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영성,기도

[스크랩] 기쁨의 50일 절기(The Great Fifty Days)

수호천사1 2009. 4. 23. 11:59

기쁨의 50일 절기(The Great Fifty Days)



1. “기쁨의 50일”의 의미 및 명칭


1) 교회의 첫 절기로서의 의미


부활주일부터 50일간 계속되는 부활 절기는 “기쁨의 50일”(The Great Fifty Days)로 불리며, 부활주일과 오순절 성령강림주일을 연결하는 교회의 첫 번째 절기이다. 즉 부활절기는 부활주일부터 시작하여 오순절 성령강림 주일에 그 절정을 이루는 50일간의 기쁨의 절기이다. 이 절기는 교회가 탄생한 이후 3세기 동안 갖고 있던 유일한 절기였으므로 이것은 대림절과 사순절보다 더 오래된 절기이다. 히브리인들이 유월절로부터 오순절까지의 기간을 “호멜절”(Omer Days)
1)
로 지켰던 것처럼, 초대교회도 부활주일부터 성령강림주일 때까지 50일 동안을 완전한 기쁨과 승리의 기분으로 지속하였다. 이 절기가 갖는 기쁨과 승리의 기분은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도저히 알거나 되찾기 어려울 만큼 초대교회 교인들을 지배하여 왔다. 그러므로 교회력에서 이 50일간의 기쁨의 절기가 차지하는 비중이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2)예배학자 토마스 탈리(Thomas Talley)는 “초대교회는 이미 1세기에 부활잔치를 50일 간 계속하고 있었다”고 한다.3)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국교회의 개신 교회 내에서는 아직도 이 절기에 대한 정확한 의미규정은 물론이고, 용어조차 번역되어 있지 않은 형편이다. 결과적으로 개신교 내에서는 이 기쁨의 50일간의 절기에 대한 이해가 거의 전무한 상태이다. 그래서 7주 동안 계속되는 이 기쁨의 부활 절기 동안에 어떤 설교자들은 고난과 환란에 대해서 설교하기도 하고, 십자가에 대해서 설교하기도 한다. 즉 부활절을 하루의 잔치로 생각하고, 그 이후부터는 부활에 대한 내용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리는 것이다.
4)


2) 파스카(Pascha) 절기의 명칭


현재 부활 절기를 가리키는 용어로는 두 가지가 사용되고 있는데 하나는 “파스카(Pascha) 절기”라는 단어이고, 또 하나는 “기쁨의 50일”이라는 용어이다. 먼저 부활 절기를 가리켜 “파스카 절기”라고 부른 것은 자칫 “파스카(pascha)”라는 명칭이 부활사건을 지칭하는 것으로만 국한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활 절기를 나타내는 “파스카 절기”라고 부르는 것이 정확하다. 그 다음에 “기쁨의 50일”이라고도 부르는데, 부활 절기가 가지고 있는 메시지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기쁨”(A most joyful space of exultation)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초대교회는 부활주일부터 오순절 성령강림주일까지 50일간을 하나의 잔치같이, 하나의 “큰 주일”같이 기쁨으로 보냈다. 그러므로 부활 절기를 가리켜 “파스카 절기” 또는 “기쁨의 50일”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래서 이 절기 동안에 금식은 금지되었으며, 슬픔과 회개의 표현으로서의 무릎 꿇음은 허락하지 아니하고 서서 기도하였다.
5)


파스카 절기 기간은 단절되지 않는 한 기간으로 기쁨으로 보내는 기간으로 정의할 수 있다. 니케아 회의(Canon 20)는 이 기간 동안에 무릎을 꿇는 일을 공식적으로 금지시키고 있을 정도이다. 이러한 기쁨을 표시하는데 대한 방해가 될 요소들의 금지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적어도 2세기정도에는 범 교회적으로 단일화되어 시행되고 있었던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6)


2. “기쁨의 50일”의 역사적 의미


초대교회에서는 부활의 기쁨과 찬송은 부활주일 아침부터 오순절(Pentecost) 성령강림주일까지 계속되었다. 즉 초대교회에서는 감사와 기쁨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의 신비를 지키던 부활주일 혹은 “부활절 성삼일(Easter Triduum)”만 축하하는데 그친 것이 아니라 50일간 계속되었다.
7)
예배학자 토마스 탈리(Thomas Talley)에 의하면 초대교회는 이미 2세기에 부활잔치를 50일간 계속하고 있었다고 한다.8)


이 “파스카 절기”는 50일간의 교회력 기간이며, 부활주일에 시작한다. 이 절기는 50일째 되는 주일(성령강림주일)에 종결이 되는데, 이 날이 4세기 후반 이후에 “오순절 일요일”이라고 불렸다. 그러므로 이 절기는 부활의 기쁨과 찬양의 메아리가 부활절 주일 아침부터 오순절 성령강림주일까지 50일 내내 진하게 배어 있는 절기이다. 바로 이 기간이 소위 “기쁨의 50일”이다. 그런데 이 “파스카 절기”를 지키는 관습은 해마다 부활주일을 지키는 관례만큼이나 오래된 전통이었다. 초대교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 7주 혹은 50일간의 기간으로 부활절을 확대시켰다. 그런데 원래 부활주일부터 성령강림주일까지의 기간은 유대인의 “오순절”(Pentecost: 50일)에 해당되는 기간이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이 기간의 명칭이 “오순절”이라고도 불리었다. 그러나 후에 오순절 성령강림주일(The Day of Pentecost)이 오순절(Pentecost)이라는 이름으로 자리 매김을 하면서부터 부활절 50일간을 의미하던 Pentecost(문자 그대로 50일이라는 의미)라는 명칭과 혼란이 빚어지게 되었다. 더군다나 오순절이라는 말은 유대교의 3대 절기 중의 하나의 명칭이기도 하다. 그래서 현재 전 세계의 개혁교회들은 오순절 성령강림주일(The Day of Pentecost)과 유대인의 오순절(Pentecost: 50일간)의 혼돈을 막기 위해서라도, 부활주일부터 성령강림 주일 때까지의 명칭을 “기쁨의 50일”(The Great Fifty Days 혹은 Eastertide)로 부르고 있다. 그리고 “펜테코스트(Pentecost)”라는 단어는 이제 50일간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부활절기의 마지막 날인 오순절 성령강림주일을 지칭하는 단어로 국한하기로 하였다.
9)
여기서 우리가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은 부활절이 한 주간만 지키는 절기가 아니라 50일간이나 계속되는 교회의 가장 큰 기쁨의 잔치 기간이라는 사실이다.10)


1) 역사적 기원


교회의 가장 오래된 절기는 부활절로부터 시작되어 오순절 성령강림주일로 끝나는 50일간의 기간이다. 이 절기는 가장 오래된 절기로서 “성(聖) 50일”이나 “대(大) 50일“로 불렸다. 그래서 처음에는 부활절로부터 오순절 성령강림주일까지 50일간의 절기 전체가 하나의 계속된 경축으로 지켜졌다. 부활, 승천, 오순절 성령강림 등 그 절기가 일어난 역사적 사건들의 순서가 분리되어 경축되기 시작한 것은 4세기 이후부터이며, 이 절기가 여러 부분으로 분리된 것은 예루살렘에서였다. 학자들은 “파스카 절기”를 “주간들의 주간”(a week of weeks)으로서 50일간 지키게 된 것은 1세기 경, 유대인들의 “주간들의 절기”(Feast of weeks) 준수와 그 근원을 관련시킨다. 이 절기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50일간의 추수감사 절기였다. 그리고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 절기준수의 당위성은 레 23:15-21에서 찾으며, 50일 전체가 단일기념으로 지켜진 전례는 유대교의 “호멜절”(Omer Days)로 유월절에서 오순절까지 7주간이었다. 이 절기의 원래의 이름은 사버스(shabouth)인데, “주간들”이라는 뜻이며, 이 절기는 유월절 안식일 다음날 시작하여 50일째 되는 날 마감하는 7주간의 절기로서 확대되었다.
11)
사도행전 2:9-11에 의하면 이 50일째 되는 절기를 이스라엘을 순방하는 순례자들이 신성하게 지켰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후에 이 50일간의 오순절이 지니는 의미는 단순한 추수 절기의 마무리에서 더 나아가 역사적인 성격을 갖게 된다. 즉 후기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 절기는 ‘언약 갱신’의 시기이기도 하며, ‘율법의 수여’의 기간이기도 했다.12)


여기서 유대인들 가운데 가장 성스럽게 여겨지는 7이라는 숫자를 보게 되는데, 그들에게 있어서 7은 완전수(fullness)이다. 제 7일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들의 완전함을 축하하셨다. 그러므로 7이라는 숫자는 완전수이다. 그렇다면 7에 7을 곱한 수는 얼마나 완전한 숫자이겠는가? 그러므로 49일 동안의 기간은 “week of weeks"가 된다. 그 다음에 50이라는 숫자도 아주 성스러운 의미를 가지고 있다. 레위기 25장의 희년(year of Jubilee)
13)
을 생각해 보면, 여기서 50이라는 숫자는 종말론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이것은 해방과 복구(restitution)의 수이며, 커다란 기쁨의 숫자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봄의 49일 동안의 추수의 절기는 새로움(newness)과 기쁨(rejoice)의 사인(sign)으로서 50일에 의해 끝난다.14)


그리고 초대교회는 바로 이런 중요한 상징을 채택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충만 위의 충만이다.
15)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7×7로 상징되어질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 이틀 후부터 봄 추수를 50일 동안 기뻐하였듯이, 그러므로 교회도 부활을 50일 동안 기뻐하였다. 이것은 거의 완전한 구조이며, 상징적인 면에서도 아주 논리적이다. 그러므로 부활절은 50일간의 기쁨의 계절이다. 그리고 부활주일(Easter Day)은 이 기쁨의 절기의 시작이다. 초대교회는 바로 이 점을 처음부터 분명히 하였고, 나중에 니케아 종교회의(325년)에서는 이 성격을 분명히 하는 두 개의 금지령을 발표하였는데, 그것은 이 기간 동안에는 “금식과 무릎을 꿇지 말 것”을 명령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기간 동안 갖게 되는 성만찬은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찬을 주로 재현하는 것이 되어야지, 처형된 스승을 기념하는 제자들의 장례식 같은 기념식사가 되어서는 안 되었다.16)


2) 역사적 발전


학자들은 이렇게 유월절 안식일 다음날부터 시작하여 50일째 되는 날(오순절, 칠칠절, 맥추절)에 끝나는 이스라엘의 Sabouth 절기가 바로 “파스카 시기”의 기원이라고 인정한다. 그런데 기독교 절기로서 “파스카 절기”는 50일 모든 날이 동등하게 중요성과 가치를 갖고 그려졌다. 이 “기쁨의 50일”의 중요성을 증거하는 고대 문헌들은 많이 발견되었다. 3세기 초 터툴리안은 “파스카 시기”의 50일간을 “오순절(Pentecost)”이라는 단어와 동일시하여 사용한 것을 보면,
17)
이 단어가 50일째 되는 하루를 의미하는 용례와는 달랐음이 확인된다. 그는 특별히 이 기간 동안을 특징지었던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관련된 종말론적 소망과, 교회에 대하여 성령을 부어주심, 그리고 하나님에게 모여든 거듭난 백성들의 언약 등으로 생성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 50일간의 “파스카 절기” 동안에는 금식을 하거나 무릎을 꿇어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18)“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라”(마 9:15). 우리는 이 “신랑과 함께 있음”의 동기가 “파스카 절기”에 대한 초대 교회 작가들의 공통된 주제가 된 흔적을 볼 수 있다.19)‘신랑이 함께 있음’(마 9:15)이 파스카 기간의 주된 주제였으며, 살아계신 어린 양 그리스도로 인한 기쁨이 이 절기의 전체에 스며있는 덕목이었다. 이 절기는 ‘흰옷 입는 주간’이었던 파스카 옥타브(8일째 되는 날)로부터 시작하여 40일째 되는 승천주일을 거쳐 50일째 되는 오순절 성령강림주일로 끝난다. 파스카 절기는 부활절을 7주간으로 확대한 큰 주일들이며 이 절기가 갖는 주제는 사실은 주님의 날이 갖는 주제와 일치한다. 이 시기에는 그리스도의 왕권과 다스리심, 그로 인한 기쁨과 부활의 증인으로서의 선교적 책임 등이 강조되었다. 이 절기는 부활을 매주 경축하던 초대교회 성도들이 단 하루도 만족할 수 없었기 때문에 기쁨의 50일 절기를 통해 그 감격과 희열을 표현하고자 했던 열망이 담긴 절기였다.20)


아타나시우스는 지금 살아 계신 어린 양 그리스도가 소유한 기쁨 그 자체가 “기쁨의 50일” 전체에 진하게 배어 있다고 말한다. 그에게 있어 “기쁨의 50일”은 다가올 종말론적 세계에 대한 상징으로서의 의미가 있었다. 성 바질(Basil)은 7이라는 숫자의 7배라는 숫자적 관점에서 이 시기를 논평한다. 7의 7곱은 부활의 첫날에 대한 “영원한 배수”가 된다. 이것은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는 풍성한 생명을 상징화한다는 해석이다. 결국 “기쁨의 50일”은 하늘에서 성취될 생명의 상징이 되었다. 어거스틴은 이 기간 동안 고백되어 지는 “알렐루야”의 중요성을 언급하면서
21)
부활 절기에 대해 “주님의 부활하심을 기념하는 이 기간은 수난의 기간이 아니라, 기쁨과 평화의 기간이다. 금식을 하지 않고, 부활을 상징하는 뜻으로 서서 기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모든 행사는 주일 각 제단에서 행해 왔고, 할렐루야를 불러 우리가 장래에 할 일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 외에 없음을 나타내었다”고 표현했다.22)이 노래는 계시록 19장의 종말론적 승리의 찬가로 묘사된다. 도살당하신 어린양과 기독교 공동체의 연합은 부활언약의 종말론적 소망 그 자체이다. 그런데 4세기 이르러 이 “파스카 시기”는 분할되기 시작한다. 세 가지로 나뉘는데, “파스카 팔부”(the Pascha Octave), “절기의 마지막 날로서 50일째 날”(the Fiftieth Day, Pentecost Sunday) 그리고 “주님의 승천 기념일”로서 40일째 날(the fortieth Day, the Commemoration of the Ascension) 등이다.23)이처럼 부활절 안에 포함된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역들이 세분되어 기념되면서 부활절 후 40번째 날을 승천기념일로 기념하고, 50번째 날을 성령강림절로 기념한 것은 4세기 후반부터였다.24)


3. “기쁨의 50일”의 신학적 의미


기쁨의 50일의 신학적 의미를 탐구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사실을 기초적으로 염두에 두어야 한다.

