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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지방교회의 경륜적 삼위일체와 상호내재

수호천사1 2009. 9. 6. 23:30

지방교회의 경륜적 삼위일체와 상호내재

 

 

내재적(본질적) 삼위일체와 경륜적(사역적) 삼위일체에 대해서 많은 오해가 있다. 특히 지방교회와 같은 경우는 자신들이 내재적삼위일체와 경륜적삼위일체를 주장하고 있다고 변명함으로서 자신들의 양태론을 숨기고 위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견해는 고의적인 조작성이라고 볼 수 밖에 없으며, 자신들의 주장을 모순과 오류로 만들고 있을 뿐이다. 지방교회는 그 용어가 초대교회의 교부들의 주장이었므로, 정통삼위일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재적(본질적)삼위일체와 경륜적(사역적)삼위일체가 무엇이며, 그러한 주장이 과연 정통삼위일체인가를 살펴보자.

1. 놓쳐서는 안되는 가장 중요한 문제점

첫 번째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를 별개의 관점으로 간주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어느 사람을 말할 때에 정면으로 볼 수도 있고, 측면으로 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당연하게도 그러한 관점이 서로 다른 사람을 말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어떠한 방향에서 보든지 그 사람은 동일적인 인물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은 중요하다. 측면으로 볼 때에 그 사람은 눈이 하나만 보인다. 그렇다고 하여 그를 눈이 하나라고 말하는 것은 오류이다. 그 사람은 측면으로 보거나 정면으로 보거나 그는 눈이 둘인 정상적인 사람이어야만 한다.

예를 들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성경이 말하고 있을 때에, 경륜적으로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내재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주장은 잘못된 주장인 것과 같다.

삼위일체를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로 구분하여, 그 두가지가 전혀 다른 관점인 것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는, 자기의 이단적 주장을 합리화시키려는 조작일 수 밖에 없다. 삼위일체란 인격이 구별되어지는 셋이고, 본질은 하나인 것이다. 그것은 내재적으로나 경륜적으로나, 인격은 셋이고 본질은 하나라는 사실이 동일하게 적용되어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정통삼위일체는 삼위가 인격적으로 구별되어져야만 하며 상호작용이 가능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성경적인 기록 자체이기 때문이다. 대외적이든, 대내적이든, 본질적이든, 경륜적이든 그것을 가리지 말고, 삼위는 인격적으로 구별되어지며 상호교류가 가능하지만, 그 세 위격의 본질은 오직 하나라는 사실을 말해야만 한다.

성자예수가 세례를 받으실 때에 성령은 비둘기처럼 머리 위로 임하셨으며, 하늘로서는 성부의 소리가 들려왔다. 이것은 우리가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기자의 사실적인 기록이다. 이것을 경륜적(사역적)인 기록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잘못된 것이다. 이 성경적인 기록은 본질적으로도 설명이 가능하여야만 한다. 성경의 기자는 4세기에 만들어진 이 경륜적 삼위일체라는 용어와 관점에 대해서 전혀 알 수가 없었으며, 오로지 경륜적인 관점에서 이 성경적인 기록을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어느 때라도 기독교의 성부하나님은 인격적으로 죽을 수가 없는 것이다. 만일 성부하나님이 돌아가신 적이 있거나 혹은 돌아가실 가능성이 있다면,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존재하시는 생명의 근본이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성부하나님이 아니라, 예수라는 인격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것에 동의하여야만 한다. 이것이 경륜적으로만 돌아가시고, 본질적으로는 돌아가시지 않았다고 설명할 수가 있는가?


그러한 설명은 궤변이며, 분명한 양태론적인 이단이다. 하나님은 그 아들을 보냈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인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게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화목제로 삼으시고 인류의 구원사역을 성취하셨다. 즉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분과 그 제물을 온전히 받으시는 분의 인격이 구별되어지지 않는 주장은 양태론적 이단이며, 소위 초대교회부터 있었던 성부고난설이며, 결코 그러한 주장은 성경적이 아니며 기독교의 것이 아니다.

2. 지방교회가 말하는 내재적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

지방교회는 내재적으로는 삼중적인 동시존재, 상호내재를 주장하며, 경륜적으로는 삼위가 세 단계와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이것은 너무 유치하고 조악한 주장이다. 양태론적인 주장을 어떻게 하면 남들에게 위장하고 감출 수 있을까하고 생각한 위트니스 리의 개인적인 방법이 지방교회를 더욱 망가뜨린 것이다. 게다가 그 용어를 교회사에서 빌려와 정통신학인 것으로 위장하려는 수법이 지방교회를 더욱 악화시켜 사이비집단으로 추락시키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야말로 양태론을 주장하면서도 그것을 발각날 것을 두려워하여 그것을 숨기기 위하여 거짓말을 하는 집단이 되어버린 것이다.

지방교회 위트니스 리의 주장대로, 하나님 자신이 육신을 입고 예수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여 살려주는 영이 되었다고 가정하여 보자. 그렇다면 예수와 성령은 하나님 자신이 거치는 단계와 과정이 되어진다. 즉 성부의 시대에 예수라는 신약시대의 과정은 아직 거치지 않은 장래의 과정이 되어지며, 성령이라는 과정은 오순절 이후에 하나님 자신이 거쳐야 할 미래적인 과정이 되어진다. 즉 세 과정과 세 단계라고 하는 삼위의 사역은 시간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것을 내재적으로 보면,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이 동시존재, 상호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지방교회가 말하는 내재적이라는 용어의 뜻은 실제적인 것이 아니라 추상적인 개념인가? 양태론적인 시각에서 볼 때에, 어떻게 시간적인 차이가 있는 삼위가 동시에 존재하며 상호내재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실제적으로 볼 때에, 지방교회가 말하는 삼위 - 하나님과 예수와 성령은 동시에 존재하는 인격인가, 아니면 서로 시간적 차이를 갖는 과정과 단계란 말인가? 예를 들어, 본인의 사역적 직분의 구별, 즉 교회의 권사와 회사의 사장과 집안의 가장이 상호교류할 수 있는가? 아니면 상호내재 혹은 동시존재할 수 있는가? 즉 "나"라고 하는 동일인격의 세 직분 혹은 세 사역이 나에게 동시존재, 상호내재 한다면, 그것이 과연 구별되는 세 인격이란 말인가?

