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삼자교회의 신학형성 배경과 사고방법
- 왕쓰웨
Ⅰ. 들어가는 말
1949년 10월 1일 중국에서 공산정권이 수립된 것은 기독교 교회와 신학 전개에 큰 변화와 함께 전기(轉機)를 맞이하게 하였다. 공산당 집권의 중화인민공화국은 사회주의 이념을 통해 혁명으로 쟁취한 중국을 새롭게 건설해 나가려고 하였으며 그 가운데 정치 질서의 확립과 경제의 발전은 무엇보다 중요한 업무로 대두되었다. 사회주의의 새로운 중국을 건설하기 위해 한편으로는 인민의 적을 제국주의·봉건주의와 관료자본주의자들로 축소시켜 이들에 대해서는 독제와 억압을 실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당과 노동자계급의 영도 아래, 공농(工農)연맹을 기초로 하여 전국 각 민족, 민주계급, 민주당파, 인민단체와 각계의 애국인사와 해외 화교를 포함하는 광범위한 통일전선(統一戰線)을 이룩하였다. 통일전선의 구축은 최대한도 내에서 단결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모으면서 사회주의 새 중국을 건설하는데 있다.
중국공산당은 기독교를 포함한 종교사업을 중공의 통일전선 사업의 일부로 간주하였으며 종교계 인사를 통일전선의 대상으로 여겼다. 사회주의 새 중국의 건설이라는 깃발 아래 공산정권 수립후 기독교의 일부 급진적이며 공산 혁명을 지지하는 우야오쫑(吳耀宗), 류량머우(劉良模) 등은 새 중국은 제국주의, 봉건주의, 관료자본주의를 타도한 중국이며, 신민주주의의 중국이면서 사회주의의 길을 향해 매진하는 중국이라 평가하였으며, 이런 새 중국에서 기독교가 변화되어야 함을 천명하였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소위 「기독교 혁신 운동」이 이들에 의해 또 당과 정부의 강력한 지도, 감독과 도움으로 전국적으로 전개되어 나갔다.
「기독교 혁신운동」의 전개는 당시의 기존 교회와 신학에 큰 충격과 함께 새로이 바뀌어진 현실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였으며 이로 전개된 「서명운동」, 「고발운동(控訴運動)」, 사회주의 개조(改造), 삼자(三自)조직 가입, 교회연합 추진 등으로 전국의 기독교인과 교회는 소위 「거듭남(重生)」을 체험하였으며 신학사고 전개에서도 「새로운 빛(新亮光)」을 갖게 되었다. 물론 「거듭남」은 사회주의 정치 현실을 자각함으로 얻게 되는 정치적 각성과 경각심을 의미하며, 「거듭남」의 결과는 제국주의와 쟝졔스(蔣介石) 정부에 대한 전면적 배척, 척결임과 동시에 「인민의 입장」, 「애국주의의 입장」에 서게 되는 것이다. 「새로운 빛」이란 사회주의 정치 현실의 상황에서 성서를 읽고 해석할 때 갖게 되는 새로운 시각과 해석을 말한다.
「기독교 혁신운동」의 인사들은 새로운 사회주의 정치현실에서 전통신앙과 기존의 신학을 재 사고하기 시작하였으며 결국 사회주의 체제나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독특한 「삼자신학」을 창출해 내기 시작하였다. 즉 「삼자신학」은 사회주의 중국에서 삼자교회 지도자들이 공식화하고 당과 정부에서도 공인한 신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과연 이러한 삼자교회 지도자들에 의해 사고되어진 「삼자신학」은 어떤 형성 배경을 갖고 있으며, 중국공산당과 정부가 끼친 영향은 어떠하며, 기존의 신앙과 신학에 대해 어떻게 평가를 하고 있는가? 또 「삼자신학」이 「새로운 빛」 아래 재사고 된 신학사고란 무엇이며, 신학에 대한 정의를 어떻게 내리고 있으며, 구체적 신학방법은 무엇인가?
