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바르트의 선교관
이해안에 있는 이방성을 주목하고 밖을 향한 선교론
손형권/
I. Bonn시기(1930-35)의 선교이해
1. 안셀름 연구(1931)
바르트의 안셀름 연구는 안셀름의 입을 빌린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신학방법론 연구이다. 이곳에서 바르트는 오직 이성에 의지해 불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시킬 가능성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먼저 말해져야 할 것이 안셀름 혹은 안셀름의 입을 빌린 바르트가 불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존재를 오직 이성에 의해서만 입증시키기 위해 그들이 있는 장소를 찾아가 그들과 함께 스크럼을 짜고 비당파성이란 우산을 쓰고 오직 순수이성에 의존해 기독교 인식을 재구성하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바르트에게 있어서 증명은 무엇인가? 바르트는 우선 기독교 진리의 사실성을 전제하고 있다. ‘오직(sola) 이성’은 ‘이성 혼자서(solitaria)’를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이 존재하시며 그분이 지고의 존재이시고 삼위일체시고 사람이 되셨음 등의 사실(daß)를 참되다 전제한 후 벧전 3:15절이 말하는 해명(Rechenschaftsablage)을 구한다. 즉 얼마나(inwiefern) 그 사실이 참되나 하는 것을 연구한다.
이때 바르트는 연구되어야 할 신앙명제를 변수 x로 놓고 다른 신앙명제를 상수 a, b, c로 삼아 이 상수들과 변수의 관계를 밝힘으로 변수를 해명한다. 이것이 바르트가 말하는 이성만을 사용한 intelligere(연구, 신학)의 방법이다. 다시 말해 바르트는 신앙명제들의 정합성(Folgerichtigkeit)을 구한다. 이것이 바르트가 말하는 신학함이요, 이 신학함의 절정에 안셀름이 추구한 증명이 있다고 본다.
따라서 바르트에게 있어서 증명과 신학함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추구되어야 할 별개의 행위가 아니다. 신학함이 충분히 이루어져 신앙명제간의 완전한 정합성을 보일 수 있게 되면 그것이 또한 동시에 증명함이 되게 된다.
안셀름이 프로스로기온에서 신존재를 증명할 때 그는 모노로기온에서와는 달리 대화(Dialog)의 상대자를 분명히 상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 상대자는 우선 이방인이 아니라 안셀름이 속한 베네딕트 수도원의 신학자들이다. 그의 대적자로 등장한 보소나 가우닐로도 안셀름의 증명방식의 문제점을 지적했지 신앙명제의 사실성 자체를 부인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안셀름이 이들과 대화할 때 자신의 주교의 자리를 떠나 대화를 위해 그들에게 갈 필요가 없었다. 그들이 안셀름에게 와서 불신자들을 대변하며 함께 이성을 사용해 거침없이 토론한다. 다시 말해 신앙명제의 사실성 여부가 그들 모두에게 있어서 토론의 전제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 모두는 교회의 지붕 아래서 토론한다.
그런데 한편 안셀름은 이런 대적자 외에도 신앙명제의 사실성 자체를 부정하는 이방인들을 또한 그의 증명함에 있어서 고려하고 있다. 만일 이들에게 신앙의 명제를 증명하려면 안셀름이 가우닐로나 보소와 했던 것과는 달리 그의 주교의 자리를 떠나 그들의 자리로 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바로 여기에 바르트가 생각하는 안셀름 증명의 특징이 있다. 안셀름은 이 경우도 가우닐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의 주교의 보좌를 벗어나 신앙명제의 사실성을 문제 삼을 어떤 중립적인 자리로 향할 의사가 전혀 없다. 그렇다면 이런 안셀름이 어떻게 신앙명제의 사실여부 자체를 문제 삼는 이방인들에게 증명이 되겠는가?
바르트에 의하면 안셀름은 이방인들에게 신앙명제의 사실여부를 결코 증명할 수 없다. 신앙명제의 사실여부는 신앙명제에 있는 진리성이 스스로를 입증해야할 문제이지 안셀름이 대신해 줄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런 안셀름에게 있어서 이방인들에게도 합당한 증명이란 무엇인가? 바르트는 이방인이 신앙명제의 사실성 여부뿐 아니라 그 정합성을 알지 못해서도 충분히 곤란을 겪고 있다고 본다.
