常)을 바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상세계는 제행무상이라는 것입니다. 무상(無常)하다는 것은 어느 한 현상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체 모든 것들은 인연(因緣)이 합하여 이루어지고 나타난 것이므로 시시각각으로 잠시도 쉬지 않고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눈앞에 전개되는 자연 현상은 봄, 여름, 가을, 겨울로 변화 듯이, 인생들도 어머니의 태중에서 탄생한 후에 유아가 영아가 되고, 소년이 청년이 되고, 장년이 노년이 되는데, 흐르는 시간에 따라 늙어 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무상이라고 합니다.


현상세계는 항존 불변하는 그대로 존재하지 못하고 변화무쌍한 것은, 일체 모든 사물이 본래부터 생멸(生滅)하는 성질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태어난 것도. 있는 것도, 만난 것도, 모두 시간적 “인연으로 만들어졌고” “인연으로 태어났고”, “인연으로 만나”는 것이므로 천류 유전한다고 말합니다.


이 무상세계에는 일정한 기간 동안 존속하면서 변화하는 일기(一期)무상과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찰라 무상의 두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마치 인간이 한번 이 세상에 태어나서 90년이든 100년이든 일정기간 동안의 삶을 누리다가 필경에는 목숨을 마치고 없어지는 것을 일기무상이라고 하고, 하루 24시간 동안에 64억 9만 9백 8십 찰라가 있다고 합니다. 즉 1초에 74075찰라가 된다는 것이고, 이렇게 짧은 순간에도 쉬지 않고 변하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무상(無常)은 “없을 무(無), 항상 상(常)”입니다. 이 세상에 변치 않는 것은 없으니 그 어떠한 것에 집착할 필요도, 욕심낼 필요도, 미련을 둘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상(無常)의 엄연한 사실을 모르는 어리석은 중생들은 천년만년 변하지 않고 항상 그대로 있을 줄 믿고, 아끼고, 욕심내고, 집착함으로 자유 없는 속박의 괴로움이 있게 된다고 불교의 교리는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상을 “고(苦)”의 전제로 보았습니다. 불교의 이러한 인생관은 상당히 비관적(悲觀的)이요, 염세적(厭世的)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불교의 창시자 석가모니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 (諸行)은 끊임없이 변화해 갈 뿐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無常)는 것을 강조하여 이것을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고 표현하고 변할 수 없는 진리로 삼았습니다.

(2) 제법무아(諸法無我)


불교의 인생관으로서 나를 어떻게 보는가를 의미 하는 것이 제법무아(諸法無我)입니다. 즉 현상계의 모든 존재의 공간(空間)성을 말하는 의미로서 시간적으로 관찰할 때 모든 존재는 무상(無常)하고 공간적으로 관찰할 때 모든 존재는 실체(實體)가 없다는 것입니다. 제법무아는 불교의 인간론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무아(無我)란 이론적으로 자아(自我)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석가모니가 말한 무아는 있는가 없는가의 존재성에 대한 이론이라기보다는 실체가 없는 것을 실체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실천적 의미를 지닌 것입니다. 다시 말한다면 “아(我)”에 대한 형이상학적 존부성에 관한 문제는 석가모니에게 있어서는 무의미한 것 이였습니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석가모니의 무아(無我)의 사상을 제법무아라는 명제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아(我)는 실체를 말하는 것이며, 일체 모든 존재는 모두 인연으로 모였다가 인연이 다하면 흩어질 뿐 나(자아)라고 고집하고 내세울 실체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인연을 빌어서 물질인 색(色)으로 뼈(地)와 피(水)와 채온(火)과 호홉(風)의 4대 원소가 어울려 육체를 구성하고 정신적으로 감각작용(수(受)), 지각작용(상(想)), 의지작용(행(行))) 분별하는 의식작용(식(識))등 오온이 인연에 의하여 가화합(假和合)하여 한 장소에 심신을 다투었다가, 이 화합의 인연이 없어지게 되면 중생으로서의 존재도 없어지는 것에 불과한데 그 무엇을 자아(自我)라고 고집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흔히 ‘나’라는 관념을 가지고 그것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처리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즉 내 몸, 내 마음, 내 재산, 내 지위, 내 생명이라고 하지만 그러나 그러한 것들 속에 참다운 자아(自我)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이 불교의 인간론입니다.


