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기독교

[스크랩] 사회주의 중국에서의 삼자교회의 전개

수호천사1 2008. 12. 17. 17:40
사회주의 중국에서의 삼자교회의 전개
조나단 차오

목차
들어가는말
1950년대 삼자회와 삼자교회의 직접적인 건립배경
1950,60년대 정치운동에서의 삼자교회의 전개
1978년 삼자교회의 재개 움직임
1980년대 삼자교회의 활동재개와 가정교회와의 갈등개혁개방에 부응하는 삼자교회
1980년대 민주화운동 전개이후의 삼자교회맺는말

Ⅰ. 들어가는 말
「삼자교회」는 중국이 1949년 공산화된 이후 형성된 교회이다. 중국 공산당은 사회주의 시기에 중국 건설을 위하여 공산당이 일당(一黨) 통치하는 형태를 정치, 경제, 사회 , 문화, 종교 등 제반 사회 영역 가운데 실현하기 위해 애썼다.

  특별히 공산화 된 이후 중국 공산당은 정치운동을 통해 전 중국인들에게 영향을 끼쳐왔다. 사회주의 시기의 중국에 있어서, 종교는 중국 공산당의 전체 통치 영역 가운데 하나였기에, 교회의 발전 역시 중국의 정치, 경제, 사회의 영향을 받으며, 그 배경 아래 발전해왔다.

  구체적으로 1950년대의 중국은 오랜 전쟁으로 인한 국내 사회환경 조성과 신(新)중국 수립을 위해 교회까지 포함한 제반 영역에서 연합운동과 제국주의와의 단절을 꾀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기독교삼자애국운동위원회(中國基督敎三自愛國運動委員會)에 가입한 교회인「삼자교회」가 탄생하게 되었으며, 이후 소위「지하교회」, 혹은「가정교회」라는 삼자를 거부하거나 반대하는 교회도 생겨나게 되어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1960년대에서 1970년대 중반까지 중국은 문화대혁명이라는 10년의 대동란 기간동안, 계급투쟁 일색의 극좌노선과 정책을 펴게 된다.
이런 이유로 이 시기에는 정치투쟁 일변도로 인한, 경제, 사회, 민생 피폐와 함께 종교와 민족이 계급투쟁의 대상으로 철저히 타파해야 할 적이 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 동안 공식적인 삼자교회는 폐쇄되거나, 철폐되어 거의 10년 동안 그 발전이 정지되었다.

  개혁 개방시기에 들어와 중국 공산당은 떵샤오핑(鄧小平)의 노선 전환으로 인해, 경제에 대한 개혁과 개방 정책을 실시하게 되었다. 이후 많은 해외의 자금이 중국에 투자되었으며, 놀라운 경제발전을 이루었다.

  이런 변화된 정치, 경제, 사회 배경아래 삼자교회와 가정교회는 그 동안의 내부적인 문제와 잠재해있던 갈등이 외적인 공간과 생존 기회의 확대를 통해 사회 전면에 표출되면서 현재에 이르렀다.

  이 글의 목적은 삼자교회에 대한 전면적인 비판과 부정에 있지 않다. 전체 중국교회에 대한 인식과 이해 차원에서 삼자교회의 탄생과, 발전, 현재의 모습을 통해 그 성격과 갈등을 파악하고 좀 더 중국교회를 바르게 이해하고 돕기 위한 것이다.

  이 글은 주로 사회주의 시기의 중국에 있어서 중국 공산당의 정치노선과 정책이 어떻게 전개되느냐에 따라, 그 정치와 사회환경에 의해 삼자교회가 그에 부응하여 어떻게 발전하여 왔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이런 접근을 통해 우리는 궁극적으로 삼자교회의 성격과 그 특성을 규정짓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Ⅱ. 1950년대「삼자회」와 삼자교회의 직접적인 건립배경
  1949년 10월에 중국 공산당이 정권을 획득하고 나서, 이들은 전체 중국인을 통치, 장악하기 위해 통일전선(統一戰線, 줄여서 통전이라고 한다)의 방침을 채택하여, 사회 각 영역에 통전을 목적으로 한 군중조직을 건립하였다.

