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지와 피선교지간에 있어서의 신학적 연속성과 불연속성
- 미국 북장로교와 초기 한국 장로 교회를 중심으로-
이우윤 (CUM 중국선교연구소장)
I. 서 론
1. 연구의 필요성
20세기 초, 선교 초기 한국은 서구 기독교 분파교회의 전시장과 같은 형편이었다. 미국 장로교, 북장로회, 남장로회, 오스트레일리아 장로회, 캐나다 장로회, 미국의 미감리회, 남감리회, 영국의 성공회, 기독동신회, 그리스도인의 집회소, 형제파, 플리머드형제단, 구세군, 엘라딘선교회,(침례교회), 동양선교회(성결교모체) 러시아정교회, 안식교회, 일본조합교회 등의 여러 국가의 교회가 한국 선교에 동참했다.
20세기 초 이러한 한국 초기 교회의 상황에서 한국 선교를 개척한 1세대 선교사들은 한국교회의 생성과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선교사들은 한국인과 접촉하면서 한국 토착문화의 역사를 이해하게 되었고 그들의 지원을 받으면서 기독교 복음을 한국 상황에 적용시켜 나갔다. 선교사관적 기독교사는 이러한 관점을 지닌다.
그리고 한국인들은 선교사를 통해 기독교 복음과 서구 문화를 접하였고 이를 한국 토착상황에서 해석하여 수용하였다. 민족사적 기독교사는 이러한 관점에 주목한다 그 결과 한국이란 토착상황에서 기독교 복음이 수용․ 해석․ 적용되어 토착적 한국 교회를 형성해 왔다.
이러한 초기 한국 선교의 정착과정에서 한국 교회는 교회내․외적의 여러 가지 상황을 맞게 된다. 내적 상황으로는 여러 각국 선교사들에 사역의 결과로 인한 교회의 여러 분파적 문제, 그와 아울러 선교사들에 의해 추구된 교회 연합운동 및 이러한 것에 대한 한국인들의 참여문제 등이 있다. 외적 상황으로는 한말 근대화 과정에서 일어나는 진보 보수세력간의 갈등과 마찰문제, 그리고 외세 특히 일본 침략에 대한 대응문제 등이다.
선교사관적 관점에서 보는 것처럼 선교사들의 신학적 배경과 사상 그리고 신앙은 한국 교회에 긍정적으로 혹은 부정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즉 이러한 선교사들의 신학적 사상과 가르침은 한국 교회에 중요한 신학적 토대를 형성하기도하고, 토착화 과정과 국내외의 여러 환경을 거치면서 선교사들의 신학과는 다르게 변형되어 적용되기도 하였다.
이제 21세기를 맞는 한국교회는 선교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선교의 주체로서의 기능과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20세기 초 피선교지로서의 선교지의 신학적 사상을 수용하던 입장에서 이제 우리 한국 교회는 신학적 사상을 선교지에 전달하는 입장에 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선교지와 피선교지간의 신학적 연속성과 불연속성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신학적 사상을 주고 받는 과정에서 어떤 사상이 연속적이었고, 또 불연속적이었는가 혹은 어떤 상황으로 인해 신학사상이 불연속성을 가지게 되었는가는 중요한 문제이다.
2. 연구의 목적과 방법
이러한 필요에서 한국의 선교 초기,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들의 신학적 사상이 초기 한국 장로교회에 미친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무엇인가를 기독교사를 통해 고찰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초기 한국 교회에 영향을 미친 미국 장로교 특히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들의 신학적 배경과 신학적 사상 및 신앙을 분석하고 이들 신학과 신앙에 영향을 준 19세기 미국 신학의 흐름도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한다.
본 고에서는 이러한 분석을 바탕으로 선교지로서의 우리 한국 교회가 피선교지에 어떤 신학적 영향을 어떻게 주어야 할 것에 대한 시사점을 발견하고자 한다.
II. 초기 한국 장로 교회와 미국 장로교 선교사들
1. 초기 한국 장로교의 태동과 미국 장로교 선교사
한국 장로교의 시작은 우리 나라 개신교의 시작과 같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한국인과 가장 먼저 접촉한 선교사들은 로스(J.ross)와 매킨타이어(j. Macintyre)인데 이들은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의 선교사들이다. 그들은 1872년 만주에 와서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선교하면서 조선 선교에 대해서 상당히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들은 중국인들을 시켜 조선인들과의 접촉했는데, 그 때 처음 만난 조선인이 의주 사람 이응찬, 백홍준, 김진기 등이다.
이 세 사람은 로스 목사가 진행 중이었던 성경번역을 도왔고, 약 2년 후 매킨타이어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얼마 후 매킨타이어로부터 서상륜도 세례를 받게 됨에 따라 그들은 한국 최초의 장로교인이 되었고, 또 성경 매서인이 되어 국내로 잠입하였다. 이로써 그들이 한국 장로교회의 초석이 되었다.
이들 네 명은 성경 매서인이 되어 국내에서 성서를 팔면서 전도사업을 병행함으로써 믿음의 씨를 뿌렸고, 이로 인해 교회의 터전을 닦았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황해도 장연 소래와 의주에 교회를 세웠는데 이것은 한국 최초의 장로교회이자 한국 개신교회의 효시였다.