첫째, 먼저 이 절기에 앞서 진행된 바 있는 금식의 절기를 전제하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자기성찰의 기회이며, 훈련과 새로움을 경험하는 사순절 기간이 이 절기에 앞서 시행되었다는 사실은 놓쳐서는 안 된다. 따라서 “파스카 절기”에 우리가 누리는 “기쁨의 신학”은 “고난의 신학”을 뚫고 난 이후 나타나는 감격임을 기억해야 한다.

둘째, 새로운 입교자들의 존재는 교회 앞에 중요한 복음적 증거로 남게 될 것이며, 이것은 단순히 역사적인 회상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을 매년 기념함으로써, 세례 받은 자로서 이루어 가야할 새로운 삶의 구조와 양식을 증진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초기 기독교 저자들의 문헌에서 자주 발견되어지는 사실과 같이 이 절기가 주는 강조점은 주간 단위에 의해 반복적으로 부활을 경험하는 공동체의 현존에 의하여 이 절기가 주는 역동성이 경험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25)


1) 기쁨의 신학


“기쁨의 50일”은 사실 확대된 주님의 날이며 파스카 절기는 부활절을 7주간으로 확대한 “큰 일요일들”이다. 따라서 “기쁨의 50일”의 주제는 “주님의 날”이 갖는 주제(주님의 죽으심과 살아나심 그리고 성령님으로 그의 공동체에 현존하심)와 일치한다. 파스카 절기가 분화 발전하기 전까지만 해도 이 절기의 중심주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새로운 피조물 됨”이었다. “주님의 날”의 성격이 그러했듯이, 우리의 “큰 일요일”이 진행되는 과정은 비록 부분적이긴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의 종말론적 희망이 성취되었고, 주님의 재림에 대한 기대가 공동체 가운데 지속적으로 소망되었다. 이에 따른 예전적 특징 또한 기대되는 그리스도의 통치를 예견하는 형태여야 한다. 이 절기가 갖는 영적 분위기는 바로 그리스도께서 현존된 기쁨이요, 그의 통치 안에서 누리는 자유 그 자체이다.
26)


2) 신앙성숙


모든 절기 중 “파스카 절기”는 세례 후 신비교육의 황금시기이다. 이 신비교육이라는 것은 새로 세례를 받은 자들에게 그들이 받은 성례의 의미를 교육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신비교육이라고 함은 성례(sacramentum)라는 라틴어와 신비(mysterion)라는 헬라어가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신비란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신비스러운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가 자각할 수 있게 하는 예식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 절기에 강조되어야 할 적합한 교육내용은 소위 “제자훈련”과 “전도학교” 개설 등이다. 제자훈련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이후의 변화된 삶을 지향한다는 의미로 정의된다면, 본 절기가 갖는 의미와 합치된다. 또한 이 절기를 맞추어 전도학교를 개설하여 이론적인 교육과 아울러 실천적인 프로그램을 진행시킨다면, 보다 역동성 있는 세례 후 교육의 커리큘럼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27)


3) 그리스도의 왕권


파스카 절기는 교회법과 예전 적인 특성에서 말해 주듯이 메시아 시대의 완성을 상징화하는 절기이다. 부활은 완전하고 완전해진(perfect and perfected) 교회의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확정해 주는 하나의 완벽한 메시지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부활에 승천이 결부된다는 것은 아주 의미심장한 일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을 인생과 같은 낮고 비천한 상태와 십자가의 부끄러움을 벗어버리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그의 영광과 권능을 충분히 과시하셨다. 그리고 그가 하늘에 올라감으로써 그의 육체적인 임재는 우리들 육안으로부터 거두어 갔지만28)그것은 신자들의 지상순례 생활 동안 그들과 함께 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더욱 효과적인 권세를 가지고 하늘과 땅 모두를 다스리기 위한 것이었다. 그의 육체가 모든 하늘 위에 높이 들림 받은 것과 같이, 그의 권능과 효력도 하늘과 땅의 모든 한계를 넘어 전파되고, 확대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승천과 통치하심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한 칼뱅의 신학에서 어떤 의미에 있어 그리스도의 승천일이 곧 장로교회의 축일과도 동일시하는 면을 보게 된다. 그리스도의 승천은 단순히 교회적 관심일 뿐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관심이기도 하다.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셨다면, 그리스도의 말씀은 교회뿐만 아니라, 세상을 다스리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초월적으로 세상을 다스린다.29)


승천이 비록 신학적으로는 부활에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개혁교회 교회력에서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승천축일과 관련하여 4가지 중요한 초점을 지적할 수 있다.
30)
첫째, 사랑의 원리의 보편성이다. 그리스도의 승천은 사랑의 우주적 성경의 시공간적 표현이다. 그것은 부활을 통해서는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승천을 통하여 보다 명백히 나타난다. 둘째, 비록 땅에서도 하늘의 현존을 인식한다. 하늘과 땅의 간격과 차이를 강조하기 보다는 그리스도의 승천은 “부활 이후”의 발생된 하늘과 땅의 간격을 더욱 축소시키는 의미를 갖는다. 루터가 잘 지적했듯이 하늘이 하나님이 계신 곳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어디에 계신가? 그 답변은 말씀과 성례전에 있다. 승천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사는 세상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곳에 의미를 부여하시는 행위를 그리스도를 통하여 현존하는 양식으로 나타내 주었던 사건이다. 셋째, 삶과 죽음이 실존하는 역사가운데 기독교 공동체를 유지시키는 방편이다. 신학자들은 교회를 전투하는 공동체로 설명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교회가 하늘과 땅에 공존하는 현실을 반영한다. 죽음과 삶속에서도 교회의 연속성은 바로 승천사건을 통하여 성취된다. 넷째, 승천은 부활의 진리와 오순절의 진리 사이를 연결시키는 가교역할을 한다. 부활의 사건은 승천의 첨가된 차원을 통하여 성취되어지며, 그것은 성령의 절기로 인도되어지면서 완결된다.


4) 선교적 성격


부활공동체의 증인으로서의 책임은 사회적 행동이나 사회적 봉사의 형태를 취하게 된다. 부활에 의하여 생성된 변화는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공동체의 변화 이상의 사회적, 문화적 변화에까지 확대되어야 한다. 부활공동체가 지녀야 할 빛은 공동체가 머무는 곳의 필요를 섬김으로 채워 주어야 하며, 또한 복음 선포를 통하여 그들에게 다가가야 한다. “파스카 절기”의 40일째 되는 날은 승천축일인데, 이 절기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승천사건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그런데 이것은 그 동안 “파스카 시기”가 지니는 부활절 세례 후 신비교육 기간으로서의 기능이 선교적 차원으로의 전이가 일어나는 것으로 특징된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8-20).31)


4. “기쁨의 50일”의 구성 및 성경적 의미


기쁨의 50일은 부활주일로부터 시작되는데, 이 부활주일은 “파스카 성삼일”(Easter Tridumm)의 셋째 날이자, “파스카 팔부”(the Pascha octave)의 첫째 날이기도 하다.
32)
그리고 “기쁨의 50일”은 40일째 되는 날인 "승천주일"을 거쳐서 50일째 되는 날인 "오순절 성령강림주일"로 끝이 난다.33)


1) 파스카 팔부(Pascha Octave)


파스카 팔부는 “흰옷을 입는 주간”으로서 새로 세례를 받은 이들에게 세례 후 교리문답교육을 부과시킬 필요성으로 말미암은 목회적인 관심에서 발생하였다. 일반적으로 8일간 지켜지는 이 절기의 뿌리를 유월절과 7일간의 무교절에서 찾는다. 현재 개신 교회에서는 이 날을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부활절 저녁에 나타나신 후 여드레가 지난 후 의심하는 도마에게도 나타나신 기사를34)통하여 얻은 공동체적인 영감을 이 절기에 투영시킨 것으로 해석을 한다. 그러나 4세기의 증거들에 의하면, 이 절기는 세례 받은 자 또는 신비교육을 필요로 하는 자를 대상으로 감독에 의하여 새 신자 소집의 필요성에 의하여 제정된 것으로 보인다. 신비교육(세례교육)에 대한 본문들은 아직 존재한다. 가장 특출한 신비교육 교본은 예루살렘의 시릴, 밀란의 암브로우스, 히포의 어거스틴, 등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파스카 주일이 계속되는 동안 부활주일 다음에 이어지는 다양한 설명들이 이 기간 동안 이루어진다. 특별한 초점은 이 절기의 8일째 되는 날에 맞추어진다. 이 날은 흰옷을 벗는 일요일이다. 이 표현은 세례 받은 새 신자가 세례식 때 입었던 흰옷을 벗는데서 유래된 것이다. 신비교육 전수자는 영원한 생명의 신비의 상징으로서 “파스카 팔부”의 8일째의 날을 이야기하는데, 이것은 세례 관련 요리문답의 종결의 날이며, 목회자로서는 세상 가운데에서 신실한 신앙인의 새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호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였다.35)


부활절 다음 주일(Low Sunday)는 부활절 바로 다음 주일을 가리키는 영국 교회의 표현이다. 부활절의 중요성에 빗대서 하는 표현인지 확실하지는 않다. 라틴 전통에서는 부활절에 새로 세례를 받는 자가 7일 동안 그 예복을 입게 되는데, 그 마지막 날인 일요일에 끝나게 된다.
36)


2) 부활절 두 번째 주일(도마 주일: Thomas Sunday)


우리의 기독교 신앙을 재확인하는데 있어서 가장 먼저 등장하게 되는 것이 부활주일 다음 주일인 도마의 날이다. 도마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신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 그러나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드디어 그는 부활하신 주님 앞에 서게 된다. 도마의 이야기는 도마의 의심에 그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심들 안에서 주님의 은혜를 만남에 있다. 예수님은 도마에게 나타나셔서 그를 책망하신 것이 아니라, “와서 보라, 그리고 믿으라.”고 말씀하셨다. 거기에는 도마를 향한 그 어떤 비난의 말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사건을 볼 때에 인간의 반응이라는 시각에서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행위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37)


3) 부활절 세 번째 주일(음식 주일: Meal Sunday)


부활하신 주님의 또 한 번의 나타나심은 음식을 함께 나누는 곳으로 둘러싸여 있다. 예수님께서는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에게 음식을 베풀어 주셨다.38)그 후에 그들은 부활의 주님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39)요한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해변에 나타나셔서 음식을 장만하시고 저들을 초청하셨다. 그래서 공동성서일과에 의하면 이 주일의 본문들은 모두가 다 음식에 관한 말씀들이 선택되었다. 그래서 이 주일을 흔히 Meal Sunday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와 관련하여 여전히 한 가지 문제가 되는 것은 이때에 우리는 아직도 계속해서 슬픔의 meal을 먹고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우리가 그렇게 기뻐해야 할 날들에 그렇게도 슬퍼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이 기간 동안 우리가 하는 성만찬은 천국에서의 잔치를 이곳에서 미리 맛보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성찬 성례전은 창조의 종국적인 갱신으로서 약속된 하나님의 통치를 대망하도록 해 주며, 또한 그것을 여기서 미리 맛보는 예전이다.40)성찬 성례전은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어질 ‘메시아의 향연’(Messianic Feast)의 예형(anticipation)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과 우리의 모든 다른 적으로부터 하나님의 능력으로 해방된 것을 기뻐하며 영원한 유월절 음식을 먹어야 한다.41)


