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기독교

[스크랩] 삼자원칙과 교회 설립

수호천사1 2008. 12. 17. 16:17
삼자원칙과 교회 설립
계검홍

[내용요약]
성경의 계시, 신앙의 전통과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중국교회의 삼자원칙은 모두 강한 교회와 교의성 신학성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다음에서 주로 나타난다. 삼자원칙은 하나님의 계시와 교회의 역사적 경험과의 통일, 교회의 지역성과 보편성의 통일, 교회의 현실성과 결과의 통일, 효과적인 교회와 교회성의 통일, 애국과 애교의 통일이다. 삼자원칙을 견지해야만 중국교회가 번영할 수 있다.

[키워드] :삼자원칙 교회성 교회 설립
삼자원칙은 중국 교회 건립의 기본원칙이며 강한 교회성을 띠고 있다. 하지만 일부 사람들은 삼자원칙은 정치적 비종교적이고 교회와 동떨어졌으며 외부요소가 첨가된 일시적인 것이라고 보고 있다. 본문은 <삼자원칙과 교회건립>을 주제로 아래의 몇 가지 부분에서 삼자원칙의 교회성에 대해 체계적으로 논하고 이를 동역자들과 함께 나누고 고찰한다. 이를 통해 이후 이에 관련된 토론에서 삼자이론이 더욱 심도 있게 정비되어 중국교회가 일관성 있게 삼자원칙에 따라 중국 교회를 설립해나가고 견고히 발전해 나감으로써 교회의 부흥을 이룰 수 있기를 기대한다.

1. 삼자원칙은 하나님의 계시와 교회의 역사적 경험의 통합이다.
(1)성경의 계시와 교회의 역사적 경험
루틴주교의 말처럼 “ 서기 49년 예루살렘회의가 이 문제를 접했을 당시부터 약 2천년 간 하나의 지역이든 민족이든 나라든 복음이 어디로 전파되든 좋았다. 당시 사람들 모두가 ‘삼자’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아니었지만 삼자의 문제 역시 복음 전파와 함께 나타났다. 비록 삼자--자치(自治), 자양(自養), 자전(自傳)--가 교회 설립의 기본원칙으로서 명확히 제시된 시기가 늦기는 하지만 삼자원칙은 교회가 설립된 날부터 사실상 교회설립의 기본 원칙이 되었다.

예루살렘대회는 교의적인 법칙을 만들려 하였으며 교회는 설립과정 중 지역적 특색을 반영하며 복음의 진리에 반하지 않는 원칙하에서 지역의 수요에 따라 복음을 전파한다고 여겼다. 이에 맞게 복음이 다른 여러 지역에 최대한 퍼지도록 하는 방법은 현지 생활 풍속과 사람의 사정에 밝고 민중성을 갖춘 현지인이 복음 전파를 맡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현재 우리가 말하는 자전(自傳)이다. 초기 교회는 기본적으로 자전(自傳)을 실현했다 할 수 있다. 즉 누가 전하고 무엇을 전하는가 하는 문제이다.일찍이 중국교회역사의 과정에서 일아났던 자립운동의 지도자가 지적한 바와 같이 “ 서양 선교사가 각지의 풍습 예절과 언어를 안다고 해도 현지인 만큼 깊이 알지는 못한다. 서로 교제를 나누는 사람은 모두 친구 사이거나 친척 혹은 동향사람이다. 원래 서로 친한 사이 일수록 서로 권하고 믿는 마음이 깊은 법이다. 서양 선교사와 현지인 간의 말과 감정의 장벽이 없으면 서로 뜻이 통하고 순종할 수 있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며 서로 의심하는 일도 없다.” (< 주신입기독교신도지회서 ><기독교도보>, 1904년,제 6호) 이는 예나 지금이나 같은 이치이다. 성경과 초기 교회의 문헌 모두 이러한 점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교회는 사도들을 섬기고 원칙적인 가르침을 주는 것 외에 교회의 섬김과 교회관리는 주로 현지 교회의 지도자와 교회에서 은혜 받은 자가 맡아 하나님의 말씀과 사도의 서신 등에 따라 목회를 하며 교회를 관리한다. 바울이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하나님의 집이니라.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고린도전서 3: 9~11)라고 말한 바와 같이 이미 터를 닦아 둔 자는 주 예수그리스도이지 다른 이가 아님을 주의해야 한다. 그 위에 세운 ‘다른 이’에서 ‘다른 이’는 곧 현지의 목자와 신도이다

동시에 사도들이 현지 교회의 구체적인 사무에 관여하지 않고 교회가 각기 스스로 관리하도록 한다. 최초의 ‘예루살렘 교회’, ‘안티오크 교회’등의 교회 또한 모두 현지인 중 덕망이 높고 능력 있는 장로와 책임자를 선출해 교회를 관리하고 교회가 자치 운영하도록 하였다. 초기 교회 역사 문헌인 클레멘트의 <고린토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보여지는 조기 교회간의 관계는 서로 평등하며 독립적이고 자주적이었다.교회가 발전하면서 일부 사람들은 전문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로 나누었고 이들은 현지 교회와 신도를 위해 헌신하는 생활을 했다.“누가 자비량(自備糧)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고린도전서 9: 7~9, 13~14)

이러한 각지 교회의 자치와 자양 자전을 중시하는 삼자 원칙은 후 사도시기 교부시대에 복음의 진리를 지키고 교회를 견고히 세우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또한 교회의 신성한 전통으로 대대로 이어지고 있다. 후사도 시기 각종 이단이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교회를 어지럽혔다. 이러한 상황을 놓고 이레니우스는 “우리는 ‘오래된 법과 제도’ 가지고 있으며 감독하고 계승하여 보존해온 기독교 자체의 품성을 지니고 있다. 감독은 사도들이 각지에서 위임 받아 하고 있으며 교회를 잘 관리하여 교회가 우리에게까지 이어져 왔고 성경을 보존하고 성경의 온전한 해석을 지켰다.’”<니케아 이전 교부 문헌 P.172> 니케아 회의에서는 더욱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다. 즉 주교는 마땅히 자기의 구회 및 이웃 구회의 주교 중에서 선정해야 한다. 이 규정은 동양과 서양의 교회에서 공통으로 따라 행해지고 있다. 키프리안이 고르넬리오에게 준 네 번째 편지에서는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마땅히 정성을 다해 하나님의 명령과 사도의 관습을 따라 지키고 시행 해야 한다. 우리들과 거의 모든 성이 따르는 적절한 ‘견진례’ 예로 들 수 있다. 다시 말해, 같은 성과 가까운 성의 주교들은 반드시 지도자를 선출하는 사람들과 함께 모여 사람들이 주교가 될 후보에 대해 모두 잘 알고 있는 상황에서 주교를 선출한다. 모든 형제의 투표와 참석한 주교들의 판단에 따라 주교직을 수여하고 안수식을 거행할 수 있다. 또한 거의 모든 성은 이러한 관습을 따른다. 말할 필요 없이 이 시기의 교회는 모두 자체적으로 운영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당시에 ‘삼자원칙’이라 칭해지는 말이 없었으나 각 지역교회의 ‘自治 自養 自傳’ 삼자 원칙이 줄곧 신성한 전통으로 여겨졌다고 할 수 있다.

교회의 지역적인 삼자원칙을 중시하였기 때문에 초기교회가 빠른 발전을 얻을 수 있었다. 몇 백 년 이라는 시간 동안 로마 전역과 더 넓고 큰 지역으로 삼자원칙이 전해졌다. 로마 교황청 시대에 들어서 로마 교황제의 성립은 교회가 제국 통일 정치 체제의 요구에 적응하도록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다른 민족과 나라의 지역성과 민족성의 특징을 말살하는 것임을 경시하고 로마의 기준을 세계 모든 민족의 기준으로 감아 교회를 세우려 하였다. 또한 교황청의 통치가 교회가 있는 모든 지역에 미치도록 하며 다른 국가의 교회의 독립자주 원칙을 무시하였다. 이로 인해 복음이 주권국가에서 전파되는데 장해가 되었다. 다음에 우리가 논하게 될 명청 시기 천주교의 중국에서의 실패가 바로 그 전형적인 예이다.

마틴 루터와 칼뱅의 종교개혁 운동으로 기독교 신교가 등장했다. 교외의 지역성과 민족성이 다시 어느 정도 반영되었고 기독교 활동이 다시 활발해졌다. 각 민족독립국가는 민족 교회를 세웠다. 예로 캔터베리 대주교의 낸시 교수는 “16세기 종교개혁가가 영어로 성경을 읽도록 결정했을 때 영국교회가 실행한 것이 삼자운동이다. 그들은 성공회를 설립했고, 공교회의 교의를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지역의 독립 자주원칙을 지켰다.

그러나 식민주의 물결이 세계를 휩쓸면서 유럽지상주의, 제국주의 사조가 유형무형으로 영향을 미쳐 기독교가 제3세계국가에 전파 시 기독교회가 또 다시 그곳의 지역적 자치원칙을 무시하데 되었다. 식민주의 침략과 함께 교회는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지역에 들어왔지만 교회의 지역성을 무시하여 결국 오랜 시간 동안에도 성공하지 못하고 오히려 ‘제국주의 침략의 도구’라는 오명을 쓰게 되었다.

교회가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지역의 식민주의 제국주의의 침략수단으로 전락하여 복음전파는 많은 난관에 부딪히게 되었다. 일부 비교적 진보적인 기독교 지도자들은 다시 기독교회의 지역성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헨리 벤 영국성공회 포교회 주임 간사는 1850년에 쓴 <현지교회조직>에서 ‘선교의 안락사’이론을 발표했다. 즉, 선교사들은 더 이상 자신들이 필요치 않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선교사 중에서도 일부 지식인들의 인정을 받았으며 나아가 지역 교회의 설립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1920년대 중국에서 성공회에서 활동한 선교사 로렌트는 바울의 선교활동은 교회의 독립을 촉진하고 지역성을 띠고 있으며 ‘모회(母會)’에 의지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2) 하나님의 중국교회에서의 계시와 중국교회의 실천
기독교가 중국에 들어와 오랫동안의 우여곡절과 몇 차례의 실패를 겪은 사실은 그것이 이미 성경에 계시된 독립적 자주적 자치(自治)적 교회의 삼자원칙이 교회의 생존과 발전을 위한 생명과 같은 것임을 증명했다.

