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큐메니칼 운동과 죽어가는 교회
|
교회가 죽어가고 있다. 에큐메니칼 운동을 지향하는 교회들이 죽어가고 있다. 에큐메니칼 운동, 무엇이 문제이기에 그것을 추종하는 교회들이 죽어가고 있는가? 아래의 글은 최덕성 교수(고려신학대학원, 역사신학)가 뉴스앤조이가 주최하는 에큐메니칼 포럼(2006. 3. 16, 대전 새로남교회)에서 발표할 논문이다.
최덕성 (고려신학대학원 교수, 역사신학)
한국교회 안에 증후군처럼 일어나고 있는 교회연합일치운동은 그 북소리가 너무나 강하여 그것이 마치 기독교의 제1계명인 것처럼 여겨지고, 그 행진에 보조를 맞추지 않으면 이단처럼 취급되고, 미지근한 태도를 보이면 진리에 반항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정도이다.
한국교회가 보이고 있는 극심한 분열 상태는 어떤 형태로든 개혁되고 교정되어야 한다. 분파 상태는 효과적인 선교활동을 방해하고 교회의 사회적 신인도(信認度)를 떨어뜨린다.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내적 하나됨은 외적 일치로 드러나는 것이 옳다. 신자들의 친교와 유대는 기독교 생활에 부합하며 소외되거나 선교가 어려운 상황 또는 혹독한 환경에 처한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무적인 힘을 준다. 교회의 연합과 일치는 타교파, 교단을 존중하는 마음을 갖게 한다. 마지막 분단민족 사회에 교회가 하나되는 모범을 보이는 것도 매우 중요하므로 감정의 예각(銳角)을 무디게 하여 조속히 하나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현재 진행되고 있는 한국교회의 연합일치운동은 위험천만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포용주의(Inclusivism), 다원주의(Pluralism), 신앙무차별주의(Indifferentism)로 흐르고 있다. (필자가 말하는 ‘다원주의’는 신학다원주의와 종교다원주의를 수용하는 등 다양한 신학사상들을 교회 안에 공존시키려는 태도를 일컫는다. ‘포용주의’는 정통신학, 자유주의 신학, 바르트주의 등 다양한 현대 신학사조를 수용하고 그러한 사상을 가진 신학자들을 용납, 묵인, 포괄하는 태도를 말한다).
한국교회의 연합일치운동은 종교다원주의를 표방하는 세계교회협의회(WCC) 중심의 현대주의 에큐메니칼 운동과 그 궤(軌)를 같이 한다. ‘교회화합과 일치를 위한 신학을 수립한다’는 미명하에 다양한 신학사상을 포괄할 수 있는 새로운 신학 제조를 모색하고 있다. 유서 깊은 기독교와 자유주의 기독교를 아우르고, 사도적 신앙과 탈사도적 신앙을 동시에 포용하려고 한다.
교회연합일치운동에 앞장서는 사람들은 교회 간의 신학적 차이가 연합과 일치를 거부할 만큼 본질적이고 심각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오늘의 신학이 교리논쟁에서 벗어나 다원화 사회에서 대화를 통해 미래를 내다보는 학문 활동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신학이 복음의 해석 작업이므로 항상 새롭고, 시대와 환경에 따라 다양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한다. ‘신학적 다양성’을 수용하자고 한다. 함께 부름을 입었으므로 홀로 옳음을 주장하거나 남의 소리를 외면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현대주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그리스도의 교회의 생명력을 앗아가고 신앙공동체를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다. 영국·독일·미국·캐나다·호주의 교회들은 교회의 생명력이 신학에 달려 있다는 것과, 교회가 자유주의 신학과 포용주의 태도를 지니고 에큐메니칼 운동을 추종하면 생명력을 잃고 추락하게 된다는 사실을 엄중하게 경고한다. 기독교 신학의 미진한 부분을 창조적으로 보완하고 개선해 나가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신앙고백, 교리, 신학의 정박지(碇泊地)를 버리고 새로운 영혼의 안식처를 찾아 나설 것을 재촉하기 때문이다.
1. 죽어가고 있는 교회
역사신학자 존 리이스(John Leith)는 자신이 속한 미합중국장로교회(PCUSA)가 생명력을 잃었으며, 이대로 가다가는 얼마 가지 않아서 존폐의 위기에 직면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 교회의 최대의 위기는 주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질문하신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에 대한 답변을 신약성경처럼 분명하게 할 수 없다는 점이라고 한다.
리이스는 유니온신학교(리치몬드) 교수로 봉사하다가 은퇴할 무렵에 저술한 『교회의 위기: 신학교육의 재앙』(Crisis in the Church: The Plight of the Theological Education, 1997)에서 미합중국장로교회(PCUSA)가 죽어가고 있는 까닭을 진단한다. 이 교단은 1983년에 북장로교회와 남장로교회가 통합하여 출범했다. 1960년에서 1990년 사이의 북장로교회(UPCUSA)와 남장로교회(PCUS)의 통계를 보면 신자가 4,250,000명에서 2,665,276명으로 줄었다. 성인세례자, 유아세례자, 교회학교 멤버도 거의 절반으로 줄었다. 같은 기간의 미국인의 인구가 196,560,000에서 248,709,873명으로 증가된 것과는 큰 대조를 이룬다.
리이스는 자신이 지켜본 미합중국장로교회의 가장 심각한 위기는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에 대한 고백이 분명하지 않은 점이라고 한다. 이러한 풍토는 지난 몇 십 년 동안 시행해 온 신학교육이 낳은 재앙이라고 한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미합중국장로교회(PCUSA)를 궁지에 몰아넣고 위기를 가져다준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이 배제된 신학교육이다. 프린스턴신학교를 포함한 이 교단의 신학교들의 교육이 진리를 가르치지 않고 신학적으로 분명한 메시지를 제공하지 않는 탓에, 신앙(belief)의 위기와 선교 목적의 혼동(confusion)이 찾아왔다. 포용주의, 다원주의에 바탕을 둔 신학교육이 정통교리를 가르치기 보다는 사회윤리, 사회참여, 인도주의 활동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세상문화와 구별되는 명확한 기독교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다. 교회의 강단에서 복음이 선포되지 않고 있는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미국인들, 특히 젊은 세대의 미국인들이 가장 듣고 싶어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이라고 한다. “신학교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는 복음 선포의 열정을 회복하면, 교회의 부흥은 시작될 것이다”고 한다.