이와는 별도로 그 당시 일본에 머물러 있던 조선인 이수정은 일본에 와있던 영국의 장로교 선교사 존녹스(J.knox)와 접촉을 하면서 자기가 번역한 쪽복음서를 발간했고, 또 외국 선교사 여러 사람을 찾아다니면서 한국 선교의 필요성을 역설함으로써 한국 선교의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데 일조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미국의 선교사이며 의사이기도 했던 알렌(Allen)이 1884년 한국에 파송된 최초의 의료 선교사로서 입국했다. 그는 처음 선교사라는 신분을 감추고, 미국영사관 부속 공의로 입국했으나 본래 그의 내한 목적은 의료선교에 있었다. 그는 세브란스의 전신인 광혜원을 개원하고 의료선교를 시작했다. 또 그는 갑신정변 때 부상당한 민영익을 살려냄으로써 국왕의 신임을 얻고, 드디어 국왕의 시의가 되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1885년 부활절날에 미국 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H.G. Umderwood)와 아펜젤러(H.G. Appenzeller)가 내한하여 본격적으로 선교사업을 시작했다. 이렇듯 한국은 최초에 스코틀랜드 장로교와 선교 접촉을 했고 드디어는 미국 장로교 선고사들이 합법적으로 입국하여 선교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 후 미국 북장로회는 한국에 선교회를 조직하는 한편 서울, 평양, 대구, 선천, 강계, 청주, 안동지역에 선교부를 조직하고 복음선교와 의료, 교육 등 선교사업을 대대적으로 펼쳐나갔다. 특히 서북지역에서는 이미 형성되기 시작한 장로교 신도들을 중심으로 각지에 급속히 조직교회가 결성되기 시작했다.
선교 초기 어떤 지역에서나 핍박이 뒤따랐다. 특히 유교정신이 남달리 강한 한국에서 새로운 서양종교인 기독교를 선교하기란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으므로, 충분히 희생과 순교를 감안해야했다. 사실상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우리나라에서는 필연적이였다.
언더우드는 1885년 7월 11일 한국에서 처음 세례를 베푼 이후, 압록강에서 33명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1887년 황해도 소래의 서상륜이 세운 교회에서 20여 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언더우드는 소래교회 일을 듣고, 용기를 내어 자기 집 사랑방에서 불과 14명의 신도를 모아 놓고 예배를 드리고 교회를 세우기로 했다. 이것이 새문안교회의 시작이다. 이 때 서상륜과 백홍준을 장로로 피택하였고 그 후 서상륜은 새문안교회의 교역자가 되었으며 백홍준 장로는 우리 나라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가 되었다.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세워진 장로교회는 장연의 소래교회를 비롯하여 서울의 새문안, 연동, 승동, 안동교회와 평양의 장대현 교회 등이다. 그 후 이들 교회는 모두 대교회로 발전했고, 인근지역에 많은 교회를 개척했다.
이렇듯 한국 장로교회는 미국 선교사들의 열성적이고 희생적인 선교로 부흥발전 할 수 있었고, 또 내적으로도 두터운 신앙을 가지고 그들에게 적극 호응한 결과로 한국 장로교회는 초창기부터 큰 성장을 이룩하게 되었다.
2. 초기 한국교회의 성장과 미국 장로교 선교사들
미국 북장로교회의 선교에 뒤이어 1892년 미국 남장로교회도 한국 선교를 시작했다. 테이트(Tate)를 비롯하여 데이비스(Davis), 레이놀즈(Reynolds), 전킨(Junkin) 등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주로 호남지역을 맡아 선교하였다. 그들은 주로 전주와 광주, 목포, 순천, 군산 등지에 선교부를 개설하고 뜨거운 믿음을 가지고 열심히 선교하여 놀라운 선교 성과를 올릴 수 있었다.
이곳에서 활동한 선교사들은 각 선교부를 중심으로 의료선교와 교육사업 등을 차질없이 추친하였고, 또 북 장로교와도 제휴와 협조가 잘 이루어졌기 때문에 한국 장로교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게 되었다.
1889년에는 호주 장로교회도 한국 선교를 시작했다. 호주의 선교사들은 빅토리아 성 장로교회 후원으로 한국에 왔는데 이들은 경남 지역 일대에서 선교활등을 폈다. 부산, 마산, 전주, 거창, 통영 등지에서 선교부를 두고 경건과 보수주의에 입각한 장로회 교리를 심어주었다. 이 지역은 서북지역 못지않게 한국 장로교회의 중심지로 성장 발전했다.
캐나다 장로교회에서도 한국 선교를 위해 다소 뒤늦게나마 선교사들을 파송했다. 캐나다인 독립 선교사가 한국 선교를 시작하였으나 얼마 후 순직하고, 1898년에는 캐나다 장로교회 그리어슨(R.G.Grierson)목사와 의사 등을 파견했다. 캐나다인으로 맨 처음 한국에 온 선교사는 매켄지(W J. Mckensie)목사였다. 그의 선교 행각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그러나 마켄지 목사는 한국에 온 지 2년 후 일사병으로 신음하다가 끝내는 총으로 자살했다.
캐나다 장로교회의 한국 선교는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 형성에 있어 견인차적 역할을 감당하여 진보적 장로교회의 한 바탕이 되었다.
