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적 교회의 존재양식
선교적 교회는 세상 안에서 하나님의 선교를 수행하는 이웃의 교회이다. 선교적 교회의 구조와 존재양식은 전술한 바와 같이 상황에 따라서 다양하게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몇 가지 원칙과 기준이 있다. 선교적 교회는 평신도들이 소외됨이 없이 자신의 능력을 교회 안에서 유감 없이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교회가 선교적 교회로 전환되어질 때 이런 일들이 가능하게 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의 인격으로 존중되고 자신에게 맞는 교회에 분야에서 공헌하는 교회, 이것이 선교적 교회의 존재양식이 될 것이다.
1. 선교적 교회의 구조
하나님의 선교를 수행하기 위한 교회의 선교적 체제와 구조 그리고 기능은 어떠해야 하는가? 1967년 발간된 Church for Others(WCC.1967)에서 북미 선교에 관한 연구위원회가 발표한 교회의 선교적 구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세계교회협의회, 『세계를 위한 교회』, 147쪽.
첫째로 가족형 구조이다. 이것은 사랑방 교회나 가족공동체를 통한 선교구조로서 전 구성원이 한가족처럼 선교에 동참한다.
둘째로 항구적 유용구조로서 카톨릭 교회나 개신 교회에서 제공하는 봉사 프로그램과 같이 주변의 요청에 따라 유용하게 쓰여지는 선교구조이다,
셋째로 생활공동체구조이다. 이것은 수도원이나 컴뮨과 같이 공동규율 밑에서 함께 생활하면서 일상 생활을 통해 선교하는 구조이다.
마지막으로 특수기동대 구조로서 어떤 특수한 선교적 과제가 생겼을 때 그 과제를 수행하기 위하여 조직되고, 과업을 수행하고, 완수한 후에 해체되는 식이다.
이 같은 교회는 종으로서의 교회 공동체이다. 바르트(K. Barth)는 그의 교회 교의학의 제 4권 제3장에서 교회 봉사의 성격, 본질, 형태 등을 논한다. 그는 먼저 교회 공동체의 봉사의 성격에 관해 “교회 봉사는 일정하고, 제한되고, 충만한 약속에 차 있다” Otto Weber, Karl Barths Kirchliche Dogmatic, 김광식 역, 『칼 바르트의 교회 교의학』,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76), 395쪽.
고 한다. 그 공동체는 세상을 위해 실존한다. 그대로의 세상을 알고, 그대로의 인간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결론 지워진 모든 사람들과의 하나님의 약속의 견지에서 그리고 그 근거에서 인간을 보고 설명하고 취급하도록 한다. E. G. Jay, 『교회론의 역사』, 419-420쪽.
그것은 교회는 세상을 위해서 있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세상에 증거 해야 할 과제가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공동체는 약속 아래 모여지고, 세워지고, 보내진다. 결론적으로 바르트는 봉사의 형태를 말씀의 봉사와 행동의 봉사로 지적한다. 이 같은 교회 유형은 종의 모습을 지닌 교회이다.
선교구조의 특성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포용성이다.
세상을 위한, 세상 안에 함께 하며,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 가는 교회는 모든 것을 포괄해 가는 포용성을 지녀야 한다. 개방적이기만 해도 안되고, 폐쇄적이기만 해서도 안 된다. 세계의 변화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개방성이 있어야 하며 정체성을 잃지 않는 범위에서 수용 및 적응하는 자세인 포용성 또한 있어야 한다. 즉 현실에 대해 외면하지 않으면서 보다 나은 하나님의 뜻이 실현될 미래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자세를 의미한다. 박근원, “제2의 종교개혁의 파장과 파고”, 『기독교 사상』, (1979.10.), 43쪽.
둘째는 다양성이다.
이 말은 변화에 대하여 창조적 적응과 수용, 즉 새로운 선교 형태의 창출이라는 점에서 필요에 따른 자기 변화 및 적응능력을 말한다. 유동적이고 다양한 세계 속에서 교회는 하나의 고정된 형태를 요구하지 않는다. 박근원, 『오늘의 교역론』,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2), 12쪽.
다원화되고 복잡해져 가는 상황 속에서 종래의 교회 구조로는 선교적 사명을 올바로 감당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교회는 다양성을 가질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포용성을 전제하면서 그때그때 유연성을 발휘하는 교회의 능력을 의미한다.
셋째는 기동성이다.
이 말은 끊임없이 신속하게 변하는 세계의 사상과 사회 생활에 적응과 대처의 의지를 말한다.
넷째는 공동체적 특성이다.
교회가 역사성을 상실하여 그 기능을 잃어버리고, 세상과 이웃을 위한 끊임없는 도전과 역사적 상황에 책임적 응답의 능력을 잃었을 때, 교회는 생존하기 어렵고 존재할 가치가 없다. 이러한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교회는 공동체로서의 체제 개발에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즉 나눔의(Sharing) 공동체로서, 혹은 섬기는(Serving) 공동체, 종말적 선교 공동체로서 하나님 나라 건설에 대한 끊임없는 노력을 감당할 기초 공동체 형성을 의미한다. D. Bonhoeffer, Life together, (Guildford and London, Balling and son Limited, 1963), 56쪽.
다섯째는 평신도 기능의 확장이다.
이것은 평신도들의 기능을 확대하고 선교활동에 깊이 참여케 하는 것을 의미한다, 평신도들이야말로 선교의 위임을 받은 하나님이 백성이다. 평신도의 재발견을 통해서 평신도와 성직자가 교권적으로 구분되지 않는 한 하나님, 한 그리스도, 한 성령의 부르심과 보내심에 응답하고 나서는 하나의 공동체, 즉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유대 속에서 하나가 되어 이 세계를 선교의 터전으로 삼아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역사가 벌어져야 한다.
