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아시아 선교전략
강요한 선교사
불과 약 100년 전까지 한국은 세계 선교계에서 침투 불가능(Impossible to penetrate)국가로 분류되었던 전력을 가지고 있다. 파란 눈을 가진 하나님의 사자들이 들어올 때 두려움 없이 그들을 죽이던 죄 많은 이 민족을 하나님께서는 전폭적인 사랑과 능력으로 완전히 변화시키셨다. 또한 지난날 침투 불가능한 종족 중 하나로 분류되던 한민족을 향해 아시아 대륙에 흩어져 있는 미전도 종족들을 보여주시며 “가라”고 말씀하셨다.
복음을 향해 지독하게 저항하던 한 민족을 이토록 변화시킨 기적을 체험한 우리로서는 미전도종족선교에 대한 더욱 구체적인 실천과 열매를 보여줄 책임이 있다. 우리는 아시아의 미전도종족들과 같은 아시아인으로서의 문화적인 유사성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금세기 동안에 환난과 핍박을 이겨낸 체험신앙의 장점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산 넘고, 물 건너, 대륙 간의 문화 장벽을 힘겹게 넘어오는 서구의 형제들과 엇비슷한 수준의 사역을 이루어낸다면 그것은 받은 은혜에 비할 때 부끄러운 결실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나님의 나라와 세계 교회를 위하여 아시아, 적어도 중앙아시아의 이슬람권에서 우리는 선봉에 설 책임이 있는 것이다. 현재 이슬람국가들이 복음을 향하여 저항한다고 하지만, 우리 한민족만큼 지독하게 저항하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이슬람권의 수많은 종족들이 미전도 종족으로 분류되고는 있지만, 그 어떤 민족도 “침투 불가능”이란 대단한 ‘별’을 달고 있지는 않다. 우리 민족을 돌아볼 때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에 대한 산 증거와 무한한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이슬람권을 향한 분명한 승리의 전략과 그것을 이룰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 한반도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기적이야말로 역사적 사실로서 우리에게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되고 있는 것이다.
1. 중앙아시아 이슬람권 사역에 대한 예언적인 소망
_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눅1:15>
역사 이래로 한 번도 복음의 빛을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 중앙아시아 이슬람권에서의 효과적인 전도 및 교회개척 사역을 위한 전략은 무엇인가? 성경으로 돌아와, 400년 동안 선지자가 없었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은 어떤 전략으로 접근하셨는가? 해답은 바로 ‘세례 요한’이었다. 그는 여자가 난 자 중 가장 큰 자였는데, 특별히 모태로부터 성령이 충만한 유례없는 능력의 소유자였다. 그는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을 소유한 자였다. 왜 그런 특별한 능력과 성령의 충만함이 필요했을까? 이사야도 예레미야도, 심지어는 엘리야도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지는 않았다. 선지자가 계속해서 이어졌던 구약 시대와는 달리, 400년 동안 선지자가 없었던 흑암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는 비상(非常)적인 능력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400년 동안 맘껏 이스라엘을 유린하던 사단과 그의 철옹성이 되어버린 이스라엘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구약의 선지자들이 갖지 못했던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가진 비상(非常) 선지자가 필요하였다.
하나님께서는 400년 동안 선지자 없이 흑암 속에 갇혀 있던 이스라엘을 깨우셨던 것처럼 역사 이래로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영적 블랙홀 중앙아시아를 깨우실 것이다.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비상(非常)적인 선지자들을 그 땅 가운데 일으키고 계신다. 그들은 강한 말씀의 능력을 소유하고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는 자들로, 약대 털옷, 가죽띠, 메뚜기와 석청으로 훈련되고 있다. 때가 되면 그들은 순식간에 사람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며, 거슬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할 것이다. 중앙아시아의 가난은 이런 외치는 자들에게 오히려 자연스런 광야이다. 이 비상(非常)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잠자던 자들이 깨어날 것이며, 포로 된 자들이 자유를, 눈 먼 자들이 다시 보게 될 것이며, 눌린 자들이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 이는 마치 거센 바람처럼 단시간 내에 일어나 대대적인 변화를 불러올 것이다. 많은 수의 선지자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강한 능력으로 준비된 선지자 한 명이 시급하다. 지금 이들에게는 말씀의 능력이 부어지고 있다. 아직 요단 강가에서 수많은 무리 앞에 나서기에는 시기상조이나 감당할 만한 능력과 규모를 갖추어 가고 있다.
2. 중앙아시아 이슬람권 선교 전략
(1) 열린 교회를 공략하라.