III.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들의 신학과 신앙
초기 한국 기독교의 신앙과 신학 형성에서 선교사의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미국 북장로회 해외 선교부 총무를 역임하였던 AJ. Brown 의 증언에 “자긍심 가득한 중국인이나 오만한 일본인과는 달리 한국인은 깊은 애통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인다.” 이 글에서 한국 기독인 들이 의심 없이 무조건 받아들인 초기 선교사들의 신앙과 신학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국 기독교의 정체성, 수립과정에서 초기 선교사들의 역할은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으며 거기에는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이 함께 내포되어 있다
1. 19세기 미국 신학의 흐름
19세기 미국 신학이 아직은 유럽 신학에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고 있었음을 미국의 종교사학자 마티(M. E. Marty)는 지적하면서 “ 미국에는 유럽처럼 거물 신학자는 없었다. 따라서 미국 신학이라 할 수 있는 것도 없었고 읽을만한 신학적 저술도 없었다 그러나 미국의 신학자들은 미국이 필요로 하는 것을 외면하지는 않았다”
17세기 후 아메리카 이주와 정착의 주역이었던 유럽의 기독교인들은 종교적 통합이념을 제공하였다. 이들은 유럽의 단일 민족, 단일 종교 체제, 국가 종교 체제를 유지한 유럽과는 다른 환경이었다.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일치를 추구하는 종교체제가 필요했다.
계약 공동체 재해석, 선민의식 적극도입, 종교적 각성운동을 거치면서 미국의 개신교 즉 뉴잉글랜드 신학에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이후 회중 교회가 중심이 된 뉴잉글랜드 신학은 계몽주의 이해를 수용하며 점차 교조적 칼빈주의 원리를 벗어나기 시작하여 19세기초에 이르러 아르미니우스 주의를 수용한 웨어의 초자연적 합리주의, 삼위일체까지 비판한 F. Hodge와 W. channing의 유니테리안 주의에 이르는 좌파신학이 나왔다(하바드 대). 예일대학을 중심한 에드워즈, 벨라니, 핀니, 제2차 종교 각성 운동의 주역들, 이들은 “해야만 한다” “할 수 있다”였다. 전적 타락과 이중 예정론을 신앙 원리로 삼는 전통 칼뱅주의와는 거리가 있었다. 신파로 불린 이들은 하나님의 심판보다는 은총을 강조하였다. 다시 무디, 생키, 토리, 채프먼 등 19세기말 20세기 초 대학생 중심의 선교자원운동과 주일학교운동 YMCA운동, 이 운동의 신학적 배경은 체험중심의 뉴잉글랜드 신학을 반영하면서도 성경의 절대성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 육적 부활 등을 강조하여 보수화 경향을 띠고 있었다. 다른 측면 신학 흐름은 진화론과 리츨의 영향을 받은 자유주의 신학으로 사회 복음 신학이 발전하였다.
칼빈의 근본 원리 따르려는 복음주의자 보수주의적 칼빈 신학은 앤도버신 학교를 설립 1812년 보수적 장로교 신학자들이 프리스턴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알렉산더와 찰스하지 알렉산더 하지, 워필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요리문답에 근거한 16세기 칼빈주의 신학이었다.
근대적 이성과 자연의 재발견을 바탕으로 개혁교회 전통을 재해석하려는 다수 계몽주의 경향에 16세기 칼빈주의의 원리를 고수하려는 소수 보수주의 경향으로 나뉘어 갈등을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19세기에 미국 감리교는 유럽의 경건주의와 아르미니우스 주의와 연결되는 신학으로 인간의 전적 타락과 이중 예정론을 강조하는 칼뱅주의와는 궤를 달이 달리하는 신학이었다. 감리교의 신학적 분위기는 웨슬리의 신학이 갖고 있는 경건주의,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요소에다 독일의 합리적 이성주의 요소를 접목하는 진보적 경향을 띠고 있었다.
2. 초기 한국교회와 미국 장로교 선교사들의 신학적 배경
초기 한국교회는 장로교회 헌법,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교회 행정, 권징조례, 예배 모범 등과 같은 선교국 교회의 외적인 형태와 교회의 법 및 신앙고백까지 넘겨 받았다. 선교사들의 신앙과 신학적인 견해가 설교와 성경 공부, 선교 방법을 통하여 새로 자라는 한국 교회에 이식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로 인하여 한국 목사들은 자기들이 전수 받은 것을 유일한 합법적인 신학이라고 이해하였고, 그것은 신학적인 전통이 되었다.
선교가 시작되던 해로부터 1920년 중엽까지는 보수적이며 복음적(evangelical)인 신학이 한국 장로교회에서 지배적인 신학으로 통하였다. 선교 초기 한국의 장로교가 비록 행정적으로 자립했더라도 신학 사상적으로는 미국 장로교의 영향하에 있었다.
선교초기 한국의 미국 선교사들은 뉴 잉글랜드에서 온 몇몇 감리교 선교사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다 미국 장로교의 구학파 사상(the Old-school idea)이 지배하던 지방 출신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교육적 배경도 1893년에서 1901년까지는 한국에서 40명의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들이 일했는데, 그 가운데 16명이 프린스톤 신학교 출신이고, 11명이 맥코믹(McCormick)신학교 출신이었다.