리이스가 말하는 미합중국장로교회의 불행은 1930년대에 발생한 북장로교회의 좌경화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교회연합과 통합운동의 맥락에서 교회가 자유주의 신학을 수용하고 교리보다는 화평을 더 중요하게 여긴 결과로 죽음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 사건을 연구하여 박사학위논문을 쓴 브래들리 롱필드(Bradley Longfield)는 북장로교회와 프린스톤신학교의 좌경화 과정을 “되돌아보면… 확실한 교리적 한계를 분명히 설정하지 않고는 교회의 세속화를 막을 수 없다고 본 메이첸의 지적은 매우 타당하다”고 말한다. 미합중국장로교회의 쇠퇴 원인이 교회가 신학적 다양성을 수용하고, 교리를 중요하게 여긴 메이첸을 배척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롱필드는‘신학적 다양성과 기구의 일치’를 선택한 미합중국장로교회의 비극이 무엇인가를 탐색한 끝에 교회라고 하는 기구의 단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신앙고백의 단일성을 포기한 결과로 생명력을 잃었다고 지적한다. 교회의 분열을 막으려는 궁여지책으로 교회통합·에큐메니칼 운동·화평제일주의를 선택했기 때문에 교회는 반기독교적인 신학을 수용하고, 명확한 신앙고백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상황에 빠져들었다. 믿고 고백하는 것이 불분명해졌으며, 교리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며, 교회일치라는 우상에게 굴복하는 교회가 되었다. 교인 수가 추풍낙엽처럼 감소된 원인은 교회가 신학의 한계를 넓히고 ‘넓은 길’을 선택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오늘날 미국 기독교계에는 ‘분리주의자’로 알려진 정통신학자 그레이스앰 메이첸 박사에 대한 연구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다. 미합중국장로교회가 죽어가고 있는 이유를 학문적으로 규명한 학자들은 한결같이 그 교회가 메이첸을 배척하고 자유주의자들을 수용한 것이라고 말한다. 포용주의와 신앙무차별주의 태도를 그 원인으로 지적한다.
디인 호게(Dean Hoge)는 미합중국장로교회가 직면한 위기는 교회가 엄격한 교리의 통일성을 포기한 것과 1920년대의 신학논쟁에서 진리보다는 기구의 통일성을 선택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교회분열을 피하기 위해 다양한 신학을 수용한 결과라는 것이다. 포용주의, 다원주의를 수용한 미국의 주류 교회들이 한결같이 자신들의 신앙의 본질을 명백하게 밝히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교회가 교리에 대한 모호한 태도를 보이고 폭넓은 선교 개념을 따라 선교활동을 한 것이 정체성을 잃고 죽어가게 된 원인이라고 한다.
존 맥클루어(John McClure)는 20세기 미합중국장로교회의 설교에 대한 연구에서 교회의 포용주의, 다원주의 태도가 교회로 하여금 일관성과 응집력 있는 메시지 전달을 어렵게 만들었다고 한다. 벤톤 존슨(Benton Johnson), 존 물더(John M. Mulder), 리 와트(Lee S. Wyatt), 제임스 무어헤드(James Moorhead), 데이비드 매카시(David McCarthy), 레나드 스위트(Leonard Sweet), 윌리엄 웨스톤(William Weston)도 동일하거나 비슷한 결론을 내린다. 웨이드 루프(Wade Clark Roof)와 윌리엄 매킨니(William McKinney)는 미국의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난 것이 교회가 세속 흐름에 맞서지 않고 주변의 문화와 구별되는 명백한 신학의 경계선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진리를 분명하게 제시하지 않은 탓이라고 한다. 교회의 세속화로 말미암아 신자 가정의 청년들이 비기독교인 미국인답게 자유분방하게 살고자 부모들이 세운 신앙공동체를 떠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미국장로교회가 죽어가기 시작한 것은 불교사원 곁에 교회당을 지어야 할 까닭이 없고, 이슬람권에 기독교 선교사를 파송해야 할 이유가 없으며, ‘하나님의 선교’라고 하는 이름으로 사회참여운동을 선교의 핵심으로 하는 에큐메니칼 운동과 교회통합운동에서 시작되었다.
미국교회의 상황은 유럽교회에 비한 크게 나은 편이다. 리차드 울리(Richard Wooley)는 영국감리교회가 생명력을 상실하고 죽어가고 있는 것과 관련하여, “사람들은 아직 열정과 확신 있는 종교를 찾고 있다. 그들이 믿는 것이 무엇인지, 왜 교회에 나가야 하는가에 대한 분명하고 확실한 대답을 주지 못한 종교를 누가 믿겠는가”라고 말한다. 영국감리교회가 급속히 쇠퇴하는 것은 (1) 자유주의 신학을 수용한 결과로 신학적 정체성을 잃었으며, (2) 기독교 신앙을 가져야 할 분명하고 확실한 이유를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영국감리교회의 김동환 박사가 지적한 바에 따르면 이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분명한 복음 메시지가 없다는 점이다. 영국감리교회의 중심적인 화두(話頭)는 ‘에큐메니칼’과 ‘다원주의’이다. 최대 관심사는 교회가 글로벌 사회에서, 복합적인 종교·문화 배경에서 어떻게 다른 종교와 다른 문화와 함께 어울려서 평화롭게 살아갈 것인가에 있다. ‘복음전도’의 핵심은 타종교와의 대화(dialogue)이다. 기독교와 ‘이웃종교’의 대화에서 복음진리가 발견될 수 있다고 본다. 이것이 영국감리교회의 공식 입장이다.
영국감리교회가 말하는 ‘복음전도’의 핵심인 ‘대화’가 성사되려면 기독교가 참 종교라는 ‘고유한 메시지’를 포기해야 한다. 에큐메니칼 운동과 다원주의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대화’의 성사를 위해 기독교가 배타적이거나 유별난 메시지를 말하지 않아야 한다고 한다. 진리를 전제 없는 ‘대화’ 속에서 찾아야 하는 ‘과정의 생성물’로 본다.
영국감리교회가 겪고 있는 변화와 신학적 흐름은 영국국교회와 독일 루터파교회, 스위스와 네덜란드의 개혁교회가 경험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기독교의 텃밭이었던 유럽의 교회들은 황폐화 되어 최대의 선교대상지로 변모했다. 교회들은 생명력을 잃었고, 강력하게 파고드는 이슬람에 서서히 그 자리를 내어주고 있다. 학자들은 콘스탄티노플(현 이스탄불)의 아름답고 웅장한 하기아소피아교회당처럼, 거미줄 처진 썰렁한 폐광 같은 유럽의 거대한 교회당들의 꼭대기에는 조만간에 십자가가 내려지고 초승달 모양의 이슬람 상징물이 매달릴 것으로 전망한다.
유럽과 미국의 교회들의 급격한 쇠락은 사회의 변화, 사상의 변천, 정치상황, 생활구조의 혁신 측면에서도 논할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신학적인 이유이다. 자유주의 기독교의 강령을 따라 에큐메니칼 운동, 타종교와의 대화를 지향해 왔기 때문이다. 포용주의, 신앙무차별주의(Indifferentism)라는 죽음의 병이 교회의 정체성과 생명력을 앗아갔다.
미국 웨일즈복음주의신학대학교의 학장 데이비스 박사는 웨일즈 부흥운동 전공자이다. 그는 필자에게 자유주의 신학을 수용하는 교회에는 성령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부흥이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중추적인 교리를 부정하는 무리들에게는 성령의 부흥과 갱신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부흥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은 죽어가고 있는 유럽의 교회들이 성령의 부흥의 불길이 임하면 살아날 것이라고 하는 기대가 허황됨을 뜻한다. 예수를 믿어야 할 분명한 까닭을 제시하지 못하는 교회, 자유주의 신학과 에큐메니칼 운동과 종교 간의 대화라는 신학을 포기하고 정통신앙으로 회기하지 않는 한, 교회가 살아날 가망이 없어 보인다.
2. 세계교회협의회와 ‘사도적 신앙’
교회를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는 신학적 흐름은 에큐메니칼 운동을 주도하는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정체성과 무관하지 않다. 이 단체는 장대한 규모와 매혹적인 프로그램들을 가지고 있다. 2005년 1월 현재 그리스정교회와 라틴아메리카의 오순절교회를 포함하여 342개의 교단과 단체들로 구성되어 있다. 로마가톨릭교회, 동방정교회, 프로테스탄트교회의 가시적(可視的) 일치와 친교를 목적으로 삼고, 성만찬을 중심으로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교회’(One, Holy, Catholic and Apostolic Church)를 표방한다.
