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선교신학의 통전적 이해
한국장로교총연합회 선교훈련원(PMTI) 가을학기가 시작됐다. “와서 도우라!”(행16:9)라는 주제로 열리는 이번 가을학기 커리큘럼 가운데 다음은 10월 20일(화) 강연을 전하는 손윤탁 박사(중곡동교회, 장신대 선교학 교수)의 "선교의 성경적 근거" 전문. (사진 : 아폴로기아 DB)
선교신학의 위치
선교신학은 “산 신학”(living theology)으로써의 선교신학이다. 그러나 신학이 ‘산 신학’이 되기 위해서는 신학이 선교를 인도하고, 선교가 신학에 생명을 줄 수 있는 상호적인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교회의 학문인 신학과 교회 존재 목적으로써의 선교가 상호작용을 함으로써 모든 교회는 제도적인 교회가 아닌 선교적인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산 신학’이라는 말은 생명력이 있다는 말인데, 생명은 언제나 복합적인 요소들이 통합적으로 구성되지 않는 한 유지되거나 성장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신학의 참된 목적이 사람을 구원하고 세계를 변화시키려는 목적과 의미를 갖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선교적인 의도와 차원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결국 선교신학은 신학의 한 부분이 아니라 모든 신학의 결과이자 목적이다.
신학은 처음부터 선교적이었다. 그 주제들을 살펴보아도 성경의 사건들과 교훈들이 모두 중요한 신학적 주제들이며, 선교적 의미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에 대한 것이나 사도 바울에 관계된 것들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의 생애와 바울의 서신들은 모두 선교적 의도에 의한 것이며, 예수님께서도 스스로 아버지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선교사이심을 말씀하셨고(요20:21), 선교사로 자신을 규정했다. 결국 신학은 선교의 산물이다. 신 구약의 성경은 선교의 책이며, 교회의 역사는 선교의 역사이다. 교리(조직신학)는 선교의 내용이며, 윤리는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대한 선교적인 책임을, 실천신학은 선교의 방법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신학은 선교의 바른 지표를 제시해 주는 것이다. 일찍부터 선교신학이 학문으로 인정 받지 못한 이유도 모든 신학이 존재하는 목적이 모두 선교와 관련이 있을 뿐 아니라, 그 성격 자체가 통전적이고 포괄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교회는 선교공동체이며, 교회 사역의 중심이 선교이기 때문에 모든 신학의 중심인 선교신학은 교회와 신학이 일체적인 관계를 맺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 교회라는 용어를 맨 먼저 사용한 것은 사도들의 공동체로써, 이들은 주님의 지상 명령인 선교 명령을 받고 간절히 기도하던 중에 하늘로부터 급하고 바람 같은 소리와 함께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며 각 사람의 머리 위에 임하였다. 성령이 임재한 것이다. 이것이 교회의 시작이다. 교회는 건물이나 조직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인의 모임을 말한다. 교회는 통전적인 성격을 갖는다. 다양한 구성원이 그렇고 종합적인 활동이 그렇다. 내적인 성장이나 외적인 활동 목표가 그렇고, 질적인 성장이나 양적인 부흥이 그렇다. 그러므로 교회라는 공동체 중심의 선교신학이 갖는 학문의 통전성을 보여주는 대표적 예가 되기 때문이다.
선교의 책인 성경
성경은 선교의 책이다. 간단히 설명하면 성경은 ‘구원의 책’이다. 선교의 목적도 역시 구원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선교를 위한 책이다. 복음서가 기록된 목적부터 그렇다. 예수님을 소개하기 위한 것이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하기 위한 것이다. 결국 선교를 위한 것이다. 신약 성경의 유일한 역사서로서 ‘성령행전’이라 불리는 사도행전도 마찬가지이다. 바로 선교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성경의 주제는 선교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계획과 그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선교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실현하는 것이므로, 성경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자 선교가 된다. 구약은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며, 대체로 성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役事)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신약은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이며, 선교의 완성을 예시해 준다. 이처럼 성경은 일관되게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인간 세상에서 펼치고 실현해 가는 과정을 기록하고 그 완성을 예시하고 있다.