  오늘날 삼자교회는 바로 이런 중국공산당의 일원화(一元化)된 당의 지도를 실행하기 위한 대중운동 일환인 삼자혁신운동(三自革新運動)을 통해 생겨났다. 삼자혁신운동의 목표는 정부의 지도를 받는 전국적인 성격을 띤 기독교조직의 건립이었기 때문이다.

  삼자혁신운동을 통해 결국 1954년에 중국기독교삼자애국운동위원회(中國基督敎三自愛國運動委員會, 줄여서「삼자회」라고 한다)가 건립이 되었다. 삼자교회는 전국적인 기독교 기구인「삼자회」에 가입한 교회를 말한다.

「삼자회」와 삼자교회의 직접적인 건립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역사적, 사회적인 배경이 있다.

  첫째, 1949년 9월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中國人民政治協商會議)에 8명의 각 종교지도자들중, 기독교계에서 공산당의 통치와 지도를 받아들이고, 이들과 협력할 것을 주장하는 5명의 종교 지도자가 초청되었다. 즉 우야오쫑(吳耀宗: Y. M. C. A의 출판부 주임, 1954년에 삼자회 주석이 됨), 자오쯔천(趙紫宸: 연경대학 교수, W. C. C 회장), 리우양마오(劉良模: Y. M. C. A 학생부 간사, 전국 정협위원), 떵위즈(鄧裕志: Y. W. C. A 총무), 짱쉬에옌(張雪岩:《田家》잡지사 사장 겸 편집인) 이었다.

  이들의 회합 이후에 교회 방문단이 만들어졌다. 이는 인민정부에 교회의 대표로서 의견을 제시하고, 공동강령에 대해 해석하고 공동강령에 명기된 종교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이들은 각 교회를 방문하면서「종교신앙의 자유」에 대해 설명하며, 신중국인 사회주의 시대가 와도 종교에 제한이 없을 것이라고 선전하였다.

  둘째, 1950년 5월 2일, 6일 및 13일에, 위에서 언급한 5명의 교회 방문단과 당시의 정무원(政務院) 총리 쩌우언라이(周恩來)가 만났다.
 
  이들은 새로운 중국에서 기독교가 과연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와 새중국에서 기독교의 특징이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관해 담화를 나누었다. 그 결과로 7월 28일「중국의 기독교 선언」이라고 일컬어지는〈중국기독교가 신중국 건설 가운데 노력해야 할 길〉을 발표하였다.
이 내용의 핵심은 두 가지로, 곧 서양 제국주의로 대표되는 서양 선교사와 선교단체로부터의 분리를 이루어 자주독립의 노선을 걷는다는 것과, 중국 공산당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의 많은 교계 지도자들에게는 이 기독교 선언에 참여하여 서명할 것이 요구되어졌다. 서명을 하는 사람들은 신중국을 환영하는 자들로, 서명하지 않는 사람들은 신중국 자체를 반대하는 자들로 간주되었다.
  한편 이 당시 중국에 있던 선교사들은 기독교 선언의 내용을 보고서는 자신들이 중국에 머무를 수 있는 기한이 멀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으나, 그럼에도 자신들의 정부가 자기들을 대변해 줄 것이라 생각하였다.

셋째, 1950년 6월 25일의「6. 25」한국전쟁의 발발은 제국주의와의 분리 및 청산에 대한 중국의 필요를 더욱 촉발시켰다.
  이 전쟁으로 중국과 미국과의 관계가 적대관계로 급변하였으며, 미국선교사들이 가택연금에 들어가게 되었다.
  10월에는 인민해방군이 6. 25 전쟁에 투입되어, 직접적으로 중국과 미국이 대치하는 상태로 악화되었다. 12월이 되자 중국 공산당은 미국으로부터 오는 자금을 동결시켰으며, 북한을 돕고 미국에 대항한다는「항미원조운동(抗美援朝運動)」을 발기하여, 반미(反美)정서를 고무시켰다.
  동시에 기독교가 제국주의에 이용된 것을 지적하여, 교회로 하여금 더욱더 정부의 관리를 받아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1951년 4월에는 뻬이징(北京)에서「미국으로부터 보조를 받는 기독교단체 처리회의」를 열어, 미국의 원조를 받고 있는 목회자들을 모이도록 하여, 공개적으로 비판대회를 열었다.