경교와 예리커원의 중국에서의 실패에 대해 논자는 이들은 많지만 그들 대부분은 비종교학자들이었기 때문에 종교발전에 포함시킬 수 없고 그 속에서 이득과 손실을 명확히 이해할 수도 없다. 선교사는 자신의 한계와 외국선교회의 이익에 묶여 그 속의 근본에 대해 깊이 언급할 수 없었다.경교가 당무교의 짧은 시간 동안의 공격으로 꼼짝없이 망하게 된 이유는 경교가 중국에서 독립자주의 길을 걷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교는 중국에 들어올 때 불교 경험을 배웠다. 언어를 사용하고 사상을 논술할 때 모두 자발적으로 중국문화와의 접합점을 찾으려 하는 것이다. 이는 경교가 어느 정도 성공할 수 있도록 하였지만 깊이가 없어 역사의 시련을 이겨내지 못했다.불교가 중국에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불교가 중국에 들어올 때 체제상 독립적이고 자주적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중국의 승려가 자체적으로 자유롭게 중국의 현실을 결합하고 방법을 찾을 수 있도록 하는데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혜원 등 중국의 고승들은 중국의 현실과 문화를 결합해 불교의 교의를 더욱 계승 발전시켰다. 또 성공적으로 중국 전통 유교 문화와 결합하여 많은 군중의 지지를 얻었고 중국에서 뿌리를 내렸다. 이것은 중국 초기 문헌인 <고승전>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나 경교는 중국에서 독립 자주적인 지위를 얻지 못했다. 이러한 점은 주로 다음에 나타난다..

체제상 경교는 여전히 로마 대주교의 주교제를 계승하고 있다. 경교의 주교가 세워지기 위해서는 총주교로부터 권한을 수여 받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총회와의 부속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경교는 중국에서 제대로 중국 선교사를 양성하지 않았고 중국 신도가 종교 업무를 맡아 하지도 않았다.신학상, 경전의 해석권을 이란의 승려가 독점하였고, 경교가 중국문화와의 결합을 시도하였지만 주로 외국 선교사들 사이에서만 이루어져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도 성과를 얻지 못하고 깊이 있는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이러한 이유로 인해 경교는 중국의 문화와 사회에 파고들지 못했고 많은 군중의 지지도 얻지 못했다. 그래서 많은 승도가 추방되어 귀국할 때 목회자와 신학경전이 없는 중국의 경교는 다른 종교에 제압되고 물들어 결국 사라지고 말았다.원대의 예리카원 또한 그러했다. 게다가 예리카원은 외부 민족의 종교로서 외지의 특징이 더욱 뚜렷했고 그래서 더 빨리 쇠퇴하었다.

명청 시기의 천주교는 마태오 릿치 등이 동양의 오래된 봉건대국이 효과적인 표교의 선결조건은 중국의 언어와 풍습에 정통하고 중국의 국정에 적합한 선교 방식을 택하는 것으로 곧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는 중국의 전통문화를 존중하고 열심히 중국어를 배웠으며 생활에서 중국의상을 입고 중국어를 사용하였다. 또한 유교 경전을 익히며 천주교와 전통유교의 교차점을 찾아 불교를 없애고 유교를 더하는 방식으로 천주교를 전파했다. 명대 진보사상가인 리쯔는 <속분서> 일권 <여우인서>에서 릿치를 다음과 같이 높이 평가했다. “먼길을 항해하여 중국에 이르러 남해조경에서 산지 거의 20년, 우리나라의 책은 안 읽은 책이 없다. <사서>에서 사람의 도리를 이해하고 <육경>을 이해했다.”릿지과 동역자들의 노력으로 명청 시기 천주교를 중국에서 포교하는데 큰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명청 시기의 천주교는 결국 예의 (예절과 의식)에 관한 분쟁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예의 분쟁은 표면적으로는 동양과 서양 문화간이 충돌이며 교황청의 중국의 문화와 전통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발생한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중국의 황실과의 심각한 정치 문제가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좀 더 깊게 살펴보면 천주교가 중국 국정에 맞게 발전하기 위해 필요한 것과 천주교 자체의 체제간의 모순이 부딪혀 폭발한 것이다.천주교는 중국에서 중국 국정에 부합하여 발전하려 했고 이를 위해서는 더욱 독립적이고 자주적으로 신학을 발전시키고 교회의 일을 처리해야 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로마교황청의 체제 자체 또한 중국 천주교회의 신학과 사무를 강하게 통제하려 했다. 이러한 통제는 여러 방면에서 중국에서 천주교가 발전하는 것을 방해하였고 일부 신학문화상의 충돌은 국가간의 정치이익 충돌을 격화시킬 수 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정치적 압력에 부딪히게 되었고 생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여지 또한 잃게 되었다. 비록 당시에 이미 중국의 지식인과 평신도를 이용해야 하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전체 교회의 관리과 사무처리의 주도권이 전부 서양의 종교인 수중에 있었고 예수회 인사들 자신의 한계로 인해 교회의 지역성의 근본이 독립과 자주에 있음을 알지 못하고 민족국가의 교회가 되었다. 그래서 후대에 이르러 교황청과 청 황실간의 모순이 발생할 때 천주교는 주요한 외부의 정치적 요소로서 금기시 되었다. 그래서 명청 시기 천주교의 실패를 통해 독립과 자주는 기독교가 중국에서 발전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하며 독립과 자주가 없으면 교회의 토대는 반석 위가 아닌 모래 위에 세워져 비 바람에 바로 크게 무너져 내리게 됨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하나님은 기독교가 중국에서 독립 자주의 길을 걸으라 하신다.

근대 기독교는 불평등조약(船坚利炮불평등조약) 을 빌어 중국에 들어왔다. 仗恃조약은 외국교회와 중국인 사이의 소송사건을 증가시켰고 중국인에게 큰 고통을 가져왔다. 또한 복음 전파도 어렵게 하였다. 1970년대부터 시작하여 일부 민족 기개가 있는 기독교도들은 외국 선교회의 통제에서 벗어나려 했고 교회의 독립 자주 자치를 위한 방법을 모색했다. 1903년에 위구어쩐등이 상해에서 ‘중국기독교회’를 창립하고 기독교신문을 출판하여 자립의 바람을 불어 넣었다. 1906년 위구어쩐이 ‘중국예수교회입회’를 성립하고서야 자립운동이 한층 더 발전해나갈 수 있었다.

중국교회의 자립운동이 일어난 후 각 지역 신도들의 반응이 빠르게 나타났으며 전국적으로 운동이 펼쳐질 때 최고조에 이르렀다. 하지만 반식민 반봉건 시대에서 식민통치의 이익과 결탁한 서양의 외국선교회가 중국교회의 진정한 자립을 지지한다는 것은 불가능 했다. 그들은 시작부터 갖가지 방법으로 교회의 자립을 막고 관련된 지도자를 위협했다. 하지만 중국교회를 이끄는 지도자들은 의지를 굳건히 하고 많은 어려움을 이겨나갔다. 1927년 이후, 중국과 외국의 반대운동 세력이 서로 결탁하여 중국인민의 혁명활동을 잔혹하게 진압하였다. 자립운동 또한 큰 타격을 받았다. 일본의 침입으로 가뜩이나 약한 중국의 자립교회는 심한 공격을 받았다. 통계에 따르면 대혁명시기 출현한 600개 이상의 자립교회 중 일부는 폐쇄되었고 일부는 해산했으며 일부는 외국선교회에 소속되었다. 이로인해 1936년에는 200여 곳 밖에 남지 않았다. 자립의 기치를 한번도 높이 들어보지 못한 ‘중국예수자립회’도 이전의 잘못을 통감하고 방침을 바꾸었고 위구어쩐 목사 생전에 견지했던 애국주의를 버리고 예기가 꺾였다. 전쟁이 전면화 된 후 몇몇 남은 자립교회도 버티기 힘들었다. 더욱이 외국선교회의 핍박과 유혹으로 新중국 성립 전에 자립을 지켜나간 교회는 거의 없었다.

20년대 들어서 중국의 기독교도의 자립운동의 목소리가 높아질 때, 신문화 운동,민족자각운동, 비기독교 운동이 서양의 외국선교회에 압력을 크게 가해 전략을 바꿀 수 밖에 없도록 했으며 토착화를 제창했다. 주요 내용은 현지 사람들을 기용해 외국선교회의 현지에 있는 교회를 관리하도록 했고 최대한 현지의 예의 등 관습에 따라 교회가 현지의 특색을 갖출 수 있도록 하여 기독교는 ‘서양의 종교(洋敎)’라는 이미지를 없애고자 했다. 이를 관철하기 위해 1922년 5월 기독교전국대회가 상해에서 열렸고 이 때 두 가지 일을 하였다. 하나는 교회의 토착화를 주장했고 또 하나는 ‘중국전국기독교협진회’를 성립했다.