다시말해 전체의 진리를 알지 못하니 그 부분진리들이 서로 상충되어 보이며 또 이들 스스로도 이 문제를 해결할 입장이 아니게 된다. 따라서 그들은 안셀름의 ‘믿기에 신학한다’ 대신에 믿기 위해 먼저 신학 함을 필요로 한다. 물론 이때도 안셀름이 그의 신학을 통해 이방인에게 믿음을 공급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철저하게 신앙명제 자체가 할 일이다) 이 부분진리와 연관된 곤란함에 대해 전적으로 무능하지 않고 인간적인 도움을 배풀 수 있다.
이것이 안셀름이 이방인들에게 공급할 수 있는 증명이다. 따라서 이때에도 이런 증명에 대해서는 안셀름이 자신의 주교의 보좌를 떠날 필요가 없다. 이방인들은 그들의 신앙명제 자체에 대한 의심을 잠시 뒤로 남겨두고 (즉 판단중지하고) 부분진리의 무모순성에 대해 안셀름에게 배울 수 있다.
이리해 안셀름은 그의 신학함에 이방인을 단순히 동반시키며 이것이야 말로 그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최상의 선물이며 증명이라 보았다. 안으로의 증명이 밖으로의 증명이다. 이런 좁은 의미에서의 증명을 안셀름이 추구한다면 그는 이방인들이 신앙명제의 사실성에 대한 믿음으로 가는 가운데 만나는 심연을 너무 가볍게 생각한 것은 아닌가? 그것은 아마도 신학함이 안셀름에게 설교처럼 선포의 행위였기 때문일 것이다. 선포에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신뢰가 선포의 처음이자 마지막 전제가 된다. 선포에서는 죄인의 죄성과 심연의 깊음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신뢰가 요구된다.
2. 베를린 선교강연(1932)
바르트는 그의 선교 강연을 먼저 선교라는 개념을 규정하면서 시작한다. 바르트에 의하면 선교는 복음을 세례 받지 않은 자들 즉 이방인들에게 전파하는 교회의 사역이다. 이런 선교에 대한 정의는 너무나 평이해 바르트만의 독특한 선교이해를 구하는 이들을 실망스럽게 한다. 그러나 바르트다움은 이어지는 ‘어떻게 선교를 할 것인가’하는 질문에서 두드러진다. 그리고 이 ‘어떻게’와 관련해 안셀름 연구에서 제시했던 ‘안으로의 증명이 밖으로의 증명이다’는 테마가 다시금 반복된다.
바르트는 20세기의 종교개혁가답게 먼저 교회 안에 있는 이방성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 밖이 또한 안에도 있다. 이 이방인이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교회 안에도 또한 잔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교회 자신도 이방인들의 교회, 죄인과 세리들의 교회이며 앞으로도 그런 교회일 것이다” 따라서 선교는 교회가 그 지체들에게 하던 것의 연장일 뿐이다.
이 ‘연장’이라는 개념은 선교가 그 청자가 이방인이란 사실을 고려해 선교만의 특수한 방식을 취할 것을 거절한다. 선교설교는 그 스스로가 먼저 말한 것에 접속되지 그곳에 이미 있는 어떤 것과도 접속하지 않는다. 국회식이 아니라 받아쓰기 식으로 선포된다.
그곳에 이미 있던 것의 개발이 아니라 무에서의 창조다. 병자에게 쾌유를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에게 부활을 선포한다. 선교에서 교회는 그들의 지성소를 제거하는 일을 감행한다. 그들을 그들의 기존 지식과 모순되는 결단 앞에 세우기를 감행한다. 모든 이성적인 사람들이 조그만 다리를 만들면 도움이 되겠다고 말하는 자리에, 그리고 어떤 다리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자리에서 건너뛰기를 감행한다.