  이들은 제국주의의 앞잡이로 비판당했으며, 이후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 그 지역 종교사무국에서 주관하는 비판을 또 받아야 했다. 이 회의에서는 기독교의 새로운 지도기구로서,「중국기독교항미원조삼자혁신운동위원회주비위원회(中國基督敎抗美援朝三自革新運動委員會籌備委員會)」가 성립되었다. 이 기구는 이후 중국교회의 유일한 지도조직이 되었으며, 이에 따른 구체적인 계획을 실행하기 시작했다. 이는 「중국기독교삼자애국운동위원회」, 즉「삼자회」의 전신이다.

  넷째, 1954년에 정식으로 성립된「삼자회」로 인해 1922년부터 각 교파와 기독교기구 대표들로 구성된 중화기독교협진회(中華基督敎協進會)가 전국교회를 연결하는 기능을 상실하게 되어 결국 1955년에 이 단체는 사역을 종결하게 되었다.

  이 의미는 이때부터 중국 내에 기독교 조직은 오직 하나 삼자회 밖에 없게 되었다는 것과 중국 공산당이 다스린 후, 기독교가 어떠한 방법으로든 독자적인 활동을 할 수 없고 정부의 지도와 통제 내에 있어야 함을 분명히 한 것이다. 삼자교회는 바로 위와 같은 과정을 거쳐서 성립된 삼자회에 등록 가입한 교회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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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1950,60년대 정치운동에서의 삼자교회의 전개
  1950년대의 삼자교회는 중국 공산당의 사회주의 개조와 국가건설이란 목표에 의해, 정치적인 삼반오반(三反五反)운동, 반우파(反右派)운동 등으로 인한 영향을 받아, 당과 국가에서 원하는 교회와 기독교인으로의 거듭나는 의식화 교육의 일환으로 주로 사회주의 교육을 학습 받아야 했다.

  또한 개조를 통해 농촌이나 공장에서 노동을 해야 했다. 전체 교회 차원에서는 교회정돈 작업을 통한 합병운동의 영향을 받아 교회가 많이 축소되었다. 예를 들어 상하이(上海)같은 경우는 1950년에 200여 개의 대소(大小) 예배당과 정식 집회처가 있었는데, 교회연합예배 운동을 거행한 이후에는 23개만 남았고 결국에는 8개로 축소가 되었다.

  1958년부터 전개된 인민공사(人民公社)운동, 대약진(大躍進)운동 등, 급속한 집단화와 중국 사회현실을 고려하지 못한 경제정책 등으로 인해, 또한 마오쩌뚱(毛澤東)과 리우샤오치(劉少奇)의 권력 투쟁과 갈등에 따른 환경적 영향으로 1960년대의 삼자교회는 더 강력하게 정부의 관리와 통제를 받게 되었다.

  계속적으로 교회가 감소되는 한편 하방(下放)운동을 통한 교역자와 교인의 노동개조, 인민공사란 집단화와 정치학습으로 교회활동에 참가하는 기회마저 줄어들었다. 1961년부터는 주일학교와 각 부서 활동이 차례로 금지되었다. 주일학교는 제국주의 영향으로 아동을 해치며, 문화침략의 도구가 된다는 점을 들어 금지시켰다. 교회의 각 부서 활동의 폐지는 각 교인들의 필요와 영성에 많은 결핍과 부족을 초래하였다.