본 글은 이상에서 제기된 문제들에 대한 대답의 시도로 글을 전개해 나갈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사회주의 중국이라는 현실 속에서 공식화되고 공인될 수 있는 신학은 과연 어떤 배경 속에서 그리고 어떤 사고의 틀과 방법에서 가능한 지를 살펴보게 되는 것이다.
Ⅱ.중국 삼자교회 신학의 형성 배경
1. 중국의 공산화와 중국 공산당의 종교 정책
1) 중국의 공산화와 사회주의 통치
1949년 10월 1일 수립된 중화인민공화국은 명의 상으로는 각 당파, 각계 대표에 의한 연합정부로 출범하였지만 진정한 권력은 중국 공산당이 장악하고 있었다. 공산당이 장악하고 있는 중화인민공화국이 비록 수립은 되었지만 전국적 통일은 아직 이루어지지는 못하였고, 대만으로 패주(敗走)하였던 쟝졔스의 국민정부는 대륙회복(反攻大陸)의 꿈을 버리지 않았으며, 미군의 반격세력도 큰 위협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또 장기간의 전쟁으로 파괴되었던 경제와 통화팽창, 실업문제가 산재하였고, 공공질서의 회복과 국내의 잔여 제국주의 및 반동세력의 소멸도 적지 않은 과제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큰 과제는 사회주의 이념에 의한 통치와 건설이었다.
공산화 이후, 중국의 통치와 건설을 위해 그리고 전국적인 행정통제와 붕괴된 국민경제를 회복하기 위해 독재적인 정치수단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의 정치적 진압도 필요하게 되었다. 실지로 마오쩌똥은 정권수립 이전인 1949년 6월 30일 중국 공산당 창당 28주년때 발표한 기념 글인 「인민 민주주의 독재를 논함(論人民民主專政)]에서 이미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인민의 국가는 인민을 보호한다. 인민의 국가가 있을 때 인민이 비로소 전국적 범위 내에서 그리고 전체적 규모 위에서 민주적인 방법으로 자신을 교육하고, 개조하며, 국내외의 반동파의 영향에서 피할 수 있게 한다. (이 영향은 현재까지도 아직 크며 또 미래에도 장기간 동안 존재할 것이며 빨리 소멸되지는 않을 것이다.) 옛 사회에서 얻은 나쁜 습관과 나쁜 사상으로부터 자신을 개조하며 반동파가 이끄는 잘못된 길로 가지 말게 하며, 계속 사회주의 사회와 공산주의 사회를 향하여 전진해야 한다.
마오쩌똥은 인민은 보호를 받는 동시에 자신을 교육, 개조하여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사회로 전진해야 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인민이란 노동자계급, 농민계급, 도시 소 자산계급과 민족 자산계급이며, 이들에게는 선거권도 있고 어진 정치(仁政)를 시행하지만 소위 반동파인 제국주의의 앞잡이인 지주계급, 관료 자산계급, 국민당 반동파와 그들의 계파들에게는 독재와 압박을 실시한다고 하였다. 더 나아가 마오쩌똥은 현재의 임무란 인민국가의 체제를 강화해야 하며 이는 곧 인민의 군대, 인민의 경찰과 인민의 법정을 통해 국방을 튼튼히 하며, 인민의 이익을 보호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하기에 정부 권력이 시종 군대와 경찰 등 무장의 힘에 의해 세워질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전개된 「토지개혁운동」, 「삼반오반(三反五反)운동」, 「반혁명 분자의 진압」, 「반 우파운동」, 「사청(四淸)운동」 등 사회, 정치운동들이 모두 군대, 경찰, 법정(法庭)에 의한 강압적인 방식으로 진행이 되었다. 또 소위 민주적인 방법으로 자신을 교육하고 개조한다고 하였지만 설득의 방식으로 진행되기보다는 강압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져 나갔다. 정치학습과 사상교육을 통해 소위 새사람(新人)으로 변화되기보다는 정치적 공포(恐怖) 수단을 통해 강제적으로 개조되거나 이중인격자가 되기도 하였다.