그밖에 토착화 제창에 따라 외국선교회는 ‘동양과 서양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중국교회의 사람이다’라는 책략을 택하였다. 공회의 명칭은 과거 ‘대영 00회’, ‘대미국00회’에서 ‘중화00회’로 바꾸었다.1927년 중화장로회, 공리회, 런던회는 또한 ‘중화기독교전국총회’를 연합 성립하였다. 하지만 ‘중화기독교협지회’든‘중화기독교전국총회’든지 기타 명칭을 바꿔 중화라는 이름을 사용한 각 공회는 재정과 인사 등 실제 권력은 여전히 외국선교회가 쥐고 있어 중국 교회의 지도자는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기존의 신학사상은 손대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 어떤 사람은 “이 기관은 미국인의 돈으로 세운 것이니 미국인에게 맞도록 하는 것이 옳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이도 분노하며 “오늘날 중국교회에는 ‘토착교회’, ‘국가기독교’가 없다.”고 지적했고 진정으로 중국교회의 토착화를 이루려면 주권을 환수해야 함을 절실히 깨달았다. 그는 또한 “현재의 과제는 ‘주권환수’, ‘주권이양’이며 혹은 중국교회 성립의 첫 단계는 자치다”라고 밝혔다. (<진리와 생명>제 2권 9~10 기, 1927년)

외국선교회가 중국에서 토착화를 시행하는 목적은 바로 중국기독교가 자립을 요구하며 택한 개혁에 대항하기 위해서이다. 중국교회 가 외국선교호회의 제약을 받는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이뿐 아니라 외국선교회는 중국교회에 거짓 이미지가 만들어냈고 중국기독교도들의 손발을 묶었으며 중국기독교도의 자립운동에 대한 지지와 주권을 환수하고자 하는 노력을 약화시켰다. 이로 중국에서 외국선교회의의 세력과 이익을 더욱 공고히 하였다. 이로 인해 토착화된 각 공회가 서양의 종교라는 본질은 변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강화되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토착화가 비록 진정으로 중국기독교의 자발적인 교회의 치리(治理)를 실현 할 수는 없었으나 중국의 기독교도가 스스로 중국교회를 관리하고 중국교회의 자주독립과 정의성, 합리성 및 필요성을 추구했다는 것은 막을 수 없는 역사적 흐름이었으며 하나님의 중국교회에 대한 목소리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부 토착화 운동 중 지도자 자리에 오른 중국기독교도는 그들이 실제로 실권을 가지지는 못하였어도 제한적인 범위 내에서 중국기독교도가 중국교회를 치리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그들 가운데 있는 지도자는 제한된 조건하에 많은 일을 하였고 우수한 신학사상에 관한 고찰을 하였다. 이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우리가 신학사상을 정립하는데 있어서의 소중한 재산이며, 이로써 중국기독교인이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잘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연구 중 그들은 중국교회가 진정으로 발전하기 위한 방법은 주권 환수와 이양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모든 것은 반식민 반봉건 시대의 과거 중국에서는 이룰 수 없으며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에야 만이 실현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립운동이든 토착화 운동이든 그 가운데 민족의 절개와 애국심을 가진 중국교회지도자들은 우야오종 선생이 삼자애국운동을 일으킨 후 모두 이 운동에 몸을 던졌고 지도자가 되어 운동을 이끌었다. 그들은 삼자애국운동에 큰 공을 세웠다. 추이이엔양 중화기독교회전국총회 지도 목사가 삼자애국운동선언 선포 후 “ 선언이 제창하는 기독교삼자혁신운동은 그 의의가 크며 비록 이해하지 못하고 원망하는 자가 있어도 우리는 어려움을 두려워해서는 안되며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전진해야 한다”고 밝힌바 있다.

이상 종합해보면 우리는 자치 자양 자전, 중국교회를 세우는 이 삼자원칙은 성경의 가르침이며 중국과 외국 교회 역사의 경험의 결정체이다. 삼자원칙은 기독교회 역사의 계시이며 하나님의 계시와 교화역사 경험의 통합이다.

2. 삼자원칙은 교회지역성과 보편성의 통합이다.
교회는 지역성과 보편성을 모두 갖고 있다. 이 둘 중 어느 한쪽도 버릴 수 없고 또한 또한 섞일 수도 없다. 교회의 지역성이란 구체적이고 눈에 보이는 교회를 말하며 한 행정지역의 구역화의 소속성을 뜻한다.여기서 말하는 행정지역구역화는 일반적으로 몇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진다. 우선 국가를 경계로 한다. 교회의 지역성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특정한 국가 간의 교회이다. 두 번째는 이 국가를 자연,문화,행정요소 등의 차이로 지역을 구분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국가의 경계는 하나님이 정한 것으로 불가침성을 가진다고 말해주고 있다. 하나님과 복음의 진리에 대한 신앙은 보편적인 것이나 구체적으로 보여지는 교회는 국경의 제약을 받는다. (로마서 16:4 ,데살로니가전서 2:14) 국가과 국가간의 교회관계는 평등 자주 독립적이며 예속관계를 이루어서는 안 된다. 지상의 교회는 모두 완벽하지 않으며 아직도 완전하고 성숙해질 때까지 많은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는 에베소서 5장 26절 27절에서 보여주는 것으로 지상의 교회가 한 점의 티끌도 없이 순결하고 영광된 교회로 하나님께 바쳐지기 위해서는 교회를 깨끗게 할 많은 과정을 거쳐야 한다.그렇기 때문에 조직의 형태와 권력메커니즘 그리고 관리체제가 생겨나기 마련이다. 이 조직체제는 국가의 지역성으로 나타나며 교회의 지역성으로 나타난다. 또한 한 국가 내에는 다른 행정구역마다 각지의 교회를 세우게 된다. 만약 어느 교회가 교인이 많거나 길이 멀거나 혹은 교통이 불편하다면 필요에 따라 예배당을 나누어 세워 교회활동을 할 수 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여전히 행정구역 하나에 하나의 교회를 둔다. 난징을 예로 들면 비록 성바울로당이나 푸커우기독교당등 몇몇 예배당이 있으나 이들은 모두 본질적으로 난징교회 안에 포함된 것이다.

일찍이 사도들은 교회를 세우는 과정에서 교회의 지역성을 주시했다. <사도행전> 9장 31절에 따르면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거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고 하였다. 후대 사도의 서신 중 교회 하나하나마다 보낸 편지는 모두 그의 지역성을 강조했다. <사도행전> 에서 ‘유대에 있는 많은 교회’를 언급했는데 외국어 성경에서는 ‘교회’라는 단어를 중복했고 중국어 성경에서는 ‘많다(众)’라는 단어를 사용했다.이는 매우 정확한 번역이다. 갈라디아 또한 성이기 때문에 성경에서는 ‘갈라디아의 각 교회’라 칭했다. 에베소서는 항구도시이며 구체적 특정한 행정구약이며 지역이기 때문에 ‘에베소서 교회’라 부른다. <계시록>은 아시아의 7개의 교회를 칭했고 성령이 7개에 교회에 모두 다른 소식을 전했다. 하나님은 여기서 중요한 원칙을 계시하셨다. 즉 교회의 설립은 지방행정구역의 제약을 받으며 그것이 곧 우리가 말하는 교회 지역성이다.

사도들이 세운 교회와 초기교회는 하나님이 계시를 따랐고 지역성의 원칙에 따라 교회를 세웠다. 이는 문헌과 고고학을 통해 더 입증되었다. 고고학상의 발견과 에우세비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2세기말 교회는 시리아 문화을 배경으로 하는 에데사에 세워졌고 그 국왕의 영도 하에 먼저 사복음과 사도의 서신 등을 시리아 문자로 번역하였다. 그 지역의 언어로 번역된 성경이 바로 교회의 지역성을 가장 잘 보여준다. 그래서 애론은 그의 저서 < (신약)신학도론>에서 지방성은 <신약> 교회관에 있어 중요한 부분이라 지적했다.

즉 교회는 철학 학파와 같이 어느 지역에 우연히 존재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공교회는 반드시 지역성을 띠며 어느 도시 혹은 어느 국가의 교회이다. 지역성,민족성,특수성 등은 전세계 교회의 필수적인 지표이다.

교회 지역성은 조직의 형식 권력메커니즘과 관리체제가 지역적이고 자주 독립적이도록 만들었다. 삼자원칙에 따라 교회를 유지하는 것은 교회의 지역성을 가장 드러낸다. 교회의 역사적 경험에서 증명된 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과 부합했음이며 하나님이 교회에 주신 계시이다. 그것은 우리가 직접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계시와 권한을 부여 받았으며 직접 셩령이 인도하심으로 주 예수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중국교회를 세우고 발전시킴을 의미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청할 필요가 없으며 다른 이들의 눈을 살펴 행해서는 더욱 안 된다. ‘나’와’남’은 하나님 앞에서 모두 평등하며 독립적이다.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고린도전서 4:7)” 문제의 관건은 우리가 받은 것이 사람에게서 받고 사람에게서 배운 것인지 아니면 주 예수그리스로의 계시대로 말미암은 것 인지이다.(갈라디아서 1:12) 우리의 책임은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이다. (사도행전 20:24). 조직의 형식과 권력메커니즘 및 관리체제는 지역적이기 때문에 모든 사무와 섬김 그리고 관리 또한 지역적이기 마련이다. 물론 소식은 국경이나 지역의 제한을 받지 않지만 소식은 명령이 아니며 모두가 공유하고 교류하는 것으로 각자가 자신의 상황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소식을 취할지 말지를 결정한다.

교회를 세우는 과정에서 굳건히 교회의 지역성을 지켜나가고 원칙에 따라 각지에 교회를 세우는 것은 각종 종교주의와 파벌주의를 버리고 그리스도는 유일하다는 사실을 지켜나가는 것이다. 이로 결국 진리가 하나로 귀결 되어 하나님의 아들을 알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체험하고자 하는 목표를 실현한다. 이것은 가장 효과적으로 성경의 의도와 하나님의 오묘한 뜻에 부합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이다.

신약에서는 ‘집에 있는 교회’를 네 번 언급하였다.‘눔바의 집’ (골로새서 4:15~16), ‘네 집에 있는 교회’ (빌레몬서 1: 2), ‘또 저의 교회에게도 문안하라.’( 로마서 16: 5).초기 교회는 예배당이 없어 주로 교인이 집에서 모였고, 이를 ‘집에 있는 교회’라 불렀다.사실상 이는 골로새、로마、에베소 등지의 교회를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가정교회’의 근거라 볼 수 없다. 분명 일부 교인들은 가정에 모이거나 가정식 예배를 드리긴 했으나 법적으로 등록을 하지 않았다. 만약 이를 교회라 본다면 이는 성경원칙에 어긋하며 또한 하나님의 성체 원칙에도 부합하지 않는다.그들 중 많은 이들은 줄곧 교회와 왕래를 하였다. 교회는 그들에게 성경과 관련 서적을 제공해 주고 그들이 법적으로 등록을 할 수 있도록 도와 주거나 교회에 와서 예배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현재 해외의 많은 이들이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는 뜻을 가슴에 품고 아직 등록하지 못하고 가정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을 모아 중국에 가정교회를 세우려 하였다. 또한 ‘가정교회’, ‘소교회’만이 하나님이 열납 받으실 수 있다고 선전하였다.분명 그들은 중국교회의 화목과 단결을 깨고 나누어 다스리려는 목적을 이루려 했다. 이런 방법은 성경의 가르침과 완전히 위배되고 하나님이 교회 건립에 보여주신 원칙과도 위배된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교회를 만드는 것은 주 합일체를 깨뜨리는 산물이자 하나님의 뜻과도 근본적으로 반하는 것이다.