바르트는 이런 감행의 근거를 예수의 주님되심에서 찾는다. 선교강연과 같은 해에 출판된 교회교의학 I/1 ‘하나님 말씀론’에서 바르트는 ‘계시’에서 하나님의 자유를 본다. 하나님의 계시는 계시 밖에 있는 더 큰 진리와 현실성에 의지하지 않고 자기 근거적이다. 하나님은 계시의 현실성과 진리성을 자신안에서 정초하신다. 이런 존재론적, 인식론적 주권이 계시에서 드러났다. 따라서 바르트는 이런 계시 개념을 “하나님은 자신을 주님으로 계시하신다”라고 요약하며 이것을 삼위일체론의 뿌리로 삼는다.
이런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그것은 인간의 인식 가능성을 전제하지 않고 오히려 선포되면서 그 인식 가능성을 함께 제공한다(I/1 201). 인간의 말은 발화될 때 말로만 그치고 그 말에 상응하는 사건이 결여할 때가 많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이면서 동시에 다스리는 힘(Regierungsgewalt)이시다(I/1 155). 즉 하나님의 말씀이 들릴 때 청자는 벌써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놓인다. 한편 이 관계가 하나님 말씀과 한 개인뿐 아니라 하나님 말씀과 세상의 관계에서도 유효하다.
하나님이 교회에만 알려지고, 세상은 하나님과 무관하게 자기의 법칙을 따르고 있고, 그리해 교회를 통해서만 비로소 세상에 하나님의 일이 주입되는 것이 아니다. 계시에서 본다면 세상이 결정적 변화위에 있다고 말해야 한다. 타락에도 남은 하나님과 세상의 관계의 힘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가 말하기 전에 벌써 세상에서 말하고 있다. 따라서 세상이 계시에 대해 중립적이지 않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의 소식이 처음 들린 곳이지 마지막으로 들린 곳이 아니다. (I/1 161)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 말씀의 힘을 중시해야지, 세상의 비신성을 중시하면 안 된다.
이런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을 말하며 바르트는 “예수가 교회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벌써 주님 되심을 이 주권을 고백하면서 안과 밖의 연대(Solidarität)를 실천하는 것이 선교라는 특수한 행위다”고 답변한다.
3. 종교이해
계시로부터 고찰할 때 세상의 종교들, 세계관들, 심지어 기독교도 불신앙이다. 가치평가로 오해돼서는 안 될 바르트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종교는 불신앙이다. 종교는 하나님 없는 사람들의 일거리이다”(I/2 324). 종교는 불신앙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계시는 하나님의 자기드러냄(Selbstenthüllung)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홀로만이 계시에 있어서 능동적인 분이시다. 인간의 무신성이 하나님을 자신으로부터 인식하려 시도하는데서 드러난다. 이런 노력은 하나님의 자기계시라는 측면에서 보았을 때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반역’이다. 사람들은 이런 노력을 통해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려 하지만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허구, 허상, 결국은 우상과 관계하게 된다.
한편 바르트에 의하면 사람들이 계시에 대해 믿음으로 응답하는 곳에 ‘참 종교’가 있다. 그러나 이때 ‘참’이란 술어는 종교에 내재하는 가능성이 아니다. 하나님 자신이 그분의 자유한 은총가운데 종교에게 이 가능성을 열어주신다. 하나님의 사역을 통해 종교는 참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이 사역을 믿으며 신자는 다음 신앙명제를 고백한다: 기독교는 참 종교이다(I/2 357). 이때도 기독교가 다시금 불신앙 즉 종교로 타락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따라서 ‘참’ 종교라는 개념은 칭의론과 밀접한 관련성 속에서만 말해질 수 있다.
이 17절에 의하면 여러 종교들과 세계관들 사이에 어떤 변별도 기대할 수 없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진 것이며, 계시에 상응하는 추인이나 순종 없이 자기로부터 하나님께로 나아가려는 시도이다.