성경은 선교라는 주제로 일관되어 있다. 구약은 창조로 시작한다. (창1:1) 그러나 신약은 구약이 ‘저주’라는 용어와 함께 말라기 4장 6절의 미완으로 끝난 데 비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약속을 성취시키려는 새 족보 즉 새로운 창조로 시작해서 ‘주 예수의 은혜’(계22:21)로 완성된다. 신 구약 성경 전체에 흐르는 주제는 하나님의 구원이며 선교이다. 따라서 선교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에 대한 철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성경 전체를 다섯 개의 큰 흐름으로 분류해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구약은 성부 하나님의 선교이다.
창조 주 하나님은 전 인류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선택과 구원을 통해 모든 열방과 민족들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신다.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을 택하셔서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고, 이로 인해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하신다. 구약의 하나님은 선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2) 복음서는 성자 예수님의 선교이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 선지자와 제사장, 왕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전 인류의 구세주이시다. 복음서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한다. 그는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선포하시며, 모든 약한 것과 병든 것을 치유하셨다. 복음서의 예수는 선교하시는 그리스도이시다.
3) 사도행전은 성령 하나님의 선교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시며, 그리스도의 영이시다. 성령은 선교의 영이시다. 성령은 교회의 영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무리들의 모임 위에 성령님이 임하시므로 교회가 됐다. 성령은 교회의 영이시다. 그래서 교회는 선교하는 교회로 시작된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은 선교하시는 성령이다.
4) 서신서는 교회의 선교이다.
“불이 탐으로 존재하듯이 교회는 선교함으로 존재한다”(Emil Brunner) “선교는 교회의 부분적인 특수 기능이 아니고, 교회 존재 그 자체이다”(D. Bosch) 서신서는 교회의 선교에 대한 편지이다. 바울을 비롯한 여러 사도들이 선교하는 중에 겪게 되는 여러 가지 일들과 교훈들을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의 몸 된 교회와 그 교회의 지체된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들이다.
5) 계시록은 선교의 완성을 기록한 글이다.
계시록은 종말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글이다. 장차 임하시게 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기록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인류 역사의 최고 정점이다. 궁극적인 선교의 완성에 대한 기록이 바로 요한계시록인 것이다.
선교가 신 구약 성경의 일관된 주제인 동시에 성경은 구원과 선교의 지침서이자 교과서가 된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에는 반드시 선교라는 주제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는 사람도 또 같은 하나님의 감동이 필요하다. 오늘날 선교의 근본 목적이 왜곡되고 복음이 변질되고 있는 이유 중 가장 큰 원인은 ‘인간 중심의 선교’로 전향되어 가는 현대선교신학의 교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성경적 선교신학’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선교신학은 통전적인 선교신학이다. 어원적으로 통전적(holistic)이란 말은 전체적(whole)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개체성을 무시한 전체가 아니라 부분적인 개체를 인정하면서 완전(complete)을 추구하는 것이다. 구체적이면서도 개별적이고, 그러면서도 종합적이다. 선교는 목적과 대상과 내용과 방법이 모두 통전적이다. 복음전도 대상으로서의 인간이 전인적이기 때문이다. 육체와 영혼이 분리된 인간은 이미 전도 대상으로서의 인간이 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완전함은 성경적인 것을 말한다. 결국 통전적인 선교신학이란 성경적인 선교신학을 이르는 말이다.
선교신학이라는 과목이, 그리고 교회에서 차지하는 선교의 위치가, 성경전체에 흐르고 있는 내용이나 역사적인 흐름이 포괄적이고 통합적인 선교신학이요, 통전적인 선교를 요구한다 할지라도 통전적이라는 용어 자체가 등장하게 된 배경은 역시 양극화 논리에 의한 보수와 진보의 대립적인 구조이다. 전도와 봉사, 복음과 문화, 개인 구원과 사회적 책임, 보수와 진보, … 오랜 기간 동안 이러한 논쟁은 지속되어 왔으며, 교회는 선교에 쏟아야 할 많은 힘들을 여기에다 소진해 버렸다. 제마다 자신의 주장이 옳으며, 자기 입장이 더 성경적이라고 했다. 이러한 와중에 양쪽 내용을 다 수용하면서 모두가 다 성경적이며 선교적인 실천을 위해 필요한 요소임을 역설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지조 없는 사람, 상대 무리와 같은 사람, 중간치들, 심지어는 절충주의자로 몰리거나 사탄은 처음부터 양다리를 걸쳤다는 욕설까지 감수해야만 했다. 그러나 여기에서 분명하게 밝히려 하는 것은 통합이다, 통전이다 하는 말이 소위 중도나 중간이나 중심과 같은 부분적 용어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성경적 선교신학에서 강조하는 통전적 선교신학이란 성경 중에서 어느 부분은 우리에게 유용하니까 취하고 어느 부분은 불리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에 버리는 신학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 그대로 받아들이는 입장이다. 이쪽에서 몇 가지 저쪽에서 몇 가지를 취사선택하는 식의 부분적인 중도 융합이나 자기중심적인 혼합 절충을 용납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양자택일이나 취사선택, 융합 절충할 권한이나 능력이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에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말씀하신 그대로 순종하는 신학이 통전적인 신학이며, 성경적인 선교신학이다.