현재 일부 서양의 반 중국 반 삼자 세력은 이론상 또 신학사상적으로 여러 가지 설교를 퍼뜨렸고 ‘그리스도 안에서는 국적과 민족을 구분하지 안는다. 모두가 기독교에 속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의 나라는 천국이다. 천국만이 기독교인의 공동의 집이다’ 등의 설교를 통해 기독교도의 국가관념과 민족의식, 독립자주의 삼자원칙을 약화시키려 하였다. 단편적으로 교회의 보편성만을 강조하여 교회의 지역성과 독립성을 부정하려했다.

이러한 말들은 신앙의 보편성과 ‘보편교회’의 개념을 뒤섞었으며 기독교과 기독교 신앙, 유형의 교회와 무형의 영적인 교회가 서로 다른 의미를 혼란 시켰다.또한 지상의 국가와 하늘에 속한 나라를 독립시켜 많은 기독교도의 국가관념을 약화시키고 자주독립를 견지하는 의지를 흔들어 놓으려 했다. 교회의 우주성(보편성)이란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심을 뜻한다. 이러한 교회는 우주에서 오직 하나 뿐이며 과거와 현재 중국과 외국의 예수를 구주로 섬기는 모든 죽은 자와 산 자를 포함한다.(고린도전서 12:13, 에베소서 1:22~13) 이 교회는 진실되고 눈에 보이지 않으며 완벽하다. 신령하며 시간과 공간,생사(生死)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마태복음> 12장 18절에서 예언한 교회는 우주성을 지닌 교회이며 모든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됨을 뜻한다.(고린도전서 12:13,베드로전서 1: 3,22~25),골로새서 1장 18절의 말씀과 같이 이러한 우주성의 특징은 유대인이나 외국인, 산 자 혹은 죽은 자 구분 없이 성령으로 난 자는 모두 그 안에 속한다.

이러한 우주성과 합일성은 주로 성령과 일치된 신앙이며 눈에 보이지 않는 완벽하고 진실한 영적인 교회이다. 이는 교회의 본질을 뜻한다. 신간의 공간의 제약 생과 사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유형의 광대한 기도교도가 집합한 교회와 혼동해선 안 된다. 그리스도의 나라와 지상의 정치국가의 구별에 대해 멜란히톤은 “그리스도의 나라는 영에 속한 것이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지하는 것이며 영생의 시작이다. 하나님에게 속한 국가는 우리가 합법적인 정치제도를 사용하도록 허락하며 마치 우리가 음식을 먹고 공기를 마시는 것과 같다. 복음은 기존의 것을 비방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해지려는 것이며 기존의 공정한 법을 따르기를 요구한다.”고 말했다.( <협동서>제 2권 p.169) 우리는 신앙의 보편성이 세상의 교회와 동일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현실세계에서는 보편성을 지닌 특정한 교회조직만이 있다. 그들의 사역은 반드시 각국의 교회간에 독립과 자주를 보장한다는 전제하에 교류하고 우의를 다지며 하나님이 은혜를 나누도록 해야 한다. 이로써 우리는 그들의 활동을 지지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유형의 교회는 지역, 민족, 국가의 제약을 받아 지역, 민족의 특성으로 나타내어 지며,기독교인으로서 구체적인 국적과 민족이 있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 말씀: “너희는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자유인이나 종이나 남자나 여자나 차별이 없다.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리라.” 여기서 ‘차별이 없다’는 것의 전제는 ‘그렇다’ 이다. 즉 유대인, 그리스인의 민족신분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알려준다. 서로 다른 사람, 민족, 국적의 사람을 인정해야만 ‘보편적’인 조직이 생겨난다. 그래서 교회의 보편적 조직은 각국교회의 개성, 독립성을 인정해야만 의의가 있으며 그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교회와 교회간의 교류과정에서 특히 국가와 국가간의 교회의 교류에서 그들은 반드시 상호평등하고 독립적인 관계를 유지해야만 한다.

또 다른 면에서, 유형의 교회는 각 국가와 민족 사이에서 생겨나며 자주독립적인 영예로운 교회를 만드는 것은 교회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이며, 또 교회가 이 목표를 실현하는데 필연의 과정이다. 이 점에서 교회와 교회의 대공성,우주성은 일치된다. 온갖 꽃이 울긋불긋 해야 진정한 봄이지 한가지 색깔 꽃송이로 아름다운 봄이 왔다고 할 수는 없다. 또 울긋불긋한 꽃들이 만개해야 그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있다. 민족적이어야 세계적이고, 세계 서로 다른 민족국가들이 서로 다른 형식으로 기독교를 표현해 내야 세계적인 기독교가 풍부하고 다채롭다고 할 수 있으며, 생명력이 충만하다고 할 수 있다. 또 그래야만 그 신앙의 보편성, 교회의 대공성이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중국교회가 이런 면에서 성공하고 대공성에 대한 교회의 공헌이 바로 본보기라 할 수 있다. 최근 아시아의 한 기독교 대표자가 “중국교회는 비식민지화의 산실이며 반드시 아시아에서 많은 교회들이 생겨날 것이다. 그들은 교회의 자주독립을 위해서, 교회의 자아를 실현시키기 위해서, 반드시 중국이라는 중요한 모범이 되는 본보기를 고려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중국 교회에서 성경말씀과 하나님을 따라 자주독립, 자력교회를 견지하는 삼자원칙에는 동요가 있어서는 안되며 이것은 폐쇄적이거나 배척하는 것이 아니다. 중국교회는 세계교회의 일원으로 상호존중과 평등우호의 기초에서 세계각국의 기독교회와 교류를 하기를 원하며 상호간의 이해를 촉진하고 하나님 안에서 하나 되고 우의를 나누기를 원한다. 일정한 형식의 교류를 통해 하나님의 은총을 함께 나누고 각국의 교회와 함께 하나님을 섬긴다. 바다는 백 갈래의 강을 받아들이며 포용성을 가지고 있다. 평등우호의 기초에서 우리는 세계 모든 국가의 교회와 교류하기를 원한다. 우리의 열린 사상은 중국교회를 설립하는데 유리하며 인류문명의 진보와 사상문화에 긍정적인 작용을 하고 사회에 유익하기에 우리는 배우고 받아들이기를 원한다. 우리는 우리의 경험과 밝은 빛 그리고 성과를 세계 모든 교회와 교류를 통해 나누기를 희망한다.

우리는 역사를 본보기로 삼아 미래로 나아가기를 원하며 역사 분쟁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마음을 열고 세계를 향해 나아가고자 한다. 상호존중, 평등우호의 기초에서 우리의 삼자원칙을 인정하는 교회와 교류하기를 원한다. 하나님의 지도와 축복 그리고 각급양회지도자들의 각고의 노력을 통해 중국교회는 나날이 번성하고 있으며 삼자애국운동도 세계의 주목을 끌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결국 삼자원칙은 지상성과 보편성, 우주성의 통합이다. 딩광쉰주교가 지적한 바와 같이 “삼자는 교회의 자아실현을 대표하는 반드시 가야만 하는 길이다. 이 길을 걸어야만 한 국가 혹은 민족교회가 진정한 교회가 될 수 있고 결국 세계적인 종교인 기독교가 보편성을 실현할 수 있다.” (<문선> 148쪽) 우리가 삼자원칙을 견지해야만 교회의 보편적인 신앙이 풍부해질 수 있으며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을 드러낼 수 있다.

3. 삼자는 교회의 현실성과 궁극성의 통합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삼자는 이미 현실이며, 다시 거론할 필요가 없는 것이라고 여긴다. 또 삼자가 단지 미봉책(궁여지책)이며 일시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지금 이러한 잘못된 관점들을 바로잡아야 한다. 우리는 삼자가 교회의 현실적 필요라는 것을 알아야 하며, 그것의 궁극적 책임을 인식해야 한다. 또 삼자가 우리 교회의 방향, 길, 원칙임을 깨달아야 하며 그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이며, 교회의 현실성과 궁극성의 일치임을 알아야 한다. 정주교의 말씀에 따르면:“삼자는 애국주의의 관점에서만 옳고 필요한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간증하는 관점에서도 필요한 것이다. 또 교회의 공동비전 실현, 역사의 궁극적인 관점에서 역시 삼자는 꼭 필요한 것이다.( <삼자문선>p148) ”이 말씀은 삼자원칙이 교회의 현실성과 궁극성이 일치함을 깊이 계시시하고 있다. 교회역사의 현실과 실천은 교회가 삼자를 실행해야 함을 요구하고 있으며, 삼자를 실행하는 교회만이 생명력이 있고 역사적 시련을 견디어낸 교회라고 여긴다. 그리고 역사의 궁극은 바로 그리스도가 역사현실을 지속시키며 이루어낸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교회는 삼자를 실행해야 하나님이 오셔서 구원해주심을 기다리는 영광의 교회가 된다.

(1) 신학 사상건설과 사역의 발전에 필요하다
저명한 신학자 포스딕의 말에 따르면: “ 사람들이 기본적인 기독교의 경험과 진리의 계시를 함부로 대하고, 더욱 적합한 말로써 그것들을 생각하지 않고 더 이상 새롭게 얻은 지식으로 그것들을 대하지 않고 새로운 시대에 그것들을 새롭게 해석하지 않게 되면, 그날이 되면, 기독교는 종말이 올 것이다.” 교회는 구체적 현실 상황 속에서 현실적인 필요에 의해 실사구시적으로 구체적 방침, 정책을 정하고 결정을 내릴 뿐만 아니라 이와 동시에 구체적 상황에 대해 신학적인 응답을 한다. 공자왈: “진실로 그리워하지 않는 것이니, 그렇지 않다면 가지 못할 먼 곳이 어디 있겠는가?” 신학은 교회가 구체적인 역사현실 상황 속에서 교회의 원대한 대계를 위해 현실에 대한 적절한 사고와 응답을 준다. 또 하나님은 구체적 역사 현실 속에서 성경을 빌어 교회에게 말씀하시며, 교회의 등불로서 교회가 나아가는 길에 빛을 비추어 주시며 나아갈 길을 인도해 주신다.