그들의 신학적 기반은 전성천은 미국 장로교회와 회중교회의 구파(Old-side, Old- Lights)나 구학파(Old-school)에서 온 것이라고 주장하는 데 반하여, 한철하(韓哲河)는 한국에 온 선교사들이 ‘신파’(New-side, New Lights)와 ‘신학파’(New-school)에 속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한국에 온 초대 선교사들은 학생 시절에 직간접으로 무디(Dwight L. Moody,1837-1899)의 부흥 설교를 통하여 감화를 받았으며, 부흥의 영향을 입었다.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이러한 배경에서 신앙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타 교파에 대해서는 관대했으나 신학적 자유주의나 성경비판은 단호히 배격하였다.
이러한 한국에 온 선교사들의 신학적인 견해는 1907년에 한국 장로교회가 채택한 신조에서 엿볼 수 있다. 장로교 신조는 12조로 구성되어 있는데, 즉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점, 하나님의 성품, 삼위일체 하나님, 하나님의 창조 사역, 인간의 창조, 인간의 타락, 그리스도의 속죄, 성령,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과 성령의 일, 성례, 기독교인의 의무, 성도의 부활과 최후의 심판에 관한 것 등이다.
3. 초기 한국교회와 미국 장로교 선교사들의 신학적 사상
대표적인 선교사인 언더우드는 26세에 총각으로 1885. 1. 25. 일본에 도착하여 약 2개월간 머물면서 한국의 역사와 풍습을 공부하고 그해 4월5일 이수정이 번역한 한글성서를 들고 한국 선교를 시작했다. 그의 선교 신학은 그 자신의 선교적 열정과 신앙의 삶위에 실천적으로 구성되었는데, 그의 신학은 다음과 같이 평가된다.
① 예수 그리스도를 타락한 인간들의 구속주로 믿는 청교도적 신앙 위에 있다.
② 성령의 역사 안에서 계속되는 경건주의적 부흥운동의 실천 위에 있다.
③ 그의 선교 신학은 주어진 선교적 과제들을 교회 연합 운동의 차원에서 풀어가려는 포용적인 그의 신앙 위에 서 있다.
헐버트는 1886년 국립학교 육영공원의 교사로 초빙 되어 와 이 땅위에서 일제의 침략과 수탈 행위를 눈으로 보고 겪으면서 자신의 선교 신학을 수립하고 실천적으로 한국 민족의 자주화와 독립을 위해 활약한 사람이다 헐버트는 다른 선교사들처럼 정교 분리의 원칙에서 일제의 한국 침략과 약탈은 방관하고 있을 수 없었다.
① 그는 신앙과 신학이 인간이 속한 삶의 현실 전체 즉 정치와 결코 분리할 수 없다고 보 았다.
② 정치 현실에 참여함을 통한 정의의 실현을 목표로 했다.
③ 한국에 대한 깊은 연구와 이해 속에서 나온 상황적 신학이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 민족의 기원과 특성을 깊게 고찰하고 이해하여 기독교 수용의 적극적인 요인을 찾았다. 한국의 고유한 역사와 문화 전통을 한국적 맥락 속에서 기독교를 통해 적극적으로 활성화 할 수 있는 신학적 방법을 모색하였던 것이다.
모페트는 1889년 미국 보수주의 신학의 요람인 맥코믹 신학교를 졸업하고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어 1890년 한국에 왔다. 선교적 열정을 가진 열정적 순회 전도사로서 한국 교회의 성장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의 보수주의 신학을 요약하면
① 성서만을 하나님의 유일한 계시의 표준으로 생각한다(성서의 절대적 권위주장, 무오류 성) 고등비평을 받아들이지 않았다(성서의 축자적 의미만 논구)
② 역사적 칼빈주의의 교리와 신앙 고백으로 형성되어 있다.
③ 청교도적 경건의 실천을 지향하였다 (술, 담배, 놀음, 금지) - 이것이 한국 교인들로 하여금 세상과 구별된 한층 높은 윤리의식과 경건적 삶의 형태를 형성케하는데 중요한 동인이 되었다.
또한 평양 장로교 신학교의 초기 교육은 성서 지식 일부를 가르키고 영적인 경건훈련에 치중하는 단계였다. 신학 교육이 본격화 될 때 한국교회에 보수주의 신학 형성에 크게 기여한 선교사는 레이놀즈였다. 미국에 유니온 신학교를 졸업한 미국 남장로교 소속 선교사 였다. 1895년 한글 성서 번역 작업에 참여하고 1916년 평양신학교의 교수로 부임하였다. 조직신학 담당으로 기본 신조와 교회적 특성을 강의하고 신학 지남을 편집하는 등 한국 보수주의 신학의 이론적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의 공헌을 두 가지로 평가하면 다음과 같다.
① 선교사 시대의 한국 신학교육의 기초 이념과 목표를 수립하고 이론적으로 체계화 했 다. 한국인 교역자 양성에 대한 구상을 가지고 구체화 한 이념과 목표가 선교정책 가 운데 없었던 시절에 교역자 양성에 대한 이념과 목적을 선교사 회의에서 공식 교육 정 책으로 채택하게 하였다.