뉴델리 총회(1961, 제2차)가 채택한 세계교회협의회 헌장은 예수 그리스도와 삼위일체 하나님이 교회일치의 기초라고 말한다. “세계교회협의회는 성서에 따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구원자로 고백하고, 한 하나님, 곧 성부·성자·성령의 영광을 위한 공동의 소명을 함께 성취하고 싶어 하는 교회들의 친교(코이노니아)이다”고 한다. 에큐메니칼 운동의 목표는 “하나의 사도적 신앙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고, 떡을 떼고, 공동의 기도에 참여하고, 인류에 대한 증거와 봉사에 참여하고 공동체적 삶을 살아가면서, 성령으로 하나의 충만한 연합과 친교를 가지는 데 있다”고 한다.
“성서에 따라 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며 구원자다”고 하는 문구는 매우 훌륭해 보인다. 그러나 기독교의 최소한의 신앙고백도 하지 않으며,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도 명확하지 않다. 기독교 에큐메니칼 단체의 신앙고백 문구로는 지나치게 간단하다. 로마가톨릭교회로 하여금 이와 비슷한 것을 표명하라고 하면 훨씬 더 구체적인 고백문을 제시할 것이다. “성서에 따라”는 성경의 영감과 권위에 대한 서술이 아니다. 세계교회협의회를 장악하고 있는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에 대한 높은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 용어를 사용하지만 전혀 다른 개념을 부여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며 구원자이다”는 서술도 자유주의 기독교가 말하는 기독론·신론·구원론을 깔고 있다.
세계교회협의회 산하 신앙과 직제위원회는 1990년에 ‘하나의 신앙고백’(Confessing One Faith)을 채택했다.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신앙’을 언급하며 각 교회와 지역교회가 이러한 신앙을 공유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문건은 ‘에큐메니칼’ 시각으로 해석된 신학, 특히 그러한 유형의 교회관을 담고 있다. 1993년 스페인 산티아고에서 열린 신앙과 직제위원회 제5차 대회는 개 교회와 지역교회의 다양성과 연속성을 말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한(히13:8) 하나님과 구주로 고백할 수 없거나, 성경이 선포하고 사도 공동체가 설교한 구원과 인간의 궁극적 운명에 대해 함께 고백할 수 없는 다양성은 부당하다”고 말하였다. 교회의 통일성은 경전인 성경의 복음진리(갈2:5,14)와 훗날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 안에 제시된 부연된 가르침들 위에 근거해 있다. 이 통일성과 이에 대한 가르침들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기독교인이 아니고, 교회가 아니다. 그러나 성서는 다양성의 기초이다. 성서는 다양한 메시지와 가르침을 제시하고 있다. 이 성서가 기록된 상황들이 다양하고, 이 성서에 대한 접근방법과 해석방법이 다양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고백문과 신앙서술은 액면 그대로 보면 복음주의자들도 환영할 만하다. 세계교회협의회가 사도적 신앙과 성경에 기초한 단체인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그러나 실제는 생각만큼 단순하지 않다. (1) 동일한 용어를 사용하면서도 전혀 다른 신학적 개념을 부여한다. (2) 문건은 문건일 뿐 회원교회·회원단체·구성원들에 대한 규제 기능을 갖고 있지 않다. (3) 이 단체의 방향과 흐름은 위 문건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다. (4) 이 단체의 교리 선언문들은 자체의 실질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5) 이 단체가 신앙고백 중심의 기구가 아니므로 상반된 신학을 가진 회원단체나 개인을 규제하지 않는다. 그렇게 할 의사도 없다. 기독교 신앙의 근본 사항들을 부정하는 자유주의 신학자, 종교혼합주의자, 종교다원주의자들을 포용한다. (6) 오히려 그런 류의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이 단체를 이끌고 있다. (7) 성경의 권위와 기독교의 중추 교리를 공적으로 분명하게 고백하지 않고서도 여전히 이 단체의 회원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세계교회협의회가 ‘사도적 신앙’(One Apostolic Faith)과 삼위일체 하나님 그리고 그리스도를 언급하는 문서를 가지고 있다고 하여 성경적이고 교리적으로 건전한 에큐메니칼 단체로 보는 것은 오판이다.
초대교회의 에큐메니칼 공의회 운동과 세계교회협의회 중심의 에큐메니칼 운동을 동일선상에 두고 전자와 후자를 등등한 관점에서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초대교회의 니케아공의회, 콘스탄티노플공의회, 칼케돈공의회와 같은 에큐메니칼 총회를 세계교회협의회 총회들과 동등한 위치에 둔다. 그러나 고대교회의 에큐메니칼 총회와 세계교회협의회는 그 지향점이 같지 않다. 전자는 ‘교리’ 중심의 총회였다. 하나님의 말씀과 사도들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신앙과 교리를 굳게 다지고 이단을 철저하게 배격했다. 주후 500년 전까지 개최된 에큐메니칼 공의회는 연합 단체의 총회가 아니라 ‘교회’의 총회였다. 교리 작성과 이단 정죄를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말씀·진리·교리에 마음을 열고 이단과 거짓교사의 가르침에 등을 돌린 총회였다.
세계교회협의회 종교간대화위원회[살아있는 신앙인들과의 대화 분과]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범위를 전 세계 종교 간의 대화로 확대시키는 ‘바아르선언문’(Baar Statement, 1990)을 발표했다. 이 선언문은 종교다원주의를 표방하며 ‘기독교 밖에도 구원이 있다’고 공식 선언한다. 유서 깊은 기독교가 고백하고 천명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유일성을 포기하고, 종교다원주의를 공식 표방한 것은 이 단체가 ‘루비콘 강’을 건넜다는 것을 의미한다. 돌이킬 수 없는 곳으로 가버린 것이다.
바아르선언문은 로마가톨릭교회의 바티칸공의회가 1965년에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내용을 담아 반포한 ‘비그리스도에 관한 선언’과 ‘종교자유에 관한 선언’과 맞먹는 획기적인 것이다. 이 선언문의 핵심은 하나님의 임재가 모든 나라와 백성 가운데 항상 존재하듯이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타종교에도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만물 가운데 임재하여 활동하며, 그는 모든 나라와 민족의 하나님이므로, 그의 사랑과 구원의 은혜 또한 전 인류와 종교들을 포용한다고 선언한다.
이 선언문은 하나님의 구원의 신비가 다양한 방식으로 중계되고 매개된다고 한다. 교회 밖의 사람들도 자기의 종교 전통에 따라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그 구원의 섭리 아래 있다. ‘이웃종교’ 신봉자들의 삶과 전통 속에 성령이신 하나님께서 활동하심을 고백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우리는 타종교인들의 세계 속에 현현되는 구원의 신비를 인식하고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그들 가운데 성취하셨고 또 성취하실 일들을 존경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종교 간의 대화는 일방통행로가 아니라 쌍방교차로이다.