어떤 종교든지, 특히 외래종교가 어느 국가와 지역에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현지문화와 현실적인 상황과 결합해야 하며 그 지역사람들에서 인정 받아야 한다. 유구하고 원대하며 찬란한 문화를 지닌 중국문화는 중화민족과 같이 숨쉬어 왔으며, 역사문명의 원동력을 추진한다. 또 이것은 중화민족의 얼굴이며 민족응집력을 보여주는 정신적 원천이다. 중국교회와 민족의 자존과 책임감을 지닌 중국기독교도들에 대해 말하자면, 우리는 절대 민족허무주의의 입장에서 중국문화를 말할 수 없다. 우리는 반드시 소중한 우리의 눈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고귀한 유산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기독교의 우월한 전통을 계승하면서 중국사회 그리고 중국문화에 알맞은 신학체계를 건설해 중국사회, 문화와 융합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중국교회의 현실상황에서 교회의 존재와 발전의 필요성이며 나아가야 할 길이다.

기독교가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현대과학, 문화 그리고 사회주의 문명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중국문화 자신 역시 발전해야 한다. 초기의 교회가 그리스문화를 받아들인 후, 더욱 확대 발전한 것처럼 우리는 중국문화를 받아들인 기독교가 한층 더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으며, 중국교회를 위해 큰 공헌을 할 것이며, 세계 각지의 교회에서 더욱 풍성한 간증을 할 것이다.

또 한편으로, 우리 역시 중국문화에서 비롯된 도전을 직시해야 한다. 정주교의 말씀에 따르면: 중국은 공자의 고향이며 이천오백 년 동안 그의 인본주의 사상을 따랐다. 윤리의 문화전통은 종교에 대해 관용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하지만 종교는 지금까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최근 몇 십 년간은 더욱 그러하다.”(<丁光训文集>p77) 정주교의 이러한 말씀은 중국기독교문화가 처해있는 상황을 여실히 드러낸다. 어떻게 기독교가 중국의 주류문화전통에 융합될지, 또 기독교 본연의 모습을 잃지 안을지, 이것들이 바로 우리가 지금 직면한 과제이다. 이 모든 것은 중화문화 속에서 생활해 온 중국 기독교도들의 책임이다. 또 중국기독교도와 중국교회만이 이에 대해 정확한 사고를 할 수 있으며, 이렇게 해야만 하나님이 중국교회에 주시는 특수한 게시와 광명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신학사상건설의 근본취지는 중국문화에 대한 적응뿐만 아니라 중국문화를 흡수하여 중국 스스로의 자주적인 신학사상체계를 만들어 중국교회가 형식상 자주독립적일 뿐만 아니라 중국교회의 신학사상 역시 자주독립적으로 하고자 하는데 있다. 이러한 자주독립의 출발점과 귀착점은 성경에 기반을 두고, 기본신앙의 불변에 기초를 두어 사회주의사회와 결합한 중국교회를 만든다. 정광훈 주교의 말처럼 “ 우리의 전망과 비전은 이러한 중국교회이다. 그것의 신학사상은 풍부하고 이성적이며 중국사회주의사회에 비교적 적합하다. 중국교회는 신도가 조화롭고 일리 있는 신앙을 갖게 하고 간증할 수 있게 할 것이다.

(2)자주독립 수호와 난관 극복에 필요하다
자주 독립을 방해한다는 것은 외국단체, 조직,개인이 종교를 이용해 각종 우리나라 헌법,법률,규율,정책에 위배되는 행동과 선전을 하여,신도들을 기만하고 사상을 억압하며 서구화를 좇으며 중국을 분화하고 중국기독교의 삼자애국운동을 파괴하는 불법행동이다. 주로 세가지 상황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종교라는 미명하에 중국 정권과 사회주의 제도를 전복하려 하며 중국의 국가통일, 영토보전,민족 단결을 파괴한다;

둘째, 중국의 기독교가 또 다시 외국선교회의 제약을 받는 교회로 전락하도록 만들고 자주독립을 막으며 중국 내에 그들이 통제하는 종교조직을 직접 만들어 활동거점을 삼고 교인들을 양성한다; 셋째, 예전의 반이성적, 반사회적, 반인성적, 반과학적인 강한 식민주의 사상색채를 가진 신학사상으로 신도들의 사상을 해하며 점유해 신도를 위협하고 중국교회건설을 막으며 자주독립의 삼자원칙을 해친다.

자주독립을 지지하며 삼자원칙에 따라 교회의 일을 처리하는 과정 중, 중국교회는 전에 없는 큰 발전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패를 달가워하는 사람은 없는 법 여전히 각종 방법을 동원해 중국교회의 자주 독립을 막으려 했다. 특히 개혁개방 이후, 그들은 개혁개방을 빌미로 경제, 문화,교육 등 각종 명목으로 우리에게 침투해왔다. 이러한 상황은 삼자임무가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우리가 반드시 끝까지 자주독립을 이루어야 함을 설명한다. 삼자원칙이 흔들림 없이 일부 형식적인 외세의 침투를 막아내야 한다.

외국의 적대세력은 삼자애국운동을 파괴하려는 목적을 이루려고 지금까지 계속 중국교회를 침투해왔다. 개혁개방이 될수록 그들이 취한 각종 수단 역시 계속 변해왔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외자도입을 이용해, 돈으로 길을 내어 기존의 교회를 그들의 활동 거점으로 삼으려 했다. 소수 말단 교회는 국가가 도입한 외자와 외국 선교회가 경제를 이용해 침투하려 한 것을 구분하지 못해 그들에게 침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고 일부 교회는 그들을 보살폈고 심지어 전도사에게 임금도 제공했다. 소수교회들의 책임자는 국가의 존엄과 개인의 인격조차 마다하고 공개적으로 그들에게 구걸하기도 하여 최소한의 기개도 잃었다. 이런 상황에 대해 정주교는 매우 우려하며 말하길 외국의 일부 기독교단체와 개인은 현재 중국종교신앙자유권리와 그들의 경제적 우세를 이용해 우리가 준비되지 못한 것을 틈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우리의 자치,자양, 자전의 원칙을 잠식하려 한다. 어떤 이는 삼자를 동정하는 것으로 찬양하고 있다. 이대로 계속 가면, 삼자는 필시 유명무실해질 것이며 삼자의 기치도 많은 문제가 생길 것이다. 이 말을 새겨들어야 한다. 우리는 너무 낙관적인 자세를 취해서는 안되며 속히 오늘날 어떻게 해야 자치, 자양, 자전에 부합되지 않는 것인지 대해 연구해야 한다. 또 정확히 이 가운데서 도리를 찾아내 모두가 따르게 해야 한다. 나는 이것이 현재 우리 삼자애국조직이 가서 해결해야만 하는 과제라고 생각한다. (<삼자문선>p418-419)

과학기술과 정보의 발전에 따라 일부 외부의 침투세력이 각종 사상 침투를 통해 식민 색채가 강한 신학사상을 퍼뜨려 신자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예를 들어,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은 서로 교류할 수 없으며 믿지 않는 사람과는 관계를 끊고 그들과 함께 할 수 없다. 기독교인은 하늘나라의 국민이므로 지상에 있는 정권의 예속되지 않는다. 이 세상은 악마의 것이므로 세상을 사랑할 수 없고 사회주의의 사회건설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믿는지 믿지 않는지 만을 물으시고 당신이 선한 일을 하건 악한 일을 하건 또한 아무리 좋은 일은 하건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등의 사상이다. 그리고 이런 배경 하에 복음을 통해 중국을 점령하여 한다는 등의 다른 의도가 있는 구호를 외친다. 그들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지하신학원”을 만들어 기반을 형성하고 일부 교회에 대해 인재를 조직하거나 경제적인 규제를 하여 일부 신자들이 삼자원칙 하에 설립된 교회와 연을 끊고 외국 선교회를 반대하는 핵심인력이 되게 한다. 그들은 이 핵심인력이 반정부 불법활동에 종사하게 하기도 한다.

외부세력의 침투활동은 우리나라 교회에 매우 심각한 손해를 끼친다. 우선 주의 몸의 분열과 대립을 발생시킨 것은,단기간 내에 극복하고 해결하기 어려운 분열과 대립을 가져온다. 따라서 이에 대응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계획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이다. 만약 이런 세력이 발전하게 된다면 분명 국가의 안보과 통일, 국민들의 소질에 모두 큰 손해를 끼칠 것이다. 따라서 외부세력의 침투를 억제하는 것은 우리나라 교회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둘째, 가정에서 집회를 하는 신자들에게 혼란을 가져온다. 외부세력은 원래 다른 의도를 가지고 품고 있어 근본적으로 반삼자와 반정부라는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모든 행위는 가정에서 집회를 하는 신자들에게 아무런 긍정적인 면이 없고 그들의 혼란을 가중시킬 뿐이다. 이러한 외부세력은 각기 다른 이익집단에 속해있기 때문에 그들은 내부에 침입한 이후 바로 분열을 일으켜 가정 집회를 하는 신자들의 질투심을 유발하고 서로간의 분열을 조장해 제도적으로 원래 불안했던 가정집회를 무너뜨린다. 이 점은 반삼자원칙의 선봉자인 쟈오톈언도 인정하는 사실이다. “이러한 외래 교회 또는 외국 선교회는 인력과 자원의 우세를 이용해 많은 전도사들을 중국 대표나 연락책으로 파견하고 그들을 통해 교회의 집회를 자기 종파의 분교회로 만든다. 이러한 주객전도의 수법으로 상호간의 친목과 교류에 의지하던 가정교회에 타격을 입히고 혼란을 야기한다.” (쟈오톈언 <당대 중국기독교발전사> 중복출판사유한공사, 1997년, 622페이지) 침투와 반침투 사이의 초점은 식민주의의 영향을 중국교회에서 유지하는지, 아니면 모든 것을 철저히 버리고 삼자원칙에 입각해 완전히 독립자주적인 중국교회를 만드는 지에 있다. 우리의 선택은 명확하다. 후자이지 전자가 아니다.