4) 부활절 네 번째 주일(선한 목자 주일: Good Shepherd Sunday)


새로 만들어진 공동 성서일과에 의하면 이 주간에 교회는 요한 10장과 시편 23편 그리고 서신 서에서도 역시 목자와 관련된 성구들을 읽는다.
42)


5) 부활절 다섯 번째 주일(‘나는 ...이다’ 주일: I AM Sunday)


주일에 교회는 “나는 포도나무요”, “나는 길이요”, “나는 진리요”, “나는 생명이니” 라는 등의 말씀들을 읽는다. 그리고 계시록의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하는 등의 말씀을 읽는다. 이런 말씀들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누구신가라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는 ....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은 출애굽 당시에 모세에게 나타나신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I am who I am, 출 3:14 등)라고 말씀하신 바로 그 하나님이심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먼저 요한은 부활하신 주님과 불타는 나무 사이에 계신 하나님 사이의 연속성을 주장하고 있다. 또한 부활은 모세에게 나타나신 신성하신 하나님의 모습처럼, 신비하고 깊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43)


6) 부활절 여섯 번째 주일


이 주일에는 복음서의 말씀들은 주님의 승천을 준비하는 말씀들을 읽게 된다. 이제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새로운 양태로 함께 하실 것이다. 이 주일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읽게 되며, 또한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실 것을 약속하는 말씀들을 읽게 된다.44)


7) 부활절 일곱 번째 주일


많은 교회들이 이 주일은 부활절 일곱 번째 주일로 지키기 보다는 승천주일로 지켜진다. 왜냐하면 승천일은 목요일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중에는 잘 모이지 않는 서구 교회에서는 이 일곱 번째 주일을 승천주일로 지키는 곳이 많다.45)


8) 승천축일(The Commemoration of the Ascension)


승천축일은 “파스카 시기”의 40일째 되는 날로서 이 절기에 대한 기원은 “파스카 시기”의 50일째 되는 날인 오순절 성령강림주일의 성장과 관련이 있다. 이는 처음에는 언급되지 않다가 A. D. 300년 엘비라 공회의 법규에서 40일째 대한 기념을 언급함으로써 가속화되었다. 388년 닛사의 그레고리의 설교문에서도 이 날을 기념했음이 확인된다. 그 이후로 동서방 지역에서 이 절기는 확인되고 있으며, 크리소스톰과 어거스틴 등에 의해서도 확인된다.46)


9) 성령강림주일(The Day of Pentecost)


4세기 초까지만 해도 “기쁨의 50일”은 파스카 신비의 풍성함을 기념하는 하나의 통합된 절기였다. 그런데 이 하나의 결합된 절기가 “파스카 팔부”로 인하여 약화되기 시작하면서 이 절기의 50일째 되는 날에 대한 기념의 중요성이 점점 증가되기 시작했다. 이 절기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300년 엘비라 공의회에서 시작된다. 이 법령은 원래 그 동안 40일째 되는 날에 “파스카 시기”를 종결하려는 관습에 대한 교정작업의 일환이었다.47)그런데 338년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는 50일째 날이 절기의 종결과 주님의 승천이라는 두 가지 성격으로 지켜졌음을 확인하고 있다.48)이러한 양면적인 성격은 384년경 예루살렘에서 거행되었던 예전의 단면을 추론할 수 있는 “이제리아의 여행”(Egeria's Travel)에서도 나타난바 있다. 스페인의 수녀로 4세기에 예루살렘으로 성지순례를 했던 그녀의 기록에 의하면 예루살렘에서는 50일째 되는 날 아침 3시(현재의 9시)에 “성령이 내려 오셔서 사람들은 모든 종류의 언어를 듣게 되었다”는 바로 그곳에 위치한 성 시온 대성당에 모여 이 사건을 전하고 있는 사도행전의 구절을 읽었다. 오후에 모든 이는 “주께서 올라가신 장소”인 올리브 동산 꼭대기의 임보몬(Imbomon)에 가서 사도행전과 복음서에 나오는 승천에 관한 가시를 읽어 주었다.49)


50일째 되는 날의 두 가지 성격의 예전을 지키던 관례를 그렇게 오래 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40일째 되는 승천일이 따로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4세기 말경에 “파스카 시기”의 50일째 되는 날은 관심을 받게 되었고, 오순절(Pentecost)이라는 명칭을 획득하게 된다. 이것은 아마도 교회의 역동성을 위하여 성령님의 중요성이 강조되어야 할 당위성에 의해서 이루어진 현상일 것이다. 이러한 중요성이 가장 직접적인 결과로 나타나게 된 것은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제기된 성령님의 위격에 관한 선포였다. 그러므로 이 날은 순전히 성령님의 오심을 기념하기 위하여 설정된 날이다. 이러한 독자적인 위치를 획득하고 난 후 오순절 성령강림 주일은 부활주일에 필적할 만한 자리에 오르게 된다.
50)


5. “기쁨의 50일”에서의 승천일(The Day of Ascension)


부활 절기 중에 특별히 중요한 날이 있는데, 바로 부활 후 40일째 되는 날이다. 이 날은 바로 예수님의 승천을 기념하는 승천일이다. 승천일은 예수님 부활 후 40일째에 오는 날이므로 항상 목요일이 된다.
51)
승천일이 언제인지도 모르고 있는 한국교회는 신학적, 신앙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는 승천일을 회복해야 한다. 하나님의 통치가 거부되고, 인간들의 통치 소리만이 난무하는 21세기 포스트모던 시대 상황에서, 한국교회의 메시지에 승천신학의 이런 중요함이 선포되고 가르쳐져야 한다.52)


1) 승천일의 기원
53)


기쁨의 50일간의 계속되는 부활 절기는 중간에 한 사건에 의해서 방해받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부활 후 40일째 되는 날이다. 그래서 이 날은 언제나 목요일이 된다. 이 승천일과 관련하여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하늘 어디로 올라가셨는가?” 그리고 “하늘은 도대체 어디인가?” 하는 등의 많은 질문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이 사건의 초점이 아니다.


원래 주님의 승천은 독립된 사건으로 경축되지 않았고, 전체의 구속을 기념하는 부활절부터 오순절 성령강림주일까지 “기쁨의 50”(부활 절기)의 기간 안에 속한 날이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승천절에 대해서 기억하고자 할 때,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을 하나의 분리된 사건으로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는 부활절기 가운데 있는 연속성의 사건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기원적으로 볼 때, 교회의 부활절 축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부활, 그리고 승천을 동시에 지키는 통합절기(unified commemoration)였다. 그런데 이것이 4세기에 동방교회에서 독립된 축일로 나왔다. 부활절 후 40일째인 이 날은 성경에 의하여 결정되었으며, 초기 명칭의 하나는 “쿼드라게시마”(Quadragesima, 40일째의 날)였다. 이 날은 늘 목요일이었기 때문에 승천일은 성목요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 절기에 대한 기원이 『사도규약』(
Apostolic Constitutions, 375-380)에서 그 내용과 시기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다.54)이 절기와 관련된 한 가지 독특한 관습은 부활절 이후 예배 때마다 켜 온 부활절 초를 그 날의 복음서 봉독 후에 끄는 일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재 승천일은 개신교에서는 현현절과 더불어 교회에서 도외시되고 있는 절기이다.


엘비라 공의회(Council of Elvira, A. D.300년) 이후에 부활절 후 40번째 날부터의 금식이 회복되기 시작하였다. 엘비라 공의회 기록을 살피면 이미 이때부터 40번째의 날이 소위 마가복음 2장 20절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 이라는 인식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복음서의 기록들은 펜테코스트 동안에 금식을 금지하고 또 기쁨의 기간이 지난 다음에 금식의 회복을 하는 근거로 작용하였다. 기쁨의 50일 기간을 생략해 보려는 초기의 시도들은 스페인 엘비라 공의회에 의하여 거절되었고, 4세기말로부터 그리스도의 승천축일이 여러 곳에서 40번째 날에 지켜지게 되었다. 그러나 예루살렘과 알렉산드리아는 중요한 예외였다. 이 두 곳은 상당기간 이러한 변화에 저항하였다. 40번째 날에 승천 기념을 행한 것은
Apostolic Constitutions에 의하면 명백하다.55)


승천일이라는 구체적 용어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닛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 sa)의 388년 설교에서 나타난다. 크리소스톰의 경우에는 펜테코스트의 설교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대략적 연대는 386- 398정도로 볼 수 있다. 크리소스톰의 승천일과 관련된 두 번째 언급은 승천일에 행한 설교로 나타난다. 388년부터 407년까지 아퀼리아의 감독으로 재직한 크로마티우스는 자신의 설교에서 승천일을 지킬 것을 열정적으로 주장하였다.
56)


2) 승천일의 신학적 의미57)


첫째, 승천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구속사역의 완성을 의미한다.

승천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셨고, 하나님께서 완성하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셨고, 그리고 우리 가운데 계시던 그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셨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58)
분명히 육신을 입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다.59)그리고 이제 모든 육신의 고통과 모욕과 멸시는 끝났다. 십자가에서 멸시와 조롱을 당하신 그 분은 이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셨다.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 올라가셨다. 그리고 구원의 위대한 사역은 완성되었고, 하나님의 만족은 온전히 이루어졌다. 그리고 천사들은 “유월절 어린양께서 죽임을 당하시고, 이제 영광을 받으시고, 축복을 받으시며, 영광과 존귀와 권세가 그에게 영영히 있을 지로다”라고 찬양을 한다. 이것이 바로 승천의 첫 번째 의미이다.


둘째, 승천은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모든 인간의 동참함을 확인하는 사건이다.

부활은 전체 타락한 창조세계를 일으키심이다. 부활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만의 부활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창조 세계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하게 될 것을 미리 맛보는 사건이다. 이것이 바울이 이야기하고 있는 새 창조의 의미이며,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60)
는 말씀의 의미이다. 즉 예수 그것과 같다. 승천은 바로 이 일으켜 세움 받음을 아주 드라마틱하게 보여주는 사건이다.61)이 새로운 세계는 이제 종말의 때에 온전히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이루어질 그 모든 사건들을 미리 보여주신 사건이 바로 그리스도의 승천이다.


셋째, 승천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인간의 모든 고통과 고민을 다 경험하시고, 하늘에 전달함을 보여준다.

우리는 승천의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이 당하는 모든 고난을 당신의 품에 안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된다. 인간이 되셔서 이 땅에 내려와 우리 가운데 거하신 주님은 우리의 모든 고통과 역경을 당하신 분이다. 그는 우리의 슬픔과 눈물과 고통을 다 경험하신 분이시다. 그리고 그 모든 경험을 가지시고, 그는 하늘나라로 올라가셨다. 히브리서 2:16-18; 4:14-16은 바로 이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승천은 모든 고난당하는 자들에 대한 위대한 능력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넷째, 승천은 성령님의 능력에 의하여 부활하신 주님께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심을 가르쳐 준다.

승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간에도 공간에도 제한 받지 않으심을 의미한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께서 조그마한 마을에서 30년 동안 사셨다. 그러나 이제 부활의 능력과 승천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신다. 그는 모든 곳에 동시에 존재하시는 분이시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두 가지 잘못 생각하는 것들이 있다. 먼저,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실 때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하는 생각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승천하신 후로 그 분께서는 우리와 지금도 같이 하고 계신다.


다섯째, 승천은 그리스도께서 전 세계의 머리되심을 가르쳐 준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과 그의 통치하심은 특별히 개신교의 신학 가운데 칼빈의 신학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셔서 하늘의 보좌에 앉으심은 곧 그가 교회의 머리되심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머리되심을 상징하는 모습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승천은 교회의 문제만을 다루고 있지 않고 전 세계의 문제를 즉, 정치와 경제 등의 문제까지도 다루고 있음을 보여준다. 만일에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셨다면, 그리스도의 말씀은 교회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다스린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셨다면 이 세상에는 다른 통치자는 없다. 그들은 단지 통치자인척 할 뿐이다. 그리스도의 통치가 가장 높은 것이다. 결국 그리스도의 승천은 그의 위치를 모든 통치자들보다 위에 있음을 나타내 보여주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성육신에서 시작된 그의 메시아로서의 사역이 이제 완전히 완성되어지며, 결론 맺게 된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3) 승천일의 성경적 의미
62)


예수님의 승천은 막 16:19, 눅 24:51, 행 1:9에 나와 있으며 베드로가 예수님의 승천에 대한 증거를 가리키는 행 2:33에도 언급되어지고 있다. 여기에는 예수님이 성령으로 보내심을 받는다는 사실이 있으며, 오순절에 많은 사람들에 의해 목격되어졌다고 나와 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승천이 하나님께서 “내 오른편에 앉다”라고 말씀하신 시편 110:1의 성취에 있었음을 더욱 더 강조한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셨다”고 말하는 엡 4:8에서 똑같은 사실을 강조한다. 히브리서는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히 4:14) 라는 말씀으로 믿는 자들이 확신을 가지고 은혜의 보좌로 가까이 나아가도록 격려한다. 베드로는 믿는 자들이 부활하시고, 하늘에 오르신 주님(벧전 3:22)에게 부르짖음을 통하여 구원받는다고 성경에 말씀한다.