더 쉽게 지방교회의 경륜적 삼위일체에 비슷하게 접근하는 실제적인 예를 들어보자. 만약 본인이 회사에 과장이었고 부장이 되었다고 하자. 그리고 지금 사장이 되었는데, 본인의 과장과 부장과 사장이라는 세 단계와 과정이 한 인격에 상호내재, 동시존재될 수 있는가? 본인이라는 동일인격의 과장과 부장과 사장이라는 과정과 단계가 서로 인격적인 상호교류를 할 수 있다는 이상한 개념이 바로 지방교회의 주장이다.....게다가 더욱 황당한 거짓말은 이러한 주장을 정통신학이라고 거짓말을 한다는 자체이다.

성경의 기자들이 본 기록은 과연 내재적인가? 경륜적인가? 도대체 어떤 기록은 내재적으로 구분하고, 어떤 기록은 경륜적이라고 구분하라는 이야기인가? 실제적으로 일어난 사건들에 대해서, 성경기자들은 어느 사건은 내재적으로 기록하였고, 어느 사건은 경륜적인 관점으로 기록하였단 말인가? 지방교회의 양태론적 견해에 대해서 불리하면 경륜적이고, 유리하면 내재적이라고 구분하는가?

과연 예수님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하셨을 때에, 경륜적(시역적)으로만 하늘로 기도하라고 하셨단 말인가? 과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절규하실 때에, 그 절규의 소리를 내재적(본질적)으로 자신안에 있는 자신에게 절규하셨는가? 과연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성부하나님께 피땀을 흘리시며 기도하셨을 때에, 그것이 위트니스 리의 주장과 같이 내재적과 경륜적 두가지 관점을 나누어 기도하셨단 말인가?

위트니스 리의 궤변을 직접 들어보자.

1 # 어찌 주님이 기도하시는 아들과 그 기도를 들으시는 아버지가 될 수 없겠는가? 기도하는 것을 듣고 계시는 아버지는 기도하는 아들이시며, 기도하는 아들은 또한 그 기도를 들으시는 아버지이다.(신약의 결론. 하나님 323쪽)

위트니스 리는 본질적인 관점에서 동시존재, 상호내재를 주장하므로, 예수님이 겟세마네동산에서 자신이 자신의 안에 있는 자신에게 기도하였다고 위트니스 리는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위트니스 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기도 한다

2 # 그러므로 요한복음17장에서 기도하고 계셨을 때, 그분은 땅에 계셨으며 동시에 하늘에 계셨다. 그 분은 땅에서 기도하고 계신 분이셨으며 동시에 하늘에서 기도를 들으셨던 분이시기도 했다.(하나님 323쪽)

왜 위트니스 리는 스스로 모순이 되는 주장을 하고 있을까? 동시존재하는 삼위가 어떻게 하늘과 땅에 분리되어질 수 있는가? 위트니스 리의 주장은 이 스스로 다른 주장을 경륜적삼위일체라는 변명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즉 그는 위장과 변명을 위한 논리로서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위트니스 리의 다음 주장을 들으면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된다.

# "경륜적"으로 말하자면 아들은 이 땅에 계셨고, 아버지는 하늘에 계셨다. 그러나 요한복음14장에서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본질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 본질적으로 말해서, 아들이 이 땅에 계셨을 때, 아버지는 그분 안에 계셨으며, 그 분은 아버지 안에 계셨다. 우리는 "본질적"이라는 단어를 그분의 본체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존재하심을 언급하는데, "경륜적"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언급하는데 사용한다. 그리스도의 사역과 관련하여 아버지는 하늘에 계셨고 아들은 땅 위에 계셨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즉 그 분의 실체 안에서 그리스도의 존재하심에 따르면, 아들은 항상 아버지 안에 계셨고 아버지는 아들 안에 계셨다. 이것은 상호내재의 문제이다. 이들은 아버지와 하나였을 뿐 아니라 아버지와 상호내재하였다. (위트니스 리, 그리스도. 33-34쪽)

(경륜적과 본질적인 설명)


# 본질적이라는 것은 생존과 존재를 위한 것이며, 경륜적이라는 것은 일과 기능을 위한 것이다. 우리가 본질적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그분의 존재를 가르키는 것으로, 그 분의 존재하심 안에 있는 거룩한 삼일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가 경륜적인 삼일성을 말할 때 이는 그분의 움직이심과 역사와 기능을 가르키는 것으로 그분의 경륜 안에 있는 거룩한 삼일성을 의미하는 것이다.(위트니스 리, 성령 69쪽)

그는 본질적으로는 삼중적인 동시존재(결과적으로 한 인격, 한 실체)를 주장하지만, 경륜적(사역적)으로만 셋으로 구별되어진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미 경륜적 삼위일체는 4세기 이후에 양태론적이란 이유로 신학적 중심에서 밀려나 잊혀진 주장이 되고 말았다. 이것을 빌려와서 정통신학인 것처럼 용어만 사용하는 지방교회는 자신들의 주장을 괴상망칙한 논리로 만들고 말았다. 더욱시 상호내재라는 용어를 또 빌려와 자신들의 주장을 정통신학인 것으로 위장하려는 시도는 지방교회의 주장을 말조차 되지 않는 해괴망칙한 모순과 오류로 만들고 있다.


다음 위트니스 리의 글을 살펴보자...

