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영원한사명)

[스크랩] 하나님의 선교에 눈을 뜨라/엡1:7-18

수호천사1 2009. 7. 8. 12:28

오늘 우리 시대에 크리스천들이 가장 많이 쓰는 말 중의 하나가 선교(宣敎)라는 말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이 나온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습니다. 과거에는 선교라는 말 대신 전도(傳導)라는 말을 썼습니다.

 

영어로 하면 선교는 "mission" 이라고 하고, 전도는 "evangelism 혹은 evangelization" 이라고 합니다. 문자적으로 풀이한다면, 선교는 "보냄"이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미시오(missio)"라는 말에서 온 것입니다.

 

영어에서 미션이라는 말을 사명(使命)이라는 뜻으로도 많이 씁니다. "미셔나리(missionary)"라고 하면 사명을 띠고 보냄을 받은 사람을 말하는데, 오늘날에는 선교사라는 말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반면에 전도는 "좋은 소식"이라는 뜻을 가진 "유앙겔리온"이라는 희랍어에서 온 것입니다. "이밴젤리스트(evangelist)"라고 하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과거부터 사용해 온 전도라는 말은 복음을 전파한다는 의미가 강합니다. 그래서 전도는 흔히 타 종교를 믿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파해서 기독교로 개종(改宗)시키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반면에, 선교라는 말은 주로 해외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해외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선교사라고 불러왔습니다.

그러다가 1952년 독일의 빌링겐(Willingen)에서 열린 국제 선교사 대회(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에서부터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과거부터 써온 전도나 선교라는 말과 개념을 구별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선교라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교"라고 하면 영어로 "미션 오브 갓(Mission of God)" 이라고 하면 될텐데 그렇게 하지 않고 굳이 라틴어로 "미시오 데이(missio Dei)" 라고 한 것을 보면 다분히 그런 의도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단순히 선교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선교"라고 말하면, 그 의미가 사뭇 달라집니다. 선교를 하는 주체가 사람이 아니고, 교회도 아니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가 선교비를 많이 책정하고 선교사를 파송하고 하면 그 교회가 선교 활동을 활발하게 하는 것 같지만 그런 경우에도 그 교회가 열심히 선교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교회를 통하여 선교를 하시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는 이번에 파라과이 단기 선교사로 가는 사람들이 합숙을 하면서 훈련을 했습니다. 기도하고, 말씀을 나누고, 가서 할 일들을 점검하고, 자기들의 생각을 나누었습니다. 우리교회가 구체적으로 단기 선교에 대한 논의를 활발하게 시작한 것은 1995년 경입니다. 그 때 뜻있는 몇 사람들이 모여서 선교부가 교회에 속한 하나의 작은 부서로 남아 있을 것이 아니라 좀 더 능동적으로 선교활동을 하자는 의견들을 나누었습니다. 그렇지만 곧 바로 어떤 행동으로 옮기기에는 아직 시기 상조였습니다. 계속해서 선교사님들을 초청해서 선교 부흥회나 선교 세미나를 열어서 선교에 대한 공감대를 넓혀 갔습니다.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단기선교에 대한 관심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 무렵 하나님께서 저에게 강한 부담을 주셨습니다.

"언제까지 그렇게 말로만 선교를 해서 되겠느냐? 이제 선교사들을 현지에 보내야 하지 않겠느냐?" 그 때 저는 용기를 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단기 선교라니요? 다들 자기 공부하느라고 바쁜 사람들인데 누가 현지에 가겠습니까? 그리고 그 경비를 누가 댑니까?" 하나님은 저의 그런 질문에 아무 대답도 안 하시고 다시 1-2년을 그냥 보내게 하셨습니다. 그러다가 1999년 초에 하나님께서 저에게 용기를 주셨습니다. 저는 이 문제를 제직회에서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의논하면 가부(可否)를 물어야 하고, 논의를 하다가 보면 단기선교가 아직 시기상조라는 말도 나올 수 있고, 경비 문제도 나올 수 있고 해서 부결될 수도 있겠다 싶어서 "올 해는 우리교회에서 단기선교를 가겠습니다" 하고 선포해버렸습니다.