2) 공산화 이후 중국 공산당의 종교정책
중국 공산당은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표방하는 정당으로서 무신론과 역사유물론을 신봉하고 있으며, 종교란 인류 사회 발전 일정 단계의 역사현상이며, 발생·발전과 소멸의 과정이 있다고 본다. 마르크스는 종교란 전도(顚倒)된 세계관이며, 피 압박 생령(生靈)의 탄식이며, 무정세계의 감정이고, 마치 정신이 없는 제도의 정신인 것 같이 종교는 인민의 아편으로 간주하였다.
엥겔스도 <반듀링론>에서 "모든 종교란 단지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지배하는 외부적 힘이 사람들의 두뇌 안에서 나타난 환상의 반영이다"라고 하였다. 레닌도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며, 일종의 정신적인 질 나쁜 술이다. 자본의 노예가 이 술을 마셨을 때 인간의 형상을 지닐 수 없게 자신을 파멸시키게 되며, 인간적인 삶의 추구를 더 이상 하지 않게 된다."라고 하였다.
비록 종교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으며 종국에 가서는 소멸될 것으로 믿으나 사회주의, 공산주의가 장기적으로 발전하고 모든 객관적인 조건이 구비될 때만이 자연히 소멸된다고 보고 있다.
중국의 공산주의자들은 초기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종교 해석을 따르지만 그들처럼 깊게 또는 심각하게 연구하거나 논의하지는 않았으며 단지 종교가 갖는 역할과 사회 역사에서의 영향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다. 즉 실용적인 측면에서의 그 가치를 따져 보았다. 그러하기에 마오쩌똥은 "공산당원도 어느 유심론자(唯心論者), 심지어 종교 신도와 정치 행동 상의 반제 반봉건(反帝反封建)의 통일전선을 구축할 수 있다.
그러나 결코 그들의 유심론 또는 종교 교리를 찬동해서는 안된다."라고 하였다. 쩌우언라이(周恩來)는 "우리는 유물론자와 유심론자가 정치적으로 협력을 할 수가 있고 공존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마땅히 서로 존중해야 하며 우리 사이에는 협력의 길이 있다."고 하였으며 또 종교계 인사들에게 "정치적으로 확실하게 섰을 때 만이 업신여김을 받지 않고 살 길이 있게 된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종교를 통일전선 사업의 일부로 간주하여 당과 정부의 노선과 사업에 협력토록 하고 있으며 그럴 때만이 종교의 존립 의미가 있고 또 존재가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공산화 이후 중국 공산당은 종교와 종교업무를 통일전선 사업의 일부로 삼았으며 종교계인사를 통일전선 사업의 중요 대상으로 여겼다. 그러하기에 종교에 대해 한쪽으로는 청산과 숙청을 가하면서 다른 한쪽으로는 장악과 개조의 정책을 전개해 나갔다. 우선 불교, 도교, 이슬람교는 국내의 반동 계급과 통치계급의 통치와 이용을 당해 왔으며 기독교와 천주교도 식민주의와 제국주의 세력의 도구가 되었고 통제를 받았다고 규정하였다. 그러하기에 이런 상황과 관계는 반드시 청산 또는 숙청해야만 하였으며 그리고 난 후에 종교와 종교조직, 종교계 인사는 당과 정부에 의해 장악되어지고 개조되는 과정을 겪게 되었다.
당과 정부에 의해 장악, 개조되어질 때 종교가 비로소 공식적으로 「지상(地上)」에서 존재할 수 있게 되며 그렇지 않을 경우 강압적으로 제거되거나 소멸되어지며 혹은 「지하」로 잠적하게 될 수밖에 없다. 종교가 이러한 운명에 처하게 되는 것은 공산당의 종교정책에 의해 나타난 결과였다.