# 그러므로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은혜와 성령의 교통은 세 개의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소유하고 누리기 위한 <한가지의 세 단계>이다. 마찬가지로 아버지, 아들, 성령은 세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 소유하고 누리기 위한 <한 하나님의 세 방면>이다. 예를 들어 얼음은 물이 되고 물은 수증기가 된다. 즉 <한 실체가 세가지 형태>를 띠고 있다. 그 실체가 수증기의 상태에 이를 때에 우리가 호흡하는 데 유용하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 소유하신 모든 것은 성령이 받으며, 성령은 우리가 누릴 수 있도록 그분을 우리 안으로 가져다 준다. 하나님은 그분의 삼일성 안에서 설명하고 묘사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많은 예들이 있다.(위트니스 리의 하나님 297쪽)

# 하나님으로서 그분은 처녀의 태 속에 들어가서 그 속에서 아홉달 동안을 머무셨다. 이렇게 해서 그분은 인성을 그분의 피난처와 거처로 취하셨다. 분명히 그분의 성육신은 <그분의 과정>이었다. 두번째로 그분은 삼십삼년 반이라는 인생의 긴 터널을 통과하면서 이 땅에서 생활하셨다. 이것 또한 하나의 과정이었다. 세 번째로 그분은 죽음 안에 들어가서 무덤과 음부를 포함한 죽음을 통과하셨다. 네 번째로 그분은 삼일후에 사망과 음부를 걸어 나오셔서 부활 안으로 들어가셨다. 그 분의 죽음과 부활 또한 <하나의 과정>이었다.(세부분인 사람의 생명되시는 삼일하나님 52-53쪽)

# 이 놀라우신 하나님은 그분의 분배를 성취하기 위해 <친히 두 단계>를 취하셨다. 성육신에 의해 그 분은 구속하는 어린양으로서의 사람, 마지막 아담이 되셨다. 그런 다음에 그분은 또 하나의 단계 인 부활을 취하셨다. 부활 안에서 그분은 더 전진된 어떤 것이 되셨다. 그분은 <생명주는 영>이 되셨다.(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는 두가지 큰 비밀. 19-20쪽)

위트니스 리는 분명하게 하나님 자신이 육신을 입고 예수로 오시고, 직접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여 살려주는 영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소위 계승설이라고 하는 양태론이다. 즉 이들이 말하는 삼위는 동일인격이 시간적인 차이를 두고 거치는 세 과정과 세 단계인 것이다.

지방교회는 이 삼위가 본질적으로는 셋이 함께 동시존재, 상호내재한다고 주장하며, 경륜적으로는 셋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이 양태론이 전통적인 정통삼위일체라고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시간적인 사역적인 차이를 둔 삼위가 동시존재, 상호내재할 수 있는가? 어떻게 본질적으로 보는 삼위일체가 경륜적으로 보는 삼위일체와 전혀 다를 수가 있는가?

지방교회의 이단성에서 더욱 위험한 점은, 그들이 자신들의 이상한 주장을 합리화시키기 위하여, 이제는 거짓 조작과 위장까지도 거리낌없이 하는 사이비집단으로 타락하고 있는 것에 있다.

그렇다면 위트니스 리가 스스로 판단하는 양태론(양식론)의 정의란 무엇일까?

# 삼위 양식론의 오류는 무엇인가? 삼위 양식론은 아버지와 아들과 영께서 모두 영원하지는 않고 또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오히려 삼위양식론은 아버지께서 아들의 오심으로 끝났고 아들은 그 영의 오심으로 끝났다고 주장한다.(위트니스 리, 하나님 37-38쪽)

하나님은 이미 예수로 변화하였고, 예수는 이미 살려주는 영으로 변화하였다는 것이 지방교회의 양태론이다. 지방교회의 삼위는 한 인격이 거치는 세 단계이며 세 과정이다. 위트니스 리는 <하나님 - 예수 - 영>으로 승계되었다는, 하나님 자신이 거치는 두 단계, 두 과정을 분명히 주장하고 있다. 전형적인 양태론이다. 그런데 위트니스 리는 자신이 상호내재, 동시존재를 주장하기 때문에 양태론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상호내재를 주장하기 때문에 위트니스 리는 자신이 양태론이 아니라고 변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의 위트니스 리의 주장을 들어보자

# 전통적인 가르침의 영향 때문에 우리는 온전한 하나님이 아닌, 아들 하나님만 성육신이 되셨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사실상 신약은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되셨다고 말하지 않는다. 신약은 하나님이 육신 안에 나타나셨다고 말한다. 이것은 온전한 하나님이 성육신 되셨음을 의미하는 것이다.(신약의 결론, 그리스도 78쪽)

위트니스 리는 아들 예수님이 성육신이 되셨다는 것이 전통적인 가르침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추종자인 지방교회는 자신들이 전통적인 가르침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방교회와 위트니스 리, 둘 중에 하나는 분명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 하나님이 한분이라는 것은 분명하고도 명확한 성경의 계시이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성경에 언급된 명확한 계시에 근거한 정통적인 가르침이나 해석에서 벗어나 그중 몇몇 사람들은 아버지도 한 하나님이요, 아들도 한 하나님이요, 성령도 한 하나님으로서 세 하나님이 단체적인 한 하나님이 된다고 말한다(하나님 282쪽)

전통적인 기독교는 아버지도 하나님이고, 아들도 하나님이며, 성령도 한 하나님이라고 한다는 것을 위트니스 리는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방교회는 자신들이 전통적인 기독교라고 주장하고 있다.