만약에 그 속에 나의 자성(自性)이 있다면 항상 머물러 변화지 않고 없어지지 않고 있어야 할 터인데도 내 몸을 가지고도 자유가 없고, 인간이 원하지 않으면서도 늙고, 병들고, 죽어가고 있다는 것, 그러므로 내 몸 내 마음을 자유로 할 수 없는 자기(自己)를 고집하지 말고, 오직 인연(因緣)에 의해 있다가 인연이 다 하면 흔적도 없이 없어진다는 이 무상(無常)의 진리를 잘 알아서 미망의 삶에서 헤엄치는 것을 버리고, 해탈(解脫)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불교의 핵심교리입니다. 이 제법무아의 사상은 인도 전통 사상에 혁명적인 선언이었습니다. 인도 전통 사상은 항상 변함이 없이 머물고(상주), 주재(主宰)하는 성품을 가진 실아(實我)의 존재를 주장하였습니다. 그런데 석가모니는 제법무아에서 실제의 존재를 부정하고, 눈에 보이는 것은 가아(假我)로서 오온(五蘊)과 화합(假和合)의 ‘나’로서 이것은 무상(無常)한 것이요 그러므로 자아 내가 없는 것이 제법무아(無我)입니다. 가아(假我)를 실아(實我)로 착각에서 오는 고통을 일체개고라고 합니다. 일체개고(一切皆苦)란 인생의 현실 모두가 일체(一體)가 괴로움(苦)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불교 경전을 보면 불교도가 아닌 “쟌부카다카”라는 이교도가 부처의 제자 “사리붓타”를 찾아와 “고”다, “괴로움”이다, 하고들 말하지만 벗이여 어떤 것이 참으로 고(苦)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이때 사라붓타는 “고고(苦苦)”, 괴고(壞苦)“, ”행고(行苦)“이라고 대답했습니다.


① 고고(苦苦)
고고란 고와 고 문자를 둘 연속해서 쓰는 것으로써, 이는 인간자체가 원래부터 괴로운 존재라는 것입니다.


② 괴고(壞苦)
괴고란 무엇이 파괴되어 생기는 괴로움을 뜻합니다. 즉 즐거움이 파괴되었을 때, 또한 애지중지하던 귀한 것을 잃었을 때, 느끼는 괴로움을 지칭합니다.


③ 행고(行苦)
행(行)이란 즉 “모든 것은 흘러간다.”, “일체는 옮아간다” 라고 하는 존재와 무상을 표현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행고성이란 무상한 것이 곧 고다는 것입니다.


불교(佛敎)는 인간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은 고(苦)라고 하는 사실을 인식하는 대서 출발했습니다. 왜 현상세계가 고인가? 불교에서는 이것을 업보(業報)와 윤회(輪廻)의 사고에 연결시킵니다. 절대로 고뇌하지 않는 상태는 윤회를 벗어난 열반의 경지에 도달하지 않으면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즉 윤회전생(輪廻前生)하는 세계는 쾌락과 행복이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절대적인 적정(寂靜)의 즐거움은 결코 얻을 수 없다는 것이며, 범부에게 있어 현상세계는 고(苦)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3) 열반적정(涅槃寂靜)