공산당은 중국의 천주교와 기독교가 제국주의에 의해 시작되었고 그 목적은 중국 침략의 도구로 사용되었다고 보았다. 그러하기에 기존의 천주교와 기독교는 반드시 제국주의와의 관계를 청산하고 그 독소를 제거하며, 당과 정부가 이들을 능동적으로 장악하고 또 그 노선을 따를 수 있도록 개조하기 시작하였다.
1950년 8월 중공 중앙에서는 <천주교, 기독교 문제에 대한 지시(關於天主敎, 基督敎問題的指示)>를 하달하여 기독교와 천주교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극적으로 대처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2… 우리가 현재의 중국 천주교, 기독교를 대하는 데 있어서 마땅히 그들의 발전을 도와서는 안되며, 그들 가운데 있는 제국주의의 영향을 반대하며 동시에 종교 신앙의 자유를 굳건히 보호한다. 또 그들 가운데 애국주의의 영향을 확대하여 천주교와 기독교가 제국주의의 도구로부터 중국인 자신의 종교사업으로 변화하도록 해야 한다
4… 오늘날 우리의 임무는 군중 가운데에서 반종교운동을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 유물주의와 과학지식의 선전을 광범위하게 진행시켜 종교의 시장(市場)을 점차 축소시켜야한다.
6… 사회질서 안정을 위해 교회는 예배당 이외의 장소에서 선교를 해서는 안되며 동시에 다른 단체도 예배당 안과 그 주위에서 반종교선전을 진행해서는 안된다. 또 같은 이유에서 교회는 현재 토지개혁이 진행되는 지역에서 마땅히 활동을 정지해야 한다.
8…각지의 기독교, 천주교에 관한 상황, 동태와 발생된 문제 그리고 우리 측이 취해야 하는 처리 방법에 대해서는 반드시 중앙에 보고해야 한다. 천주교, 기독교에 대해 취해지는 중요 조치는 반드시 중앙의 비준을 얻어야 한다.
여기에서 천주교와 기독교는 발전의 제한, 확대의 축소, 활동의 제한을 본격적으로 받게 되었으며 기독교와 천주교에 대한 중요 조치는 반드시 당 중앙의 비준을 얻어야만 하도록 하였다. 이 이후 기독교와 천주교의 운명이 당의 노선에 따라 결정되어진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 되었다.
1950년 9월 중공 중앙에서 <기독교, 천주교에서 「기독교선언」 운동을 전개하고 호응하는 것에 관한 지시(關於在基督敎天主敎中開展嚮應「基督敎宣言」運動的指示)〉를 내려 천주교와 기독교가 자립, 혁신운동을 펴도록 하였고, 1951년 3월에 중공 중앙은 또 <종교혁신 운동의 적극적 추진에 관한 지시(關於積極推進宗敎革新運動的指示)>를 내려서 기독교와 천주교가 전개하는 자립혁신 운동은 중요한 정치의미가 있는 군중운동이기에 각 지역(당)에서 마땅히 적극적으로 영도해야 할 것을 지시하였다.
결국 이런 지시들은 기독교와 천주교가 제국주의와의 관계를 끊고 그 영향을 숙청해야 함을 언명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1950년 12월 28일에 중공 중앙의 <미국의 경제 지원을 받는 문화교육 구제기관과 종교단체에 대한 처리 방법의 지시(對接受美國津貼的文化敎育救濟機關及宗敎團體處理辦法的指示)>에서 미국의 경제적 지원을 받는 문화교육 구제(救濟)기관과 종교단체는 반드시 정부에 등록을 해야 하며 미국과 관계를 끊도록 하였다. 같은 날에 또 <중국과 외국인 선교사의 여행 및 선교 문제에 관한 지시(關於中外敎士旅行宣敎問題的指示)>에서 모든 외국인 선교사는 예배당 이외의 일체의 여행과 선교를 불허하였다. 그리하여 외국의 지원과 외국인의 국내 활동의 발길을 끊어 버리게 하였다.