# 삼일성에 대한 "전통적인 설명"은 전체적으로 충분치 않으며 "삼신론"에 가깝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와 합할 때, 하나님은 뒤에 남아 계시지 않으며, 그리스도가 보좌에 남아계시지도 않는다. 이것은 기독교가 주는 인상이다. <그들은 아버지를 한 인격으로 생각하여 또 다른 인격이신 아들을 보내사 구속을 성취하게 하시고 그후 아들은 또 다른 인격이신 그 영을 보낸 것으로 생각>한다. 전통적인 생각으로는 그 영이 믿는 이들 안으로 오실 때, 아버지와 아들은 보좌에 남아 계신다. 믿는 이들이 기도할 때, 그들은 아버지 앞에 엎드려 아들의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가르침을 받는다. 신격을 세 분리된 인격들로 나누는 것은 성경의 계시가 아니라, 니케야 신조의 교리이다.(439쪽)

삼위일체에 대한 전통적인 설명을 "충분치 않으며 삼신론에 가깝다"고 주장하는 위트니스 리는,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양태론을 임의대로 정의하면서 자신이 양태론이 아니라고 주장하다가, 급기야는 전통적인 삼위일체의 초석이 되는 니케야신조를 삼신론에 가깝다고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위트니스 리는 성부하나님이 다른 인격이신 성자 예수를 보낸 것을 부정하고 있으며, 예수님이 다른 인격이신 성령을 보낸 것을 부정하고 있다.

위트니스 리의 글 하나만 더 보자...

# 어떤 사람들은 나에게 아들이 아버지이고 주님이 그 영이라고 말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그들이 충고할수록 나에게는 성경이 말하는 것을 말할 힘이 더 생긴다. 나는 성경에 따라 아들이시고, 사람이 되셨고,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우리 그리스도가 오늘 아들일 뿐 아니라, 아버지와 그 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성령48쪽)

더 이상 위트니스 리가 양태론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미 확인하였다시피 "아버지가 아들이고 아들이 그 영"이라는 주장이 곧 양태론이다. 아들이 아버지이고 주님이 그 영이라고 인격을 구별하지 않는 것이 양태론인데, 다른 사람들이 그런 주장을 하지 말라고 함에도 불구하고 위트니스 리는 그렇게(양태론을) 말하겠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정리하여 보자.... 위트니스 리는 분명한 양태론이다. 단지 자신은 본질적인 관점에서 상호내재를 주장하기 때문에 양태론이 아니라고 이상한 궤변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누가 그러한 이상한 변명을 인정하여 줄 수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추종자인 지방교회는 자신이 전통적인 삼위일체라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 게다가 정통교회측의 토론 상대방을 삼신론자라고 모한하고 있다. 과연 누가 정통삼위일체를 정의하고, 누가 양태론과 삼신론을 정의하는가?

3. 양태론과 성경의 모순점

다음은 양태론이 모순이라는 성경적인 증거이다. 아래는 본인의 개인적 견해가 아니라, 성경적인 기록이라는 것을 명심하여야만 한다. 양태론적인 시각으로 아래 성경구절에 대해 증거하지 못한다면, 양태론은 비성경적이라는 증거가 되어진다.

1) 예수님과 하나님이 동시존재, 상호내재한다면 예수님이 하나님아버지에게 기도한 것은 자기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에게 기도한 것인가? 아니면 인격적으로 구별되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기도한 것인가

2) 예수님과 하나님이 동시존재, 상호내재한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자신에게 바쳐진 제사였는가? 아니면 인격적으로 구별되는 아버지께 바쳐진 제사였는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은 하나님께 드려진 제사였다는 것이 성경적인 기록이다.... 구약의 모든 제사는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이다. 자신이 자신 안에 계신 아버지께 제사로 바쳐지기 위해 예수님 자신을 자신에게 바치는 것이 되어진다면, 제물로 바쳐지는 분과 제사를 받으시는 분이 인격적으로 구분되어야만 한다. 신약에서 가장 중요한 예수 십자가의 대속의 개념이다......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바쳤으며 누가 그 희생제물을 기쁘게 받았는가?

3)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에게 부탁하나이다"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기 전에 하신 이 말씀은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아버지에게 자기 영혼을 부탁한다는 것인가?

4) 다윗이 기록한 시편110:1의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되...."라는 구절은 신약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님을 구별하는 의미로 재조명 되어진다(마22:43). 다윗이 하나님 안에 있는 예수를 본 것인가? 하나님과 구별된 인격으로서의 예수를 본 것인가?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시110:1)

이 시편의 기록은 신약의 여러 곳에서 예수님이 직접 인용하셨으며, 다윗이 하나님과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구별하였다고 말씀하셨다. 신약에서 마22:43을 보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예수님과 하나님을 구별한 다윗은 삼신론자인가?

5) 보혜사이신 예수께서 "다른" 보혜사를 보내준다는 성경말씀에 대해서, 위트니스 리는 성경을 왜 다르게 해석하는 것인가? 예수님은 성령을 왜 "다른" 보혜사라고 말씀하셨으며, 3인칭대명사 "그"라고 하셨는가?

6) 사람과 한 분 하나님 사이의 또 다른 한분이신 중보자 예수가 있다는 성경말씀(딤전2:5)은 하나님과 예수님이 동일한 인격이라는 것을 말하는가? 아니면 하나님 아버지와 구별되는 인격으로서의 예수님이 중보자로서 한 분이라는 것을 가르키는가?

7) <성자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에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였으며, <성부 하나님>은 하늘에서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세 인격이 모두 구별되지 않는 동일한 상호존재하는 인격인가? 요한12:28의 예수님의 지상간구와 하나님의 하늘로부터의 소리는 무엇인가? 또 변화산에서 하늘로부터 들려오던 하나님의 소리는 무엇인가? 복음서의 기자들은 삼신론자인가?

8)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은 "예수님"을 보았다. 스데반은 삼신론자였는가?

9) 예수님은 자신이 곧 하나님이라면, 주기도문에서 왜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하셨는가?

10) 사도행전 10:37-38 성경본문...