열반적정은 앞의 제행무상(諸行無常)과 제법무아(諸法無我) 현상계에 대한 불교 철학적인 이지적(理智的) 판단에 의한 진리관 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열반적정은 불교의 종교적 실천이성(實踐理性)의 요청에 따라 마땅히 온갖 번뇌의 결박에서 해방되어 생사(生死)의 고해(苦海)를 뛰어나와 영원히 생사윤회(生死輪廻)가 없고, 항상 고요하고 안온한 절대의 이상 경지를 가리킨 말입니다. 즉 열반(涅槃)적정의 세계의 특징은 제행무상과 제법무아의 세계와 달리 운동도 변화도 없는 오직 적정(寂靜)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일체의 현상은 모두가 인연에서 말미암기 때문에 인연은 또 하나의 다른 인연으로 인해 생성변화가 무상하며 그런고로 이러한 가변적(可變的)인 세계 속에 살아가는 인간은 괴로움에 허덕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상한 만물만상을 상주불변한 것으로 여겨 거기에 애착을 가지게 될 때에 “고(苦)”는 필연적으로 따르는 대가로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무상(無常)한 줄을 알고, 그것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그것들의 생멸 변화에 놀라지도 아니하고, 거기에 마음을 쓰지도 아니하면 고(苦)와 괘락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경지를 바로 열반적정의 경지 상태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반(涅槃)이란 뜻은 “불어서 끈다”는 뜻입니다, 백팔번뇌를 비롯한 일체의 그릇된 고집과 갈등에서 오는 “번뇌 망상”의 불을 불어서 끈다는 것입니다. 이 열반을 “없어졌다”, “고요하게 건넜다”, “고요하게 없어졌다”, “원만히 고요하다“는 등으로 뜻을 번역합니다. 불교에서는 현실세계는 무상(無常)하고 모든 존재도 항상 변하고 고정 불변한 것이 없는 모든 존재에 실질적인 내(自我)가 있는 줄 망상을 일으키는 까닭으로 존재하고, 존재는 고통이 동반한다는 것이 일체고 라는 것입니다. 열반(涅槃)은 망상의 불이 꺼진 상태로 불교가 말하는 최고의 이상경지입니다. 열반에는 유여의 열반과 무여의 열반 두 가지가 있습니다. 유여의 열반(有餘依涅槃)이라는 것은 일체 모든 번뇌를 다 끊어서 미래의 생사의 원이 없어졌다고 할지라도 아직 전생의 과보인 오온(五蘊; 색, 수, 상, 행, 식)으로 이루어진 육체가 남아 있어 의지한다는 의미이고,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이란는 것은 이 육체마저 다 없어지고,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어 의지할 것도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열반적정은 온갖 번뇌의 결박에서 해방되어 생사의 고해를 뛰어나와 영원히 생사윤회가 없는 무생(無生) 무사(無死)의 이상세계를 가리킵니다.


불교의 근본사상으로서 삼법인(三法印)을 일괄적으로 말한다면 현실세계 현상을 시간적으로 유한하다고 본 것이 제행무상(諸行無常)이고, 공간적으로 실체가 없는 것으로 설명한 것이 제법무아(諸法無我) 있고, 그러므로 불교의 이상세계 본체계를 시간, 공간적으로 없다는 것이 열반적정(涅槃寂靜)이라고 합니다.

2) 사성제(四聖諸)


사성제란 앞서 삼법인(三法印)과 함께 중요한 불교 교리의 정수(精髓)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성제 고찰에서 성제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 뜻은 “올바르게 살핀다.”는 것입니다. 불교의 근본적 세계관은 물질적, 정신적 요소의 모든 것이 고(苦)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최고의 문제를 죄(罪)로 보듯이 불교에서 보는 최고의 문제는 고(苦)입니다. 그러므로 사성제라 함은 현실 세계의 결과가 고성제이고, 그 원인을 말하는 것이 집성제이고, 고통의 원인들을 멸하는 것이 멸성제이고, 그리고 불교의 이상 세계에 도달하는 방법론이 도성제인 팔정도(八正道)입니다.

(1) 고성제(苦聖諸)


석가모니(釋迦牟尼)는 첫 번째 거룩한 진리로서 인생의 고(苦)에 관한 고성제를 설파했습니다. 인생이란 투카[dukkha]라는 것이며, 그 뜻은 인생의 삶이란 필연적으로 고통(苦痛)을 수반한다는 것입니다. 고성제는 사성제의 실제적 이론적 입장에서 고난의 원인에 대한 규명입니다, 석가모니는 고통에는 사고(事故)와 팔고(八苦)가 있다는 것입니다.


① 사고(四苦)
사고(四苦)란 “탄생에서 오는 생고(生苦)”, “늙음에서 오는 노고(老苦)” “질병에서 오는 병고(病苦)”, “죽음으로 오는 사고(死苦)”인 생, 노, 병, 사(生老炳死)를 의미합니다.


② 생고(生苦)
생고(生苦)란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의 고통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배에서 나올 때부터 인생은 충격을 받는다는 것으로서 그렇지 않으면 무엇 때문에 애기의 첫 소리가 울음이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탄생자체를 괴로움으로 봅니다. 중생이 윤회하는 동안 고통을 피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③ 병고(病苦)
병고(病苦)란 사람은 언제나 건강하게만 살수 없으며, 수시로 병고에 시달릴 수밖에 없기 때문에 괴로운 존재라는 것입니다.