바아르선언문이 말하는 ‘대화’는 종교 간의 상호이해나 협력을 위한 의사소통의 차원을 넘어서 기독교가 타종교에 대해 고수해 온 기존의 배타적인 교리와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포기하고 타종교와 진리담론 속에서 진정한 진리를 찾는 노력을 뜻한다. 이처럼 세계교회협의회는 성령 하나님이 타종교 안에서도 구원역사를 펼친다고 본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의 유일절대 조건이라는 유서 깊은 기독교의 구원론을 더 이상 고백하지 않는다는 것을 선언한다.
세계교회협의회는 종교다원주의를 ‘고백’하며 기독교의 유일성을 부정하는 새로운 기독교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 단체를 주도하는 지도자들의 사상에서 아주 명확하게 드러난다. 전 총무 에밀리오 카스트로(Emilio Castro)는 “세계교회협의회의 공식 신학이란 것은 없다. 그런 것이 결코 있을 수도 없다. 우리는 한 교회가 아니다. 심지어 신하 교회 안에도 신학의 다양성이 있다”고 말한다. 전 총무 유진 카슨 블레이크는 “연합된 교회는… 신앙의 신학적 형식들의 광범위한 다양성을 포용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진 마리 틸라드(Jean-Marie Tillard)는 “하나님의 교회는 심지어 가장 놀라운 일치 시대 동안에도 항상 다원적 형태였다. 실천의 차원에서도 교훈의 차원에서도 그러했다”고 한다. 이 단체의 핵심인물 가운데 한 사람인 라이문도 파니카는 에큐메니칼 토론의 목표가 “다양한 기독교 신앙 고백들을 초월하며 또한 내재하는 원리에 보다 더 깊고 충실한 항상 어떤 새로운 일치점에 있다”고 말한다. 세계교회협의회가 주도하는 에큐메니칼 운동이 로마가톨릭교회와의 일치와 종교간의 대화를 넘어서서 종교통합을 추구할 가능성이 엿보인다.
복음주의 선교신학자 피터 바이엘하우스(Peter Beyerhaus)는 한국복음주의협의회(회장 김명혁)의 초대로 서울에서 ‘종교다원주의’에 대해 강연(2004. 11. 12.)했다. 종교혼합주의와 종교다원주의가 흥행하면서 그리스도의 유일성이 부정되고 유서 깊은 기독교가 심각하게 도전당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세계교회협의회에서 행한 정현경 박사의 초혼제(1991), 로마가톨릭 교황청이 이탈리아 아시시에서 개최한 세계종교인평화기도회(1987), 세계교회협의회의 종교 간의 대화 등을 그 사례로 꼽았다. 세계교회협의회의 다원주의적 상대주의(Pluralistic Relativization)는 그리스도에게 상대적인 자격을 부여하고 또 그리스도 밖에도 다른 경배의 대상, 구원의 길이 있음을 인정하며, 혼합주의적 침식(Syncretistic Undermining)이 한 종교가 다른 종교를 정복하기 위해 그 종교에 침투하는 전략으로 나타난다고 말했다. 기독교가 침식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종교혼합주의가 신(新)영지주의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고 지적했다.
바이엘하우스는 적그리스도가 역사적 기독교에서 나온다는 점과 그것이 기독교 신앙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를 ‘대체’한다고 말했다. 모든 종교를 초월하는 단일 정치·사회·경제·문화 체제를 만들려는 움직임을 적그리스도의 출현과 접목시켰다. 혼합주의와 다원주의는 (1) ‘강압적 단일화’를 지향하며, (2) 연합·일치·통합을 양심적으로 반대하는 사람들을 ‘근본주의자로’로 평가절하하며, (3) 근본주의 신앙을 교회와 인류 발전의 적으로 규탄하며, (4) 전통적인 기독교 복음전도와 선교를 근본주의자들의 사역으로, 불법행위로 보고 이를 금하도록 요구한다고 했다.
세계교회협의회가 ‘사도적 신앙’(One Apostolic Faith)을 고백하고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교회의 친교’로 시작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한 신앙고백을 표방하고 시작한 출범 당시에는 어느 정도 정당성을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주도해 온 이 단체는 점차 탈기독교화 되어 지금은 ‘타종교에도 성령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있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사도적 신앙’을 부정하는 차원에 도달했다. 이러한 사실은 이 단체의 신앙고백 문건은 문건일 뿐 그것이 구성원들과 회원교회들의 믿는 바를 규제하지 않으며, 다만 시작할 때 내세운 고백문건과 현재 이 단체가 실제로 믿고 고백하고 지향하는 것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한다.
3. 화이부동은 가능한가?
기독교인들의 교제와 연합과 일치 활동은 효과적인 복음전도를 위해 언제나 환영할 만하다. 초교파 학생단체와 선교단체의 연합활동이나 ‘성서기드온’이나 기독교남자청년회(YMCA)나 기독교여자청년회(YWCA)와 같은 연합단체는 다양한 교파, 교단에 속한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뭉쳐 큰 규모의 선교사역을 조직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기독교 신앙공동체의 영적인 일치가 교회의 외형의 단일화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데는 이의(異意)가 있을 수 없다. 신자들이 연합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나가야 한다는 것이 잘못이라고 할 사람은 없다. 대사회·대정부 활동과 구제활동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교회 연합기구는 필요하다. 교회연합기구가 대정부·대사회 활동·구제 등의 일을 하는 것이 목표라면 화이부동(和而不同: 어울리면서도 동화되지 않음)의 자세로 협조하고 동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종교 간의 긴장과 불화를 극소화하기 위해 타종교 지도자들을 만나고 협력하는 차원에서도 일련의 연합기구는 필요하다. 기아대책·환경개선·빈곤퇴치·전쟁억제 등 일반은총의 영역 문제는 상호협력이 가능하다. 불교 승려와 손을 맞잡고 남북통일, 민족문제, 사회정의를 논해야 하며, 이슬람교 사제와 머리를 맞대고 종교 간의 전쟁을 억제하기 위한 대화를 해야 하는 마당에 ‘기독교’라고 하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선한 일 하는 것을 마다할 까닭이 없다.
그러나 한국교회 연합일치운동은 이러한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교회연합 일치운동의 궁극적 목표는 교단 통합, 곧 기구 단일화이다. ‘한국교회 연합을 위한 교단장 협의회’는 “분열된 교회들의 연합[은]… 한국교회의 궁극적인 일치를 지향한다”고 천명한다. ‘연합’과 ‘일치’는 에큐메니칼 운동이라는 한 껍질 속에 들어 있는 두 개의 땅콩 알이다. 구분은 되지만 떼어놓을 수는 없다. 이러한 운동의 궁극의 목표는 교단, 교파 통합이다. 다양한 교리와 신학을 용납하는 연합활동을 하다가 종국에 단일 교단으로 통합한다는 것이다. 교회 외형적인 획일성(Uniformity)을 추구하고 있다. 이러한 운동은 결과적으로 개신교회들을 통합하고, 다음으로는 로마가톨릭교회와 통합하고, 그 다음에는 타종교와 일치하는 수순을 밟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대주의 에큐메니칼 운동과 한국교회 연합일치운동은 ‘교리는 분열시킨다’고 하는 전제를 깔고 있다. 믿고 고백하는 것은 다르지만 친교하며, 함께 일하며, 함께 전도하며, 함께 기도하며, 함께 교제하자고 한다. 그렇게 하면 교리를 넘어서고, 다양성을 포용할 수 있는 어떤 새로운 신학을 만들어 낼 것이라고 한다.