셋째, 이단이 생겨난다. 외부세력의 침투 목적은 중국교회를 분열시키고 자신의 세력을 키우는 것이므로 그들은 가능한 한 가정집회를 하는 사람들과 삼자원칙에 입각해 세워진 교회사이의 관계를 끊으려 한다. 또한 반이성적이고 반정부, 반사회적인 여론을 퍼뜨려 신자들을 통제하는 목적을 실현한다. 정상적인 종교활동의 범주를 벗어나면 감독과 제약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일부 사람들은 신자들을 속이는 등 제멋대로 행동하여 돈을 갈취하거나 풍기를 문란하게 만든다. 일부 이단과 사교도 바로 이런 배경에서 생겨난 것이다. 일부 이단과 사교가 생겨난 데 대해 외부세력들은 전가할 수 없는 책임을 지니고 있다. 일부 이단은 직접적으로 외부세력의 영향을 받고 있다. ‘전범위교회’가 바로 전형적인 예이며 이후 생겨난 ‘필립왕’, ‘동방번개’등의 사교도 이렇게 해서 생겨나 발전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날 국가주권과 국토의 보존, 중국교회의 건강한 발전을 보호하기 위해 반드시 삼자원칙을 지켜 나가야 하며 어떠한 형태의 침투도 막아야 한다는 점을 명확하게 인식해야 한다. 이것은 중국과 교회 모두에게 매우 중요한 현실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민족국가의 차이와 경계가 존재하는 한 삼자원칙은 지속될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교회의 삼자원칙을 지켜 외부세력의 침투를 막고 역사 종말의 시기에 그리스도의 날이 올 때까지 중국교회를 잘 지켜야 한다.

(3) 삼자교회는 교회건설과 발전의 최종적인 목표이다.
교회는 현실 속에서 반드시 독립자주적으로 결정을 하고 신학사상을 만들고 사무를 진행해야 한다. 또한 독립자주와 자강은 하나님이 만물과 교회에 요구하시는 것이며 교회가 신의 가호 하에서 최종목표를 추구하는 것이다. 노자는 도는 “獨立而不改, 周行而不殆 (하나로 일어나 변함이 없으며 두루 영향을 미치며 위태하지 아니하다)”라 했고 <주역(易)>에서는 또한 “天行健君子當自强不息 (하늘의 운행이 굳세니 군자가 건괘의 이치를 살펴서 스스로 힘써 실천하고 쉬지않는다)”,“君子以獨立不懼 (군자는 홀로 있어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공자는 “不患無位, 患所以立 (지위가 없음을 걱정하지 말고, 지위에 설 것을 걱정하라)이라 말했다. 이것은 중국인들의 천하의 이치와 인륜에 대한 인식이다. 인생천지간에 천하의 이치를 따르며 자강불식해야한다. 성경에서도 우리에게 “너는 담대하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 “(사무엘하 10:12),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고린도전서 16:13)라 전하며 사람이 이러하거늘 교회는 더욱 그러해야 한다. 그래서 성경은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太16:18),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히브리서11:10),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디모데전서 3: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고린도전서 3:11) 이러한 성경 말씀은 교회는 탄탄한 집과 탄탄한 토대와 같이 스스로 대지 위에 견고히 세울 수 있어야 하며 큰 물살이 덮쳐도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고 전하고 있다. 딩광쉰 주교의 말과 같이 “삼자는 본래가 삼자를 위한 삼자가 아니다. 삼자애국운동이 봉기초기 보았던 이상은 잘 다스려지며 양육되고 전파되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중국 땅에서 부흥하는 것이다.” (<삼자문헌>p.101 ) 이렇게 중국의 광활한 땅위에 우뚝 솟아야 하는 교회는 탄탄한 토대가 필요할 뿐 아니라 안에서부터 밖까지 구조와 재료 모두 금은보화로 만들어 산 위의 견고히 빛나는 성처럼 교회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아야 한다. 이러한 교회는 분명 영광된 교회이며 우리가 교회를 세우는 궁극적인 목표이다. 그렇기에 삼자원칙은 교회를 세우는 방향이자 길이며 원칙이다. 또한 교회 건립의 최종 목교이다. 삼자원칙은 교회 건설의 현실성과 궁극성의 통합이다.

4. 삼자원칙은 교회와 교회성의 통일을 이루는 것이다.
상술한 내용을 종합하자면 삼자원칙은 교회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내부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와 교회의 실천의 통일이며 교회의 현실성과 최후의 통일이며 교회의 지방성과 우주성의 통일이다. 삼자원칙의 이러한 특성은 완벽하게 결합되어 있고 교회를 둘러싸고 있는 주축이자 목표이다. 삼자원칙은 교회를 만드는 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전제조건이며 교회를 형성하는데 있어 중요한 내용이다. 따라서 삼자원칙은 강한 교회성을 지니고 있으며 교회성의 일부이다.

삼자원칙의 교회성은 우선 이것이 교회를 만드는 전제조건이자 기본내용이며 교회의 속성을 실현하고 보장한다는 데 있다. 이에 대해 우리는 앞에서 여러 차례 이야기 한 바 있다. 여기에서 다시 더 심층적인 분석을 해도 무방하다. 주권독립국가는 각 사업이 독립자주적으로 이루어 지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역사에 비추어 봤을 때 우리는 주권이 없는 교회는 주권국가와 세력에 의해 이용당하고 결국 자신의 국가의 독립과 주권 및 국가 사무의 진보와 번영을 해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대해 어떤 이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영혼의 왕궁이며 거룩하고 무결한 곳인데 어떻게 다른 이에 의해 이용당할 수 있냐고 이야기 할 수도 있다. 이러한 형제자매들의 마음은 좋은 것이며 그들의 감정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실질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갈 수 없고 어지러운 교회와 구체적인 교회의 차이가 있다. <에베소서> 5장 26절에서는 “물을 이용해 교회를 깨끗이 하고 거룩해져라” 라고 강조한다. 이것은 오늘날 지상의 교회는 부단히 물로써 자신을 깨끗이 닦을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교회를 깨끗하게 하고 현재진행형에서 완료형으로 바꾸어야만 티끌이 없으며 거룩하고 무결한 영광스러운 교회가 될 수 있다. <계시록> 2장 3절은 7개의 편지를. 이것인 평범한 편지가 아니라 성령의 말씀이며 교회를 향한 말씀이다. 그는 우리에게 지상의 교회는 타락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미 타락한 것도 사실이므로 우리에게 “만물에는 귀가 있어 들을 수 있다.” “따라서 너희는 회개하여라. 회개하지 않으면 나는 네가 있는 그곳으로 가서 나의 입안에 있는 검으로 너희들을 공격할 것이다.” 라고 경고한다.

모든 편지는 우리에게 신자 개인이건, 지상의 교회이건 모두 성화의 과정이 있으며 성장의 과정이 있다고 이야기 한다. 이치가 맞다고 경험과 실제에서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고린도교회는 은혜가 가장 큰 교회이다. 하지만 육체적인 것에 속하며 젖을 먹는 어린 아기와 같다. 버가모 교회는 사탄의 자리기 있을 것이다. 따라서 교회가 정치경제의 확장 도구로 이용당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지상교회의 이러한 위험성에 대해 알고 계시어 우리에게 단호하게 경고하신 적이 있다. 이러한 위험은 이미 현실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만약 우리가 이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고 삼자원칙을 견지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언제든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근대 기독교는 중국에서 제국주의에 이용당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전교활동이 서양의 경제, 정치 이익집단에게 이용당해 그들의 해외 확장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신성한 교회 사무에 오점을 남겼으며 교회는 피동적으로 불결한 악행을 하였다. 중국의 삼자는 이러한 상황에서 생겨난 것이며 자발적으로 서양의 선교회와의 관계를 끊고 “자치, 자양, 자전”의 삼자원칙을 실시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물로써 교회를 정화하라”고 하신 말씀을 실천하는 것으로 교회를 기도의 신전, 경배의 신전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중국교회에서 하시는 사업이며 하나님이 영원히 그 곳에 머무실 것이다. 하나님의 눈과 하나님의 마음 또한 항상 거기에 있다. (왕상 9:3)

사도의 서신 중 “나는 거룩한 교회를 믿는다.”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신앙의 기본 내용 중의 하나이다. 교회는 거룩하고 깨끗하며 공정한 곳이다. 하나님은 물과 도를 통해 교회를 정화하는 동시에 교회가 하나님의 업무를 도와 자체적으로 정화하기를 원하신다. ‘너희는 스스로 깨끗게 하여 거룩할지어다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레위기 20:7)’, ‘(디모데후서 2:21)’ 이러한 스스로를 정화하는 행동은 성령을 감화시키는 것이며 자신의 의지를 통해 주동적으로 이루어야 한다. 사람들의 마음이 자정 되어야만 물과 도로 교회를 거룩하게 만들 수 있다. 또한 자주독립적인 교회만이 자주독립의 의지를 가질 수 있고 자정을 통해 거룩함과 공정함을 실현할 수 있다. 교회가 독립성을 지니지 못하고 거룩함과 공정함이 없다면 다른 나라와 이익집단의 도구로 전락하여 진정한 거룩함과 공정함을 이룩할 수 없다. 각종 결함을 씻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은 바로 자주독립을 실현하고 삼자원칙을 견지하는 것이다. 불결하고 공정하지 못한 교회는 자주독립능력이 없고 교회는 이러한 불결과 불공정을 없앨 수 없을 뿐 아니라 이러한 나쁜 요소가 자꾸 늘어나 공익과 거룩함을 논할 수조차 없게 된다. 상술한 내용을 통해 우리는 이러한 현상이 중국교회의 역사에서뿐 아니라 전 세게 교회역사에서 부지기수로 나타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악명 높은 “면죄부”는 교회의 이름을 빌어 다른 민족을 억압한 전형적인 예이다. 결국 마틴 루터에 의해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나 자주독립적인 교회가 독일 땅에서 태어났다. 이러한 외부에서 생겨나는 불결과 불공정은 오늘날 독립자주성이 없는 교회에서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거룩하고 깨끗하며 공정한 교회가 거룩함과 공정이라는 본성을 드러내려면 반드시 자주독립이 필요하고 자주독립은 바로 물과 도를 이용해 교회를 정화하는 방식이고 교회의 거룩함과 공정함의 일부분이다.