정리해본다: 1)바르트가 계시를 하나님의 자기계시로 파악하고 이리해 계시를 삼위일체론적으로 정초하는 동안에, 하나님 한분만이 이 사건의 모든 영역의 주어로 남으신다. 2)하나님밖에 그분의 계시에 간섭할 어떤 가능성과 현실성도 없다. 3)따라서 과연 계시가 그 침전물(Niederschlag)을 경험 속에 남기는 것은 사실이지만, 역으로 인간의 경험은 계시에 대해 아무것도 아니다. 4)따라서 타종교들의 종교체험과 그 침전물들(상징 제의 등)은 계시에 대해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며, 세상종교들의 계시들은 불신앙일 뿐이다.
바르트는 후일 이런 주장의 협소함을 감지했고 그리스도 중심적인 관점에서 성서와 교회 밖의 영역에 있는 진리들의 가치를 인정하려 시도했다.
II. 화해론의 선교이해
1. 빛들의 교의(Lichterlehre)
1938년 간행된 교의학 I/2에서 바르트는 종교를 불신앙으로 정의했다. 바르트는 이곳에서의 입장의 과격성을 후일 완화시키는데 이것이 화해론 IV/3에서 이루어 졌다. 바르트는 이곳에서 교회밖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비정규적 자기증언에 대해 말한다.
바르트는 ‘생명의 빛’이란 항목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다양한 종류의 자기증언을 구별한다. 이곳에서 그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유일한 빛이심을 강조한다. 그분 곁에 다른 두 번째 빛이 없다. 이것은 신자들에게 한편으로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증언을 신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다른 한편 겸손과 순종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유일한 말씀으로 증언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유일무이한 말씀은 일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러나 또한 증인들 즉 선지자와 사도들의 말들과 고지 속에서 자신을 알리시며 이들을 통해 성서 안에서 중재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직접적 증언이다. 한편 교회의 선포는 간접적 증언이다.
이것을 넘어서 바르트는 성서 밖의, 교회 밖의 참 말들에 대해 언급한다. 이런 말들을 생각해야 하는 근거는 “기독교인이 부활하신 이를 증언해야 한다”는데 있다. 그런데 이 부활하신 이에게 만물이 주어져 있고 그분의 권세는 전 우주로 뻗어져 있다. 그분은 그 자유하심 가운데 교회라는 작은 영역에 매여 있지 않다. 따라서 교회는 교회밖에 있는 참된 말들에서 그분을 만날 것을 고려해야 한다.
그런데 이 교회 밖에서 만나게 되는 참된 말들은 그 진리성을 자신 안에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가지고 있다. 밖의 빛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한 빛을 반사한다. 즉 빛들은 존재론적으로 이 한 빛을 통해 정초된다. 말들의 진리성은 하나님이 그것들이 참되게 규정하는데 달려있다. 그들은 성서의 말씀을 지나치게 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내용적으로 성서의 말씀과 일치해야 하며 성서의 증언을 특정한 상황 속에서 새로운 빛 안에서 조명해야 하며, 힘 있게 해야 하며, 이리해 더 깊이 있게 성서로 가게 해야 한다. 빛들이 성서와 상이한 점은 다음에 있다: 빛들이 성서의 통일성 항상성 완결성을 제시하지 않는다는 것. 왜냐하면 한편으로 말들은 특정시간 특정 장소에서 교회를 향하며, 다른 한편 말들은 통상적으로 전 공동체로부터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들이 밖에서 오기 때문에 교회 내에서는 늘 논쟁거리가 된다. 그리해 교회의 일각에서만 이해되고 영감을 줄 뿐이다.
(선지와 사도 그리고 성서안의 직접 증언과 교회의 선포를 통한 간접증언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정규적 자기증언 곁에, (교회 밖의 세상에서 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비정규적 증언 곁에 제 3의 말의 영역 즉 하나님의 피조물인 우주가 있다. 그런데 창조의 말들 진리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말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세상의 자신과의 협약이 문제된다. 창조영역의 빛들은 질서를 고지하면서 방향감각(Orientierung)을 준다.
