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 아니라 비전을 성취하라
김영남 목사(WMTC 원장)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을 사는 동안 꿈을 성취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자신의 인생을 통해 무언가 성취하고자 하는 강한 열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도 우리는 자주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에 대해 궁금해 하며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버리지 못한다. 그러나 진정한 헌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우주적인 계획과 비전이 성취되도록 자신을 드리는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질문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내가 할 일은 무엇인가?’ 내가 원하는 것이나 계획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바로 비전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미 각각의 그리스도인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시는 놀라운 계획이 있다. 이것을 아는 것이 비전의 확인이며, 이것을 이루는 것이 비전의 성취이다.
온전히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가 가져야할 기본적인 자세는 무엇인가? 먼저 성공이 아니라 의미를 위해 살라고 조언하고 싶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로 자신에게 유익하던 것을 그리스도를 위해 다 해로 여겼다(빌3:7). 그의 인생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그는 인생 전체를 망라한 결정을 내린 것이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인생을 바꾼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관한 사실이 바울의 인생을 변화시켰다. 솔로몬의 전도서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라고 고백한다. 헛되다는 것은 잡은 줄 알고 있지만 손을 펴보면 안개처럼 사라진 상태를 의미한다. 그가 누린 부귀영화, 쾌락, 지식, 성취, 명성 그 어떤 것도 인생을 “의미”있게 하는데 소용이 없었다는 것이다. 혹시 우리가 추구하는 성공이 그런 것은 아닌가? 리차드 포스터는 ‘돈, 섹스, 권력’이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혹시 우리의 성공의 기준이 여기에 있지 않는가?
‘성공’보다는 ‘의미’를 추구해야 한다. 어거스틴은 ‘무엇을 얻을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남길 것인가를 생각할 때에 비로소 성인이다’라고 했다. 언젠가 우리의 삶에서 ‘이게 전부 일까?’혹은 ‘이런 식으로 더 이상 살 수는 없다.’라고 고백하기 전에 다시 의미를 추구하는 삶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그냥 온 인생이 아니다. 인생에는 책임이 있다. 하나님의 계획을 알자. 우리가 계획하고 하나님의 승인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 대한 계획이 무엇인지 알고, 성취하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붙잡아 매어둘 수 없는 순례자, 주인이 아니라 청지기, 방심할 수 없는 군인’이다. 우리가 목회자나 선교사가 되는 것 뿐 아니라 어떤 직업을 갖더라도 ‘하나님 나라’를 인생의 의미로 삼아야 한다.
온전한 비전의 성취를 위해 세상이 아니라 복음을 위해 살라고 격려하고자 한다.
세상에서의 성취도 가치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위한 성취가 진정한 성공이다. 프란시스 사비에르는 젊은이들에게 ‘당신의 사소한 야망을 포기하라’고 했다. 복음 전도에 대한 성경 전체의 명령은 순종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기도는 여전히 맴돈다. ‘주님 제가 여기 있겠나이다, 저 친구를 보내소서’라고 말이다. 로버트 멕퀼킨의 책 ‘지상명령 성취, 왜 지연되는가?(The great Omission)’의 서론에 보면 선교 강의에서 이 세상 사람의 반 수이상이 복음을 듣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극소수의 교회와 그리스도인 만이 복음을 전하려고 시도하고 있다고 지적에 대해 한 학생이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장면이 나온다. 그는 대답하기를 ‘매우 좋은 질문입니다. 나는 날마다 그 질문을 하는 한 분을 압니다’라고 했다, ‘그가 누구인가?’ 하는 질문에 맥퀼킨은 하늘을 가르켰다.
그가 제시한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① 사람들이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다
② 선교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③ 어떤 다른 길이 있다고 생각한다
④ 기도가 주변적이다
⑤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수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단 한번도 복음을 듣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누군가 복음을 전해줄 사람을 그들은 오늘도 기다린다! 구원받은 인간의 축복이 놀랍고 아름다운 것처럼 영원한 형벌에 처할 죄인의 운명도 너무나 끔찍하고 가혹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잘못은 불신자들에 대한 무관심이다.
미국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였던 아도니람 저드슨은 버마에서 선교사로 사역했다. 그의 인생은 아주 적은 수의 회심자를 얻고 고통과 박해를 받은 것으로 일관되었다. 만일 선교사로 영광과 위대함을 기대한다면 우리는 실족할 것이다. 그러나 아도니람 저드슨이 거기 머무르며 일생을 다 허비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세속적인 성공보다 복음에 헌신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복음을 위해 살라!
마지막으로 오늘의 젊은이들에게 현재가 아니라 영원을 위해 살라고 말해주고 싶다.
짐 엘리엇은 1956년에 에쿠아도르의 아우카 부족에게 선교하러 갔다가 순교한 사람인데, 그가 이런 말을 남겼다. ‘영원히 놓을 수 없는 것을 위하여 끝까지 잡을 수 없는 것을 포기하는 것은 결코 어리석은 것이 아니다.’ 자신의 과거의 업적 때문에 혹은 실패 때문에 안심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수고를 줄이지 않고, 쉬지도 말고 마지막 피치를 올리는 사람들처럼 맹렬히 달려가야 한다. 하나님의 일을 의무로 여기지 말고 특권으로 누려야 한다. 익숙한 것에 매이지 말고, 의지와 상상력, 모험심과 용기를 가지고 비전의 땅을 개척해 나가야 한다. 미국 남침례교회에는 일년에 한번 선교를 위한 특별헌금을 드리는데 ‘라티 문 선교헌금’이라고 한다.
라티 문은 독신으로 1873년 중국 핑투에서 사역했다. 이 여자선교사는 어린이나 돌보라는 당시의 편견을 깨고, 복음전도와 교회개척에 헌신하였다. 1912년 일본 고베에서 72세로 숨지기 전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드려 중국 사람들을 사랑하였다. 그녀는 실제적으로 굶어죽었다. 자신의 양식과 마지막 남은 모든 것을 굶주린 중국 사람들을 위해 주었다. 그녀의 일기에 보면 ‘더 이상 나와 같이 외로운 선교사가 없었으면 좋겠다’고 기록할 정도로 외롭고 힘든 사역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그녀의 헌신은 지금 모든 선교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기억되고 있다. 결코 외롭지 않게...
하벨은 말하기를 ‘사람의 진가는 자기가 원하는 역할을 할 때가 아니라 운명이 부여하는 역할을 할 때이다’라고 했다. 비전을 성취하기 위해 오늘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Just Do it - 당장 그 일을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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