② 평양신학교의 신학적 주류였던 보수주의 신학을 학문적 차원에서 체계화하고 이를 변증하는 역할을 수행함으로서 선교사 시대의 한국신학의 틀을 형성하였다. 서구 여 러 종교의 진보적 사상(진화론 범신론, 성서의 고등비판등)을 소개하고 이를 성서와 역 사 칼빈주의의 전통과 교리의 입장에서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서구의 진보적 이성주의 에 근거한 성서 비평을 부정하고 성서의 절대적 권위를 주장하였다. 교회의 사회 참여 적 기능과 활동에 대한 비판, 교회론에서 전도와 엄격한 도덕생활에 근거한 공동체라 고 정의하였다. 교회의 현실적 정치나 사회에 직접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불가능 한 것 이다. 자연종교의 계시론에 대한 비판- 유교 불교 등 전통적인 한국의 종교적 현상들 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론에 근거하여 비판하였다.
초기 한국 교회의 급속한 성장은 교회를 지도할 교역자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했고 신학정보의 결핍을 절감하게 하였다. 1900년 한국 최초의 신학지 신학원보가 감리교 선교사 존스에 의해 발간되었고, 1916년 신학세계(감신)와 함께 한국 신학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신학지남(1918년) 이 창간되었다.
신학지남은 당시 짧은 신학교육 기간에 교육을 받은 한국 교역자들에게 일선 목회에서 설교하기에 부족한 설교 자료들을 보충해 주고 목회의 실천적 지침을 주기 위해 발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 신학지남을 통해 한국 교회의 실천목회와 기독교 교육의 신학적 기초 및 체계를 형성하여 준 선교사가 클라크 목사 였다.
클라크는 미국 북장로교에 속하여 미국 맥코믹 신학교에서 찰스핫지와 워필드 등의 지도하에 신학 공부를 하고 1902년 이 땅에 왔다. 1906년 평양신학교 교수로 취임하여 실천신학과 기독교 교육을 담당하고 성서 주석 및 교회정치에 논문과 저술을 하였으며 한국인 교역자 양성과 신학 저술에 그의 생을 바쳤다. 클라크는 미국의 보수적 신학의 토양에서 배운 신학적 원리들을 실천신학과 기독교 교육의 분야에서 나름대로 적용하여 한국교회의 보수주의 실천신학의 토대를 이룩하였는데 그의 신학적 업적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① 신학지남을 통해 체계적인 헌법 해설과 교회 정치 조례 등을 해명하여 한국 장로교 회의 구조와 체계를 형성하는데 기여하였다. 클라크는 한국교회의 빈약한 정치전통과 확 립되지 않은 교회제도 속에서 장로교의 전통과 관례에 맞는 교회 운영과 조직 관리 등 에 대한 지침과 방법들을 부단히 소개 정립했다.
② 목회 신학의 틀을 신학 지남을 통해 마련하였다 - 예배와 설교에 대한 그의 글을 당 시 말씀 선포와 예배의식에 미숙했던 한국교회의 외적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③ 기독교 교육의 신학적 이론과 교육 방법론 등의 글을 통해서 한국교회의 교육활동에 기초를 제공하였다.
대각성 운동 후 미국 선교사만 아니라 고난의 경험 속에 한국 땅에 백성들의 정서와 이상이 일치하는 성령부흥운동을 역사적 사건으로 이끈 이는 하디였다. 그는 협성 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여 학교의 기초를 닦고 발전시키는 일에 힘을 기울였으며, 1916년 ‘신학 세계’를 창간하여 서구 신학 소개로 신학 문제에 대한 토론의 장을 마련하는 등 문서 선교를 통한 한국 신학의 정립에 큰 업적을 남겼다. 그에 대한 업적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잇다.
① 그의 신학은 성서 주석학이 었다. 신약총론, 구약총론 등의 성서 개론서를 출판하였고 신구약성서 거의 모든 책의 주석적 논문들을 발표했으며 서구의 비평학과 고고학적 결과들을 소개하였다. 성서 권위를 인정하되 성서를 하나님의 듯과 사람의 사상이 포함된 히브리인의 역사와 종교 문학으로 이해한다.
② 그의 신학 형성에서 더욱 중요한 요소는 기도와 회개를 통한 체험적 신앙인 이었다.
③ 그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적 소명에 따르는 전도적 열정에서 형성된 신학이다.
4. 초기 한국교회와 미국 장로교 선교사들의 신앙
1884년 Allen 선교사의 입구 이후로 구한 말기의 개화파 인사들 가운데 기독교 선교를 환영한 사람들의 사상은 결국 유교적 봉건주의 사회와 일본을 비롯한 외세로부터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해방될 것을 바라면서 기독교의 진리와 사회적 이념들의 실현되는 민족사회의 형성을 목적으로 삼았다. 그들의 개화사상은 정치 신학이었고 해방 신학이었다. 곧 그것은 성서의 진리가 한국 민족의 정치 문화 도덕 등 전반에 걸쳐 성육하게 하려는 신학이며 구악의 노예 상태에서 개인적 사회적 해방을 위한 것이었다.