종교업무에 대한 당의 장악과 통제는 1951년 1월 중공 중앙의 <종교문제 위원회와 종교사무처 설립에 관한 결정(關於設立宗敎問題委員會及宗敎事務處的決定)>을 발표하므로써 공식화, 제도화되었다. 즉 중앙과 각 중앙국, 분국(分局)아래 종교문제 위원회를 두어 종교에 관해 지도와 연구를 책임지게 하였다. 먼저는 기독교, 천주교, 불교문제의 정책 방침을 세워나갔으며 또 정무원(政務院), 문교위원회(文敎委員會)와 각 대 행정구 인민정부의 문교위원회 아래 종교사무처를 설치하여 기독교, 천주교와 불교에 관한 업무를 통일적으로 집행하며 연구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당과 정부의 적극적인 간여로 기독교의 경우 1954년 7월 중국기독교삼자애국운동위원회(中國基督敎三自愛國運動委員會), 천주교는 1957년 8월 중국천주교우애국회(中國天主敎友愛國會), 불교는 1952년 11월 중국불교협회, 도교는 1957년 4월 중국도교협회, 이슬람교는 1953년 5월 중국이슬람교협회가 결성되어 각각의 종교를 대표하는 공식적이며 전국적인 종교조직이 되었다. 당과 정부 그리고 종교조직의 관계는 다음과 같은 도표로 나타낼 수가 있다.
중앙당 통일전선사업부 |
------→ | 정무원 종교사무처 |
------→ | 종교조직 예)중국기독교 삼자애국운동위원회 |
| ↓ |
| ↓ |
| ↓ | ||
지구당 통일전선사업부 |
------→ | 지방정부 종교사무처 |
------→ | 지방 종교조직 예)지방의 기독교삼자애국운동위원회 ↓ 각 교회 |
각 종교를 대표하는 종교조직의 결성을 통해 당은 이로써 각 종교를 집중 통제하고 또 여러 가지 당에서 펼치는 정치사상 개조운동과 더불어 종교 지도자들을 개조해 나가기에 이르렀다. 당과 정부에 의해 장악되고 개조될 때 종교는 비로소 진정한 애국주의나 인민의 종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전국적인 종교조직들이 결성되고 난 후에도 당과 정부는 지속적으로 「청산, 숙청, 장악, 개조」의 정책을 펴 나갔으며 현재까지도 비록 종교 정책에 있어 어느 정도의 시대적, 지역적 정도의 차이와 실시의 불균형은 있지만, 상당한 일관성을 가지고 이상에서 언급한 정책과 태도들로써 종교와 종교업무를 처리하고 있다.
Ⅲ. 중국삼자교회의 새로운 신학사고와 방법
1. 달라진 현실과 새로운 신학사고
공산정권의 수립으로 달라진 정치사회현실은 중국의 교회로 하여금 새로운 영성체험을 갖게 되거나 강요받게 되었으며 그로 말미암아 신학적 측면에서 새로운 신학사고와 정립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띵꽝쉰은 "1949년이 중국의 국가생활의 중요한 전환점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인의 영성생활에도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그들(교회)은 반드시 새로운 발견, 새로운 영성의 추구를 위해 하나의 길을 개척해야 한다"고 하였으며 선이환도 "35년전 인민혁명의 승리는 보통백성의 운명을 근본적으로 바뀌어 놓았는데, 이는 우리의 신학사상에 큰 영향을 일으켰다."고 하였다.
즉 공산정권 수립 후 새로운 중국에서 나타난 새로운 현상과 현실이 기독교인이나 교회로 하여금 전통 신앙과 신학에 대해 새롭게 질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달라진 현실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공산정권의 수립과 그에 따른 새로운 현실과 통치 질서를 말한다.