④ 노고(老苦)
노고(老苦)란 “젊은 시절 건강할 때에는 인생은 즐거운 것이다”라고 생각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이란 늙으면 죽음에 대한 공포심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더 사랑을 받지 못하고 대접을 받지 못하고 남을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고 앓고 시달릴까 두렵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노고(老苦)라는 것입니다.


⑤ 사고(死苦)
사고(死苦)는 죽음에서 오는 공포가 고통이란 것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는 필연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죽음을 고통이라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인생관을 이처럼 괴로움은 고통스러운 것으로 봅니다. 그러므로 사고 (四苦)란 “낳는 것도 고통이요”, “늙는 것도 고통이요”, “병든 것도 고통이요”, “죽는 것도 고통”이라는 것입니다. 불교의 출발점은 이 사고(四苦)인 <생, 노, 병, 사> 문제를 해결하고자 출발했습니다.


⑥ 팔고(八苦)
팔고(八苦)는 사고(四苦)(생 노 병사)와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에서 오는 고통 이별애고(離別愛苦), 미움과 만나야하는 고통 원증회고(怨憎會苦), 소유하고자 해도 소유하지 못하는 고통 구불득고(求不得苦), 오온에서 오는 고통 오음성고(五陰盛苦), 이것을 팔고(八苦)라 하고 있습니다.


⑦ 이별애고(離別愛苦)
이별애고란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 곁을 떠나거나 죽어버렸을 때 오는 고통, 나의 소유라고 생각하여 아꼈던 물건을 잃었을 때 오는 고통, 높은 권세를 가진 자가 그 권세를 잃었을 때 오는 고통, 이별애고는 모두가 “헤어짐”에서 오는 고통이라는 것입니다.


⑧ 원증회고(怨憎會苦)
원증회고란 헤어지는 것만이 괴로움이 아니라 만나는 것도 고통이라는 것입니다. 만나기가 싫지만 미워하는 자를 만나게 되고 또 미워하는 이와 함께 살아갈 수 밖에 없는 환경에서 얻어지는 괴로움의 고통, 사상과 관념이 다른 사람들과 만나야 되는 것도 정신적인 고통이듯 원증 회고는 만남에서 오는 괴로운 고통을 말합니다. 헤어짐에서 오는 고통은 사랑 때문이고, 만남에서 오는 고통은 미움에서 오고, 그러므로 사랑이나 미움은 모두 고통의 근원이 된다고 불교는 봅니다.


⑨ 구불득고(求不得苦)
구불득고란 아무리 가지고 싶어도 가질 수 없는데서 오는 괴로움의 고통을 의미합니다. 즉 자기가 하고 싶고, 갖고 싶지만 다 가질 수 없는데서 오는 괴로움, 구불득고란 욕구와 충족이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되지 않는데서 오는 괴로움을 의미합니다.


⑩ 오음성고(五陰盛苦)
오음성고란 인간의 심신(心身)이 오음에서 생기기 때문에 괴로움이란 것입니다. 오음을 오온(五蘊)이라고도 합니다. 그 뜻은 모아 쌓은 것, 회합하여 모인 것이라는 것인데, 이렇게 모여 모든 중생이 삼계육도 윤회하기 때문에 괴로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 인간이란 색(色),수(受),상(想), 행(行),식(識)의 5가지 요소들의 복합체인 그 자체가 괴로움임을 오음성고(五陰盛苦)라고 합니다. 여기서 인간존재 그 자체가 괴로움이라함은 인간존재를 구성하는 신체적 요소(色;지,수.화,풍), 느낌(受), 생각(想), 의지(行), 인식(識) 등의 물질적, 정신적 요소들이 모두 항시 변하는 무상(無想)한 것들이라는 교리입니다. 그 어느 것도 항구적인 만족을 줄 수 없는 괴로운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라고 불교 창시자는 말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위에 언급한 5가지 묶음[오온]들 가운데 어느 것도 나와 불변하는 자아로 취할 것이 못 된다고 하는 사상입니다. 석가모니에 의하면 인간이란 다만 수시로 변하는 요소들이 화합하여 하나의 임시적 존재를 산출하고 있을 뿐 인간에게 항구불변의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불교의 생사(生死)관입니다. 그러므로 무상(無常)과 무아(無我)와 고통(苦痛)은 석가모니(釋迦牟尼)께서 깨달아 그가 본 인간존재의 참된 모습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괴로운 것을 즐거운 것으로, 무상한 것을 항구적인 것으로, 영원불변의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데도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음성고 입니다 그러므로 마치 기독교(基督敎)인이 죄인인 것을 깨닫게 될 때 비로소 은혜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는 것과 같이, 불교는 인간 존재 자체가 일체고의 인식에서 해탈이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사고(四苦)인 생, 노, 병, 사와 팔고(八苦)인 이별애고, 원증회고, 구불득고, 오음성고에서 오는 고통의 세계에서 해탈하는 종교입니다.