동시에 지상교회는 국가와 민족의 교회가 되어야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바꿀 수 있고 사람들의 기쁨과 걱정과 관련되어 사람들의 종교가 되어 그들에게 거룩하고 깨끗하다는 이미지를 심을 수 있다. 또한 이런 교회만이 각국에서 원만히 유지될 수 있으며 교회의 영광을 한껏 드러낼 수 있다.

따라서 교회의 거룩함과 공정함은 삼자원칙과 매우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으며 “거룩한 교회”의 교회성의 하나가 되었다. 삼자원칙은 외부의 것이 아니며 교회 내부에 있는 교회성의 일부이다.

둘째, 삼자원칙은 교회합일의 근본 절차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우주성에 있어서 ‘하나’일 뿐 아니라 지상교회에서도 반드시 ‘하나’여야 한다. 또한 지상교회의 ‘하나’는 천상교회의 ‘하나’를 보여주는 것이다. 어떻게 하나의 몸을 지키는가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오묘한 핵심진리이며 성령의 주된 사명이다. 하지만 지상의 교회의 ‘하나’는 인위적으로 파괴되어 그리스도의 몸을 분열시켰다. 이것은 주로 다음의 내용에서 알 수 있다.

1) 사람이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는 것이다. 초기교회에서 바로 이러한 분열요소가 존재한다. <고린도전서> 1장을 보면 당시의 고린도 교회에서 어떤 사람은 바울에 속한다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은 아볼로에 속한다고 이야기하며 또 다른 사람은 게바에 속한다고 하고 심지어 그들이 그리스도에 속한다는 말도 있었다. 따라서 바울는 “그리스도는 분리되는 것입니까?” 라고 묻고 그에 대해 “이것은 파를 나누는 것입니다.”라고 정의 내렸다. 중, 근대 교회 역사를 살펴볼 때 이런 식으로 사람에 의해 파가 갈라지는 일이 점점 더 심각하게 나타났으며 여러 종파가 계속해서 나타났다.

2) 세력범위로 나누어 지는 것이다. 남아무개회, 북아무개회, 동아무개회, 서아무개회 등 여러 교회가 세계 각지에 퍼져나갔고 이러한 것들은 정치적인 목적과 경제적인 확장이라는 분명한 의도가 있다.

3) “은혜를 입는 것”, “밝은 빛”, “특별히 살핀다” 등을 기준으로 나누어 각종 당파와 교회를 만드는 것이다.
신체의 ‘하나’를 깨뜨리는 방식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것은 크고 전체적인 성질을 통해 나눈 것이며 일부 포함되지 않은 요소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어떻게 유형을 나누며 몇 개로 나누는가가 아니라 겉으로 봤을 때 분명한 문제의 실체를 보고 거기에서 교훈과 계시를 얻는 것이다. 종파가 난립하는 배경에는 세가지 요소가 있다. 첫째는 경제, 둘째는 정치,

셋째는 개인주의 요소이다. 각 종파의 선교조직 역사와 조직 상황과 경제 수입원 및 그들의 행동을 지도하는 기본 방침을 살펴봤을 때 우리는 서양의 경제재단이 아닌 정치세력집단이 이것을 통제하고 제약을 행사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위 말하는 독립적인 교파는 개인주의에 입각해 조직의 형식에 있어서 독립성을 지닌다. 하지만 그 지도사상과 사회적 효과는 서양 경제재단과 정치세력집단의 영향력과 제약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러한 각 재단과 세력집단이 교회의 선교조직을 통제하려는 목적은 교회가 그들의 경제 및 정치 목적을 위해 일하게 하기 위함이다.

이런 존재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사실 매우 간단하다. 어디든 하나님의 사역이 있고 어디든 사탄의 방해(파괴)가 있다; 성령은 어디든 충만하고 마귀 역시 어디서든 공격을 한다. 이것은 두 힘의 대결이며 결국은 전능하신 하나님과 성령이 승리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완전한 독립과 일치이며 거룩함이 충만하고 영예로운 예수 그리스도의 몸——교회가 이 땅에 설립된 것이다. 하나님 사역의 중심은 바로 이 땅에 영예롭고 거룩한 교회를 세우는 것이며 교회로 하여금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몸, 성전, 하나님의 집이 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를 위해 끊임없이 사역하시고, 이를 위해 파견된 성령은 늘 하나님의 뜻에 따라 움직인다. 중국교회의 삼자원칙은 바로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이며, 하나님이 중국교회의 사역 중 드러내시는 것이며 성령이 움직이는 맥박과 같다.

삼자원칙의 핵심은 자주독립이고 외국교회의 제약을 받지 않으며 충분히 교회의 지역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삼자원칙에 따라 세워진 교회여야만 각양각색의 종파를 배제할 수 있으며, 외국의 각종 재단과 정치세력의 제약을 벗어날 수 있다. 중국교회는 이미 종파 후기에 진입했으며 자치, 자양, 자전의 삼자원칙은 철저히 발전해온 필연적인 결과이다. 중국에서 삼자원칙에 따른 각 교회가 연합, 일치, 단결할 수 있는 이유에는 매우 중요한 객관적인 조건이 있다. 바로 어떠한 경제적 조건이 없고 또 어떠한 경제적, 정치적 집단이 교회의 통제권을 이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교회는 국가민족의 이익과 완전히 일치하며 사람들과 환난을 같이하며 함께 숨쉰다.

삼자원칙의 본질은 그리스도를 지도자로 모신 교회를 만들어 모든 정치집단과 이익집단이 교회를 방해하는 것을 막는 것이다. 삼자원칙은 확립된 그날부터 교회의 모든 불순물을 제거하고 신도들이 하나님을 따르도록 하는 교도를 창도하였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립보서 2:1~5) “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빌립보서 3:3) 모든 것을 교회를 위해 모든 것을 주의 이름을 위해 그리스도를 높이 추켜들라. 삼자원칙에 의해 세워진 교회로 교회사역에 힘쓰고 하나님을 받들고 신도를 섬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 지도자로 모시고 그리스도를 높이 받든다.

그리스도를 받들고 그리스도를 지도자로 삼아 성령을 입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이 삼자원칙이며 목표이다. 당연히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백성들에 대한 사랑은 이 원칙의 밑거름이다. 중국교회는 삼자원칙에 따라 교회를 세우고 삼자원칙을 실행함과 동시에 또 다른 중요한 원칙을 실행해야 한다. 바로 “신앙적 관점과 예의에서 서로 존중하고 동역자 간에 ‘사랑으로 서로 관용을 베풀고 평화롭게 교제한다”’(중국기독교협회장정). 이것으로 삼자는 신앙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신앙을 통일 시키는 것도 아니다. 바로 단합한다는 전제하에 서로 다른 신앙의 관점과 관련 예의에 대해 서로 존중하는 것이라는 것을 명확히 알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상호간의 존중이 없으면 단합이 지속되고 확대되기 힘들다는 것이다. 단합과 상호존중은 상부상조의 관계이지 상호 대립, 배척의 관계가 아니다. 이러면 우리는 성령을 받고 하나 되어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간증을 할 수 있다. 그리스도를 인도자로 삼아 그리스도와 하나됨을 체험할 수 있다.

전세계 교회에 대해 말하자면, 삼자원칙을 견지하는 것 역시 세계 각국 교회가 전도상의 합일에 유리하다. 각국교회의 자주독립은 각자의 분열과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자주독립은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이며, 그것은 그리스도를 모두의 지도자로 여기면서 각국 교회와 평등하고 우호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속한 경험을 나눈다. 그러나 종파적, 분열적, 침투파괴 자주독립적인 것은 오히려 인간 혹은 어떤 세력, 이익을 지도자로 삼아 그리스도의 육체인 교회를 세우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분열시키는 것으로 일부 세력과 집단의 이익을 달성한다. 이것으로 우리는 자주독립, 평등우호적인 삼자원칙을 견지하는 것이 전 세계 교회의 우호, 단결을 증진시키는 근본이며 보장하는 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셋째, 삼자원칙을 견지하는 것은 교회를 세운는 것이며, 교회가 성장하는 목표이다. 이 점은 우리가 삼자원칙의 현실성과 궁극성에서 이미 논술했다. 삼자의 궁극성에서 우리는 이미 삼자가 교회를 세우고 교회가 성장하는 궁극적인 목표라고 했다. “ 자치, 자양, 자전” 결국 이것은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교회의 성령과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이다. 좋은 교회, 영광스런 교회는 타인의 의향에 의해서가 아닌 독립적인 교회이며, 모든 일을 타인에게 의지하는 교회는 분명 좋은 교회가 아니다.

이와 동시에, 한 교회가 외적으로 자주독립적인데 내적으로 매우 취약하다면 힘든 시련을 겪어낼 수 없고, 진정으로 독립적인 교회라고 할 수 없다. 진정으로 자주독립을 한 교회는 삼자를 실현시킬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면에서 견고하고 세밀하게 세워진 교회이다. 또 언제든지 하나님의 영광스런 교회에 헌신 할 준비가 되어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들이 모두 각자의 결함을 버리고 많은 시련을 이겨내어 강하고 영광스런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삼자원칙의 “自”는 인간이 하나님에게서 벗어나 독립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신도가 스스로 교회를 관리하고 교회를 받드는 것을 뜻한다.