"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되어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며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10:37-38)

"하나님"이 "예수"에게 "성령"을 부어주셨다..... 하나님과 예수와 성령이 동일한 한 실체라면 성경본문은 무엇인가? 즉 하나님께서 자신의 안에 있는 예수에게, 자신의 안에 있는 성령을 부어주셨는가? 아니면, 부어주시는 하나님에게도 삼위가 상호내재되어있고, 부음을 받으시는 예수에게도 삼위가 상호내재되어있으며, 붓는 성령도 삼위가 내재되어있단 말인가? 혹은 자신이 자기에게 자신을 부어주셨는가? 누가는 삼신론자였는가? 아니면 구위삼체론자였는가?

11) 하나님의 편재를 설명하는 아래의 성경구절은 모두 틀렸는가? 아니면 하나님이 오직 성도의 몸 안에만 장소적으로 동시존재, 상호내재한다는 위트니스 리의 주장이 옳은가?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시139:8-10)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행17:24-25)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20)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가까운데 하나님이요 먼데 하나님은 아니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기를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렘23:23-24)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잠15: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히4;13)

4. 정통교회사적인 경륜적삼위일체의 개념

그렇다면 정통 교회사가 말하는 경륜적삼위일체에 대해서 살펴보자. 교회사적으로 경륜적삼위일체라는 용어는 곧 양태론을 의미하였다.

# 그러므로 현대 학자들은 사벨리우스주의를 '양태론적 단일신론'이라고 부른다. 혹은 문제의 기능들이 하나님의 본질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자신의 외부관계를 '운영하시는' 방식을 가르키므로, '경륜적삼위일체'이라고 부른다.(문자적으로 '가정관리를 뜻하는 그리스어 오이코노미아에서 나온 말)"(윌리스턴 워커의 기독교회사, 101-102쪽)

게다가 지방교회가 정통신학이라고 주장하는 경륜적 삼위일체는 4세기 이후에 한번도 정통신학인 적이 없었다.

# 그러나 이 견해는(필자주: 경륜적삼위일체는) 전체 교회의 지지를 획득하는 데 실패했다. 신학세계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나, 동방의 3대 신학자와 아우구스티누스 후부터 경세론적 삼위일체론을 공적으로 지지하는 신학자는 없었다......이러한 이유에서 경세적 삼위일체론은 제4세기 이후부터는 신학영위의 중심부에서 밀려나고 말았다.(이종성의 삼위일체론, 257쪽)

지방교회는 초대교회 교부들도 본질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로 구분하여 주장하였기 때문에, 지방교회가 말하는 경륜적삼위일체는 정통삼위일체이다라고 말한다. 즉 초대교회 교부들이 사용했던 용어이므로, 무조건 정통삼위일체라는 주장이다. 지방교회와 같은 주장이 곧 양태론이라는 것을 우리는 다음 문헌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 3세기 초에 터툴리안은 인격들(persons), 얼굴들(faces), 가면들(masks)과 같은 단어의 의미를 빌어서 세 위격, 한 본질(Three persons, One essence)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 후 같은 세기의 사벨리우스는 터툴리언의 개념으로부터 약간 애매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양태론(이는 문자적으로 아버지께서 고난을 받으셨다는 성부고난설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또는 신고난설, 즉 하나님께서 고난을 받으셨다는 뜻)과 같은 개념으로 삼위일체론을 변형시켰다. 그는 세 개의 구별된 실체들이 한 신성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목적에 따라서 성부의 형태, 성자의 형태, 성령의 형태를 취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참조: 물, 얼음, 수증기와 같이 유사성을 갖는 세 인격들의 경우를 생각해 보라) (아가폐 성경사전 779쪽)

# 이 말은(프로소폰: 라틴어 페르소나의 헬라어) 불행하게도 사벨리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에 의하여 오용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을 형식적으로만 믿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란 자체 안에 있는 관계명칭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 외부세계와 가질 때 가지는 명칭뿐이라고 했다. 이름은 셋이나 실제는 한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는 당시 로마 교회 안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페르소나' 대신에 '프로소폰'이라는 말을 썼다. 이 말을 쓰면서 그는 삼위가 아버지 하나님과 동일한 실체를 가진분이 아니라, 기능의 일부를 담당하고 있을 뿐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때로는 아버지로, 때로는 아들로, 때로는 성령으로 나타나서 특유의 기능을 발휘하나, 하나님과 별개의 휘포타시스를 가진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렇게 말하면서 하나님은 한때는 창조자로, 한때는 구속자로, 한때는 생명의 부여자로 나타났다는 것이다.(이종성의 삼위일체론 298페이지)

특히 캘빈은 세르메투스라는 양태론자와 논쟁을 하엿던 적이 있었다. 그는 지방교회와 동일하게 삼중적인 신을 도입하였으며, 양태론자였다.

# 캘빈이 그들에 관해서 말한 내용을 잘 검토해 보면, 세르베투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고대의 두 이단설이었던 사벨리우스주의와 아리우스주의를 교묘하게 혼합한 설을 가르친 듯 하다. 일면 세르메투스는 사벨리우스주의자였다. 캘빈이 말했듯이 세르메투스는 "신의 본질 안에 세 위격이 존재한다고 말할 때마다 삼중적인 신을 도입하는 것이며, 이것이 하나님의 단일성에 일치 않는 한, 이 삼위는 공상적인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제럴드 브레이의 신론, 234쪽)

지방교회는 세 위격을 삼중적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이 셋이 언제나 함께 한 공간 안에만 국한되어있다고 믿음으로서 실제적으로는 한 인격, 한 실제, 한 영이라고 주장한다. 즉 이들이 말하는 삼중적이란 실제적인 것이 아니라, 어떤 공상적인 개념일 뿐이다.

지방교회는 구약에서는 외부적으로 하나님만이 사역하셨고, 그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직접 예수로 오셨다고 보며,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 결국 육신을 입은 하나님 자신이라고 보며, 죽음과 부활후에는 영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들이 말하는 삼위는 결국 하나님 자신이 거치고 변화되는 단계와 과정을 의미한다. 그들의 상호내재란 삼중적인 요소이며, 실제적으로 구별되는 인격이 아니고, 즉 양태론을 위장하기 위한 추상적인 변명일 뿐이다.