이것 또한 어둠속에서 분명할 밝음을 창출한다. 이 빛들은 한분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계시와 과연 같지는 않으나 이 계시와 전혀 무관하지도 않다. 이 빛들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계시에 의해 문제시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이 계시에 통합되고 정렬되어야 한다. (IV/3 175)
바르트는 이처럼 빛들의 교의에서 교회영역 밖에 있는 진리에 대해 말하고 비기독교적 세상을 신학적으로 재조명했다. 피조세상의 말씀성에 대해서 우선적으로 말해져야 할 것은 이 영역에서 진리로 만나지는 것은 피조세계의 방향감각(Orientierung)을 섬기는 것이라는 것, 즉 계시가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세상의 언어성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본질적으로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한편 예수그리스도의 비정규적 자기계시에 대한 교의는 다른 종교의 언명들을 혹 그것이 신자들의 믿음을 더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사역한 것이 아니었나 점검해보게 한다는 점에 있어서 17절을 넘어선다. 다시 말해 다른 종교들은 신학적으로 검토되어야 하지 이전처럼 처음부터 거절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것이 타종교 자체를 그 고유성에서 검사하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들 가운데 이따금 그리스도 인식에 상응하고 그 인식을 심화시키는데 도움이 되는 요소가 있는가를 찾아보라는 것이다. 이때 이 언명이 세속문화의 언명인지 아니면 타종교의 언명인지의 구별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이 사실은 바르트에게 있어서 타종교의 특별한 진리요구가 그다지 고려되지 않았음을 말한다.
다음이 바르트의 근본항상성이다: 인간 편에서 하나님의 계시에 조금이라도 간섭(hinzufügen)할 수 없기 때문에 교회 밖에서 발견되고 검토되는 것이 중재적인 가치를 가질 수 없다. 따라서 타종교의 언어 상징 제의는 즉자적으로는 계시의 표현이 될 수 없다. 다만 계시의 한조각 계기가 될 뿐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는 제 3의 수단을 인정하는 것, 그리해 다른 종교들로부터 배우는 가능성은 바르트의 계시이해로부터 불가능하다.
2. 증인개념
바르트는 선교를 ‘예수 그리스도의 선지자적 사역을 뒤따르는 섬김’(IV/3 S952)으로 이해한다.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총 속에서 결의되고 수행된 세상과의 화해는 또한 인식론적 차원을 갖는다. (IV/3 693f)
예수 그리스도는 한번은 낮아지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대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면서 모든 인간을 대신해 그들의 칭의가 되셨고, 다시 한 번은 높아진 사람의 아들로서 왕의 직무를 수행해 모든 인간을 대신해 그들 모두의 성화가 되셨으며 이 양자 모두를 유일회적으로 완성하셨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그분이 유일회적으로 행하신 이 두 가지 사역에서 머무르지 않으셨다. 그분은 또한 제사장과 왕으로서의 그분의 존재와 사역에 대한 선포자이시다. (IV/3 694)
즉 그분은 그분 안에서 가까워온 하나님 나라의 선지자이시다. 그분이 왕과 제사장의 직임을 행하실 때 그분은 철저하게 배타적으로 홀로 이 일을 행하셨다. 따라서 그분의 이 왕과 제사장으로서의 직무에는 인간 편에서의 아주 조그마한 보조조차 허용될 여지가 없다. (IV/3 693)
이 부분에 있어서 교회가 동참을 시도한다면 그것은 교회의 죄악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되고 그분의 수난에서 수행된 세상과 기독인을 위한 이 사역과 관련해 우리들은 늘 수동적으로만 참여할 수 있다. 즉 그분에 대한 순수한 믿음과 그분에 대한 순전한 사랑과 그분에 대한 온전한 소망 속에서 그 사역에 동참하게 된다. 그러나 이제 그분이 선지사역을 수행하실 때 그분은 더 이상 홀로이고자 하지 않으신다. (IV/3 695) 그분은 먼저 그리스도인을 증인으로 부르신다.
그리스도인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어떤 특정한 실존형식으로 부름 받았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림 아래에 있다. 이리해 그는 여타 다른 사람들과 다른 특별한 사람으로서 즉 하나님과 아주 가깝게, 즉 하나님의 자녀로 존재한다. 이런 하나님 가까움을 통해 신자들은 하나님의 유비로 살라고 부름 받는다.