그 때 저는 선교 신학자 에밀 브룬너(Emil Brunner)의 말을 인용했습니다. "불이 탐으로써 존재하는 것처럼, 교회는 선교를 함으로써 존재한다(A church exists by mission, as fire exists by burning.)." 정말 그 말 그대로였습니다. 그 때 저는 교회는 선교함으로써 존재한다는 것을 실감(實感)했습니다. 교인들의 관심이 그렇게 뜨거울 수가 없었습니다. 단기선교를 기쁜 마음으로 후원했습니다. 가지 않는 사람들도 자기가 가는 것처럼 기쁜 마음으로 헌금했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 중보기도 팀이 생겨서 단기선교를 지원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교회 역사 상 처음으로 1999년에 중미(中美)에 있는 코스타 리카(Costa Rica)로 단기선교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북한의 식량 난이 외부에 알려지면서 탈북자에 대한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외국에 나가서 타 문화권의 사람들에게 선교를 하는 것도 좋지만 내 나라, 내 민족을 돌아보아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2000년, 2001, 2002, 2003년에 계속해서 탈북자들을 위한 단기선교를 가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저의 머리 속에는 그 때 탈북자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감격이 생생합니다. 저를 찾아와서 똑똑한 말로 "저는 앞으로 목사가 되겠습네다!" 하면서 세례를 받겠다고 하던 아이들, 그리고 짧은 시간에 한마디라도 더 복음을 증거하려고……"지금 내가 이 형제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이 형제는 복음을 영원히 듣지 못할지도 모른다" 생각하고 다급한 음성으로 복음을 전했던 한 자매의 음성이 귀에 생생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선교가 무엇입니까? 어느 형제가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과거에 자기가 착각 속에 살았다고요. 하나님의 비젼이 나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걸 모르고 자기는 나의 비젼이 하나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착각했었답니다. “하나님의 선교”의 핵심은 바로 그것입니다.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불붙는 사랑, 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불붙는 소원을 하나님 스스로 이루어 나가신다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은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교회를 사용하시고, 여러분과 저를 사용하십니다.

다시 진부하게 도구론(道具論)을 들먹일 필요가 없겠지요? 도구가 무엇입니까? 톱, 대패, 끌, 망치, 붓, 연필 같은 연장들입니다. 이것들은 말 그대로 작품을 만들기 위한 도구들입니다. 작가의 주된 관심은 자기가 만드는 작품에 있지 연장에 있지 않습니다. 작가는 필요한 때에 필요한 연장을 사용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교에 눈을 뜬 사람들은 겸손합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가복음 10:45)." 이 말씀처럼 세상을 섬기는 삶을 삽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교만하지 않습니다. 거만하지 않습니다. 가진 자가 못 가진 자를 대하는 것처럼 무례하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선교 현지에 가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교만해지려고 하는 유혹을 이겨야 합니다. 우선 우리는 잘 사는 나라에서 왔습니다. 잘 사는 미국에서 왔습니다. 내가 먼저 믿은 예수를 전해주려고 왔습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을 가르치려고 하는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잘 사는 나라에서 온 티를 내기 쉽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관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관심이 도구인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헐벗고 굶주린 이 형제, 자매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사람을 구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나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드러나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지 내가 아닙니다.

오늘 읽은 에베소서 말씀을 보십시오. 이 말씀에서 바울은 다섯 가지 중요한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보혈로 자유함을 얻었고, 죄의 용서를 받았고,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비밀을 깨달았다고 합니다(7-9절). 이 말씀은 우리가 받은 특권이 무엇인지 말해 줍니다.

둘째로, 이제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찬양을 받기를 원하신다고 합니다(12절). 이 말씀은 우리의 책임과 사명이 무엇인지 말해 줍니다.

셋째로,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여러분도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분명히 알게 되기를 원한다고 합니다(17절). 이를 위해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에베소 교회에게 지혜와 계시의 정신(the Spirit of wisdom and revelation )을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넷째로, 바울은 에베소 교회 교인들이 마음의 눈을 뜨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18절). NIV 영어 성경에는 “I pray that the eyes of your heart may be enlightened”라고 했습니다. NLT 성경에는 “I pray that your hearts will be flooded with light”라고 했습니다. 그냥 눈이 아니고 마음의 눈입니다. 그냥 눈을 가지고 볼 수 있는 것은 매우 제한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시력이 좋은 사람이라도 볼 수 있는 것에 한계가 있습니다. 그 이상은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마음의 눈을 뜨면 보이지 않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슨 목적으로 우리를 부르셨는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이유가 무엇인가?" “나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은 무엇인가?” 하는 것들은 마음의 눈을 뜬 사람이라야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일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 것인지, 에베소 교회 교인들이 깨닫기를 원한다고 합니다(19절).

1952년의 빌링겐대회에 참가했던 신학자들은 선교에 대하여 이렇게 정의(定義)를 내렸습니다. "선교란 구원받은 전 피조물 위에(즉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주권(主權)을 세우려는 포괄적인 목표를 가지고 아들을 보내심 곧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 한 지체로서 참여하게 되는 선교운동의 원천은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 안에 있다." 다시 말하면 선교는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게획과 목적을 깨닫고 그 계획을 이루는 일에 헌신하는 하나님의 선교입니다.