5. 상호내재

지방교회가 주장하는 상호내재란 "페리코레시스"라고 한다. 그것을 지방교회는 상호내재라고 하는 장소적인 개념으로만 생각한다. 그러나 페리코레시스라는 용어는 종속주의에 대항하여 만들어진 논리이다. 즉 삼위가 모두 동일한 신적본질을 가졌다는 주장으로 종속주의를 무색하게 만드는 그당시로서는 진보적인 논리였다. 그러나 상호내재는 인격을 구별할 수 없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았던 논리였으며, 실제로 양태론자들이 그 용어를 악용하였던 것이다.

# 또한 이 말은 모든 신적인 속성 각각이 세 휘포타시스 모두에게 똑같이 돌려진다는 의미다. 즉 세 휘포타시스는 모두 전능하며 전지하며 영원하다. 이 교리는 종속론의 문제를 피하게 해주며 사벨리우스주의나 서머나의 노예투스의 성부고난설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골로새서2:9 "그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에 대해 적절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상호점유의 개념은 오리겐의 위계질서적 모델을 기반으로 한 커다란 진보였다. 그러나 이 개념은 휘포스타시스들이 <서로 어떻게 구별될 수 있느냐는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이 점에서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제럴드브레이의 신론, 186-187쪽)

그러나 어거스틴은 그 페리코레시스를 상호내재라고 하는 장소적인 개념으로 보았으나,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그 개념을 장소적 개념뿐 아니라, 상호상통, 상호교류라는 동적인 관점으로도 보았다.

# 한편 세 번째 소주제인 페리코레시스 이론과 관련하여 헬라어인 페리코레시스 용어 그 자체를 분해해 보면, 페리코레시스 용어는 다소 정적인 의미가 들어있는 상호내주의 의미도 포함하지만, 다소 동적인 의미가 들어있는 상호관통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상호관통(상호상통)의 의미에서의 페리코레시스에 관한 진술이 아타나시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위격들의 삼위성에 관하여 진술할 때, 상호내재(공통내재)의 의미에서만 그들의 이론을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김석환의 교부들의 삼위일체론, 349쪽)

갑바도기아의 세 교부 중 한 사람이었던 바실은 페리코레시스(상호점유)에 대해서 상호교류와 대자적인 관계의 개념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 위에서 지적한 것과 같이 바실은 삼위의 관계를 설명함에 있어서 '통해서', '안에서' '함께' 라는 낱말을 구사하면서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본성적 상호교류 또는 대자적 관계성을 강조했다. ..... 그는 신성의 통일성과 단일성을 강조하다가 군주신론에 빠진 데오도투스나 사모사타의 바울을 경계했다.(이종성의 삼위일체론 251쪽)

즉 본질의 단일성과 상호교류하는 구별되는 인격으로 간주한 것이며, 그것은 오늘날의 정통삼위일체의 초석이 되어진다.

# 우리는 위격들의 상호내재성, 즉 후에 이른바, 페리코레시스(교류, 상호순환)라고 불리우는 교리를 발견한다. <신성은 분할된 위격들 안에, 분할되지 않은 채로 존재한다>. 세 위격들 속에는 '본성의 동일성'이 있다. 성자는 성부 안에 있고, 성부는 성자 안에 있다. <위격들의 구별에 따라서는 둘이 별개>이나, <본질의 공유에 따라서는 하나>이다. 위엄은 둘로 쪼개지지 않고, 영광도 나뉘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에 의해 설명되는 영광송 역시 복수가 아니라, 단수이다. 형상에 따른 영광은 원형에로 나아간다. 한 경우에는 모방의 이유인 형상이고, 다른 경우에는 본질에 의한 아들이시다. 그러니까 세 위격은 각각 자신 안에 한 동일실체 전부를 갖는다. 그리고 각 위격은 실체에 관한 한, 다른 위격들을 완전히 포괄하고 관통한다. 그러나 <각 위격은 한 동일실체를 전부를 갖되, 다른 위격들과 공유할 수 없는 특성>을 갖는다."(김석환, 교부들의 삼위일체, 150쪽)

갑바도기아 교부중 바실은 또 이렇게 말하였다.

# 한 하나님 아버지, 한 독생자, 한 성령께서 계시다. 우리는 <그 위격들의 각각>을 따로 따로 선포한다. 그리고 그들을 함께 헤아려야만 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복수성의 개념에 대한 무지한 진술에 의해 당황하지 않는다. 우리는 오늘날까지 두 번째 하나님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없다.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을 경배할 때에 우리는 전제군주론을 고수하면서, 또한 <동시에 위격의 개체성>을 고백한다.(같은 책, 145쪽)

또 갑바도기아 교부중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는 양태론자들과 같이 위격을 혼동하지 않았으며, 단일신론자와 같이 실체를 분리시키지 않았다. 즉 위격은 구별되어야만 하지만, 실체는 분리되지 말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 초과됨이나 결핌함이 없고, 이 단일성은 혼동됨도 없으며, 또 나뉘었다고 해서 분리되지도 않는다. 우리는 이렇게해서 사벨리우스의 (위격의) 혼동이나 아리우스의 (실체의) 나눔으로부터 똑같이 보호받을 수 있다. 사벨리우스와 아리우스는 정반대의 악들이지만 그 사악함에 있어서는 똑같이 악하다.(같은 책, 191쪽