예수께 속함을 알면서 그리고 하나님 곁에 머물면서 신자들은 (하나님의 의지에 따르면 결국 모든 인간의 존재형태가 되어야 할) 예수 그리스도의 유비로서의 존재를 선취한다. 바르트는 이때 신자와 하나님의 참된 동일성과 참된 상이성을 특징짓기 위해 이 유비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IV/3 612)
그렇다면 유비가 어디에 있는가? 바르트는 그리스도와 그를 뒤따르는 사람들 사이에 세 가지 유비를 제시한다. 첫 번째 유비는 그들의 존재의 외향적 성격이다. 그리스도는 그분은 중보자로서 자신에 대해 내향적으로만 존재하지 않으시고 그분의 선지사역 가운데 신자들을 부르시면서 외향적으로 존재하시며 그러는 가운데도 온전히 그분 자신이시다. 따라서 신자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내향적일 뿐 아니라 외향적으로도 존재해야 하며 이리해 그들의 인간성이 진정한 인간성으로 각성하게 된다. (IV/3 629)
이 외향성의 의미가 기독인의 실존의 중심이 그가 부름 받을 때 받은 ‘과제’에 있다는 바르트의 말에서 잘 드러난다. 신자는 그의 구원소유를 사적으로 즐기도록 부름 받은 것이 아니고 특정한 기능 즉 증인의 사역을 하도록 부름 받았다. 이런 기능 속에서 기독인의 존재가 성취된다. 이 기능에 그리스도와 신자의 두 번째 유비가 있다.
바르트가 지금까지 형식적으로 증인의 기능으로 묘사했던 것의 내용이 그가 그리스도와 신자의 관계를 ‘행위 공동체’로 이해하는 곳에서 드러난다. 이 행위는 특정한 출구와 특정한 목적을 통해 특징지워진다. 이러한 그들 행위의 공통되는 방향설정에 세 번째 유비가 있다. 기독인들 사역의 출구는 하나님의 의지와 사역이며 목적지는 세상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신자는 증인으로 살며 그들이 하나님의 의지와 사역으로부터 존재할 때 참 기독인의 존재를 살게 된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구원의지의 대상이며 따라서 그들이 세상을 향할 때 이를 통해 결국 하나님을 향해 사는 것이 된다.
3. 선교공동체로서의 교회공동체
교회의 파송에서 증인사역이 집단적으로 대변된다. 선지사역을 수행하실 때 그분은 당신의 증언을 위해 부르시고 세우시고 파송한 교회공동체와 함께 하신다. (IV/3 952) 교회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선지사역에 동참하기 위해 부름 받은 존재이다. (IV/3 692) 이 그리스도의 선지 사역에 동참함이 교회공동체의 선교행위의 핵심이다. (IV/3 695)
교회 공동체는 이 과제 외에 다른 어떤 과제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스도 사역에 동참함 즉 파송이 교회의 유일무이한 과제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를 위해 교회를 세우셨기 때문이다. 이 과제가 교회를 구성한다. 교회공동체는 먼저 존재하다가 이 과제를 추가적으로 얻은 것이 아니다. 교회는 이 과제 없이 존재할 수 없다. 과제가 교회존재의 중심과 지평을 형성한다. 교회는 이 과제를 붙잡을 때, 아니 역으로 이 과제가 교회공동체를 붙잡을 때 그때 존재한다. (IV/3 910) 이것이 교회 공동체가 선교공동체라는 뜻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특정한 사람들을 그분의 증인 공동체로 부르셨을 때 이것은 우연이거나 혹은 하나님의 임의가 아니다. (IV/3 862) 교회공동체는 하나님의 영원한 은총예정에서 세상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세상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부르도록 세상으로부터 선택되었다. (II/2 217) 이런 깊이에서 교회 공동체는 과제를 받으며 선교공동체이게 된다. 교회는 선교공동체이기 위해 선교행위를 결단할 필요가 없다. 교회는 처음부터 선교공동체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더 이상 기독교 공동체일 수 없다. (III/3 74)