여러분, 유명한 건초더미 운동(Haystack Movement)을 아십니까? 1806년에 윌리암스 대학(Williams College)에서 비를 피해 건초더미 속에 들어갔다가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리기로 작정했던 사무엘 밀즈(Samuel J. Mills)를 중심으로 한 네 명의 대학생들이 세계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 운동이 프린스톤 대학으로 번져나가서 프린스톤 해외선교회(PFMF)로 발전했고, 거기서 유명한 프린스톤 선언이 나왔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허락하신다면 아래 서명한 우리는 기꺼이 자원하여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세계의 어느 곳이든 나아갈 것을 선언한다." 이 운동은 다시 그 유명한 SVM(The Sudent Volunteer Movement)운동으로 발전했습니다. 이들은 "우리 세대에 세계를 복음화 시키자!(The Evangelization of the World in this Generation!)"는 슬로건을 걸고 하나님의 선교에 헌신했습니다. SVM에서 1970년까지 전 세계 선교사의 70%를 충당했고, 선교 자원의 75%를 충당했습니다.

이번에 파라과이로 가는 단기선교사들은 "지구 위에 십자가가 그려진 로고 밑에 Our Filed is the World"라고 새겨진 티셔츠를 입습니다. 윌리암스 대학에 가면 건초더미 운동을 기념하는 탑이 있습니다. 탑 위에는 둥근 공같은 지구를 받치는 조각이 있고, 그 밑에는 사무엘 밀즈를 비롯한 네 친구들이 이름이 새겨 있습니다. 지구 밑에는 "The Field is the World"라고 새겨 있습니다. 저는 그 말을 조금 바꾸어서 "Our Field is the World"라는 말을 우리 단기선교팀의 슬로건으로 만들었습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1885년에 우리나라에 왔던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선교사 아펠셀러(Henry G.Appenzeller) 선교사도 이 운동에서 영향을 받은 사람입니다. 1883년 커네티컷(Connecticut) 주(州))의 하트포드(Hartford)에서 열린 전국 신학생대회(The American Inter-Seminary Alliance)에 언더우드는 뉴브룬스위크(New Brunswick) 신학교 대표로, 아펜셀러는 드류(Drew) 신학교 대표로 대회에 참석했습니다. 그 대회 마지막에 알버트 올트만스 (Albert Oltmans) 목사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지금 조선은 천 삼백만 민족이 복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 가난과 질병과 학대 속에서 쓰러져 가고 있습니다. 그 나라가 드디어 작년에 나라 문을 열었습니다. 주님은 여러분 중에 누군가가 조선 민족을 위해 선교사로 가기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날, 이상하게도 아무도 헌신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언더우드를 부르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 왜 아무도 헌신하지 않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언더우드, 왜 너는 안 된다고 하느냐?" "저는 인도로 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계속해서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왜 너는 안 된다고 하느냐?" 언더우드는 마침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렇다, 왜 나는 안 된다고 하는가? 주님, 주님이 원하시면 제가 조선으로 가겠습니다." 언더우드와 아펜셀러는 20대 후반과 30대의 황금기를 조선을 위해서 바쳤습니다. 그리고 조선의 운명은 바뀌었습니다.

그 누가 알겠습니까? 파라과이 선교사로 파송 받는 여러분이 만나는 어린이 한 사람, 원주민 한 사람이 여러분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어떻게 변화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리고,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그 나라의 운명이 어떻게 바뀔지 누가 알겠습니까? 여러분이 파송될 파라과이는 면적이 우리나라의 네 배이고, 브라질.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3국에 둘러싸인 나라입니다. 1811년에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했고, 전 국민의 97%가 카톨릭입니다. 그 나라는 카톨릭이 국교입니다. 그러나, 제가 비슷한 환경인 코스타 리카를 가 봐서 압니다. 말이 카톨릭이지 샤마니즘화 된 카톨릭입니다. 집집마다 성경은 신주처럼 모셔 놓았지만, 그 속에 무슨 말씀이 들었는지 모릅니다. 파라과이는 일인당 국민 소득이 4,900불인, 목축을 주 산업으로 하는 가난한 나라입니다.

이번에 파송 받는 단기 선교사들은 비록 10일 남짓한 짧은 기간이지만, 그 기간 동안에 그 나라를 완전히 가슴이 품으십시오. 지구 상에 많은 나라 중에 한 나라를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품는다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인지 모릅니다. 그 나라를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품고 여러분에게 주어진 사명과 책임을 완수하고 돌아 오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뒤에는 여러분을 파송한 이 교회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여러분이 돌아 올 때까지 기도로 도울 것입니다.


출처 : 행복†충전소
글쓴이 : 행복충전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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