그레고리는 더욱 정확하게 세 위격과 한 본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즉 위격은 개별적이며 구별되고 나뉘어지지만, 신격(신성)의 관점에서는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 내가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때 그대는 한 빛의 섬광과 동시에 셋에 의하여 즉시 조명받아야 한다. <개별성이나 위격들에서는 셋>이다. 또는 누가 그렇게 부르기를 원한다면 위(persons)에서는 셋이다. 왜냐하면 그 음절들이 동일한 의미를 나타내는 한, 우리는 그 용어들에 대해서 시비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체의 관점에서는 즉 <신격의 관점에서는 하나>이다. 왜냐하면 내가 만일 그렇게 말해도 좋다면, <위격들은 구분없이 나누이기 때문>이다. 위격들은 구분 안에서 연합된다. 왜냐하면 신격은 셋안에서 하나이고, 그 셋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 셋 안에 신격이 있다. 또는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셋이 바로 신격이다.(같은 책, 217쪽)

물론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약간의 개인적인 관점이 다르며, 어거스틴 역시 그들과 다른 양상을 보인다. 그들의 견해는 고전적 삼위일체로 불리우며, 그들의 논리는 그 당시에 미완성적인 삼위일체론의 논리적 전개와 발전의 과정에 있었기 때문이다. 지방교회는 이러한 교부들의 견해중에서 오해의 소지가 있는 부분만을 고의로 선택하여, 그들이 사용하였던 용어이었으므로 자신들의 양태론이 정통신학이라고 왜곡시키고 있는 것이다.

# 이러한 사실과 대단히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은, 어거스틴에게는 위격과 본성(혹은 본질)을 정확하게 구별하게 하는 적절한 틀이 없다는 점이다. 그의 선배들 및 동시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어거스틴은 위격들이 논리적으로 신적본성에 의존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어거스틴을 양태론(즉 사벨리우스주의자) 라고 비판하는 의견들에 대해서, 비록 그것이 어거스틴의 견해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 동의한다 할지라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제럴드브레이의 신론, 206쪽

# 교회가 휘포스타시스와 페르소나는 동의어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하게 된 것은, 어거스틴이 죽은지 반 세대가 지난 451년의 칼케톤 공의회에서였다. 이리하여 페르소나에 대한 정의에 휘포스타시스의 객 관적이며 절대적인 성격을 포함시키는 길을 열게 되었다. 어거스틴이 이 위격들을 "존재양식"이라고 말하면서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정확히 바로 이러한 절대적인 영구성이었다. 우리는 어거스틴의 어휘선택에 대해 의문을 표시할 수 있다. 그가 선택한 어휘는 그를 사벨리우스주의로 몰 수 있는 가능 성을 열어놓고 있다.(이것은 페르소나라는 단어가 얼굴이나 가면을 뜻하기 때문에 삼위가 한분 하나님의 세 얼굴로 이해되어 결국 양태론적 오류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역주)" (제럴드 브레이의 신론. 198쪽)

# 이 말은(프로소폰: 라틴어 페르소나의 헬라어) 불행하게도 사벨리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에 의하여 오용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을 형식적으로만 믿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란 자체 안에 있는 관계명칭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 외부세계와 가질 때 가지는 명칭뿐이라고 했다. 이름은 셋이나 실제는 한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는 당시 로마 교회 안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페르소나' 대신에 '프로소폰'이라는 말을 썼다. 이 말을 쓰면서 그는 삼위가 아버지 하나님과 동일한 실체를 가진 분이 아니라, 기능의 일부를 담당하고 있을 뿐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때로는 아버지로, 때로는 아들로, 때로는 성령으로 나타나서 특유의 기능을 발휘하나, 하나님과 별개의 휘포타시스를 가진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렇게 말하면서 하나님은 한때는 창조자로, 한때는 구속자로, 한때는 생명의 부여자로 나타났다는 것이다."(이종성의 삼위일체론 298페이지)

갑바도기아 교부들과 어거스틴은 위대한 신학자임에 분명하지만, 그가 사용한 용어때문에 오히려 양태론자라고 비난을 받은 적이 있었고, 실제로 그의 견해는 양태론자에게 오용을 당하던 적이 있었다. 물론 그는 양태론자가 아니라고 교회사는 평가한다...그러나 그에게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 지방교회는 그러한 오해의 소지가 있었던 견해를 정통신학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회사에 관심이 별로 없기 때문에 지방교회의 거짓말에 대해서 잘 알 수가 없다는 것을 노린 것이다.

# 갑바도기아의 삼위일체론은 몇가지 중요한 면에서 미완성임을 알 수 있다. 그 삼위일체론에는 휘포타시스들의 상호점유와 신성의 원천으로서 성부의 수위성 사이에 해소되지 않는 긴장이 초래하고 있었다. 이 긴장은 그 후 논쟁을 낳았으며 결국 분열을 초래했다."(제럴드 브레이의 신론, 194쪽)

실제로 교회 역사상 양태론자들은 초대교회 교부들의 일부 주장과 특히 용어를 사용하며, 그들의 양태론적인 주장을 합리화시키려고 시도하였던 것이다.

지방교회의 주장은 양태론이다. 그들이 아무리 내재적으로 상호내재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경륜적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변명하여도, 교회사를 정확히 아는 사람에게는 거짓말일 따름이며 더욱 명백한 영태론일 뿐이다.

양태론은 성경의 심각한 모순을 가져온다.....이것에 대해서 해괴하고 이상한 변명과 해명을 하고 있지만, 성경에서 언급되는 삼위의 인격적 구별과 상호작용에 대해서 양태론은 설명할 방법이 없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성경적인 기록을 최우선적인 순위로 올려 놓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양태론을 고집하면,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십자가 대속의 개념이 무너진다. 온 인류의 죄를 위하여 자신을 제물로 바치는 예수그리스도와, 그 제물을 온전히 받으시는 하나님의 인격적 구별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 안에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려는 목적으로 파송되어지는 성령하나님의 인격과 그를 보내시는 성부와 성자의 인격이 구별되어지지 않는다. 계승적인 양태론을 주장하다보면. 하나님의 영원불변성에 대한 성경적 기록이 부정되어야만 하며, 하나님의 무소부재, 편재성에 대한 성경적 기록이 부정되어야만 한다.