삼자교회의 지도자나 신학자들은 공산혁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찬동하고 있기에 새로운 현실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선이환은 중국 기독교인이 직면하는 5가지의 새로운 사회역사환경을 다음과 같이 열거하였다.
1) 천여년 동안 사회의 최하층에 처해 있던 인민군중의 운명이 바뀌어졌다.
2) 많은 기독교인이 반대하였던 죄악이 사회제도의 변화에 따라 소멸되거나 억제되었다.
3) 수많은 진정한 혁명가들에게서 고상(高尙)한 도덕과 자기희생의 정신을 보았다.
4) 온 사회가 더욱 일치 단결함은 물론이거니와 공동의 투쟁목표도 있다.
5) 30여년 동안 중국사회가 여러 거대한 변혁을 경험하였지만 지금 혼자의 힘으로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고 있으며, 신속히 발전된 세계로 개척해 나가고 있다.
띵꽝쉰은 혁명가들과 직접 접촉을 하면서 그들의 다수가 국민당 정권의 관리와 같지 아니하며, 외국선교사나 중국교회지도자들이 그들에 대해 묘사한 것과도 다르다. 그들은 마귀귀신과 홍수나 맹수(洪水猛獸)가 아니며, 정상적인 사람이며, 윤리관념과 인생의 꿈과 뜻에 대해서도 진지함을 지닌 자들이다. 많은 혁명가들이 동포의 해방을 위해 그들의 모든 것을 희생하였고 심지어 목숨도 내놓았다. 인민을 위해 봉사한다고 하는 것은 단지 구호가 아니라 그들의 생활목표이다.
라고 하면서 띵꽝쉰 자신은 이들 무신론자와 공산당원들의 말과 일들을 마음속으로 찬성하며, 그들의 이런저런 약점을 지적하기를 원하지 않으며, 온 마음과 열정으로 그들을 대하면서 그들과 함께 공동의 적을 반대한다고 하였다.
천쩌민은 사회주의 제도가 "4천여년 동안 중국인민이 아직 갖지 못한 가장 공정하고 가장 인도(人道)적인 새로운 사회제도이다"라고 하였고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해서는 현재에는 비록 완전하게 선하고 아름답지 않고, 여러 가지 개선되어야 하는 점도 있고, 약점이나 잘못, 심지어 비극도 있었지만… 전체 90%이상의 사람에게 있어, 역사적으로 그리고 현실적인 의미에서 라이프니쯔(Libniz)의 말과 같이 이는 "모든 가능한 세계가운데 가장 완전한 세계이다."
또 그의 「신치론(神治論)」의 학설을 빌려 말하면 우리 기독교인이 믿는 하나님은 전능, 전지(全智), 무소부재, 공의롭고 자비로운 하나님이기에 우리는 중국인민이 해방을 얻은 이 역사적 사건은 확실하게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 속에 있다는 것을 믿는다.
라고 하였다. 이처럼 삼자교회인사들은 달라진 현실이 하나님의 구원의 뜻 가운데서 이루어 졌고, 혁명가들은 훌륭한 인격을 지닌 인간들이며 이들이 주장하고 세우려는 사회주의제도는 가장 공정하고 인도적인 것으로 보았다.
달라진 세상은 삼자교회 신학자들로 하여금 전통적인 신앙과 신학을 재평가하게 되었고, 새롭게 경험한 신앙체험은 새로운 신학사고를 하게 만들었다. 천쩌민은 새로운 중국에서 새로운 영성체험과 새로운 신학사고의 정립에 대해 다음과 같은 갈등이 있음을 토로하였다.