미국에서 들어온 초기 개신교의 선교사들은 거의가 20대의 소명감에 불탔던 신학교를 갓 졸업한 사람들이었다. 언더우드(26세) 아펜젤러(27) 알렌(27) 스크랜톤(29) 등이 젊은 나이에 충분한 신학적 훈련과 신학의 체계적 조직이나 전개의 시간적 여유도 없이 낯선 이방 땅의 선교 현장에 나섰다. 따라서 이들이 먹여주는 대로의 복음을 우리의 이해로 삼으면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런 복음 이해가 한국교회의 신앙과 신학전통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즉 이런 신앙과 신학 전통이 기득권을 주장하게 되었고 또한 이런 노선이 다수를 획득하게 되면서 교권을 형성하게 되고 또 이것들이 교권의 지도 노선을 형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타문화권, 타국에서 교단끼리 연합 할 수밖에 없었으나 30년 이라는 시간과 세월이 흐른 후 조직과 교권이 확립됨에 따라 그들이 세운 그리스도의 왕국이 분열 위기에 몰리자 개방성이 폐쇄성으로 포용성이 보수성으로 변질되었다.
이들 선교사들의 신앙의 양태는 청교도신앙, 경건주의 신앙, 복음주의 신앙 등으로 특징지워진다.
우선, 장로교 계통 선교사들의 신학 배경이기도 한 청교도 신앙은 신학이나 성서 비평신학에 대해서는 완고한 보수적 입장을 취했으며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서는 전천년설을 고수했다. 이들은 고등비평학이나 자유주의 신학을 위험한 이단으로 보았다. 16세기 칼빈주의 원리를 고수하려는 보수 우파 장로교 신학의 보루였던 프린스턴 신학과 매코믹 신학 출신 선교사가 주도권을 행사한 한국 장로교 신학은 결과적으로 교파 교리 중심의 신학 구조를 갖게 되었다. 천로역정으로 대변되는 청교도 신앙은 개인의 신앙과 생활개혁에는 놀라운 힘을 발휘하였지만 염세적 내세적 신앙으로 현실 도피적 신앙 양태를 가지고 있었고, 그 결과 사회 개혁적 기능을 약하여 교회가 사회적인 면보다 개인주의적인 면이 강하였다.
그리고 경건주의 신앙은 감리교 선교사들 뿐만 아니라 장로교 선교사들에게도 발견되는 현상이었다. 초기 한국 개신교 선교사들은 교파를 초월하여 경건주의 색체가 강했다. 18세기 뉴잉글랜드 신학이 감리교 운동과 연결된 종교 각성 운동이란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었던 것처럼 한국의 초기 부흥운동도 종교 각성운동의 성격이 강했다. 1903년 원산 부흥운동은 하디선교사의 개인적 회개와 중생의 체험에서 시작되어 집단적인 회개운동으로 발전된 것이다.
기도모임, 성경공부를 위한 사경회는 부흥운동을 촉발시킨 요인이었고 이후 한국 교회의 경건주의 성격 형성의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경건주의 신앙은 내적 신앙 체험과 윤리적 갱신에는 기여했으나 점차 감정적이고 주관적 체험 중심의 반이성적 경험주의로 흘러 신학의 자리를 좁혔다.
또한 복음주의 신앙은 성경의 절대권위, 그리스도의 구속과 칭의론, 재림과 심판, 삼위일체 등 보편적 프로테스탄트 신앙 원리를 그 근간으로 한다. 그러나 1920년부터 복음주의에 대한 보편적 이해가 교파와 교회에 따라 달라지기 시작했는데, 보수적 장로교회에서는 근본주의적 신학 원리로 점점 폐쇄적이고 방어적인 개념으로 이해한 반면, 감리교회에서는 사회 복음주의까지 수용하는 적극적인 개념으로 해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개신 교회들이 공유하였던 복음주의 개념은 보수 방어적 장로교회의 전유물이 되었다.
이같은 선교사들의 성경과 그리스도 중심의 복음 이해가 한국 기독교를 성경적 기독교, 그리스도 중심의 기독교 전통 위에 서게 만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성경과 그리스도를 강조하다 보니 자연계시의 가능성 및 타종교와의 대화마저 단절되는 폐쇄적인 신학풍토가 조성된 면이 있다. 혹자는 그 결과인해 한국 교회와 신학은 그리스도 중심에서 신 중심으로 폭을 넓혀 가는 세계신학의 흐름에 뒤질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IV. 미국 장로교 선교사들과 초기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적 연속성과 불연속성 문제
1. 부흥 운동에 있어서의 연속성과 불연속성 문제
1907년 평양 장대현 교회의 부흥은 한국 교회에 큰 영향을 미친 운동으로 첫날 사경회에 남자만도 1,500명의 이상의 사람이 모였다. 한국의 오순절로 불려 질 만큼 대단한 역사를 가져온 이 부흥은 사경회를 인도하던 사람들이 부흥을 위하여 달리 한 일은 없었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학생들의 감정을 돋구려고 하지 않았고, 다만 예수의 십자가를 얘기했을 뿐이었다.
전국을 휩쓸어 새로 자라나기 시작한 한국교회에 영적 생활의 기틀을 잡게 한 이 운동을 통하여 한국 교회는 나름대로 특성을 지니게 되었다. 이 부흥 이후, 한국 교회는 일본의 식민지 통치 하의 어려운 시련을 겪게 되었고, 신사참배의 어려움을 인내와 영적 힘으로 극복했다.