더군다나 하나님과 사람의 구별조차 없이 사람이 하나님이 된다는 망발을 하게되는 이단교리에 대해서 무슨 말이 필요한가? 재림하시는 예수의 인격을 부정하는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니다. 그것은 2000년 동안의 기독교인의 소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재림에 대해서 숱하게 기록되어있는 성경말씀을 단지 상징적으로만 해석하여야 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즉 기록된 성경말씀을 근거로 하는 신학적 논리가 아니라, 이미 세워진 독특한 교리를 맞추기 위하여 기록된 성경을 부정해야만 한다면, 당연히 그러한 교리는 이단적 주장이 되고마는 것이다.

그는 보이지 않으며 들리지 않는다. 마치 동산에서 먹으면 정녕 죽는다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린 아담과 하와와 같다....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뱀의 말에 그만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 버렸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에게 미혹되면, 하나님의 말씀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다.

6. 올바른 상호내재의 뜻

본인은 상호내재하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다만 본인이 믿고 지지하는 상호내재란 성경적인 개념의 상호내재이며, 정통신학이 말하는 상호내재이며, 지방교회의 것과 다르다. 지방교회가 말하는 상호내재란, 여태까지 살펴본 것과 같이 오해의 소지가 있었으며 양태론적인 성향을 가졌던 개념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에서의 실제 예를 살펴보고, 정통신학이 말하는 상호내재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롬12:5)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된 많은 사람은 모두 한 인격일까? 많은 사람이 동시존재하며 상호내재하는 것을 말하는? 아니면 믿음으로 인한 유기체적인 영적 상호교류을 뜻하는가?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

예수를 믿는 자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고 말하고 있다. 유대인과 헬라인과 종이나 자주자와 남자나 여자가 모두 한 인격이며 한 장소에 동시존재하는 것이라는 것이 아니라, 한 믿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다음 구절을 보면 확실하게 나타난다.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빌1:30)

바울과 빌립보교인은 서로가 안에 거하는 상호내재, 동시존재를 뜻하였을까? 아니면 한 믿음 안에서의 유기체적인 영적연결을 의미하였는가? 감옥에 있는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의 안에 인격적으로 동시존재하며, 빌립보교인들의 인격이 바울의 인격 안에 동시존재, 상호내재하였는가? 과연 그들은 한 인격이었는가? 구별되는 인격으로서 유기체적인 영적 상호교류를 의미하였는가?

즉 앞에서 말한 요한복음 14장의 "서로의 안에 거하는" 상호내재는 "인격 안의 인격"을 의미한다고 해석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삼위의 유기체적인 영적교류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여야 한다. 그렇다면 정통신학에서 상호내재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확인하자

# 오픈2 주석성경:(신약 172쪽, 173쪽)


[요14:9] 나를 본자는 아버지를....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을 보듯 하나님을 본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아무도 그 분을 볼 수가 없다. 여기서 예수님이 하나님을 계시하는 분이심을 뜻한다. 곧 예수님을 본 사람은 <하나님의 속성, 성품, 그분의 뜻, 계획>등을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요14: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성부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이 <인격적으로는 구별 되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동일하심을 말한다.

[요14:20] 내가 아버지 안에....하나님과 예수님과 믿는 이들 사이의 친밀한 <영적결합>을 의미한다.

신학자들과 정통신학에서는 "상호내재"란 "본질적인 하나" 혹은 "유기체적인 영적연합"을 의미하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이다. 즉 "인격적으로 구별되는 연합"을 의미한다.

웨슬레목사도 역시 상호내재를 고유의 인격성을 강조하는 가운데 주장한다. 웨슬레는 그 상호내재를 "일치" 혹은 "단일성"으로 해석하며, "구별된 인격"을 주장한다. 즉 "단일적인 신적본질의 일치"와 "구별된 인격"을 말한다.

# 웨슬리는 성부, 성자, 성령, 각자가 지니고 있는 <고유의 인격성을 강조>하며, 삼위의 상호내재를(성부와 성자가 성령과 함께 내재하고 있음을) 주장한다.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을 표현하는 신학적 용어로 '상호내재'(perichoresis)를 사용한다. 이 말은 "서로가 상대방을 받아들이기 위해 자신을 철저하게 거부하고 포기할 뿐만 아니라 자신을 비우는 것"을 의미한다. 즉 성부 하나님이 성자 하나님 안에, 성자 하나님이 성부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상호내재함으로써 서로간의 일치를 이룬다. 이와 같은 상호내재의 속성에 의해서 성부, 성자, 성령은 서로 분리되지 않으면서 서로 <구별이 된다>. 이로서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으로서 구별될지라도 서로 분리되거나 떨어지거나 나뉘어지지 않는 <단일성>을 갖게된다(김영선의 웨슬레 신학)

유명한 개혁신학의 조직신학자인 웨인그루뎀도 다음과 같이 상호내재를 설명하였다. 즉 정통신학이 말하는 페리코레시스(상호점유, 상호교류)란 동일한 신적본질과 구별되는 인격간의 상호교류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 그(예수)는 신자들을 위해 기도하기를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했는데 이는 우리의 연합이 삼위일체 안에서 성부와 성자 사이의 완전한 연합과 같게 되기를 기도하신 것으로, 우리의 하나됨은 영원하고 완전히 조화를 이룬 것이어야 함을 (하나님의 하나됨과 같이)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삼위를 통한 비유가 대단히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개개인의 성품을 흡수해 버리지는 못할 것을 경고하기 때문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완전한 연합을 이루고 있음에도 그들은 <독립된 삼위>이다. 마찬가지로 어느날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고 다른 신자들과 함께 완전한 연합을 이루게 되겠지만, 우리는 우리 각자에게 주신 은사와 능력, 관심 책임, 친구관계, 선호도, 욕망등을 소유한 <독립된 개체>로 남아 있을 것이다.(웨인 그루뎀, 조직신학 중권, 557쪽)

출처 : 내 사랑 중국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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