과거 몇 년간에 개인과 교회는 모두 큰 불과 같은 세례를 경험하였고, 새로운 빛도 보았다. 우리는 주님의 영이 친히 우리를 빛나는 큰 길로 인도하셨다는 것을 깨달았고 또 갑자기 이런 경험들의 영적인 의미를 발견하였을 때 자연히 신학적 요구를 제기하였다.
즉, 여러해 경험한 것들을 신학적 이론으로 정리하고자 하였으며 신앙을 통해 얻은 것을 공고히 하고 우리의 나갈 길을 찾고자 하였다. 비록 우리는 이 길이 주님께서 친히 열어 놓으신 것이라 확신하지만 이 경험이 너무 신선하고 또 과거에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기에 우리로 하여금 여러 가지 과거에 익숙하였던 전통적 견해들을 수정하도록 하였다.
수정의 과정에서 회의도 느꼈고 고통도 겪었다. 우리는 기도와 사고(思考)를 잘 해야 한다. 그럴 때만이 믿음을 갖고 앞을 향해 걸을 수 있다.
이러한 상황 아래 우리는 영성의 굶주림과 이성의 허약함을 느끼며 마치 오랜 병에서 치료 받은 자 같이 어떤 강렬한 요구를 하게 되었다. 즉 영적인 지식욕의 만족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 또한 건강하다는 증거이다.
과거의 쓰레기는 우리로 하여금 싫증을 낳게 한다. 우리는 더 좋은 영양식품(營養品)을 요구한다.
띵꽝쉰은 "새 중국 출현이후의 많은 새로운 현상과 현실은 많은 신도들에게 전통 신앙의 재고(再考) 내지 회의(懷疑)를 가져다 주었다"고 하였고, 선이환은 "가장 절실한 것이란 중국신학사상이 어떻게 현대 중국이 처한 정치, 사회, 경제, 문화의 거대한 변혁에 대해 응답하느냐에 있다"고 하였다.
삼자교회 인사들은 모두 신학사상의 재사고와 새로운 신학사상의 수립이 시대적 요청에 의해 필요함을 절실하게 느꼈던 것이다.
삼자교회의 신학자들이 다시 사고해야 하는 신학적 내용은 무엇이며 어떤 문제들에 대해 신학적 응답을 해야만 했는가? 선이환은 다음 9가지의 주제에 대해 중국교회는 신학적 대답을 해야 한다고 하였다.
1) 하나님의 사랑이 단지 그가 구원한 사람에만 해당이 되는지, 아니면 모든 인민군중에게도 베풀어지는지?
2) 하나님은 오직 그를 믿는 자를 통해서만 그의 사랑을 표현하시는지? 아니면 모든 정직하고 선량한 사람을 통해서도 그의 사랑을 표현하시는지?
3) 인간의 본성이 모두 죄악으로 타락하고 충만하게 되어 어떠한 문화창조 또는 사회의 발전도 불가능한지, 아니면 인간의 본성 가운데 여전히 어느 정도로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는지?
4) 모든 물질적 발전과 성취는 사탄의 일이고 인간을 유혹하여 하나님 곁을 떠나게 하는 노력인지 아니면 이런 성취나 발전도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의 구현으로 보아도 되는지?
5) 인간은 마땅히 현실세계와 모든 물질생활을 버리고 더 나은 생활을 위한 노력도 포기해야 비로소 하나님과 가까워지는지, 아니면 인간은 현실생활 속으로 들어가 물질과 문화생활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더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지?
6) 사람이 재난과 고통 때문에 종종 하나님을 찾게 되기 때문에 재난과 고통은 합리적인 것이며 또 그것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되는 것인지, 아니면 단지 재난·고통의 제거와 평안·기쁨을 누리기 위해 기도와 노력을 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감사를 배우게 되는 것인지?
7) 하나님과 죄악세력의 충돌 가운데서, 오늘의 세계가 모두 다 죄악의 세력에 의해 통치가 되었기에 반드시 전세계를 멸망시켜야 천국이 강림하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은 최고 높은 분으로 시종 역사의 발전을 주관하시고 계신지?