  그러다가 1966년부터 1976년까지 문화대혁명 기간에는 마오쩌뚱의 탈권투쟁과 함께 마오의 승리로 인한 계급투쟁 노선이 전개되어, 마오쩌뚱 숭배가 중국 전역에서 행해지고 개인우상화 작업이 진행이 되었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홍위병(紅衛兵)들에 의해 구(舊) 사상, 문화, 습관, 풍속 등「4구(舊)」타파를 외치며, 각 종 문화재와 건물을 파손되었을 뿐 아니라, 십자가, 교회, 성당 등도 파괴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오면 극좌(極左)노선으로 종교 자체가 계급투쟁의 대상이었기에, 많은 신자들이 단지 믿는다는 이유 하나로, 극심한 비판과 노동개조형에 처해졌다. 홍위병들은 삼자회를 강제로 해체하고, 삼자회 지도자를 비판하였으며, 삼자운동을「리우샤오치와 우야오쫑의 음모」라고 하여 수정주의 타도 대상으로 삼았다.

  문화대혁명 기간동안 삼자교회의 부지와 부속건물 등 교회의 많은 재산이 점유를 당했으며, 교회는 완전 폐쇄되거나, 공장이나 창고등 다른 용도로 전용(轉用)되었다. 중국 곳곳에서 성경이 몰수되고 불태워졌으며, 삼자교회의 공공의 모든 집회가 금지를 당했다.
이 당시 삼자교회 지도자들과 교인들이 겪은 심령상의 고통과 상처는 대단해서, 이 때는 기독교인이란 이유만으로 멸시를 당하거나,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삼자교인과 지도자들은「반혁명분자」로, 소귀신, 뱀귀신 등으로 배척을 당했다.

  이들은 공산당의 정책과 노선이 극좌노선으로 바뀜에 따라 이전 시기에 정부에 협력하고 공식적인 집회를 허락 받았던 것에서, 공개 집회의 정지, 기도의 제한 뿐 아니라 심지어「반혁명분자」로 감옥에 수감되는 사태까지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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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1978년 삼자교회의 재개 움직임
  1978년 12월 11기 3중전회 이후, 떵샤오핑(鄧小平)의 4개 현대화와 개혁 개방 정책이 실시되면서, 그 전의 극좌적이며, 이데올로기적인 마오쩌뚱의 노선에서, 실용주의적인 떵샤오핑 노선으로 중국공산당의 정책이 전환되었다.


  1980년에는 문혁시대의 4인방이 체포되어「반혁명집단」으로 법의 심판을 받았으며, 마오쩌뚱 역시 문혁이란 착오(錯誤)를 범했다고 평가를 받았다.

  1980년대 이후 중국 공산당은 중국의 경제건설을 가장 중요한 문제로 대두시키면서, 경제발전을 위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에서 총력을 기울여 외국 자본을 유치하고, 투자를 증대시키며, 국제교류를 증진시키는데 노력하였다.

  이런 목표로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도 다시 통전적인 정책을 회복하여 실행해오고 있다.

1980년대 공산당의 정책 전환으로 종교부분 역시 통일전선적인 가치로서 인정이 되어, 삼자교회와 삼자회의 활동이 재개될 수 있는 기회를 맞게 되었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중단되었던 통일전선부, 종교사무국, 삼자회 등이 회복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회복이란 종교의 전면적인 자유와 개방의 회복이 아니라, 공산화 이후부터 1966년 이전까지의 중국 공산당의 종교에 대한 종교정책을 다시 회복한다는 것을 말한다.

  기독교에 대한 정책으로 1980년 4월에 삼자교회가 다시 재개방되었으며, 잡지《티엔펑(天風)》도 복간되었고, 1981년에는 난징(南京)에 있는 금릉협화신학원(金陵協和神學院)을 재개방하였다.


Ⅴ. 1980년대 삼자교회의 활동재개와 가정교회와의 갈등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의 초기 시기인 80년대 전반, 구체적으로는 1980년 난징(南京)회의를 통해 종교에 대한 통일전선적 측면에서의 종교신앙자유정책이 추진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중국에서 비밀리에 급성장해오던 가정교회와 공산당의 종교회복정책으로 인해 재개방된 삼자교회간에 대립과 충돌이 시작되었다.