1) 명령의 통전성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 신 구약 성경의 시작인 이 한 구절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인 동시에 모든 인류를 향한 선교의 근거가 된다. 동시에 창조의 기사는 온 인류가 공통적인 기원을 갖고 있으며, 동일한 존엄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모든 종족이 다 창조주 되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 수 있도록 함에 그 선교적 당위성이 있는 것이다.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피조물이지만 그 중에서도 인간은 특별히 구별된 피조물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고, 또한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관리할 수 있도록 위탁 받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에게 명령하셨다. 아직 인간이 선악과를 먹기 전이라 죄에 대한 언급은 없다. 순서적으로 봐 문화적인 명령(cultural mandate)이 먼저 였다. 선교의 최종적인 목적은 복음적 명령(evangelistic mandate)이라 할지라도 복음 전파를 위한 수단으로서의 문화적인 접근 방법을 먼저 이야기할 수 있는 상당한 근거가 된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1:28) 이 명령을 오늘날 우리는 사회적 명령으로 풀이한다. 그러나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성경이라는 긴 여정을 통해 우리들에게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시고 말씀해 주신 절대적인 명령을 수령하게 된다. 모든 믿는 자들, 곧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이 명령은 원복음(protoevangelium)이라 불리는 창세기 3장 15절 “내가 너로 여자와 운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에 근거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여야 하는 명령이다. 이 명령을 우리는 개인 구원을 위한 전도명령이라고 부른다. 죠지 피터스(george W. Peters)는 이것을 두 명령(Twofold Mandate)이라 불렀다.
문화적(첫 번째) 위임 : 하나님이…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1:28, 2:15, 8:17)
복음적(두 번째) 위임 :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마28:19~20, 막16:15, 눅24:48, 요20:19~23, 행1:7~8)
이 두 명령은 동등한 위치를 갖는다. 이 두 명령은 서로 다른 환경으로 나왔으며, 다른 필요와 목적으로 봉사할 수 있도록 주어진 별개의 명령이기 때문에 독립적이다. 독립적이면서도 동등하기 때문에 통전적이다. 교회는 오랫동안 이 주제에 대한 논쟁을 계속해 왔다. 그러나 로잔 언약 이후 복음주의의 입장에서도 ‘전도와 사회 참여’라는 문제는 모두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의무인 동시에, 사회적 관심에 대해서도 매우 진지하게 취급되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됐다.