이렇게 승천의 의미는

첫째, 예수님이 지상에서의 사역을 끝내고 이 땅에 계실 동안 자기의 한정된 시간의 끝을 의미하는 것이다.

둘째, 예수님의 굴욕적인 시간이 끝나고 그의 영광은 다음에 오는 승천으로 이제 더 이상 가리워지지 않는다(요 17:5;행 9:3,5). 예수 그리스도는 이제 귀한 높은 하늘 보좌에 계신다.

셋째, 하늘로 부활한 인간의 첫 출입문과 하늘에서 새 역사의 시작(히 4:14-16; 6:20)을 표한다. 부활 안에서 인류의 대표자로서, 영광 받으시는 육체는 믿는 자들의 중재자이시다.

넷째, 예수님의 승천은 성령강림을 가능하게 했고(요 16:7),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을 보내시기 위해 하늘로 올라가시는 것이 필요했다.


4) 승천일과 오순절 성령강림주일의 관계
63)


기독교의 승천일과 오순절 성령강림절은 처음에는 역시 통합적인 축일(Unitive Festival)로 시작이 되었다. 즉 처음 몇 세기 동안 교회는 오순절 기간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일도 함께 지키고 있었다. 그래서 터툴리안 같은 교부는 기록을 남기기를 “그리스도가 오순절에 하늘로 올라갔다”고 주장하였다.
64)
또 4세기 전반에 유세비우스(Eusebius)는 오순절의 존엄과 거룩함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가운데 “이 오순절은 7주간 계속되었으며, 성서가 기록하고 있는 데로 우리의 구세주가 하늘로 승천하시고 성령이 내려오신 날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65)그러므로 4세기 전반까지 교회는 성령강림절에 예수님의 승천과 성령강림을 동시에 기념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4세기말에 이르러 이 두 가지의 중요한 사건의 의미를 보다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마침내 이 둘을 분리하여 지키게 되었다. 즉 그 내용은 주님 부활 후 40일째를 승천일로 하고, 50일째를 성령강림일로 정하였던 것이다.


초대교회의 기록에 의하면, 예를 들어 “사도들의 규약”(Apostolic Constitutions)은 부활절 후 40일을 “주의 승천하심을 기념하는 축제일”로 가장 적합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초대교회가 이렇게 정확한 날짜를 찾게 된 근거가 되는 것은 사도행전 1:1-11에서 특별히 3절을 근거로 하였던 것 같다. 즉 이 말씀에 의하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40일 동안”이라는 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일을 찾아낸 것이었다. 이 절기는 특별히 콘스탄티노플과 안디옥을 중심으로 소아시아 지방에서부터 시작한 것 같으며 후에 북쪽 이태리 그리고 동쪽으로는 예루살렘까지 번져 나간 듯하다. 분명한 것은 승천일은 언제나 부활 후 40일째 되는 날에 지켜졌으며(부활 후 6번째 주일 후 목요일), 때로는 그 다음에 오는 주일에 지켜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승천일은 목요일에 지켜졌다.


그리하여 이제 전에는 하나였던 오순절의 축제는 이제 승천일(Ascension)과 오순절(성령강림일: Day of Pentecost)로 나뉘게 되었다. 그리스도는 이제 하늘에 계시며, 성령께서는 지상에서 거룩한 교회와 함께 계신다. 그리하여 성목요일(Holy Thursday) 혹은 승천일(Ascension)은 부활절과 승천 때까지의 성서상의 40일 간을 표시하는데, 어거스틴은 이것이 4세기에 일반적으로 성립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66)
또한 실비아(Sylvia)의 순례(Pilgrimage)에는 그 날에 감람산으로 올라갔던 엄숙한 행진이 묘사되어 있는데, 그 산 위에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 헬레나 여왕이 교회를 세웠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부활절과 오순절 성령강림 주일은 교회력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중요한 절기(THe Great Fifty Days)의 첫째 날과 마지막 날이 되었다.


6. “기쁨의 50일”의 목회적 의미


기쁨의 50일 절기가 나타내는 주제를 올바르게 부각시키기 위하여 성서일과상의 성서적 연구는 이 절기가 갖는 “의미의 풍부한 다양성”을 도출하여야 한다. 우리는 분명하게 부활과 승천 사이에 있는, 40일 동안 예수의 부활현현 기사들과, 오순절 성령강림을 기다리는 10일간의 기록들을 얼마든지 성서 속에서 발췌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더욱 심화된 의미를 여기서 발견해야 한다. 부활하여 살아 계신 우리 주님께서 바로 “우리 가운데” 계신다는 것,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이것을 보다 더 분명하게 알게 하신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성령님의 사역”이라는 사실은 이 기간 동안 보다 더 부각되어야 할 주제이다. 또한 공교롭게도 이 절기는 만물이 약동하는 “새 생명의 계절”에 일어났다는 것도 흥미로운 사실이다. 따라서 “새로운 피조물의 거듭남”을 성서일과에서 강조할 필요가 있다. 이 기간 동안 이루어지는 성서일과는 일차적으로 사도행전과 요한복음에서 가져온다. 구약 대신 사도행전을 읽는 것은 이 기간이 “교회의 시간”임에 대한 반영이다. 특별히 이 기간 동안 강조되어야 할 사항은 교회 신앙의 복음적 성격을 강조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읽기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특성이 부각되어야 한다. 3년마다 각각의 해에 두 번째 읽기는 베드로전서(A년), 요한1서(B년), 요한계시록(C년)으로 구성되어 있다. 3개년 동안 7주간 읽기의 반복은 몇 가지 중심 주제를 나타낸다.67)


1) 성서읽기의 중심 주제
68)


첫째,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이다.

이 주제는 이 절기 자체가 나타내는 대표적인 주제이다. 특히 주일들은 이 실재에 대하여 다양한 국면들을 표현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파스카 절기”의 셋째 주일은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부활 후 식탁교제에 대한 설명으로 이루어진다.
69)
다섯째 주일에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나타나심을 확증하는 “나는 ...이다”(I am)라는 말씀에 비중을 둔다. 넷째 주일에는 시편 23편에 나오는 “선한 목자” 말씀과 요한 10장의 “선한 목자”를 병용하여 읽는다. 여기서는 고난당하신 그리스도, 부활하셔서 통치하시는 그리스도와의 긴장관계가 첨예하게 나타날 수 있는데, 특별히 C년에 독서할 요한계시록 본문에서는 도살당한 어린양이 바로 우리 목자 되심을 공존시키고 있음을 본다. 일곱째 주일에는 요한복음 나타나는 대제사장적 기도로서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것들은 모두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을 주제로 하는 독서들이다.


둘째, 성령님의 사역과 현존이다.

이 본문들은 사도행전 본문을 통하여 성령님께서 교회에 40일 동안 부재하였다는 오해를 불식시키는 것을 분명하게 할 필요가 있다. 베드로의 설교, 사울의 회심,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해진 사도들의 치유사건들, 교회의 연합 등은 교회에 현존하시는 성령님의 활동을 담고 있는 독서들이다. 더 나아가 두 번째 주일과 여섯 번째 주일의 복음서 본문들은 요한복음 14-15장과 20장에 있는 주님에 의하여 제자들에게 성령님을 주님의 요한의 해석을 사용함으로 현존하시는 성령님을 강조하는 것을 보게 된다. 두 번째 주일에는 특별히 요한복음 20장의 본문을 담은 독서로 이루어지는데, 여기에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고, 의심 많은 도마에게 나타났으며, 그들에게 숨을 쉬심으로 그리스도의 영을 주신다는 것으로 그 줄거리가 구성되고 있다.


셋째, 세례 받은 이후의 새로운 삶이다.

물론 사도행전 본문들이 복음공동체 속에 믿음을 제공하고, 치유하며, 선포하는 능력을 불어넣음으로써 세례공동체의 선교적 사명을 입증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본문들은 왕관을 쓰신 어린 양 앞에서 뿐 아니라, 이 땅 위에서도 신앙공동체로서 특징짓는 찬양의 메아리를 강조하고 있다. 요한1서 읽기들은 특히 세례공동체의 가장 기본적인 성격으로서, “사랑의 윤리”에 관심을 갖도록 이끈다. 반면 베드로전서에서는 하나님의 백성된 새로운 생명들에게 복 주심과 그 필요성을 지속적으로 주석하고 있음도 관찰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 성령님의 사역, 세례공동체의 새로운 삶의 중요성이 “기쁨의 50일”의 성서일과에 짙게 배어있는 중요한 주제들이다.


2) 절기에 적합한 성서본문
70)


(1) 제 1주 : 부활주일(Easter Sunday)
(요 20:1-18)71)(시 118:1-2, 14-24; 행 10:34-43; 골 3:1-4)

부활절은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기념절기이다. 왜냐하면 부활이 없었다면 기독교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부활은 기독교신앙의 반석과 같은 역사적 사실이다. 요 20:1-18에서 주의 깊게 볼 점은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의 사실을 제자들에게 알린 뒤,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가 무덤으로 달려가 개어있는 세마포를 보고 부활의 사실을 확인하고 돌아갔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기자는 예수 부활의 증거를 그렇게 제시한 것이다. 그런데 마리아가 부활을 확인하는 과정은 다르다. 마리아는 예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을 보고 ‘내 주의 시신을 어디에 가져다주었는지 알지 못해’(요20:13) ‘울면서’(요20:12) 주님을 찾으며 계속해서 ‘주의 시신을 찾겠다’(15절)고 하다가, 결국은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고 “내가 주를 보았다”는 고백을 한다. 마리아는 예수에 대한 신실한 사랑을 통해 부활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요한복음 기자는 이적(miracle)이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신앙을 갖게 만드는 중간매체의 역할을 할 뿐이며 결코 이적 때문에 또는 이적을 보기 위해 신앙을 갖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그의 복음서 전체에서 일관되게 가르치고 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신앙을 갖게 되면 더 이상 이적을 추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요 20:31). 부활절은 영원한 생명이며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신자들 사이의 절대적인 사랑의 관계를 확인하는 날이다(롬 8:38-39).


(2) 제 2주 : 도마주일(Thomas Sunday)
(요 20:19-31)(시 16;행 2:14a, 22-32; 벧전 1:3-9)

부활주일 바로 다음주일에 적합한 본문인데 핵심은 부활을 의심하는 사람들의 의심을 충분히 불식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모든 인간은 도마와 같은 면을 가지고 있다. 특히 과학문명의 절대적인 영향아래 있는 현대인에게 부활은 현대과학으로서는 설명할 수 없는 초이성적, 초자연적인 특별한 현상이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도마는 현대인들의 질문을 대표하고 있다(25절). 그 바램은 충분히 받아들여져 수용되며(27절) 이후 도마는 주님에 대한 완전한 신앙을 고백한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께서는 현대과학 지식을 넘는 초월적인 일을 하실 수 있다고 전제할 때만 이해할 수 있다. 부활에 앞서 천지창조를 생각해 보자. 하나님은 생명을 창조하셨고 그것을 가져갈 수 있으며 가져가신 생명을 다시 되돌릴 수 있는 분이다. 도마주일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생명경륜을 기뻐하면서 늘 현대인의 의식 속에 내재해서 생명잔치를 방해하는 세력인 의심과 죽음의 어두움을 떨쳐 버리는 환희를 맛보는 주일이다.


(3) 제 3주 : 음식주일(Meal Sunday)
(눅 24:13-25)(시 116:1-4; 12-19; 행 2:14a, 36-41; 벧전 1:17-23)

본문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일어난 이야기로 오늘날 부활신앙 없이 살다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 백팔십도로 다른 삶을 살게 된 신앙인들에게 일어난 변화가 어떤 것인지를 잘 그려주고 있다. 이 두 제자는 예수의 행위와 말씀에 매료된 뒤 이 분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분이라는 소망까지 가졌었는데 십자가형으로 죽임을 당하자 부활의 소식을 듣고도 믿지 못하며 깊은 좌절과 실의에 빠져 있었다(24:19-24). 그러나 부활한 예수께서 나누어 준 떡을 받는 순간 ‘눈이 열려서’ 예수의 부활을 확인하며 환호하게 된다(31절). 음식이 신앙으로 인도하는 중간역할을 한 것이다. 음식주일은 부활신앙의 눈이 열려 예수의 부활과 장차 있을 신앙인의 부활을 확인하면서 환호하는 기쁨의 주일이다.72)즉 음식주일은 부활이라는 소망의 음식, 죽음을 초월하는 영생의 양식을 먹으며 부활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세계 속의 사람들에게 희망의 이유를 말해주는 근거가 된다(벧전 3:15).