세계교회협의회가 교리·신조·진리 중심의 단체가 아니라 교제와 성찬 중심의 단체이듯이 한국교회의 연합일치운동도 믿고 고백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 외형적 하나됨을 최대의 덕목으로 삼는다. 다양한 신학을 수용하고 있다. 종교개혁자들이 소중하게 여긴 교회의 표지(標識)인 하나님의 말씀(성경, 교리)은 뒷전으로 밀어내고 친교, 성찬, 사회참여 성격의 선교에 열을 올리고 있다. ‘개인구원, 사회구원을 각기 외치면서 교회가 진보, 보수로 나뉘는 것은 원칙적으로 잘못’이라고 하면서 한국의 진보교회와 보수교회가 일치하려면 타협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보수계 교회들이 ‘성경만이 유일한 계시이다’고 하는 태도와 성경이 무오하다고 하는 문자주의 시각을 버려야 일치가 가능하다고 본다.
신학은 교회의 생명이다. 신앙공동체의 신앙을 결정짓는다. 피상적으로 보면 자유주의 신학을 지향하는 교단의 목사도 만나보면 복음적인 측면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자유주의를 대폭 수용하는 신학교를 졸업한 목회자들은 교회의 신앙이 신학교에서 배운 것과 일치하지 않은 것을 경험하고 있다. 자기 교단의 신학의 변질과 모호한 신학적 정체성을 걱정하기도 한다. 복음주의계 에큐메니스트들이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하나가 되자고 하며, 사도신경을 고백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이다.
그러나 여기에 함정이 있다. 자유주의 신학을 수용하는 사람들은 만나보면 인간적인 측면에서 신사적이고 매력적이다. 순수한 교리를 고백하고 복음적인 신앙을 가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들을 통제하고 있는 상대주의 진리관과 신학의 패러다임이 그러한 역동성과 포용력을 제공한다. 순수 실재론(Naive Realism)의 진리관을 가진 사람이 이해하기 어려운 역동성을 지니고 있다. 진리를 고정되고 하나이며 불변하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그들도 복음적인 신앙의 요소를 지니고 있다. 복음주의자를 만날 때 자신이 복음주의자인 것처럼 말한다. 복음주의자와 연합하고 일치하여 손해 볼 것이 없으므로, 그들이 연합과 일치를 반대할 까닭이 없다.
그러나 개인은 복음적이지만, 그들이 속한 교회, 교단이 설정한 신학노선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교회가 설정한 신학 노선과 전통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기지 않는다. 교회, 교단은 각각의 고유한 신학노선을 지향하고 있으며, 신학 전통을 가지고 있다. 각 교회는 세계교회의 관계 속에서 활동과 교제를 가진다. 자유주의, 복음주의, 개혁주의, 바르트주의, 칼빈주의, 알미니우스주의 등 각각의 신학 노선을 따른다.
교회의 신학은 그것을 주도하는 신학자들과 교회 지도자들과 그 교회의 신학전통이 무엇을 고백하는가에 크게 좌우된다. 미국북장로교회의 좌경화 과정이 보여준 것처럼 교회의 신앙노선을 결정하는 신학논쟁은 ‘별들의 전쟁’이다. 일반 신자들이 고백하는 것은 교단 신학의 방향 설정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자유주의 신학을 추종, 포용하는 교단 안에 있는 복음적인 신앙을 가진 개인 신자들은 자신들이 속한 교단을 성경적으로 변경시키는 일에 기여하지 못했다.
특정 교회, 교단이 이단교리를 공문화 하지는 않으나 성경이 제시하는 중추 교리를 부정하거나 고백하지 않는 자들을 제재하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신학적 다양성을 수용하는 교회와 외형적인 연합과 일치를 도모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공적인 고백문서의 내용과 실제 고백이 일치하지 않는 교단이나 고백문서에서는 건전한 교리를 표방하면서도 이단보다 더 교묘한 거짓교사를 제재하지 않고 묵인, 방조, 수용하는 교회나 신앙고백과 교리에 대한 규제 기능을 가지고 있지 않는 교단과 일치하는 것은 위험천만이다. 그리스도 교회의 본질, 곧 보편성·사도성·통일성에 역행한다. 교단, 교파의 공적인 고백문서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가 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규제기능이 있는가 하는 점이다. 공적 고백문서가 무엇을 표방하든지 간에 자유주의, 종교다원주의 등을 수용, 묵인, 방조하는 포용주의, 다원주의, 신앙무차별주의 태도를 가진 교회와 일치하려고 하거나 그러한 성격의 연합기구에 동참하는 것은 사도적 신앙에 반(反)한다. 기독교의 중추 교리를 불신하는 자들을 목사나 감독으로 세우거나 신학교에서 가르치도록 허용하는 경우, 그러한 집단, 교회에서 성별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참 교회와 일치하는 일이다. 이것이 종교개혁 신학자 칼빈과 루터가 추구한 프로테스탄트교회의 기본 원리이다.
맑은 물이 흐르는 강과 탁류가 흐르는 강이 합쳐지면 탁류의 강이 되는 것처럼, 역사적 기독교와 자유주의 기독교가 합하면 자유주의 기독교가 된다. 메이첸은 유서 깊은 기독교와 자유주의 기독교가 서로 다른 종교이며, 교학상장(敎學相長)의 관계가 아니라고 밝힌 바 있다. 두 그룹은 서로 다른 뿌리를 가지고 있다. 상반되는 신념체계, 사고 패러다임, 신앙이해, 진리관을 가지고 있다.
유서 깊은 기독교는 신앙고백의 일치(Confessional Unity)를 조건으로 하는 교회와 신자의 연합과 일치를 추구한다. 현대주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자유주의 기독교를 지향하면서 교회 외형의 일치(Ecclesiastical Unity)를 추구한다. 이 두 흐름은 결합될 수 없는 긴장관계를 가지고 있다. 전자에 속한 종교개혁자들은 진리 중심의 에큐메니칼 운동을 펼쳤고, 후자에 속한 세계교회협의회 중심의 세계교회운동은 진리에는 등을 돌리고 외형적인 연합과 일치에 열성을 다하고 있다. 질병과 구조악과 차별에서 인민을 해방시키고, 공해, 자연보호, 동물의 권리(動權), 문화, 핵무기, 환경, 평등에 초점을 두고 있다. 교회가 문화와 민족과 사회에 대한 책임을 이행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요소들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러한 운동이 기독교의 중추적인 교리를 무시하고 종교다원주의까지 수용하며, 예수를 믿어야 할 까닭을 제시하지 않는 기독교를 만들어 교회를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탁류의 강에 뛰어들어 물을 정화하면 될 게 아닌가 하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연합일치 작업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그것을 주도하고 교회가 정통신앙으로 선회하도록 하면 되지 않는가 하고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치게 순진한 이상이다. 미국과 유럽의 교회들이 좌경화의 길에 들어설 때만 해도 절대 다수의 신자들은 유서 깊은 기독교의 복음적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매카트니처럼 자기 교단의 신앙고백, 교리, 신학의 좌경화를 걱정한 신자들도 있었다. 그런데도 교회는 그들이 원하는 것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치달았다. 다수의 신자들이 복음적, 정통신앙을 가지고 있었지만 교회는 생명력을 상실했다. 그들은 좌경화 흐름을 중단시키는 데 이바지 하지 못했다.