아울러 부흥운동 이후, 선교사들과 한국인 신자들은 피차를 더 잘 이해하고 더 깊은 교제를 나누게 되었고, 부흥운동으로 말미암아 한국 신자들의 도덕적, 영적 생활이 더 높은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의 부흥 운동을 한국의 특성으로 만 이해하게 될 때, 부흥운동에 있어서 신학적인 연속성은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비록 한국적 상황에서의 특이한 상황이 있을 지언정 분명한 것은 이러한 부흥운동이 성령께서 주권으로 일하시는 불가항력의 영적인 운동이라는 사실과, 17세기 말엽 독일에서 경건주의 운동이 일어나면서부터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영국 웨슬리의 부흥 운동, 미국의 조나단 에드워즈의 부흥 운동과 2차, 3차에 걸쳐 일어난 부흥 운동과 유럽의 개신교 나라들과 세계의 여러 선교지에서 줄곧 일어났던 부흥 운동의 하나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이 운동은 비단 한국에서만 일어난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유럽과 세계 여러 선교지에서 일어난 연속적 의미를 가진다.
즉 유럽과 미국에서의 부흥 운동이 기독교인들을 영적으로 각성케 했을 뿐 아니라 사회봉사운동을 유발했으나, 한국에서는 기독교인들의 신앙심을 깊게 하고 도덕성을 고양하는 데 그침으로써 부흥운동은 신학적 불연속성을 가진 것이 아니라, 그것은 양 교회가 처한 역사적, 사회적 배경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선교가 시작된 지 오래되지 않았으며 복음을 받은 신자가 소수인 반면에, 유럽 사회는 주민의 대다수가 교회에 적을 두고 있는 사회일 뿐 아니라 오랜 기독교 역사와 구제, 봉사의 전통이 있으며, 사회운동을 말하는 인문주의 사상이 주창되고 있던 사회임을 고려해야한다.
2. 선교정책에서의 연속성과 불연속성 문제
미국에서는, 각성운동으로 말미암아 급격히 늘어나는 교인들을 양육하기 위하여, 감리교와 침례교는 지도할 만한 이들을 먼저 안수하여 교회를 돌보도록 하고 목회하면서 추후에 신학 교육을 받도록 조처했으나, 장로교회는 그러한 상황을 돌아보지 않고 목회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소정의 신학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장로교와 감리교의 신학 교육 방침은 각성 운동 당시 미국의 경우와는 정반대였다. 장로교는 부흥운동의 결과 늘어난 교인들을 양육하기 위하여 목사를 양산한 반면, 오히려 감리교에서는 목회자의 자질을 높인다는 동기로 목사 후보생들을 엄선하는 바람에 장로교에 비하여 훨씬 적은 수의 목사를 배출한 것은 선교지인 미국과 피선교지인 한국에서의 선교정책이 불연속성을 가진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선교정책에 있어서의 선교지와 피선교지간의 연속성 및 불연속성 문제는 초기 한국 교회의 선교에 있어서도 발견된다. 1918년, 한국 장로교 총회에서는 간도 선교를 두고 감리교회와의 갈등이나 필요없는 경쟁을 피하기 위하여 선교 구역 조정을 위한 협의를 제안했으며, 1920년에는 전도지 분계위원회를 두어 선교 구역을 조정하기로 하였다. 즉, 러시아 영토에서는 소왕령(蘇王嶺)에서 동청철도(東靑鐵道)와 이북의 지역은 감리교회의 전도국으로 정하고, 소왕령에서 수청(水淸), 해삼위(海三威), 추풍(秋風), 연추(延秋) 등지는 장로회의 전도구역으로 정하였으며, 소왕령은 양교회의 공동 전도지로 정하였다.
그리고 중국 영토에서는 하르빈 시(唅市) 전부와 동청철도 이북은 감리회의 전도 구역으로 정하고, 북간도, 서간도, 목능현(穆凌縣), 소왕령 하르빈 시 연선에 있는 교회들과 동청철도 이남은 장로교의 전도 구역으로 정하였다. 서양 선교사들이 우리 나라에서 시행했던 선교지 분담 정책(comity)을 피선교 교회가 자립하여 선교하는 교회가 되면서 그대로 시행한 사실은 선교정책의 연속성이란 의미에서 매우 흥미 있는 일이다. 이 일은 난립하는 오늘의 교회적인 상황에 사는 그리스도인들과 지도자들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3. 초기 한국 교회의 성경관에서의 신학적 연속성과 불연속성
초기 한국 교회의 미국 장로교 선교사들의 이러한 보수적인 신학은 한국 목사들을 통하여 좀 더 극단적인 근본주의적 신앙으로, 성경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려는 데서 오는 율법주의와 독선적인 분리주의로 발전하게 되었다. 또한 많은 장로교의 목사들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믿고 해석하는 경향 때문에 전통적인 개혁주의 신앙과는 분명히 색채가 다르지만,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철저하게 믿는다는 공통점이 있는 세대주의를 거부하지 않고 친근하게 영입하였다.
게다가 성경을 자기 멋대로 해석하는 이단적인 운동도 위험한 고질병으로 등장하였다. 이러한 성경관에 대한 신학적 불연속성은 한국 목사들이 철저한 칼빈주의자로 교육을 받지 못한 데서 연유한 것인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었다고 보여진다.
① 많은 한국 목사들이 일반 학교 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했기 때문에 칼빈주의를 하나의 세계관을 가진 사상 체계로 이해할 만한 소양을 갖추지 못했다.