(4) 제 4주 : 선한목자 주일(Good Shepherd Sunday)
(요 10:1-10)(시 23; 행 2:42-47; 벧전 2:19-25; 요 10:1-10)

선한목자 주일은 부활하신 뒤 보혜사(변호자, 상담자, 위로자, 중재자, 권고자) 성령의 모습으로 교회와 함께 하셔서 우리를 기쁨과 감사의 삶으로 인도하시는 선한목자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심에 감격하고 감사하는 주일이다. 본문은 구약성서에서 선한목자의 모습을 아주 잘 그리고 있는 시편 23편의 말씀과 일맥상통된다. 여기서 “사망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4절 말씀은 죽음의 공포를 넘어선 부활의 기쁨과 신앙으로 인도하는 목자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강조하고 있다. 예수가 선한목자이심을 강조하는 이 구절은 성경이 아닌 다른 어떤 문헌에 나온다하더라도 깊은 감동을 받을 정도로 잘 표현된 목자상이 그려져 있다. 이 날은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알고 부를 수 있으며, 그 목자의 목소리를 아는 양들, 나아가 양을 위해 자기 목숨까지도 기꺼이 버릴 수 있을 뿐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목자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새삼 깨달으며 감격하는 날이다.


(5) 제 5주 : “나는...이다” 주일(AM Sunday)
(요 14:1-14)(시 31:1-5, 15-16; 행 7:55-60; 벧전 2:2-10)

예수님이 신자들에게 어떤 분이신지를 명확하게 선언하는 8절 말씀을 예수님의 부활에서 새삼 확인하며 감격하는 주일이다. 예수만이 ‘길, 진리, 생명’이심을 단호하게 선언하는 이 굴절은 기독교 진리의 절대성을 새삼 강조하면서 신앙인들이 그 속에 머물 것을 요구한다(행4:12). 이외에도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6:51), 참 포도나무(15:1), 양의 문(10:9), 선한 목자로 표현하는데 이를 통해 요한복음 기자는 모두 합쳐 일곱 가지에 달하는 표현73)에 잘 나타난 부활하신 주님의 완벽한 공급과 보호를 강조하면서 그분과 한 몸처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이 주일은 부활하셔서 구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를 충분히 깨닫게 하고 그 분과의 신비한 연합을 새삼 확인하면서 깊은 영적 교제를 나누게 하려는 열망에서 제정된 것으로 보인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선언은 예수가 그렇다는 말인데, 그 단어 각각은 예수 그리스도가 종교적, 철학적, 과학적 진리임을 동시적으로 선언하고 있다. 첫 번째 사실은 이해할 수 있으나, 이와 함께 예수가 철학적 진리, 과학적 진리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생명적, 과학적 진리인 예수의 부활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6) 제 6주 : 승천준비주일
(요 17:1-26)(요 14:15-21; 시66:8-20; 행 1:8, 17:22-31; 벧전 3:13-22)

승천은 부활하신 주님이 하늘로 떠나가심을 의미하며 이를 가장 적절히 준비하는 것은 떠나가시는 주님의 뜻을 분명히 알아 이를 이루어나가는 것인바, 그것은 바로 교회가 하나 되는 것이었다. 주께서 성령의 모습으로 교회와 함께 계시면서 이 하나 됨을 지켜보실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승천을 준비하는 이 주일에 요한복음 17장을 읽고 묵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17장에는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 승천하시기 전에 요한교회 공동체가 하나 되길 간절히 바라며 드리는 예수님의 기도의 정신과 내용을 깊이 묵상하면서 한 마음으로 부활을 기다리는 교회공동체, 영생을 소유한 교회답게 예수님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교회(4-5절), 주님과 하나 되어 주님의 인도를 받아 한 사람도 실족하거나 잃지 않는 교회(6-12절), 진리로 거룩하게 되어 악에 빠지지 않는 거룩한 교회가 되자고 다짐하게 되는 구절이 있기 때문이다(13-26절).


(7) 제 7주 : 승천주일
(행 1:6-14; 마 28:18-20)(요 20:19-23; 시 47; 벧전 4:12-14, 5:6-11)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것을 축하하는 승천축일은 원래 부활절기 중 40일째 되는 날이지만 서구에서는 주중에 모이기 힘들기에 많은 교회들이 승천주일로 지켜 왔다.
74)
예수님의 승천은 예수님의 지상 사역의 완성을 뜻한다. 부활하심으로 죽음의 세력이 패배(the defeat of death)하게 하신 뒤 하늘로 영광스러운 귀환을 하신 것(11절)을 기념하기 때문이다. 성령이 임하면 제자들은 온 세상에 그리스도를 전하는 증인이 되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승천은 제자들의 선교사역의 시작을 뜻하며 이 일은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까지 계속해야 한다.


(8) 제 8주 : 성령강림주일(The Day of Pentecost) (행 2:1-21)


인간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가 한 치의 빈틈도 없이 계속적으로 완벽하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지상에서 구원사역을 마치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늘로 부르신 뒤 이 분의 하신 역할을 완벽하게 대치할 존재를 즉시 보내셨는데 그 분이 바로 보혜사 성령이시다.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부활 승천하신 예수는 더 이상 이천년 전 이스라엘 땅에만 계신 분이 아니라 보혜사 성령으로 모든 교회와 교인들에게 함께 하시게 됨으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존재가 되는 놀라운 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즉 의사소통의 방식이 사람 대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성령 대 온 교회, 성령 대 온 성도로 광범위하게 확장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교회와 성도는 성령의 강력한 인도함을 받는데 그것이 그들의 언어와 그들의 생활방식에까지 미치게 된다. 방언을 말하고 유무상통의 공동체적 삶을 살게 되며, 무엇보다 구원의 영으로 이방인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게 된다. 이런 모든 이유 때문에 교회는 성령강림주일을 기뻐하고 축하하며 환희 속에서 감사하게 된다.


3) 설교의 방향


기쁨의 50일 절기에 어떠한 방향으로 설교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들을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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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부활의 감격과 기쁨이 느껴지는 분위기를 연출하는 선포여야 한다.

기독교는 기쁨과 감격의 종교이다. 그러나 그 기쁨과 감격은 반드시 고난을 뚫고 나온 기쁨이요, 감격이어야 한다. 역의 논리도 성립된다. 기독교가 말하는 고난은 부활 속에서 이해되어지고, 해석되어지며, 수용되어지는 그러한 고난이어야 한다. 이 절기에 제공되는 설교사역은 결국 고난의 십자가 신학과 영광의 부활신학이 만나는 형태로 그 균형을 잡아야 한다.


둘째, 이 절기의 설교주제는 “Kerygmatic Preaching"에서 ”Didactic Preaching"으로 그 비중을 점증할 필요가 있다.

이 절기가 갖는 신앙적인 명제들 중 하나는 “성숙”이고, 신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성화”이다. 세례를 새로 받은 새 신자 뿐 아니라, 기존 신자들 역시 “성숙”이라는 과정을 겪는 기간으로 이 절기를 사용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절기는 오늘 한국교회가 몸살을 앓고 있는 “성화의 결핍”을 부분적으로나마 채울 수 있는 적합한 절기이다. 아무튼 이 절기가 갖는 중요한 신학적 맥락은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남과 삶의 실천이다.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존재로서 합당한 새로운 사고와 새로운 삶의 스타일을 지향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설교의 중요한 포인트가 되어야 한다.


셋째, 설교자는 이 절기의 끝에 성령강림절이 위치하고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어떤 의미에 있어서는 성령님의 사역이 강조되어야 할 시기는 성령강림절 이후보다 오히려 “기쁨의 50일”의 기간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40일의 주님의 현현사건의 배후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성령님이 함께 하심이 전제되어야 하며, 승천과 성령강림사건의 10일 동안의 성자 부재기간에도 성령의 존재를 말하지 않고는 사도들의 행동이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쁨의 50일” 내내 이어지는 기쁨의 능력도 성령의 사역이요, 승천의 초월적인 사건이 확인된 것도 성령의 능력이요, 부활현현 사건의 메시지를 설명하는 것 모두가 다 성령과의 연계성 속에서 설명되어야 한다.


넷째, 이 기간 동안에 설교자는 임마누엘의 신앙을 강조할 수 있어야 한다.

결국 부활사건의 초점은 임마누엘에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가 바로 부활로 나타났으며, 승천과 우편에 앉으심으로 입증되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지니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더불어 하늘과 땅을 통치하신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그의 육체가 모든 하늘 위에 높이 들림같이 그의 권능과 효력도 하늘과 땅 모든 한계를 극복하고 전파되고 확대되고 있다는 사실이 확고하게 선언되어야 한다.


다섯째, 설교자는 이 절기 동안 선교적 관심을 강조해야 한다.

특히 본 절기에 우리의 선교적 관심은 좀 더 에큐메니컬적인 차원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즉 복음을 전파하는 차원(Gospel Mandate)과 사회봉사라는 차원(Cultural Mandate)이 적절하게 균형을 취한 선교적 관심이다. 부활에 의하여 일어난 놀라운 변화는 단지 한 개인의 삶의 변화 차원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며, 보다 우주적인 차원으로 확대시킬 필요가 있다. 그것은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모든 영역에서 도전되어야 할 과제이다. 우리의 선교영역을 좀 더 폭 넓게 이해할 수 있는 선포는 “기쁨의 50일”의 절기에 아주 적합한 시도이다.


부활절로부터 시작되는 부활 절기의 설교를 준비할 때 부활절이 단 하루인 것처럼 설교되어서는 안 되겠다. 또한 부활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려는 데에 너무 주안점을 두는 것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초대교회는 부활을 증명하려고 애쓴 것이 아니라 그것을 선포하라고 부름 받았음을 명확히 하면서 설교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승리하게 될 것이라는 “적극적 사고”에 강조점을 두는 메시지도 바람직하지 않다. 부활 절기는 그리스도의 승리를 선포하는 것이고, 그분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죄로부터의 승리, 죽음의 권세로부터의 승리를 선포하는 것이지 긍정적 사고를 통한 성공적 인생철학을 제시하는 자기중심적 메시지로 전락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선포되어야 할 부활 절기 설교에서 강조되어야 할 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역사에 대한 찬양, 거룩한 백성의 창조를 통해 부활의 승리가 어떻게 인간들에게 확장되어 가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설교,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성령님의 강림을 연결하는 설교, 부활의 은총이 성례전을 통해 중재됨을 선포하는 설교, 개인들의 윤리적 삶을 위한 결단을 촉구하는 설교, 주님과 동행하는 삶과 사명을 위해서 달려가는 삶에 대한 강조(눅 24장) 등이다. 그러므로 부활 절기의 설교는 종말론적 희망이 넘치는 메시지, 복음의 선포의 메시지, 새로운 삶에로의 전환을 촉하는 메시지가 선포되어야 할 것이다. 이때의 설교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 성령님의 사역과 현존에 대한 강조, 세례 받은 이후의 새로운 삶, 부활의 감격과 기쁨이 느껴지는 분위기를 연출하는 설교, 임마누엘 신앙의 강조, 선교적 관심을 강조하는 설교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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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예배의 방향


부활 절기는 부활의 신비를 전하고 재현하는 중요한 시간이다. 또한 다시 사신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뻐하고, 그분의 임재를 새롭게 경험하면서 그분의 주인 되심과 왕 되심을 선포하는 절기이다. 그러므로 부활주일 예배는 한 해의 모든 예배 가운데 정점에 해당하는 예배였다. 이 예배에서 모든 예배자들은 하나님의 신비와 승리, 그분의 측량할 수 없는 사랑과 설명할 수 없는 자비에 압도되게 된다. 이 부활 신앙은 교회와 성도들의 신앙의 근간을 이루었으며 또한 교회의 활동과 선교에 가장 중요 동인이 되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기독교의 예배와 삶의 근간을 이루었던 부활 신앙이 신화적인 내용 정도로 여겨지고, 부활의 신비에 대한 기쁨과 감격이 결여되어 있는 오늘의 예배 현장이 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한국교회는 교회력의 관점에서 볼 때 긴 사순절의 기간을 가진 후 정작 부활절은 하루의 행사로 그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세례나 성만찬 예전에서도 부활에 대한 신학적 주제는 간과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고난 받으심에만 초점이 맞추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혹자는 부활 절기를 지킴에 있어서 십자가에 대한 많은 강조가 있는 대신 부활에 대해서는 너무 불충분하게 강조되고 있음을 지적하기도 한다. 이는 한국교회의 예배와 삶을 지적하는 말이다.77)


초대교회의 부활에 대한 확신과 기쁨을 회복하는 것은 오늘 우리 예배 현장에서 가장 시급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초대교회 예배자들이 기쁨과 감격 속에서 주님의 부활을 기뻐하고 경축하였던 부활 절기와 관련하여 우리가 발견하고 새롭게 해야 할 예배 신학적 의미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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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부활 절기에는 그리스도의 다시 사심에 대한 강조가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다시 사심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완성이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새롭게 하시는 사건이 된다. 이것은 부활하심을 통해 우리들에게 구체적으로 그 사건이 이루어졌음을 강조되어야 한다.