4. 진리 안에서 연합과 일치
한국교회의 에큐메니칼운동의 현재의 쟁점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와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단일화이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측에서 단일화를 주저하고 있는 상태이다. 두 단체가 단일화 되면 그 단체는 세계교회협의회의 회원교회가 될 가능성이 크다. 자유주의 신학과 ‘하나님의 선교’ 그리고 종교다원주의를 표방하는 ‘세계교회’의 지도를 받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추진해 온 로마가톨릭교회와 일치운동을 모색할 것이 분명하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회원교회들이 그 때에 이르러 로마가톨릭교회와 일치와 ‘이웃 종교’와의 대화에서 진리를 찾으려하는 움직임을 거부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러한 단일화 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최소한의 조건’이 간과되고 있다. 성경이 제시하는 말씀―교리에 대한 신앙고백의 일치가 그리스도인을 하나로 묶는다. 교회의 신앙고백적 통일성을 보전하는 것은 성경에 바탕을 둔 순수한 신앙에 대한 공적인 증거이다. 바울이 가르치고, 어거스틴이 강조하고, 종교개혁자들이 주창한 ‘진리 안에서 일치’를 도모하는 것만이 정당하다. 교회의 연합일치 활동도 성경이 제시하는 만큼 생각하고, 말하는 데까지 걸어가며, 제한하는 곳에 머물러야 한다.
만약 진보계 교회들이 기존의 포용주의 태도와 자유주의 신학이라는 입장을 포기하고 유서 깊은 기독교 신학을 지향하는 노선으로 전환하고 성경이 제시하는 중추 교리를 주저하지 않고 수용한다면 그러한 연합과 일치는 순풍을 만난 배처럼 나아갈 수 있다. 성경무오성과 하나님의 주권과 은총에 대한 분명한 고백을 가진다면 성공적인 일치를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진보계 교회가 보수 신앙노선으로 전환할 희망은 없다. 변하는 것은 보수계 교회들뿐이다.
교회의 연합일치의 조건은 ‘성경이 제시하는 중추 교리’이다. 종교개혁신학자 존 칼빈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아들이시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총에 근거한다는 것과 같은 것들”(『기독교강요』IV.1.12.)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은총’은 바울이 가르쳤고, 어거스틴이 확신했고, ‘칼빈주의 5대 교리’로 간명하게 표현된 그것이다.
바울은 이방인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구원을 선포했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을 선포했다. 은혜로만 얻는 구원을 선포하는 교회가 인간 공로(Works)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과 단일 교회를 구성하는 것은 바람직한가? 그리스도 예수만이 구원의 길이라고 믿는 사람과 모든 역사적 종교는 구원의 다양한 길이라고 보는 사람이 하나 되는 것이 옳은가?
한국의 복음주의계, 개혁주의계 에큐메니스트들이 ‘진리 안에서 연합,’ ‘신앙고백의 일치(Confessional Unity)’라는 단순한 조건을 고려하지 않고 신학적 다양성을 인정하자고 하면서 포용주의, 다원주의, 신앙무차별주의 에큐메니칼 운동에 앞장서고 있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교인들의 수평이동의 덕을 보아야 하는 목회자들이 이 교회, 저 교단, 이 신학, 저 교리가 그다지 차이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신학자들과 지도급 인사들이 그러한 흐름을 무분별하게 수용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탁류의 강을 정화하려고 하기는커녕 오염된 물결에 휩쓸리고 그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하는 경향을 보인다.
자유주의자나 이단자 보다 더 해로운 사람은 무분별하게 에큐메니칼 운동에 앞장서는 복음주의계, 개혁주의계 에큐메니스들이다. 그들은 거짓교사와 이단과 어두운 세력에 대한 경계심과 저항력을 앗아간다. 자유주의 신학의 위험성에 대한 경계심을 없애버린다. 자유주의와 정통신학의 신앙고백이 그다지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게 한다. 역사적 기독교와 자유주의 기독교가 상호보완적으로 병존하는 것이 가능하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는 분위기를 만든다. 기독교의 핵심진리조차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는 풍토를 조성한다.
천둥이 치면 만물이 응하는 것처럼 함께 어울리다보면 남의 의견을 무의식 가운데 따라갈 수 있다. 한국교회의 연합일치운동을 주도하는 복음주의계 에큐메니스트들은 신학적 다양성을 수용하자고 주창하는 반면에 자신들이 받은 신앙고백적 바탕에 대한 확신은 포기한 듯하다. 장로교 대신과 합동정통이 한국장로교연합회 활동에서 기장과 통합 인사들과 어울리다가 진보계 에큐메니칼 단체인 세계개혁교회연맹(WARC)에 가입했다. 화이부동이 부화뇌동(附和雷同)으로 발전할 수 있고, 사문난적(斯文亂賊: 이단적인 언동으로 종교의 도를 어지럽힘)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이다.
성경적 진리를 고백하는 교회라면 이미 성령 안에서 하나이며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 신약성경은 ‘하나됨’을 조직체의 단일화로 이해하지 않는다.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4:3)는 말씀은 진리를 무시하고 진행되는 오늘날의 무분별한 연합일치운동에 적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교회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영적인 몸을 구성하고 있어도 외견상으로는 하나 되지 못할 수도 있다. 바울과 바나바가 선교를 위해 각기 다른 길을 따랐지만 영적으로는 여전히 하나였다.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이 땅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여러 가지 이유와 부득이한 사정과 견해의 차이로 의견대립을 보이다가 나누어지기도 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진정으로 유지해야 하는 일치는 성경이 제시하는 진리, 교리에 대한 신앙고백의 하나됨이다. 이것들을 포기하면서까지 외형적인 교회일치를 도모할 필요는 없다. 교회는 사회기관이나 일반 세상 조직과 다르다. 힘의 논리나 조직에 전적인 신뢰를 두는 교회연합과 일치는 성공할 수 없다. 성령께서 하나되게 하신 신앙공동체의 일치성을 깨뜨리는 것은 언제나 반(反)기독교 신학, 자유주의 신학, 거짓교사의 가르침이다. 이것들은 화평, 연합, 일치라는 가면을 쓰고 나타나 교회 안에 갈등을 낳고 분열을 조장한다.
성경에 바탕을 둔 신앙고백, 신학의 정체성이 명확하지 않은 연합단체는 인간 패거리 집단에 지나지 않는다. 바벨탑 아래 뭉쳐서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창11:4)고 하는 것에 불과하다. 단결하여 자신의 힘을 세상에 과시하려고 하는 운동은 그리스도적 동기(진리 안에서 일치)가 아니라 아볼로적 동기(인본주의, 인도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5. ‘가장 위험하고 해로운 인물’
리이스가 탄식하는 미합중국장로교회의 위기를 몰고 온 신학교육의 재앙과 교회 변질은 교회가 총회의 결정과 지시에 불응한 뉴욕노회를 제재하지 않은 데서 시작되었다. 총회는 뉴욕노회로 하여금 자유주의자들을 처벌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뉴욕노회는 총회의 지시를 무시했고, 자유주의 신학 강령에 따라 교회를 개혁하려고 하던 자들은 신학을 정치적으로 접근하여 풀기 위해 계파활동을 강화했다. 보수파는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높은 학식을 가진 자유주의자들의 조직적이고 주도면밀한 정치활동을 막아내지 못했다. 그 결과로 교회의 신앙고백에 충실한 사람들은 징계를 받거나 공동체를 떠났고, 상반되는 신학을 가진 사람들은 교회를 차지했다.