  삼자교회와 가정교회간에 가장 큰 갈등은 삼자회에 가입을 할 것인가, 하지 않을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이것은 교회의 머리와 교회의 주권이 누구에게 있으며, 교회가 과연 누구의 지도와 관리를 받느냐는 교회의 본질과 성격에 관련된 가장 핵심적인 문제였다.

  이 때, 일부 가정교회들은 삼자의 성격이 예전과는 다르다는 기대와, 공식적이고 합법적인 교회의 활동을 보장받고자 하는 마음에서 또는 계속되는 삼자회의 가입등록 요구 압력에 굴복하여 삼자회에 가입을 하였다. 그렇지만 가입한 교회의 경우 즉시로 삼자회에 정기적인 보고와 통제를 받았고, 예배의 횟수도 줄어들었다.

  사회주의 체제에서 기독교의 발전을 억제하거나, 완만하게 현상유지를 하려는 여러 간섭과 제한으로 인해, 예전 가정교회로 있을 때 보다 교회의 본질적인 측면인 전도부분에 가장 직접적인 타격을 받게 되었다. 그러므로 가정교회들은 더욱 더 삼자회에 가입을 하지 않고, 개혁 개방 시기의 넓어진 생존의 공간과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여 계속 부흥, 발전시켜 나갔다.

  이로 인해 삼자교회 측에서는 교회로서 존재하며 생존할 정당성과 합법성을 정부로부터 부여받았기에, 가정교회와의 갈등과 충돌이 더 많아졌다. 가정교회에 대한 고발, 비판 및 심지어 정부에 가정교회를 단속해 줄 것을 요구하는 교회 목사도 있었다. 정부에서도 가정교회가 계속 확산, 발전되자, 이에 대한 대응으로써 1982년 3월에 중공중앙에서〈19호문서〉를 공포하였다.

  이후 같은 해에 기독교가 부흥한 지역에서〈허난성(河南省)기독교애국공약〉및〈윈난성(雲南省)기독교삼자애국운동위원회,윈난성기독교협회의정상적인 종교활동 보호에 관한 결정〉등 기독교 문서들이 연이어 나왔다.

  주 내용은 경제활동을 위한 생산과 종교활동이 중복되거나, 생산활동을 위협할 경우, 생산활동을 우선하며, 만 18세 미만의 청소년의 신앙 금지, 해외의 방송 및 서적 금지, 삼정정책(三定政策, 즉 지정된 장소, 지정된 사람, 지정된 구역에서만 활동해야 한다) 등이다. 이런 문서들은 결과적으로 공인된 삼자만 합법적인 단체임을 재 천명한 것이다.

Ⅵ. 개혁개방에 부응하는 삼자교회
  1985년 중국 공산당은 1984년부터 전개된 도시체제 개혁, 경제개혁 가속화 등의 영향으로, 과학, 교육, 군사 등의 개혁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현대화에 주력하는 정책을 취하게 되었다.
  삼자회와 삼자교회는 이에 부응하고 발맞추기 위해 정책을 변화하기 시작했다. 즉 기존의 삼자원칙에 의거해 해외로부터의 어떠한 금전적인 지원이나 투자를 받지 않았던 것에서, 나름대로 원칙과 틀을 마련하여 해외와 우호 왕래라는 차원에서 해외의 금전적인 지원과 도움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삼자회」와 해외간 대표적인 협력 사례가 바로 1985년에 설립된「애덕기금회」이다.


  한편, 이때 이후 같은 맥락에서「삼자회」와 삼자교회 목회자들의 해외 우호 교류활동이 증가하게 되었다. 이들은 해외를 돌아다니며 중국의 종교정책을 선전하고, 우호적인 면에서의 교류와 협력을 환영한다는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그래서 삼자교회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 확대와 함께 해외의 투자와 지원이 급속하게 증가하여, 삼자교회가 신설, 증축되거나 교회설비가 제공되었다. 또한 삼자교회들 중 자체적으로 교회운영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레스토랑, 유치원, 상점 등을 운영하는 교회도 생겨났다. 대부분 삼자교회 자체의 빈약한 재정과 경제형편, 정부의 개방 경제정책에 대한 부응, 삼자교회 자체의 경제적 기반을 튼튼히 하기 위해, 갈수록 해외와 교류를 희망하는 삼자교회들이 늘어갔다.