2) 선교적인 힘의 통전성
교회는 두 가지의 중요한 힘을 갖는다. 예루살렘교회와 안디옥교회를 설명하면서도 이 두 가지의 힘을 강조하지만 성경학자들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특징도 두 가지의 힘, 곧 구심력과 원심력을 강조한다. 그 특성을 각각 부르심과 보내심(“come and go”라는 명령)이라는 내용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율법과 복음, 심판과 은혜, 공의와 자비, 이스라엘과 이방인, 행위와 믿음…결국 신 구약 성경의 특징을 설명하는 선교의 이 두 가지 힘을 요약하면 일반적으로 구심적(centripetal)인 힘과 원심적인(centrifugal) 힘으로 설명할 수 있다. 중국에서는 이를 향심력(向心力)과 이심력(離心力)이라는 단어로 표기하는 바, 이를 구약을 이스라엘이라는 특수성으로, 신약을 ‘온 인류(세상) 구원’이라는 보편성으로 말하기도 하고, 세계주의(universalism)에서 특정주의(particularism)로, 또 다시 이 특정주의는 우주주의로 나아가는 원리를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언제든지 구심력은 원심력을 전제로 하는 것인데, 실제로 창세기의 족장들에게 주어진 복이 그들만의 복이 아님을 성경의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해 복을 얻을 것이라. (창12:2~3)
아브라함 – “땅의 모든 족속이”(창12:3) “천하 만민이”(창18:18, 22:18)
이삭 – “네 자손을 인해 천하 만민이”(창26:4)
야곱 –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해”(창28:13~14)
요셉을 통해 이스라엘뿐 아니라 모든 애굽 사람들은 7년 흉년의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그의 온 백성을 위한 “제사장의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출19:6)으로서의 특권을 누린다. 그러나 출애굽의 과정에 나타난 열 번째 재앙은 애굽인이냐 유대인이냐 하는 것도 보다 죽음의 사자가 확인한 것은 문설주의와 문인방의 ‘피’였다는 사실(출12:23)이다. 그래서 출애굽 시 중다한 잡족들이 그들 무리에 가담할 수 있었다. (출12:38) 주목할 일은 이스라엘의 율법은 제한적이지만, 에돔은 3대, 암몬과 모압은 10대를 기다려도 이스라엘의 회중에 들 수가 없다는 규정(신23:7~8)이 던져주는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사실 이방인들도 유월절이나 안식일 규례를 함께 지킬 수도 있었다. (민9:14, 출20:10, 신17:15 참조) 특별히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이들을 압제하지 못하게 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관대해야 함을 명하였다. (출22:21, 대상16:19~20, 레9:9~10, 33~34) 라합이나 모압 여인 룻의 이야기나 나아만 장군에게 베풀었던 관용은 모두 구약 속에 나타난 보편성과 선교의 원심적인 성격을 대변해 주는 내용들이다. 특히 유대인들이 그토록 소중히 여긴 예루살렘과 성전에 대해서도 솔로몬은 헌당 기도를 통해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보편적인 사랑을 호소하게 됨을 보여주고 있다.
“이방인에 대해서도…이 전을 향해 기도하거든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땅의 만민으로 주의 이름을 알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처럼 경외하게 하옵시며…”(대하 6:32~33)
신약성경이 구약성경보다는 분명히 더 선교적이라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결코 구약의 보편성을 경시하지 않는다. 신약성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의 선교명령은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행1:8)을 향한 원심적인 명령이라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이 일을 위해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아니하고 모여서 약속한 성령을 기다려야만 했다. (행1:4) 교회는 흩어지는 교회로서의 사명이 중요한 만큼 모이는 교회로서의 역할을 다하게 될 때 교회다운 교회로서의 힘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선교의 특수성과 보편성, 구심력과 원심력,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 부르심과 보내심, 소명과 사명은 신 구약 성경의 전반적인 성격을 규명해 주면서도, 결코 어느 하나를 버리거나 양자택일 할 수 없는 통전적이고 통합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3) 사역의 통전성
예수님은 선교사이셨다. 선교(mission)라는 단어가 ‘보내다’(missio)라는 말에서 유래된 것처럼 선교는 보내는 것이다. 예수님은 스스로 보내심을 받은 자이심을 밝히셨고, 또 우리를 보내셨다. (요20:21)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이 땅에 보내심을 받은 성자 예수님의 사역은 오늘날 그로부터 보냄을 받은 우리들의 사역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선교는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복음전파로 요약될 수 있다. 갈릴리에서 시작해 유대와 예루살렘으로 이어지는 여정과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예수님의 사역을 우리는 일반적으로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신” 일들이었다. (마4:23, 9:35)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자체가 선교였다. 