이 교단이 자신의 신학, 교리, 신앙고백 전통에 역행하는 사상을 가진 신학자들을 제재하지 않고 포용한 것이 엄청난 비극이라는 점을 깨달은 것은 상당 시간이 지난 뒤였다. 추풍낙엽처럼 교인 수가 감소되고, 생명력이 상실되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에 대한 고백이 분명하지 않은 상태를 보고서 비로소 포용주의, 다원주의, 신앙무차별주가 ‘죽음과의 키스’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교회의 신학적 변질은 교회 안의 극소수의 신학자들에 의해 시작된다. 초기에는 소수이다가 점차 인간적인 매력과 정치력을 발휘하여 교회의 전체 분위기를 반(反)정통 노선으로 끌고 간다. 신학적으로 온건한 인사들은 대체로 정치적인 순발력이 약하고 신학적인 대처능력이 떨어진다. 중도파는 계파 간의 화합, 교회 안의 화평, 교단 분리 방지를 위해, 그리고 ‘학문의 자유’라는 미명 아래 자유주의 기독교에 열린 태도를 보인다.
메이첸이 역사적 기독교를 파수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씨름하던 즈음에, 미국북장로교회의 선교행정가 로버트 스피어(Robert Speer)는 이 교회의 외국선교부 총무와 총회장(1929)으로 활동하면서 교회의 문을 자유주의 기독교에 열어 주었다. 자신이 정통신앙과 교리에 동의한다고 말하면서도 자유주의 신학을 포용했다. 포용주의, 다원주의, 신앙무차별주의를 지향하는 연합일치운동을 주도했고, ‘사도신경이면 충분하다’고 말했다. 역사적 기독교 신학을 고답적인 교리지상주의로 여겨 지탄했다.
메이첸은 스피어를 “우리 시대의 가장 언변이 뛰어난 사람 중의 한 명이요… 세상에서 가장 저명한 종교 지도자들 중의 한 명”이라고 칭찬했다. 또한 스피어가 자신은 자유주의자가 아니며 정통신앙을 가졌다고 말하면서도 자유주의 기독교의 도전에 응전하지 않고 포용함으로써 가장 공격적인 자유주의자 못지않게 교회에 해를 끼치고 있다고 지적했다. 교회에 가장 위협적인 사람은 이와 같은 엉거주춤한 태도와 달콤한 말로 사람들을 안심시키는 자라고 비판했다.
메이첸은 포용주의와 관련하여 스피어를 “장로교단에서 가장 위험하고 해로운 인물”이라고 말했다. 적의 장수보다 더 무서운 존재는 적과 내통하는 아군 병사이다. 의심을 받지 않는 가운데 어느 순간에 성문을 열어주면 적이 쳐들어 올 수 있다. 이단자와 거짓교사와 자유주의 신학자는 신분이 뚜렷하기 때문에 교회가 경계태세를 가질 수 있지만, 자신이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고백한다고 하면서도 자유주의 기독교에 교회의 문을 개방하는 사람은 이단자보다 훨씬 더 위험하고 유해하다는 것이다.
스피어에 따르면 인간의 언어는 하나님의 진리를 담고 전달할 수 있는 완전한 그릇이 아니므로 언어로 구성된 교리가 완전할 수 없다고 한다. 이러한 스피어의 언어 이론은 헨리 코핀과 같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거듭 주장해 오던 것이다. 이 이론은 기독교의 역사성과 교리를 부정하는 데 줄곧 사용되어 왔다. 스피어는 성경의 영감,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속죄사역, 육체부활, 기적능력을 단지 이론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보는 ‘오번선언서’에 서명한 자들이 비록 서명을 했을지라도 그 교리들에 대한 믿음을 부정하지 않는 한 그들을 신뢰해야 한다고 말했다.
스피어는 선교통일과 교회일치를 위해 기독교 교리를 개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서로 간의 차이를 드러내는 차원이 아니라 상호 일치점을 찾고 유지하는 차원에서 다시 서술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기독교의 조화, 우주통일, 세계통합에 관심을 가졌다. “오늘날에 가장 중요한 것은 통일이다. 기독교의 중심 원리도 통일이다. 모든 삶의 근본적인 원리도 통일이다”고 다. 이것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세계평화가 침해당하고 민족분열이 가중되던 시대 상황에 대한 지식인의 고뇌를 담아낸 것이기도 하다.
스피어가 교리논쟁, 신학논쟁을 혐오한 것은 그것이 선교에 손상을 가져오고 세상의 평화유지에 방해가 된다는 생각 때문이다. 교회가 세상에 모범을 보이고 선교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교회통합과 선교통일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선교의 성공은 교리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통일에 달려 있다. “모든 경쟁은 그리스도에 대한 불충성이며 모든 낭비는 세상에 대한 불충성이다. 경쟁과 파당은 형제애와 신뢰와 사랑의 정신을 가르친 그리스도와 불일치하며, 그리스도에 대한 불충성이다.” 교회일치와 초교파 연합에 성공하기 위해 기꺼이 자파의 교리를 희생하거나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스피어는 과거의 교회가 올바른 교리를 보존하기 위해 싸웠으나 갈등의 시대는 지나갔고 새 시대가 되었으므로 이제 교회는 교리가 아니라 개인의 지도력, 온건하고 열성적인 인도주의적 봉사, 위대하고 신성한 사랑의 열정으로 불신앙과 이단을 극복해야 한다고 보았다. 참과 거짓은 악에 대한 교회의 진취적인 공격과 교회의 헌신적 사랑의 실현으로 극복될 수 있다고 보았다. 스피어는 ‘세계는 통일 된다’는 확신을 가지고서 교회통합, 선교통합, 세계통합만이 아니라 남녀의 통합에 열성을 다했다.
스피어는 기독교의 중추 교리를 무시, 역행하는 자들을 포용하면서까지 교회통합, 선교통합, 연합일치 운동을 전개했다. 교리를 경시하고 그리스도나 그의 인격에만 신앙의 초점을 맞추면서 하나됨을 말했다. 교리를 희생시켜 연합일치를 도모했다. 자신이 선교부의 총무로, 교단의 총회장으로 봉사하면서 화평을 위해 자유주의 기독교에 교회의 문을 열어주었다. 롱필드와 여러 학자들이 말하듯이 그는 교회를 사멸시킬 적군의 입성을 도왔고, 유서 깊은 기독교를 파괴할 폭탄장착을 허용했다.
스피어는 분열을 치유한다는 미명으로 또는 화평을 빌미로 이단보다 더 위험한 자유주의 신학에 엉거주춤한 태도를 취하는 개혁주의 신학자가 거짓교사보다 더 위험하고 유해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유서 깊은 기독교와 자유주의 기독교가, ‘보수와 진보’가 그다지 ‘차이가 없다,’ ‘나누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말하거나 ‘서로에 대한 오해이다,’ ‘모두 다 선교적 동기를 가지고 있다,’ ‘사도신경이면 고백공동체로 충분하다’고 하는 따위의 감언이설로 사람들을 안심시키는 복음주의자, 개혁주의자는 자유주의자보다 더 유해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스피어는 연합일치운동에 앞장 서는 복음주의 진영의 에큐메니스트들을 연상시킨다. ‘사도신경이면 충분하다’고 말하고, 보수신학과 진보신학을 수용하고 아우를 수 있는 새로운 신학을 만들어 내야 한다고 하고, 신학적 다양성과 포용주의를 지향하는 인사들을 떠올린다. 몇 대에 걸친 개혁주의 신자 가정에서 태어나고, 학생선교운동의 ‘세계복음화’ 강령에 감동을 받고, 장기간 그 단체의 간사로 봉사한 것도 흥미롭다. 당대의 장로교회 안에 가장 언변이 뛰어난 사람이며, 저명한 종교 지도자들 중의 한 명인 것도 특기할 만하다.