(2) 집성제(集聖諸)


집성제는 고통(苦痛)이 발생하는 원인을 밝히는 진리라는 것입니다. 석가모니는 고통 그 원인을 싼스크리트어로 탄하(tanha)라고 하였습니다. 번역하면 욕망(慾望)이라는 것입니다. 욕망이 인생의 모든 비극의 원인이 된다는 것은 불교에서 매우 큰 비중의 교리가 됩니다, 기독교의 죄(罪)의미와 비교 될 주제입니다. 인간 존재와 그 삶이 고통인 것은 인간들이 끊임없이 무엇인가 욕구하는 욕망(慾望)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욕망이 계속되는 한 인간은 사후에 또 다른 고통의 존재로 태어나 생사윤회 과정이 또 다시 반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탄하인 욕망의 근본 원인은 인간의 실상을 모르는 무명(無明)과 이 무지를 조건으로 하여 생긴 전생에 있어서 누적된 업력에 의해 생기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석가모니(釋迦牟尼)는 이와 같이 고통(苦痛)를 일으키는 복합적 조건들을 분석적으로 설파했으며, 이 같은 고의 조건적 발생을 연기(緣起)라고 불렀습니다. 무지와 욕망으로 인해 인간은 과거, 현재, 미래세상을 통해 끊임없는 생사의 악순환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라고 불교 교리는 말하고 있습니다.

(3) 멸성제(滅聖諸)


멸성제는 인생고(苦)를 고치는 방법에 관한 것입니다. 즉 무지와 욕망이 멸한 상태에 관한 불교의 교리를 설명하는 것이 멸성제입니다. 이는 고통을 멸한 상태가 불교의 이상세계인 열반(涅槃)이라고 부릅니다. 열반은 탐욕, 성냄, 무지의 3독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로서 생사의 세계를 초월한 경지를 뜻합니다. 열반은 과거 전생에 지은 업의 소산인 현재의 몸을 지닌 채로도 실현 가능하고 사후에 신체를 떠나 실현되기도 한다고 말합니다. 후자를 반열반이라고 부릅니다. 석가모니(釋迦牟尼)의 입적시에 실현된 현상입니다. 이런 사후의 열반에 대하여 석가모니(釋迦牟尼) 당시부터 제기되었던 문제는 인간에게는 영원불멸의 자아(自我)가 없는데, 누가 열반을 체험하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따라서 현세에서 열반을 실현한 여래(如來)가 사후(死後)에 존재하는가 안하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으며 석가모니(釋迦牟尼)는 이에 대하여 가부를 논하지 않았습니다.

(4) 도성제(道聖諸)


도성제란 고통의 종식인 열반으로 가는 길을 구체적인 방법으로 극복 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 것이 팔정도입니다. 석가는 깨달음에 이른 후 가르친 핵심사상이 사성제와 팔정도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는 수많은 부처의 가르침의 경전과 그 이후 깨달은 자들이 기록한 팔만대장경이 있지만, 그들의 모든 가르침을 함축적으로 표현한다면 사성제와 팔정도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결국 석가의 모든 가르침은 팔정도와 사성제를 말하는 것인데, 이 말씀은 팔정도의 올바른 삶이 있는 자가 사성제를 깨달아 해탈에 이를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듯이 해탈에 이르려면 반듯이 팔정도의 실천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팔정도(八正道)에 대하여 간략하게 설명하고자 합니다. 첫째로는 정견(正見)으로서 현상세계의 모든 사물을 올바른 눈으로 올바르게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로는 정사유(正思惟)로서 눈으로 보고 자세히 관찰한 것을 올바른 생각으로 판단하라는 것이고, 셋째로는 정어(正語)로서 올바로 보고 생각한 것을 가감 없이 진실 되게 말하라는 것이고, 넷째로는 정업(正業)으로서 입으로 말한 모든 것은 반드시 말한 그대로 진실 되게 실천하여야 한다는 것이고. 다섯째로는 정명(正命)으로서 인간의 모든 삶을 진리의 가르침에 따라서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고. 여섯째로는 정정진(正情進)으로서 정도의 길에서 이탈하지 말며 진리를 따라서 오직 한길로만 정진할 것이고 ,일곱 번째로는 정념(正念)으로서 생각 속에 번뇌 망상을 제거하고 오직 진리만을 생각할 것이고, 팔 번째로는 정정(正定)으로서 평안한 마음을 가지고 주야로 진리만을 묵상하라는 것입니다.