② 장로교가 평양에 신학교를 세워 정규 신학 교육을 시작한 것은 1902년부터였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교회의 전도사로 시무하였고, 신학 과정은 1년에 3개월씩 5년동안 공부를 하고 졸업하였다. 이러한 조건하에서 학적으로 바람직한 신학 교육을 실시한다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③ 또한 교회가 일제의 탄압을 받았기 때문에, 선교사들은 일본 총독부와의 마찰을 피하려고 했으므로 정치, 사회, 문화, 전통에 관심을 가지게 하고, 또 신학적인 안목을 가지도록 교육하는 일은 기대할 수 없었다.
4. 정교분리에 대한 신학적 연속성과 불연속성
1919년 3.1 독립 운동이 일어났을 때 온 기독교인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할 정도로 기독교인들은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평양신학교도 그 때문에 가을까지 휴교를 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지남」에는 이러한 일에 대하여 일언의 간접적인 시사(示唆)마저도 없다.
곽안련(charles. A. Clark)은 일찍이 정치에 대한 선교사들의 태도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교회가 정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우리는 믿는다. 교회는 영적인 기관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정치에 아무런 관심이 없어서 현재의 정부나 그 어떤 다른 정부에 대해서도 찬성하거나 반대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의견은 치외법권을 향유하는 선교사의 입지에서는 옳게 말한 것이다. 그들은 외국인으로서 정치적 중림을 지키고 정치에는 개입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가 바로 선교지 본국인의 견해가 될 수는 없다. 본국인들은 국민으로서 생활이 정치와 나라의 운명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그 후에라도 신학적 반성을 했어야 하는데, 일제 정부의 엄격한 검열이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신학지남」은 내내 침묵을 지켰다. 이것은 선교사들과 피선교지의 본국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신학적인 불연속(不連續, discontinuity) 혹은 문화와 역사적인 배경의 차이에서 유발되는 신학적인 여과(濾過, distillation)의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5. 종말론에 대한 신학적 연속성과 불연속성
지금가지 보는 것처럼 선교사들의 신학은 어떤 의미에서든 우리의 역사와 문화의 배경이 서양과는 다름으로 인해 한국 교인들의 신앙에 그대로 순수하게 반영되지는 않았다. 한국 기독교인들은 불운한 정치, 사회환경 때문에 강한 종말론적인 기대 속에서 살았다. 한국 교회의 종말론적 신앙은 전천년설(premillennialism)을 믿는 신앙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또한 상당한 세대주의(世代主義, dispensationalism)로 채색된 것이다.
한국 교회의 전천년설의 천년왕국 신앙은 이러하다. “그리스도께서 먼저 공중에 나타나셔서 부활한 성도들과 7년 공중 잔치가 벌어진다. 그 사이에 땅위는 아마겟돈 전쟁이 일어나 믿지 않는 세계인구의 3분의 1이 죽임을 당한다.” 무천년설을 지지하는 사람의 입지에서 보면 세대주의의 천년왕국 신앙이나 전천년설을 지지하는 천년왕국 신앙에는 별로 큰 차이가 없다.
그런데 한국 교회에서는 개혁주의 교회에서 더 널리 보편화 되고 있으며, 역사적으로 중요한 여러 개혁파 교회의 신앙고백에서 지지를 받는 무천년설(A-millennialism)을 무시한다. 431년 에베소 회의에서 교회는 어거스틴의 영향으로 전쳔년 신앙을 미신(迷信)으로 단정했으며, 루터와 칼빈을 위시한 종교 개혁자들은 이를 철저히 배격하였다.
그러나 성경을 문자적(文字的)으로 믿으며 무디의 부흥 운동을 통하여 은혜를 받은 선교사들에게 배운 한국 교인들은 이 천년왕국에 대한 믿음이 더 성경적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더 현세적(現世的)인 천년왕국에 대한 믿음이 희망을 주었기 때문에, 이러한 믿음을 통하여 일본 식민 정부의 압제의 고난을 참고 견딜 수 있는 위로와 용기를 받았다.
V. 결 론
선교지와 피선교지간에 있어서의 신학적 연속성과 불연속성에 관한 본 연구의 고찰은 우리 한국 교회의 신학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해 준다. 우선 한국 교회는 이 시대적 상황속에 좀 더 뚜렷한 신학적 사상을 견지해야 한다. 아울러 신학교육은 목회자를 위한 자격적인 의미가 아니라 이 시대의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밝히 드러내어 전달하고자 하는 분명한 목표를 가져야 한다. 우리 한국교회에 전달되어 연속성을 가지고 적용되고 소화되어 온 신학적 사상을 우리 토양에 맞추어 토착화하고자 하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 한국 교회가 전세계에 파송하고 있는 12,000여명의 선교사들의 신학적 사상은 무엇보다 중요하며, 그 신학적 사상이 피선교지의 상황에 적합하게 적용되어 전달되어 질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문화와 역사적인 배경의 차이에서 유발되는 신학적인 여과(濾過, distillation)인 신학적 불연속성을 기도와 말씀의 지혜로 최소화해 나갈 수 있는 신학적 역량을 배양하는 것이 신학적 사상이 전달되는 선교 현장에 무엇보다 더욱 절실한 필요가 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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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한국개신교회사, 1995.
송길섭. 한국신학 사상사,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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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열, 한국 기독교 수용사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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