8)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은 단지 사람과 하나님사이만의 화해인지, 아니면 전 인류 사회를 포함해서 하나님과 화해된 것인지? 성육신(成肉身)은 단지 개인의 영혼구원에만 의미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전체인 삶과 교회생활에도 의미를 지니는지?
9) 믿음과 사랑, 신앙과 행위, 구원과 도덕, 신인(神人)관계와 인간관계는 절대적으로 대립되는 것인지, 아니면 융화되어 일치를 이루어야 하는지?
선이환은 또 달라진 세상 현실에 대해 신학적으로 재고해야 하는 내용과 과제를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제시하였다.
첫째, 새 중국 수립 후 나타난 사회적 변혁과 생활수준의 향상, 그리고 사회에 출현할 「새로운 인간(新型的人)」 가운데 많은 이가 공산당원인데, 이런 여러 사실들을 어떻게 신학적으로 해석해야 하는가?
둘째, 소수의 교회 목사와 사역자들이 여전히 이런 사회변혁이 신학에 가져다준 의미를 의식하지 못하고 계속 친미반공(親美反共)적으로 설교를 하는데, 중국의 신학사상은 반드시 또 우선적으로 이런 식민주의적 잔재를 제거해야 하는 과제가 있다.
셋째, 1950년 가을 일어난 삼자운동에서 제기한 소위 「자전(自傳)]은 누가 전하느냐의 문제 뿐만 아니라 "무엇을 전하느냐"가 문제이다. 현실 도피적인 사상을 제거하여 중국 기독교인 자신에 의한 신학사고 길의 개척이 신학사고의 과제가 된다.
넷째, 기독교인의 윤리문제인데 즉 「세상초월」, 「정치초월」사상 그리고 기독교인은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지 등의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이상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삼자교회의 신학 재사고와 사고의 주제와 내용들은 모두 달라진 현실에서 비롯되었으며 이 모든 것들은 현실사회와 현실문제와 직결되고 연결된 내용이다. 즉 삼자교회의 신학사고는 서재에서 이루어 진 것이 아니라 달라진 현실 속에서 공산정권을 긍정하고 따르면서 현실사회문제에 대해 신앙적, 신학적 응답과 정당성을 찾기 위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가 있겠다.
Ⅳ. 맺는 말
중국에서 사회주의 정권의 수립은 기존 기독교 교회와 신학에 큰 변화를 갖게 하였다.
당과 정부로부터 지도·관리·통제를 받은 삼자교회의 지도자와 신학자들은 기독교와 기독교 신학사상을 사회주의 중국에 맞도록 개조와 변용 작업을 해 나갔으며 특히 신학사상 부분에 있어 기존 신학의 재사고, 비판과 더불어 새로운 상황에 맞추어 신학에 대한 정의를 내렸고 새로운 신학의 의미를 찾았고 신학사고와 방법을 새로이 전개해 나갔다.
삼자교회 신학자들은 우선 공산화이후 중국기독교인이 새로운 정치현실에서 갖게 된 새로운 「영성체험」을 토대로 신학을 사고하였으며, 이 새로운 「영성체험」이 신학의 기초와 출발점이 되었다. 또 삼자교회신학은 「현실」을 바탕으로 신학을 전개하였으며 「인민의 편」에 서서 신학을 형성해 나갔다. 그리고 삼자교회의 신학 재사고와 사고의 주제·내용들은 모두 달라진 사회주의 중국이라는 현실에서 비롯되었으며, 신학사고의 모든 내용들은 현실사회와 현실문제에 직결되어 있다. 즉 삼자교회의 신학사고는 서재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달라진 현실 속에서 공산정권을 긍정하고 따르면서 현실사회문제에 대해 신앙적·신학적 응답과 정당성을 찾기 위해 이루어졌다고 볼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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