우선 마가복음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먼저 유대 땅에서 기적(귀신들린 자의 치유 사건)을 베푸셨다. (1:21~28) 이방 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5:1~20) 베드로 장모의 열병 치유나(1:29~31) 게네사랏에서 병상 채 메고 나온 환자의 치유(6:53~56), 5병 2어(6:34~44)의 기적과 7병 2어(8:1~9) 기적은 모두 유대와 이방에서 행하신 능력이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이방 여인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믿음을 보셨다. (마15:28 참조) 시니어(D. Senior)는 이것을 이방선교를 위한 마가의 “갈릴리 편들기”로 표심받는 지역이며, 정치적으로도 헤롯이 아닌 로마가 직접 통치하는 지역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가는 예루살렘을 죽음의 장소로, 갈릴리에서 만난 반대자들조차 예루살렘 출신(3:22, 7:1)임을 부언한 것은 예수님의 선교가 유대인과 이방인을 모두 포함하는 통전적인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예수의 선교가 통전적이었다는 것은 비단 이방인과 유대인에 대한 문제뿐 아니라 선교 방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종으로 묘사된 마가복음의 예수는 철저한 섬김을 통해 사역하는 분으로 묘사되어 있다. 예수님은 약 3년의 공생애 기간에 중점적으로 두 가지 일을 하셨는데, 첫째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었고(전도와 선교), 둘째는 병든 자, 귀신들린 자, 눌리고 소외된 자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일(디아코니아)이었다. 귀먹고 어눌한 자를 고치셨고 귀신을 쫓아내시며, 혈루병 환자와 열병을 고치시고, 세리들과 함께 식탁 공동체를 베푸심으로 위로하시고 동행하셨다. 섬김과 봉사가 없는 선교는 불가능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 사역은 디아코니아로 시작되고 있다. 굶주린 무리들에게는 빵이 필요했다. 그래서 5병2어와 7병2어의 기적을 행하셨다. 디아코니아의 선교 사역은 복음의 전파를 위한 사역이기도 하지만, 복음 전파와 함께 이뤄져야 할 사역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사역을 통해 모범을 보여줬다.
교회는 세상과 타협을 해서도 안 되지만, 세상을 무시하거나 외면해서는 안 된다. 특히 이러한 입장은 예수님의 선교사역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유대인을 버리고 이방인을 취한 것이 아니라 둘 다 선교의 대상으로 삼았다. 선교는 멀리 해외로 선교사를 파송해 복음을 전하게 하는 일로만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선교의 일차적인 의미는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이방 민족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께서 원하고 계신 것은 좁은 의미에서의 해외 선교만이 아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이방 민족들에게도 그의 종을 파송하시지만 또한 이 땅의 소외 받고 버림받은 작은 자들을 향해서도 끊임없이 그의 일꾼을 파송하신다.
바울은 모범적인 선교사였다. 바울 선교의 통전성은 그의 다양한 선교 방법과 융통성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유대인들과 교회지도자들로부터 숱한 비판을 받으면서도 그의 사역은 언제나 융통성 있었고 방법 역시 다양했다.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으로”(All things to all men) 적용되는 바울 선교의 중요한 특징은 ‘방법에 있어서의 다양함’뿐 아니라 대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임을 말해 주고 있다.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과 같이 되어서 복음을 전파했고,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자와 같이 되어서 복음을 전파했다. 바울의 복음 전도는 때와 장소에 구애되지 않았다. 어떤 곳에서는 수 주간만 머물렀는가 하면 어떤 곳에서는 2~3년을 머물렀으며, 회당을 중심으로 한 전도에 힘을 쓴 것은 사실이지만 강가에서(행16:13), 감옥에서(행16:30), 시장에서(행17:17), 심지어 죄수의 몸으로 호송되어 가는 가운데 멜리데 섬에서까지도(행28:4-6) 기회를 놓치지 아니 하고 전도하였다. 바울의 전도 방법은 가정을 대상으로 하는 전도였으나 개인 전도에 대해서도 등한시 하지 않았으며, 서신을 통한 문서 전도나 제자 양육을 통한 교육전도(행19:5-10)에도 힘을 썼다.
바울은 효과적인 선교를 위하여 융통성 있는 선교 전략을 구사하였다. 바울의 선교전략은 매우 통전적이고 통합적이었으며 복음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어떤 경우에도 복음의 내용에 관한 일체의 양보가 없었다.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받으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6:8). 아무리 시대적인 상황이 바뀌어 간다 할지라도 복음은 변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이시기 때문이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행4:12)이기 때문이다. 성경말씀 그대로 예수님 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갈 자가 없기’(요14:6) 때문이다.
손윤탁 박사 (중곡동교회, 장신대 선교학 교수)
출처: 아폴로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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