스피어 타입의 에큐메니스트는 자유주의자와 동일한 사상과 사고양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은 자유주의자가 아니라고 강변한다. 자신이 개혁주의자라고 말하면서도 교리지상주의를 지탄한다. 교회의 정체성을 허무는 신학사상을 펼치면서도 신앙고백공동체의 생명이 달려 있는 문제에 대한 논의를 명분 없는 논쟁으로 본다. 그리스도와 구원에 대한 확신만 있으면 어떤 종교 그룹과도 연합하고 일치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류의 에큐메니스트들과 신학자들은 자유주의 기독교의 도전에 응전하지 않음으로써 정통신학을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혼란을 일으키는 면에서 가장 공격적인 자유주의자보다 훨씬 더 유해한 영향을 교회에 미칠 수 있다. 메이첸이 스피어를 장로교단 안에서 “가장 위험하고 해로운 인물”이라고 평가한 것은 개혁주의 신앙을 고백한다고 말하면서도 다양한 형태의 자유주의 신학과 시류(時流)에 교회의 문을 열어주는 회색주의자와 포용주의 태도를 가진 중도파 인사들의 처신의 위험성, 해독성을 경계한 말이다.
한국교회의 생명력 유지에 가장 유해한 인물들은 진리에 대한 민감성을 상실한 채 무분별한 에큐메니칼 운동에 앞장서는 복음주의자, 개혁주의자들이다. 학문성, 객관성, 중립성, 포용성이라는 미명아래서 교파 간에 신앙고백의 차이가 없다고 하는 신앙무차별주의를 심으며, 교리무관심주의를 조장한다. 진리에 대한 민감성을 둔화시키고, 교회의 생명을 앗아가는 자유주의 신학의 해독과 위험에 대한 긴장과 경계심을 허무는데 기여한다. 성경에 토대를 둔 ‘역사적 기독교’와 상대주의와 주관주의에 바탕을 둔 ‘새로운 기독교’가 상호보완적으로 병존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게 한다. 신학적 다양성을 수용하며 보수와 진보를 넘어서는 새로운 신학을 창출하자고 하는 말로 교회를 미혹한다. 지식인들의 책임은 일반 대중보다 훨씬 더 크다. 복음주의자 김명혁, 이성구, 옥한흠, 김상복 등은 메이첸이 미국교회 안에서 “가장 위험하고 해로운 인물”이라고 평한, 미국북장로교회의 좌경화에 기여한 스피어를 연상케 한다.
6. 맺음말: 후천성면역결핍증
추풍낙엽처럼 쇠락하는 유럽과 미국의 주류 교회들의 실패는 한국교회가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할 역사 교훈이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여 교회를 궤멸시키려 달려드는 원수를 대적하고 진리로 허리를 동이지 않으면 추락하게 된다. 자유주의 기독교를 지향하면서 에큐메니칼 운동과 타종교와의 ‘대화’에 열성을 보여 온 유럽과 미국의 교회들은 교회연합일치운동에 무조건 동참하고 신학적 다양성을 수용하는 교회와 일치하는 것은 죽음과 입맞춤하는 것과 같으며 후천성면역결핍증(AIDS) 환자와 밀월을 즐기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교훈하고 있다. 아무리 아름다운 옷을 입고 화려한 주택에 살고 많은 지식을 가졌다 할지라도 ‘죽은 목숨’에 지나지 않는다. 죽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당분간은 큰 변화가 없는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신조, 신앙고백, 신학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태도는 교회의 정체성을 모호하게 만들고, 생명을 앗아가며 교리를 소홀히 하는 무분별한 교회연합일치운동은 복으로 위장된 저주라는 것을 가르쳐 준다.
당나라 시대에 중국에서 번성했던 종교혼합주의적인 경향을 가진 경교(景敎)는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소아시아 지역 교회들도 없어졌다. 기독교의 고유한 복음을 양보하고 토착화를 지향했기 때문이다. 교회들이 많고 기독교인들이 많던 소아시아 지역은 현재 기독교 신앙의 불모지가 되었다. 유럽의 교회를 괴멸시키는 적(敵)은 교회 밖에 있지 않고 교회 안에 있다.
성별(聖別)은 기독교의 중추 교리를 불신하는 문제로 생기는 갈등을 해결하는 최후 방책이다. 성경이 제시하는 기독교 신앙을 부정하거나 반(反)기독교 사상을 선전하거나 복음에 충실한 신자들을 핍박하는 ‘교회’와 일치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불일치하는 일이다. 칼빈, 루터, 나치 치하의 독일고백교회, 일제말기의 신사참배거부운동교회는 참된 가견적 신앙공동체를 건설했다. 교회분리는 경계해야 하지만 기독교의 중추 교리를 거부하거나 역행하는 교회를 떠나 사도성, 보편성, 통일성, 거룩성에 부합하는 교회를 건설하는 것은 분리주의가 아니다.
프린스턴신학자 벤자민 워필드는 “신약성경의 그리스도인의 일치성은 신자들의 공통의 기독교 신앙 위에 기초했다. 그리스도 안의 일치성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에 대한 불신실함 위에 세워질 수 없다”고 말한다. 칼빈은 “거짓이 종교의 성채 속으로 침입해 들어오자마자, 요긴한 교리의 요점이 뒤집어지자마자, 교회의 죽음이 초래된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 교회가 사도와 선지자의 교리 위에 기초해 있다면… 그 교리가 파괴될 때 교회가 어떻게 계속 존속할 수 있겠는가?”라고 한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단순히 하나의 외형적 조직체 때문에 그들이 ‘하나’라는 인상을 주는 것은 단지 교회 밖에 있는 세상을 오해케 할 뿐만 아니라, 또한 거짓말을 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고 말한다.
나팔은 분명한 소리를 낼 때에만 가치를 가진다. 엘리야, 아모스, 예레미야, 요한, 바울, 어거스틴, 존 위클리프, 마틴 루터, 존 칼빈은 진리파수의 사명에 목숨을 걸었다. 진리가 공격을 받고, 교회가 죽음의 질병에 대한 저항력을 상실해 가고 있는데도, 교회 지도자들과 신학자들이 입신양명을 위해 무분별한 연합일치운동에 앞장서는 것은 진리를 팔아 화평이라는 팥죽을 사는 것과 다르지 않다.
*전거(典據)와 위 주제에 대한 충분한 논의는 필자의 『에큐메니칼 운동과 다원주의』(2005)를 보라.
'목회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로마제국 하 일어났던 초대교회 10대 핍박 (0) | 2009.06.11 |
---|---|
[스크랩] 로마제국 하 일어났던 초대교회 10대 핍박 (0) | 2009.06.11 |
[스크랩] 청소년 분노 치유를 위한 기독교교육 모델 연구 (0) | 2009.06.01 |
[스크랩] 가정이 이끄는 교회 (0) | 2009.05.11 |
[스크랩] 가정이 교회를 세운다. (0) | 2009.05.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