우리는 A공원을 A교회라 부른다. B공원은 B교회이다. 우리는 다른 도시에도 그런 교회들을 갖고 있다. 이러한 호칭의 변화는 우리 사역과 양육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매주 정기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와 구원을 받는다면 그곳은 교회로 불릴 수 있다고 믿는다. 한 장소로 죄인들을 부르는 구심적인 형태는 이슬람권 같은 지역에서 우리를 소극적으로 만들어 버린다. 죄인이 있는 곳을 향해 나아가서 사역하는 원심적인 사역이야말로 예수님의 사역이요, 우리를 담대케 하고 살아있게 하는 사역이다.
A공원은 전국의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현지어로 자유롭게 복음을 나눌 수 있는 사역자나 현지인이 사람들을 만나 자연스럽게 복음을 나누면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영접한다. 그리고 그들은 성경책을 받아 들고 예정된 버스와 기차를 타고 전국으로 흩어져 나간다. 이것은 한국에서만 가능한 상황이 아니라 중앙아시아 이슬람권에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많은 사역자들이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공원전도에 힘을 기울이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위험하다고 여기는 것과 눈에 보이는 교회개척의 결실로 우리의 손에 쥐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2년이 넘게 정기적으로 공원에서 현지 형제들과 전도하는 동안, 이런 형태의 개인적인 전도는 중앙아시아에서 아주 적합하고 안전하다는 것이 증명되고 있다. 또 가시적인 결실이 없다는 점에서도 비록 영접한 사람들 대부분과 다시 만날 수 없거나, 다음 약속에서 바람을 맞는 경우가 더 많지만 주님이 주시는 확신과 기쁨이 있기에 감당할 수 있다. 눈에 보이는 교회개척의 불가능을 문제 삼는 자들에게 과연 몇 명의 보이는 결실을 보아야 중앙아시아가 곧 회복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겠냐고 질문하면 아무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대동강변에서 순교당한 토마스 목사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들어 쓰셨는가? 몇 개월 동안 제너럴 셔먼 호를 타고 고생하며 왔건만 복음 한 마디 전하지 못한 채 그는 죽임 당했다. 그가 가져온 한국어 쪽복음은 창호지로 사용되었다. 그러다 한가한 시간에 창호지의 성경문구들을 읽게 된 것을 계기로 온 마을이 복음을 알게 되었다. 몇 년 후에 한 선교사가 이 마을에 들어와 복음을 나누었을 때, 그들은 익히 알던 것이라 순식간에 예수를 영접하게 되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다.
R시의 A형제는 잠시 T시를 방문하였다가 예수를 영접하고 3일 만에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다. 형제의 고향에는 교회 모임이나 사역자가 없는 도시였기에 오직 하나님께만 의탁하고 갓 영접한 갓난아기를 새로운 지역으로 파송하였다. 3년 반이 지난 지금 그는 10여명의 가정교회를 개척한 귀한 형제로 성장하였다. 항상 이렇지는 않지만 복음을 듣고 성경을 가지고 전국으로 흩어지는 형제들 중 이런 자들을 장차 볼 수 있을 거라는 강한 기대가 우리에게 있다.
공원에서 한 형제가 주님을 영접할 때 얻는 특별한 기쁨과 영적인 거룩한 구별을 경험한다면 이 일이 그저 무의미한 일이라고 여기지는 않게 될 것이다. 영혼을 건지는 기쁨은 이 세상의 어떤 것도 바꿀 수 없고 비할 수 없다. 하늘의 절대적인 보상이 이 사역을 지속시키며, 죄인을 우리들의 교회로 부르는 것에서 이제는 죄인들이 널려 있는 온 시내와 마을이 나의 섬기는 교회라는 적극적인 패러다임(paradigm)으로 바꾼다면 더욱 활기찬 사역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2)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파하라.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우리는 이슬람권에서 정말 피나는 고생을 하고 있다. 한 명의 제자를 얻기 위하여 우리는 어떤 전략으로 사역해야 하는가? 몇 명의 현지인을 찍어 놓고 날이면 날마다 그를 만나며 시간을 보내야 하는가? 아무런 결실 없이 지나가는 시간 속에서 제일 먼저 지치는 것은 우리들 자신이다. 때로는 진정으로 준비된 자를 만났을 때 우리 자신의 모습이 너무 연약하고 지쳐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찾는 ‘한 사람’의 의미가 예수 믿는 한 사람이 아니라 주의 능력에 사로잡힌 성숙된 사역자의 자질이 있는 자임을 고려할 때, 우리는 좀더 넓은 시야를 갖출 필요가 있다. 준비된 ‘한 사람’을 만나기 전에 이 문화권에서 나 자신이 먼저 성숙한 ‘한 사람’이 되도록 준비되어야만 한다. 사도와 같은 현지인 제자들은 사도와 같은 사역자를 통하여 탄생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살아있지 않고는 준비된 ‘한 사람’을 만날 수도 없고, 만난다 해도 그를 훈련시킬 수 없다. 우리의 사역대상은 넓을수록 좋다. 즉 우리의 입을 통하여 복음을 듣는 자의 숫자는 많을수록 좋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 전하기에 힘쓰는 것만이 이슬람권에서 늘 전도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다. 늘 복음 증거하는 삶에 깨어 있으면 좋은 마음 밭을 가진 사람을 만나게 되고 또한 그를 양육할 수 있는 능력도 부여 받게 된다.