이상 요약한 것과 같이 팔정도(八正道)란 결국 현상세계를 정확히 알아서 올바르게 정도의 삶을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또한 팔정도 실천하는 것을 셋으로 크게 묶으면 계(戒), 정(定), 혜(慧)의 삼학(三學)이 됩니다, 도덕적 행위와 삶[계;戒], 흩어진 마음의 통일과 정화[정;定], 사물에 대한 올바른 통찰[혜;慧]을 닦음으로써 열반을 실현 할 수 있다는 교리입니다. 석가모니는 인생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기 전에 자세하게 진찰을 하여 여러 가지 심상치 않은 증세를 보고 그 증세들의 원인을 찾아낸 후에 치료를 하듯이, 먼저 인생의 심상치 않은 문제들의 증세를 찾아내고 그 원인을 발견한 다음에야 비로소 치료의 길을 모색하였습니다. 그리고 처방을 내렸습니다. 먼저 생, 노, 병, 사의 괴로움이란 증세를 찾아내고 그리고 난 다음 그 괴로움의 원인은 자아(自我)를 위한 욕망이라는 것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그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그 병을 고칠 수 있다는 진단을 내리고 마지막으로 고칠 수 있는 처방을 내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 처방이 곧 여덟 가지의 바른 길(八正道)입니다.


팔정도(八正道)는 인생고의 병을 치료하는 과정입니다. 이것은 타인이 치료해 주는 치료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의 노력에 의한 훈련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팔정도>는 8번째의 주제인 “불교의 팔정도(八正道)와 기독교의 팔복의 말씀”에서 자세히 설명하고자 합니다.

3. 나오는 말

기독교(基督敎) 신학은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님을 믿는데 있다면, 불교의 교리는 삼법인(三法印)과 사성제와 팔정도(八正道)를 실천하는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교의 구원의 세계인 열반(涅槃)에 이르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 팔정도(八正道)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불교의 교리에서는 현상세계와 인간의 존재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열반(니르바나)에 도달하는 방법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불교(佛敎)의 교리를 이해하려면 먼저 열반(涅槃)의 세계가 무엇인지를 알아야합니다. 불교의 구원의 핵심은 열반(涅槃)입니다. 석가모니는 열반의 개념보다는 열반에 도달하는데 관심을 두었습니다. 열반의 궁극적인 목적은 윤회(輪廻)에서 해방되는 것으로 존재의 종식을 의미하는 상태입니다. 열반(涅槃)은 “불어 꺼져서 없어진 상태” “멸절된 상태”로 열반(涅槃)이란 부정적 의미로는 존재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모든 번뇌(煩惱)의 속박에서 해탈(解脫)되고, 진리를 깨달음으로써 미혹한 생사를 초월해서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열반의 법(法)을 체득한 경지를 의미합니다.


불교에는 기독교에서 구원을 받은 자의 마지막 표상인 천국(天國)과는 참으로 다른 세계인 열반(涅槃)이 있습니다. 천국(天國)은 실존하는 세계인데 반해 열반(涅槃)의 세계는 존재가 없으면서 존재가 있는 것으로 말하는 점에서 역설적인 면이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진정한 실재성이란 모든 것은 잠시도 머물러 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는 유전의 원리에 의하여 모든 현상 세계는 어디로 가나 생사(生死)와 고통으로 충만하다고 묘사합니다. 그러므로 생사(生死)가 반복 되는 고해와 같은 사바의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의 세계로 구원 받고자 하는 것이 불교의 사상입니다.

서재생 목사 / 서울대현교회,/ 개종선교회 회장. /승려에서 목사로 개종

출처 : 내 사랑 중국 ♡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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