한편 교회공동체가 그리스도의 선지사역에 동참하면서 그 존재로 불리워질 때 교회 공동체는 스스로 선지적 특성을 갖는다. (IV/3 909) 그런데 교회의 선지 사역은 그분과 다르다. (IV/3 695) 교회 공동체가 이런 동참을 통해 제2의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 아니다. (IV/3 907) 그분 홀로 그분의 선지 사역에 있어서 본래적이고 일차적인 증인이시다. (IV/3 694) 교회공동체 자체는 계시의 힘이 없다. 교회의 동참은 주님의 그것의 반복이나 확장이나 연장이 아니다. (IV/3 878)
교회가 동참하는 가운데서도 그분의 선지 사역은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그분의 선지 사역이 교회 공동체의 선지사역의 전제가 된다. 교회의 사역은 그분의 것과 비교해 훨씬 아래쪽에 위치하며 예수께서 먼저 증언하는 것에 대한 이차적 증언이다. (IV/3 559)
이 동참을 실행하면서 교회공동체는 세상을 향한다. 그리스도의 선지사역이 교회를 위해서만이 아니고 온 세상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이 세상을 위해 존재하신다. 그리고 예수의 교회가 먼저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위해 존재할 때, 교회에게는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그들의 장소에서 세상을 위해 존재하는 것 말고 다른 것은 없다. 교회는 추가적으로가 아니라 그들의 근원에서 본질적으로, 정의상 세상을 위해 부름 받았다. (IV/3 873)
그들의 증언은 또한 그들 자신의 지체를 향해져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는 또한 인간적 피조물이며 그리해 세상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들이 세상을 위해 존재하면서 스스로를 위해서도 존재한다. 그런데 이 내적인 차원이 자기 목적이 되면 안된다. (IV/3 954) 교회의 과제는 자기 자신의 존재의 질화 고화 심화 풍성케 함으로 끝나서는 안된다. 밖을 향한 과제의 수행을 위해 교회는 안을 향해 그들의 지체를 향해 증언을 해야 한다. (IV/3 954)
III. 맺음말
30년대 개신교 선교학은 바르트의 신학을 대체적으로 비판적으로 접근하였다. 그들은 바르트 신학을 통해 선교사역에 마비가 올 것을 두려워했다. 바르트는 그의 위기의 신학으로 인간의 모든 행위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표명했고, 이것이 선교 관계자들의 염려를 불러일으켰다. 1932년 Siegfried Knak은 작은 논문에서 바르트 신학에 선교에 대한 충분한 동기와 정초가 있지만 그것이 실천에 있어서 ‘선교행위(Missionstat)’를 만들어 내지 못함을 비판하였다. 인간 행위에 대한 비판적 시각 때문에 “변증법 신학 추종자들이 선교를 절름발이 의지로 만난다”
이런 초기의 평가는 그 이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하다. 그 이후 바르트의 선교이해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거의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이 이 사실을 반증한다. 그러나 비록 본 시절에 말한 ‘안으로의 선교가 밖으로의 선교다’는 개념이 그다지 호응을 얻지는 못했지만, 베를린 선교강연에서 시작하고 화해론의 교회의 파송에서 구체화된 Missio Dei라는 개념은 선교 관계자들에게 많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런데 오늘날은 역설적으로 Missio Dei가 아니라 ‘안으로의 선교가 밖으로의 선교’라는 개념 때문에 바르트가 다시 관심을 끌고 있다. 신자들을 잃어가고 있는 유럽 교회들은 자기 안에 있는 이방성을 주목하고 이들을 향해 밖을 향한 선교사적 자세로 임할 것을 주장하는 바르트에게 문제해결의 지혜를 구하고 있다.
|손형곤 목사는 서울대철학과, 장신대대학원, 독일뮌스터대학원에서 바르트선교론에 대해서 연구했다. 이 글은 서장(서울대 장신대)모임에서 발표된 글입니다.
| 출처:중국선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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