예수님은 12제자를 양육하면서도 항상 대규모 전도 및 신유 집회를 멈추지 않으셨다. 비록 예수님이 직접 계획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대규모 집회와 소규모 모임이 늘 끊이지 않았다. 예수님의 사역 형태는 늘 움직이는 모바일(mobile)사역이었다. 예수님은 12제자를 데리고 다니시며 움직일 만한 구조를 유지하셨다. 예수님을 따르던 수백, 수천의 사람들이 떨어져 나가버려도 예수님은 안타까워하거나 그 숫자에 연연해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미션은 12제자의 준비와 함께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성령의 강한 바람을 일으키는 것이지, 그들을 규합하여 조직적인 단체나 세력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것은 예수님의 제자들, 곧 사도들의 몫이었다. 예수님은 자기의 미션을 정확히 아셨기에 따르는 수많은 무리들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소신 있게 새로운 지역을 향하여 계속 움직여 나가심으로써 그를 따르는 다수를 실망시키셨다.
세례 요한을 통하여 이스라엘은 깨어났고, 깨어난 그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과 나라를 보았으며, 그들은 사도들을 통하여 조직적인 공동체로 뭉치기 시작하였다. 세례 요한은 성령의 능력과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한 자였지만 예수님처럼 기적을 베풀지 않았고, 그것 때문에 갈등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을 깨워 주의 길을 평탄케 예비해야 하는 자신의 정체성과 미션에 대한 강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자들을 모아 조직적이고 대규모적인 공동체를 세우려고 애쓰지 않았다. 그의 미션은 하나님의 능력을 선포하며,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이스라엘에게 보이는 것이었고, 12제자들의 삶을 개혁하여 사도와 전도자의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었다. 또한 사도들의 사역의 범위를 전 세계로 확장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들을 계속 움직이게 하셨다. 조직적인 초대교회의 개척은 사도들만의 공로가 아니며, 이미 세례 요한의 사역과 예수님을 통해 강한 성령의 바람이 모든 이스라엘 가운데 불어 닥쳤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슬람권에서의 우리의 사역은 한 곳에 정착되어 있는 형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성경 속에 나타난 믿음의 선배들은 그 어느 누구도 미전도 지역 한 곳에서 평생 동안 사역하지 않았다. 그들은 주의 복음이 편만하게 전파될 때까지 힘에 지나도록 돌아다니며 온 땅을 밟고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였다. 만일 1세기에 비행기가 있었다면 사도들은 온 세계를 자기집 앞마당처럼 누볐을 것이다. 교통수단의 발달로 우리는 거주하는 도시나 일정 지역에서뿐 아니라 더욱 광범위한 지역에서의 사역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교통수단의 발달이 없던 1세기에도 우리 선배 사역자들은 비록 걸어 다니는 한이 있더라도 새로운 개척지를 찾아 떠났던 것이다. 우리의 사역 시간 중 일정 시간을 여행을 통한 모바일사역으로 따로 떼어놓아도 거주하고 있는 지역의 정착 사역에는 큰 지장을 주지 않을 수 있다. 아직도 사역자가 없는 마을과 역사 이래로 한 번도 복음을 듣지 못한 종족을 옆에 놓고 앞마당 사역에만 전념하는 것은 좋은 모델이 될 수 없다. 우리가 정착 사역과 함께 모바일사역을 동시에 해 나간다면 적은 수의 사역자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광범위한 지역을 공략할 수 있게 될 것이며. 순회전도자들이 온 땅을 밟으며 묵은 땅을 반복적으로 기경한다면 곧 온 땅이 옥토로 변하게 될 것이다.
|출처: 선교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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