  삼자교회 지원에 대한 긍정적이고 발전적인 측면은, 해외 자원으로 삼자신학교가 증가되고, 신학교 시설이 보수되었으며, 신학 서적들이 공급되고, 인재양성에 대한 장학금이 전달되는 등 중국교회를 성장시키고 발전시켰다는 점이다.
  한편 삼자교회와 해외 교회의 교류가 확대 증가됨으로 다음과 같은 부정적인 면이 나타난 것도 사실이다.

  우선 삼자교회에 지원한 금액이 전부 교회를 위해 쓰여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과, 한 교회를 건립하는데 필요한 돈이 실질적으로 몇 배나 더 높게 산출되어 해외의 많은 헌금이 얼마나 집중적으로 효과 있게 사용되는지의 여부를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삼자교회 자체가 교회의 발전과 부흥을 중시할 수 없는 환경적인 제약과 더불어 중국 공산당의 통일전선정책으로 경제정책에 필요한 금전적 필요에 부응하고 선전해야 하는 현실적인 삼자교회의 역할도 있기 때문이다.

  이외에 가장 부정적인 측면은, 삼자교회와의 교류와 협력으로 중국 안에 엄연히 존재하는 가정교회 자체를 부인하거나 몰이해하게 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삼자교회와 협력하고 있는 해외교회 지도자들의 강연과 글에 나타나는 가정교회를 배제한 단편적인 중국교회의 이해이다.

 
Ⅶ. 1980년대 민주화운동 전개이후의 삼자교회
  1986년에 후야오방(胡耀邦)의 경제체제 개혁과 함께 개혁파는 간부들의 혁명화, 지식화, 젊은이화, 전문화인 간부4화를 주장하며 원로간부들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 하였다.
그래서 보수파는 이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는데다 당시 경제적인 물가폭등, 인플레 현상 등으로, 1987년에는 보수파가 주도하는 반자산계급자유화(反資産階級自由化)운동이 벌어졌다.


  이런 정국의 상황으로 삼자교회에서는 사회주의 정신문명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해야 했다.
  쟝시성(江西省)의 삼자회 같은 경우는 설교를 할 수 있는 자격증을 발급하여, 소위「설교증」이 있는 사람만이 설교를 할 수 있도록 조처하였다.
  또한 1988년에 꽝똥성(廣東省)에서는 성(省)급으로는 처음으로〈꽝똥성 종교활동장소 행정관리 규정〉을 공포하는 등 종교활동에 대한 관리조례, 규정, 합법적인 틀 내에서의 활동과 등록요구 등 법제화 움직임이 더욱 가속화되어 가정교회와의 충돌과 갈등은 이전 시기에 비해 더욱 확대되었다.

  그러나 가정교회의 불법집회 규정으로 인한 단속과 핍박이 심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가정교회의 부흥과 발전은 지속되어, 이 시기에 중국 변경지역을 향한 복음전도의 필요와 열기는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1989년에서 1992년 2월까지의 6.4 천안문 사태 발생과 그 이후 수습에 주력했던 중국은 긴장국면으로 들어서 당에서는「안정으로 모든 것을 주도하겠다(穩定壓倒一切)」는 캐치 플레이를 내걸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등 전반적인 부분에서 안정위주의 강경하고 보수적인 정책을 실시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정국은 경색화되고 경제적으로도 많이 위축되었다.