2. 선교적 교회의 존재 양식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화해적 대명사다. 인간이 창조주에 대한 반역으로 인하여 자기의 인간성을 상실하는 동시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왜곡시켰을 때 그리스도는 그 관계를 개선하고 인간에게 자기 됨을 회복하게 하는 화해의 작업을 담당했다. 화해자로서 그리스도 선교는 인간과 하나됨으로 그 구체적인 실현을 보는 것이다. 이 선교적 수행을 위하여 그는 본래 하나님과 동등함에도 불구하고 종의 모습을 취하여 인간이 되셨다(빌 2:7). 예수 그리스도의 또 다른 선교는 사회적 차원에서의 화해이다. 누가복음 4장 18절, 19절에 보면 예수의 선교는 사회의 여러 계층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에 참여하는 교회의 존재 양식은
첫째, 민중의 교회(church of the people)이다.
이 말은 교권주의적이고 물량주의적인 제도적 교회에 반대되는 것이다. 교회는 성직자 중심이거나 교회 재정을 좌우하는 소수의 평신도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해함으로 새 사람이 되어서 새 삶을 영위하는 모든 사람의 교회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제도나 시설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다. 그러기에 그 구성요원이 비록 사회적, 인종적, 성적 및 연령적 상이성을 지닌다 할지라도,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안에서 온갖 자연적 및 인위적 장애를 극복하고 자유와 평등 안에서 사랑의 교제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민중의 교회는 “원칙적으로 동등한 권리와 동등한 품위를 갖춘 동등한 공동체” J. Moltmann, The Church in the Power of the Spirit, 박봉랑 외 4인 역,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0), 106쪽.
이다. 이 공동체에 속한 자들은 일체감을 지니게 되고, 세상의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차원의 자유와 친교를 경험함으로써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하나님의 화해적 선교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의 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둘째로 민중의 교회는 “민중을 위한 교회”(church for the people)가 되어야 한다.
예수는 이웃을 위한 사람이기에 그를 따르는 교회의 기본 구조는 이웃을 위해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따른다. 하나는 세속적인 힘들과의 마찰 내지는 충돌로 인한 긴장이고, 또 하나는 교회가 민중을 대상화하는 것이다. 전자는 계층 간의 화해를 위해 도움을 가져올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는 반면에, 후자의 경우는 몰트만이 우려하는 바와 같이 “민중이 민중의 해방을 빙자한 이데올로기에 의하여 착취당하고 파괴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민중은 그것이 선하든지 또는 악하든지 간에, 교회나 또는 사회 정치적 활동을 위한 목적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셋째로 교회는 "민중과 함께 있는 교회"(church with the people)이어야 한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으심은 그가 우리와 함께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세속적 사랑으로 이웃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은 그 목적이 자유 안에서 이웃과 함께 존재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교회의 궁극적 존재 이유가 밝혀진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화해를 지향하는 교회가 민중 속에 있을 때 민중과의 연대의식을 통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체감을 경험하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화해가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의 현존을 통하여 성취된 것과 같이 교회가 민중의 고난에 개입하는 자기 희생적 사랑 없이는 화해를 위한 대화와 설득과 변화는 기대할 수 없다. 이계준, 『한국교회와 하나님의 선교』, 89쪽.
따라서 우리는 복음전파와 사회봉사, 나아가 사회변혁까지를 포함하는 선교원리를 지향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가서 섬기게 되어 있다. 사랑이 없으면 우리가 이웃과 사회로 나아갈 수 없고 나아가지도 않고 그들을 섬기며 도울 수 없다. 그러므로 온전한 선교는 항상 전도하는 일과 섬기며 봉사하는 일을 함께 실천해 나가야 한다. 한국기독교사회운동연합 편, 『날로 새로워지는 그리스도인들 : 선교현장의 이해를 위하여』, (서울: 녹두, 1993), 179쪽.
그 모델을 우리는 초기 한국 그리스도교에서 찾을 수 있다. 초기 한국교회는 구한말의 국가적-사회적 위기 상황에서 공식적으로는 교회보다 먼저 교육 및 의료사업에서 출발하였다. 봉사를 매체로 해서 선교의 설자리가 마련되었다.
우리가 교회로 부름을 받은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데 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인간이 살고 있는 모든 곳에 전파되어야 하며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 나라의 자녀들은 세상 속으로 보냄을 받는다. 이러한 신앙고백 하에 모든 교회는 그 구조를 선교적 구조로 전환하여야 한다.
이렇게 교회가 선교적 교회로 전환되어질 때 교회는 교회 안에 있는 다양한 능력들을 살릴 수 있다. 즉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의 인격으로 존중되고 자신에게 맞는 교회에 분야에서 공헌하게 된다. 또한 선교적 교회는 평신도가 활성화되어지며, 모든 교인의 참여를 통한 교회에서 일어나는 소외의 현상이 극복되고, 다양한 관심의 사람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와 다양한 사회의 욕구에 응답하면서 사회의 변혁 세력으로 자리 매김 할 것이다. 이런 선교적 교회는 교회 안에 작은 교회들, 즉 가정을 중심으로 학교를 중심으로, 불우 기관을 중심으로, 사회단체를 중심으로 다양한 현장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는 작은 교회의 연합체가 된다. John Fleming & Ken Wright,『새로운 선교와 교회 구조』, 25-28쪽.
교회 안의 작은 교회 형태가 가장 활발하게 일어나는 것이 라틴 아메리카의 기초교회공동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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