둘째, 부활 절기에 그리스도의 현존하심과 통치하심에 대한 강조가 있어야 한다.

부활 신앙과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다”는 고백은 상호 보완적이다. 그분의 살아계심은 반드시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 안에 현존하심으로 나타나며,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권능의 주로 나타나게 된다. 그래서 몰트만은 초대교회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은 “살아 있는 자들과 죽은 자들에 대한 메시아의 특별한 위치를 나타내기 위한 중요한 표상”이었다고 주장한다.


셋째, 부활 절기는 기쁨의 절기임이 강조되어야 한다.

“기쁨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가장 확실한 표시”이기에 그리스도의 살아계심과 부활하심에 대한 신앙은 반드시 기쁨으로 연결되게 된다. 살아계신 주님이 우리 삶과 존재의 중심이 된다면 기쁨은 불가피한 것이다. 혹자는 “지금 왕이 성 안에 거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높이 올려진 성 위의 펄럭이는 깃발과 같이 기쁨은 우리에게 그런 마음을 갖게 한다”고 말했다. 부활 절기는 다시 사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며 통치하심에 대한 감격의 표현으로서 기쁨을 그 중심축으로 한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우리 주님의 부활을 경축하는 부활 절기는 기쁨과 찬송, 경축과 빛의 절기였다.


넷째, 부활 절기는 복음 선포의 절기임이 강조되어야 한다.

주로 이때에 세례가 행해진 것도 복음 선포와 관련이 있으며, 부활의 은총의 나눔으로서의 성만찬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부활절 전야 철야 모임은 세례와 성만찬으로 끝을 맺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시작되는 새 창조를 상징하였으며 이것은 복음 전도의 위임으로 귀결된다. 부활의 아침에도 그러했지만 가서 부활의 소식을 전하는 것은 부활 절기의 가장 중요한 삶의 덕목이다.


5) 현재적 의미


기쁨의 50일간의 부활 절기가 시작되면 교회는 예수님의 부활 이후의 행적을 돌아보며 부활하신 주님을 확인하곤 하였는데, 도마의 이야기(둘째 주일),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나누신 식탁에 대한 이야기(셋째 주일), 주님의 승천이야기(40일째, 혹은 일곱 번째 주일) 등이 주로 다루어 왔던 주제들이라 할 수 있다. 기쁨의 절기는 50일째 날인 성령의 임재와 강림을 기념하는 성령의 강림절로 끝을 맺게 된다. 이러한 기쁨의 50일인 부활 절기는 한국교회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요즈음 몇몇 예배학자들을 통하여서 초대교회로부터 지켜왔던 이 부활 절기인 기쁨의 50일간을 새롭게 조명해 보자는 논의들이 일어나고 있다. 서구의 교회가 오랫동안 지켜왔던 귀한 절기임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교회력을 단순화하였던 청교도들의 영향으로 이 절기를 모르고 지내왔던 것이 사실이다. 40일(사순절) 동안은 주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 깊은 묵상을 하면서도, 주님의 부활에 대해서는 부활절 단 하루만 기억하고 축하한다면, 전통적으로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하고 기념하여 왔던 부활에 대한 확신과 선포가 교회에서 너무 약화되어 균형을 잃은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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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부활이 없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고, 우리가 다 거짓말쟁이가 된다고 하였다(고전 15:14-15). 그러기에 부활은 우리에게 그렇게도 소중한 것이요, 우리의 참 소망이 된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이 부활의 소망을 1년 중에 단 하루만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즉, 1년 중 부활주일에만 주님의 부활을 축하하고 감사하고 만다. 그리고 부활주일 다음부터는 부활에 대해서 더 이상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이런 모습은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이다. 왜냐하면 부활 절기는 부활주일 하루만이 아니라 부활주일부터 시작하여 오순절 성령강림주일까지 계속되는 50일 간의 기쁨의 절기이기 때문이다.
80)
현재 한국교회에서는 이 “기쁨의 50일” 동안의 부활 절기(Eastertide)에 대해서 잘 모르고 지내고 있다. 그러나 이제부터라도 초대교회의 가장 중요한 신앙고백, 즉 부활신앙을 담고 있던 이 “기쁨의 50일”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81)기독교는 기쁨의 종교이다. 그리고 그 기쁨을 온전히 담고 있는 절기가 바로 “기쁨의 50일”이다.82)


7. “기쁨의 50일”의 문화적 의미


1) 기독교 정체성을 확립하는 절기


한국 교회는 지금 소비문화와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과 더불어 그 세력을 더해가는 민족주의와 다원주의의 도전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도전은 한국 교회가 더욱 이 사회와 민족의 문화 안에 뿌리를 내리고, 동시에 복음적 정체성도 더욱 분명하게 해야 한다는 이중적 과제를 부과하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부활 절기는 매우 큰 의미를 지닌다. 부활이야말로 기독교의 정체성을 분명히 할 수 있는 시금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와 신앙인들은 부활절을 통하여 자신의 신앙과 삶을 점검하고 새롭게 세워 나가야 한다. 동시에 한국교회는 이 부활절이 민족 복음화의 전기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부활절에 뒤이어 자리잡은 초파일 연등행사를 준비하는 상징물들에 압도되어 부활절이 교회 안의 축제로 움츠러드는 현실을 지혜롭게 극복해야 한다. 이런 취지로 교인들이 함께 참여하여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을 회상하고 증거하는 음악회와 뮤지컬을 비롯한 다양한 문화 행사를 지역 사회와 함께 하는 큰 행사로 삼으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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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교회공동체의 결속을 다지며 전도할 수 있는 기회


교회 안에서의 뮤지컬 공연은 성도들이 다양하게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특히 젊은이들이게 다가가기 위한 좋은 도구가 된다. 부활 성극은 교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참여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중요한 배역 외에는 어른들과 아이들이 함께 어울려 간단한 노래와 스킷을 할 수 있다. 이때는 이웃을 초청해 전도하는 기회로 만들어도 좋을 것이다. 이런 연극이나 음악은 오늘날 교회가 오늘의 성도들과 젊은이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열린 마음을 갖고 할 때 좋은 도구가 된다.84)


이와 같이 부활 절기에 교회에서 성도들과 이웃들을 대상으로 한 문화 행사를 기획하는 것은 뜻있는 일이다. 교회 안에 있을 수 있는 세대 간의 차이를 극복하고 아울러 이웃을 초청하여 자연스럽게 교회 문화를 익히게 하고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3) 전통문화를 부활신앙으로 토착화하는 절기


우리나라에는 정월 보름날이면 당집에서 제사를 드렸는데 열나흘 밤에 ‘옷걸기’와 ‘옷따기’를 하는 풍습이 있었다. 아무도 몰래 새로 만든 옷이나 한 번도 입지 않은 옷을 걸어 놓아 누구든 가난한 이웃이 가져다가 입게 하자는 취지를 담고 있다. 이렇게 ‘옷걸기’를 한 사람은 그 해를 복되게 살 수 있다고 믿었다. 오른 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선행이다. 우리가 해마다 맞이하는 기쁨의 50일을 그저 기독교인의 행사로 그칠 것이 아니라 전통문화를 부활신앙으로 토착화하여 이웃과 함께 사랑을 나누고 희망을 말하며 세상을 밝히는 뜻 깊은 절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85)


4) 일상에서 누리는 부활의 기쁨


생명이 죽음보다 강함을 깨달으며, 다소 혼란하고 어지럽던 일상 속에서도 자연은 다시 피어남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우리의 숨을 지켜본다. 숨 쉴 때마다 자연의 냄새를 들이마시고 주님의 사랑을 흡수한다. 부활은 보이지 않는 것, 관찰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분명 보이는 것이다. 가족들끼리 가까운 교외로 나가서 자연을 만끽하는 것도 부활을 생생하게 만나는 것이다. 다시 바쁜 생활로 돌아가도 이 자연의 푸름을 볼 수 있는 새로운 눈이 생긴다면 그 속에서 주님의 부활하심도 함께 목도할 수 있다. 우리의 삶은 내내 부활의 길을 걷는다. 성서 속에서만, 혹은 교회 안에서만 누려왔던 부활의 기쁨을 일상의 삶으로 끄집어내어 보면, 기쁨의 50일뿐만 아니라 하루하루 부딪히는 순간 속에서 지금 여기 살아있다는 감격과 활기가 삶을 이어가는 힘이 될 수 있을 것이다.86)이처럼 우리의 일상을 의미 깊게 조망할 때 그 속에서도 부활의 의미를 연결 지을 수가 있다. 막연하고 잡히지 않는 모습으로 남아있는 부활이 아니라 기쁨의 50일 동안 일상 속에서 부활의 기쁨을 찾는 것은 부활을 생생하고 실제적으로 경험하게 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8. “기쁨의 50일”의 예전 특성
87)


1) 예전의 기본적인 전제


이 기간 동안의 예전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기본적인 전제를 가지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첫째, “기쁨의 50일” 절기는 사순절 기간 동안의 금식으로 충분히 준비된 전형적인 그리스도의 절기라는 사실이다.

신랑이 함께 있을 때에는 금식하지 않는다는 주님의 말씀에 충분히 근거한 초대교회는 이 절기 동안 금식을 금지하며, 그리스도의 현존을 충분히 즐거워하는 기간으로 삼았다. 그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제자들과 부활의 식탁을 함께 하시는 주님을 회상하기도 했고, 똑같은 형태로 재현하기도 하였음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둘째, 교회는 이 절기 동안 서서 기도한다.

이것은 부활을 몸짓으로 표현하는 시도들이며, 이것은 또한 권위와 능력으로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의 왕적 통치에 대한 기대를 나타내 주기도 한다. 무릎 꿇음에 반해서 서 있음을, 이 절기의 기쁨의 성격을 잘 나타내주고 있는 표식이기도 하다.


셋째, 사순절 기간 동안 금지되었던 “알렐루야”로 찬양하는 것은, 천상적인 예전에의 공동체적 참여를 고백한 것이다.

또한 이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 안에서 교회의 기쁨을 노래하는 고백적 성격도 있다.


넷째, 세례 후 실시하는 신비교육의 장이 이 절기동안 이루어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신비가 그의 백성들에게 계시됨을 증거 하는 의식이 요청된다. 이것은 마치 사순절 기간 동안 세례적 성격을 지속시키는 작업과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지는 시도이다. 그러므로 사순절 동안 세례 성례전의 준비 작업이 이어지는 “파스카 절기”는 기존 회중들의 집단 속에 새 신자를 동화시키는 중요한 의식들이 사용될 필요가 있다.


2) 다양한 예전적인 시도들


이 절기 동안 분위기 고양을 위하여 점화된 부활절 촛불을 지속시키며, 50일 동안 내내 세례반(Baptismal Font)을 그대로 설치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한 예전적인 아이디어라 할 수 있다. 또한 교회의 인테리어는 최상의 모습으로 장식할 필요도 있다. 비록 절기가 갖는 원래의 예전 색깔은 흰색이라 할지라도, 이 절기의 기쁨의 분위기를 종합적으로 연출해 내는 것이 중요한 까닭에, 사용되는 색깔도 금색과 붉은 색깔과 흰색의 조화를 표현해 보는 것도 좋은 발상이라 하겠다. 새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을 위하여 관심의 표현을 공동체적으로 하는 것도 대단히 좋다. 예컨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위하여서는 공동체의 지원을 받아야 한다는 취지에서 중보기도를 하는 시간을 만드는 것도 바람직하다. 이때 가르침과 설교는 세례 받은 사람들의 삶의 의미에 초점을 두는 것이 바람직하며, 이것은 새로 세례를 받은 사람 뿐 아니라, 기존 신자 전체에게도 주의를 환기시킨다는 의미를 갖는다. 규모가 큰 교회라면 새로 입교한 사람들만을 위하여 특별히 공부하고, 기도하며, 선교적 사명을 습득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을 배려할 필요도 있다. 만약 회중의 규모가 작은 집단이라면 작년 부활절 때 세례 받은 이들을 기념한다는 취지에서 그들을 초청하고, 금년 새로 입교한 분들과 더불어 전 교인들이 오찬을 함께 하는 것도 공동체에로 빠른 동화를 위한 좋은 시도이다. 이것은 이 절기가 갖는 또 다른 주제인 “제자들과 함께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식탁교제”를 경험하게 되는 기회로 주어질 수 있다. 물론 파스카 전야에 세례의식을 하지 못했거나, 세례후보자들이 너무 많기에 파스카 전야에 모두 하지 못했다면, 이 파스카 절기의 주일들을 활용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이 절기에 읽게 되는 많은 성서일과의 본문들이 바로 세례와 성령을 주제로 다루고 있음이 이러한 시도를 정당화시키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


3) 성만찬적 특성


“파스카 절기”의 성만찬 성례전적 특성도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과 부활절의 7주간의 확대라는 절기상의 특성을 고려하여, 그 분과 함께 하는 부활 후 식탁교제의 일환으로서 이 기간 동안만은 매주 성찬성례전을 집례하는 것을 강조할 필요도 있다. 그리고 그 내용은 기쁨에 찬 부활식사라는 맥락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4) 예전음악


“기쁨의 50일”의 절기에는 기쁨의 음악을 적절히 사용하는 것이 좋다. 기쁨으로 노래하는 것은 인간의 심연에 존재하는 본능적 표현이며, 이러한 태도는 이 절기에 더욱 고양되어야 하며 촉진되어야 한다. 협연이나 칸타타 등 다양한 음악적인 행사들이 있을 수 있는데, 그 모든 음악의 방향성은 바로 천상을 향한 “알렐루야”가 되어야 한다.