  직접적인 교회에 대한 영향은 1990년에 종교사무국 간부회의를 소집하여 종교관리 문제를 의논하였으며, 그 뒤 1991년에 중공중앙의〈6호문서〉를 발표하게 되었다.〈6호문서〉의 가장 큰 핵심은 종교에 대해 철저한「관리」를 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이 시기 이후부터 계속해서 종교관리적 측면에서 많은 법규와 조례가 탄생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1994년 국무원의 144호문서〈중화인민공화국 국내외국인 종교활동관리규정〉과, 145호문서〈종교활동장소 관리조례〉이다. 하나는 중국 안에서 가정교회에 대한 관리 및 통제이고, 다른 하나는 해외 기독교 선교활동에 대한 통제이다.

  한편 1989년 민주화운동 시기 초기에 삼자회 주석인 띵꽝쉰(丁光訓)의 민주화운동 지지로 띵의 입지가 많이 축소되었다. 이후 민주화운동이 탄압으로 마무리 지어지면서 당에서 띵꽝쉰과 삼자회에 대한 믿음이 이전보다 약화되고, 민주화운동지지 이후 종교사무국에서 좀더 직접적으로 삼자신학교를 관리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1991년에는 삼자전국회의를 열어, 교회행정제도의 건립에 초점을 두고, 교회관리, 치리를 농촌의 삼자교회까지 이르게 하였다.

  1996년과 1997년 중국교회 상황은 사회치안 유지와 범죄자 척결이라는 옌다(嚴打)운동 전개를 통해서 가정교회의 불법집회를 단속하였다. 그래서 가정교회에서는 몸을 도사리고 신중히 사역을 전개하는 국면이다.
  이에 비해, 정부에 등록한 합법적인 교회로서의 삼자교회는 이렇다할 변화와 특별한 제재가 없다.

  분명한 것은 이후 삼자교회와 종교사무국 측의 종교법제화 움직임과 종교관리, 통제의 움직임이 계속적으로 강화되는 속에서 삼자회의 정통성과 합법성은 더욱 보장받을 것이다.
이로 인한 가정교회와 삼자교회의 갈등과 충돌 역시 계속될 것인데 앞으로 종교법과 법제화 움직임이 좀더 완비 단계에 이르면, 가정교회에 대한 핍박과 관리는 더욱 강화될 것이다.

Ⅷ. 맺는 말
  지금까지 공산화 이후의 중국 역사 속에서 삼자교회의 건립과 삼자교회의 의미 및 그 발전을 공산화 이후 중국의 정치, 사회변화 속에서 주로 규명해 보았다. 또한 이로 인하여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되는 가정교회와의 갈등도 살펴보았다.

  지금 현 시기에 중국선교는 다양한 형태로 여러 채널을 통해 전개되고 있다.
그 가운데 연합운동을 하고 있는 단체인 세계기독교교회협의회(W. C. C)를 주축으로 하여 이에 속한 교회들은 합법적이고 공식적인 채널을 통한 교류와 협력사역을 위주로 하고 있다. 한국의 기독교교회협의회(K. N. C. C)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의 삼자교회에 대한 교류와 협력이 증가함에 따라 이 방면에서 중국교회 발전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다만 한가지 제언하고 싶은 것은 중국교회와 상황에 대한 전면적인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중국에는 공식적인 삼자교회만 존재하고 가정교회란 없다는 식의 글과 강연 및 중국적인 역사현실과 상황 속에서 탄생하여 고난 속에서 성장하고 있는 가정교회의 존재를 부인하고 그 사역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는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합법적이고 공식적인 교류를 지향하는 삼자교회의 해외 방문과 해외의 삼자교회에 대한 지원, 협력이 갈수록 증가하고 있는 추세에서, 삼자교회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그 성격의 파악은 지금 이시기 해외교회가 중국의 교회를 제대로 돕고 섬기는데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눈에 보이는 현상을 통해 삼자교회를 이해하고 돕는 것에서, 사회주의 중국이라는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 속에서 이 시기에 중국의 교회가 어떻게 국가 사회 발전에 부응하느냐가 교회를 존재케 하는 관건적인 문제였기에, 여기에서 파생하는 삼자교회의 성격특징과 갈등을 알고, 삼자교회를 잘 도와야 한다.

출처 : CMP KOREA ♡ 차이나미션파트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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