넷째, 삼자원칙의 교회성이 여전히 나타내는 것은 교회신앙생활의 중요한 부분이다. 교회는 “성도를 모으는 고귀한 단체”이며 이 단체는 또 단결을 뜻하며 이 단결은 교회신앙생활을 나타낸다. 교회신앙생활 역시 교회성의 중요한 내용이다. 교회신앙생활의 내용은 교회의 예배, 복음 전하기, 집회, 소통 등등이다. <시편>133편은 시인의 언어로 신앙생활을 찬미하였다 :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사도행전>은 교회신앙생활을 묘사했다 : “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수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사도행전 2: 46-47)

건강하고 아름다운 교회생활은 교회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내용이자 지표이다. 자치, 자양 , 자전은 교회신앙생활의 기본내용이며 그것의 건강하고 아름답고 풍부한 중요한 보증이다. 자주독립을 이룬 교회 중 각 지방, 민족, 국가는 자유롭게 본 민족의 문화전통을 결합하고 성경에 쓰여진 자신의 복음전도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본 민족의 전통에 따라 예배를 만들고 찬송가를 만들 수 있다. 이것이 교회생활을 다양하고 풍부하게 하며 순결과 건강을 지향하고 하나님의 영예로운 간증을 충만하게 한다. 언어, 풍습이 비슷하여 본성이 서로 통하며 외부요소의 복잡한 개입이 없어 각 지역 교회는 모두 광대한 신도의 염원에 따라 민주적으로 자기 교회의 책임자를 선출하고 교회의 후계자를 양성한다. 자주독립을 실현시켜서 각 지역 청년들은 교회에 점점 더 많이 찾아오고 현지의 풍부한 인적 재원은 교회를 위해 훈련되어지며 교회건설을 위해 끊임없이 많은 靈,德,智,體,群의 우수한 인재를 길러낸다. 중국교회를 살펴 보면, 각 지역의 교회는 현실적인 필요에 근거해 비교적 효과가 있는 신학교육을 통해 현재, 많은 젊은 사역자들을 길러내고 있으며, 신학교육사역자는 이미 교회의 발전에 중대한 임무를 맡고 있다. 그들은 중국교회를 건설하는데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고 더욱 하나님의 영광스런 간증을 할 수 있도록 힘쓸 것이다. 모든 중국교회는 활력과 생기로 충만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삼자원칙은 교회의 곳곳에 융합되어 교회와 내제된 일치성을 지닌다. 삼자원칙은 우리의 신앙 중 ‘거룩한 교회’의 내용에서 매우 중요하고 없어서는 안될 부분이다. 만약 우리가 교회를 궁전에 비유한다면 예수그리스도를 반석으로 그 위에 기초를 세우고 궁전이 대지 위에 우뚝 솟을 수 있으려면 반드시 철과 흙을 섥어 내부를 튼튼히 하며 기둥을 단단히 세워야 하고 질 좋은 벽돌이 필요하다. 삼자원칙은 교회를 짓는 비계(飛階)이며 건축물의 기둥이자 틀이고 재료이다. 이런 틀과 재료 없이 궁전을 높게 지을 수 없으며 궁전의 번영은 더더욱 논할 수 없다. 그러니 삼자는 교회를 세우고 지키는데 필수적인 원칙이며 교회성의 일부이기도 하다. 또한 우리의 신앙생활의 일부이다.

5. 삼자원칙은 애국과 애교의 통합이다.
국가는 인류의 경험의 산로 인류의 활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성경, 교의 그리고 전통은 모두 우리에게 애국은 기독교인의 당연한 의무이자 영적으로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이며 기독교인의 영적 생명의 일부분이라고 알려준다. 어떤 사람의 ‘국민으로서는 애국할 수 있으나 기독교인으로서는 애국을 논할 수 없다’라는 말은 틀렸다. 국가에 대한 태도는 기독교인의 영생과 인격 그리고 품격을 반영했다. 기독교인은 사회 구성원의 일부분이며,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모두 애국심을 갖고 있다.

국가는 항상 사회제도와 관련을 맺고 역사의 흐름 속에서 계속 변화한다. 그래서 애국은 역사상의 혹은 현재의 어떤 특정한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중국의 기도교인에 대해 말하면, 애국은 곧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을 사랑하는 것이다. 중국은 사회주의제도를 시행하고 있으며 최대한 인민을 대표하며 기독교의 교의와 부합한다.

(1) 애국은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이다
1. 국가는 하나님이 만드신다.( 신명기 32:8,시편 74:17, 사도행전 17:26)
<창세기> 12장 1~2절 말씀: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 창세기 17장에서 국가를 언약으로 삼아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라고 강조했다.성경은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국가를 세우는 신성한 사명을 부여하였고 또한 인간에게 ‘국가’를 주었다. 개념상 신성성은 인민의 국가의 보호 아래 복을 누리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국가와 국가 간, 사람과 사람간의 생활원칙은 곧 사람을 불러 복을 얻는 것이라 규정하고 있다. 한 민족 혹은 여러 민족이 일정한 경계 내에서 생활하고 복잡한 사회관계를 맺음으로써 각 개체의 생존과 발전을 도모한다. 국가의 경계는 하나님이 정한 국가이며 하나님은 영원한 언약으로 이어져 내려온다. “지극히 높으신 자가 열국의 기업을 주시고”, “인종을 나누신다” ,”민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 (신명기 32:8),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여름과 겨울을 이루셨나이다” (시편 74: 17)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년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사도행전 17:26절). 여기서 성경은 국가주권과 국토 완정이 부여 받은 신성성을 확실시하고 애국이 신성한 의의 신앙적 의의를 갖도록 했다.그래서 애국은 더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일부이다.

5. 3자원칙은 나라를 사랑하고 기독교를 사랑하는것과의 통일이다.
국가는 인류실천의 산물로서 인류의 활동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성경, 교의, 전통은 우리에게 나라를 사랑하는 것은 크리스찬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이며 마음으로부터 우러러 나온 감정이며 영성생명의 일부분이지 타인들이 말한 국민은 나라를 사랑할 수 있고 크리스찬은 나라를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은 틀린 말이다.

나라를 사랑하는 태도는 크리스찬의 영성생명, 인격과 품성을 나타낸다. 크리스찬은 사회의 일원으로서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

국가는 일정한 사회제도와 연관이 있고 역사 중에서 부단히 변화한다. 때문에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은 현실중의 하나의 구체적인 나라를 말한다. 중국의 크리스찬으로 말하면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사랑하는 것을 말하며 중국이 실행하는 사회주의제도는 인민의 이익을 대표하며 인민을 위한 사업이며 기독교의 교의에 부합된다.

(1) 나라를 사랑하는 것은 성경의 시종일관한 가르침이다.

1. 국가는 신이 정한 것이다. (신명기32: 8, 시편74: 17, 사도행전17: 26)
《창세기》12: 1-2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창세기》17장에서는 나라를 강조하여 말하기를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 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하였다. 여기에서는 고대 이스라엘 민족이 나라를 세우는 신성한 사명을 말하는 동시에 인류활동에서 “국가”가 개념상에서의 신성함을 말 한다 인민의 나라의 보호 하에서 복지를 누린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나라와 나라 인간과 인간의 사이에 “타인을 복 받게 한다.”는 원칙을 규정하였다. 하나의 민족 혹은 여러 개의 민족이 일정한 영역에서 생활하며 복잡한 사회관계를 이루어 개체의 생존과 발전을 보호하고 촉진한다. 이 영역은 하나님이 정한 국가이며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으로 전해 내려온다. “지극히 높으신 자가 열국의 기업을 주실 때, 인종을 분정하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민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신명기32: 8) 고 하였고 《시편》74장17절에서는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여름과 겨울을 이루셨나이다.”고 하였으며 《사도행전》17장 26절에서는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년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라고 말씀하셨다. 이런 말씀들은 국가주권과 영토완정의 신성함을 충분히 강조하여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 신성한의미가 있게 하고 신앙적 의미가 있게 하였다. 때문에 나라를 사랑하는 것은 따라 첨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중의 하나이다.

2. 성경에서의 애국주의의 본보기와 계시
성경의 역사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과 인류를 구한 역사이며 애국주의정신을 보여주는 역사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스라엘민족의 흥망성쇠에 관한 역사를 보여주며 이 역사 속에는 많은 애국주의의 본보기와 계시가 있으며 이는 우리들로 여려금 시시각각 국가와 민족의 이익을 우선으로 하게끔 가르친다. 이는 우수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의무이다.

모세로부터 이서야, 사사, 다윗, 등 뭇 선지자들은 나라와 민족을 구하고 새로운 국가의 업을 세우기 위하여 혹은 국가의 고충을 해결하기 위하여 피 흘려 싸운 사람들이다. 그들은 모두 훌륭한 애국주의의 본보기이며 하나님의 충실한 종이다. 예수님도 세상에 오셔서 육신을 입으셨으며 그도 어느 한 민족 국가에 속하며 자기의 국가와 민족을 깊이 사랑하였다. 맹자가 말한“老吾老, 及人之老, 幼吾幼, 以及人之幼(내 집 노인을 노인으로 존경하여 그 마음을 이웃집 노인에게까지 미치게 하고 내집 어린이를 어린이로 사랑하여 그 마음을 남의 집 어린이에게 까지 미치게 한다면)”오직 자기의 혈육동포를 사랑하여야만 진정으로 인류의 사랑을 감당할 수 있고 하나님의 주신 사명을 완성할 수 있다. 때문에 예수님은 그의 나라의 정치, 문화, 경제, 종교의 중심인 예루살렘이 침략과 통치를 받을 때 우시며“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 하였거니와 ······날이 이를 찌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누가복음19: 42-44) 마태복음23: 37-39 즉 시인 애청이 말한 것처럼 “무엇 때문에 내 눈에는 늘 눈물이 고이는가 그것은 내가 이 대지를 깊이사랑하기 때문이다 ”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위해우신 것은 조국에 대한 깊은 사랑이다.

《로마서》8장 35절부터 39절에서 사도 바울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하였지만 《로마서》9장 3절에서 바울은 그의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여기서는 사도바울이 조국을 그의 모든 것을 초월하여 사랑하는 마음을 볼 수 있다. 그는 나라를 사랑하여 저주를 받은 게 아니었고.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게 아니었으며 반대로 축복을 받았고 주님과 더욱 가까워 졌다. 이것은 바울이 조국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깊고 조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일치함을 볼 수 있고 같은 뿌리를 가진 것을 알 수 있다.

《시편》137편과 126편은 더욱더 조국에 대한 사랑을 나타낸 말씀이다. 조국을 잃은 사람은 조국의 중요성으로 더욱 절실히 이해한다. 조국을 잃은 유대민족은 이방인의 압박, 경멸 모욕의 상황에서 나라를 잃은 아픔을 더욱 뼈저리게 느꼈다. 나라를 잃은 날 그들의 혈육과 자식들이 돌에 치여 죽는 비참한 모습은 그들로 하여금 절대 잊지 못하게 하였다.《시편》137편에서도 침략 받은 민족의 타향에서의 내심의고통과 고국에 대한 사랑을 볼 수 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페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출처 : CMP KOREA ♡ 차이나미션파트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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