5) 승천절과 이어지는 주일의 예전


교회는 그리스도의 승천과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다는 사실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토대로 승천축일의 예전적인 전통을 가지고 있다. 6번째 목요일에 일어나는 이 절기는 단순히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40일간 현현하셨다는 사실만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파스카 절기” 전체로서의 절정에 해당하는 날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가능하면 6번째 목요일에 특별예배를 드리는 것이 좋으나, 형편에 따라서는 이어지는 7번째 주일에 드려도 무방하다. 그리고 그 예전의 특성은 “부활과 승천의 연계성”을 유지하는 관점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승천은 하나의 독립적인 사건이 아니며, “파스카 절기” 전체의 의미를 증거 하는 하나의 중요한 입증사실 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9. “기쁨의 50일” 예배의 실제


1) 부활절기(Eastertide) 주일예배
88)


부활절기 주일들의 예배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참 기쁨과 감사가 표현될 수 있도록 준비된 예배이며, 대부분 부활주일 이후에 성찬 성례전이 거행되지 않는 관계로 성찬이 생략된 예배순서이다.


예배의 실제


예배로 부름 ··································································································· 인도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 11:25). “천사가 여자들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마 28:5-6).

기원 ·············································································································· 인도자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 이제는 우리가 주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찾지 아니하오니 이는 예수님께서 다시 사셨고 생명의 주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망의 골짜기에서 예수님을 건지심으로 우리 또한 건지실 것을 실로 보여 주셨사오니 이제는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이제 주님의 부활을 기뻐하는 오늘 하늘로부터 성령을 보내시어 우리의 기쁨을 충만케 하시옵소서. 우리를 구원하신 유일하신 이름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찬송 ····································· “예수 부활했으니”(154) ····································다같이

부활시 교독 ······························································································· 다같이89)

인도자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회   중 구주 예수 부활하사 사망 권세 이기셨습니다.

인도자 예수님께서 죽은 자의 부활을 알게 하시려고 다시 사셨습니다.

회   중구주 예수 부활하사 사망 권세 이기셨습니다.

인도자 예수님께서 정의의 승리를 보이시려고 다시 사셨습니다.

회   중 할렐루야 우리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다같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려고 다시 사셨습니다.

(혹은)

인도자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회   중 진실로 부활하셨습니다.

다같이 할렐루야!

찬송 ············································ “주님께 영광(155)·································다같이90)

죄의 고백 ····································································································· 다같이

인도자 부활하신 예수님을 뵐 낯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실망하여 엠마오로 돌아가던 제자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 부활하신 주님을 믿지 못한 도마, 두려워 떨고 있던 제자들……. 그들도 연약했지만, 오늘 우리들도 연약합니다. 이 시간, 주님 앞에서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과 허물을 내어 놓으십시다.

용서의 확인 ··································································································· 인도자

누가 감히 우리를 정죄하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는 죽으셨지만 오히려 살아나셔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계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주십니다(롬 8:34). 그러므로 그 어떤 것도91)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39절).

찬송 ································· “사망을 이긴 주”(152, 1절) ···································다같이

“사망을 이긴 주 교회의 머리라 죄 사함 받은 우리도 주 함께 살리라”

교회의 기도 ··································································································· 맡은이

기도송 ·········································································································· 찬양대

말씀을 위한 기도 ··························································································· 설교자

거룩하신 하나님, 이 시간 우리의 마음 문을 성령의 능력으로 열어 주셔서 주님의 말씀이 낭독되고 선포될 때에 우리가 은혜를 받게 하시며, 마음의 평화를 얻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믿음으로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의 말씀을 받게 하시며, 주님의 뜻에 복종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통하여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구약의 말씀 ··································································································· 낭독자

서신서의 말씀 ································································································ 낭독자

복음서의 말씀 ································································································ 낭독자

찬양 ·········································································································· 찬양대92)

말씀의 선포 ··································································································· 설교자

응답의 찬송 ···························· “다시 사신 구세주”(151)······························다같이93)

봉헌 ·········································································································· 다같이94)

찬송 ······································· “예수 부활했으니(154) ····································다같이

삶으로 나아가는 부활절 기도 ··········································································· 다같이

인도자 이것은 신앙의 신비입니다.

회   중 그리스도께서 죽으셨고,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셨으며,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입니다.95)

인도자 부활의 주님! 주님께서는 사망과 죽음을 멸하시고 지옥의 권세를 파하셨습니다.

회   중 우리를 지키시어 죄악을 이기게 하옵소서.

인도자 생명의 주님! 주님께서는 죽음을 넘어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사망을 이길 희망을 주셨습니다.

회   중 우리를 죽음을 넘어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다같이 사망을 이기시고 무덤 문을 열어 놓으신 부활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립니다. 아멘.

파송의 말씀 ···································· 고전15장 ············································ 설교자96)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라.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17-20).

축도 ·············································································································· 설교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고후 13:13).

2) 예수 승천주일 찬양예배97)


예배의 실제


일곱 교회(계1:20)와 일곱 영(계4:5)을 상징하는 일곱 촛대를 강단에 놓고 점화함으로 예배를 시작합니다. ‘요한’의 낭독자는 등단해도 좋고 ‘음성’ 낭독은 목소리만 들려줍니다.

찬송 ··································· 주 예수 이름 높이어(37장)·································· 다같이

인사 ········································ 요한계시록 1:4-5······························· 낭독자와 회중

요한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또 장차 오실 그분이,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이, 또 신실한 증인이시오 죽은 사람의 첫 열매이시오 땅위의 왕들의 지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찬송 ······································ 만유의 주 앞에(26장)······································· 다같이

기도 ·············································································································· 인도자

말씀 ······································· 요한계시록1:10-18 ········································· 낭독자

요한 주의 날에 내가 성령 안에서 내 뒤에서 나팔과 같이 울이는 큰 음성을 들었습니다.

음성 네가 보는 것을 책에 기록하여, 일곱 교회로 보내어라.

요한 그래서 나는 내게 들려오는 그 음성을 알아보려고 돌아섰습니다. 돌아서서보니, 일곱 금 촛대가 있는데 그 촛대 한가운데 ‘인자와 같은 이’가 계셨습니다. 그는 발에 끌리는 긴 옷을 입고 가슴에는 금띠를 띠고 계셨습니다. 머리와 머리털은 흰 양털과 같이, 또 눈과 같이 희고, 눈은 불꽃과 같고, 얼굴은 해가 세차게 비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를 뵐 때에, 내가 그의 발 앞에 엎드려져서 죽은 사람과 같이 되니, 그가 내게 오른 손을 얹고 말씀하셨습니다.

음성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살아있는 자다. 나는 한 번은 죽었으나 보아라, 나는 영원무궁하도록 살아있어서 사망과 지옥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

찬송 ···································빛나고 높은 보좌와(27장) ···································· 다같이

말씀 ·········································요한계시록 4:1-8 ········································· 낭독자

요한 그 뒤에 내가 보니, 하늘에 문이 하나 열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전에 내가 들은 그 음성, 곧 나팔소리와 같이 나에게 들린 그 음성이 말하였습니다.
음성 이리로 올라오너라. 이 뒤에 일어나야 할 일들을 너에게 보여 주리라.
요한 나는 곧 성령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늘에 보좌가 하나 놓여있고 그 보좌에 한 분이 앉아 계셨습니다. 거기에 앉아 계신 분은, 모습이 백옥이나 홍옥과 같았습니다. 그 보좌의 둘레에는 보좌 스물 네 개가 있었는데, 그 보좌에는 장로 스물 네 명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는 금 면류관을 쓰고 앉아있었습니다. 그 보좌로부터 번개가 치고 음성과 천둥이 울려나오고 그 보좌 앞에는 일곱 개의 횃불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 일곱 횃불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십니다. 그리고 그 보좌 가운데와 그 둘레에는 네 생물이 있었습니다. 이 네 생물은 각각 날개 여섯 개씩 가졌는데, 날개 둘레와 그 안쪽에는 눈이 가득 달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밤낮 쉬지 않고 찬양하고 있었습니다.

네생물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전능하신 분, 주 하나님!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다. 또 장차 오실분이시다.

찬 양 ··································거룩 거룩 거룩하신 주········································· 다같이

말 씀 ·····································요한계시록 4:9-11··········································· 낭독자

요한 그 보좌에 앉아 계신 분께, 그 생물들이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드리고 있을 때에, 스물네 장로는 그 보좌에 앉아 계신 분 앞에 엎드려서, 영원무궁하도록 살아계신 분께 경배드리고 자기들의 면류관을 벗어서 보좌 앞에 내놓으며 외쳤습니다.

장로들 우리의 주님이신 하나님, 주님은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기에 마땅하신 분이십니다. 주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셨으니, 만물은 주님의 뜻을 따라 생겨났고 또 창조되었습니다.

찬 양 ·········································존귀와 영광(51장) ········································ 다같이

말 씀 ·········································요한계시록 5:1-13 ······································· 낭독자

요한 나는 또, 그 보좌에 앉아 계신 분이 오른손에 두루마리 하나를 들고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안팎에 글이 적혀 있는 그 두루마리는 일곱 인을 찍어 봉하여 놓은 것이었습니다. 내가 보니 힘센 천사가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천사 이 봉인을 떼고 두루마리를 펴기에 합당한 사람이 누구인가?

요한 그러나 두루마리를 펴거나 그것을 볼 수 있는 이는 하늘에도 업고 땅 위에도 없고 땅 아래에도 없었습니다. 이 두루마리를 펴거나 볼 자격이 있는 이가 하나도 보이지 않으므로, 나는 슬피 울었습니다. 그런데 장로들 가운데서 하나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장로 울지 마십시오. 유다 지파에서 난 사자, 곧 다윗의 뿌리가 승리하였으니 그가 이 일곱 봉인을 떼고 이 두루마리를 펼 수 있습니다.

요한 나는 또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가운데 어린 양이 하나 서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어린 양은 죽임을 당한 것과 같았습니다. 그 어린 양이 나와서 보좌에 앉으신 분의 오른손에서 그 두루마리를 받아들였을 때에 네 생물과 스물네 장로가 어린양 앞에 엎드려 이런 말로 새로운 찬양을 했습니다.

장로와 생물들

주께서는 그 두루마리를 받으시고 봉인을 떼실 자격이 있습니다. 주님은 죽임을 당하시고 주님의 피로 모든 족속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서 사람들을 사셔서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주께서 그들에게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를 이루게 하시고 제사장이 되게 하셔서 땅위에서 다스리게 하실 것입니다.
요한  나는 또 그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선 많은 천사들을 보고 그들의 음성도 들었습니다. 그들의 수는 수천, 수만이었습니다. 그들은 큰 소리로 찬양했습니다.

천사들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권세와 부와 지혜와 힘과 영광과 찬양을 마땅히 받으실 만합니다.

요한  나는 또 하늘과 땅위와 땅 아래와 바다에 있는 모든 피조물과, 또 그들 가운데 있는 만물이 이런 말로 찬양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모두  보좌에 앉으신 분과 어린 양께서는 찬양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영원무궁 하도록 받으십시오.

찬송 ···········································면류관가지고(25장) ······································ 다같이

설교 ·················································································································· 목사

중보기도 ········································································································· 맡은이

주의기도 ································· 주기도문영창(548장) ········································ 다같이

마침인사 ······························· 요한계시록 22:20-21 ······························ 인도자와 회중

인도자  이 모든 계시를 증언하시는 분이 “그렇다. 내개 곧 가겠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다같이  아멘. 오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시여!

인도자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사람들에게 있기를 빕니다.

다같이  아멘.

 

 

참고문헌

 

● 국내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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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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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술논문

조성태. “교회력에서 부활절기(Easter cycle)의 위치에 관한 연구.” 미간행 석사학위논문,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2001.


1)원래 칠칠절(Feast of Weeks)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이 절기의 가장 오래된 이름은 맥추절이다. 출 23:16에 의하면 “너희가 밭에 씨를 뿌려서 지은 곡식의 첫 열매를 드리는 맥추절을 지키라”고 기록되어 있다. 출 34:22절에도 “밀 곡식을 거두어 드릴 때 맥추절을 지키라”고 되어 있고, 성결법전인 레 23:22에도 맥추절은 곡식을 거두는 절기임을 말한다. 이와 같이 칠칠절의 의미는 봄의 첫 곡식의 추수 감사절이다. 즉 칠칠절이란 첫 보리 수확을 하는 무교절로부터 시작하여 칠 주간을 지난 다음 날 곧 밀 추수를 완료하는 날로 시간적인 성격에 따라 칠칠절로 명칭 되었다. 이렇게 칠칠절의 원래 봄의 첫 수확물을 하나님께 드리던(민 28:26) 특별한 축제일을 지칭하는 것이나, 실제로는 보리의 첫 수확을 기점으로 해서 밀 수확을 마칠 때까지의 7주가량 되는 전반적인 곡물 수확기간과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후기 유대교에 와서는 이 칠칠절은 유월절 축제를 끝맺는 것으로 생각되어졌다. 즉 유월절에서 시작된 집회가 무교절 이후의 7주간의 추수기간이 지나고 마침내 칠칠절에 50일 동안의 추수 축제가 막을 내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날이 오십 일(레 23:16)이 되는 날이므로 “오순절”이라는 말이 쓰였다. 그래서 이 절기를 후기 문서에서는 헬라어로 오십이란 의미의 “펜테코스트”라는 말로 번역이 되었다.

2)주승중, 『은총의 교회력과 설교』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2006), pp. 114-115.

3)주승중, “기쁨의 50일 간의 부활절기,” 『새가정』 통권566호 (2005. 4), p. 14.

4)주승중, 『은총의 교회력과 설교』, p. 115.

5)위의 책, pp. 115-116.

6)조성태, “교회력에서 부활절기(Easter cycle)의 위치에 관한 연구,” (미간행 석사학위논문,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2001), p. 100.

7)Adolf Adam, The liturgical year, its history & its meaning after the reform of the liturgy,trans. by Matthew J. O`Connell (New York: Pueblo Publishing Company, 1981), p. 84.

8)Thomas J. Talley, The Origins of the Liturgical Year(Minnesota: The Liturgical Press, 1992), pp. 57-66.

9)주승중, 『은총의 교회력과 설교』, p. 116.

10)주승중, “교회력의 중심으로서의 부활절(A Paschal Center),” 『장신논단』 제17호 (2001. 1), p. 325.

11)주승중, 『은총의 교회력과 설교』, p. 117.

12)정장복 외, 『예배학 사전』 (서울: 예배와 설교 아카데미, 2000), p. 165.

13)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지니 이는 칠 년이 일곱 번인즉 안식년 일곱 번 동안 곧 사십구 년이라, 제 오십 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그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그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레 25:8, 10)

14)주승중, 『은총의 교회력과 설교』, p. 117.

15)(요 1: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16)주승중, 『은총의 교회력과 설교』, p. 118.

17)Tertullian, On Baptism, ch. ⅩⅠⅩ (c. 205). trans. S. Thelwall, Ante-Nicene Fathers, Ⅲ (Grand Rapids: William B. Eerdman Publishing Company, 1997), p. 678, 주승중, 『은총의 교회력과 설교』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2006), p. 118에서 재인용.

18)Tertullian, On Prayer, ch. ⅩⅩⅢ (c. 205). trans. S. Thelwall, Ante-Nicene Fathers, Ⅲ (Grand Rapids: William B. Eerdman Publishing Company, 1997), p. 689, 주승중, 『은총의 교회력과 설교』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2006), p. 119에서 재인용.

19)주승중, 『은총의 교회력과 설교』, pp. 118-119.

20)김운용, “사순절․ 부활절기의 예배와 삶,” 『사순절 부활절기 교회교육 자료집 Ⅰ』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 기독교교육연구원, 2005), p. 17.

21)Augustin, Letter 55: to Januarius(c. 400). trans. Wilfrid Parsons, Fathers of the Church, ⅩⅡ, pp. 284-285, 주승중, 『은총의 교회력과 설교』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2006), p. 119에서 재인용.

22)정장복 외, 『예배학 사전』, p. 155.

23)주승중, 『은총의 교회력과 설교』, p. 119.

24)서원모, “교회 역사 속의 부활절기,” 『교육교회』 통권334호 (2005. 4), p. 13.

25)주승중, 『은총의 교회력과 설교』, pp. 136-137.

26)위의 책, p. 137.

27)위의 책, pp. 137-138.

28)행 1:9.

29)주승중, 『은총의 교회력과 설교』, p. 138

30)위의 책, pp 138-139.

31)위의 책, p. 139.

32)전통적으로 부활절 전야(Pascha Vigil)에 세례를 받은 이는 그 다음 주일, 즉 “파스카 절기 2주일”까지 흰옷을 입고 지내면서 자신이 받은 세례(입교)성례의 의미에 대하여 교육을 받았다. 이것을 가리켜 mystagogy(신비교육, 세례교육)이라고 불렀으며, “파스카 절기 2주일”에 흰옷을 벗었으므로 이 날을 “백색 주일”(White Sunday)라고 불렀다. 이렇듯 “파스카 팔부”는 세례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세례 팔부”라고 불리기도 한다.

33)주승중, 『은총의 교회력과 설교』, p. 120.

34)요 19:1-26.

35)주승중, 『은총의 교회력과 설교』, pp. 120-121.

36)정장복 외, 『예배학 사전』, p. 170.

37)주승중, 『은총의 교회력과 설교』, p. 121.

38)눅 24:13-35.

39)눅 24:32.

40)정장복 외, 『예배학 사전』, p. 413.

41)주승중, 『은총의 교회력과 설교』, pp. 121-122.

42)위의 책, p. 122.

43)위의 책, pp. 122-123.

44)위의 책, p. 123.

45)위의 책, p. 123.

46)위의 책, p. 123.

47)위의 책, pp. 123-124.

48)Eusebius, Life of Constantine, Ⅳ, 64 (c. 338). trans. E. C. Richardson,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2nd series, Ⅰ. p. 557, 주승중, 『은총의 교회력과 설교』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2006), p. 124에서 재인용.

49)Egeria, Travels, ⅩⅩⅩ-ⅩⅩⅩⅧ (c. 384). trans. John Wilkinson, Egeria's Travels(London: SPCK, 1971), pp. 132-138, 주승중, 『은총의 교회력과 설교』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2006), p. 124에서 재인용.

50)주승중, 『은총의 교회력과 설교』, p. 124.

51)주승중, “승천일,” 『새가정』 통권567호 (2005. 5), p. 56.

52)위의 책, p. 58.

53)주승중, 『은총의 교회력과 설교』, pp. 125-126.

54)Apostolic Constitutions, Book Ⅴ, ch. ⅩⅠⅩ (c. 375). trans. James Donaldson, Ante-Nicene Fathers, Vol. Ⅶ (Peabody: Hendrickson Publishers, Inc., 1994), pp. 447-448, 주승중, 『은총의 교회력과 설교』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2006), p. 125에서 재인용.

55)조성태, “교회력에서 부활절기(Easter cycle)의 위치에 관한 연구,” pp. 110-111.

56)Thomas J. Talley, The Origins of the Liturgical Year,p. 66.

57)주승중, 『은총의 교회력과 설교』, pp. 126-128.

58)행 1:11.

59)요 1:3.

60)고전 15:20.

61)엡 4:9-10; 골 1:18-20; 시 68:18; 계 1:5; 21:1 등 참고.

62)편집부, “승천주일과 오순절,” 『교육교회』 통권281호 (2000. 6), p. 17.

63)주승중, 『은총의 교회력과 설교』, pp. 132-134.

64)Tertullian, On Baptism, ch. ⅩⅠⅩ (c. 205). trans. S. Thelwall, Ante-Nicene Fathers, Ⅲ (Grand Rapids: William B. Eerdman Publishing Company, 1997), p. 678, 주승중, 『은총의 교회력과 설교』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2006), p. 132에서 재인용.

65)Eusebius, Life of Constantine, Ⅳ, 64 (c. 338). trans. E. C. Richardson,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2nd series, Ⅰ. p. 557, 주승중, 『은총의 교회력과 설교』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2006), p. 132에서 재인용.

66)Augustin, Letter 55: to Januarius(c. 400). trans. Wilfrid Parsons, Fathers of the Church, ⅩⅡ, p. 285, 주승중, 『은총의 교회력과 설교』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2006), p. 133에서 재인용.

67)주승중, 『은총의 교회력과 설교』, p. 140.

68)위의 책, pp. 140-142.

69)A년: 눅 24:13-35; C년: 요 21:1-19.

70)최재덕, “부활 절기에 적합한 성서본문 연구,” 『교육교회』 통권334호 (2005. 4), pp. 4-8.

71)이 날은 파스카 팔부(Pascha Octave)라고 부르는 부활주일 후 8일간의 첫째 날이기도 하다. 이 기간 동안 초기 교회는 부활 주일에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보다 성숙한 신앙을 갖도록 교리문답교육을 시켰는데, 흰옷을 입고 받았기에 백색주일(White Sunday)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오늘날 어떤 한국교회에서는 부활주일에 흰 넥타이를 매는 전통을 지키고 있는데 거기에는 이런 배경이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시 무덤에 있었던 흰 옷 입은 두 천사들이 또 다른 이유인 것으로 보인다(요 20:12).

72)그런 점에서 이 주일에는 잘 알려진 찬양곡인 “엠마오 마을로”의 가사를 잘 소개한 뒤 훈련된 성도들이 선창하는 가운데 모두가 따라 부르면 더 감명 깊을 것이다.

73)이 표현들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높이, 깊이, 넓이(엡 3:19)가 잘 나타나 있다.

74)성서적 근거는 행 1:3절에 기록된 대로 부활하신 예수께서 40일간 저들에게 보이시고 말씀하신 데 있다.

75)주승중, 『은총의 교회력과 설교』, pp. 142-143.

76)김운용, “기쁨과 경축의 절기-부활 절기 기간의 설교와 예배,” 『교육목회』 통권33호 (2008. 3), pp. 50-51.

77)위의 책, p. 49.

78)김운용, “사순절, 부활절기의 예배와 삶,” 『교육교회』 통권300호 (2002. 3), pp. 26-27.

79)정장복 외, 『2008년도 교회력에 따른 예배와 설교 핸드북』 (서울: 예배와 설교 아카데미, 2007), p. 83.

80)주승중, “기쁨의 50일 간의 부활절기,” p. 13.

81)정장복 외, 『예배학 사전』, p. 170.

82)주승중, “기쁨의 50일 간의 부활절기,” p. 15.

83)임성빈, “기독교문화 심는 민족의 축제일 되기를,” 『오늘』 통권27호 (2005. 3), pp. 25-26.

84)정경환, “부활절, 드라마 예배 드려요,” 『오늘』 통권27호 (2005. 3), pp. 31-33.

85)태원석, “부활의 기쁨 50배 더하기,” 『오늘』 통권27호 (2005. 3), p. 30.

86)노영신, “일상에서 피는 부활의 꽃,” 『오늘』 통권27호 (2005. 3), pp. 36-37.

87)주승중, 『교회력과 설교 강의안』참고.

88)정장복 외, 『2008년도 교회력에 따른 예배와 설교 핸드북』, pp. 84-88.

89)부활시 교독 대신에 부활절 교독문을 낭독하거나, 혹은 부활과 관련된 시를 교독할 수도 있다.

90)예배의 시작부터 이 순서까지는 부활의 기쁨이 느껴질 수 있도록 인도자는 약간 빠른 템포와 격앙된 목소리로 예배를 인도하는 것이 좋다. 부활의 기쁨이 예배의 처음부터 확연히 느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이 예배 순서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91)이 부분은 용서의 선언이 단순 명료하게 되도록 성경 말씀(38-9절)을 요약하여 변형한 부분으로 필요하다면 성경말씀 전문을 그대로 낭독할 수도 있다.

92)한국교회에서 일반적으로 설교 전에 찬양대의 찬양이 들어가고 있는 현실을 반영하였다. 하지만 찬양대의 찬양을 생략하거나, 혹은 말씀을 위한 기도 전에 찬양을 넣는 것도 가능하다.

93)부활하신 주님과 동행하고 그분을 섬기는 내용으로 응답의 찬송으로 적합하다.

94)응답의 찬송을 부르는 동안 봉헌의 순서를 가질 수도 있다.

95)전통적인 서구교회의 예배에서 성찬 기도의 내용 속에 나오는 부분이지만, 부활절기의 특성을 고려하여 부활절기 기도에 넣는 것으로 응용하였다.

96)파송의 말씀과 축도는 그 날의 설교자가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97)조숙자, “예수 승천주일 찬양예배,” 『교육교회』 통권269호 (1999. 5), pp. 18-21.

출처 :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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